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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고려사도 위서이다

by 8866 2007. 3. 30.

 【세종즉위년 12월25일】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사(高麗史)》에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鄭道傳)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사신(史臣)의 본 초고(草稿)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변계량과 정초가 아뢰기를,“만약 끊어지고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이 직필(直筆)을 증손(增損)한 것을 미워하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고 하였다.
 【세종1년 9월19일】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고려사(高麗史)》를 읽어보았더니,  <사실과> 맞지 않는 곳이 많으오. 마땅히 개수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세종1년 9월20일】  임금이 예문관 대제학 유관(柳觀), 의정부 참찬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이 찬수(撰修)한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였다.
 【세종2년 2월23일】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유관(柳觀)에게 《고려사(高麗史)》의 교정하는 일을 물으니, 관이 대답하기를, “역사(歷史)란 만세의 귀감(龜鑑)이 되는 것이온데, 전에 만든 고려사에는 재이(災異)에 대한 것을 모두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지금은 모두 이를 기록하기로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모든 선과 악을 다 기록하는 것은 뒤의 사람에게 경계하는 것인데, 어찌 재이라 하여 이를 기록지 아니하랴.” 하였다.
 【세종2년 5월28일】 경연에서 정사를 보았다. 변계량이 《고려사(高麗史)》에 재앙과 기이한 일을 뽑아 기록하여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후한서(前後漢書)》에 기재되어 있는 재앙과 기이한 일을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에 다 적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교정할 적에 반드시 더 기록할 것이 없다.” 하였다.
 【세종3년 1일30일】이전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간혹 사신(史臣)이 본래 초(草)한 것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고, 또 제(制)니, 칙(勅)이니 하는 말과 태자(太子)라고 한 것 등의 유가 참람 되고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된다 하여, 유관(柳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하였더니, 이제 와서 편찬이 완성되었으므로 이에 헌상 해 올렸다.
 【세종4년 12월21일】 춘추관(春秋館)에 명하여 공신(功臣)의 작(爵)을 물려받은 일을
《고려사(高麗史)》에서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세종5년 6월29일】 예조 정랑(禮曹正郞) 윤수(尹粹)가 마전현(麻田縣)에서 와서, 고려 태조(高麗太祖) 이하 팔위(八位)의 제향(祭享)에 쓸 전물(奠物)·기명(器皿)·묘사(廟舍)·노비(奴婢)·전택(田宅)의 숫자를 들어 계(啓)하였다. 예조(禮曹)에 내리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 태조는 초상(肖像)으로 하고, 그 나머지 팔위(八位)는 모두 위판(位版)이라 하니, 태조도 위판으로 모시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예조 참판 정초(鄭招)가 대답하기를,
 “초상(肖像)으로 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위판으로 바꾼다면 초상은 어디에 두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이 제전(祭田)·제기(祭器)·노비(奴婢)를 두어 만세토록 제사를 폐하지 아니하려는 것이다. 나는 능이(陵夷)된 폐단이나 없나 하여 예관(禮官)을 시켜서 가 보라 하였는데, 과연 그렇다.” 하고, 또 “태조 이후 여덟 임금이 모두 백성에게 공덕이 있어서, 폐하지 아니할 만한 임금이었던가.” 하니, 정초가 대답하기를,
 “《고려사(高麗史)》가 반포되지 못하여, 신은 전대의 일을 아지 못합니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조서로(趙瑞老)가 대답하기를,  “전자에 진산군(晉山君) 하윤(河崙)이 말하기를, ‘이제 종묘(宗廟)도 오히려 오실(五室)에 불과하니, 고려 태조 이하는 당연히 오주(五主)만 두어서 제사지내야 한다.’ 하였으나, 태종께서 그대로 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물러가 예전(禮典)을 참작하여 아뢰고, 능체(陵替)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5년 12월29일】 지관사(知館事) 유관(柳觀)과 동지관사(同知館事)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처음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역사를 편수함에 있어,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저술한 《금경록(金鏡錄)》을 근거로 하여 37권을 편찬하였더니,
