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1년 8월25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바치니,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었다.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전문은 이러하였다.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보아 법으로 삼고 뒷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 대개 이미 지나간 흥망(興亡)의 자취는 실로 오는
장래의 권계(勸戒)가 되므로 이에 편간(編簡)을 엮어 감히 임금[冕旒]께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왕씨(王氏)가 처음 일어난
것은 저 태봉(泰封)으로 부터 굴기(짉起)하여서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후백제(後百濟)를 멸하고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한 집안을
이룩하였으며, 요(遼)나라를 버리고 당(唐)나라를 섬겨서 중국을 높이 받들어 동토(東土)를 보전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번거롭고 가혹한 정치를 개혁하고, 크고도 원대(遠大)한 법규를 크게 넓혔습니다. 광종(光宗)이 친히 임헌(臨軒)하여 선비들을 시험하여
뽑으니, 유학(儒學)의 기풍이 점차 일어났고, 성종(成宗)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니 왕가로서 다스리는 기구(器具)가 갖추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종[宣讓]이 왕위에서 실각하자 국운이 거의 기울 뻔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현종(顯宗)이 중흥(中興)의 공을 이루니 나라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문종(文宗)이 태평한 정치를 여니 인민과 만물이 함께 평화를 누렸습니다.
후사(後嗣)들이 혼미(昏迷)하게 되자,
권신(權臣)들의 독단과 방자함이 있었습니다. 군병으로 포위하여 임금 자리[神器]를 엿본 것이 처음 인종(仁宗)때 그 시초를 보이더니,
역모(逆謀)를 꾀하여 임금의 권한이 아래 사람에게 있었던 일[倒太阿]이 의종(毅宗)이 재위하던 때에 마침내 일어났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거간(巨姦)들이 번갈아 선동하여 임금을 마치 바둑이나 장
기를 두듯이 세우니, 강한 외적들이 번갈아 침범하여 백성들을 마치 풀잎을 베듯이
죽이었습니다. 원종[孝順]이 위태로왔던 큰 국난을 평정하여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보전하였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은
놀이와 잔치에서 뭇 계집을 가까이 하다가 마침내 부자(父子) 사이의 혐의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또 충숙왕(忠肅王) 이래로 공민왕(恭愍王)대에
이르기까지 변고가 여러 번 일어나 나라의 쇠퇴가 더욱 깊어가더니, 그 근본이 위조(僞朝) 때에 다시 한 번 찌그러져, 역수(歷數)가 마침내
진주(眞主)에게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그 용맹과 지혜를 하늘이 주시어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와 갔습니다. 이에 그 성무(聖武)를 널리 펴서 수많은 간난(艱難)을 헤치시고 능히 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정부(貞符)를 잡으시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시어 한 국가를 창건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고려(高麗)의 사직(社稷)이 비록 이미 구허(丘墟)로 돌아갔지만
그 역사는 인몰(湮沒)하게 할 수 없다 하시고, 사씨(史氏)에게 명하사 《통감(通鑑)》의 편년체(編年體)를 본따서 편찬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태종(太宗)께서 계승하게 되자, 이를 재상(宰相)에게 말하시어서 수교(?校)하게 하였는데, 지은 사람은 하나둘이 아니었으나 책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선왕의 모유(謀猷)를 그대로 따라서 문화(文化)를 크게
선양(宣揚)하시어 역사를 수찬(修撰)하면 모름지기 해박(該博)하게 갖추기를 요한다 하시고, 다시 국(局)을 열고 재차 엮어서 가다듬게 하였으나,
아직도 기차(紀次)의 정(精)하지 못하고 또 빠진 것도 많은데, 하물며 편년(編年)은 기(紀)·전(傳)·표(表)·지(志)와 달라서 사실을
서술(픊述)하는 데 그 본말(本末)과 시종(始終)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에 용렬(庸劣)하고 우매(愚昧)한 신(臣)들에게
명하시어 찬술(纂述)을 맡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
