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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판

[스크랩] 중앙아시아역사

by 8866 2006. 10. 2.

중앙아시아역사

 

흉노제국의 발흥

 

스텝 국가 (주-스텝 (steppe) [명사] 사막 주변에 펼쳐져 있는 초원 지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몽골 등지에 발달하였으며, 밀농사와 목축에 적합함) 흉노제국(匈奴帝國)의 형성기는 중국 역사상 제 1차 전성기였던 한조(漢朝 206BC - 220AD)와 한조가 멸망한 후의 혼란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으며, 이 때에 스텝 지대를 다스린 세력은 흉노제국이었다. 흉노제국은 스텝 지대에서 일어난 최초의 국가조직은 아니었으나, 흉노제국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학자들은 근래에 흉노를 실질적인 최초의 스텝 제국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흉노는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족(韓族) 등 소위 알타이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 연합체로서 지도층은 알타이어의 하나인 튀르크어의 한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이미 중국에 한조(漢朝)가 건설되기 이전에 스텝을 석권하고 있었다.

 

초기에 흉노제국의 통치 영역은 오르콘(Orkhon), 셀렝가(Selenga) 강 유역과 외튀켄(Ötüken) 평원, 그리고 오르도스 지방이었다. 이 당시 스텝의 서쪽, 즉 아무다르야 강과 시르다르야 강 유역과 카스피해 지역에는 스키타이민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들의 적대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그들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4세기 말경으로서 중국의 전국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흉노가 중국을 크게 위협하는 고로 진(秦)나라는 기원후 221년 만리장성 구축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흉노는 다른 북방 민족들과 연합하여 진(秦)에 대항하며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흉노는 연(燕), 진(秦), 한(漢)이 계속되는 동안 이들 중국 왕조들에게 있어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중국은 이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시황제가 구축한 만리장성은 칸수성의 린타오에서 요동에 이르는 것으로 약 5천km에 달했다.

 

진의 만리장성 구축과 적극적인 군사대응으로 흉노 등 북방세력이 잠시 쇠퇴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묵돌(冒頓)의 등장으로 흉노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묵돌(冒頓)의 등장

흉노제국의 창립자는 투멘(頭曼; Tume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여러 유목 부족 집단들을 통합한 후에 선우(單宇 : Shan-yu)라는 공식적인 관직명을 가짐으로써 흉노제국을 출범시켰다. 묵돌(冒頓: Motun)은 자신의 아버지 투멘이 후궁 연씨의 아들을 왕위에 계승하려고 하는 것에 반발하여 10만 기병대를 출동시켜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정권을 탈취하였다. 선우가 된 묵돌은 정권을 강화시킨 후에 먼저 서쪽으로 천산산맥과 칸수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후에 동쪽으로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국(東湖國)을 멸망시킴으로서 명실공히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이처럼 북방을 장악한 묵돌이 중국을 공격하게 되자 기원전 201-199년에 중국과 휸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마침내 묵돌은 한고조(漢高祖)를 퇴패시키고 승리하였다. 이에 한고조는 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기원전 198년 한(漢)의 신하 유경(劉敬)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화친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흉노 선우에게 공주를 출가시킨다. (2) 비단, 곡물 등 매년 조공을 바친다. (3) 흉노와 한(漢)은 동등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한다. (4)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상호 침입을 중지한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화친조약은 중국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흉노에 대해 중국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묵돌의 영역확장을 위한 군사원정은 계속되었다. 그의 정복 사업의 결과로 묵돌 통치시대에 제국의 경계는 동쪽으로 만주지방, 서쪽으로 아랄 해, 북쪽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쉬 강 유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 지방과 티벳고원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로서 약26개의 종족과 국가를 복속하여 통치권에 두었다.

 

이처럼 묵돌은 중국을 위협하여 중국과 불평등 화친조약을 맺고 수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동북아시아의 우세한 세력으로 제국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마침내 중국은 가능하면 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유화정책을 쓰면서 분열과 분리정책을 함께 써나가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이치이(以夷治夷) 정책은 이 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북방정책의 노선이 되어왔다.