  정도전이 말하기를,  “원왕(元王) 이하는 비기어 참람 하게 쓴 것이 많다 하여, 즉 종(宗)이라고 일컬은 것을 왕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고 호칭한 것을 생일(生日)이라 썼으며, 짐(朕)은 나[予]로 쓰고, 조(詔)를 교(敎)라 썼으니, 고친 것이 많아서 그 실상이 인멸된 것이 있고,  또 운경(云敬)은 도전의 부친으로, 별다른 재능과 덕행도 없었는데도 전(傳)을 지어 드러내고, 정몽주(鄭夢周)·김진양(金震陽)은 충신(忠臣)인 것을 가차없이 깎고 몰았으며, 오직 자기의 일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여, 그 옳고 그른 것을 정한 것이 <그네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왔고, 착하다고 한 것과 악하다고 한 것이 예 역사를 그르쳐 놓았다.” 하고,  진산군(晉山君) 하윤(河崙)이 이르기를,
도전의 마음씨의 바르지 못함이 이와 같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조정에 건의하기를,  “옛날 역사에 상고하여 거기에 붙여 쓸 것은 더 써넣고, 없앨 것은 삭제하여야 한다.” 고 하더니, 그만 이것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무술년에 임금이 유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校正)을 가하도록 하니,
유관이 주자(朱子) 강목(綱目)을 모방하여 편집하려고 하였으나,
계량이 말하기를,  “여사(麗史)가 이미 이인복과 이색과 정도전의 손을 거쳤으니 경솔히 고칠 수는 없다.” 하고, 그 편수함에 미쳐서는 옛 그것을 답습하여
,
태자(太子)의 태부(太傅)·소부(少傅)·첨사(僉事)를 세자(世子)의 태부·소부·첨사로 하고, 태자비(太子妃)를 세자빈(世子嬪)으로 하며, 제칙(制則)을 교로 하며, 사(赦)를 유(宥)로 하고, 주(奏)를 계(啓)로 하였고, 아직 지주(知奏)는 고치지 않았으나, 자못 당시의 사실을 잃었던 것이다.” 하고,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양봉래(梁鳳來)·정사(鄭賜)·강신(康愼)·배인(裵寅)·김장(金張) 등이 계량에게 고하기를,  “태자 태부(太子太傅) 등의 칭호는 당시의 관제(官制)이요, 제(制)·칙(勅)·조(詔)·사(赦)도 당시에 호칭하던 바요, 비록 명분(名分)을 바로잡는다고는 말하지만, 《춘추(春)》에 교제(郊?)와 대우(大雩)를 같이 전하여 <그 후세의> 감계(鑑戒)가 되게 하였으니, 어찌 이를 고쳐서 그 실상을 인멸되게 하겠소.” 하니, 계량이 그렇지 않다 하여, 도리어 이 뜻으로써 윤회에게 고하여 임금에게 주달[轉達]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의 춘추(春秋) 같은 것은 제왕의 권한을 의탁하여 한 왕의 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참람하게 왕(王)으로 일컬은 것은 깎아 내려서 자(子)라고 썼고, 성풍(成風)의 장사에 천자로서 과람한 부의를 했다 하여, 왕이라 이르고 천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취할 것은 취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며, 빼앗고 주는 것이 성인의 심중의 재량으로부터 나왔는데, 좌씨(左氏)가 전(傳)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형(荊)나라와 오(吳)나라와 어월(於越)나라를 한결같이 자기들이 호칭대로 좇아, 왕이라 쓰고 일찍이 고치지 않았으며, 《주자강목》 같은 것도 비록 춘추의 필법[書法]을 본받았다 하나, 그 주에는 참람 하게 반역한 나라가 명칭을 도절(盜竊)한 것도 또한 그 사실에 인하여 그대로 기록하였으니, 그 기사(記事)의 규례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리라. 오늘 사필(史筆)을 잡는 자가 이에 성인이 취하고 버리신 본지를 엿보지 못할 바엔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바르게 기록하면, 찬미하고 비난할 것이 스스로 나타나서 족히 후세에 전하고 신빙할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과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후일에 와서 고쳐서 그 사실을 인멸케 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종을 고쳐서 왕으로 일컬을 것도 사실에 좇아 기록할 것이며, 묘호(廟號)·시호(諡號)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고,  범례(凡例)에 고친 것도 이에 준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계량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도전이 참람히 비의(比擬)한 것을 고쳤사오나, 도전(道傳) 때에 와서 비로소 고친 것이 아닙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종으로 일컬은 것을 왕으로 썼고, 또 주자(朱子)가 강목을 지을 때에, 칙천황후(則天皇后)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서 당(唐) 2년, 3년으로 썼기에, 신도 또한 위로 주자의 필법을 법받고, 아래로 도전의 뜻을 본받아, 무릇 참람하게 비의한 일은, <전에> 고치지 않은 것도 또한 있는 데 따라 고쳤습니다. 