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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스크랩] 성경에 대해서

by 8866 2006. 6. 30.
우리는 흔히 교육적인 부모의 대명사 격으로 맹자의 어머니를 꼽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니 단기지교(斷機之敎)니 하는 고사성어까지 만들어낸 분이니 그런 평가가 과장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잠깐 들여다 봅시다.
맹자와 어머니는 처음에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마 거기보다 집값이 싼 곳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맹자는 허구헌날 요령을 흔들며,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천 날 부르네" 하며 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 주저하지 않고 이사하기로 결심합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교육환경론자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사한 곳은 저자거리였습니다.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이지요. 가진 재산 다 팔아 사글세 겨우 얻어 살았을 겁니다. 가난한 곳이어서 아들이 망친다면 가장 부유한 곳에 가는 것이 좋았을지 모르죠. 그런데 거기서 맹자는 헝겊쪼가리들을 모아다 놓고 "골라 골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냐" 이러면서 노는 게 아니겠어요? 앗 뜨거워라 싶어 어머니는 다시 이사를 결심합니다. 이번에는 서당 근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공자 왈 삼인행이면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니라" 운운하며 공부 흉내를 냈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를 몇 번 갔나요? 이사는 두 번 갔습니다. 장소는 세 군데였지요. 그러니 맹모삼천지교가 아니라 맹모이천지교라고 해야 맞지요. 하지만 옛날 중국 사람들에게 짝수는 음의 수였기 때문에 꺼렸습니다. 그럼 맹모삼소지교(孟母三所之敎)나 맹모삼처지교(孟母三處之敎)라고 해야 옳겠지요. 그런데 강조하고 싶은 건 '이사'를 했다는 거니까 세 곳의 장소를 슬쩍 이사 개념으로 바꾼 겁니다. 일종의 문화적 성차별이 아닐 수 없지요.
사실과 진리는 다를 수 있습니다. 두 번 이사를 갔건 세 번 이사를 갔건 담고 있는 의미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한 번 굳어지면 잘 바뀌지 않는 사유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고사성어가 중요한 것은 담고 있는 뜻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잘못된 사실에서 유추한 의미는 거짓이고 허위입니다.
이와 같은 오류가 어찌 이 고사에만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성경은 그것보다 훨씬 많은 사건과 인물과 배경을 안고 있습니다. 쓴 사람들도 여럿이고 상황과 의미도 다양합니다. 거기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그 본질적 의미가 전적으로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경계의 말을 하는 것은 자칫 지나치게 문자에만 매달린 축자적 해석의 태도가 너무나 일상화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1996년 4월 8일자 타임지에는 엘슨(John Elson)이 쓴 <성서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란 글이 실렸습니다. 그는 고고학이 모세와 아브라함과 같은 구약성경의 인물들이 실재하였을까에 대해서는 의심을 제기했지만 신약성경의 중심인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과학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는, 순회 연설가이며 경탄할 만한 노동자로서의 예수의 실존이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입증하지도 반증하지도 못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최근에 이스라엘에서 발굴된 것들이 그리스도가 출현했다고 믿었던 그 시대 상황에 풍부한 안목을 제공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결코 말할 수 없다. 많은 경건한 신앙인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신적으로 영감된 복음서들의 증언이야말로 절대적으로 고고학의 망치에 의해 발견된 어떤 증거들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다."

