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을 만나다 18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글쓴이: 한살림 http://cafe.daum.net/9876/3Mhq/34
라캉의 로마 강연 1
정신의학에 맞서는 정신분석학
라캉의 ‘로마 강연’에 관해서 수많은 독서노트가 쓰여질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1953년 9월 26일과 27일에 걸쳐 로마 대학에서 행한 강연을 La Psychoanalyse I (1956) 에 발표하였다. [The Function and Field of Speech and Language in Psychoanalysis] 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사유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대변한다. 이 강연을 기점으로 하여 라캉은 에고심리학과 결정적 결별의 과정을 겪게 된다. 라캉의 사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논문에 발표된 내용을 숙지해야만 한다. (나에게도 이는 먼 목표일 따름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발설하는 것들은 이 목표에 도달하려는 버벅거림일 뿐이다.)
이 논문은 영역본을 기준으로 72페이지에 이른다. 요즘 한국의 출판 풍토를 보면 책 한 권으로 엮기에 충분할 것 같다. (한글로 번역되어 다소 상세한 설명들을 첨가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지젝과 바디우 등의 책들이 신속하게 번역되고 있는 상황에서 라캉의 선집 하나 제대로 출간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라캉의 글들은 이미 회복할 수 없게 낡았거나 상품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일까? 라캉의 글을 반복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책이 한글로 소개되고 있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라캉의 사유가 나에게 발휘하는 매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번역의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출간은 그만두고라도 개인적으로 번역하여 관심있는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마음도 간혹 든다. 그러나 불어를 하나도 모르는 내가 할 일이 아닐 뿐더러 아직 그 정도의 애정은 없다. 나의 애정은 그의 글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 긴 논문을 다 읽은 후에 노트를 쓰겠다고 결심했지만 결국에는 그의 글에 유혹되어 읽기를 그만두고 쓰기 시작한다. ‘Preface’와 ‘Introduction’과 ‘1. Empty Speech and Full Speech in the Psychoanalytic Realization of the Subject’의 일부를 읽은 후이다. 대략 15페이지를 읽었다. 이제 막 ‘full speech’에 대한 내용이 시작되려는 시점이다. 한창 논문이 중요한 대목으로 넘어갈 때 멈추고는 글을 쓰는 것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지 않으면 라캉이 펼치는 사유의 과정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문득 나의 독서를 멈춘 것은 라캉이 주장하는 정신분석적 경험 (psychoanalytic experience)에 대한 입장이다. 두 개의 서문 다음에 본론을 시작할 때 라캉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Whether it wishes to be an agent of healing, training, or sounding the depths, psychoanalysis has but one medium: the patient’s speech” (E. 206; F. 247).
라캉은 당시에 정신분석학이 사용되는 세가지 방식을 요약하고 있다. 실제 환자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치료, 분석가를 교육하는 수단, 그리고 인간 심층을 탐색하는 수단. 가령 나의 경우에는 세 번째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 또는 인간 일반에 대한 ‘심층’ 이해를 얻을 목적으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적 철학, 문학, 사회과학 등은 대부분 세 번째 방식에 속할 것이다. 라캉은 어느 방식에 속하든 정신분석학이 문제가 되는 한 ‘환자의 말’이 유일한 매체라고 주장한다. 정신분석학적 경험은 ‘환자’가 말을 걸고 ‘분석가’가 응답하는 대화에서만 나타난다.