또 이미 고친 바 있는 참람된 일을 다시 쓴다면, 지금 사관들이 반드시 <이를> 또 본받아 쓸 것이니, 그 사실을 그대로 쓴다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에는 내 능히 의혹을 풀지 못하겠다. 주자의 강목은 이 책과는 다르다. 주자 강목은 명분을 바로잡고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여, 만대의 아래에서도 일성(日星)과 같이
환히 밝은 것이 있으나
, 이 글에는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의 구분이 없는데, 그대로 쓰지 않는다면 후세에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 사실을 보고 알겠는가. 경이 또 말하기를, ‘익재가 처음에 시작한 일이라.’고 하니, 내 비록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않겠으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앞사람의 과실을 뒷사람이 쉽게 안다.’고 하였거니와, 경이 말한 것같이 지금의 사관이 그것을 보고서 쓸 것이라는 것은, 즉 사실 그대로 쓴다는 말이니, 사실을 사관이 그대로 쓴다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드디어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
아울러 도전이 고친 것까지도 모두 구문(舊文)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유관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삼가 상고하오니, 한나라와 당나라·송나라의 제도에 있어, 서한(西漢) 시대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태종 효문 황제(太宗孝文皇帝)와 세종 효무 황제(世宗孝武皇帝)와 중종 효선 황제(中宗孝宣皇帝)만 종의 존호를 올렸고, 그 나머지는 모두 종으로 일컫지 않았으며, 동한(東漢)에 있어서는 세조 광무 황제(世祖光武皇帝)와 현종 효명 황제(顯宗孝明皇帝)와 숙종 효장 황제(肅宗孝章皇帝)와 목종 효화 황제(穆宗孝和皇帝) 이외에는 또한 종으로 칭호하지 않았으며, 당나라에서는 고조(高祖)이하로 모두 종으로 칭호하였고, 송나라에서는 태조 이하로 또한 모두 종으로 칭호 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서 이것을 법 받아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또한 모두 종으로 칭호하였으니, 이는 참람한 일입니다. 그러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은 모두 묘호(廟號)이므로, 이번에 혜왕(惠王)·정왕(定王)으로 칭호를 고쳤습니다. 묘효로써 시호[謚]를 삼는 것은 그 진실을 잃는 것 같아서, 전조사(前朝史)의 시말(始末)을 상세히 상고하오니, 태조의 시호는 신성 대왕(神聖大王)이요, 혜종의 시호는 의공 대왕(義恭大王)이었으며, 정종 이하도 모두 시호가 있었습니다. 재위(在位)의 끝나는 해에 이르러서는, 왕이 아무 전에서 훙(薨)하다 하고, 시호를 올리기를 아무 왕이라 하고, 아무 능(陵)에 장사하고, 묘호는 아무 종(宗)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종에 이르러서 원나라 조정에서 추후해서 충헌왕(忠憲王)이라 시호하였고, 원종(元宗)도 추후해서 충경왕(忠敬王)이라 시호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으로부터 그 이하는 모두 원나라 조정의 시호를 받은 것이오니, 비옵건대, 전조사(前朝史)에 있어 태조를 신성왕(神聖王)이라 고치고, 혜종을 고쳐서 의공왕(義恭王)이라 하며, 정종이하는 모두 본래의 시호로써 아무 왕으로 칭호하면, 거의 사실을 속이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오니, 엎디어 바라건대, 하감(下鑑)하시고 재량 선택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또 윤회에게 명하기를,
전조사에 천변(天變)과 지괴(地?)를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다시 실록을 상고하여 다 싣도록 하라.”  하니, 윤회가 사관들로 하여금 초출하여 등사하게 하고, 윤회가 경연에서 강의를 마친 뒤에, 천변·지괴의 단자(單字)와 지관사(知퉓事) 신 유관의 글을 진정(進呈)한다고 한 것을 다 읽어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미소(微小)한 별(星)의 변동은 기록할 것이 못된다. 고려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변과 지괴를 정사(正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첨가하여 기록하지 말고, 또 그 군왕의 시호는 아울러 실록에 의하여 태조 신성왕·혜종 의공왕이라 하고, 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이며, 그 태후·태자와 관제(官制)도 또한 모름지기 고치지 말고, 오직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 곳에는 천하 두 글자만 고칠 것이요, 또한 천하를 경내로 고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세종6년 8월11일】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는데, 그 서문(序文)에 말하기
