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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고려사도 위서이다

by 8866 2007. 3. 30.

 【단종즉위년 11월28일】 춘추관(春秋館)에서 《고려사(高麗史)》를 인쇄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
 【단종1년 7월22일】 시강관(侍講官) 성삼문(成三問)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반사(頒賜)할 것을 명하셨다 하는 바, 반사기(頒賜記)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데, 어제 반사기를 환수(還收)하여 50여인을 삭제했다 합니다. 이 책은 태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세종조에 일이 끝났는데,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찍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책에 오찬(誤撰)이 있어 드디어 고칠 것을 명하여서 근일에 책이 완성되었으니, 전날 사사로이 종이를 바친 사람은 다 반사(頒賜)를 받을 만하여, 비록 한 사람이라도 속일 수가 없는데 하물며 50여 인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겠습니까? 세종 때에 있어서는 모든 책을 반드시 널리 배포(配布)하고, 진실로 부족함이 있으면 비록 내장(內藏)할 것이라도 반드시 모두 반사(頒賜)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책이 부족하다면 다시 명하여 더 찍어서 널리 배포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단종1년 7월22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54질(秩)을 집현전(集賢殿)에 내려 소장(所藏)하게 하였다.
 【단종1년 12월28】 남형(南亨)이 상서하기를,  신의 아비 남수문(南秀文)이 고려
사[前朝史]를 잘못 지어서 일찍이 고신(告身)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찬성(贊成) 권제(權?)와 대제학(大提學) 안지(安止)는 죄가 신의 아비와 똑 같은 처분을 받았는데, 모두 다 고신을 돌려 받았사오니, 빌건대 아울러 돌려주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단종2년 10월13일】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의 의논을 아뢰기를,
 “《고려전사(高麗全史)》는 사람들의 시비(是非)·득실(得失)이 역력(歷歷)히 다 갖추 기재(記載)되었으므로,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가 《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出刊)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是非)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內府)에만 간직하였습니다. 우리 동방(東方) 만세(萬世)에 법(法)받을 만하고 경계가 될 만한 책은
《고려사(高麗史)》와 같은 것이 없으니, 청컨대 《고려전사》를 인간(印刊)하여 널리 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4년 9월12일】 임금이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게 하였다. 임금이 우리 나라의 서기(書記)가 탈락(脫落)되어 완전하지 못하므로,
삼국사(三國史)와 고려사(高麗史)를 합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쓰고자 하여,
여러 서적을 널리 취(取)하여 해마다[逐年] 그 아래에 모아 써 넣게 하였다
.

 

