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1
눈앞의 성진 씨는 그렇게도 동자스님을 닮았는데도 그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동자스님은 늘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말했고 무념無念 법을 말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스님에게서 생각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탐진치) 물든 망념과 청정한 불심인 본성을 바라보는 지혜로 나뉜다. 망념은 무無를 통해 제거하고 지혜는 염念을 통해 닦아야 하는 것이다. 인당스님은 법당 뜰의 풀을 뽑고 강원 앞에 무드기 쌓인 낙엽을 쓸어 모아 소각하고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평범한 사미승이었지만 불도를 닦는 수행자만이 가지는 깊은 불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산나물을 캐면서도 찻잎을 따면서도 정원을 쓸면서도 인당스님의 입에서는 염불이 그칠 새 없었다. 입으로 마음속으로…… 자식을 산중에 버린 부모에 대한 원망을 버린다는 건 불자가 아니고는 정말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스님은 그녀에게 오빠였고 스승이었고 친구였고 연인이었다.
천둥번개가 울고 폭우가 쏟아지던 날, 사찰 뒤편 벼랑 턱의 암자에 동자스님과 함께 갇혔던 그날 밤의 일을 윤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암자에서 수행하던 연단스님에게 심부름을 올라갔었으나 연단스님은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두 사람은 암자에 덜컥 유폐되고 말았다. 비바람에 그물거리는 촛불, 장검처럼 서릿발 치며 번뜩이는 천둥번개, 부산스레 떨그렁거리는 풍경소리, 어둠 속에서 무섭게만 보이는 문수보살상……
윤미는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전신을 화들화들 떨었다. 천둥소리와 번갯불이 번뜩거릴 때마다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사지를 옹송그린 채 흑흑 울었다. 그런데도 동자스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문수보살 앞에 꿇어앉아 목탁만 똑딱똑딱 구성지게 두드렸다. 그 목탁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르고도 절주 있었다. 공포에 질린 윤미가 그의 가슴을 오비작오비작 파고들어서야 동자스님의 몸가짐과 목탁소리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네 옆에 있잖아.”
드디어 목탁소리가 그쳤고 스님의 두 팔이 그녀의 등을 살며시 보듬어 안는다. 스님의 품은 너무나 포근하고 편안했다. 그 품에 안기는 순간 공포와 두려움은 눈이 녹듯 말끔히 사라졌다. 더 이상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서릿발 치는 번개의 섬광도 보이지 않았다. 삼라만상은 고요한 평화 속에서 단꿈을 꾸는 듯 했다. 풍경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고 무성한 동백나무숲을 두드리는 빗줄기소리는 은근한 목탁소리처럼 구성졌다.
“나랑 너랑 신랑각시 할까?”
윤미는 꿈속에서처럼 속살거렸다. 동자스님은 대답 대신 손으로 그녀의 소담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님의 품속에 이렇게 안겨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윤미는 그렇게 스님의 품속에서 저도 모르게 잠이 깜빡 들었다.
“선생님은 제가 있던 절의 동자스님을 꼭 닮으셨어요. 복스러운 얼굴도 그렇고 서글서글한 눈매와 상큼한 코, 두툼한 입술도 그렇고요. 삭발만 하시면……”
“스님을 닮다니요?”
밑도 끝도 없는 화제를 불쑥 꺼내는 바람에 성진은 입가로 가져가던 맥주잔을 허공중에 멈추고 의아한 눈길을 그녀에게 던진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맥주로 주종을 바꿔 마시고 있었다. 어느새 테이블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수두룩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술이나 마셔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제1원리』, 라캉의 『에크리』, 데리다의『그라마톨로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흠뻑 심취된 성진에게 스님의 이야기를 꺼낸다한들 호기심을 유발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한국말과 한국음식에게까지 거부감을 나타내는 남자, 양인으로 환골탈태하려고 안달아 하는 성진에겐 동양의 모든 것이 혐오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녀에게 과거가 중요한 것처럼 그에겐 현재가 중요하겠지. 그러나 윤미가 현재에서 탈피할 수 없듯이 성진 역시 과거에서 도피할 수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과거와 현재는 앞뒤로 인간을 옥죄어오는 쇠고랑과 같은 존재이다.
“주체라는 건, 현재인 동시에 과거이며 또 미래이기도 하잖아요.”
“낙서된 흔적과 낙서되고 있는 흔적 그리고 낙서될 흔적……”
두 사람은 다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해야 하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화제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았다.
윤미의 참선화두이기도 한 주체가 어찌하여 성진의 화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숙명적인 인연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동자스님의 화신이 나타나기라도 했을까?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어딘가 두세 곳 더 옮겨 다니며 양주까지 마셨다. 무슨 말인가를 수없이 했지만 화제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귀가택시에 승차했을 때 그녀는 이미 만취상태였다.
누군가 그녀를 업고 터널 같은 깊숙한 어둠 속을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때로는 그 사람이 성진으로 보였다가 때로는 동자스님으로 보인다. 때로는 그 길이 전세방인 아파트로 이어진 정원으로 보이고 때로는 암자로 이어진 암반 길로 보인다.
“인당스님!”
윤미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답 대신 짤막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몇 층입니까?”
“2080호요. 앙리부인이 얻어준 전세방이에요. 독 감방이라는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의식은 오락가락 그네를 타는데 말은 신기하게도 잘 만들어져 나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윤미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상대방이 이상하게도 너풀너풀 춤을 추고 있다는 환각에 빠져들었다. 백중맞이영가천도제날 붉은 가사에 회색 장삼을 입은 대공스님이 구리 바라를 두 손에 들고 태징, 목탁, 태평소, 법고, 삼현육각의 반주에 맞춰 추던 바라무 같다. 영산제날 하얀 육수장삼에 육수가사를 입고 노랑 고깔을 쓰고 두 손에 꽃을 들고 범패음악반주에 맞추어 나비승무를 추던 동자스님 같다. 공양의 의미와 부처칭송의 이름을 담은, 느리면서도 장중하던, 하늘을 훨훨 나는 두루미처럼 자유롭던 춤사위.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연꽃을 들어 상근기를 보이니
이는 눈먼 거북이가 마치 넓은 바다에서 물에 떠있는 나무를 만난 듯 하네
만약 가섭이 부처님의 심지 법문을 알고 빙그레 웃지 않았다면
끝없는 청정한 가풍 누구에게 전하랴
나모 라다나 다라야야
나막 알약바로기제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 바로니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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