범례(凡例)는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법 받았으며,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모조리 성재(聖裁)에
품신(稟申)하였습니다. 본기(本紀)를 피하고 세가(世家)로 한 것은 명분(名分)의 중함을 보인 것이요, 위조(僞朝)의
신씨(辛氏)를 낮추어 열전(列傳)에 넣은 것은 참절(僭竊)에 대한 형벌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 충녕(忠쨻)과 사정(邪正)을 유(類)별로 나누고,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을 유(類)대로 모으니, 통기(統紀)도 문란하지 않고 연대(年代)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사적(事迹)은 상세하게
밝히기를 다하려고 힘썼고 궐류(闕謬)된 부분은 반드시 보완(補完)하고 교정(校正)하도록 하였습니다. 슬프다! 옥서(玉署)에서 연참(鉛暫)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세종께서는> 홀연히 승하(昇遐)하시였습니다.[鼎湖弓劍之忽遺] 신(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려, 머리를 조아려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그 원대한 계책을 이어받으시어 큰 공렬(功烈)을 더욱 빛나게
하셨습니다. 유정 유일(惟精惟一)하시어 성학(聖學)이 그 고명(高明)을 극(極)하셨고, 비현 비승(丕顯丕承)하시어 효도(孝道)의 지극하심이 그
계술(繼述)에서 나타났습니다. 전대의 일이 아직 성취하지 못함을 생각하시어 미신(微臣)으로 하여금 이를 책임지고 이루도록 하시니, 신 등이
다같이 천박한 재질로서 와람하게도 융중(隆重)하신 부탁을 받고, 혹은 패관(稗官)의 잡록(雜錄)을 채택하기도 하고,
비부(秘府)의 고장(故藏)을 들추어서 3년간 노고를 다하여 드디어 일대(一代)의 역사(歷史)를 완성하였습니다. 이에서
전대(前代)의 남긴 자취를 상고한다면, 겨우 필삭(筆削)의 공정함만이 있을 뿐이나, 후인에게 밝은 귀감(龜鑑)을 보이어서 그 선악(善惡)의
실상을 잃지 않도록 기(期)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를 편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경들과 같이 속히 이룬 적은 아직 없었다. 이와 같은 큰 전적(典籍)을 수년이 안되어 잘 지어서 바치니, 내가 대단히 가상히
여긴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음식을 내려 주고 인하여 김종서 등에게 말하기를, “춘추관(春秋館)의
일은 이미 끝났는가?” 하니, 김종서 등이 아뢰기를, “이는 전사(全史)입니다. 그 번거로운 글을 줄이어 편년(編年)으로
사실을 기록한다면 읽어보기가 거의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속히 편찬토록 하라.”
하였다.
【문종1년 8월30일】 이보다 앞서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이 전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여 물품을 하사한 교서(敎書)를 가지고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를 편수하고 상(賞)을 내려
표창하는 것은 전에도 이런 예가 있었고, 또 역대(歷代)를 통하여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고려사》의 편수를 마치어 바쳤으니, 빌건대,
성상(聖上)께서 재결(裁決)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이계전에게 명하여 다시 전의 일들을 대내로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이계전이 아뢰기를,
“신(臣)이 삼가 《옥해(玉海)》를 상고하니, 정관(貞觀) 10년(636) 정월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방현령(房玄齡) 등이 주(周)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제(齊)나라·수(隋)나라의
《오사(五史)》를 편찬해
바치니, 계급을 올리고 차등을 두어 반사(頒賜)가 있었으며,
송(宋)나라 상부(祥符) 8년(1015)에 왕단(王旦) 등이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역사를 편찬하여 목록(目錄) 1권, 제기(帝紀) 6권, 지(志) 55권, 열전(列傳) 59권을 올리니, 우악(優渥)한
조서(詔書)를 내려 이에 답하고 왕단에게는 수사도 수사관(守司徒修史官)으로 올리고
조안인(趙安仁)·조형(晁逈)·진팽년(陳彭年)·하송(夏첞)·최준도(崔遵度) 등에게도 아울러 품질(品秩)을 올리고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왕흠약(王欽若)·진요수(陳堯첤)·양억(楊億)도 일찍이 그 편수에 참여(參與)한 바 있어 역시 물품을 하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마광(司馬光)에게 칙유(勅諭)를 내려 《자치통감》을 편수하게 하여 성사(成事)하였다.’
