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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9

by 8866 2008. 10. 10.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9

 

“제가 선생님의 초상을 그려드려도 되겠습니까?”

프랑스어가 더 많이 추가되며 그녀의 말은 더 이상 한국말이라고 하기엔 우스꽝스러울 만큼 구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랬지만 오기가 집념을 버리지는 않는다.

“보시다시피 한가한 시간은 많아도 그림 그릴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학생입니다.”

이제 남자의 프랑스어 밑천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며 말마디들이 한국말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런 엷은 프랑스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요하게 프랑스어표현을 고집하고 있었다.

“저도 30프랑에 생계를 건 거리화가가 아니에요.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는 대학생이거든요. 돈을 바라지 않을 뿐 아니라 원하신다면 그림에 모델사례금까지 얹어서 드릴게요.”

더 이상 프랑스어가 아니면 복잡한 의사표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미는 설령 한두 마디의 짤막한 토에 불과할지라도 말 사이사이에 한국말을 끼워 넣기에 심혈을 쏟았다.

남자는 이상한 여자 다 보았다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른다. 동자스님과 더불어 계곡이며 숲 속이며 바위에서 뛰놀던 추억이 새삼스러워진다. 산마루 벼랑 턱의 그 조용한 암자에서 스님과 단둘이 폭우가 퍼붓던 어둠 속에서 지낸 그 밤이……

잠간 새에 그림을 완성했다. 사실 그 그림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있던 모습이어서 그리기가 너무나 쉬웠다.

“다 그렸어요.”

윤미가 건네준 그림을 받아든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화선지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만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이 사람이 저라는 말입니까?”

“비슷하지 않으세요. 동양화법으로 그리느라 했는데……”

“서양화를 전공한다면서 왜 동양화기법으로 그린 겁니까?”

“제가 동양인이잖아요.”

“동양인이라 해서 꼭 동양화를 그려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어쩌죠. 전 서양화를 더 좋아합니다.”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이유라니요. 좋아하는데도 꼭 무슨 이유를 붙여야 합니까. 굳이 이유를 들라면 향토적이고 촌티 나는, 게다가 초학자의 미완성품 같은 동양화가 싫기 때문입니다. 서양화는 완벽하지요.”

굳이, 향토적, 촌티, 완벽 이런 단어들을 한국말로 대체했다는 사실보다 코리언이 한국화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윤미를 놀라게 했다.

“받으세요. 사례금입니다.”

윤미는 지갑에서 100프랑을 꺼내어 남자에게 건넸다.

“이건?”

“약속했잖아요. 모델사례금을 드리겠다고.”

“그림 그릴 돈은 없지만 이유 없는 돈을 넙적넙적 받을 만큼 궁하지는 않습니다. 체면을 구겨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남자는 돈을 돌려준다.

“그럼 대신 제가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까요?”

“식사요?”

낯선 여자의 느닷없는 호의에 남자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아무리 타국에서 만난 동포라고 해도 생면부지의 사이가 아닌가. 남자는 선 듯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순간 윤미는 광장 맞은편 모퉁이에 나타난 드뇌브의 모습을 발견했다. 조급한 나머지 그녀는 결례를 무릅쓰고 무작정 남자의 손목을 잡고 골목으로 잡아끌었다.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에게 이끌려 광장을 빠져나왔다. 윤미는 드뇌브의 감시를 받느니 차라리 낯설긴 해도 동포와 함께 하고 싶었다. 화구는 드뇌브가 알아서 챙길 것이다.

“제가 잘 아는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택시에 승차해서야 윤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께서는 뭘 전공하시나요?”

“음악이요.”

“실례지만 존함은?”

“프루스트입니다.”

“네?! 그건 예명이실 테고 본명은?”

프루스트는 대답은 묻어놓은 채 창밖의 풍경만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 갑자기 당하고 보니 아직도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제 이름은 김윤미에요.”

“그것도 예명이겠죠. 프랑스이름이 따로 있을 거잖습니까.”

이번엔 그녀 쪽에서 대답이 궁해져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줄리아!

앙리부인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 이름 때문에 그녀는 부모님이 지어준 윤미라는 이름을 매장해야만 했다. 남들은 그녀를 줄리아라고 불렀지만 정작 본인은 그 이름을 싫어했다. 동자스님이 불러주던 이름, 큰어머니와 대공스님이 불러주던 이름 윤미가 자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휴대폰벨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보나마나 드뇌브의 추적전화일 것이다. 윤미는 아예 작동을 꺼버렸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드뇌브의 감시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앙리부인이게 고자질할 테면 하라지. 비록 하루일망정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강압과 수모도 감수해낼 것 같았다. 단 하루라도 내 의지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보고 싶다. 진정한 코리언으로, 조각난 코리언의 정체성을 복구하면서……

 

 

 

 

3

 

 

 

 

파리시내에서 결코 찾기 쉽지 않은 한식집.

두 사람은 식탁을 가운데 하고 마주앉았다.

아침에는 바케트를 버터에 발라먹고 점심에는 도토리모양의 브리오슈를 커피나 코코아에 적셔먹고 저녁에는 앙리부인이 즐겨 차리는 식단인 돼지고기내장을 튀긴 앙두일레트나 양고기를 버터에 구운 누아제트, 거위나 오리고기를 훈제한 프아그라요리만을 먹어야 했던 리옹에서의 나날에 윤미는 치즈, 버터, 고기범벅인 느글느글한 기름기에 음식 맛을 잃었고 거식증까지 일으켜 냄새만 맡아도 구토증세가 발작한 정도였었다. 단 한 끼만이라도 엄마가 늘 해주던 시래기된장국이나 새콤하고 이가 쩡 시려나는 광 속 독안의 배추김치, 갓김치, 열무김치를 먹어보았으면. 그도 아니면 공양주큰어머니가 차려주던 녹두를 박은 절밥과 푸른빛갈의 나물국, 무국, 푸성귀무침, 상추쌈, 버섯잡채를 먹어보았으면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은근한 향과 깊은 맛을 가진 반야차, 마가목차, 구기자차는 특히 절의 약수로 달인 것이 일품이니 그 맛을 한번 들인 사람은 달짝지근하면서도 약간 찝찔하고 자극적인 시중음료에서는 진 맛을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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