 

동서흉노의 분리

기원전 174년 묵돌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노상(老上) 선우가 등극하였다. 노상은 부친의 정책에 따라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복속국에 대한 통치를 강화시키고, 중국 도성 장안(長安) 근교까지 진군하는 등 중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압력도 더욱 더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화친조약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흉노의 침범이 계속되자 중국 조정 내에 흉노토벌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상 선우를 이은 군신(君臣) 선우 때에 흉노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중국은 흉노제국 내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흉노족 지도층 내부의 분열을 위해 이간질를 통해 흉노세력 약화를 가속화시켰다.

 

이렇게 흉노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후한(後漢)의 광무제는 그 동안 60여 년간 지속되어온 화친조약을 버리고 흉노정벌에 나섰다. 당시, 중국으로서 국가 경제에 주요재원이 되는 비단 수출 증대를 위해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흉노 정벌은 선결과제가 되어있었다. 한(漢) 무제(武帝)는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를 회복할 목적으로 흉노를 대대적으로 정벌했는데, 이로 인해 흉노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후에 흉노는 제국내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제국이 남(南)과 북(北) 흉노로 분열하게 되었고, 비단길에 대한 통치력 상실과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중단됨으로써 패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 마침내 흉노는 기원후 155년 다른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며 몽골계로 추정되는 선비(鮮卑)족과 연합한 중국 후한에 의해 멸망하였다.

 

흉노제국이 멸망한 후 스텝 지역에는 혼란과 정치적인 불안정 시기가 시작되어 5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역사 기록에 의해 분열시대 - AD 2세기부터 6세기말 - 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남흉노의 후세들로 추측되는 부족들이 수 개의 왕조를 세웠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조는 거의 없다.

 

한편, 흉노의 쇠망으로 인해 생긴 정치적 공백은 어떠한 스텝 세력에 의해서도 메워지지 못했는데, 당시 구체적인 흉노제국의 영향력과 정도는 사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흉노사람들은 유목 국가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수 세기 후에 등장한 튀르크족(돌궐족)이 세운 돌궐제국은 흉노제국의 군사와 국가 조직 형태를 답습하여 세워졌다.

 

흉노의 문화

흉노인의 언어는 알타이어로서 지도층은 기원후 3세기 북위(北魏 Tabgach)에서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궐어의 원시어(原始語 Proto-Turkic)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흉노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25고분에서 출토된 인물 자수화를 통해서 흉노인들의 인물상을 짐작할 수 있다. 흉노 인물은 엄숙한 자태를 가졌는데 모양은 발이 짧고, 비교적 크며 예리한 눈매를 가지고 있다.

 

흉노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馬具), 양털로 엮은 깔개 등과 금속 제품이나 골기(骨器) 등에 나타난 동물 문양 등을 통해서 흉노사회에서는 돌궐사회에서처럼 민요나 예술 등에 유목민족적인 요소가 풍부하게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용담을 담은 민요가 발달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대표적인 악기(樂器)로는 유목민족 전통 악기인 호가(胡茄)와 북이 있다.

 

한편, 금속 출토품 중에는 사슴, 사자, 말 등이 서로 물어 뜯고 있는 문양들이 많이 발견 되는데, 이것은 흉노가 스키타이와 관련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흉노의 대표적인 수예품으로는 펠트 위에 여러 색상의 털실을 사용해 장식한 것을 들을 수 있다.

 

흉노 사회의 혼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족 간의 문제였다. 또한 형이나 동생이 죽었을 때 형수나 계수를 아내로 삼는 수혼(嫂婚)제도가 존재했었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가 신의 아들로 표현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등장하는 천신의 대리자로서의 천자(天子)의 개념은 주왕조 설립자와 초기 왕조가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북방 알타이민족의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상 숭배 사상은 흉노인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관을 사용하였으며, 죽은 자가 생시에 사용하던 금, 은 장식이나 의복 등을 함께 묻었다. 특히, 지도층 귀족이 죽었을 때는 노예를 함께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흉노사회에는 샤마니즘의 흔적도 많이 나타난다. 인간과 신을 중개하는 무당이 있었으며 주술도 행했다. 또한 어떤 무당들은 의술도 행했는데, 한서(漢書)에는 흉노 사회의 무당이 실신한 사람을 의술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훈제국

흉노제국이 선비와 중국의 연합군에 의해서 기원후 155년에 멸망된 후, 흉노의 지도층은 세력을 잃고 서진(西進)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진하여 우랄산맥을 넘어 정착하게 된다.