운운(云云)하고, ‘위로는 만주(晩周)로 부터 아래로는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발휘(發揮) 편집하여 일가(一家)의
체재를 이루었으며 그 포폄(褒貶)과 거취(去就)가 모두 의거(依據)한 바 있어 내가 살펴 열람하고 나서 진실로 깊이 가탄(嘉歎)하였다. 이제
경(卿)에게 은견대의(銀絹對衣)·요대(腰帶)·안마(鞍馬) 등을 별록(別錄)과 같이 하사하니, 이르거든 받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씨족대전(氏族大全)》은 원풍(元豊) 5년(1082)에 증공(曾鞏)이 이청신(李淸臣)·왕존(王存) 등과 더불어 역사를
편수한 것인데, 임금이 친히 중서성(中書省)에 조서(詔書)하기를, ‘《오조사(五朝史)》는 마땅히 증공에게 맡길 것이다.’ 하여, 드디어
사관(史官)이 되어 편찬하였습니다. 책이 완성되니 임금이 용의(龍衣)·금대(金帶)를 하사하고 중서 사인(中書舍人)에
발탁시켰습니다.
우리 태조조(太祖朝) 때에 정도전(鄭道傳)에게 하사한 교서(敎書)를 살피니, ‘진상한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의 일은 살펴 잘 알았노라.’ 운운(云云)하고 ‘이제 경에게 내구마(內廐馬) 1필, 백은(白銀) 50냥(兩),
단자(段子) 1필(匹), 채견(綵絹) 1필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받기 바란다.’ 하였고, 세종조(世宗朝) 때 권제(權?) 등이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해 바쳐 당상(堂上)에 승진되고 하사물은 없었으며, 3품 이하의 문관(文官)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셨습니다.
《강목통감훈의(綱目通鑑訓義)》를 찬집(撰集)할 때, 신(臣) 이계전(李季甸) 및 김문(金汶) 등은 자급(資級)을 뛰어올라 제수되었고,
이사철(李思哲)·최항(崔恒) 등은 가자(加資)하였으며, 찬집을 마친 뒤에도 모두 다시 가자(加資)해 주셨습니다. 또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집할 때는 3품(三品) 이하의 문신에게 3차례나 가자(加資)가 있었습니다. 신이 보니, 역대의 여러 신하들이 역사를 닦아
올리면 혹은 두터운 은혜로써 조서(詔書)를 내려 답하기도 하고 혹은 물품을 하사하기도 하고 품질(品秩)을 승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서의 하사는 그 일이 헛된 문구(文具)에 치우치는 감이 있습니다. 앞서 본조(本朝)에서 궤장(?杖)을 하사할 때 으레
교서(敎書)를 내리시고 대신(大臣)은 사양하는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모두 교서와 비답(批答)으로만 하던 것을 세종 대왕께서 한갓
빈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이를 폐지하셨습니다. 이제 사책의 편수를 완성함에 있어 교서를 내리시는 일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중국에 들어가서 조칙(詔勅)을 받들어 오든가. 가뭄에 비를 빌어 비를 얻는 등의 한때의 작은 일들도
오히려 물품을 하사하여 포상하고 있는데, 더욱이 이 고려사는 그 편년법(編年法)을 고쳐 마사(馬史)의 체재를
본받아 세가(世家)·지(志)·표(表)·열전(列傳) 등 모두 1백여 권으로 하여 장차 이를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신은 아마도 포상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빌건대 당상관(堂上官) 이상은 성상께서 헤아려서 적당히 내리시고, 3품 이하는 가자(加資)를 하시고 그
당시에는 비록 춘추관(春秋館)에 사진(仕進)하지 않았더라도 오랫동안 편찬에 참여했던 자에게는 송조(宋朝)에 왕흠약(王欽若) 등이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포상을 시행한 고사(故事)에 의하여 그 노고에 보수(報酬)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채백(綵帛)의 하사는 지금 바야흐로 국상(國喪) 중이라 마땅치 않으니, 차등을 두어 안장과 말을 내리는 것이 온당할 것이고, 3품 이하는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고, 이내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공조 판서(工曹判書)
정인지(鄭麟趾)·우참찬(右參贊) 허후(許텓)·예문 제학(藝文提學) 이선제(李先齊) 등에게는 각각 안장 갖춘 말 1필(匹)씩을 하사하고,
부제학(副提學) 신석조(申碩祖)에게는 말 1필을 하사하고, 한성부 윤(漢城府尹) 김요(金켌)·대사헌(大司憲) 정창손(鄭昌孫)·부제학 최항(崔恒)
등도 일찍이 편수에 참여한 바 있었다고 하여 또한 각각 말 1필씩을 하사하였으며, 당시 편찬에 종사한 자와 일찍이 편찬에 참여하였던 3품 이하의
관원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을 더하게 하였다.
