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21년 8월6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탪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이 장백산(長白山) 북록(北麓)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公탪鎭)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江外]에 옛 성(城)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古城)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女眞)을 쫓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하였다.
【세종22년
2월18일】 의정부 우의정 신개(申죏)가 상언(上言)하기를,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오니, 덕종(德宗)이 평장(平章)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北境)의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서해(西海) 바닷가의 예전 국내성(國內城) 지경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삭(寧朔)·운주(雲州)·안수(安水)·청새(靑塞)·평노(平虜)·영원(寧遠)·정융(定戎)·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동해(東海)에 이르는 수천 리를 뻗어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25척이요, 넓이도 그와 같았으며,
무릇 끝에서 끝으로 가려면 석 달이나 걸렸습니다. 그로부터 동서의 오랑캐 도적들이 감히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고,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다투어가며 와서 변방에서 항복하고 주(州)나 현(縣)을 설치하기를 청원하여, 국적에 붙여 민호로 편입된 자가 1만
명에 가까웠사온데,
오늘날은 중국에서도 산해위(山海?)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는 수천 리의 땅에다 참호를 파고 보(堡)를
쌓으며 나무를 심어서 북쪽 오랑캐[北胡]가 감히 엿볼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입보하는 소요가 없어져 여염집이 땅에
덮였고 소와 양이 들에 널려 있사오니, 중국과 고려에서 오랑캐를 방비하는 정책에 따르시고,
의주(義州)로부터 경원(慶源)에 이르는 사이에다 장성(長城)을 쌓는다면 만세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고려의 3월
노정(路程)의 성터나 중국의 수천 리에 걸쳐 있는 갱참(坑塹)도 반드시 도로의 구부러지고 곧은 곳에 있을 것이오니, 오직 성터를
살피는 자는 모름지기 지략과 견식이 있는 자라야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세종24년 4월10일】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중국에 매를 바치는 것은 명백히 그전의
규정이 있었으며, 우리 조종(祖宗)에 와서도 선덕 연간(宣德年間)에 여러번 송골매[松?]를 바쳤으니, 본국(本國)에서 송골매를
잡게 된 것은 조정(朝廷)에서도 아는 바입니다. 또 몇 해 전에 송골매를 진헌(進獻)하는 일에 대하여 이미 선유(宣諭)한 황제의 칙지(勅旨)가
있었는데, 지금 만약 바치지 아니하고 혹은 쌍으로 바치는 수효도 많지 않을 것 같으면, 다만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혹은 뜻밖의 폐해가 있을 것입니다.”
【세종24년 8월12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신개(申죏)·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권제(權?) 등이 찬술(撰述)한 《고려사》를
올렸다.
【세종28년 10월11일】 임금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이계전(李季甸)과 응교(應敎)
어효첨(魚孝瞻)에게 이르기를,
“《고려사(高麗史)》는 처음 찬술(撰述)한 것이 매우 간략하여 후에 다시
첨입(添入)하였지마는, 유루(遺漏)된 일이 많이 있다. 요(遼)나라에서 고려의 세자(世子)에게 면복(冕服)을 내려 준
일을 오히려 쓰지 아니하였으니 그 나머지를 알 수 있겠다.
지금 다시 교정(校正)해야 되겠다. 또
환조(桓祖)께서 만호(萬戶)의 직책으로써 삭방(朔方)에 간 데 대하여 대간(臺諫)이 그치기를 청했던 일과 용비시(龍飛詩)를 태조(太祖)께서
승천부(昇天府)에서 접전(接戰)하던 상황에 첨입(添入)했던 것은, 비록 속언(俗諺)에는 전함이 있으나 역사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니, 이 일로
미루어 본다면 반드시 유루(遺漏)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여러 사관(史官)들과 더불어 사초(史草)를 자세히
상고하여, 위에서 도조(度祖)와 환조(桓祖)로부터 태조(太祖)에 이르기까지 행사(行事)한 자취를 수색(搜索)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31년 1월4일】 춘추관(春秋館)에 전지하기를,
“전에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소략(疎略)한 실수가 있어서 다시 편찬하게 하였더니, 요(遼)에서 세자에게 면복(冕服)을 준 일을 또
빠뜨렸으니, 이제 다시 교정하되 비록 한 글자와 한 가지 일이라도 빠져서 고쳐야만 할 일은 모두 다 표를 붙여서
아뢰라.” 하였다.