 

흉노제국이 붕괴된 후 약 2세기가 지나서 유럽에 돌풍을 몰고온 훈족(Huns)은 바로 이 흉노제국의 후예들로서 중국의 중앙아시아 정벌 후에 서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일 개연성이 많다. 학자들이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 등에 기인한다. 흉노(匈奴)라는 이름은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원시 알타이어(Proto Altaic) 흉(hyung)과 중국어 노(奴)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훈(Hun) 혹은 흉(Hyung)족을 경멸시하여 부르는 것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다. 즉, 흉노인들은 자신들을 흉(hyung) 혹은 훈(hun)이라 불렀으나, 중국인들이 경멸조로 이 말에 '노예'를 의미하는 노(奴)를 첨가시킨 것이다.

 

훈족은 4세기 중엽 알란(Alan)國을 정복한 후, 374년경 볼가 지역에 등장했다. 당시에 흑해(黑海) 북부 지역 돈 강과 드네프르 강 유역에는 東고트族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서부지역에는 西고트族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달族은 헝가리 지방에 살고 있었다. 이외에도 슬라브계 및 페르시아계 종족들이 흑해 북부와 발칸반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다.

 

훈제국은 기마를 사용한 기동력과 기마전술을 가지고 東고트를 공격하여 374년 동고트를 붕괴시켰다. 훈제국은 후리문트(Hurimund)를 동고트 통치자로 임명하고 서코트를 공략하여 375년 서코트 왕 아타나리크(Atanaric)를 불가리아 지역으로 몰아내었다. 이리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훈족에 밀린 서코트의 로마 유입으로 395년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급격히 분리되었다. 이와 같은 훈족의 침입으로 고트족 이외에 동유럽의 부족들이 로마 영내로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이탈리아 로마는 크게 위협되었다. 로마가 분리되면서 훈족의 로마 침입은 가속화되어 주력 부대가 발칸반도와 트라키아(Thracia), 또 다른 주력 부대는 코카서스와 에르주름(Erzurum)을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였다.

 

훈족의 로마 공략과 대외외교는 400년경 울드즈(Uldyz) 통치시대에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을 압박하던 울드즈는 투나 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이에 다시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반달족과 훈의 공격을 받아 서진한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다.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402년 알라리크(Alaric)가 이끄는 서고트족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다음에는 동고트의 라다가이수스(Radagaisus) 장군이 반달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하여, 이탈리아는 매우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훈제국이 개입하여 훈의 울드즈와 로마군 연합군대는 라디가이우스 군대를 제압하고 라디가이우스를 처형함으로 로마는 구출되었고 훈제국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훈제국의 영토는 아랄 해 동부지역에서 동유럽, 발칸반도에 이르렀다.

 

410년 울드즈가 사망하고 카라톤(Kara Ton)이 훈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카라톤은 412년에서 422년까지 훈제국의 동부지역을 통치했으며, 422년에 훈왕족의 루아(Rua), 문추크(Munchuk), 아이바르스(Aybars), 옥타르(Oktar) 왕자들의 권력투쟁에서 루아가 왕에 올랐다. 루아는 비잔틴제국을 제압하여 연간 금 350 리브레의 공납을 부과할 정도로 그 기세를 크게 떨쳤다. 루아는 434년 돌연 사망하고 훈제국은 드디어 아틸라(Attila)가 통치하게 되었다.

 

부친인 문추크가 일찍 사망하자 숙부인 루아 왕에 의해 양육된 아틸라는 40세에 왕이 되어 그의 형 블레다(Bleda)와 함께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아틸라는 왕위에 오른 후 비잔틴제국에 대해 연간 공납액을 2배로 올려 700리브레를 요구하였다. 비잔틴황제 데오도시우스는 아틸라의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아틸라 통치 시대의 훈제국의 위세는 대단했다. 아틸라 시대에 훈제국의 영토는 동서로는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 산맥까지, 남북으로는 카프카스야에서 발트 해안에 이르렀으며 약 45개여 종족을 다스렸다.

 

아틸라의 정복사업은 계속되는 가운데 445년 그의 형 블레다가 사망함으로 아틸라 1인 통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때에 훈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동서로마를 완전히 장악하고 서아시아에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전 지역을 통치하였다.