【문종1년 11월1일】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과 우부승지(右副承旨) 박중손(朴仲孫)을 인견하고 말하기를, “개국(開國)할 초기에
왕씨(王氏)를 참혹하게 대우한 일은 진실로 태조(太祖)의 본의(本意)가 아니고, 바로 그때의 모신(謀臣)들이 한 바인데, 태조께서 항상 몹시
애도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태종조(太宗祖)에 이르러 왕씨의 후예(後裔)로 왕걸우음[王巨乙于音]의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당시의 법사(法司)에서 극형(極刑)에 처하고자 하였으나, 태종께서 석방하여 주고 논하지 말도록 명하여 그로 하여금 생업(生業)에 편안하게
하였다. 선왕(先王)께서도 이 일을 생각
할 때마다 추도(追悼)하여 마지않으시고 항상, ‘왕씨(王氏)의 후손을 찾아내고자
한다.’고 말씀하셨다. 계해년과 갑자년 사이에는 더욱 간절히 진념(軫念)하셨으나, 다만 국가에 일이 많았음으로 인하여 시행하지 못한
것뿐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전대(前代)의 후손으로 왕가(王家)에 빈(賓)을 삼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義)라고 여긴다.
하물며 5백 년의 조업(祚業)을 가지고도 제사에 주인 없는 것이 옳겠느냐? 이제 조종(祖宗)의 뜻을 이어서 왕씨의 후예를 구하여 역대(歷代)로
빈(賓)을 삼았던 예에 의거하여 그 작위(爵位)를 높여 줌으로써 제사를 이어가게 하고자 하니, 집현전(集賢殿) 문학(文學)이
선비를 불러서 나의 뜻을 상세히 말해 주고 교서(敎書)를 지어 올리게 하라. 내가 전일에 이 일을 정부(政府)에 의논하였는데, 정부에서도 옳게
여겼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왕걸우음[王巨乙于音]의 옥사(獄事)를 내버려두고 묻지 아니하였는데, 뒤에 이를 칭송하는 말이
있었으며, 그 뒤에 또 왕씨가 나타난 일도 있었다.” 하니, 이계전이 대답하기를, “왕걸우음의 일은
국사(國史)에 실려 있어서 신도 또한 칭송한 말을 알고 있습니다. 왕씨의 후손을 보존하여 생업에 편안하게 한 것은 천하의 국가와 천지의
도량(度量)을 공변되게 하는 것이니, 바로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혁명(革命)하였으나 기(杞)나라와 송(宋)나라를 보존한 뜻입니다. 이것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낙천정기(樂天亭記)》의 말입니다. ‘뒷날에 왕씨가 나타났다.’는 일은 신이 아직 이 일을 알지 못하니 대단히 통탄하고
슬픕니다. 이제 교서를 내려서 시행하시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고, 이계전이 또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의 말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이 전자에 춘추관(春秋館)에 벼슬할 때 이미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고, 다음으로
《여사장편(麗史長編)》을 편찬하여 거의 이미 완성이 되었었으나 지금은 전임하여 의정(議政)이 되었으니, 춘추관에 벼슬하는 것을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에 의하여 춘추관(春秋館)에 출사(出仕)한 모신(謀臣)은 바로
정도전(鄭道傳)의 무리였다.” 하였다.
