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8
그녀는 스승의 가르침을 입속으로 되뇌며 화선지위에 붓을 날렸다. 감필법과 여백 미는 결코 의미의 삭감이나 공백이 아니다. 도리어 증감과 은유를 유발한다. 구도의 평면 화 역시 사물의 사실적 모습을 왜곡시킨다기보다는 도리어 사물을 원근법과 3차원공간이라는 기계적 원리에 얽어매고 중심과 주변으로 분리시킴으로서 화가의 인상을 무시하는, 본의 아닌 실수를 극복하도록 한다. 원근법의 규제를 떠나 화가는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느닷없이 윤미의 시선을 유혹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라임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어 신문을 보는 남자,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동양인이라는 사실, 인당동자스님과 외모가 흡사하다는 사실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늘 머릿속으로 동자스님의 성인된 어엿한 그림을 상상해보곤 했는데 바로 저 얼굴이었다.
윤미는 붓을 멈춘 채 한동안 넋을 잃고 그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꽉 차서 넘치는 충만감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빈 듯한 느낌으로 싱겁기만 한 서양인보다는 다른, 어딘가 부족한 듯하나 차돌 같이 알이 든 느낌 때문에 여유와 실속이 엿보이는 동양인. 문자 그대로 하나의 조각품 같았다.
뜻밖에도 동자스님을 닮은, 스님의 성인된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조금은 흥분시켰다.
윤미는 서둘러 멈췄던 붓을 화선지위에 가져갔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나무에 기댄 등을 앞으로 약간 숙이고 살짝 꼰 다리를 나란히 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신문 든 손을 합장하고 양복 대신 승복을 입는다면 그 모습은 틀림없는 동자스님의 성장한 모습일 것이다. 어느덧 귓전에는 풍경소리, 목탁소리, 법종과 법고소리,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한창 신나게 그리는데 문득 그녀의 시야에서 남자가 아니, 동자스님이 사라졌다. 윤미는 저도 모르게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는 사람들 속에 섞여 광장을 가로질러 사크르쾨르성당 쪽을 향해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윤미는 사람들 속을 비집고 그쪽을 바라고 무작정 달려갔다.
“선생님.”
남자가 주춤 발걸음을 멈췄다. 서툴긴 했지만 그 남자에게는 분명 귀에 익은 한국말이었을 것이기에 반응이 남달랐으리라. 윤미는 그 남자가 첫눈에 코리언이라는 직감이 들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국말은 슬프게도 그 향기와 맛이 한물 간, 프랑스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수양모이자 이모인 앙리부인의 금지령으로 리옹에 살았던 18년 동안 한국말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말뿐만 아니라 한국 의상, 한국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넌 인젠 코리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야. 아빠는 프랑스인 신부이시고 엄마는 앙리부인이며 네 이름은 줄리아야.”
한국말을 한마디만 해도 그날 급식은 단절되었고 24시간 방구석에 꿇어앉은 채 나는 프랑스인이다. 내 이름은 줄리아다 라는 말을 수백, 수천 번 반복하는 혹독한 체벌을 받아야만 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는 한국말을 되뇌면서 앙리부인의 부당한 강요에 항의했다. 동자스님이 윤미를 문 독사를 때려잡았다고 승행僧行범죄로 인정되어 법당부처님 앞에 3000배의 참배를 드리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기만 할뿐 도와줄 수도 없었던 그때의 안타까웠던 심정, 회색 승복이 땀에 흠씬 젖고 굵은 땀발에 눈도 뜨지 못했지만 계율을 어긴 죄로 연신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며 절을 하는 사미승 인당스님이 가엾었다.
“인젠 그만해. 누가 지키는 사람도 없잖아.”
보다 못해 제지도 해보았지만 스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스님의 두 무릎과 팔꿈치는 벗겨져 피가 났고 이마는 퍼렇게 멍들어있었지만 주지스님에 대한 원망 한마디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깊은 불심에 윤미는 감동되었었다. 그렇게 스님을 생각하며 다리가 저려나는 것도 허기와 현기증이 발작하는 것도 이를 악물고 참아냈었다. 입으로는 프랑스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곤 했다. 나중에야 미술공부를 구실로 파리로 도망쳐오긴 했지만 염탐꾼인 드뇌브에 의해 앙리부인의 금지령은 아직도 유효기간이었다.
“절 부르셨습니까?”
남자는 몸을 돌이키더니 의아한 시선을 윤미에게 던진다. 뜻밖에도 남자의 입에서 튕겨 나온 말은 한국말이 아닌 프랑스어였다. 그러나 윤미는 억양이나 어법의 혼란에서 그가 프랑스어에 서툰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국에서 오셨죠?”
“제가 코리언으로 보입니까?”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의 프랑스어표현은 광대 문외한이 줄타기하듯, 어린애가 얼음 위를 지치듯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네.”
“뭘 보고요?”
“그냥요. 말씨며 외모며 분위기며 어디나 다요.”
이제 그녀도 한국말의 빈약함을 느끼며 어려운 표현은 프랑스어로 대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능한데까지는 한국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검은 머리, 황색 피부, 동그란 코에 프랑스어는 늘 탈을 쓰고 얼굴을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한국말을 구술하는 순간 그녀는 상실되었던 정체성의 복구감에 도취되며 가슴까지 설렌다. 코리언은 한국말을 해야 코리언답다. 앙리부인에게서, 매장되었던 모국어를 실컷 해보고 싶었다. 큰어머니와 그랬듯이 인당동자스님과 그랬듯이 애써 곰팡이 낀 옛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러나 그 흔적들은 오랜 세월동안 버려져있어 녹 쓸고 부식되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퇴색해있었다. 정말이지 오늘 이 자리에서까지 우리말을 못하면 조카를 프랑스인으로 환골탈태시키려는 앙리부인의 계책으로 영영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데 남자는 웬일인지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는 아가씨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연히 코리언이죠.”
무슨 영문으로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는지 윤미도 모른다. 한국말을 모르는 코리언이라서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감격으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코리언인데 한국말이 그렇게 서툽니까. 완전히 프랑스식인데요. 혹시……”
보일 듯 말 듯 얼굴을 스쳐가는 찰나의 조소는 윤미의 가슴을 가시처럼 찌르며 박혀들었다.
혼혈아!
그런 표정이다. 오해를 해소하고 순수한 코리언혈통이라는 걸 밝히고 싶었지만 거기엔 슬픈 사연이 있었기에 혀끝까지 흘러나온 말을 삼켜버렸다. 아직은 이름도 모르는 초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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