 

452년 봄에는 드디어 아틸라의 서로마제국 원정이 시작되었다. 아틸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줄리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에 도달하였다. 교황 레오 1세는 사절단을 데리고 7월에 아틸라를 방문하였다. 로마제국과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는 교황은 로마의 파괴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틸라는 이 청을 받아들여 철수하였고, 동서 로마 통치를 선언하였다. 그는 마지막 정복 대상인 사산조 페르시아제국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철군 후 아틸라는 급작스런 출혈로 60세 나이에 사망했다.

 

아틸라 사후 훈제국은 내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일레크(Ilek), 뎅기지크(Dengizik), 이르네크(Irnek) 등 아틸라의 세 아들 가운데 먼저 왕이 된 일레크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뒤를 이은 뎅기지크는 비잔틴 자객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르네크(Irnek)가 집권했을 때는 이미 훈제국은 크게 기울어 있었다. 이르네크는 훈족을 이끌고 남부러시아로 이주하였고, 훈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후에 이들 훈족들에 의해서 헝가리와 불가리아가 탄생하게 되었다.

돌궐제국

일반

여러 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 기록을 남긴 민족이다. 몽골의 오르콘(Orkhon)강 유역에서 발견된 튀르크語 비문(碑文)은 돌궐제국과 당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여 준다. 이 비문에는 돌궐제국을 쾩튀르크(Köktürk) 제국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 비문을 통해 우리는 돌궐(튀르크)족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스텝의 유목 민족으로서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비문을 통해서 당시의 중앙아시아 역사에 대한 중국의 사료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돌궐이 스텝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에 독립된 2개의 돌궐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을 해석하여 볼 때, 돌궐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돌궐족 자신들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쓰여진 튀르크(Türk)라는 말은 6세기말 비잔틴 역사가(歷史家) 아가티아스(Agathias)의 비잔틴 문서와 아랍 시인 나비가트 알 주브야니(Nabigat al-Zubyani)의 아랍 문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러시아 문서에서는 12세기 초기에 Tork 형태로 나타난다.

 

그의 뜻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1072년 중세 튀르크 학자 카쉬가르 마흐무드가 그의 사전에 '강력하다'라고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후로 많은 역사 학자들이 마흐무드(Mahmud)의 이 근거 없는 민간어원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말에 A. Vambery는 이 말의 동사 türe-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튀르크 언어학자들은 Vambery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한편, 돌궐(突厥)이라는 말은 6세기 중국문서 주서(周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중국과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은 튀르크족을 돌궐(突厥)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중국인이 튀르크족을 소위 북방 오랑캐라하여 경멸적으로 칭하여 만들어낸 조어(造語)로서 튀르크(Türk)와는 별개의 말이다. 돌궐의 뜻은 "사나운 말 같은 큘(Kül)부족"이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돌궐족의 초기 부족명이 궐(厥), 즉 큘(kül)임을 암시하고 있다. 큘, 즉 궐족(厥族)의 이름은 큘 테킨(Kül Tekin), 큘 카간(Kül Kagan), 큘 초르(Kül Chor) 등 돌궐제국의 왕호(王號)에 나타난다.

 

돌궐제국을 이룬 튀르크族은 흉노의 일파로 보여지며,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Ötken) 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족을 튀르크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알타이 산록에 거주하였고, 알타이산이 투구처럼 생겨 그와 같은 의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이것은 당시의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이 부족의 원래 직업은 철공이었으며, 처음에는 연연의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같은 알타이계 족속인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스텝민족 사상 처음으로 취락을 건설함으로써 초원지대의 도시 건설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립

돌궐제국의 성립 역시 스텝제국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지도력 있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돌궐제국은 부민(Bumin) 혹은 투멘(Tumen) 이라고 불리우는 고대 튀르크족 지도자에 의해 AD 545년경 건설되었는데, 그는 552년 서위(西魏)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킴으로 스텝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이 사망한 후에 아들 무칸(Muqan)과 동생 이스테미(Istemi)가 동부 스텝과 서부 스텝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동돌궐의 지배자는 전체 돌궐제국을 대표하는데 그의 왕호는 카간(Kagan)이며, 서돌궐은 형식상 동돌궐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서돌궐의 통치자 관직명은 제 2의 통치자의 뜻으로 야부그(Yabgu)였다.

