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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13

by 8866 2008. 11. 12.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3

 

윤미는 지금도 대공스님이 늘 하시던 말씀을 한마디도 빠트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말의 심오한 뜻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허깨비 같지만 욕망으로 고통 받고 공하고 불결하면서도 청정한 본성을 간직하고 생하고서도 멸하는 육신, 그런데도 혈통과 동포라는 육신의 인연에 연연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혈육, 동포라는 인연이 없다면 인간은 어디서 생기며 또 어디로 맥이 이어질 것인가? 생은 인연이며 인연은 육체를 통해 계승되는 것이다. 앙리부인이 나더러 생의 인연을 끊고 프랑스인이 되라고 강요하지만 끊는다고 끊어질 인연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내 몸은 인연의 한 흔적이고 낙서일 따름이다. 나더러 동자스님과의 인연을 끊고 동족과의 인연을 끊으라고 한다면…… 그 흔적과 낙서들이 앙리부인의 뜻대로 그렇게 쉽게 지워질 수 있을까.

지난밤 성진이와의 사이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인지 아쉬운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드뇌브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처지에 성진에게 몸을 허락하는 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 했던 죄밖에 없다. 그것은 정당한 인연의 맥을 이어가려는 본능적 욕구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명분이 서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하나의 인연은 다른 하나의 인연에 의해서 지워지고 그러한 악순환의 연속이 인생이라면……

어딘가 뿌리가 잘려나간 듯한 그런 기분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따르릉- 따르릉-

갑작스런 전화벨소리가 화두삼매의 문전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녀의 의식을 놀라게 했다.

성진 씨!

얼핏 뇌리를 스치는 예감에 윤미는 방석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수화기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의 임자는 드뇌브이다.

“일어났습니까? 빨리 내려와요. 오늘은 사크르쾨르성당으로 가야 합니다. 교수님께서 야단치셨거든요.”

사냥개!

윤미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송수화기를 덜컥 내려놓았다. 눈만 뜨면 뒤를 추적하고 입만 뻥끗하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드뇌브의 방자함이 역겨웠다.

전화벨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울렸다. 윤미는 수화기를 들자 버럭 언성을 높였다.

“알았다니까 그래요!”

그러나 수화기안에서는 드뇌브가 아닌 앙리부인의 얼음덩이처럼 차디찬 음성이 들렸다.

“지난밤 만났던 애는 누구니?”

벌써 고자질했구나. 비열한 자식!

“친구에요.”

“친구? 무슨 사인데?”

“그냥 아는 사이에요.”

“코리언이니?”

“아니, 중국인이에요. 대학 강산데 결혼한 사람이에요.”

위기상황이어서인지 마치 대본을 외듯이 거짓말이 술술 굴러나갔다.

“정말?”

“네.”

어느새 등 곬에 식은땀이 흥건히 내돋았다.

“이번 한번만 믿어주마. 그러나 다시 한번 낯선 남자를 집안에 끌어들였다가는 그땐 용서가 없다는 걸 알아두어라. 학교를 중퇴시키고 리옹으로 끌고 와 드뇌브와 결혼식을 올려줄 거야!”

일방적으로 통화가 툭 끊어졌다.

윤미는 한동안 선 자리에 못박인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김성진! 프루스트!

느닷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취중에 주고받은 전화번호였지만 머릿속에 또렷하게 입력되어있었다.

 

 

 

4

 

 

 

 

나는 스승 앞에서 익숙한 아니, 당연히 익숙해야 할 현란한 운궁법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바이올린자작곡을 연주했다. 마르셀교수가 지적한 기법들에 유의하면서.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연주기법에 신경 쓰면 쓸수록 스피카토, 피치카토, 슬러스타카토 주법보다는 마르틀레, 글리산도, 비브라토 따위의 몇 개 주법에만 편중하게 된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다리를 꼰 채 식지로 손잡이를 똑똑 두드리며 박자를 짚던 마르셀교수의 양미간에 깊은 곬이 파이며 굴곡을 이룸을 보자 나의 연주는 더욱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바이올린만 쥐면 왜 자꾸만 영문 없이 해금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저음중현과 고음유현 두 줄밖에 없고 일정한 음의 자리도 없이 손가락 위치와 활대를 밀고 당기는 힘의 강약에 따라 음고音高를 내는 간단한 악기, 소리마저 거칠고 천박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던 악기였는데 말이다. 해금은 늘 무속인이고 재비인 할아버지의 굿 음악 연주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느닷없이 곤두박질하는 하행선율의 육자배기 목 굿 음악, 탄식조로 길게 빼주는 지속음, 그 지속음 사이를 누비며 흐느끼듯 한숨 쉬 듯 토막 내고 장식하는 불안정한 굴절 음, 기복이 심한 잔가락들과 거의 외침소리에 가까운 목쉰 4~5도 조약진행과 박력 있는 이二강음, 진양조의 느린 장단의 불규칙적인 박자와 일자다음一字多飮音형식으로 가사와 박자의 부조화……

이제는 바이올린소리마저도 앵-앵- 깽-깽- 찍-찍- 하는 해금소리로 들린다.

“그만해!”

마르셀교수가 걸상에서 벌떡 일어서며 손에 들고 있던 오선보를 마룻바닥에 홱 내던졌다.

나는 흠칫 놀라 연주를 멈추고 바이올린을 어깨위에서 내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음악이야? 클래식도 재즈도 아니고. 곡조는 늘어빠지고 박자는 불안하고 말이지. 꼭 마치 물귀신소리 같고 고함소리 같고 한숨소리, 통곡소리, 애원소리 같잖아. 리포트 다시 해와. 내가 뭐랬어. 프루스트 넌 피를 갈아야 한다고 그랬지. 그 몸속에 흐르는 묽은 피를 갈지 않고는 서양음악을 터득할 수가 없다 했잖아.”

마르셀교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나한테 등을 홱 돌리더니 연습실에서 씽하니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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