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신스키(維金斯基, 중국명 伍廷康, 1893-1953) :
- 공산국제에서 중국에 파견한 첫번째 대표. 중국공산당의 건립에 많은 도움을 줌.
- 대혁명시기에 진독수의 우경주의노선을 지지. 대혁명실패후 소련으로 돌아감. 국제공산과 관계단절.
- 일본군의 중국침략때 여러편의 글을 발표하여 중국의 항일을 성원함. 이후 저작활동을 하여, 수백편의 학술논문과 정치문건을 작성함. 중국혁명과 동방혁명의 연구에 참고가치 있음.
- 1953년 모스크바에서 병사. 향년 60세
2. 마리(馬林, Hendricus Jonannes Fanciscus Marie Sneevliet, 1883-1942)
- 네덜란드 국적. 중국공산당사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
- 1920년 레닌에 의하여 공산국제의 주중국대표로 임명됨. 1921년 중공제1차대표대회에 출석.
- 1921년 12월 23일, 공산당원 장태뢰를 따라 계림으로 감. 세번 손중산을 만남. 손중산에 여러 건의를 하고, 중국공산당의 건립과 제1차국공합작에 많은 공헌을 함.
- 1923년 소련으로 귀국, 공산국제 동방부에서 근무, 1924년 갈등으로 사직후 네덜란드로 귀국하여 네덜란드 공산당에서 근무
- 1927년 공산국제의 트로츠키파를 동정하였다는 이유로 네덜란드공산당에서 퇴출.
- 1929년 트로츠키조직 사회혁명당을 조직
- 1940년 독일군의 네덜란드침입때, 적극 항전하다 체포됨. 1942년 피살.
3. 요페(越飛, Adolf Abramovich Joffe 1883-1927)
- 러시아 크리미아 사람. 1922년 7월 26일 소련정부의 주북경정부대표로 파견됨
-1923년 1월 26일, 손중산과 공동으로 <<손문,월비선언>>을 발표하여, 손중산의 연아(聯俄)정책의 중요문건이 됨. 제1차국공합작에 중요한 역할을 함.
- 1923년 소련으로 귀국, 이후 공산국제와 소련공산당의 당내투쟁에 휩쓸림. 트로츠키파에 연루되어 박해를 받음.
-1927년 1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자살
4. 가룬(加倫, 와시리 콘스탄티노비치 브류헬)
- 소련공산당의 주중국 수석군사고문. 손중산의 군사업무를 도우고 국민혁명군을 개조하고, 북벌계획을 지도하고, 북벌전투를 지휘함.
- 군사지휘능력이 뛰어남. 소련귀국후 소련공산당의 최후소비에스대표, 소련홍군고급지휘관이 됨.
- 1929년 중동로사건후 특별원동군을 지휘하여 장학량을 물리침. 1935년에 원수의 계급을 받음.
- 1938년 하상호전투를 이끌어 일본군을 물리침.
- 1938년 11월 숙청운동때 나이 겨우 48세인 젊은 원수는 비밀처단됨. 1966년에 명예회복.
5. 루이(羅易)
- 인도국적. 공산국제대표,
- 임의로 공산국제의 지시문건을 왕정위에게 주어, 왕정위가 공개적으로 반공노선을 취하는 빌미를 줌.
- 1927년 소련으로 소환당함. 스탈린이 접견을 거부하고, 중공6대와 공산국제6대에서 엄중한 비판을 받음. 루이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문장을 발표하여 반격함.
- 1929년 공산국제에서 제명된 후, 공산국제를 공격하는 글을 대량 발표함.
- 1954년 거주지에서 사망.
6. 보로딘(鮑羅廷, Mikhail Markovich Borodin, 1884-1951)
- 백러시아인. 황포군관학교역사상 없어서는 안될 인물
- 1923-1927년 소련공산당의 주중국대표로 국민정부고등고문을 맡음. 제1차국공합작을 추진. 황포군관학교를 건립, 소련의 원조를 얻고, 북벌을 조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
-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의 임종전에 영어로 구술한 것을 보로딘이 <<소련에 보내는 유서>>로 기록.