【세종31년 1월28일】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을 불러,
《고려사(高麗史)》의 개찬(改撰)에 대한 것을 의논하고 인하여 춘추관에 전지하기를,
“《고려사》가 자못 소략(疎略)한 데 지나치니, 이제 다시 고열(考閱)하여 갖추 자세히 보태어 넣으라.” 하고,
드디어 우찬성 김종서·이조 판서 정인지·호조 팜판 이선제(李先齊)와 창손에게 감장(監掌)하기를 명하였다.
【세종31년
2월1일】 김종서(金宗瑞)를 의정부 우찬성 지춘추관사 겸 판병조사(知春秋館事兼判兵曹事)로 삼고, 임금이
권제(權?)·안지(安止) 등의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보태고 깎은 것이 공정하지 못함으로써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는데, 이때 안지가 지춘추관사로 있다가 종서로 대신하게 하였다.
【세종31년 2월5일】
춘추관에서 《고려사(高麗史)》를 고쳐 편찬하기를 논의하였는데,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였다. 사관(史官)
신석조(辛碩祖)·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하위지(河緯地)·양성지(梁誠之)·유성원(柳誠源)·이효장(李孝長)·이문형(李文炯)
등은 의논하기를, “사기(史記)를 짓는 체(體)는 반드시 기(紀)·전(傳)·표(表)·지(志) 등이 있어서, 사적(事跡)을 갖추 실어
각각 조리가 관통(貫通)됨이 있어야 하니,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 이후로 모두 이 체를 이어받아서, 고치는 이가 없고, 편년법(編年法)은
본 사(本史)를 은괄(?括)하여 보기 편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사를 짓지 아니하고 곧 편년에다 갖추 싣고자 하니, 서술하기가
심히 어렵고, 따로 세계(世系)와 지리(地理)가 있으니, 쓸데없이 덧붙임이 심하며, 또 범례(凡例) 안에 조회·제사·가구 경행(街衢經行)·춘추
장경도량(春秋藏經道場)·생신 수하(生辰受賀)·왕자 탄생·사교 예물(賜敎禮物)·인일 반록(人日頒祿)·연향 중국 사신(燕享中國使臣) 등과 같은 것은
모두 예사 일이라 하여, 약(略)하여 쓰지 아니하고, 다만 처음 보는 것만 썼으니, 만약 본사(本史)가 있고 편년(編年)을
짓는다면 가하거니와,이제 본사가 없는데 이처럼 요약(要略)하면 자못 사체(史體)를 잃은 것이오니, 원컨대, 역대 사가(史家)의
구례(舊例)에 의하여 기(紀)·전(傳)·표(表)·지(志) 등을 남김없이 갖추 쓴 뒤, 이에 편찬한 편년(編年)에다가
다시 깎고 보태어 따로 한 책을 만들어서, 본사(本史)와 아울러 전하게 하면, 옛 사람의 역사를 닦는 제도에 거의
합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고려의 사적이 본래 거칠고 빠진 것이 많아서, 기·전·표·지 등을 만들고자 하여도 일을
성취하기가 어렵다.’고 하나, 전사(前史)의 열전(列傳)에 한 사람의 일을 겨우 두어 줄만 쓴 것이 있으니,
여기에서도 마땅히 전(傳)을 세워야 할 사람이 있으나, 사기에 행한 사적을 잃어서 전을 실을 수 없는 것과, 사적(事迹)이 갖추어지지 못한 것은
비록 빠뜨릴지라도 해가 되지 아니하며, 진실로 제작(制作)하는 일이 제도에 합당함을 얻으면, 일의 어렵고 쉬움과 더디고 빠른 것은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어효첨(魚孝瞻)·김계희(金係熙)·이물민(李勿敏)·김명중(金命中) 등은
논의하기를, “사기를 짓는 체는 반드시 기·전·표·지를 세우는 것이 진실로 상례(常例)이지만, 다만 염려되는 것은 일을
쉽게 성취할 수 없어 수년 안에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체례(體例)가 빠지고 간략하여 옛 사람의 지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비록
이룩될지라도 도리어 볼 만한 것이 못될 것입니다. 송조(宋朝)의 일로 보건대, 본사(本史) 외에 전문(全文)이 있고, 또
속편(續編)이 있으니, 원컨대,
《송사(宋史)》 전문의 예에 의하여 지금 편찬한 《고려사》에다 다시 교정을 더하여 예전대로
반행(頒行)하고, 기·전·표·지의 저작을 만일 아니할 수 없다면 아직 후일을 기다릴 것입니다.”
