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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스크랩] 장춘해방전역과 75團

by 8866 2006. 11. 27.
장춘 해방전역과 75퇀

 

   
▲ 연길에 진출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 (1945년 12월 연길)

제1차 장춘해방전역에 참가한 75퇀(조선족퇀)의 전신은 연변경비1퇀이다. 이 경비1퇀은 1945년 “9.3”후 쏘련원동군소속 항일련군 88려단의 강신태가 연길에 진주하여 조직한 경비퇀의 일부와 리익성 등 연안에서 나온 조선의용군 5지대 골간들로 편성된 부대로서 조선의용군 16퇀이라고도 불리웠다.

경비1퇀은 연변의 삼도만, 모령, 천교령, 안도, 돈화 등지에서 토비숙청을 하다가 시국의 변화에 따라 제1차 장춘해방전역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형세는 국민당이 장춘 등 주요도시를 점령하고 있었고 지금의 길림성을 길료(吉遼)성이라고 하였는데 성위와 성군구는 반석현에 있었다. 동북민주련군동북총부(동총)의 지시에 따라 성군구부대를 재편성할 때 경비 1퇀은 25려 75퇀으로 편입되였다.

제1차 장춘해방전역은 동총의 지시하에 길료군구의 주력이 되었다. 사령원은 림풍, 부사령원에 진광이였고 장춘을 진공하는 방향에 따라 동북종대, 동남종대, 서남종대 새개 종대로 나뉘였는데 75퇀(조선족퇀)은 동남종대에 소속되였다.

동남종대의 진격로선은 장춘시 동쪽의 도하자와 남쪽의 헤이주이즈로부터 북상, 옛 건국대학(지금의 장춘대학자리), 대륙과학원(응용화학연구소자리)를 거처 만자회, 동식물공원일대에서 격전을 벌리고 륙군병원(지금 길림대학 재2림상병원 자리), 자강소학, 훈춘가 일대에서 저항하는 대량의 적을 소멸하였다. 국민당군대에 편입된 일본인군인과도 접전하였다. 전역이 결속되던 4월 18일 오후에는 아군과 배합하여 위시정부 청사를 점령하고 세 개 종대가 협력하여 적군의 소굴인 중앙은행을 공략하였다. 이 최후전전의 순간에 은행에 포위되였던 수천명 적군이 반포위돌파로 밀물처럼 반격해나오는 바람에 75퇀(조선족퇀)은 동남방향인 민강로로 후퇴하면서 큰 손실을 보았다. 국민당반동파는 발악을 하다가 최후엔 아군에 투항하고 말았다. 투항을 접수하러 앞으로 나가던 박락권퇀장이 교활한 적군의 날창에 찔리여 희생되였다.

이 전역에서 아군은 적군 2500여명을 살상하고 국민당의 중장지휘 진강정, 시장 조군매 등 고위급 장령을 포함한 1만 4000여명을 포로하였다. 아군도 적지 않은 희생을 보았다. 75퇀(조선족퇀)에서도 170여명의 장병이 희생되였다. 전역이 끝난후 75퇀은 구태시에서 잠시 휴식정돈하고 연변으로 개선하였다.

길림신문 “장춘조선족”편찬위원회 04월 21일

출처 : 한복 입는 사람들
글쓴이 : 진달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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