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19

by 8866 2009. 3. 28.

라캉을 만나다 19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라캉의 로마 강연 2 - 진실과 소외와 상징에 대하여

글쓴이: 한살림

 

오늘같은 날 ... 그래도 계속 읽는다.

 라캉의 <The Function and Field of Speech and Language in Psychoanalysis>는 아름다운 글이다. 한 편의 잘 쓰여진 시(詩)처럼. 시가 가지기 마련인 다의성(多義性)에도 불구하고 – 또는 그 때문에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읽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아직’ 의미를 소진하지 못했다는 그 느낌에 기대어 우리는 다시 그 시를 방문한다. 물론 라캉의 논문을 시와 등치하는 것은 잘못이다. 라캉의 논문은 ‘과학’에 속한다.

 

라캉의 논문은 일정하게 읽기 어렵거나 일정하게 읽기 쉬운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어렵고 어떤 부분은 쉽다. 읽기 쉬운 부분에 펼쳐지고 있는 그의 논의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라캉을 지적 사기꾼으로 모는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 라캉의 논문들은 nonsense-sense-nonsense의 구조를 갖는다. 논문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sense)는 전체 논문이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는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라캉이 얻는 것은 어떤 이득일 것인데 나는 라캉이 이렇게 난해한 논문을 발표하여 무슨 이득을 얻는 지 모르겠다. 라캉이 또는 그의 주변에 몰렸던 세계의 지식인들이 세상을 희롱하는 재미로 살았던 정신병자들이라고 가정해야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라캉의 [에크리]를 세번째 읽고 있는 나의 독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라캉이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글에서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예언자’의 광기같은 것은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디에 기대어 라캉을 신뢰하는가? 수많은 라캉의 제자들이나 전문가들을 통해서? 그러나 내가 이미 라캉을 어느 정도 신뢰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의 사유를 전파하는 자들이 모두 미쳤다고 믿는 게 더 낫다. 그래서 나는 이미 라캉을 신뢰할 만하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우선 라캉의 사유가 혁명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왔음에 분명하다. 이렇게 센세이션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면 뭔가 있지 않겠는가? 이로 하여 나는 라캉의 세계에 초대를 받았다.

 

이제 [에크리]를 읽으면서 라캉에 대한 나의 믿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아직 그의 글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는 없지만 이는 분명 나의 지적 경험의 한계에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라캉은 글에서 진위(眞僞)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럴 수도 있고 저절 수도 있고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식의 글쓰기가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갈무리된 사유가 소위 ‘과학적 명제’로 표현되고 있다고 ‘믿는다.’ 즉 라캉은 A가 틀렸다고 말하면서 B를 제시한다. 물론 라캉의 B가 틀릴 수 있고 A 또는 C가 옳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라캉이 분명하게 B를 제시하고 있다는 데에 내기를 걸 수 있다. (가슴이 콩알처럼 작은 나는 거의 장난으로라도 도박을 하지 않는 편이다.) 나의 주장은 라캉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른다고 할 때 이 모름과 불투명성의 책임을 라캉이 아니라 내가 떠 안아야 함을 뜻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라캉의 [에크리]에 코가 꿰었음에 틀림없다. 요즘 많은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 라캉 탓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라캉의 논문이 sense1-sense2-sense3로 구성된 것임을 아는가? 나는 나 자신의 (독특한) 지적 훈련으로 하여 sesne2를 의미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sense1과 sense3를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하자. 나는 라캉이 진실한 인문학자라고 가정하면서 sense1과 sense3에 접근하기에는 ‘내가’ 무지몽매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나는 라캉의 스타일에 분통을 터뜨릴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난해한 스타일이 반드시 그의 글이 엉터리라는 결론을 도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지식의 일천함과 지성의 경박함 때문에 그의 스타일이 난해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소칼처럼 ‘맹목적’ 과학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을 분노하게 하는 대목이 [에크리]에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쿤이나 파이어아벤트 같은 이들에 의해 제시된 과학적 상대주의가 일정한 힘을 얻어서 전통적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중대한 실험을 좌절시키는 사태마저 나타났다. 이 갈등은 미국에서 ‘과학전쟁’으로 표출되었다. 소칼은 이 전쟁에서 쿤과는 적대적인 진영에 속한 사람이다. 당연히 소칼은 쿤의 입장을 포스트모더니즘과 묶어서 ‘fashionable nonsense’라고 부를 것이다. 현대의 진화론자들 가운데 매우 좁은 의미에서 예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화 현상을 ‘위험한 미신’으로 치부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미국에서 1960년대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과학에 대한 새로운 입장은 유럽에서는 1920년대에 이미 가시화되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을 대체하던 시기였다. 이 성과를 가장 빨리 철학에 소화한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화이트헤드이다. 그의 [과정과 실재] 등을 보면 과학에 대한 혁신적 철학이 만개하고 있음을 본다. 프랑스에서는 라캉이 주의를 끌고 있는 과학 철학자인 알렉상드르 꼬이레가 쿤의 과학혁명의 이론을 선취하고 있다. 라캉의 과학이론은 이 전통에 속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Here the distinction between people make between the exact sciences and those for which there is no reason to refuse the appellation ‘conjectural’ no longer seems to be acceptable – for lack of any grounds for that distinction” (E. p.236; F. p.286). 수학과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가르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경계는 없다고 말한다. 이 문단이 발설되고 있는 전후 몇 페이지는 과학철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에게 매우 쉽게 이해된다. 라캉에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을 자유는 있지만 그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지는 아주 분명하다. 그의 스타일은 막힘없이 흐른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을 통해 나는 라캉을 화이트헤드와 쿤 등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당연히 소칼 등이 거품을 물면서 반대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라캉은 매우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새로운 과학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이 대목에서 내가 라캉을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보다 난해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나의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런데 라캉의 전통적인 과학관을 비판하는 대목이 왜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가?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이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미국에서 소칼로 대표되는 과학이 여전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겨우 1960년에 들어서야 새로운 과학철학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1962에 초판이 나왔다. 프랑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베르그송, 바슐라르, 코이레, 라캉 등 이미 지난 세기 초에 과학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 지성계를 강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를 라캉은 지나가는 말로 ‘c factor’라고 요약한다. 문화적 분위기라고 대충 번역할 수 있다.

