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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연재 9

by 8866 2007. 12. 14.

 

 

 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교향곡과 말티즈 그리고 철민이 A

 

 연재 9

 

 그렇다면 사람은 대상을 주어진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란 말인가. 어둠 속에서 바위나 고목은 귀신이나 도깨비로 보이고 길가의 행인이 연인으로 보이는 이런 현상은 『착각』이라는 말로 단순하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은 곧 보고 싶은 것이라는 욕망에 대한 시각의 예속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시각의 지배자가 욕망이라 할 때 주체는 대상을 욕망하는 한계만큼만 한계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KBS『퀴즈탐험』프로그램에서 새끼표범「진이」의 생활을 보여준 후 게스트들에게 표범의 무늬를 알아 맞추는 문제를 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2분여동안이나 표범을 본 게스트 4명중 한명만「꽃무늬」임을 마쳤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이게 웬 일인가?
 게스트들이 본 것은 표범인데 표범의 무늬를 보지 못하다니? 「꽃무늬」라고 정답을 맞힌 게스트도 금방 본 자료화면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친구 집에서 본 표범가죽에 근거하여 추측한 것이었다. 그들은 더구나 퀴즈를 맞히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여 화면의 세절까지 놓치지 않고 관찰했을 텐데도 이런 불확실성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명진이도 그 장면을 TV로 시청했지만 표범의 무늬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표범「진이」가 사자새끼를 하이에나의 공격에서 지켜주려고 하던 감동적인 장면들만 기억 속에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모성애는 짐승이라고 해서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여자가 현주라고?”
 “현주가 아닌가요?”
 “뭘 보고 현주 씨라는 거야. 이목구비도 없이 그냥 몇 개의 곡선과 점에 불과하잖아.”
 “분위기가 현주잖아요. 냉담하고 쌀쌀맞고 조각상 같고 그림 같고.”
 “분위기?!”
 아내가 그림에서 느낀 건 분위기란다.
 “분위기만 보고 어떻게 현주 씨라고 단정할 수 있어. 전혀 모호하고 불확실한데 말이야.”
 “그러니까 확실함을 추측하는 거 아니에요. 확실하고 완벽하다면 추측할 이유조차 없잖아요.”
 불확실함과 모호는 확실함에로 통하는 필연적인 교량橋梁이라는 뜻인가. 아내는 무언가 확실함을 찾아서 불확실한, 분위기만 느낄 수 있는 음악에 도취한 것인가. 그렇다면 말티즈는 왜 기르는가? 말티즈에게도 불확실한 것이 있는가.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름을 짓지 못한 추상석을 애석으로 생각한다는 현주에게도 아내와 비슷한 감정이 있을까? 확실한 것은 불확실함 속에 은폐해있으면서 그것을 발굴하기 위한 음악 감상과 미술 감상의 가능성을 창출해내며 예술작품은 또 그 때문에 의미를 가지고…
 “전혀 근거 없는 소리하지 마.”
 “함께 갔던 거죠? 제가 뭐라 하지 않을 거니까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선후배지간에 커피 한잔 나누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어서요.”
 아내는 사교장소나 밖에서 보이던 그 성숙 미와 지적풍도와 반듯한 교양미를 어디에다 다 팽개치고 이렇듯 구질구질하고 천박한 주부로 변해버렸을까.
 “글쎄 그런 일은 없었다니까. 나 피곤해. 얼른 씻고 저녁식사나 해야지.”
 더 이상 옥신각신할 가치가 없는 화제라고 생각한 그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했다. 스케치북을 들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현주 씨와 추상석 그리고 아내가 발견해 낸 그림 속의 현주 씨…
 두통이 극심하게 발작했다. 그는 늘 휴대하고 다니는 두통약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몇 개의 곡선과 점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발견한 아내의 관찰력을 비범하다고 봐야할 지 병적이라고 봐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는다. 연구실에서 존 컨스터블의 그림에 빠져 온갖 불확실한 이미지를, 화가의 관찰에서 소외된 이미지들을 찾아 헤맸던 자신의 행위나 형체나 모호한 추상석 이름 짓기에 골몰하는 현주 씨의 집념이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확신하고 싶어 한다.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오자 아내는 벌써 깨끗하게 씻어 건조시킨 속옷을 차곡차곡 개어서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새 옷을 갈아입으니 거뿐하고 개운했다.
 주방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그가 좋아하는 곱창전골도 올라있다.
 온종일 자기 방에서 컴퓨터게임에 빠져있던 아들 철민이는 식사시간이 되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말티즈의 자리는 가장 따뜻하고 평온한 최상의 자리, 아내의 품이었다. 남편인 명진이도 그 품을 밤이 되어서야 그것도 한달에 몇 번씩밖에 차지하지 못하지만 말티즈는 하루 24시간 점유하고 있다. 자기만의 품을 빼앗아간  말티즈가 그래서 영문 없이 미운지도 모르겠다. 그냥 보기만 해도 구둣발로 복부를 짓밟아 놓고 싶다. 종일 브래지어도 착용하지 않은 아내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꼼지락거릴 그 가는 연적의 발목을 분질러 놓고도 싶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명진에게는 그런 용기조차 없었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 순응할 뿐이었다.
 밥상에 마주앉아 수저를 들던 아들 철민이가 느닷없는 질문을 던져오는 바람에 명진은 입으로 옮겨가던, 국물이 담긴 숟가락을 허공중에 멈춰버렸다.
 “아빠, 높은 산 너머엔 뭐가 있지?”
 적당한 대답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떠오르는 대답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천박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산 너머엔 또 강물과 들판과 마을이 있지. 우리처럼 사람들이 살고 있단다.
