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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10

by 8866 2008. 10. 24.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0

 

유학을 와 갑자기 식습관이 바뀐 프루스트를 위해서도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각별히 찾아온 곳이었다. 대학식당은 음식값은 싸도 역시 메인디쉬, 샐러드 따위 양식이어서 국밥이 식성인 한국인에게는 목에 걸리는 음식들이다. 윤미도 그래서 가끔씩 드뇌브의 눈길을 피해 이곳으로 와 한식을 포식하는 것으로 늘 식상한 식욕을 달래곤 했다.

그런데 반길 줄로만 알았던 프루스트가 뜻밖에 한식을 거부하여 별도로 옆 가게에 따로 주문하는 자그마한 소동이 벌어졌다. 게다가 백포도주까지 들인다.

“양식을 즐겨 드시는 식성인가 봐요. 프랑스에 오신지 6개월이나 된다니 김치나 청국장 생각이 나실 줄로 알고 모셨는데……”

윤미는 김치찌개를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문을 열었다.

“장장 28년간이나 먹었습니다. 역겨울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제 몸에서 새큼새큼하고 구릿한 된장냄새, 김치냄새가 날까봐 두렵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몸에서는 우유냄새가 나는데 말이죠. 저는 인젠 이 포도주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포도주가 없는 날은 태양이 없는 날과 같다.’ 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프루스트는 맵싸하면서도 약간 탄 냄새와 쓴 맛이 나는 루아르 푸일리 퓌메백포도주를 입가에 가져가며 그윽한 눈매로 유리컵을 응시했다.

그 말은 앙리부인이 식탁에 마주앉을 적마다 기도문처럼 외는 경구였다. 앙리부인은 한국여자이지만 프랑스사람보다 더 프랑스사람 같다. 그녀가 포도주를 마시는 건 그냥 마시는 동작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었다. 먼저 잔을 들고 불빛에 그 은은한 액체의 빛깔을 감상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코끝에 가져다대고 향기를 음미한 다음 조금만 마셔 온 입안에 포도주향기가 가득하게 퍼지는 진 맛에 심취되며 두 눈을 사르르 감는다. 그와 같은 동작이 바로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프루스트에 의해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윤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체류 6개월밖에 안되는 유학생이 완벽한 프랑스인을 꿈꾸는 그 모습은 이상하게만 보였다. 프루스트의 현실에 대한 향수는 과거와 추억에만 매달리는 자신의 현실도피생활방식보다 당연히 신선해야 할 텐도. 과거를 외면한다는 건 또한 정체성의 포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없지 않았다. 과거, 현재, 미래 이 화두는 그녀의 서툰 요가명상의 풀리지 않는 퀴즈이기도 했다. 정체성이라는 건 얼핏 보기엔 과거에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미래 즉 죽음에 대한 집착 역시 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대공스님의 참선화두가 도솔삼관이었다는 건 최근에야 알았다. 도서관에 가서 불교관련책자를 찾아보고서였다. 그것은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화두의 두 끝이 하나의 의미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한 인생의 정체성이 완벽해지는 것일 테고.

“코리언이 한식을 싫어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결례라는 걸 알면서도 도전적 위험을 감내하면서까지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프랑스사람이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프루스트는 아직은 예의로만 두 사람의 관계가 유지되는 상황을 좌시하는 상대방의 월권행위 같은 데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태연했다.

“누가 프랑스사람이란 거죠?”

“윤미 씨 말입니다.”

“제가 프랑스사람이라고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코리언이에요. 혼혈아도 아니고 이곳 태생도 아닌 한국에서 나서 자랐고 부모가 한국인인 순수한 코리언의 혈통이란 말이에요.”

자신의 반응이 너무 민감했음을 깨닫고 그녀는 서둘러 진지해진 표정을 정리하며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 김치찌개는 우리 엄마가 늘 저한테 만들어주시던 거예요. 그리고 절에 있을 때는 큰어머니가……”

왜,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프루스트 씬 그 절의 동자스님을 닮으셨어요. 그래서 오늘 제가……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음성이 나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소주 한잔을 따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엄마가 난산으로 죽은 뒤 아빠가 2년 동안이나 하루 세 끼 줄곧 마시던 소주다. 아빠는 결국 그 독한 알코올 때문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 소주에는 앙리부인의 감미로운 예술인 포도주와는 다른 그녀만의 한이 담겨있었다.

“아시겠어요. 전 절에서 별의별 음식을 다 먹어보았어요.”

술 한 잔이 들어간 데다 흥분하기까지 한 그녀는 더 이상 심중의 그 복잡한 의미들을 한국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저모 모르게 유창한 프랑스어로 구술하기 시작했다.

“공양주이던 큰어머니를 도와 산나물을 캐다가 씻고 데치고 썰고 무치고 깻잎, 콩잎을 따다가 장아찌 만들고 김장하고 메주 쓰고, 시금치, 콩나물을 다듬고 우엉을 칼등으로 두드리고 불린 표고버섯을 찢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정작 프랑스어로 진술하려니 도리어 프랑스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어들이 많았다. 깻잎, 장아찌, 김장, 메주……이상하게도 그렇듯 어려운 우리말 고유어들이 어렵지 않게 입 밖으로 술술 풀려나왔다.

혼혈아인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절에까지 있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 프루스트는 한동안 꼼짝 않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혼자서 절로 들어가신 겁니까?”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죄송합니다.”

“3년 뒤엔 큰어머니도 타계하셨어요. 전 여덟 살에 프랑스에 사는 이모네 집에 입양되었어요. 이모가 한국말을 못하게 했어요. 한국음식도 먹지 못하게 했고요. 완벽한 프랑스사람으로 만든다면서요.”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숙연한 기분까지 감돌았다. 죽음이란 단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이번엔 제가 아가씰 모시죠.”

화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온 자신의 결례를 사과라도 하듯 프루스트는 서둘러 분위기수습에 나섰다.

“제 프랑스이름이 뭔지 알고 싶으시죠. 줄리아예요. 앙리부인이 지어준 이름이거든요.”

“제 본명은 김성진입니다. 프루스트는 제가 스스로 지은 겁니다.”

“김성진 씨!”

성진이 2차로 윤미를 데리고 간 곳은 파리 좌안의 생 제르맹 데프레 지역에 있는 유명한 레 되마고라는 카페였다.

그들은 가로수그늘 밑의 서늘한 노천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핫 초콜릿에 포도주가 올라왔다.

길을 사이 둔 맞은편의 생 제르맹 데프레 교회는 철학가 데카르트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제1원리인 저 유명한 코기토이론을 창시한 명인이 아닙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모든 과거와 기억과 흔적과 역사에 불신의 봉인을 붙인 거죠.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현존일 뿐이라는 진리를 발견한 겁니다. 그런데도 기억들과 흔적들과 역사와 과거는 여전히 존재하니 도대체 주체란 무엇입니까? 흔적과 낙서들의 중첩이, 다시 말해 과거와 현재의 타협이 주체라면 코기토가 발견한 주체는 죽음의 운명을 타고 난 거겠지요.”

“생각하고 있는 실존적자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또 하나의 주체 앞에서 코기토는 과거이고 기억이고 흔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 많은 흔적들과 기억들과 낙서들은 주체라는 허깨비를 따라다니며 참된 자아를 말살하고 있습니다. 저 그림자들의 무모한 간섭에서 일탈해야 주체는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요. 라캉의 주체, 데리다의 차이, 들뢰즈-가타리의 고른 판 위에서의 리좀현상과 도주선……진리는 다면체여서 어떤 길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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