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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라캉을 만나다 20

by 8866 2009. 4. 7.

 

라캉을 만나다 20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Variations...' 논문을 읽고 (라캉 글의 난해함과 진리) 


[에크리]에 대한 노트를 이미 많이 썼다. 이를 통해 라캉에 대한 독해에 있어 나는 어떤 주관적인 깊이를 얻었는가? 라캉에 대해 많은 개론서들이 번역되거나 저술되어 출간된 상황을 고려하면 나는 [에크리] 읽기에 대한 장황한 노트를 <비평고원>에 올릴 필요가 있는 지를 거듭 자문하게 된다. 특별히 라캉에 대한 나의 독해가 일정한 수준을 얻지 못했을 때 나의 글쓰기/글보이기는 치기어린 나르시시즘일 것이다. 그러나 한글로 소통하는 이들이 몹시 그리운 시절에 나는 잡문으로라도 말을 건네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에크리]에 대한 독서 노트 20번째를 쓴다.

라캉은 <Variations on the Standard Treatment>을 1955년 봄에 썼다고 한다. 이 시절에 라캉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의 에고심리학과 영국의 대상관계이론을 이론적으로 극복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요약하고 보니 내가 이 난해한 논문을 이해한 것만 같은 착각을 갖는다. 지난 해 12월 말에 삼십여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이 논문을 두 번 읽었다. 그 읽음을 통해서 라캉의 글이 난해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라캉이 이 논문을 통해 말하고 있는 대상은 정신분석가들이다. 라캉의 청중은 프로이트의 청중과는 매우 다르다. 정신분석학의 대중적 성공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유통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을 형성하였다. 프로이트는 소위 일반적 교양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강의하였다. 이에 비해 라캉은 전문적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강의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과 라캉의 [에크리]를 나란히 놓으면 이 점은 금방 분명해진다. 정신분석학이 영미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상황은 라캉이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드러내는 장(場)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설적 의의를 갖는다.

라캉의 청중은 단순한 교양인들이 아니라 전문가 집단이다. 학자들. 라캉은 대학생들에게 정신분석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의 청중들은 이미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었다. 레비스트로스 이뽈리트 알튀세르 등등. 그래서 라캉은 학생을 가르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점은 라캉의 스타일이 갖는 난해함을 일부 설명해 준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는 공유하고 있는 지식들이 있다. 이 지식들은 설명되지 않고 전제된다.

이 논문에 나오는 대목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 without noticing that, in abandoning himself to the bad faith of instituted practice, he [i.e., a psychoanalyst of ego psychology] degrades it [i.e., psychoanalysis] to the level of routines whose secrets are dispensed by cleaver analysts” (E. p.274; F. p.330). 이 문장에서 라캉이 사용하고 있는 ‘bad faith’는 즉각적으로 사르트르를 상기시킨다. 그는 1943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에서 이 개념을 소개하였다. 따라서 라캉의 문장은 사르트르의 사유와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라캉의 사유는 실존주의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라캉은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사르트르의 핵심 개념의 하나인 ‘bad faith’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전제한다. 이 문장에서 ‘bad faith’는 라캉과 그의 독자 사이의 소통을 용이하게 만든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개념을 잘 모르는 나에게는 라캉의 글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 경우 그의 난해함은 라캉의 탓인가 나의 탓인가?

<Variations…>는 정신분석학의 기법에 대한 논문이다.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는 글과 교양인을 대상으로 하는 글은 정교함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라캉은 일단 자신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당시 유통되고 있던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정통하다고 기대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갖는 뇌전문의가 다른 뇌전문의들을 대상으로 하여 뇌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나처럼 정신분석학에 대해 조야한 지식만을 갖는 사람들은 라캉의 글이 갖는 묘미를 맛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라캉이 참조하고 있는 이론들을 먼저 읽는 일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또는 라캉의 사유를 ‘쉽게’ 설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있다. 지적 허영심이 강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여전히 라캉에 사로잡혀 행간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방어한다면 거장과 씨름함으로써만 후진들은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세운다.

라캉의 글을 ‘제대로’ 읽는 방법은 무엇일까? 레비스트로스는 라캉의 글을 대여섯번 읽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그는 라캉의 글은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라캉이 매우 중요한 사유를 발설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이 사유를 전유할 시간이 자신에게 없다고 말한다.