를,
  “역사의 법은 옛부터 있었다. 당나라와 우나라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여러 서책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국(列國)의 사관이 각기 그 때의 일을 기록하여, 뒤에 편찬 기술하는 자가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 한 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관중(關中)에 들어가면서 소하(蕭何)를 시켜서 진(秦)나라의 문적(文籍)을 거두게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위에 오르자 위징(魏徵)을 명하여 수(隋)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전 세상의 쇠하고 흥한 연고를 거울삼아 뒷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본받고 반성하게 함이니, 이른바 나라는 가히 멸망시켜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닌가. 공경히 생각하면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의 《실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여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모방하여 3년만에 37권이 성취되었으나,   살펴보건대, 그 역사가 잘못된 것이 꽤 많았으니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더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로, 이에 우의정 신(臣) 유관(柳觀)과 예문학 대제학 신 변계량과 신 윤회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라 하시니, 영락 21년 11월 28일에 신 관(觀)이 말씀을 올리기를, ‘전조(前朝)에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모두 종(宗)이라 칭한 것은 참람한 일이었으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이 모두 묘호(廟號)였는데, 이제 새 역사에는 혜왕이라 정왕이라 개칭(改稱)하여 묘호로써 시호(諡號)인 것처럼 만들어 진실을 잃은 것 같사오니, 실록에 따라 태조는 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은 의공왕(義恭王)이라 하고, 정종 이하도 모두 본래의 시호를 쓰게 하면 거의 사실(事實)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겠나이다.’ 하였더니, 이 날에 신 회(淮)가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에 친히 옥음(玉音)을 받자왔으니, 말씀하기를, ‘공자의 《춘추(春秋)》는 남면(南面)하는 권리에 부탁하여 한 임금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였던 까닭으로, 오(吳)·초(楚)에 참람하여 왕이라 한 것을 깎아서 자(子)라 하고, 성풍(成風)을 봉(풧)으로 장사하게 한 것에는 왕을 말할 때 천왕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붓으로 깎아내리고 빼앗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서 재정(裁定)하였으나, 좌씨(左氏)가 전(傳)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오나라·초나라와 월나라에 한결같이 왕이라 자칭(自稱)한 것을 좇아 왕이라고 써서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고,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말하기는 《춘추》의 서법(書法)을 본받았다고 하나, 그 분주(分註)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나라이나 도적질하여 표절(剽竊)한 명호(名號)라도 모두 그 사실대로 좇아 기록하였으니, 어찌 기사(記事)의 범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다. 이제 붓을 잡은 자가 성인(聖人)의 붓으로 깎는 본뜻을 엿보아 알지 못하였은즉,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쓰면, 칭찬하고 깎아내린 것이 자연히 나타나 족히 후세에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사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추후로 고쳐 그 진실을 잃게 할 수 없을지니, 그 종이라 한 것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가히 실록에 따라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사실을 없애지 말라. 범례를 고친 것은 이것으로 표준을 삼으라.’ 하시니, 신 등이 공경하여 명철하신 명령을 받고 드디어 원종(元宗)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 편찬하기를 이미 끝내매, 사적(事跡)이 대강 완전하여 책을 펴면 권(勸)하고 징계(懲戒)하는 것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
