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빈시조선민족백년사회(1) |
할빈 조선민족이민이 시작된 기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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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력사를 안다는 것은 자기민족을 아는 첫 과제이다. 오늘의 우리민족은 력사에 있던 우리민족의 발전이다. 때문에 민족의 력사를 알아야만 우리민족의 우수한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나는 우리민족의 얼(정신)을 지켜보려고, 민족의 지위를 찾으려고, 후대들에게 민족문화와 우수한 전통을 전해주려는 마음에서 수십 년 간 수집, 발굴, 보관하였던 력사자료를 글로 정리하여 조선민족간부로서의 의무를 리행하고저 한다. 원래는 천천히 사료를 더 많이 발굴해 보려 했는데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타계하는데다 내 나이 75세라 앞날을 예측키 어려우니 금년부터 서둘러 집필을 시작하였다. 력사자료 정리에서 우리민족의 명칭에 대하여 력사를 존중하는 각도에서 원문을 인용할 때는 원문명칭 그대로 썼다. 대한제국 시기의 사료에서는 한인 학교, 한민회 등으로 나오는데 이를 그대로 썼다. “한일합병”후 일본은 한국국토를 다시 조선이라 하였다. 그 시기 사료에 조선인, 조선인거류민회등으로 나오는 것도 그대로 썼다. 중국은 100여 년의 력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국가정권이 바뀌였다. 각 시기마다 우리민족자체의 이민 원인과 이민 과정도 달랐으며 사회지위와 사회발전도 달랐다. 때문에 나는 할빈시 조선족의 백년 력사를 4개 부분(시기) 즉 제1 부분은 청나라말기(1898년 이민시작으로부터 1911년까지) 제2부분은 중화민국시기(1912년 중화민국 건립으로부터 1931년 9.18 사변까지) 제3 부분은 위 만주국시기(1932년 만주국 건립으로부터 1945년 8.15 해방까지) 제4 부분은 중화인민공화국시기(해방후부터 20세기 말까지)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 글을 쓰는데 사료의 부족으로 또 자신의 력사 지식의 제한으로 잘못된 점이 많으리라고 생각 되여 독자들의 가르침을 바란다. 우리민족의 힘을 모아 공동으로 우리의 력사를 올바르게 쓰기를 기원한다. 할빈이란 지명이 맨 처음 나타난 것은 1822년이다. 그때는 자그마한 어촌 이였다. 할빈이란 만족어로서 1864년 흑룡강장군아문에서 보관하고있는 문건에 만족문자로 “할빈”이라고 쓴 기록이 있다. 현대화 도시로서의 할빈은 100여 년 력사를 가지고 있다. 할빈의 도시건설은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로부터 시작 되였다 1896년 5월 중국의 리홍장은 청나라특사의 신분으로 제정러시아 페테로부르크에서 신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이때 리홍장은 제정러시아정부 대장대신 우이터와 “중러밀약”(中俄密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동북경내 동쪽 수분하로부더 서쪽 만주리까지의 동청철도(민국 이후에는 중동철도 혹은 동성철도 라고 함) 부설권을 얻었다 1898년 5월에 제정러시아는 할빈을 동청철도의 관리중심으로 결정지었다 계속하여 1898년 7월에는 “동청철도 공사 련속 계약”을 맺어 제정러시아는 할빈서부터 려순까지의 동청철도 남부선 부설권을 가졌다 1897년 여름 동녕현 삼차구 부근에서 동청철도 착공식이 있은 후 20여만 명 로동자가 동청철도 부설공사에 투입하였다. 동청철도 동쪽선인 할빈으로부터 러시아의 시베리야철도를 잇는 우쑤리스크(중국어로 梔城子)까지는 1901년 3월 3일에 기차가 개통, 동청철도 서쪽선인 할빈으로 만주리 까지는 1903년 7월 14일에 개통하였다 1903년 동쪽의 수분하로부터 서쪽의 만주리까지 동청철도 전선이 개통되면서부터 많은 로동자, 청부업자와 공상업자들이 할빈에 모이기 시작하여 할빈은 근대 도시로 신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동청철도 부설로부터 시작하여 할빈 이란 도시가 형성 되고 동시에 조선민족의 이민이 시작 되였다 조선민족으로서 제일먼저 할빈 땅을 드딘 사람은 츄푸뤄프라고 하는 러시아 조선사람이다. “동청철도 연혁사”(1923년 러시아문 출판)의 기재에 의하면 동청철도 부설을 위하여 러시아 측에서 파견한 선발대는 1898년 3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였다. 