하니, 지관사(知館事)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가 두 논의를 가지고 아뢰매, 효첨 등의 논의에 따랐다.
종서와 인지가 동궁에 들어가 뵙고 아뢰기를,
“편년체(編年體)에 시사(時事)를 갖추 기록하려고 하면 뜻을 통하지 못하는
예(例)가 많으니, 석조 등의 논의에 따르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동궁이 들어가 아뢰매,
임금이 기·전·표·지로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다.
【세종31년 2월22일】 이조에 전지하기를, “전자에
《고려사(高麗史)》가 소략(疎略)함에 지나쳐서 권제(權?) 등에게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더니, 이제 그 글을 보건대, 권제가 뜻대로
삭감하여서, 혹은 남의 청촉(請囑)을 듣고, 혹은 자기에게 관계되는 긴요한 절목(節目)은 모두 그 사실을 빠뜨렸다. 안지(安止)도
권제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
여 도와 이루었으니, 참람함이 막심하매, 권제의 고신(告身)과 시호(諡號)를 추탈(追奪)하고, 또한 안지의
고신을 빼앗아 영영 서용(픊用)하지 말며, 낭청(郞廳) 남수문(南秀文)도 《고려사》의 일을 오로지 맡아서 당상관에 아부하였으니, 그
죄가 또한 같으니, 고신을 추탈하라.” 하였다. 권제가 구사(舊史)를 깎고 보탠 것은 매우
자세하였다. 그러나, 채하중(蔡河中)의 어머니는 용강(龍崗)의 관비(官婢)이라, 사관(史官)이 모두 그 사실을
썼고, 윤회(尹淮)도 기록하였으며, 권제도 초고(初藁)에는 실었으나, 최사강(崔士康)의 청을 듣고 마침내 깎았으며, 또
제(?)의 아버지 권근(權近)이 성지(聖旨)를 사사로 개탁(開圻)한 일을, 제가 그 말을 왜곡(歪曲)되게
쓰고, 또 사초(史草)에는 권부(權溥)·권준(權準)·권고(權皐) 등의 행실을 낮추어 썼는데, 제는 이것을 또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또
권부는 권수평(權守平)의 후손인데, 일찍이 《고려실록(高麗實錄)》을 수찬하다가, 수평이 죽으매, 그 세계(世系)가 미상(未詳)하다고
썼는데, 제는 태조(太祖)의 공신 권행(權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제의 죄가 오로지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나, 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그 화(禍)가 미치는 것이 마땅하다. 안지는 성품이 나약(懦弱)하여 제에게 견제(牽制)되어 같이 죄를 받았다.
처음에 임금이 권제 등의 보태고 깎은 것이 공정하지 못한 것을 알고, 안지를 불러 힐책하고, 또 그때의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신석조(申碩祖) 등을 불러 물으니, 어효첨이 김종서와 정인지에게 말하기를,
“경신년에 남수문과 더불어 같이 《고려사》를 편수하였는데, 묻기를, ‘채하중(蔡河中)의 일은 어찌하여 먹으로
지웠는가.’하니, 수문이 말하기를, ‘어찌 내가 한 일인가. 다만 당상(堂上)의 명을 좇은 것이다.’ 하기에, 내가 곧 본초(本草)에
좇아 쓰고, 다만 필적(筆跡)을 다르게 하여, 남이 내가 쓴 것임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매, 종서 등이 곧
들어가 아뢰게 하였더니, 이에 종서와 인지를 불러 의논하고, 또 효첨을 머물러 두고 유시(酉時)에서 해시(亥時)까지 이르러 파한 뒤 이 명이
있었다. 수문(秀文)은 널리 경사(經史)에 통하고 글에 고기(古氣)가 있었다. 처음에 사마천(司馬遷)을 모방하여 역사를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중론(衆論)의 억제하는 바가 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권제의 편찬한 《고려사》에 수문의 글이 많았으나, 성품이
좁고 꼿꼿하여 역사 편찬하는 일을 스스로 오로지 함이 많으니, 동류들이 마음으로 꺼리고, 안지도 수문의 오로지 함을 미워하여 일찍이 좌중 에서
꾸짖고 욕하였다.
