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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스크랩] 하나님은 없다

by 8866 2006. 11. 24.

 

 연재 8

 그리고 한 가지 더 첨부힐 것은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겪는 건 죄를 지은 인간 뿐이 아니다. 모든 포유동물들이 그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동물들도 인간처럼 무슨 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성결합은 자연스럽게 부부와 사랑과 가정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외면하고 있다. 남녀간의 자원적인 성결합과 그를 통한 사랑은 인간에게는 행복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내린 징벌은 아담과 이브에게 도대체 행복이 되었을까 불행이 되었을까.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생활과 벌을 받은 인간, 이성의 결합과 부부사랑, 가족, 후대를 가진 인간생활상을 비교해보면 그 해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은 아무 하는 일이 없었다. 동물들을 다스린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지시로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노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무료하고 가치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할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는 것도 전혀 없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성간의 사랑도 모르고 부부나 가정의 행복도 모르고 선악도 모르는, 문자 그대로 무위도식자였다. 무능하고 무지하며 무료하고 무의미한 시간들의 반복이었다. 무엇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 하나 권태뿐이었다.

 



인간이 선악과를 훔쳐먹고 처음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성기를 가렸던 무화과나뭇잎


 

 그러나 벌을 받은 다음부터 인간은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 남녀의 성결합, 부부의 사랑, 화목한 가정, 자식, 노동 그리고 죽음...

 이중에서 노동을 제외하고는 인간도 동물과 다름없다.

 아마 불행을 꼽으라면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장수가 아닌 제한된 생명 때문에 잉태와 출산에 의한 후대계승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노동은 힘들긴 하지만 인간을 권태와 무료의 포로에서 구원하여 일거리를 가진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었으며 그를 통해 지혜를 늘리고 문명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처음에는 선악과만 금지시키고 생명수는 식용이 허용되었었다. 그러나 선악과는 이미 훔쳐먹었으니 지켜야 할 필요가 없어졌고 반대로 생명수를 지키게 한다. 하나님이 인간생명에 한계를 지어준만큼 그들이 생명과일을 훔쳐먹으면 다시 장수할 것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그런데 생명수를 그토록 엄하게 지키는데는 (천사들의 그룹을 동원하고 화염검 즉 불칼까지 들고서)또 다른 의미가 중첩된다.

 하나님이 비록 인간에게 유한생명을 내리긴 했지만 생명과일만 먹으면 장수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생명수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히고 생명수의 효험이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태어 천사들을 동원하여 생명나무를 지킬 것 없이 없애버렸을 수도 있었을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피조물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창조할 수는 있어도 일단 어떤 기능이나 효과가 피조물에게 주입된 다음에는 원초적무의 상태에로 철회시킬 수는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선악과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지만 과일의 효험이 인간에게 제공하고 있는 능력 즉 지혜를 하나님은 무효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룹>이란 분명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천사들의 존재는 오늘 날까지도 베일에 감싸여 있다. 천사들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는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의 소유자인지 아니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인지...

 성경의 내용을 보아서는 그들도 피조물임에는 틀림없다. 우주의 모든 것이 피조물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지혜와 능력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기술이 없다. 만일 그들도 신적존재라면 하나님은 그가 그토록 원하는 유일신이 될 수 없을 것이며 만일 그들도 인간이라면(피조물)아담은 최초의 인간으로 될 수 없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과 인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다만 날개가 더 있을 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

 

 인간의 원죄는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지혜를 도둑질이라는 부당한 방법을 통해 얻긴 했지만 그것은 도둑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특수환경 때문이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고 처음으로 행한 일은 무화과나뭇잎으로 성기를 가리는 도덕적행위였다. 그때문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웬일인지 식용을 엄격히 금지했던 선악과를 훔쳐먹은 인간에게서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백지화시키지 않는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뱀의 지혜가 권장된다. 인간에게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한 사악한 뱀의 지혜는 저주받을 대신 아이러니하게도 비둘기의 착함(선함)과 동일시된다. 어쩌면 일단 금과를 먹은 다음엔 하나님도 그것의 무효화가 불가능해서였던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은 지혜를 가진 인간이 처음으로 선택한 동작(자각적 행위), 치부를 가리는 인간의 선한 동작을 가죽옥을 지어입힘으로서 완곡하게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인정이 묵인 또는 관용이라고 해도 인정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이 동물과는 다른 지혜로운 인간, 도덕적인 인간, 문명한 인간, 자각적인 행위자로 새롭게 역사의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지어입혔다는 가죽옷


 

 이른바 원죄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부당한 차별시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었다.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한 차별시라고 하는 것은 그가 천사에게는 지혜와 능력을 주었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이러한 반항이 처음부터 자각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자각적일 수가 없었다. 최초의 인간에게는 그러한 판단력이 없었다. 말이나 겨우 번지는, 어린애의 지능보다도 못한 저능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수락한 것은 인간에게도 선악을 알려는 호기심이 희미하게나마 잠재했던 것임을 알수 있다.

 권능과 부당함에 대한 반발은 정의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선악과를 훔쳐먹은 인간은 또다시 반항을 포기하고 순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결국 도덕은 타자를 의식한 나머지 자아의 욕망을 은폐 또는 반납하는 일종의 자학과 억압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인간이 두려워한 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죄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라 자신의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수치심이었다. 인간은 형벌을 받는 것보다 수치를 느끼는 것이 더 고통스럽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출처 : 문학과 작가
글쓴이 : 아데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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