어느 종교나 경전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스도교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잘못된 인식의 수정과 전환은 매우 적절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기 위해 쓰여진 책도 아니고 과학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쓰여진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들, 그리고 신앙의 경전으로서의 성격과 역사적 사실의 기술, 신앙의 기록들의 복합물로서의 성경은 흔히 바이블(Bible)이라 부릅니다. 즉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적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 본디 뜻은 책을 일컫는 라틴어 Biblia에서 연유합니다. The Book. 책이죠. 그런데 유일한 책입니다. 크게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구약과 신약이 그것이죠. 구약은 흔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압축되고 신약은 메시아에 대한 증언으로 대표된다고 말합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성경은 그 구성이 조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구약 46권, 신약 27권을 성경으로 인정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구약의 제2경전이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조금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문장이나 함의가 조금씩 다르고 특히 늬앙스가 다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어 번역본을 사용한데 반해 개신교회에서는 히브리어 번역본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우선 구약성경 맨 앞부분을 차지하는 모세오경입니다. 이것은 천지의 창조에서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출발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적 토대를 구성합니다. 다음으로는 예언서와 역사서로 구성됩니다. 이스라엘이 외국에 의해 침탈되고 시달림을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언이 강조되었고 이것이 그들의 역사 인식과 자연스럽게 결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문서 즉 시편이나 지혜서, 그리고 잠언이나 아가와 같은 성경이 있습니다. 구약은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술되고 전해진 경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같은 구약성경 내에서도 불일치를 노출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것은 그때그때마다의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통시적 역사로 작용해왔기 때문에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후대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읽는 것은 자의적 해석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축자적인 해석에 매달리는 것도 또한 반드시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듯이, 구약성경도 당연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그리고 그 필요에 의해서 글로 쓰여지게 되어 전해졌을 겁니다. 무엇보다 후세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역사 인식을 가르치고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 쓰여졌을 겁니다. 구약성경이 문서화된 것은 기원전 950년 경 솔로몬의 지시에 따라 말로만 전해오던 하느님의 말씀을 글로 기록하고 저장하게 되었던 것에 비롯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모세오경(토라)이 중심이었겠지요.(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그들의 요체입니다) 솔로몬의 집권 시기는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이 자부심이 그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기록된 경전을 갖도록 했을 겁니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나머지 예언서들이 덧붙여진 겁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죽은 뒤 남북으로 분열되고 결국은 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모두 멸망한 뒤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신난(辛難)과 질곡의 시기에 그들을 붙잡아 준 것이 바로 예언서였던 겁니다.
그에 비해 신약성경은 구성이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것은 27권으로 구성되는데,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와 함께 살았던 제자들에 의한 기록인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꼬 루카)와 요한의 복음서입니다. 이것의 주요 내용은 예수에 대한 증언들로 압축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로 바오로 사도에 의해 쓰여진 23개의 서간문들과 계시록입니다. 기원후 5세기 경 예로니모에 의해 완성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 성경의 구성입니다.
흔히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 부르고 요한복음서와 더불어 네 복음서로 통칭합니다. 공관(共觀)이란 뜻은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함께 보고 각기 기록했다는 의미로 쓰였을 겁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마태오 복음이라고 해서 마태오라는 저자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통칭해서 복음사가라고 부르는 겁니다.
시대적으로 본다면 마르코복음서가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대략 기원 후 7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것을 토대로 마태오와 루카가 자신들이 기록한 것들을 첨부해서 10여년 쯤 지나서 복음서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요한이 공관복음의 내용을 토대로 예수의 독특한 영적인 부분을 부각하고, 특히 그리스인들의 사유적 특성에 맞춰 쓴 때가 대략 100년에서 150년 사이쯤으로 추정됩니다.
이 복음서들은 내용도 조금씩 다를 뿐 아니라 관점도 조금씩 다릅니다. 물론 공통점이 더 많죠. 이것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성격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구전으로 시작되었을 겁니다. 예수가 부활하고 하늘로 돌아간 후 제자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각 지역 초대교회 공동체 사람들에게 전해온 것들을 모아 문서로 만든 겁니다.
예수에 대한 이해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서 각기 여러 모습으로 비춰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의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지닌 보편성과 사실성에 기인합니다. 그 점이 바로 공관복음서의 의미이자 가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거나 예수 전승이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일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에수를 이해하고 있는지 촘촘하면서도 유연하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쓰여진 배경과 의도, 그리고 의미를 잘 새겨서 읽어야 합니다. 또한 같은 공관복음서지만 마태오복음서와 마르코와 루카의 복음서는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복음서는 예수가 다윗의 직계 후손임을 강조합니다. 다윗왕의 계보에 세움으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왕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주로 유다인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뚜르르 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예수 전승이었을 겁니다. 마태오복음서 곳곳에 구약성경의 확인이 보이는 것은 다 그러한 연유입니다.