- 장개석의 4.12정변때 묵인하는 태도를 취함. 1927년 장개석이 반공청당후에 보로딘의 체포령내림.
- 1927년 10월 몽고를 거쳐 소련으로 돌아가 연금됨. 중공6대에서 엄중하게 비판받음. 대혁명의 실패와 관련한 책임이 있음. 공산국제는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사함.
- 1931년 미국작가 스트랑의 요구에 따라, 스탈린이 특사함. 모스크바신문의 주편을 마틈. 타스사의 대리책임자, 1949년 2월 스트랑의 간첩안에 연루되어 모스크바에서 체포됨
- 1951년 이르쿠츠크의 노동개조소에서 사망함. 1964년에 명예회복
7. 로미나츠(羅米那玆)
- 그루지아인, 공산국제 대표. 중공87회의의 소집에 중요한 역할을 함. 회의상에서 <<당의 과거잘못 및 새로운 노선>>에 관한 보고와 결론을 작성함.
- 구추백의 좌경정책을 지지함. 귀국후 공산국제6대상에서 엄중하게 비판받음. 이후 코카서스에 유배되어 경제업무를 맡음. 스탈린경제정책에 반대하여 직위박탈당함.
- 1934년 거주지에서 자살. 사후에 영원히 당적을 박탈당함.
8. 미푸(米夫, 1901-1938)
- 28명의 볼세비키지지자와 왕명을 올린 막후기획자. 소련에 돌아간 후 중공의 주공산대표를 여전히 조종함.
- 1938년 숙청운동때 비밀처단. 1976년 명예회복
9. 이덕(李德, Ono Braun)
- 중국명은 이덕, 화부(華夫). 독일 뮌헨 사람. 공산국제대표
- 군사지휘능력이 졸렬했음. 소련홍군의 기병사단의 참모장을 역임. 모스크바육군학교에서 학습. 성적이 뛰어나서 공산국제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중공중앙의 군사고문을 맡음.
- 1933년 10월 상해를 거쳐 비밀리에 중앙혁명근거지로 보내어져 홍군군사위원회와 참모부 고문이 됨
- 당시 중앙서기는 박고인데, 군사지휘권을 이덕에게 넘기고, 그가 혼자 지도에 근거하여 전투를 지휘함. 당시의 지도는 간략한 것이어서 아주 부정확했음. 그래서 그의 지휘는 전선의 실제상황과 차이가 많이났음.
- 홍군의 제오차 반"포위공격"은 모두 이덕의 "단촉돌격", "양개주먹작전" "적을 국문밖에서 맞이함"이라는 정규군의 전술전략을 채택하여 진행함.
- 1935년 1월 준의회의를 소집하고 이덕도 회의에 참석함. 회의에서 비판을 받은 후, 최고군사지휘권이 박탈되고, 군사고문의 직위도 취소됨.
- 이후 이덕은 중앙기관을 떠나 홍군1군단을 따라 장정을 하여 섬북까지 가고, 거기서 기병을 훈련시키고, 나중에 연안군사학원의 교수가 됨.
- 1939년 여름, 이덕은 연안을 떠나 난주를 거쳐 소련으로 돌아감. 출판사에서 일함.
- 1949년 동독으로 돌아감. 마르크스레닌연구소에서 근무. 소련의 정치문학저작을 독일어로 번역함.
- 독릴의 문학연맹주석, 작가협회제1서기를 맡은 바 있음. 대량의 글을 발표하여, 반중국적인 활동을 함. 회고록을 출판하여 중국에서의 자신의 과오를 변명하고, 중국공산당을 공격함.
- 1974년 독일에서 병사
이외에 다린(達林)은 1922년 공산국제대표로 중국에 왔다가 1927년에 모스크바로 귀국한다. 가라한(加拉罕 1889-1937)은 1921년 7월에 중국에 왔다가 1926년 8월에 귀국한다. 1937년 숙청때 체포되어 사형을 받고, 1956년에 명예회복된다. 이외에 라디크(拉狄克), 니콜스키(尼克爾斯基), 쿠츠니츠와, 마마야프, 사러야노와등도 중국에 와서 혁명지원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들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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