【문종2년 2월20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찬술(撰述)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바쳤으니, 전문(箋文)에
이르기를, “신(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진실로 황공(惶恐)하면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편년체(編年體)는 좌씨(左氏)에서 근본하였고, 기전체(紀傳體)는 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시작되었는데,
반고(班固) 이후에 역사를 쓰는 사람이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조술(祖述)하여 어김이 없는 것은 그 규모(規模)가
굉박(宏博)하고 저술이 해비(該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쓸데 없이 길어서 구명(究明)하기 어려운 걱정을 면할 수가
없으니, 이는 역사가(歷史家)의 서로가 장·단점(長短點)이 있어 한쪽만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려(高麗)는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나서, 웅무(雄武)로써 많은 악인을 제거하고 관대함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마침내 대업(大業)을 세워 후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교사(郊社)를 세우고, 장정(章程)을 정하고, 학교를 일으키고, 과거(科擧)를 설치하고, 중서성(中書省)을 두어
기무(機務)를 총령(總領)함으로써 체통(體統)이 매인 바가 있고,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주군(州郡)을 살핌으로써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감히
방사(放肆)하지 못하였으며, 부위(府?)의 제도로써 군대를 농민에게 소속시키는 법을 얻게 되고, 전시(田柴)의 등급[科]은 벼슬하는 사람에게
대대로 국록(國祿)을 주는 뜻이 있게 되어, 형벌과 정사가 시행되고 법식(法式)이 갖추어져서 중앙과 지방이 편안해지고 백성과 물질이
풍부해졌으니, 태평의 정치가 성대(盛大)하다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중대(中代) 이후에는 조선(祖先)의 유업(遺業)을 능히 계승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폐행(嬖幸)에게 미혹(迷惑)되고, 밖으로는 권간(權姦)에게 제어(制御)되었으며, 강적(强敵)이 번갈아 침범하여 전쟁이 많이 일어났으니,
점접 쇠퇴(衰頹)하여 가성(假姓)이 왕위(王位)를 절취(竊取)하는 지경에 이르러 왕씨(王氏)의 제사를 이미 혈식(血食)되지 못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이 반정(反正)했지마는 마침내 우매하고 나약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대개 하늘이 진주(眞主)를 낳아서 우리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써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맨 먼저
보신(輔臣)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찬수(纂修)하도록 하셨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또 틀린 점을
교정(校正)하도록 명하셨으나 마침내 성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는 신성(神聖)한 자질로써
문명(文明)의 교화를 밝혀서 신(臣) 등에게 명하여 요속(僚屬)을 선발하여 사국(史局)을 열고 편찬하되 전사(全史)를 먼저 편수(編修)하고 그
다음에 편년(編年)에 미치도록 하였으니, 신 등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명령을 받들어 감히 조금도 게으르지 못하였는데, 불행히도 글을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군신(群臣)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선왕(先王)의 뜻을 공손히 계승하여 신 등으로
하여금 일을 마치도록 하시니, 생각해 보건대 일찍이 선왕에게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거칠고 고루한 이유로써 굳이 사양할 수가 없습니다.
