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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할빈조선족백년사회(2)-할빈지구에서의 ‘3.1운동`

by 8866 2006. 11. 27.
할빈조선족백년사회(2)-할빈지구에서의 ‘3.1운동'

 

한일합방후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조선각지에서는 성세호대한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무단통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진행하였다. 조선의 200여 곳에서 200여만명이 참가한 독립시위운동에서 사망자가 7천 500여명, 부상자가 1만 6천여명, 체포된 사람이 4만 7천여명이나 되였다.

이와 같이 항일민족독립운동은 조선독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온 민족이 한덩어리로 뭉쳐서 일본과 싸운 독립정신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하기에 ‘3.1운동' 하면 곧 조선의 자주독립을 의미하고 ‘3.1정신' 하면 국민이 단결하여 조선의 독립과 자유평화를 쟁취하려는 민족정신을 말하게 된다.

중국에서도 조선의 ‘3.1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1930년 2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와 공청단성위에서는 조선독립운동과 인도혁명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긴급통지를 내여 군중을 발동하고 시위를 조직할것을 호소하였다. 할빈시당조직은 반제대동맹의 성원을 발동, 각 공장, 학교에 만여부의 선언서를 배포하고 강연대와 양걸대를 조직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반제대동맹에서는 도리 안부 제3소학교에서 강연대회를 조직하였다. 이 대회에서 반제대동맹의 조선인성원들이 조선의 ‘3.1운동'경과를 소개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죄행을 까밝히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할것을 호소하였다. 반제대동맹에서는 또 할빈지구의 반제혁명사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1930년 3월 1일 ‘3.1운동' 11주년 기념행사를 조직할것을 결정하였다.

1930년 2월 13일 음력 정월보름을 쇠는 기회를 리용하여 할빈시내에서는 조선인민과 인도인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위행진이 조직되였다. 이날 할빈전기공장, 평민녀자공장, 양복공장, 신발공장의 로동자들과 학생 200여명이 양걸대와 강연대를 조직하여 군중들이 모이는 곳마다에서 강연을 하여 중국인민은 조선인민과 인도인민들과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 , 영국제국주의를 반대할것을 호소하였다. 시위대오가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란 구호를 쓴 붉은기를 들고 남강에 있는 할빈일본총령사관앞에 이르렀을 때 할빈일본총령사관의 요구에 의하여 중국경찰들이 나와 시위군중을 탄압하고 시위골간 5명을 체포하였다. 3월 2일 할빈반제대동맹에서는 재차 조선과 인도의 독립을 성원하는 대시위를 조직하였다. 그번 시위운동에는 12개 군중단체 2천여명이 참가하였다. 시위대오는 신성대가(지금의 상지대가)와 중앙대가에서 시민대회를 열어 반제강령을 통과하였고 선언을 발표한후 동성특별구 경찰서앞에 가서 반제구호를 웨치며 체포된 5명의 군중을 석방할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3월 1일 아성에서는 할빈시내와 성고자, 아성, 해구, 옥천, 사리툰 등지의 675명(당시 시위운동의 지도자 리극화가 중공중앙에 보낸 보고서의 수자)의 조선군중이 아성 조선인 개신소학교 운동장에 모여 조선 ‘3.1운동' 11주년기념대회를 진행하였다. 그 대회에서 할빈반제대동맹에서 파견한 중국동지가 참가하여 연설을 하였다.

‘3.1운동'기념대회에 참가했던 아성현 아스하진 선건촌의 최재민, 박환호, 권태민씨와 아성현 옥천진 홍광촌의 박광영, 아성현 쌍풍향 쌍성촌의 박수호 등은 1965년 8월과 10월에 그 력사사실을 밝혔다. 그날 600여명의 조선족 군중들은 각종 표어와 기발을 손에 들고 줄을 지어 질서있게 아성시가지를 몇기산이나 돌면서 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3.1운동만세!', ‘일본의 만몽개발을 반대한다!' 등 구호를 웨치며 삐라를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날의 시위운동은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여 군중들의 민족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아성현의 반동당국은 이번 조선족군중들의 혁명활동을 각종 방법으로 파괴하였다. 3월 1일 새벽부터 각지의 군중들이 아성현성으로 돌아올 때 반동당국은 동서남북의 대문을 닫아걸고 조선족군중들이 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성내외가 호응하는 방법으로 성문을 열어젖히고 현성으로 들어가 제때에 대회를 열었다. 600여명의 분노한 조선족군중들이 시위행진을 할 때 당국에서는 많은 경찰을 풀어 거리량쪽에서 감시를 하였다.

시위가 거의 결속될 때 할빈반제대동맹에서 파견받고 연설을 하던 중국동지가 체포되였다. 경찰은 '너는 중국사람으로서 조선사람들의 혁명활동에 참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중국동지는 할빈반제대동맹의 대표자격과 정법대학의 졸업증을 내보이면서 반동경찰의 그릇된 론리를 반박하여 무죄로 풀려났다.

그번 '3.1운동' 11주년기념시위운동은 참가한 사람이 많고 성세가 호대했으며 성공적으로 결속되여 북만의 반제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 마음의 보름달
글쓴이 : 문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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