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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스크랩] 하느님은 없다 一. 창조의 역사

by 8866 2006. 9. 30.

 

연재 1

 

一. 창조의 역사

 

1장.혼란한 창조질서

 

 1. 태초의 우주는 無가 아니었다. 

 



 그림 1. 천지창조

 

 성경학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하나님은 절대적 무에서 有를 창조해냈다는 뜻이다. 그러나 창세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상황은 이와 다르다는 점을 금시 인지할 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2) 

 

 혼돈하고 공허하긴 하나 당시의 우주에는 이미 <땅>이 있었고 흑암(어둠)에 묻혀있긴 하나 <깊음> 즉 공간이 있었고 게다가 수면(물)까지 있어 하나님이 그 위를 자유자재로 운행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태초라는 은유와는 달리 벌써 너무 많은 질료들이 존재해 있었다. 

 <水面>과 <운행>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면>위에 펼쳐져 있었을 3차원공간을 연상하게 되며 그 공간의 존재로 하여 비로서 <하나님의 신>이 그 위를 운행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때문에 병존했을 시간의 존재도 알게 된다.   운동의 지속을 전제하는 은유로서의 <운행>은 시공간속에서만 행위가능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림 2. 천지창조

 이처럼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천지의 많은 것들은 벌써 스스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 존재들이 <혼돈과 공허> 즉 무질서상태에 놓여있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가사의한 것은 태초의 모든 것이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즉 무질서 뿐인데 유독 하느님만은 질서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이 어떻게 무질서의 세계에서 유일한 질서적존재로 지속될 수 있었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언제부터 질서적존재로 확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 자신이 질서적존재가 아니었다면 태초의 무질서를 질서에로 전환시킬 수 없었을 것만은 확실하다.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는 그러한 무질서의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복합적피조믈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창조주이기에 앞서 피조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무질서인데 하나님만이 질서적존재였다고 믿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질서는 규칙적인 운동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한데 그런 규칙적운동이 무질서속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하나님도 비규칙적존재였다고 해도 무리이긴 매일반이다. 무질서가 어떻게 무질서를 질서적체계로 변환할 수 있는가.

 

 

 그림 3. 빛의 창조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혼돈과 공허, 어둠과 깊음을 악의 기원과 연관된 것이라고 보고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또 무질서와 악은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제외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서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를 막론하고 하나님피조물의 운명에서 탈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존재들은 하나님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무질서와 악만큼은 하나님의 능력을 일탈한 독립적존재였음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자신의 창조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악과를 훔쳐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악을 징벌했을 것이다. 이러고 보면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성서학자들의 주장이 정확하지 않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격이 되고 만다.

 이로써 뉴턴이 신의 영역에 양도한 <최초의 충격>은 절대적 무에서의 유에로의 창조가 아닌 유에서 유에로의 변화로 그치게 되었으며 그나마 하나님의 권능을 일탈한 독립적존재마저 인정해야 하는 창조의 불완전함을 남기게 되었다. 그것은 조건부적인 창조 즉 기존질료에 의한 창조나 선택적창조로써(악과 무질서는 창조에서 배제된 것처럼)그 완정성에 결여를 포괄하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권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체나 현상이 있다는 건 우주만믈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성경의 주장이 정확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무질서와 악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문제는 윤리적당위성을 가지며 더욱 심각해진다.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이 죄다 창조주의 책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그자체인 하나님께서 그러한 책임을 질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창조는 분명 질서와 선에 국한된, 그래서 서로 대립되는 모순의 양면이(이를테면 선과 악)결합될 때에만 비로서 완벽해질 수 있는 우주의 정체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4. 태초의 우주

 


그림 5. 탄화수소 계열의 분자가 충만했다는 태초의 우주

 

 현대 이론물리학에서는 빅뱅이론을 우주탄생에 관한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물질자체의 속성인 운동과(수축, 팽창 등)에너지에 의한 대폭발로 우주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창조의 원천은 물질의 속성인 에너지이다. 결국은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따르면 우주는 하나님의 영적의지의 파생물이라고 한다. 

 우주에 관심을 갖는 동물은 인간 뿐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능력으로 인식할 수 없는 만큼의 미지의 자연에 대해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파악이 깊어갈수록 신들이 차지했던 영역의 반경은 좁아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토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신적 존재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혜 덕분에 최초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뒤를 이어 계속 다윈의 진화론과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르메트르의 빅뱅이론에 육박하면서 하나님의 우주창조설이 밑뿌리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물론 일부 과학자들, 이를테면 미국의 물리학자 스태프와 같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종교적, 신비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스태프는 <물리적인 세계는 정신세계에서 나타나는 어떤 흐름의 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우주는 물질적인 세계가 아닌 정신적, 추상적인 환영에 불과하단 말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에서 맨 나중에 창조되었다.  다른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창조한데 반해 유독 인간만은 손을 대어 흙으로 빚어냈지만 무엇 때문인지 창조순서는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인간의 능력의 일부분으로서의 정신의 역사도 성경에서는 물질의 다음일 뿐이다. 인간 먼저 창조된 우주가 정신적 흐름일 뿐이라면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창조했단 말인가? 그가 창조한 것은 물질적우주가 아니라 정신적현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존엄을 지키기는 고사하고 그 위상과 권능을 훼손시킬 뿐이다.