전하의 생각하심이 깊으신 지라, 면대(面對)하여 명령하심은 어의(御意)의 독단(獨斷)에서 나왔으니,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반드시 저소손(?少孫)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명백하고 정대(正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반드시 저소손(?少孫)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大)함이 보통 천박한 소견(所見)으로는 그 가[涯]와 끝을 측량하지 못할 것이라.  삼가 손을 잡아 머리를 조아리고 붓을 들어 글로 써서 책머리에 실어서, 뒤의 군자로서 이것을 읽는 자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자세하게 생각하라.”하였으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다.
 【세종7년 12월7일】 경연에 나아가 맹사성(孟思誠)에게 이르기를,
 “변계량이 연전에 청하기를, ‘《고려사(高麗史)》를 정도전이 편수(編修)한 전례에 따라, 모든 참의(僭?)한 이름은 모두 고치고 휘(諱)하여 쓰자.’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도전이 이미 편수한 글에도 기성의 사실은 고치지 않았는데, 고쳐 편수하지 않은 글까지 굳이 추후로 고쳐야 하겠는가. 역사의 기록은 반드시 바른 대로 써야만 하는 것이니, 어찌 숨겨[諱] 써서 그 일을 민멸(泯滅)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우의정 유관(柳觀)과 제학(提學) 윤회도 또한 바른 대로 쓰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찍이 윤회에게 명령하여 서문(序文)을 다시 지으라고 하였더니, 이제 계량이 이렇게 강청하고, 참찬(參贊) 탁신(卓愼)의 논의도 또한 계량과 같으니, 내가 어찌 반드시 말리겠는가. 또 나의 말한 바를 지금의 사관(史官)이 어찌 죄다 쓰지 않겠는가. 윤회가 지은 서문은 쓰지 않고 우선 계량의 말에 좇도록 하겠다.”  하였다.
 【세종8년 11월20일】수찬색(修撰色)이 계하기를, “고려(高麗)의 법으로서 준수해야 할
것은 모두 《원전(元典)》에 수록되어 있사오나, 정묘년(丁卯年)에 고친 의관(衣冠) 제도는
실려 있지 아니하여 후세에 고증(考證)할 길이 없사오니, 그 제도를 예조(禮曹)로 하여금
《고려사기(高麗史記)》와 중외(中外)의 문서를 상고하게 하여, 《원전(元典)》 속의 전조 판지(前朝判旨)에 추가하여 기록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10년 10월3일】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일찍이 진주(晋州) 사람 김화(金禾)가 그
아비를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낯빛을 변하고는 곧 자책(自責)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니, 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효행록(孝行錄)》 등의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항간의 영세민으로 하여금 이를 항상 읽고 외게 하여 점차(漸次)로 효제와 예의(禮義)의 마당으로 들어오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직 제학(直提學) 설순(첁循)에게 이르기를,  “이제 세상 풍속
이 박악(薄惡)하여 심지어는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가 아니지만, 그러나 실로 교화하는 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전에 편찬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20여 인의 효행을 더 넣고, 전조(前朝)와 및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사람으로 효행이 특이(特異)한 자도 또한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편찬해 이루도록 하되, 집현전(集賢殿)에서 이를 주관하라.”  하니, 설순이 대답하기를,   “효도는 곧 백행(百行)의 근원입니다. 이제 이 책을 편찬하여 사람마다 이를 알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고려사(高麗史)》로 말씀하오면 춘추관(春秋館)에 수장되어 있어 관 밖의 사람은 참고하여 살펴볼 수 없사오니, 청컨대 춘추관으로 하여금 이를 초록(抄錄)해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즉시 춘추관에 명하여 이를 초(抄)하도록 하였다.
