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조선시대 후기 유학사상
Ⅰ. 조선후기 유학개관
이 장에서는 성리학 내부의 쟁점을 놓고 벌어진 조선중기 이후 형성된 각 유학파간의 논쟁과 정통 주자학의 고수와 주자학 일변도로부터
탈피하려던 일군의 경향들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후기 유학의 전체윤곽을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아울러 우선 밝혀두어야 할 것은 이 글에서
다루어야할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이 글의 내용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는 禮論과 實學思想을 이글의 범위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글은 논의의 촛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조선후기에 전개된 각 학파의 형성과정과 사상적 변천을 성리학의 중심주제인 理氣性情論 을 축으로 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조선후기를 임진, 병자의 양란 이후부터 개항까지로 규정하는 일반적인 시대 구분을 따르면 이글에서 다루는 범위도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약 300년간의 유학사상이 되겠다. 조선후기 성리학의 성격과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임란 이후의
조선사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의 성리학은 예론을 중심으로 발전되고 예론은 당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전개되기 때문에 당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정치질서형성을 조선왕조의 붕괴과정으로 보느냐, 아니면 성리학적 언론 정치의 한
구현으로 보느냐에 따라그러한 정치질서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성리학의 의미도 달라지게 된다. 조선후기를 전기의 안정을 잃고 당쟁으로 피폐해져
붕괴되어 가는 시기로 보면 이 시기의 성리학은 退溪, 栗谷에 의해 완성된 조선 성리학 체계를 당쟁을 위한 스콜라적 논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예론 중심의 공리공담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후기를 중세적 제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 경제적 관계를 위한 새로운
질서의 모색이 시작되는 역사발전의 한 시기로 파악하면 조선후기의 성리학이 전기에서처럼 적극적인 역사적 기능을 수행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나
후기성리학은 나름대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여 간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유학사를 중세적 질서의 해체에
중점을 두고 살피면 중세적 질서를 대표하는 주자학 중심의 성리학을 계속 고집하는 正統性理學과 주자학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추구한
陽明學, 漢學, 考證學(實學)등의 諸 試圖 이렇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자학 중심의 정통 성리학 내부에서도 학통과 당파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발생한다. 이들 여러 경향들이 대립하고 종합되어 조선후기 성리학의 흐름을 형성해 나가는
것을 도식적으로 명확히 그릴 수는 없지만 대강을 살펴보면 조선후기 성리학의 성격을 결정짓는 몇가지의 계기를 중심으로하여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조선전기 성리학이 士林의 勳舊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조선 성리학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성리학이 현실의 권력을 비판하는 무기로 기능함에 따라 조선 성리학은 명분을 중시하게되고 따라서 仁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 理學的 性格을 띠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花潭의 一氣聚散說은 이어지지 못하고 退溪의 理發氣隨論과 栗谷의
理通氣局說을 중심 축으로 하여 이후의 성리학이 전개된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퇴계의 성리학을 主理的, 율곡의 성리학을 主氣的이라 하고
이후의 조선 성리학을 이 기준으로 재단하고 있으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은 모두 주리적이라 할 수 있고 주리적인 가운데 理의
發을 인정하느냐 하지않느냐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후의 성리학은 바로 이 미묘한 차이를 바탕으로 하여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즉
영남학파 와 기호학파로 나누어져 발전하게 된다.
