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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고려사도 위서이다

by 8866 2007. 3. 30.

고려사(高麗史)도 위서(僞書)이다.

 

고려사로는 고려의 실체를 전혀 알 수 가없다. 
태조 이성계와 개국 일등 공신 정도전은 고려의 사서를 필삭(筆削)하여
고려사를 전면 개정하여 놓지 못한다면 조선의 개국도 이성계의 왕권도
사상누각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려의 개국이 잘못된 것이었고 또한 중국의 사서를 사칭(詐稱)하여
한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역사를
왜곡 조작하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조작한 고려사를 태종이 의심하였고 세종은 재위 기간동안
고려사를 완전히 개작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고려의 사서와 고려 실록을 불태웠다.
삼국사가 위서(僞書)였으며, 고려사 또한 위서(僞書)이다.


 

 【태조1년 10월13일】 조준·정도전 등에게 《고려사》를 수찬케 하다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정총(鄭摠)·박의중(朴宜中)·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소종(尹紹宗)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태조4년 1월25일】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를 편찬하여 바치다. 그들에게 내린 교서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과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태조(太朝)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치니, 임금이 친히 보고 정도전에게 교서(敎書)를 내리었다.

  “듣건대, 임금이란 것은 <하늘의> 덕(德)을 대신하여 나라를 가지고, 반드시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역사를 써서 책을 만드는 것이니, <그것은> 일대(一代)의 전장(典章)만 갖추자
는 것이 아니라, 후세를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 중하기 때문이다.
왕씨(王氏)의 세상을 상고해 보면, 고려라는 국호를 습용하여 능히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해[歲]를 지낸 것이 5백 년에 가깝고, 대[世]를 전한 것이 30대를 넘으매,
치란성쇠(治亂盛衰)의 자취와 선악득실(善惡得失)의 원인에 대하여 기록이 번거롭게 있으나, 또한 없어진 것도 많으니
, 진실로 훌륭한 역사가에 맡기지 않았던들 어찌 완전한 책을 만들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경은 학문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의 미세한 부분까지 연구하였고, 식견은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였으며, 의논은 옛 성현의 말씀에 의거하여 바르게 하고, 시비는 반드시 사특하고 정직한 취지에 의하여 밝게 판단하여, 나를 도와서 나라를 열고 큰 공을 이루었으며, 아름다운 계책은 정치와 교화를 시행하는 데 도움이 되고, 웅장한 문장은 문물 제도를 제정할 임무를 맡길 만하며, 온순한 선비의 기상이요 늠름한 대신(大臣)의 풍도인지라, 내가 즉위할 당초부터 경에게 적당히 쓰일 학문이 있는 것을 알고 보필하는 정승의 자리에 앉히고, 또 국사(國史)를 편찬하는 관직까지 겸하게 하였더니, 과연 정치를 잘하는 여가에 훌륭한 역사책을 만들어,  첫째로 연대를 표기하고 대략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변고와 상사(常事)는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을 취사 선택하고, <인물의> 포폄(褒貶)은 선현(先賢)의 <의견에>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 사건은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썼으되 너무 복잡하지 않고, 문장은 간결하되 속되지 않으니 옛날의 자유(子游)·자하(子夏)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아도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훌륭한 사필(史筆)의 풍도가 있다. 책을 펴보고 돌려보내며 가상하고 탄복함을 그치지 못하여, 은총을 내려서 편찬한 공로를 정표하는 바이다. 아아! 옛날 우사(虞史)는 요전(堯典)의 글을 지어서 직필(直筆)하였고, 은(殷)나라는 하후(夏后) 때의 일을 거울삼았으니, 당연히 앞에 가던 수레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경에게 백금(白金) 1정(錠), 구마(廐馬) 1필, 채단(綵段) 1필, 비단[絹] 1필을 하사하니 받을지어다.” 