그에 비해 마르코복음서는 예수의 탄생과 성장은 싹뚝 건너뛰고 곧바로 예수의 세례부터 시작합니다. 아마도 예수를 유다인의 구세주가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두루 구원하는 보편적 구원자 예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태오복음서의 독자와 마르코복음서의 독자는 달랐던 셈이지요. 그것은 복음이 전달되고 선포되는 환경과 조건이 달랐기 때문입니다.(이렇게 성경은 처음에는 낱권으로 시작되었는데, 아까 말한 것처럼 4세기에 들어 하나의 정경正經으로 공표되었던 겁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이것이 결코 한 사람에 의해 일관되게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쓰여졌는지를 고려해야 하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으며 고칠 수도 고쳐서도 안 된다는 완고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절대적이지만 하느님에 관한 그 어떠한 이론도 체계도, 심지어 경전도 결코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문자에만 가둬져 있을 때, 성경은 자칫 죽은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서제일주의는 성경을 강조하는 건강한 태도이긴 하지만 자칫 경직되면 견강부회라는 덫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경은 신앙의 기초이긴 하지만 절대불변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기록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자의적으로 멋대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의미와 가치는 그 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신약성경은 유다인의 사건을 헬레니즘 세계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서술한 것입니다. 이것은 왜곡이 아니라 예수 사건의 의미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특정 부족의 신앙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신앙으로 자리매김을 할 토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 편협된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될 겁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따른다 하면서 편협한 배타성과 공격성, 그리고 무례함까지 서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겁니다.
'성경대로 읽고 성경대로 따라 산다'는 신념에 따라 성경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구약성경에서 잘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세기 1장 1절부터 모두가 사실이며 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일종의 부족신관이라고 봐야 합니다. 부족적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은 모두 악의 세력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은 항상 옳고 정당하며 그들은 그르고 부당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신은 오로지 자신들만을 보호하고 구원하며 언제나 적을 물리칩니다. 또한 자신들에게도 때로는 신은 전적인 오롯한 믿음과 숭배만을 요구하는, 그래서 액면상으로는 매우 가혹하고 준엄한 신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물론 신은 무서운 모습보다는 사랑과 아량과 축복을 아끼지 않는 창조주의 모습이 더 큽니다.
이러한 구약의 부족적 신관이 특정한 부족의 구원사에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위축되고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아야 했던 부족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그렇게 읽고 있지 않나요? 만약 그렇게 읽었다면 하느님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집니까? 예를 들어 여호수와가 예리코 성을 점령하고 아이 성을 공격할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여호수와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것도 속임수와 계략을 동원해서 예리코를 점령했습니다. 하느님은 직접 우박을 퍼부어서 도망가는 적을 궤멸시켰습니다. 하느님이 여호수와의 기도를 들어서 해와 달을 멈추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적을 무찌르게 했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 때 신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운 것과 흡사하지요. 이런 모습으로 비춰진 하느님은 잔인하고 옹졸하며 편협한 신이 아닌가요?
왜 이런 모습의 하느님이 묘사되는 걸까요? 수 천 년 전 상대적으로 힘이 아주 약한 한 부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존 그 자체였을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의 적과 싸워 이겨야지요. 그러니 그들의 신이 어떻해야 할까요? 하느님은 자신들의 안위와 민족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든든한 보루여야 할 겁니다.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어떠할 지는 쉽게 상상이 가는 일이지요. 백전백승의 하느님이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느님은 '만군(萬軍)의 주'일 수 밖에 없지요. 오늘날까지도 굳세게 외치는 바로 그 개념의 하느님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런 전투적 하느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전투적인 신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이 모든 곤경과 질곡을 스스로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보호하고 감싸줄 것이라는 신뢰와 자신감이 우리를 악과 싸워 이겨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볼 때, 오로지 나의 안위와 행복과 승리만을 주도하는 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부족적 신일 수는 있겠지만 인류 보편적 하느님일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구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한 부족의 단순한 신관의 표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에 대한 기원과 구원의 거대한 인식과 약속입니다. 다만 그것을 옹색하게 받아들일 때 앞서 말한 그런 편벽에 빠지기 쉽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이러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그걸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투적이고 잔인한 하느님은 참된 모습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예수는 바로 그런 한계에 대해 옛껍질을 벗고 보편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으라는 새로운 약속을 자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전투적이고 잔인한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었습니다. 