 

라캉에게는 정신분석학이 문제된다. 라캉이 정신분석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할 때 정신분석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에고심리학이었다. 그런데 이 에고심리학은 1930년대에서 40년대에 걸쳐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의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라캉은 과학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정신분석가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전통) 과학을 모방하여 정신분석학을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라캉의 주장이 맞다고 할 때 이 왜곡이 왜 중요한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이 논문에서 라캉이 주장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정신’에 접근한다. 이는 라캉의 ‘상징론’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 상징론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진실(truth)과 소외(alienation)이다. 소외를 다르게 대상화(objectification)이라고 부른다. 내 생각으로는 소외와 대상화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물상화(reification)과 거의 흡사한 함축을 갖는다. 칸트의 용어를 빌면 목적인 인간이 ‘거의 절대적으로’ 수단으로 전락한 상태를 의미한다. ‘상품화’라는 말도 비슷한 함축을 가질 것이다. 라캉이 과학과 에고심리학에서 발견하는 것은 “주체를 소외하는 위험(danger of alienating the subject)” (E. p. 260; F. p.316) 이다. ‘누구의 수단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자본주의 비판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따라서 라캉이 과학-에고심리학-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진실(truth)이다. ‘누구의 진실인가?’라고 물을 때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영역 안에서 분석을 받고 있는 주체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Analysis can have as its goal only the advent of true speech and the subject’s realization of his history in its relation to a future” (E. p.249; F. p. 302). 라캉이 여기에서 주체라고 할 때 주체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의 경험 안에 놓여 있는 ‘그’ 또는 ‘그녀’를 의미한다. 정신분석가는 당연히 ‘그’ 또는 ‘그녀’가 스스로의 진실을 발견하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에고심리학은 ‘그’ 또는 ‘그녀’의 진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분석가의 ‘허위(에고)’를 유지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다. 이 과정에서 도움을 받으러 온 ‘그’ 또는 ‘그녀’는 더욱 심각하게 소외된다. 라캉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Once the intersubjective topography has become entified, it is in fact realized in the division of labor between the subjects present. This deviant use of Freud’s formulation that all that is id must become ego appears in a demystified form: the subject, transformed into an it, has to conform to an ego which the analyst has no trouble recognizing as his ally, since it is, in fact, the analyst’s own ego.” (E. p. 252; F. p. 305)

 

이 긴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분명 라캉의 사유 전체를 이해하는 것을 전제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현재로는 가능하지 않아서 내가 부분적으로 이해한 것만을 기술한다. 인용문에서 라캉이 ‘it’으로 강조한 것은 ‘물건’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이 물건은 이제 분석가의 에고를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 이를 미국 정신분석학에서는 ‘다시-희생시킴(re-victimization)’이라고 불린다.