라캉이 ‘환자의 담화’라고 말한 것에 주목한다. 이 연설은 ‘동료’ 정신분석가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것이다. 따라서 라캉이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분석가가 환자를 만나는 상황이다. 이는 흔히 나타나는 심리학적 또는 철학적 인간 이해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대개 심리학과 철학은 ‘정상인 사람’을 분석의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 나는 라캉의 글을 읽을 때 반드시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라캉은 인간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 라캉의 ‘환자’를 인간 일반과 등치하는 일이 언제나 일어나지만 이 등치는 면밀하게 정당화되어야 한다. 후기 라캉의 사유를 참조할 수 없어 라캉 자신이 등치를 제시하고 있는 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강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1953년의 시점에서 라캉은 환자와 인간 일반을 등치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라캉을 종교적으로 또는 비판이론적으로 또는 들뢰즈-가타리적으로 읽는 방법이 가능하다. 이는 환자와 인간 일반을 등치하는 갖가지 방식이다. 이 등치에서 환자를 인간 일반에 속하는 것으로 등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일반을 환자로 전환하는 등치가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나 불교 등의 관점에 따르면 모든 또는 적어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환자이다. 비판이론은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전망을 포기하고 사회학적 전망에 기초하여 다수의 사람을 환자로 만드는 전체주의적 또는 자본주의적 파시즘의 분석에 몰두한다. 내가 읽은 바에 국한하여 판단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판이론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가망없다고 주장한다. 환자인 인간 일반이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거나 어렵다. 따라서 환자는 환자인 채로 의미있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들은 사람이 환자인 채로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을 자본주의가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에서 연유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실존주의의 연관을 발견한다. 나치의 지배하에 있던 유태계 지식인들은 실존주의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면서 비판 이론을 발전시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니체-하이데거-사르트르-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헤겔-마르크스-프로이트-비판이론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아직 이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두 계보에 대한 생각이 맞다면 라캉은 비판 이론의 계보에 속한다. 이 강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라캉의 글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한다. 소외(alienation)과 진리(truth).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헤겔에서 연유하여 마르크스를 거쳐 비판이론에 있어 핵심 과제로 등장한 ‘소외’에 대한 분석과 다른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T. 아도르노가 쓴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라캉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만 자유를 실감나게 느낀다’고 주장한다. 야스퍼스의 말을 빌면, 한계상황에 처할 때 자유의 맛을 눈물나게 안다. 이는 포만의 가치를 알게 하기 위하여 사나흘 사람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기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는 항구적인 굶주림에 있을 때에만 포만의 상태를 ‘상상으로나마’ 맛볼 수 있다. 만약 이런 주장이 맞다면 상상하는 자유가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어떤 가치를 갖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간디의 상황을 잠시 생각한다. 이 무소유의 행동가가 가지고 있던 최대의 관심은 무엇이었던가? 간디는 (우리 사회가 낳은) 무소유의 사상가인 법정과는 판이하다. 법정은 거의 실존주의자에 가깝고 간디는 비판이론가에 가깝다. 처음 무소유를 실천하겠다고 결심한 간디가 한 일이 노동운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올려주기 위해 단식을 시작하였다. 그는 인도 민중이 처한 경제적 궁핍과 식민지적 착취를 타파하기 위하여 영국에 항의하면서 감옥을 들락거렸다. 그는 왜 인도 국민 전체에게 무소유의 삶을 설교하는 대신에 ‘일용할 빵을 제대로 챙겨먹는’ 인도를 만들기 위해 애썼을까? 그는 굶어 죽는 일에 진정한 해방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잘 챙겨먹는 것이 진정한 삶의 출발이다. 이 풍요한 상황에서 굶는 것은 자유의 표현이다. 어쩔 수 없이 굶고 있는 사람에게 굶음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 폭력을 비판이론가들은 ‘소외’라고 부른다.
라캉이 이 강연을 하는 시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이 소외의 문제였다. 나는 라캉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망으로 이끌지 않았던 것은 그가 의사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매일 몇 시간씩 기본적인 삶마저도 가능하지 않을 만큼 비틀려 – 소외되어 – 살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라캉은 잔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캉의 치료적 잔인함은 이 환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있어 ‘자선적인 동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판단에 기인한다. 정신분석가의 잔인함 또는 침묵이 환자에게 그의 진리를 돌려준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으로 미룬다.)
라캉은 이 강연에서 당시 이루어지고 있는 정신분석학 전반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정당한 것인가? 아니면 라캉의 ‘교조주의적 고집’이 나만 옳다고 하는 독단을 낳았던 것일까? 나는 거의 전적으로 라캉이 옳다고 믿는다. 이를 정신분석학과 정신의학과 관련하여 다루어본다.
이 시기에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특수한 대화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라캉은 1951년에 행한 강연인 <Presentation on Transference>에서 이렇게 말한다. “In short, psychoanalysis is a dialectical experience” (E. 177; F. 216). 라캉은 분명 헤겔의 변증법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단순하게 말하여 정신분석이 ‘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 변증법적 또는 담화적 경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자의 진실(truth)이다.
정신분석학은 분석을 통해 환자에게 그 자신의 진실을 돌려주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할 때, 환자의 삶은 전체로서 허위(lie)라고 말할 수 있다. 환자가 보여주는 증상들(symptoms)은 거짓 삶을 유지하려는 노력과 진실을 말하려는 시도가 충돌하면서 비어져 나온다. 라캉은 환자가 거짓 삶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소외라고 부른다. 라캉은 이 거짓 삶을 분석하기 위하여 상상계에서 작동하는 에고에 관심을 기울이다. (환자의) 주체는 상상계에서 에고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라캉의 에고가 거울단계에서 형성되어 강화되는 이상아 (Ideal Ego) 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밝혔으니 이 강연에 나타난 문제만 언급한다.)