 【예종1년 6월29일】 공조 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하였는데,
 1. 《고려사(高麗史)》를 반포하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고려사》는 전조(前朝)의 치란(治亂)을 기록하여 후세(後世)의 권징(勸懲)이 되는 것이므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역란(逆亂)의 일이 있다면 소위 역란하는 자는 역대(歷代)의 역사가 모두 있는 것이니, 어찌 홀로 전조의 역사에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참칭(僭稱)한 일이 있다면 전조의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하나로 통일하고 개원(改元)하여서 종실(宗室)을 칭하였고, 금(金)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황제(皇帝)로 삼았고, 고황제(高皇帝)는 스스로 성교(聲敎)가 있다고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참칭하는 데에 혐의가 되겠습니까? 소위 번국(蕃國)이라고 하는 것은 기내(畿內)의 제후(諸侯)와는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만약 근대(近代)의 일이 있어서 유전(流傳)할 수 없다면, 지금 명(明)나라도 《원사(元史)》를 행하니, 어찌 그 이목(耳目)이 미칠 것을 헤아리겠습니까? 만약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삭제하고서 행하면 가할 것입니다. 비단 지경 안에서만 행할 것이 아니라 《사략(史略)》과 같이 중국에 전하거나 일본에 전해도 또한 좋겠습니다.  이는 비단 일시의 계책이 아니고 만세의 무궁한 계책이 되는 것이니, 빌건대 우리 나라에서 찬술한 여러 서적 가운데 부득이한 비밀 문서(찅密文書) 외에 《고려전사(高麗全史)》와 같은 것은 옛날대로 전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성종3년 4월16일】 신은 행 부사정(行副司正) 신(臣) 홍경손(洪敬孫)과 행 부호군(行副護軍) 신(臣) 조지(趙祉)와 행 성균관 사성(行成均館司成) 신(臣) 민정(閔貞) 등과 더불어 침식(寢食)도 폐하다시피 하고 의사(意思)를 짜내어서, 서산(西山)의 40권(卷)의 번문(煩文)을 깎아내어 감히 유인(游刃)을 시험하였고, 《고려사(高麗史)》 5백 년의 유적(遺迹)을 보태어 겁없이 속초(續貂)를 하였습니다. 버리고 취하고 한 것이 아주 망령된 짓이어서 참람한 죄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 두려우나, 어리석다고 하여 그의 지혜조차 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가 존재함은 곧 사도(師道)가 존재함이온데, 어찌 감히 아름다움을 약탈하는 것으로 공(功)을 삼아, 남이 지닌 재주를 자기가 지닌 것처럼 하겠습니까? 지금 신등이 찬술한 책자를 《대학연의집략》이라 이름하고, 감히 ‘평생(平生)의 정력(精力)을 이 1부(部)의 편찬에 다 바쳤다.’고 여기니, 혹시 한가하신 겨를에 때때로 관람하시면, 선악(善惡)의 자취를 뚜렷이 상고할 수 있게 되어, 오직 선(善)을 주장하는 자는 군사(君師)가 될 것이고, 치란(治亂)의 이유가 환히 징빙(徵憑)할 수 있어, 반드시 치(治)와 더불어 도(道)를 같이하게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대학연의집략》 21권을 편찬하여 모두 10질(帙)을 만들어 삼가 구초(具草)하여 전문(箋文)을 받들어 아룁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곧 전교서(典校署)로 하여금 개간(開刊)하여 올리게 하고, 이석형에게 안장 갖춘 말[鞍具馬] 1필을 내려 주고, 홍경손과 조지·민정에게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내려 주었다.
 【성종13년 2월13일】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
   1.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춘추관(春秋館)에 1건(件)의 《고려사(高麗史)》가 있는데,
혹은 권초(權草)라 일컫고, 혹은 홍의초(紅衣草)라 일컫고, 혹은 전문(全文)이라 일컫습니다
. 세종 무진년에 주자소(鑄字所)에 내려 인쇄하여 낼적에 신에게 명령하여 감수(監修)하고 교정(校正)하게 했습니다만, 인쇄를 마치자 세종께서 《고려사》를 편수한 것이 공정(公正)하지 못했음을 들으시고 반포하기를 정지하였으며, 붓을 들었던 사신(史臣)들도 이 때문에 죄를 얻었습니다. 무인년에 이르러 세조께서 사정전(思政殿)에 거둥하였을 적에 신이 권남(權擥)과 더불어 입시(入侍)하여서 직접 이 문제를 아뢰고 명을 받아 본고(本稿)를 개정(改正)하고서 권남과 신의 이름을 서명(署名)하였는데, 지금도 참고가 됩니다. 위의 《고려사》는 실지로는 《고려사대전(高麗史大全)》이었으며 착오(錯誤)된 곳을 이제 개정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춘추관에 명령하여 본고(本稿)를 찾아서 전교서(典校署)에 내려 보내 인쇄하여 반포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리지(地理誌)》는 국가의 도적(圖籍)으로서 역대(歷代)에 모두 있었습니다. 송(宋)나라에는 《구역지(九域誌)》가 있었고, 명(明)나라에는 《일통지(一統誌)》가 있었습니다. 신이 세종 대왕 때에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誌)》를
찬수(撰修)하였었고, 세조 대왕 때에도 지도(地圖)와 지지(地誌)의 일을 명령받았었는데
, 예종 대왕이 즉위하여서는 편찬을 빨리 마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무자년 겨울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무술년 1월에 서책이 완성되어 진상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이를 인쇄하여서 관부(官府)에 수장(收藏)하여 주시면 군국(軍國)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서적을 깊이 수장하여서 만세(萬世)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전사(高麗全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본조(本朝) 역대의 《실록(實錄)》, 그리고 《총통등록(銃筒謄錄)》·《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훈민정음(訓民正音)》·《동국정운(東國正韻)》·《동국문감(東國文鑑)》·《동문선(東文選)》·《삼한귀감(三韓龜鑑)》·《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승문등록(承文謄錄)》·《경국대전(經國大典)》·《경외호적(京外戶籍)》·《경외군적(京外軍籍)》과 제도(諸道)의 전적(田籍)·공안(貢案)·횡간(橫看), 그리고 제사(諸司)·제읍(諸邑)의 노비(奴婢)에 대한 정안(正案)·속안(續案) 등을 각각 네 건(件)씩 갖추게 하는 외에 세 곳의 사고(史庫)에 있는 긴요하지 않은 잡서(雜書)들까지 모두 다 인쇄하게 하며, 또한 긴요한 서적들은 춘추관과 세 곳의 사고에 각기 한 건씩 수장하여 길이 만세(萬世)에까지 전하게 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도(地圖)는 관부(官府)에 보관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또 민간(民間)에 흩어져 있게 하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지도에는