 【세종12년 11월23일】 상참을 받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춘추관에서는 충신의 성명을 벌써 뽑아 보냈느냐.”하니,  시강관 설순(첁循)이 아뢰기를,“고려의 말년에는 주서(注書)였던 길재(吉再) 뿐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께서 재(再)를 부르시니,  재는 《시경(詩經)》 한 편의 강의를 드리고 돌아갔으니 이는 스스로 기자(箕子)가 홍범(洪範)을 진술한 것에 견준 것이다. 당시에 《시경》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없어서 재가 감히 강의를 드렸단 말인가. 정말 오활한 노릇이다.”  하니, 안숭선(安崇善)이 대답하기를,  “신도 이것을 보고 오활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고, 순(循)이 아뢰기를, “재는 박학한 사람이 아니고 《시경》과 《서경》을 알았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행동은 가치가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사간(司諫)을 추증(追贈) 하고 또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하였다. 순이 아뢰기를,
“재는 위조(僞朝)에서 벼슬하였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는 집안이 좋은 사람이었는가.”  하매, 순이  “한미한 집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조의 대가(大家)의 귀족들은 모두 우리 왕조에 벼슬하였는데, 재는 미천한 선비로서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도잠(陶潛)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도잠은 작은 벼슬로 진(晉)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런즉 그의 행적은 마땅히 포창하여 후세에 전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 도통사(崔都統使)는 공민왕 때에 있어 큰 공로가 있었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순이 아뢰기를, “최영(崔瑩)이 군대를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하였고,  현릉(玄陵)이 죽은 뒤에 왕씨(王氏)의 혈통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당시의 재상은 영을 두려워하여 신우(辛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이 돌아와서
신우를 세운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었으나,  벌써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영은 의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대의를 들고 나와서 우(禑)를 쫓아내고 왕 씨를 세웠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순(循)이 대답하기를, “우가 벌써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는 또 요를 공격하는
일을 일으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李穡)도 여러 번 죄를 주기를 청하는 탄핵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의리를 아는 학자로서 신씨(辛氏)에게 아부하였는가.
‘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선왕(先王)의 아들이 있다.’고 하였으니,  우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왕씨(王氏)를 세우지 않고 우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어나실 줄을 알고 일부러 우를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신 것은 곧 회군(回軍)한 뒤의 일이요,  그 때에는 임금 노릇하시려는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째서 우를 세웠을까. 왕씨의 직계 혈통으로는 누가 있었는가.” 하니, 순이 아뢰기를,  “직계 혈통에서는 후손이 없었고, 다만 공양왕(恭讓王)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현릉(玄陵)은 어째서 신돈(辛旽)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 임금의 자리에 세우고 왕씨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하였을까. 옛적에, ‘차라리 다른 성을 세울지언정 같은  성은 세우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뜻과 마찬가지로다.” 하니, 순이 아뢰기를,
“이색(李穡)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이 나를 풍도(馮道)라고 하지만,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실이 바로 풍도(馮道)와 같다.