퇴계학파는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아 그 主理的 경향을 더욱 강화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는데 특히 17세기 후반 葛庵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학자들은 퇴계의 理氣互發論을 강화하면서 율곡의 주기적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해야 할 사실은 퇴계학파나 남인에 속한 유학자가 모두 퇴계의 직전제자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퇴계 당시 퇴계와
영남지역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南溟 曺植의 문인들이 인조 반정이후 北人이 몰락하면서 퇴계학파에 흡수된 사실이 있고 화담의 제자중 일부도 퇴계학파에
가담하여 후일 畿湖南人을 형성한다. 특히 이들 기호남인중의 일부 유학자의 사상이 화담의 氣論, 漢學 등 당시의 脫朱子學적인 경향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점은 주목될만한 사실이다. 율곡학파 즉 기호학파는 처음에는 西人 후에는 老論이라는 당색과 함께 주자중심의 성리학을 조선 사회에
고착시켜 후기성리학의 정통을 형성하게 된다. 율곡학파도 퇴계학파와 마찬가지로 龜峰 宋益弼, 花潭 徐敬德, 牛溪 成渾 등의 문인들이 서인에
합세하면서 성립되었고 懷尼是非를 계기로 老,小論이 나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송시열에서부터 시작된 순정 주자학의 표방은 17세기경 싹트기
시작한 한학 양명학등의 탈주자학적 경향들과 대결하면서 주자학적 명분론의 고수로 나아가게 됨으로써 율곡의 학문이 지녔던 유연함과
현실성을 상실한 채 교조화 되어 갔다. 주자학적 명분론의 고수로 조선성리학의 정통을 확보한 기호학파내부에서 理 즉 성의 보편성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이 湖洛論爭이다. 호락논쟁은 뚜렸한 결론이 없이 흐지부지 끝났으나 참여한 성리학자가 엄청나게 많고 그 여파로 율곡의 성리학이 지녔던
理通氣局說과 氣發理乘一途說사이의 논리적 부정합성이 다시 검토되면서 다양한 성리학설이 이후 전개되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 후기성리학의 여러 유파가
형성되는 중요계기를 이루는 호락논쟁은 철학적 문제 중심의 학파대결로 전기의 退高論爭과 더불어 조선조 성리학의 또 하나의 커다란 특색을 형성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17세기 중반이후의 성리학을 대충 살펴보면 퇴계학파는 영남지역에서는 여전히 퇴계학을 묵수하고 있었고 기호의 남인은
星湖學派의 사상으로 발전해가서 천주교와 결합하기도하고 洙泗學으로 발전해가기도 하여 주자학적 성리학에서 이탈해 갔다. 호락논쟁 이후의 기호학파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면서 人物性東夷論諍과정에서 표출되었던 논리적 가능성을 극대화하여 唯氣論으로 재정리되기도 하고
北學思想으로 변모되기도 하고 唯理論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주기적인 주자학 해석이라는 성격을 지녔던 율곡의 학통에서 鹿門의 唯氣論과
위정척사운동과 열결된 唯理論이 동시에 도출되고 근대지향의 탈주자적인 북학사상이 또한 여기서 연유한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중세사회의 해체기라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그만큼 복잡했고 그것을 대하는 각 성리학자들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기존의 입장을 강화하든가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면서 다양한 변용을 보여준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이상에서 조선후기의 성리학을 극히 간략하게 그려보았다. 한논문으로 다루기에는
포괄되는 성리학자의 수도 너무 많고 갈래도 너무 복잡해서 이 글에서는 조선후기성리학의 논쟁점을 중심으로하여 후기 성리학의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각 유학파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를 선별하여 간략히 살펴봄으로 후기성리학의 변천을 개괄하고자 한다.
Ⅱ.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형성과 전개
성리학이 조선조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어 점차 보편화 되고 그 이해의 심도를 더하여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 것은 조선 중기의 明宗 宣祖대에
이르러서 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관이 민간에까지 보편화될 뿐 아니라 퇴계와 율곡이라는 두 거봉에 의해 이론적으로도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된다. 퇴계에 의해서 주자학중심의 성리학으로 조선성리학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미 양명학을 비롯한 非程朱的 思想은 비판받기 시작했고
이때 이미 조선 성리학은 교조적인 배타성을 띠고 시작했다 하겠다. 조선후기의 성리학파는 이러한 주자학의 배타성 위에서 각기 자기학파가 주자학의
정통임을 내세우면서 분파를 형성해간다. 그리고 각 유학파간에는 주자학에 대한 태도나 해석의 차이로 말미암아 학문적으로 대립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당파와 결합됨으로 해서 학문적인 대립은 정치적인 대립으로 화해 상대방의 학설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으로 일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자학의 해석이 한층 치밀해지고 전기의 주자학 해석이 지녔던 논리적 난점이 재검토되면서 새로운 성리학 조류를 형성해 나간 것이
조선후기 유학파들의 공헌이라 하겠다.
