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을 만나다 1
[에크리]를 통해 라캉을 만난다
라캉은 정신분석가였다
글쓴이: 한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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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리]가 나를 낙담시키는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책이라는 점이다. 지난 팔년 동안 줄곧 정신분석학에 관한 책들을 읽어왔기에 나의 낙담은 절망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에고심리학(하르트만과 에릭슨)과 대상관계이론(클라인과 위니캇)과 자기심리학(코핫)과 분석심리학(융) 등의 책들을 읽었는데도 라캉의 [에크리]를 해독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솔직하게 말하면 거의 불가능하다.) 도대체 이 어려움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영미에서 일반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지식들은 라캉을 이해하는 데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프로이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별 소용이 없다. 당연히 칸트나 헤겔이나 하이데거 등을 읽어도 [에크리]를 해독하는 일이 수월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무엇에 의지하여 [에크리]를 이해할 것인가? [에크리]를 두 번 통독한 후에 내린 결론은 이해가 될 때까지 [에크리]를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에크리]를 이해할 목적이라면 라캉이 권고하더라도 절대 아우구스티누스나 칸트나 헤겔 등을 읽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프로이트 마저도 매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라캉만 프로이트를 읽은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를 읽다 보면 라캉보다는 에고심리학에 도달할 확률이 매우 높다. [에크리] 읽기에 도움을 얻을까 해서 칸트나 헤겔을 읽었다가는 무저갱에 빠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오직 [에크리]를 해독하는 정도에 따라 라캉의 눈으로 파악한 프로이트 칸트 헤겔 등을 만난다. [에크리]의 사유를 확보하지 않은 채 칸트를 읽은 후에는 십중 팔구 라캉이 헛소리를 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에크리]를 읽는 것이 라캉을 아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즉각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은 [에크리]가 그만한 시간을 들여 읽을 만큼 중요한 책인가 하는 점이다. 라캉에 밥벌이가 달렸거나 그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들은 백 번이라도 읽거나 읽어야 할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 나는 이 지점에서 고민중이다.
두 번의 통독에서 내가 어렴풋하게 얻은 몇 가지 포인트들을 나누고 싶다.
첫째, 라캉은 평생을 정신분석에 몸바친 사람이다. 무엇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가에 따라 실존을 규정할 수 있다면 라캉은 직접 내담자들을 상담한 정신분석가였다. 이 점은 [에크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라캉은 철학자도 심리학자도 비평가도 작가도 아니었고 (정신의) 의사였다. 그의 삶은 광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이해하고 치료하는데 바쳐졌다. 그의 사유는 정신분석가로서의 경험에서 흘러나온다.
지젝은 분석을 받고 정신분석가의 자격을 획득했지만 그는 정치철학에 헌신하고 있다. 라캉과 지젝은 궁극의 관심이 다르다. 지젝이 읽는 라캉은 지젝의 눈으로 해석된 라캉이고 [에크리]의 라캉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미 지젝에 매료된 사람이 굳이 [에크리]를 읽을 이유가 있을까? [에크리]를 읽는다고 지젝처럼 생산적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에크리]를 읽으려면 라캉이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라캉은 무엇보다도 정신분석가이다. 그래서 [에크리]의 처음에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분석을 실은 것은 라캉의 잘못이다. 마치 라캉이 문학비평가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사유를 응용하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에크리]를 읽으려는 사람은 그가 정신분석가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미 유명해져서 내담자를 볼 필요가 없을 때에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상담을 하면서 보냈다. 라캉이 남긴 세미나들을 정리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밀레르가 라캉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미심쩍다.
어쩌면 나에게 [에크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은 내가 정신분석가로서 직접 내담자들을 만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밤이 새고 나면 어김없이 이런 저런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일용할 양식을 얻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라면 [에크리]는 단순한 책이기를 멈추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매뉴얼이 될 것이다. [에크리]에 실린 논문들은 이러한 관심과 요구에서 탄생한 것이다.
출처: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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