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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할빈조선족백년사화(4)-황산저자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

by 8866 2006. 11. 27.
할빈조선족백년사화(4)-황산저자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

 

황산저자농장은 1925년에 건립한 할빈 혜제와세다회사(惠濟稻田公司)에서 경영하였다. 이 회사는 “수전 100헥타르의 수입이 한전 500헥타르의 수입과 맞먹으니 그 리익이 크다는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일로서 수전개척을 제창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은전 10만원을 모아 회사를 꾸리고 할빈항무국의 왕순존이 리사장이 되고 마자경이 경리를 담임하였다.

이 회사는 할빈시가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되는 아스하량안에 토지 574헥타르를 구매하였다. 러시아 공정사를 청해서 측량한후 5000헥타르를 관개할수 있는 버들보를 막고 20여리 수로를 닦았다. 1927년부터 수전에 익숙한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소작이나 방청으로 수전 300헥타르를 풀었다.

‘동성특별구행정장관공서' 실업과에 남아있는 혜제와세다회사의 보관서류를 보면 한 헥타르의 산량 벼 20섬(石)을 잡고 소작비로 8섬, 수리비로 2섬 즉 총산량의 절반을 받아갔다. 한해농사가 잘 됐던 못 됐던 심지어 재해로 곡식 한알 거두지 못해도 이 소작비와 수리비만은 꼭 받아갔다.

황산저자 조선농민들은 새해농사를 위하여 해마다 혜제회사의 자금을 10개월간 3푼 리자를 주고 고리대를 채용하였다. 1929년의 조선농민들의 고리대 리자만해도 은전 만원이 넘었다. 회사의 빚을 진 조선농민들 수십명의 명단을 보면 빚이 제일 적은 최두룡이 76원 80전이고 보통 2,3백원이며 천원이 넘는 사람으로 김성일, 김인호 등 셋이나 있었다. 빚을 제일 많이 진 정도순이는 2531원 22전이였다. 소작이나 방청농사를 지어서는 일생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었다.

황산저자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는 동북서류관에 보존되여있는 할빈 동부교외 황산저자농민조합쟁의단(荒山咀子農民組合爭議團)의 ‘선언서'가 설명해주고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선언서
전 만주의 로동자벗들이여!
전 만주의 농민벗들이여!
모든 피압박대중들이여!

황산저자의 100여호 농민들은 농사지을 토지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하여 하는수 없이 혜제회사(惠濟會社)의 논을 소작으로 부치고있다.

혜제회사는 할빈에서 세력이 가장 큰 항무국 국장을 비롯한 관리와 자본가들이 주금을 모아 꾸린 회사이다. 이 회사는 5년전(1925년)에 수십만원의 큰 자금을 들여 황산저자에다 수리공사를 수축하고 수전을 풀었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민들을 구제한다는 듣기 좋은 구실로 회사라는 현대적 간판을 내걸고 농민들을 참혹하게 착취하고있다. 그들은 회사를 경영할수록 자본이 늘어나고 벼슬이 올라가고있으며 우리에 대한 착취수단도 갈수록 악독해지고있다.

혜제회사는 개간을 시작한 그 이듬해부터 가장 참혹한 방청제도를 실시하였다. 죽지 못해 회사의 소작농으로 된 조선인 농호들은 혜제회사의 순전한 농노이다. 지주들은 방청제도로서 농민들을 착취하고있다. 매 농호에 2헥타르의 땅을 소작으로 내주고 좁쌀 한섬, 콩 한말, 소금 30근을 선대해주고 가을에 가서는 제멋대로 이름을 달아 곱으로 긁어갔다. 그리고 그 무슨 경작자치비, 수리비 하는 따위의 명칭으로 매 헥타르에 벼 두섬씩 더 가져갔다. 그자들은 해마다 수리비를 받아가지만 수리시설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해마다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부득불 회사의 대부금을 써야 했다. 농민들끼리 서로 담보를 서서 그 빚을 갚도록 하고 대부금을 쓰다보니 농민들은 모두가 그자들의 대부금을 꾸어쓴 노예로 되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우리가 땀흘려 가꾼 곡식을 해마다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깡그리 몰수해가군 했다. 그자들은 강탈을 다그치는 한편 압박수단도 갈수록 참혹해졌다. 그놈들은 무장대까지 무어놓고 (그 비용도 우리가 부담) 누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죄명을 씌워 체포하거나 내쫓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목슴을 유지해나가기 위하여 여직껏 가장 온순한 태도로 그놈들을 대할수밖에 없었다. 우리 농민들이 보막이일을 하다가 두 사람이 생명을 잃었으나 지주놈들은 한마디 문안도 하지 않았다. 놈들이 곡식을 깡그리 빼앗아가도, 놈들이 우리를 내쫓아도 우리는 통곡만 하며 자기의 신세를 원망할뿐이였다.