조선후기 유학파의 성립은 조선 성리학의 완성기로 일컬어지는 중기 성리학을 계승하는 가운데 이루어
진다. 사승관계로 학맥을 추적하면 임란 전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退溪,栗谷, 南冥, 花潭, 龜峰, 牛溪 등의 학계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여러 학통을 이어 받은 유학자들은 16세기 후반부터 당파정치가 시작되자 학맥과 지역 그리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어느 한 당파에 속하게
되었다. 乙亥黨論이래 조선의 사대부가 東人과 西人 둘로 나누어진 이후 복잡한 갈래를 치면서 이합 집산을 거듭하다가 南人 北人 老論
小論의 四色黨派로 귀착되었다. 이들 당파와 학파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동인은 대부분 퇴계와 남명의 문인으로 구성되었고 서인은 대개 율곡과 우계의
교우, 문인들 이었다. 구봉의 문인제자는 서인으로 흡수되었고 화담의 문인들은 일부는 동인으로 일부는 서인으로 나누어 졌다. 동인은 퇴계계가
남인, 남명계가 북인 으로 나누어 졌다가 인조반정이후 북인이 몰락하자 남명계가 남인에 흡수됨으로 해서 조선의 유학파는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서인,
지역적으로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학맥상으로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당색과 학설 출신지역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남인이나 서인에 속하면서도 학문적으로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도 있었지만 남인계열의 학자는 대개 퇴계의
理發氣隨說을 조술하며 율곡의 학문을 주기적이라고 비판하고 있고 서인계열의 학자들은 율곡의 氣發理乘一途說과 理通氣局說을 이어받아 퇴계의 이발설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인과 서인의 구분은 퇴계학파, 율곡학파의 구분과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렇게 구분된 두 학파의 사상전개가
조선말기의 유학사상에 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우선 이 두 학파의 형성과정과 각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의 학설을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연대로 보면 퇴계학파의 형성이 조금 앞서나 율곡의 학설이 퇴계를 비판하면서 형성되었고 율곡학파가 이를 이어 퇴계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퇴계학파의 율곡비판이 본격화되므로 여기서는 율곡학파부터 먼저 살피고자 한다.
1. 율곡학파의 형성과 퇴계설 비판
앞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율곡학파는 율곡의 문인과 율곡의 교우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의 문인들 그리고 화담계의 유학자 일부가 합쳐져서 형성되는데 당파로는 서인과 지역적으로는 기호와 연결된다. 율곡의 학통은 본래 구봉의
문인이었던 沙溪 金長生(1548 - 1631)으로 이어지고 그의 아들인 愼獨齊 金集(1574 - 1656) 尤菴 宋時烈(1607 - 1689)을
거쳐 遂菴 權尙夏(1641 - 1721)로 이어진다. 이 무렵 율곡학파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로 말미암아 노론과 소론이 갈리게
되고 학문적으로는 牛溪 成渾(1535 - 1598), 南溪 朴世采(1631-1695), 拙修齊 趙聖期(1638 - 1689), 三淵
金昌翕(1653 - 1722) 등의 退栗折衷을 표방하는 일군의 성리학자가 학문적 맥을 달리하게 된다. 율곡학파의 적통에 해당되는 수암의 문인인
南塘 韓元震 (1682 - 1751)과 巍巖 李柬(1677 - 1727) 사이에 벌어진 人物性同異論爭으로 말미암아 율곡학파는 다시 학문적으로
湖學과 洛學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호락논쟁의 여파로 율곡학파의 맥을 잇는 기호의 성리학자들은 다양한 경향을 띠게된다.즉 호락논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鹿門 任聖周(1711 - 1788)같은 유학자는 유기론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老洲 吳熙常(1763 - 1833), 梅山 洪直弼 1776
- 1852등은 녹문을 비판하면서 점차 주리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호락 논쟁 이후의 율곡학파에 해당되는 조선후기의 유학자들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따로 다루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사계, 우암, 수암을 거치면서 율곡학파가 퇴계의 理氣互發說과 四端七情論을
비판하고 조선 성리학의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 과정까지만 간략히 살펴볼까 한다.