신미년 가을에 글이 완성되었는데, 이에 또 사적(事迹)이 세상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것과 제도가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을 모아서 번잡한 것은
제거하고 간략한 것만 취하고 연월(年月)을 표준하여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여 고열(考閱)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그런 후에 4백
75년의 32왕의 사실이 포괄(包括)되어 빠진 것이 없고 상세함과 간략함이 다 거론(擧論)됨으로써 역사가(歷史家)의 체재(體裁)가 비로소 대략
구비된 듯합니다. 비록 문사(文辭)가 비리(鄙俚)하고 기차(紀次)가 정밀(精密)하지 못하지마는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는 데에 있어서는 정치하는
방법에 조금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조촐한 연회의 여가에 때때로 살피고 관람하여서 옛 것을 상고하는 성덕(盛德)에 힘쓰고, 세상을 다스리는
대유(大猷)를 넓혀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그 은혜를 받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찬술(撰述)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2권을
삼가 전문(箋文)에 따라 아룁니다.” 하였다. 김종서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의 역사도 오히려
구해 보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의 역사이겠습니까? 대신(大臣)들이 자못 구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마땅히 빨리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頒布)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본사(本史)가 비록 사적(事迹)은 상세하지
못하지마는, 이를 버리면 다른 데는 상고할 글이 없습니다. 혹시 빨리 인쇄하지 않는다면 벌레가 먹어 파손(破損)될까
두려우니, 또한 마땅히 빨리 인쇄하여 여러 사고(史庫)에 간수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사란 것은 후세(後世)에 보여서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숨겨서는 안되니, 마땅히 인쇄하여 이를
반포(頒布)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하니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찬술(撰述)하도록 했는데, 정도전이 관장(管掌)하는 사무가 많아서 이 일은 요속(僚屬)에게 맡겼으나, 이로 말미암아
빠져나간 부분이 매우 많았었다.
태종(太宗)은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대조 교정(校正)하도록 했으며, 세종(世宗)은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쳐 찬술(撰述)하도록 했으니, 정도전의 초고(草藁)에 비하면 조금 상세한 편이었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김효정(金孝貞)이 말하기를, “윤회(尹淮)가 찬술(撰述)한 것에 또한 빠지고 간략히 한 실수가 있으니 후세에 전해
보일 수 없습니다.” 하니, 이에 권제(權?)에게 명하여 이를 찬술(撰述)하도록 하였다.
권제(權?)가 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과 더불어 찬록(撰錄)·부집(쯖集)한 것은 이가(二家)보다는 상세한 편이었지만,
그 좋아하고 미워함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필삭(筆削)이 공정(公正)하지 못하였다. 일이 발각나게 되니,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정인지(鄭麟趾) 등과 더불어 이를 찬술(撰述)하도록 하였다. 김종서 등은 편년체(編年體)는 상세히 구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 기전체(紀傳體)의 법에 의거하여 과(科)를 나누어 완성을 책임지워,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 등으로 하여금 열전(列傳)을 찬술(撰述)하도록 하고,
노숙동(盧叔仝)·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이예(李芮)·윤기견(尹起죻)·윤자운(尹子雲) 등으로 하여금 기(紀)·지(志)·연표(年表)를
나누어 찬술(撰述)하도록 하고는, 김종서가 정인지·허후(許텓)·김조(金켌)·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신석조(辛碩祖) 등과 더불어 이를
산삭(刪削) 윤색(潤色)하였다.
이때 권제(權?)·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이 새로 중죄(重罪)를 얻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모두 몸을 움츠려서 산삭(刪削)하지 못했으므로, 자못 번란(煩亂)하고 용장(冗長)한 곳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歷史家)의 체례(體例)가 비로소 구비되었으므로, 이때에 와서 그 간절하고 요긴한 것만 모아서 사략(史略)을 찬술(撰述)하여
바치었다.
【문종2년 4월11일】 안지(安止)의 고신(告身)을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안지는
권제(權?)와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찬수(撰修)하면서 마음 내키는대로 사실을 감삭(減削)했던 이유로써 죄를 얻었지마는, 그러나 권제의
제재(制裁)를 받았으므로 안지의 스스로 한 짓은 아니었다. 그 외손(外孫)이 일찍이 신문고(申聞鼓)를 치고 진소(陳訴)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말하기를, “안지(安止)의 성품이 옹졸하나 정직하니, 선왕(先王)께서 죄를 가(加)하지 않는 것은
그가 권제(權?)의 꾀속에 빠져서 능히 중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그제야 고신(告身)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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