어떤 책에서 발터 카우프만은 하이데거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글을 카프카의 ‘성채’처럼 궁극적으로 불투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이데거의 글이 궁극에 있어서는 어떤 실질적인 내용도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것을 직접 읽는 수밖에는 없는 데 어쩌면 카프카의 K처럼 죽을 때까지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하이데거의 미로에 갇힐 각오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철학자는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어떤 철학에 대해 직접적인 체험을 갖는 것 이외에 그것을 아는 뾰족한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이 지젝을 일컬어 라캉보다 라캉의 사유를 잘 파악했다고 말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또는 라캉은 프로이트보다 프로이트의 사유를 잘 파악했다고 말하는 것도 웃긴다. 모든 새로운 사유는 이전의 사유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것과는 결정으로 다르다. 프로이트의 사유와 라캉의 사유는 상당한 부분 ‘교집합’을 이루지만 정확하게 겹치지 않는다. 라캉의 저작에서 라캉을 알 수 있을 뿐 프로이트를 알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직접 읽어야 한다. 물론 라캉을 읽는 근본적인 목적의 하나는 그를 통해 스스로의 사유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실 카우프만이 말하는 ‘카프카의 성채’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하이데거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적 사기 (fashionable nonsense)”인가 하는 점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 한 자락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티프를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독특하게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독특하게 무의미할 수 있다. 나는 라캉의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와 씨름하는 동안에 나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는 보다 복잡한 사유를 마련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Variations…>는 1955년의 상황에서 정신분석학자들이 겪고 있던 이론과 기법의 혼란과 이탈을 다룬다. 라캉의 다른 논문인 <The Situation of Psychoanalysis and the Training of Psychoanalysis in 1956>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이 시기에 라캉은 미국과 영국에서 인기있던 두 가지 정신분석학의 ‘정통들’에 도전한다. 안나 프로이트의 주변에 형성된 에고심리학과 멜라니 클라인의 주변에 형성된 대상관계이론 (object relations theory)에 대항하여 라캉은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정신분석학적 사유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라캉은 논문은 무엇보다도 이 정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비텐베르크에서 교회 정문에 95조의 반박문을 붙였던 루터처럼 라캉도 기존의 정신분석학들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나는 이 복잡한 논문을 읽고 라캉의 사유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의혹들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의혹은 라캉의 사유를 파악하는 길 위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암초들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논문에서 키워드는 진리(truth)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정신분석가인 라캉에게 있어서 진리는 언제나 환자라고 불리는 정신분석의 주체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이 구성에 있어서 정신분석가는 산파의 역할을 한다. 오직 주체만이 자신의 진리를 산출한다. 정신분석학은 역사적 우연으로 자신의 진리를 산출할 수 없는 주체들로 하여금 자신에 고유한 진리를 산출하도록 돕는다. 이 점에 있어서 정신분석학은 산파술(maieutics)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 교차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The fact is that psychoanalysis, since it progresses essentially in nonknowledge, is tied in the history of science to a state prior to its Aristotelian definition, which is known as dialectic. Freud’s work bears witness to this in its reference to Plato and even to the pre-Socratics.” (E. p.299; F. p. 361)

이 문단은 <Variations…>를 맺고 있는 마지막 문단과 잘 호응한다. “… will instead be recognized as affirming the truth that analysis cannot find its measure except along the pathways of a learned ignorance” (E. p.300; F. p. 362). ‘非-지식’과 ‘학습된 무지’는 진리를 산출하는 데로 나아간다.

나는 여기서 라캉의 사유를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process philosophy)에 비추어 이해한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주체(actual entity)는 질서(order)와 혁신(novelty) 이라는 극단 사이에 흔들리며 창조성(creativity)을 드러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주체는 전혀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상태 (disorder)와 혁신을 이루어낼 수 없는 상태 (triviality) 라는 병리적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라캉의 진리는 (나에게 있어) 화이트헤드의 창조성과 매우 유사하다.

라캉에게 있어서 진리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보편적 사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라캉은 과학의 지식과 주체의 진리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라캉은 과정에 연루되는 진리의 산출을 다루기 위해 담화(speech)와 담론(discourse)을 대비하는 데 이에 대한 정밀한 독해에 이를 수 없어 나에게는 하나의 문제로 남는다. 다만 <Variations…>에서 담론(discourse)는 주체의 진리를 구성하는 담화(speech)를 방해하고 왜곡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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