율곡의 성리학은 화담의 一氣長存說을 비판하고 理通氣局說을
내어 理에 보편성과 선차성을 둔 점에서는 퇴계의 理先氣後의 입장과 근사하나 이기의 관계문제에서 퇴계가 不相雜을 강조한데 반해 율곡은 不相離를 더
강조하고 있으며 격물치지의 해석에서도 퇴계의 理自致說을 반대하고 있다. 율곡과 퇴계의 성리학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은 사단칠정론인데
퇴계가 사단칠정을 理發氣隨와 氣發理乘에 각기 나누어 분속시킴으로써 이기호발을 주장한데 반해 율곡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
氣發理乘一途만 인정한다. 이러한 율곡의 성리설은 일찌기 고봉에서 부터 지적된 퇴계 성리학의 논리적 난점을 보완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리학적
세계관의 핵심이되는 理개념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 시킨 것으로 이후 理의 發과 動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끝없는 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
사계 김장생은 구봉의 문인으로 구봉에게서 예학을 전수받았으나 성리학은 율곡에게서 배워 율곡의 학문을 잇게 된다.그는
"퇴계선생의 사단칠정호발설은 권양촌의 입학도설에서 나왔다.그 圖에 사단이 仁의 좌변에 칠정이 仁의 우변에 적혀 있는데 정추만은 양촌에 입각하여
도를 만들었고 퇴계는 추만에 근거하여 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호발설이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고 하여 퇴계의 이기호발설이 권양촌의
입학도설과 정추만의 천명도설에서 유래한 것임을 말하고 이어서 퇴계의 호발설이 주자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사계는 퇴계의
호발설과 더불어 격물에 대한 퇴계의 '물리의 극처가 나의 궁구함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이자치설을 반대하여 퇴계학파의 우복 정경세와
논변을 벌이기도 했다. 사계는 여기서 격물이물격을 '손님을 불러서 손이 온것과 같다'고 설명한 우복의 비유에 대해 이는 물리가 객손이 되어
오심에 왕래하게 되고 지지의 한 단계가 간데 없게 되어 오심과 상관이 없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계까지만해도
퇴계의 학설에는 분명치 않은 점이 있다든지 의심스럽다든지 하여 상대방을 존중하고 논변에 당파적인 감정이 끼어들지 않았으나 우암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율곡 사계의 학통을 이어받아 율곡의 성리학을 주자학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만든 사람은 우암 송시열이다. 우암은 퇴계와 우복의
학설을 공격하고 율곡의 설이 옳음을 논증하는데 평생을 바쳐 노력했는데 이는 당시에 예송문제로 격화된 당쟁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우암이
48세때 柳稷등이 율곡의 이기일물설은 주자에 어긋난 육상산의 도기론에 가깝고 율곡이 '주자가 참으로 이기호발이라고 생각했다면 주자
또한 과오다'하여 전현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율곡의 문묘배향을 반대하자 첫째 주자가 이기호발을 주장하지 않았고 둘째 율곡은 이기는 혼륜무간하다
했으니 일물로 본 것이 아니며 세째 주자도 고승 도겸에게 배운 바 있으니 율곡의 출가도 용납될 수 있다고 율곡을 변호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우암은 평생에 걸쳐 율곡의 설과 주자의 성리설이 일치함을 논증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로 나온 저술이 <주자언론동이고>이다.
우암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퇴율의 설이 나누어진 이유를 밝힌다.
"이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로 부터 말할 수도 있고
기로 부터 말할 수도 있다. 시원으로부터 말할 수도 있고 현상으로 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개 이기는 혼륜무간하나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이어서 뒤섞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이에 동정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가 기를 주재한 것으로부터 말한 것이고 이에 동정이 없다고 한 것은 기가
운행하는 것으로 부터 말한 것이다. 선후가 있다고 말한 것은 이기의 개념에서 한 말이요 무선후는 이기의 현상에서 한 말이다."
우암의 이
말만 놓고 본다면 퇴계와 율곡은 각각 이기의 한면을 말한 것으로 근본은 같다고 주장하는것 같다. 우암은 퇴계의 이기호발설이 주자어류의
'칠정시기지발 사단시이지발'에서 나왔음을 인정하지만 퇴계의 오류는 그 구절에 너무 집착하여 그와 모순되는 구절이 있음을 간과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주자의 이 말이 혹 기록자의 실수인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는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의 논리를 계속
밀고나가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이므로 칠정과 마찬가지로 사단도 선악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성리학자들을 당혹케 했다.
"퇴계
고봉 율곡 우계는 모두 사단을 순선하다고 여겼으나 주자는 사단에도 불선한 점이 있다고 여겼다. 알지 못하겠도다. 네 분 선생님들은 주자의 이
말을 보지 못했는가. 사단이 어떻게 불선할 수 있는가. 사단도 기발이이승하기 때문이다. 발할때 그 기가 청명하면 이도 순선하지만 그 기가
혼탁하면 이도 그것에 가리워지게 된다."