 

한편, 돌궐은 초기에 중국 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우며 침략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다. 그러나 583년 통일된 수(髓)나라와의 충돌에서 패배하게 되고, 이미 내부분열로 인해 동서로 나뉘어져 있던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이용당하기 시작하였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나라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 시기를 이용하여 돌궐이 잠깐 부흥하였으나, 곧이어 등장한 당(唐)나라에 의해 반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에 이르러 쿠툴루그 일테리쉬(Kutlug Ilterish)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 2의 돌궐제국, 즉 후돌궐을 세웠다. 돌궐비문에 나타난 빌게카간, 큘테킨 등은 바로 이 후돌궐의 집권자들이다. 일테리쉬는 독립 후 10년 만에 동부 스텝을 장악하고 제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스텝 지역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돌궐의 통치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유목민족 부족들의 세력 쟁탈전의 전장으로 변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742년에 바스밀(Basmil)부족이 우이구르, 카를룩 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Tengri)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후 바스밀과 카를룩, 그리고 우이구르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우이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 우이구르(Uygur)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구조

돌궐제국은 체계적인 정치기구를 갖추어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조직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왕에 해당하는 카간(Kagan)은 세습제였지만, 임명제도가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부족들간의 싸움이 잦았고, 카간은 절대군주이긴 하였지만 중요한 결정은 혼자서 내릴 수 없었다. 군사조직은 다른 스텝 제국과 유사했으며, 그들의 전술은 급습이였다. 그들의 군사력은 카간의 지도력에 의해 그 세기가 좌우되었다. 유목민족 사회는 모계사회와 부계사회가 교체하며 존재했는데, 이는 유목집단이 흥왕할 때는 부계가 세력을 잡았고 쇠퇴기에는 모계가 세력을 잡았던데 기인한다. 이 사회의 가장 작은 공동체단위는 장(帳)이었고, 장이 모여 성(姓)을 형성했으며 성이 모여 한 부족을 이루었다. 부족을 이루는 데는 그 부족이 소유하는 토지와 군사력이 필수였다. 한 공동체 혹은 국가가 형성되려면 이러한 여러 부족이 연합해야 했었다.

 

대외관계

돌궐의 대외 관계는 과거의 스텝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주로 충돌과 전쟁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들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비단길에 대한 지배 문제와 많은 관련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앙 아시아를 지배하는 민족은 중국과 비쟌틴제국과의 교역로를 지배했었다. 이때까지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무역이 페르시아계 소그드인(Sogdian)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소그드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 스텝을 장악한 제국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보호를 받아왔었다.

 

557년에 돌궐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공하여 그 동안 페르시아에 위협적이었던 아프카니스탄 지방의 에프탈리테(Hephtalites)를 붕괴시키고 그 영토를 동부 킨강산맥에서부터 트란속시아나 지경까지 넓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제국은 페르시아와의 무역 협정을 추진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곧 이어 567년에 소그드인 비단업자 마니아크(maniakh)를 단장으로 비쟌틴제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냄으로 이 때 돌궐과 비쟌틴이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가 이 교역을 장악해 왔었는데 돌궐제국이 등장하여 소그드 상인들을 지배하게 되자 페르시아와 돌궐제국은 불편한 적대관계가 계속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돌궐이 중국에서 산 비단을 페르시아에게 팔고 페르시아가 다시 비쟌틴에게 파는 형식이 구상되었으나, 이러한 구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돌궐은 비쟌틴과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직접 무역은 돌궐제국과 비쟌틴제국간의 외교관계의 증진으로 발달했는데, 돌궐과 비쟌틴의 우호관계는 특히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쟌틴으로서는 동서에서 페르시아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했던 것이다. 아바르인에 대한 기득권 문제로 비쟌틴과 돌궐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으나 비교적 돌궐과 비쟌틴의 관계는 무난히 계속되었다.

 

돌궐과 비잔틴의 호의적인 관계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쟌틴제국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궐과 비쟌틴과의 관계는 군사적 동맹관계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흑해 북부와 루마니아 지방에 있던 아바르(Avar)를 중간에 두고 돌궐과 비쟌틴이 장기적으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은 기독교화하기 시작한 아바르를 자신들의 복속국으로 취급했으나, 돌궐은 전통적으로 아바르인들이 돌궐의 속민(屬民)임을 주장하며 나왔다. 학자들은 월지국, 연연, 에프탈리테, 아바르가 인종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이 대부분 인도-유럽계통의 토하르족(Tocharian)이라 추정되고 있는데, 그러나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알타이계 부족일 가능성이 많다.