이 선발대는 기사 스터뤄브스끼를 위수로 하여 기사, 기상기술자, 의사, 통역, 주방장, 로동자 그리고 병사들까지 약 50명이 30대의 마차를 타고 삼차구, 년고탑, 길림, 유수, 라림을 거처 4월 24일에 할빈의 향방에 있는 전씨술공장(田家燒鍋)에 도착하였다 이 선발대의 통역이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는 조선사람 츄푸뤄프이였다. “동청철도 연혁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였다. 선발대가 할빈에 도착한 이튼날 스터뤄브스끼 등은 말을 타고 송화강변을 시찰하였다. 그들은 마가구(馬家溝) 나루터를 지나 지금의 도리구 제홍가 부근의 고지에 올라서서 송화강을 내다보았다. 강 남안 에는 비교적 좁고 낮은 언덕(지금의 조림공원부터 우이궁 일대)이 보였다. 이 언덕 우에는 초소 하나와 초가집 세 채가 보였다. 동쪽으로 한참 내려가 지금의 도외구 승덕가 부근에 인가 10여 채로 이루어진 마을이 보였다. 고지에서 송화강변까지는 넓은 저습지대로서 강변까지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밭에서 일하던 중국농부 둘이 호기심을 품고 우리 곁에 다가왔다. 이때 조선인 통역 츄푸뤄프가 그들에게 강가로 가는 길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남강고지의 동쪽 끝(지금의 문화공원)에 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과연 일행은 남강의 동쪽 내리막에서 길을 찾아 강변까지 도착했다. 낮은 언덕 우에 있는 초소를 찾아가 보니 포대(砲台)하나를 10여명 청나라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당시 목격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 할빈에 왔을 때 남강구 높은 지대는 옥수수, 조, 수수밭이였고 화원가와 아동공원 부근은 묘지들이 있었다. 지금의 도리구 석두도가 쪽에는 아편이 심어져 있었고 공장가와 매매가 부근은 큰 늪이 있어 물오리가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고이가와 경위가일대는 큰 비슬 나무들이 우거겼다고 한다. 또 “동청철도 연혁사”에는 향방에 있는 전씨술공장은 얼마 전 토비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재물을 빼앗기고 주인은 피신하여 집이 비여 있었다고 한다. 하여 조선인 통역 츄푸뤄프를 아스하성(지금의 아성시)에 보내여 술공장의 주인을 찾아 데리고왔다 장시간의 담판을 거처 은(銀)8000량이란 싼값으로 32칸의 집과 전부재산을 매수하여 수선한 후 철도부설공정국의 사무실과 숙소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전씨술공장의 위치는 동향방에 있었는바 지금의 연복가 일대 코리아타운이 있는 부근에 해당된다. 이로 보아 처음 할빈에 온 조선사람 츄푸뤄프의 거주지는 철도부설공정국의 사무소와 숙소가 있는 향방구 연복가 부근에 있은 셈이다. 러시아 통역 츄푸뤄프의 조선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어떻게 되여 통역으로 활약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나중에 츄푸뤄프가 할빈에 정착하였는지? 아니면 좀 살다가 러시아로 돌아갔는지 그 행적을 아직 찾지 못하였다. 허나 그는 맨 처음으로 할빈 땅을 디딘 조선사람으로서 러시아 이름과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이로 보아 할빈 조신민족 이민이 시작의 기점은 츄푸뤄프가 할빈에 왔고 또 할빈의 도시건설이 시작된 1898년 4월로 보아야 할 것이다. 흑룡강신문 서명훈 01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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