 

이 문장들에서 내가 이해한 바를 보다 일상적 예를 통해 생각해 보자. 자신의 주관을 가진 백수가 있다. 장자에 나오는 것처럼 무용의 철학 비슷한 것을 어렴풋하게 가진 백수라고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이런 백수는 무익한 것만 아니라 유해한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무용의 철학을 전염시킬 수가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이런 백수를 비정상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백수는 장자처럼 무용의 철학 같은 것을 강하게 제시할만한 철학적 능력은 없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이 백수를 치료하여 자본주의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유효 노동으로 만드는 임무에 착수한다고 하자. 이 백수는 과거 어렴풋하게 전유한 무용의 철학이 엉터리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의 생산능력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자. 백수는 이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자본주의 노동이 소외된 노동인 한에 있어서 백수는 ‘노예’로서 자본가를 위해 죽도록 일하는 권리를 쟁취했다고 할 수 있으며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삶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비판하고 있는 에고심리학자들은 대개 이 백수들을 유효노동으로 전환하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통해 에고심리학자는 자신의 허위 –에고-를 강화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은 ‘너희는 틀렸다!’라고 선포한다. 라캉은 에고심리학을 비판할 수 있는 이론은 이미 프로이트에 의해 밝혀졌다고 믿는다. 따라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다시 프로이트에게로!’의 형태를 갖는다. 다만 이 경우에 라캉은 프로이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인류학과 언어학 등의 이론들을 통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다시’ 쓴다. 이 논문에서 라캉이 원용하는 것은 언어학이다. 그런데 언어학에 대해 지극히 기본적인 지식밖에 없는 나는 오직 라캉의 언어학만을 개략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소쉬르가 “언어는 기호(sign)”라고 정의한 것을 비판하면서 라캉은 “언어는 상징(symbol)”이라고 주장한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단순히 용어상의 오류가 아니라면 소쉬르의 언어학은 과학에 편만한 대상화의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즉 소쉬르의 기호학은 언어를 기호로 환원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라캉의 언어학은 과학이라는 좁은 테두리가 아닌 인간의 일상적 언어 사용에서 지배적인 상징으로서의 언어를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상징으로서의 언어가 가장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시(詩)이다. 정신분석학은 과학과 시학(詩學) 사이에서 시학에 보다 가까이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언어는 상징”라고 말하면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자유와 창조성이라는 현상이다. 동물 또는 물건을 지배하는 기호의 결정성에 대비하여 개별자로서의 인간을 지배하는 상징의 창조성이 부각된다. 이를 다루기 위해 라캉은 speech (발화)와 language (언어)의 개념을 원용한다. 파롤과 랑그를 즉각 떠올린다. 이 구별은 라캉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보인다.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학은 주체에게 발화할 수 있는 창조성을 돌려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특징은 보편성이며 발화의 특징은 개별성이다. 과학은 언어에 가깝고, 시는 발화에 가깝다. 언어를 떠나서 사람은 없으며 발화할 수 없을 때 사람은 건강하지 않다.

 

라캉이 말하는 ‘건강한’ 주체는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발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건강하지 못한’ 주체는 거의 완전히 언어에 지배되거나 아니면 언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려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혔다고 말할 수 있다. 라캉의 상징론은 발화할 수 있는 능력의 회복과 관련이 있다. 이를 라캉은 주체의 진실 (the subject’s truth) 라고 부른다. 정신분석학에 있어서 개별적 진실을 넘어서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진실은 없다. 라캉은 진실은 언제나 개별적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독서노트를 마치고 다음 논문을 읽기로 한다. 나는 이 논문을 읽으면서 계속하여 화이트헤드와 리쾨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리쾨르와 관련하여 그와 라캉의 상징론은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라캉이 리쾨르에게 ‘지적인 빚’을 청구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리쾨르의 ‘무죄’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두 사상가가 독립적으로 비슷한 상징론에 도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슷한 상징론에 도달한 이유는 분명하다. 헤겔과 하이데거와 프로이트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사상가들이다. 따라서…. 나는 이 독립 이론화가 사실이기를 바란다. 이 경우에 이 상징론이 갖는 가치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다시 만나 해묵은 감정을 풀고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와 라캉의 관계는 다음을 기약한다. 참고로 라캉은 <Kant with Sade>에서 지나가는 말로 화이트헤드를 거론하고 있다.)

'서양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캉을 만나다 21  (0) 2009.04.14
라캉을 만나다 20  (0) 2009.04.07
라캉을 만나다 18  (0) 2009.03.25
서양철학사  (0) 2009.03.21
라캉을 만나다 17  (0) 2009.02.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