 

한편, 돌궐제국의 중국과의 무역은 중국에게 말을 주고 비단을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무역에서 중국은 그렇게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돌궐이 그들의 물건을 가져다가 강제로 떠맡기듯이 하는 억지 무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돌궐과의 충돌을 원치 않은 중국은 대부분 그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은 자신이 대국이라는 의식 속에서 돌궐이 가져온 물건을 조공으로 여겨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비단길을 장악한 돌궐과 생산국인 중국과의 이러한 불균등한 무역 관계와 무역에 대한 양국의 개념 차이는 결국 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을 야기시켰다. 즉, 물량이 많은 중국은 돌궐이 무역품으로 가져오는 것이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조공으로 생각해서 답례하는 형식으로 무역을 행했었는데, 돌궐은 순수한 무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돌궐이 더욱 더 불균등한 무역을 강요하자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슬람교의 침투와 탈라스 국제전

 

돌궐제국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애니미즘적인 샤마니즘이 신앙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 사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 초에는 서돌궐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동돌궐도 비록 원로였던 톤유쿡(Tonyukuk)이 불교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 즉 스텝의 기질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불교를 반대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비교적 성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경우 네스토리안 교도들에 의해 경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식간에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아랍인들은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이슬람화시킨 후, 중앙아시아 스텝의 서쪽과 경계를 같이 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을 증대하기 시작했다. 아랍 이슬람인들은 처음부터 전쟁을 통한 중앙아시아 지배나 혹은 포교를 목적으로 직접 포교자를 파송하지는 않았으며, 이슬람화된 페르시아계 무역 상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지 타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전파는 한 지역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법이었다.

 

8세기 중엽에 가서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아랍 이슬람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어 기존세력인 돌궐, 티베트, 당나라 등과 함께 아랍 이슬람 움마야드왕조도 세력 경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움마야드왕조의 페르시아 지역 통치자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Qutaiba ibn-Muslim)은 서돌궐의 여러 부족을 점령하며 박트리아, 부하라, 사마르칸드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돌궐은 제국 내부의 분열로 아랍의 침입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스텝의 서쪽 트란속시아나 사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아랍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시도되고 있을 때, 당나라에서는 713년 현종이 즉위하여 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티베트제국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정책을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돌궐제국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세 제국이 팽창하려는 야욕을 품게 된 것이다. 곧이어 734년 스텝제국 돌궐은 붕괴되고 그 뒤를 이어 돌궐계인 우이구르인이 스텝의 동쪽에 세력을 장악하여 우이구르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747년 당나라는 고구려 출신인 고선지 장군의 지휘하에 파미르고원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여기에서 티베트를 크게 물리쳤다. 750년 중국의 타쉬켄트 원정 때의 잔인한 약탈행위는 그 지역 서부 튀르크인들로 하여금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원조 요청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랍 이슬람 압바스 군대는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티베트, 돌궐계 카를룩(Karluk)과 연합하게 되었고,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좋은 돌궐계 우이구르제국과 연합하여 751년 여름 7월에 이들 동맹군과 중국-우이구르 연합군이 중앙아시아 타쉬켄트(Tashkent) 부근 탈라스(Talas)강 유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아랍-티베트-카를룩 동맹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심장부인 튀르키스탄(Türkistan)은 1세기 동안 티베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스텝 서부 트란속시아나는 압바스 왕조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탈라스강의 전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때부터 트란속시아나에서의 중국의 영향이 그치게 된 것이다. 또 이슬람교가 튀르크족의 군소국가들과 부족들에게 전해져 중앙아시아에 돌궐계 이슬람세계가 형성되고 역사 속에서 팽창하여 오늘날 거대한 이슬람세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후 튀르크 민족은 두 개의 상이한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각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서튀르크족은 이슬람의 영농정착국가로 변화하였고 후에 셀추크(Selchuk)제국을 건설하여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보호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동튀르크와 중부튀르크는 스텝 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후에 몽골이 등장하여 세계를 정복할 때 그 근거지가 되었다.