정총(鄭摠)에게 교서를 내리었다.
“전대(前代)의 흥망성쇠의 자취는 반드시 뒷사람을 기다려서 역사책이 이루어지고, 후왕(後王)들의 권계(勸戒)가 되는 것은 경서와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거울삼을 수 있는 것이다. 생
각하건대,  왕씨(王氏)는 고려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한 집을 만들고, 오대(五代) 때부터 중국을 섬겨, 세대(世代)가 오래고 기록이 대단히 많으나, 여러 번의 난리로 인하여 없어진 것이 있어 <사료가> 구비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록한 사람이 하나가 아니어서, 엉성하고 주밀하며 자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아니하고, 혹은 너무 길게 기록하여 시비곡직(是非曲直) 사정(邪正)을 가리기 어렵게 되었으니, 만일 일대(一代)의 실록(實錄)을 만들려면 반드시 <재질·학문·식견의> 삼장(三長)을 다 가진 재사(才士)라야 한다. 생각하건대, 경은 기품이 순수하고 맑으며, 학문이 깊고 풍부하며, 언사(言辭)가 간결하여 믿음직하고, 문장(文章)이 우아(優雅)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고, 비판은 근엄하고 지조가 있으며, 가슴속에 들어 있는 권도(權度)는 깨끗하고 틀림이 없는지라, 내가 개국할 때에 경의 협력에 힘을 입어, 국정(國政)을 결정하는 의정부(議政府)에 올리고 사필(史筆)을 잡는 관원을 겸하게 하였더니, 정치를 협조하는 데 힘을 쓰고 역사를 편찬하는 데 또한 전심하여, 공양삼세(公羊三世)의 일과 사마천의 편년체(編年體)의 규범에 의하여 <고려의> 전사(全史)를 완성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으니, 의논이 <송나라 범조우(范祖禹)가 지은> 《당감(唐鑑)》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와 같이 야비하지 아니하며, 변사(變事)나 상사(常事)에 대하여 필삭(筆削)이 정(精)하고,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일에 대하여 선악을 명시하였다.  내 마음으로 가상히 여겨 후하게 상을 주는 바이다. 아아! 비록 화려하나마 번거롭지 않고 소박하나마 속되지 않으니, 가위 현량한 사관(史官)의 재질이 있다하겠다. 다스리게 되면 반드시 흥하고 어지럽게 되면 반드시 망하는 것이니, 어찌 전대(前代)의 역사를 보지 않으랴! 이제 구마(廐馬) 1필, 백은 50냥(兩), 비단[段子] 1필, 채견(綵絹) 1필을 하사하니 받을지어다.”

 

 【정종1년 1월19일】  전대 군신의 자취를 보기 위해 《고려사》를 바치도록 하다
“내가 전대 군신(君臣)의 행사(行事)한 자취를 보고자 하니, 《고려사(高麗史)》를 바치도록 하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조박(趙璞)이 《고려사》를 바쳤다.

 

 【태종1년 1월10일】 태종(太宗)이 《고려사(高麗史)》를 보다가 우리 전하(殿下)에게 이르기를,“너의 모후(母后)의 공(功)이 유씨(柳氏)의 제갑(提甲)에 비교하면 더욱 중하다.” 하였다.
 【태종1년 4월25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바치게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조박(趙璞)에게 이르기를, “내가 전조(前朝)의 역사(歷史)를 보고서 권계(勸戒)를 삼으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였더니, 박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그리하셔야 됩니다.”
  【태종4년 12월19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고려 관제(官制)를 《고려사(高麗史)》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태종14년 5월10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을 불러서 《고려사(高麗史)》
를 찬정(撰定)하라고 명하였다. 국초(國初)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였으나, 위조(僞朝) 이후의 기사는 자못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는데, 대개 하윤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를기를, “내가 《고려사(高麗史)》 말기(末紀)를 보니, 태조의 사실이 자못 사실과 달랐다.”  하니, 한상경(韓尙敬)이 대답하기를, “태조(太祖)도 또한 일찍이 그러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고,  이응(李膺)이 말하였다.  “실록(實錄)은 마땅히 수세대(世代) 뒤에 수찬(修撰)하여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공론(公論)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태조 때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윤소종(尹紹宗)이 전조 실록(前朝實錄)을 수찬할 때 여러 사관(史官)이 모두 사초(史草)를 고쳐 써서 바쳤으나, 오로지 이행(李行)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금(囚禁)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만약 이 글과 같다면 전조(前朝)의 말년에 임금에게 직언(直言)한 자는 오직 윤소종(尹紹
宗) 한 사람뿐이었고, 고을을 잘 다스린 자는 오직 정운경(鄭云敬) 한 사람 뿐이었으나, 개국(開國)할 때 기밀(機密)의 일을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  하니, 한상덕(韓尙德)이
 “신이 조준(趙浚)에게 들으니, 또한 말하기를, ‘현릉(玄陵) 이후의 기사는 모두 잘못 썼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믿을 수 있는 역사는 후세에 보이기 위한 것이니, 전하가 아시는 바대로 개정(改正)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내가 마땅히 영의정과 의논하겠다.”  하고, 드디어 승문원(承文院)에 명하여 정해년 이후의 수교(受敎)한 조획(條턛)을 차례대로 편찬하게 하였다.
 【태종14년 8월7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남재(南在)·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이후의 일은 사실이 아닌 것이 많으니, 마땅히 다시 찬정(竄定)하라.”
 【태종16년 6월20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과 지관사(知館事) 한상경(韓尙敬)과 동지관사(同知館事) 변계량(卞季良)이 《고려사(高麗史)》를 3분(三分)하여 그 집에서 개수(改修)하였다.   하윤이 춘추관의 장무(掌務) 김원로(金元老)를 불러서 말하기를,
“더운 때에 날마다 모여서 근무하는 것은 편하지 못하다.  전조(前朝)의 충정왕(忠定王) 이전의 역사를 마땅히 셋으로 나누어 그 하나는 나에게 보내고,  그 하나는 지관사(知館事)의 집에 보내고,  그 하나는 동지관사(同知館事)의 집으로 보내면 우리들이 나누어 보고 찬정(竄定)하겠다.”하였으나,이 해 겨울에 하윤이 졸(卒)하여, 일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출처 : 신과 역사 그리고 환생
글쓴이 : 김기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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