색(穡)은 진(晉)나라 때의 사실을 이끌어 말했으나, 진(晉)나라 때에는 북방의 오랑캐가 강성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으니, 이것을 고려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길재(吉再)의 절조는 포창할 만하다. 정몽주(鄭夢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니, 순이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신이 그가 충신이란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춘추관(春秋館)에서 이에 대한 공문을 보내 온 것이 없고, 성상께서도 명령하시지 아니하여, 신은 감히 청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몽주(夢周)의 일은 태종께서 그가 충의를 위하여 죽은 줄을 아시고 벌써 포창하고 상을 내리셨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느냐. 충신의 대열에 기록함이 옳다.”하고, 또 말하기를,
“이숭인(李崇仁)의 재주는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이 모두 그를 지나치게 칭찬하였다. 처음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 근(近)이 숭인(崇仁)을 변호한 글을 삭제했는데, 근과 계량이 이를 다시 편찬할 때에, 추가하여 써 넣었으나, 그 사실은 실정보다 지나쳤노라. 이 역사는 역시 완성되지 못한 책이니,  만일 이것을 고쳐서 꾸밀 때에는 그것을 없애야 될 것이다.   근(近)이 《도은집(陶隱集)》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를 극히 칭찬하였고,
또 벼슬을 추증(追贈)한 뜻을 썼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닌 얘기다. 계량이 근에게 묻기를, ‘어째서 추증하지도 아니한 사실을 썼느냐.’ 한즉,  대답하기를, ‘지금 추증했다고 쓰면 뒤에 반드시 추증될 것이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큰 실언이다. 계량도 숭인을 가리켜 ‘어질다’고 하였으되,  태종께서 보시고 ‘이것은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다.’ 하시므로, 계량이 대답하기를, ‘어질다[賢]는 것을 <그러면> 재(材)로 고치겠습니다.’ 하였다. 근과 계량은 모두 숭인을 색(穡)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니,  설순이 아뢰기를,
정도전(鄭道傳)이 숭인이 문장에 능한 것을 질투하여 그를 죽게 만든 것이요, 충의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색도 그의 문장을 칭찬하였습니다
.” 하였다.
 【세종14년 8월10일】 임금이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보고 춘추관(春秋館)에 전지하기를,    “《강목(綱目)》의 필법(筆法)으로 수찬(修撰)한다면 작은 일의 중첩(重疊)되는 것은 다 기록하기가 어렵겠지마는, 그러나 보기에는 편리할 것이며,  편년(編年)의 필법
(筆法)으로 수찬(修撰)한다면
보기에는 비록 어려우나, 사실을 서술함에는 상세할 것이니,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는가.”  하니,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신장(申檣)·정인지(鄭麟趾)·김효정(金孝貞)·설순(첁循)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대저 역사의 기록은 편년(編年)이 있고 난 후에 강목(綱目)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도 또한 그러하다. 편년의 필법으로 이를 수찬(修撰)하여, 차라리 번거로운 데에 실수가 있더라도 소략하여 사실을 빠뜨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세종20년 3월21일】 임금이 경연에 나아가니 승지 허후(許텓)가 시강(侍講)하였다. 후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본관에서 편찬한 《고려사》를 보았는데, 그 체재가 타당하지 않은 듯하였습니다. 옛부터 역사서(歷史書)를 짓는 데에는 두 가지 체재가 있었습니다.   좌씨(左氏)는 연대를 경(經)으로 하고 나라를 씨[緯]로 하였으며,