 

연연제국

북흉노 제국(155 A.D)을 멸망시키는데 있어 중국과 함께 일조를 담당했던 몽골계 선비족(鮮卑族)은 몽골리아지역에서 흉노의 대체 세력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며, 흉노 이후에 몽골리아는 약 2세기 반 동안 권력의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A.D.400년경이 되어서야 강력한 새로운 유목 민족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연(柔然)이라고도 불리우는 연연(Juan-juan)이다. 그들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그것은 자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에서 나타난 연연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연연은 타브카치(Tabgach) 즉, 북위(北魏 AD386-534)의 창립자인 탁발규(拓跋珪 386-409)의 치세 기간 동안 역사 무대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사륜(社崙)이라는 지휘관이 나타나 한북(漢北 Karashar) 지방에서 소왕국을 건설하고 있던 고차(高車)를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에까지 세력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중국에 이웃한 이 새 강력한 제국의 기원에 대한 고찰은 활발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들에 관한 진부한 계통학은 서로 일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연연은 흉노족과 연관이 있다고 하며, 반면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동쪽 미개인들인 동호(東湖)의 후손들이라고도 한다.

 

(魏)왕조의 연대기에 의하면, 연연은 277년에 위왕조 자신들의 조상에 의해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정치적 목적의 허풍과 과장이 다분히 첨가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연연이라는 이름은 다소 경멸적인 별명인 것 같다. 최소한 철자법만 보더라도 그 글자들의 특성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연의 생활 양식은 다른 유목민족들의 양식과 흡사했다. "그들은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텐트에서 거주한다"는 것 등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연연이 변발을 했었다는 것도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연연과 당시 북중국의 통치 국가 북위(北魏)와의 관계는, 중국의 변방에 자리잡은 유목 민족들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공격과 이에 대한 보복 공격,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과 침략 관계로 일관해 왔다. 여러 차례 북위는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연연의 영토 깊숙이 침입했었다. 북위의 천자 세조(世祖) 태무(太武 423-452)의 통치 기간 때인 438년과 443년에, 북위 즉, 타브가치 군대는 연연의 군대와 싸우려고 고비 사막을 가로 질러 갔으나 전투를 시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연연의 군대는 도주했으며, 많은 북위 군사들이 황량한 사막의 불모지에서 사멸했기 때문이다.

 

북위는 429년 이후에 오손(烏孫), 고차(高車) 등 소왕국들과 동맹 관계를 맺어 연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悅般)과의 동맹은 연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북위와 열반 동맹군의 공격으로 연연의 통치자 *달단(Ta-tar 414-429)이 사망하게 되나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연연을 패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북위 왕조는 수동적으로 연연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 성벽을 건설하게 되었다. 북위는 연연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534년, 연연에 앞서 패망하고 말았다.

 

한편, 연연에 복속되어 철공업에 종사하던 돌궐족들이 6세기 초에 연연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초기에는 북위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돌궐의 세력이 점증되자, 돌궐의 부족장이었던 토문(土門)이라고도 불리는 부민(Bumin)은 연연에게 공주와 혼인하기를 요청했는데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것을 핑계 삼아 552년 부민은 북위의 계승자 서위(西魏 535-554)의 도움을 받아 연연에 공격을 감행해서 그들을 퇴패시켰다. 연연의 통치자 아아궈이는 자살하게 되고, 곧이어 연연은 내부분열로 패망하게 되었다. 555년 돌궐은 연연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3000명을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서 연연이라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http://azer.swim.org/asia_1.htm

* 타타르족 [Tatar]

요약: 우랄산맥 서쪽, 볼가강과 그 지류인 카마강 유역에 사는 투르크 어계(語系)의 종족.

본문: 인구 약 500만(1987).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기간주민인데, 공화국 이외의 지역에도 널리 살고 있다. 킵차크족과 그 밖의 남(南)러시아 초원의 유목민과 고(古)불가르족(族)의 자손으로 구성되었고, 농목축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에 능하다. 또한 예로부터 교역(交易)에도 뛰어나다. 14세기 이래 이슬람 교도가 되었으나 그 이전의 민간신앙도 남아 있다.

 

 

 

 

 

 

 

 

 

 

출처 : 베뢰아세계선교후원회
글쓴이 : jej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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