보편화는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의 메시아는 어느 특정한 부족만을 편애하여 다른 부족들은 말살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닮아 실천하도록 하는 자비로운 하느님임을 보여준 것이지요. 구약성경의 예언과 가르침을 신약성경이 완성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적 문제의 근간이 바로 이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의 보편적 사랑의 확립과 실천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을 보호하고 복을 내려주는 하느님만을 좇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고대의 부족적 신을 믿는 소아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성경을 읽을 때 그런 보편성을 토대로 읽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 보편성의 또 다른 확립은 바로 성경이 사도들로부터 유래되어 있어서 허구가 아닌 사실로서, 그 확실한 근거와 증인을 마련하고 있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복음사가들은 자신들의 선교적 목적과 소명에 맞게 성경을 저술했습니다. 그렇다고 제 입맛에 맞춰서 허구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공관복음서의 공관(共觀)이라는 말에서 보듯, 충분히 크로스체킹할 수 있게 쓰였습니다. 다만 독자가 누구인가, 그가 어떤 입지에 있는가, 어떠한 부분을 강조할 것인가에 따라 조금씩 순서나 내용의 다소와 강조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 성경을 읽는 우리들도 마땅히 지금 우리가 어떻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두루 살피고 새기며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사용된 거대한 메타포와 상징 체계, 그리고 역사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의 역사성과 정체성, 그리고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마리아라는 지명과 문화권이 개입된 성경의 사건들을 어떻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가톨릭교회에서는 2006년 첫날부터 새로운 성경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사용했던 성경은 1986년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공동번역 성서>라고 불렀던 거지요. 사실 이 성서는 한국교회사에서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서입니다. 1965년 제2차바티칸공의회를 통한 교회의 반성과 새로운 지향, 그리고 개신교에서 번성적으로 나타난 에큐매니컬 운동의 반향이 서로 조합되어 이루어진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신구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은 한 아버지며 인류는 한 자녀라고 하는 진리를 깊이 깨달은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의 신구교가 연합하여 우리말 성서를 출간한 것에 그치지 않고 민족사적으로도 새로운 통합과 화해,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새로운 전망이라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1968년 신구교 대표로 구성된 공동위원회에서 공동번역을 결의한 이후 지속적인 작업을 한 결과 우선 1971년에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내놓았습니다. 이후에도 작업은 계속되어 마침내 1986년에 신구약 통합성서가 출간되었습니다.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성서는 가능한 한 현대어와 어법에 맞게 고쳤고 축자적 번역이나 형식적 일치(formal correspondnece)를 피하고 내용의 동등성(dynamic equivalence)를 취하여 읽는이들이 원문을 읽는 사람과 같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물론 오랜 관행상 익숙해진 말들은 그대로 받아들였지요. 대표적인 경우가 <탈출기>를 여전히 <출애급기>로 번역한 것이지요. 고루한 말투와 고어체의 어휘나 어법은 피한, 아주 깔끔한 성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가톨릭교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열심히 사용한 반면 개신교회에서는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고 점차 유야무야 예전의 성서를 여전히 사용할 뿐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번역어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짐작이 가세요? 바로 하느님/하나님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가톨릭교회에서는 하느님, 개신교회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표기합니다. 한 쪽에서는 하늘에 계신 신이므로 마땅히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오직 한 분인 신이므로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각자 주장하는 의미는 나름대로 정당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신을 지칭하는 말은 아닙니다. 들리던 말로는 성서를 번역하던 양 진영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지만,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되 인세는 개신교회에서 운영하던 대한성서공회에서 갖기로 합의를 보는 선에서 매듭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바로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없는' 성서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불경하게' 하느님이라 쓰여진 성서는 쓸 수 없다는 저항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동번역성서를 기피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참 허망한 일이죠. 기껏 열심히 정말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낸 그 대역사가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던 겁니다. 아마 지금 같았다면 서로가 경본은 공유하되 각자 야훼/하느님, 여호와/하나님으로 사용하기로 합의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기력하게 좌초된 공동번역성서는 아예 개신교회에서는 잊혀진 성서가 되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름만 '공동'인 성서를, 그것도 인세는 고스란히 개신교회에 제공하는 그 기묘하고 어처구니 없는 동거를 하게 된 겁니다.