【세종31년 4월6일】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전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할 때에 한(漢)나라 소제(少帝)와 송(宋)나라 창오왕(蒼梧王)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위조(僞朝)의 신우(辛禑) 부자(父子)를 모두
왕으로 칭하였는데, 삼가 상고하옵건대, 소제(少帝)와 창오왕(蒼梧王)을 비록 본사(本史)에 제(帝)로 칭하고 강목(綱目)에도
또한 폄출(貶黜)한 것이 없으나, 그러나, 강목에 고후 여씨(高后呂氏) 원년(元年)에 관한 유우익(劉友益)의 서법(書法)에 소제(少帝)는 다른
사람의 아들이지만 태자(太子)라고 쓰고 소제(少帝)라고 써서 고침이 없었으니, 한(漢)나라 조정의 대신을 죄준 것이옵고, 여씨(呂氏)로
기원(紀元)을 하고 다른 사람의 아들로 하지 아니함은 정통(正統)을 어렵게 여긴 것이옵니다. 고후(高后) 8년에다가 윤기신(尹起莘)의 강목
발명(綱目發明)에도 또한 말하기를, ‘강목에 써서 조금도 깎은 말[貶辭]이 없고 참 효혜제(孝惠帝)의 아들인 것 같이 한 것은, 한(漢)나라
조정의 장신(將臣)과 상신(相臣)들의 죄를 나타낸 것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강목(綱目)에 소제(少帝)로 칭한 것은 제(帝)가 된 것을
관여한 것이 아니고, 본사(本史)에 소제본기(少帝本紀)를 짓지 않았으니 뜻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오왕(蒼梧王)은 《송서(宋書)》
본기(本紀)에 쓰기를, ‘폐제(廢帝)의 휘(諱)는 욱(昱)이고 명제(明帝)의 장자(長子)인데, 대명(大明) 7년 정월 신축(辛丑)에
위위부(衛尉府)에서 나서 태시(泰始) 2년에 세워 태자(太子)를 삼았다.’ 하였고, 본기(本紀)의 끝에 이르러 쓰기를, ‘이보다 먼저 민간의
와전(訛傳)된 말에, 큰 집에는 아들이 없고 진 대비(陳大妃)가 본래 도아(道兒)의 첩(妾)이니, 도로(道路)에서 하는 말이 혹은 도아(道兒)의
아들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명제(明帝)가 창오(蒼梧)로 아들을 삼아 통(統)을 이었기 때문에 본기(本紀)에 또한 명제의 장자라고 쓴
것이고, 태후(太后)가 창오(蒼梧)를 폐할 때에 명령하기를, ‘욱(昱)이 적장(嫡長)으로 황통(皇統)을 이어 올랐는데, 어찌 지극히
흉패(凶悖)할 줄을 뜻하였으랴.’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다만 포악하고 잔학한 죄를 수(數)한 것뿐이요, 다른 성(姓)이라고 해서 끊은 것은
아닙니다. 강목(綱目)에 주(主)라고 일컬은 것은 그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강(綱)에는 황(皇)에 쓰고 목(目)에는 도아(道兒)의
아들이라고 쓴 것입니다. 하물며, 창오(蒼梧)를 도아의 아들이라 한다는 말을 특히 민간 도로의 와전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제(少帝)와 창오(蒼梧)를 함께 끌어다가 우(禑)·창(昌)의 증거로 삼을 수 없음이 분명하옵니다.