고려의 중엽 이전에는 오도양계도(五道兩界圖)가 있었고,
아조(我朝)의 처음에는 이회(李?)의 팔도도(八道圖)가 있었으며, 세종조에는 정척(鄭陟)의 팔도도(八道圖)와 양계(兩界)의 대도(大圖)·소도(小圖) 등이 있었고
, 세조조에는 신(臣)이 만들어서 진상한 팔도도(八道圖)와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의 삼읍도(三邑圖)가 있으며, 그리고 지금 신이 만들어서 진상하는 연변성자도(沿邊城子圖)·양계연변방수도(兩界沿邊防戍圖)·제주 삼읍도(濟州三邑圖)와 안철손(安哲孫)이 만든 연해 조운도(沿海漕運圖)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유소(魚有沼)가 만든 영안도 연변도(永安道沿邊圖)와 이순숙(李淳叔)이 만든 평안도 연변도(平安道沿邊圖)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삼도(下三道)의 감사영(監司營)에도 각기 도(圖)가 있습니다. 그리고 왜승(倭僧) 도안(道安)이 만든 일본·유구국도(日本琉球國圖)와 대명 천하도(大明天下圖)도 비단과 종이로 만든 족자(簇子)가 각기 하나씩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만든 지리지 안에는 팔도 주군도(八道州郡圖)·팔도 산천도(八道山川圖)·팔도 각일 양계도(八道各一兩界圖)·요동도(遼東圖)·일본도(日本圖)·대명도(大明圖)가 있습니다. 위의 것에서 가장 긴요한 것들을 모두 관에서 거두어 홍문관에 비장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도 한결같이 관에서 거두어 의정부(議政府)에 보관하게 하면 군국(軍國)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신이 엎드려 들으니 당(唐)나라 개원 때에 토번(吐蕃)이 《모시(毛詩)》와 《상서(尙書)》를 요구하였으나, 당나라에서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근일에 영안도 관찰사가 《고려사》를 요청하여 그 경내(境內)의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고려사》는 전공(戰攻)의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을 전부 기록한 것이어서 함부로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물며 본도(本道)의 산천이 <서울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경계가 야인(野人)과 맞닿은 곳이어서 전에는 탁청(卓靑)과 조휘(趙輝)의 사건이 있었고,
뒤에는 역적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이 있었습니다. 무릇 일은 미리 방지(防止)하여서 곡진(曲盡)하게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고려사》를 도로 거두어 들여서 사관(史館)에 보관하고, <영안도에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각 1부씩을 주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당(唐)나라의 등세륭(鄧世隆)이 표문(表文)을 올려 태종의 문장들을 찬집(撰集)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말하기를, ‘양(梁)나라 무제(武帝) 부자(父子)와 진(陳)나라 후주(後主)와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다 문집(文集)이 있었지마는, 어찌 나라가 망(亡)함을 구하였던가? 그러니 임금 된 이로서는 덕정(德政)이 없을까 걱정해야지 문장을 하여서 무엇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양성지는 <태종의> 이러한 말이 훌륭함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렇게 소(疏)를 올려 청하였음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임금이 좋아하고 숭상함을 헤아려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아첨을 바친 것이 심하다.” 하였다.】
 【성종13년 2월28일】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이세좌(李世佐)·민사건(閔師騫) 이 아뢰기를,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여 《고려전사(高麗全史)》 홍의초(紅衣草)를 간행하기를 주청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간행하지 말도록 청합니다. 신이 그 서적을 보니 매우 상밀(詳密)하게 된 것이어서 간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그 서적이 어떠한가?”하였다. 송질이 대답하기를,“양성지는 신의 처조부(妻祖父)입니다. 양성지가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세조께서 그 서적을 소중하게 여기어서 권남(權擥)에게 명령하여 양성지와 더불어 그 책을 간행하라고 하였다가 곧 다시 그 일을 정지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였습니다. 그 서적은 지금의 《고려사》와 비교하면 자못 자세하게 되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서적을 가져다가 <궁내로> 들여라.” 하였다.

출처 : 신과 역사 그리고 환생
글쓴이 : 김기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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