라캉의 사유가 맞다면 (또는 라캉의 사유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맞다면) 라캉이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정신분석학에서 변증법적-담화적 경험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대신하여 정신분석학은 정신의학이나 행동-인지심리학적 정신치료법을 닮아간다. 이 둘의 차이는 증상을 다루는 데서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우울증을 앓고 있는 주체가 말을 하는 상황을 들어보자. 웅얼거림 말더듬 실수 망각 등등. 현대에 유행하고 있는 치료법에 따르면 우울증이라는 행위의 지표들을 확인하자마자 (정신과) 의사들은 항우울제를 처방할 것이다. 이 경우에 우울증 환자와 의사 사이에 어떤 대화도 필요하지 않다. 환자가 말을 하는 동안에 의사는 객관적으로 관찰을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의사가 얻는 것은 DSM IV 같은 진단 책에 기술된 지표들에 따라 내담자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할 것이다. 의사가 처방한 항우울제는 하루 또는 일정한 시간 동안 증상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만들면서 내담자를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 과정은 매우 즉각적이고도 효과적이다. 이 경우 문제되는 것은 항우울제 등의 약품이 낳을 수 있는 ‘육체적’ 부작용이다. 많은 경우에 이 부작용은 약의 효과에 비해 미미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용인된다. 법적으로 용인된다고 할 때 이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생긴다고 하여도 의사 또는 제약 회사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이 항우울제가 유통되고 있는 사회가 생각하는 건강의 전제들에 동의하는 경우라고 한다면 정신의학의 진단과 처방에 대해 실질적인 항의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작용이 거의 없으면서 경제적인 항우울제를 생산하도록 사회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이는 항암제나 당뇨병 치료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윤리적 사회적 법적 공방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정신의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시점에서 라캉이 에고심리학을 비판하는 대목을 생각해 보자. “In any case, it seems indisputable that the conception of psychoanalysis in the United States has been inflected toward the adaptation of the individual to the social environment ...” (E. 204; F. 245).
사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왜 사회 적응이라는 목표가 문제되는가? 에고심리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라캉은 현존하는 사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상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라캉이 활동하고 있던 시절에 프랑스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지식인들은 다 좌파였다는 스피박 (Spivak)의 주장을 상기한다. 사회가 문제가 있는 경우에 사람을 사회에 잘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공학’일 따름이다. 비판이론이 초점을 두는 것은 정확하게 잘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자본주의의 착취를 매끄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다시 라캉의 헤겔적 사유는 비판 이론에 접근한다. “[…] the aggressiveness of a slave who responds to being frustrated in his labor with a death wish” (E. 208; F. 251). 라캉이 말하는 ‘death wish’는 타살이 아니라 자살의 의도이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도대체 노예가 생각하는 쓸모란 무엇일까? 주인을 위해 죽도록 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노예는 주인을 타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살할 생각을 하는 것일까? (좀 더 억측하여 물으면) 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라캉은 노예가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상계에 자리잡은 타자는 주체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라캉의 이 말은 그가 미국의 정신분석학 (또는 정신의학)에 대한 생각을 요약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항우울제는 노예의 노동을 더욱 극단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이 맥락에서 환자가 보여주는 증상들은 소외를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주체의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이해될 때 정신의학은 이 몸부림을 잠재우면서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복무한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포함하여 정신의학을 비판하는 푸코 등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캉에 대한 푸코 등의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라캉의 에고심리학에 대한 비판은 그가 1966년에 새로 쓴 문단에 잘 드러나 있다. “… in the work he does to reconstruct it [즉 상상계에 구축된 에고] for another, he encounters anew the fundamental alienation that made him it like another, and that has always destined to be taken away from him by another” (E. 207-208; F. 249). 에고심리학적 정신분석의 과정에서 주체는 (이전) 에고를 대신하여 이제 분석가의 에고를 자신의 에고로 이상화한다. 주체의 정신 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라캉은 오히려 주체의 소외를 더욱 깊숙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학적 경험은 이 증상을 약물이나 다른 수단을 사용하여 잠재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 증상들은 억누를 수 없는 진실이 (거의 완전히 파괴된 모습으로나마) 드러나는 순간들로 파악해야 한다. 라캉이 보는 정신분석학의 주체는 증상들로 말을 건다. 분석가는 이에 (적절하게) 응답함으로써 주체의 진실을 돌려준다. 아직 라캉은 전체로서 도착된 사회에서 ‘진실로’ 사는 것이 가능한지 또는 바람직한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이 지점에서 라캉은 환자의 거짓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한 줌의 아편을 처방하기를 거절한다. 라캉은 (아직) 진리가 사람을 자유케 한다는 전통에 매우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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