이러한 문제와 한계를 벗어나고 공동번역성서에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구절이나 보다 합당한 어휘로 바꿀 용어 등에 대한 전반적 검토가 새로운 성서에 대한 당위로 제기되었고 주교회의 성서위원회가 구성되어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서와 그리스어로 쓰여진 신약성서를 15년에 걸쳐서 원문의 뜻은 보다 살리고 현대언어의 어법과 어휘에 맞춰 개정하고 전례에 사용할 수 있도록 음운적으로도 다듬어서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 '성경'이라 명명했습니다. 그 중심이 되었던 임승필 신부는 출간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직전에 선종하여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어느 한 교회를 옹호하고 다른 교회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픈 충고로 한 마디 하자면,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이제는 성서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새로운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성서의 어법이나 어휘 등을 보면 흔히 말하는 '구닥다리'의 흔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반 언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고어투나 낱말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신자들은 오히려 그 어투며 어법이 훨씬 더 정감있고 권위있게 들린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언제까지 그 어리석은 편견과 고집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나요?
한국 불교의 쇠락(?)은 좋은 반면교사가 될 것입니다. 인구조사 상으로는 불교신자가 거의 천 만에 이를 만큼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 불교신자인 사람들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 같은 대학생들의 경우 5% 내외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님이 불자인 경우에도 자녀들은 절에 가는 경우가 드물고(절은 거의 산에 있지요? 포교원들이 시내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극소수입니다), 일정한 예배행위가 없고(주일이나 일요일 개념이 없죠. 보름이나 그믐에 법회가 있으니 일상의 틀과 너무 다르죠), 경전의 학습이나 기도의 형식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번역된 것은 있지만 잘 않 읽어요. 그리고 배례는 있지만 기도문은 별로 없어요. 경을 하지만 스님들이 하는 독경은 본디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음차한 것을 우리가 다시 한자를 우리 발음으로 읽는 것이니 그것을 듣고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아마 스님도 따로 학습하지 않았으면 모를 겁니다) 결국 이렇게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태의연한 모습이 오늘날 불교가 일상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일상의 언어로 쓰인, 느낌이 직접 다가오는 경전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 느낌과 감동이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와야 그 실천 또한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개신교에서도 이제 늦은 감은 있지만 한시 바삐 현대적 언어로 된 성서를 펴내기를 바랍니다. 고어투의 성서는 기도조차도 고어투로 만들고 있음을 비춰볼 때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다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갑시다. 우선 복음서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전기가 아닙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일대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을 신앙공동체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일종의 신앙고백문과도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를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 신앙의 안목에서 예수가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를 보여주려고 쓴 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증언서이지요.
저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는 모릅니다. 그런데 본디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예수아,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표현한 말이라네요. 그 이름의 뜻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사람의 이름으로 쓰이는 고유명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서를 해석할 때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전승 과정들을 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또한 그 복음서가 쓰여진 동기를 가늠해봐야 할 겁니다. 예수가 자주 "알아 들을 귀를 가진 자는 알아 들어라"고 한 말의 함의를 잘 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와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 담고 있는 일차적이며 궁극적 목적이 역사적 진리나 인간사의 전달 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시각만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자칫 큰 혼란을 자초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감성에만 의존하거나 직관만 좇는다면 그것은 맹목에 가려 말씀의 진면목을 스스로 놓쳐버리는 우를 범할 뿐입니다.
성경은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고, 다양한 역사, 문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고,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를 영감 받고 쓰여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구두전승에서 문서전승으로 쓰여진 가장 큰 이유는 후세들을 종교 교육적으로 가르치고 교훈을 남기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그 본질은 계시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의 말씀과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가 담긴 책으로써 시대와 역사를 불문하고 영원히 후손에게 남겨질 최고의 문화적 유산이자 보배이다. 그리고 이 성경은 오늘도 믿는 사람들에게 매일의 삶 속에서 전해지고 살아 움직이는 진리이다."

도움이 될 책들
생활성서사,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2001 생활성서사



출처 : 바오로의 뜨락
글쓴이 : 김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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