반고(班固)와 사마천은 나라를 경으로, 연대를 씨로 하였는데,  역대로 역사서를 짓는 데에는 모두 반고와 사마천을 모방하였으나, 홀로  온공(溫公)만은 좌씨를 의거하였으니, 그것은 본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 때에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사략》이라 한 것은,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흥하고 쇠한 일의 대개만을 서술하여  당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으나,  초고(草稿)만 갖추었을 뿐이고 책은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국초에 와서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하윤(河崙)·윤회(尹淮) 등이 서로 잇달아서 찬수하였으나, 모두 제현(齊賢)의 것을 따라서 너무 소략(疏略)하였으므로 다시 증보(增補)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략한 폐단을 면하지 못하였고 또 역대로 편수한 역사서의 체재가 같지 않으니,  다시 반고·사마천의 체재에 따라 기(紀)·전(傳)·표(表)·지(志)를 지어서 본사(本史)를 만들기를 청하오며, 이어 윤회가 지은 것으로 사략을 만들면 거의 옛사람이 지은 역사서의 체재에 맞을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즉시 지관사(知館事) 권제를 불러서 묻기를, “허후의 말이 어떠냐.”  하니, 제가 대답하기를,“허후의 말은 신도 또한 들었으나  다만 《고려사》는 본초가 소략한데,  만약 기(紀)·전(傳)·표(表)·지(志)로 구분하면 더구나 사기의 체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세종20년 7월8일】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사신(史臣)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사(高麗史)》를 엮을 때 위조(僞朝) 신우(辛禑) 부자에 관한 기사에 이르러서는, 이를 모두 배척하여 우(禑) 또는 창(昌)이라 썼습니다.  신등이 삼가 상고하온 즉, 한(漢)나라 여후(呂后)는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 혜제(惠帝)를 삼았는데도 뒤에 《한사(漢史)》에서 제(帝)라 썼고,  《자치통감(資治通鑑)》과 《강목(綱目)》에서도 역시 제라고 썼으며, 송(宋)나라 창오왕(蒼梧王)은 그의 시종(始終) 사적이 모두 우(禑)와 같사온데  《남사(南史)》에서 이를 폐제(廢帝)라고 일컬었고,  《자치통감》에서는 표제(標題)에 창오왕이라고 일컫고 기사 서술에는 모두 제(帝)라 썼으며, 《강목》에도 역시 송나라 군주로 상례 그대로 썼는가 하면, 무릇 참호(僭號)를 도절하여 점거한 자까지도 오히려 아무 주(主)라고 일컬으고, 일찍이 그 이름을 마구 척호(斥呼)하지 않은 것은 대개 사실 그대로를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강목》에 정통(正統)이 아닌 자는 두 줄로 주(註)를 나누어서 반드시 이름을 썼으며,위 문제(魏文帝) 조비(曹丕)와 오 태제(吳太帝) 손권(孫權)의 유례가 그것이며, 정상적인 시호[諡]가 없는 자도 또한 이름을 썼으니, 진(晉) 해서공(海西公)을 제혁(帝奕) 태화(太和) 원년으로 쓴 유례가 바로 그것이니, 이는 하나의 변례(變例)인 것입니다.  지금 우(禑)는 비록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공민왕(恭愍王)이 자기 아들이라고 지칭하고 대신들에게 부탁하였으며,  원(元)나라 황제의 작명까지 받았고 14년간이나 왕위에 있었사온즉,  더구나 다른 참호를 도절한 자와 비유할 바가 아니온지라 군주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우와 창이 이미 그 정통이 아니고 봉해 준 시호도 없사온즉, 오로지 창오왕에다 비할 수도 없을 것 같사오니, 그 표제에의 칭호는 위제(魏帝) 조비(曹丕), 진제(晉帝) 혁(奕)의 예에 의거하여  폐 왕우(廢王禑), 폐왕 창(廢王昌)이라 일컬으고, 재위(在位)하였을 당시의 사실을 서술함에 이르러서는 창오왕의 예에 의하여,  당시 신민들의 일컫던 것과 사가(史家)가 쓴 그대로 혹은 왕(王),  혹은 상(上)이라 일컬어서 그 사실을 인몰(湮沒)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 하오리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21년 1월12일】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검토관 이선제(李先齊)에게 이르기를,
“네가 지금 관직이 춘추관을 겸임하여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는 데 참예 하고 있으나,  왕씨(王氏)를 용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그 말이 매우 괴상한 것이다. 예전에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갔을 적에 원나라 학사(學士)가 그 연유를 물었으니, 비록 그 말이 황당하지만 후세에 불가불 전하여야 하겠으니, 사책(史冊)에 갖추 기재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였다.

출처 : 신과 역사 그리고 환생
글쓴이 : 김기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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