 이런 대답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아들의 질문보다는, 식사보다는, 말티즈와의 장난에 정신이 팔린 아내도, 은백색의 우아한 털을 손으로 쓰다듬고 석탄덩이 같이 까만 코와 입에 입을 맞추며 사랑에 흠뻑 도취된 아내도 별 생각 없이 유창하게 답할 수 있는 답이었다.
 철민이 자신도 그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애의 의문과 호기심은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럴진대 아버지로서 교수로서 명진의 대답은 반드시 철민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어야 할 임무가 생긴다.
 그도 어렸을 때는 늘 마을 앞산을 쳐다보며 그 산 너머에 뭐가 있을까 궁금했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를 따라 그 산 너머로 가보았을 때 명진은 그처럼 평범한, 너무 많이 보아온 풍경에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그의 앞을 막아선 산은 그에게 또 다른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었다.
 설마 아들 철민이가 시각의 한계에 대해 벌써 의문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철학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어린애가 철학적의문과 사고를 진행할 리는 없다.
 그 애의 물음은 그날 마로니에공원에서 보았던 죽은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준다. 신문에 가리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커피를 받아들고 마시는 동작 역시 신문에 가려져 그 분위기만 느꼈을 뿐 확실한 것은 포착하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깨닫고 명진은 놀랐다. 그 신문 한 장이 거대한 산줄기 같은 역할이라도 한 것일까.
 “글쎄다. 뭐라고 말해줘야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교수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처음부터 대답 같은 건 기대하지 않은 모양 온정신을 맛있는 곱창전골을 먹는 데만 쏟아 붓고 있었다. 젖살이 도톰하고 토실토실한 그 애의 볼따구니에 기름이 번지르르하게 발려있었다.
 어쩌면 그 답을 철민은 벌써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을 넘어가 보면 그만이 아닌가.
 이렇게 간단하다고.
 의문이란 의문일 때만 신비로운 것이지 풀리고 나면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고. 의문은 누구 말을 듣고서 해소되기보다는 체험을 통해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들어야 확실하게 풀린다는 이치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진이도 모든 사유를 포기하고 식사에만 열중하기도 했다.
 밑반찬이 수두룩하게 깔린 식탁에서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하나 곱창요리뿐이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도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았고 말티즈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에서 명진은 단지 곱창요리만을 맹렬하게 정복해 나갔다.
 “어때요. 미나리가 맛있죠? 싱싱해서 사왔어요.”
 아내가 무심중 던져오는 말에 명진은 전골 속에 미나리가 들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아내가 음악을 감상하듯이 그도 느긋한 곱창 맛만 알고 먹어왔었다. 그와 아들 철민은 곱창을 좋아했지만 아내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싫어했다. 남편과 아들을 위해 기름진 음식을 만들 때면 늘 그릇에 야채만 골라내어 먹곤 했다.
 “쑥갓이나 버섯도 좀 드셔보세요. 맛이 담백하고 좋아요.”
 미나리, 쑥갓. 버섯…
 먹고 싶은 음식물의 맛만 음미할 수 있다는 건 선호하는 음식물만을 먹는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물은 먹으면서도 맛을 모른다.
 “그 외에 여기 또 뭐가 들어갔지?”
 “두부, 배추, 마늘, 파…”
 미나리, 쑥갓, 버섯, 두부, 배추, 마늘, 파, 기름, 간장, 소금, 미원…
 그 모든 맛을 일일이 식별하여 음미하지 못한 내가 그 모든 악기들의 소리를 분별하며 감상하지 못한 아내와 뭐가 다르랴. 그냥 곱창전골이니 곱창 맛으로만 먹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곱창이 주성분인 곱창전골에서도 부성분인 미나리와 쑥갓을 더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버섯이며 미나리며 쑥갓이 입안에서 저마다의 맛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만이라도 좋으니 곱창 맛이 아닌 야채만을 음미하기로 신경을 썼다.
 그러나 그는 야채 맛에 미각기능을 이동시키자마자 아까 음악 감상 때와 똑같은 현상을 발견했다. 곱창 맛을 잊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종합적인 맛을 느끼려고 하니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시원하다함은 곱창이 우러난 맛이고 얼큰하다함은 고춧가루 맛이고 구수하다함은 쑥갓 맛이고 담백하다함은 미나리 맛이니 그것을 합친 맛은 유니슨연주시의 교향곡과도 같이 모호한 분위기와 불확실한 느낌일 뿐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그중에서 각자의 취미에 따라 한두 가지 선율이나 악기 그리고 맛을 느끼게 될 때 비로소 맛의 진미를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진미는 필연코 다른 한 맛의 소외를 전제로 해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내는 미나리나 쑥갓 맛을 곱창전골의 진 맛으로 명진은 미나리나 쑥갓 맛이 배제된 곱창 맛을 곱창전골의 진 맛으로 알고 있듯이 말이다.
 그윽한 눈길로 말티즈를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은 세련된 성숙 미와 균형미, 숙녀들의 우아한 교양미가 햇빛처럼 흐른다. 저렇듯 완벽한 미모가 미소 한번에 산산조각 난다는 일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현주의 미소는 도리어 그녀의 미모를 더 빛내주지 않는가.
 식사가 끝나자 아내는 또 그림에 대해 의문을 들고 나왔다.
 “앉아. 아가야, 앉으라고 했잖아…그림의 여자가 현주가 맞죠?”
 말티즈를 훈련시키며 아내는 잠시 묻어두었던 화제에 다시 의문의 보습을 박는다.
 홍현주와 아내 이영희는 친구를 넘어 절친한 의자매 사이었는데 어쩌다가 서로를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사이가 된 거지?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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