우(禑)로 말하면 그 어미 반야(般若)는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데, 일찍이 궁인(宮人)이 된 일이 없고, 공민왕(恭愍王)이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었을 때, 돈이 우(禑)로 양자를 삼아서 후사(後嗣)를 세우기를 청하매, 왕이 곁눈으로 보면서 웃었더니, 돈이 왕의 마음에
허락된 것을 알고, 이에 오일악(吳一?)을 시켜 원장(願狀)을 낙산사(洛山寺)에 쓰기를, ‘제자(弟子)의 분신(分身)인
모니노(牟尼奴)가 복(福)되고 수(壽)하여 나라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하였으니, 역적 신돈의 찬탈(簒奪)의 꾀가 이미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공민왕 19년에 이르러 우의 낳은 지가 이미 6살이 되었는데 오히려 후사가 없는 것을 근심하여 의릉(毅陵)을 개장(改葬)하려 하였고, 왕의
말년에 익비(益妃)가 임신하매 기뻐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영전(影殿)이 부탁할 곳이 없을까 염려하였더니, 비(妃)가 이미 임신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랴.’ 하였으니, 이것은 왕이 비록 우로 후사를 삼기를 허락하였더라도 그 마음은 죽을 때까지 아들로 삼으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가 장차 취학(就學)할 때에, 태후(太后)가 아직 어리다고 칭탁하여 허락하지 않았고, 우를 세울 때에 태후와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 등은
종친(宗親)을 세우려 하는데, 이인임(李仁任)이 권병(權柄)을 오로지 하려 하여 내외(內外)의 정론(正論)을 어기고 끌어다가 세워 왕을
삼았으니, 이것은 태후와 대신이 또한 아들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전에 사기(史記)를 편수(編修)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중국
황제의 명령이 있다.’ 하였으나, 우가 선 지 11년 뒤에 비로소 책봉(冊封)을 하였고, 책봉한 이듬해에 황제가 말하기를, ‘자주 약속(約束)을
청하나 짐(朕)이 여러 번 허락치 않은 것은 정(正)히 분수를 지키도록 한 것인데, 청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쫓는다.’ 하였고,
창(昌)이 중국에 조회를 청하매, 중국 황제가 말하기를, ‘왕씨(王氏)가죽음을 당하여 제사(祭祀)가 끊어진 뒤에 다른 성(姓)으로 왕을 삼는
것은 삼한(三韓)의 대대로 지키는 좋은 법이 아니라.’ 하고, 또 말하기를, ‘동자(童子)가 반드시 중국 서울에 올 것이 없다. 과연 어질고
지혜 있는 신하들이 직위에 있어 군신(君臣)의 분수를 정한다면 수십 년 중국에 조회하지 않더라도 그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하였으니, 중국
왕제가 우의 부자(父子)에 대하여 끊은 것이 깊습니다. 공양왕(恭讓王)을 세울 때에 온 나라의 군(君)들과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우와 창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 수 없고, 또 천자(天子)의 명령이 있으니 마땅히 거짓[假]을 폐하고
참[眞]을 세워야 한다.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는 태조(太祖)의 정파(正派)이니 공민(恭愍)의 후사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정비(定妃)의 분부로써 왕을 받들어 위(位)에 나가 정통(正統)을 잇고,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우·창을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았다가
조금 뒤에 법으로 형(刑)에 처하였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실상 이 의논을 주장하셨으니, 참람하게 도둑질한 죄를 성토(聲討)하여 하늘이 준
벌로써 끊은 것이 엄하셨나이다. 지금 만일 오히려 우와 창을 왕으로 하여 역적의 자손으로 하여금 32대(代)의 서열(序列)에
섞어서 분별이 없게 한다면, 다만 대의에 어그러질 뿐이 아니라, 태조의 명분을 바로잡으신 의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후(諸侯)를 폐하고 두는 것은 천자에게 있는 것이온데, 하물며, 우가 타성(他姓)으로서 도둑질로 점유하여, 위로는 천자(天子)의 끊은 바
되고, 아래로는 국론(國論)의 폐한 바 된 것이겠나이까. 한(漢)나라 왕망(王쭄)이 속임수를 쓰고 간사한 꾀를 부리어 거짓을 가지고 곧 참이라
일컫고서, 모두 태후(太后)를 빙자해 가지고 위(位)를 도둑질하여 임금 노릇을 10여 년이나 오래 하였으나, 《한서(漢書)》에 그 이름을
배척하여 쓰고, 내리쳐 열전(列傳)으로 만들어서 참람하게 도둑질한 죄를 드러내었나이다. 우는 역적 신돈(辛旽)의
자식으로서 왕위(王位)를 도둑질로 점유하여, 부자가 서로 전하면서 지극히 흉하고 지극히 악하여 죄가 왕망보다 더하온데, 어찌 왕이라 일컬어서
명분을 어지럽힐 수 있나이까. 전자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역사를 편수할 때에 우와 창을 이름으로 썼고, 그 뒤에
하윤(河崙)·유관(柳寬)·변계량(卞季良) 등이 다시 다듬고, 윤회(尹淮)가 거듭 편찬할 때에도 또한 모두 그대로 하였사오니,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랬겠나이까. 비옵건대, 지금 《고려사》를 편수함에 있어서 우·창 부자를 모두 《한서》 왕망의 예(例)에 의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난적(亂賊)을 징계하여 만세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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