 

 

 그림 6. 인간창조

 

 그런데 하나님 창조 이전의 혼돈의 세계는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존속했을까?

 그 혼돈의 세계는(땅, 공간, 물)또 누구에 의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창조되었을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얼마 동안이나 존속했으며 무슨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천지를 창조했을까?

 그동안 혼돈의 세계에서 유일한 질서였을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과연 절대적무질서 속에서 단 하나의 질서가 존재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하나님의 우주창조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창세기를 통독하노라면 하나님은 마치도 재미나는 유희를 놀고있다는 느낌이 든다. 거창한 우주를 창조한다는 그런 장엄함이나 신성한 분위기보다는 마술을 부리거나  장난에 심취한 어린애처럼 너무도 짧은 시간에 무난히 진행되어 우주창조라는 거창한 주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1:4)

 



그림 8.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표현은 우주창조의 유일한 목적으로 반복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에게는우주창조가 어떤 보기좋은 장난감을 만드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일종의 유희였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아마 하나님은 지루한 어둠과 혼돈 속에서의 세월이 싫증나고 권태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 권태를 달래려고 유희를 벌린 것일까? 결코 텅 빈 우주에 군림하는 어둠과 혼돈과 무질서를 공제하고 광명과 질서의 궤도에 올려세우려는 그런 거창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윤리적당위성도 정의적사명감도 없어 보인다.하나님의 우주창조는 그저 하나의 평범한, 자기만족의 유희에 불과할 따름이다. 정교한 설계도나 진지한 원칙 같은 것도 없었다. 자신이 보기 좋으면 그만이었다.

 태초의 세계에는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알 수도 없고 본적도 없고 경험한적도 없고 표본도 없었을텐데도 한마디 말만 하면 우주는 스스로 모습과 윤곽을 갖추고 탄생했다. 그래도 인간은 모방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도 있었다. 빛이나 바다나 동물들은 무엇을 모방할 수도 없었을 것인데...

 우주는 이렇게 하나님의 맹목적인, 일시적 충동에  의해 창졸간에 조물된 것이다. 환언하면 우주는 하나님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첫날에 빛을 창조했다. 빛의 산생에는 물리학적, 기하학적, 수학적, 천문학적인 과학이론이 전제되어야 함을 불문하고서라도 빛이 그자체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림 9. 천지창조

 

 물리학이론에 의하면 빛의 방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건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이다. 이들 원자가 빛을 발생하자면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이 주어져야 한다. 물론 스스로 빛을 방출하는 우라늄, 알파-베타선과 같은 방사능물질도 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무에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무의 세계에 가장 먼저 창조해낸 것은 빛이다. 그런데 물질의 선차적존재가 없는 빛이 과연 어디서 방출될 것인가. 실은 창세기 제1장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우주창조 이전에 이미 땅과 시공간 그리고 물과 같은 물질이 있어 원자들이 존재했으니 빛은 이미 존재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사(1:4)

 

 어둠은 태초에 이미 있었으니 창조라고 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한 일은 빛을 어둠과 분리시켰을 뿐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누게 하시라 하시고(1:6)

 

 보다싶이 물뿐만 아니라 궁창(공간)역시 하나님 우주창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단지 가운데 있는 궁창을 분리해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존재했던 물질의 방위적위치만을 조절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1:7)

 

 제1장 6절의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와 완전히 모순되는 메시지이다. 물 가운데 있던 공간을 분리하여 물 위에 놓고 하늘로 삼았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순은 계속되고 있다. 궁창은 원래 물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제1장 7절에 보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게 하시며> 라고 되어있다. 궁창은 결국 태초의 상태 그대로인 <물 가운데>에 놓인 셈이다. 억지로라도 이해한다면 그 공간지평을 넓혔다는 의미일 것이다.

 창세기는 제1장 31절까지 창조과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 사이 우주전체는 물론 인간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원만하게 결속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구절을 보아도 생명체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될 대기(산소)의 창조는 찾아볼 수 없다. 흙과 물과 빛만 가지고는 생명체가 생존할 수 없다는 건 과학이 아닌 상식이 되어있다. 한마디로 모세가 오경을 집필했던 고대에는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흙과 물과 빛만 있으면 충분한 줄로 알았지 대기층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그런 원인으로 다행이도 대기는 하나님의 창조목록에서 탈락하여 스스로 탄생한 독립적존재로 되고 말았다. 오늘 날의 독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대기가 없는 천지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생존하였는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기층이 없다면 하늘도 푸르지 않을 것이며 호흡장애는 물론 파장이 짧은 X선, 감마선, 자외선 차단이 불가능하여 생명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림 10. 에덴동산

 

  2장 하나님 우주창조설과 여러 나라의 우주창조신화와의 비교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출처 : 문학과 작가
글쓴이 : 아데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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