혜제회사가 건립되여 4년째 되던 해였다. 놈들은 본래 과분하다고 했던 그 방청제도를 또다시 뜯어고쳐 더욱 참혹하게 착취하였다. 식량비와 대부금을 줄이고 수리비와 경작비는 더 높여놓았다. 우리는 더 참을수 없어 들고일어났다. 우리 대중들은 한결같이 일떠나 혜제회사를 포위하고 방청제도를 반대해나섰다. 회사에서는 대중의 시위에 하는수없이 방청제도를 소작제도로 고치였다. 하지만 소작제도도 방청제도보다 크게 나은 점도 없었다. 소작료는 매 헥타르에 6섬5가 되였다. 그중 5되는 부분은 그놈들이 송가전의 소작인(한족) 들한테서 받아내지 못한 빚을 모두 황산저자 농민들에게 받아내는 판이였다.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수 있단 말인가! 그 외에도 그 무슨 수리비요, 토지개발비요 하는 명목으로 적지 않게 거둬갔다. 그 전해는 수재를 입어 절반 수확밖에 거두지 못했으나 지주는 벼 한알 남기지 않고 몽땅 긁어갔다. 도대채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농민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고생스래 농사지어 쌀 한알 먹지 못하고 초가을부터 춘삼월까지 주린 배를 끌어안고 견디여왔으니 우리 농민들의 생활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래도 강도같은 지주는 올해 또 소작료를 올리려고 한다. 더 참을수가 없어 황산저자의 400여명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또다시 일떠섰다. 방청제를 하려면 3년전의 규정대로 하고 소작제를 하려면 작년의 규정대로 할것을 요구했지만 간악한 혜제회사측에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뿐아니라 토지경작권을 조준포에게 팔아먹었다. 조준포는 경리인 마자경과 진학공을 파견하여 우리가 경작하던 토지를 빼앗아가고 우리를 내쫓고있다. 우리같은 농민이 토지를 떠나 어떻게 살아나갈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최후의 길을 선택하였다. 전 만주에 사는 우리와 같은 환경에서 헤매는 형제들이여, 모두 일떠나자! 우리의 투쟁이자 당신들의 투쟁이며 당신들의 투쟁이자 우리의 투쟁이다! 모두 한결같이 일떠나 서로 원조하자! 우리는 죽어도 토지를 떠날 수 없다! 관청의 체포와 압박을 반대하자! 지주의 소작료를 감소시키자! 전 만주의 로농대중은 한결같이 일떠나 황산저자의 농민투쟁을 지원하자!

                                                                   1930년 4월 26일

할빈동부교외 ‘황산저자농민조합쟁의단' 이 선언은 황산저자 조선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선언을 발표한 황산저자 조선인농민들은 5월 1일 농민대표 허극 (許克, 후에 항일련군 제3군 군장, 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을 담임했던 허형식임)을 위수로 한 쟁의단 골간들의 령솔하에 70여명이 할빈시내에 와서 혜제회사와 투쟁하였다. 이날 오후 일부 청년들은 또 허극의 령솔하에 해구, 이층전자, 취원창에서 온 조선인청년들과 함께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을 습격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출처 : 마음의 보름달
글쓴이 : 문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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