우암의 율곡설 추종과 퇴계비판은 결국 주자학의 고수로 귀착되는데 우암의 이어한 순정 주자학에의
집착은 예송을 통한 정쟁중에 남인계열의 미수 허목과 백호 윤휴가 고례의 왕자례부동서인을 들고 나와 왕권을 옹호하면서 당시의 집권층이던
서인의 주자가례의 입장을 공격하자 더욱 견고해 졌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한학적 기풍을 지녔던 윤휴의 경전주석이 주자학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판단하여 윤휴를 적휴, 사문난적, 심어홍수맹수라고 극렬히 비난했고 더 나아가서는 윤휴와 교우를 단절하지 않는다고 하여 윤선거 윤증에게
휴당 종휴라고 비난을 가하여 마침내 노론과 소론이 갈라서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의 성리학은 실로 우암에 이르러 완전히 주자학 중심으로
고착되었으니 우암의 성리학은 이전의 성리학설을 화석화하고 이후의 성리학을 제약하는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하겠다.
원래 우암의 문인중 학술과
문장이 뛰어나 우암의 의발을 전수받을 것으로 기대되던 명제 윤증이 懷尼是非이후 휴당으로 배척되었기 때문에 우암의 위와 같은 율곡 추종과 주자학
고수라는 과제는 遂菴 權尙夏에게 계승되었다
수암은 '학문은 주자를 주로하고 사업은 효종의 대의를 주로하라'는 우암의 가르침대로
<사칠호발변>을 지어 퇴계의 호발설을 비판하고 율곡의 사단칠정 기발이승일도설이 주자의 의도와 합치됨을 변증하고 있다.수암의 성리설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심의 의미를 둘로 나누어 인심도심설을 설명한 부분인데 수암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심은 형기의 사에서 생기는 것이니
이때의 기는 이목구비를 지칭한 것이다. 칠정은 기에서 발하는 것이니 이때의 기는 심을 지칭한 것이다. 글자는 같아도 의미가 전혀 다른데 옛부터
선현들은 항상 인심도심은 이같이 설명이 가한데 사단칠정만이 이런 설명이 불가한가라고 말하니 깊이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수암의 이
분석에 따르면 칠정이 곧 인심이 될 수 없으므로 사단과 도심은 곧 이의 발이고 칠정과 인심은 기의 발이라는 호발설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이상에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을 계승한 사계, 우암, 수암이 어떻게 퇴계의 호발설을 비판하고 어떻게 율곡의 설이 주자의 본령에
일치함을 논증하는지를 대충 살펴보았다. 우암에서 수암에 이르는 과정에서 율곡학파는 지나치게 율곡의 기발이승의 입장을 강조하고 논리적으로 확대
해석한 결과 주자학 본래의 이 강조를 도외시한 감이 있다. 여기서 퇴계학파가 율곡학파와 율곡의 성리설을 비판할 수 있는 소지가 생기게 되었고 또
후일 율곡학파 내부에서 호락논쟁이 싹트는 계기가 마련되고 조선조 말에 가서는 극단적인 유기론과 유리론이 모두 율곡학파에서 연유하는 원인이
제공되는 것 같다.
2. 퇴계학파의 형성과 율곡비판
앞에서 언급했듯이 퇴계학파의 구성은 퇴계의 직계 문인및 남명계열의 학자 그리고 화담계열의 학자 일부가
합하여 이루어 진다. 남명계열의 학자들은 義의 실천을 중시했기 때문에 별도의 성리설을 전개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허엽으로 대표되는 화담계열의
학자들은 후의 기호남인의 독특한 사상적 분위기와 연결되는 것 같으나 확실치 않다.
퇴계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기호발설에 기초한
사단칠정론은 퇴계의 직전제자인 월천 조목과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로 이어진다 하겠다. 이 중 학봉, 서애, 한강은 퇴계문하의
삼걸로 일컬어 지는데 이들로 부터 퇴계학파의 여러 분파가 생겨나게 된다. 학봉의 문인들과 서애의 문인들은 서원배향의 위계문제 때문에 일찍이
호파와 병파로 나누어졌고 후에 한강-미수로 이어지는 기호 퇴계학파와 한강-여헌으로 이어지는 학파가 형성됨으로 해서 퇴계학파는 네 분파로 나누어져
발전하게 된다. 이들 학파의 사상적 특색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들 학파를 이루었던 유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퇴계학파의 중심을
형성한 학파는 근래에 까지도 그 학맥을 이어온 학봉의 문파인데 학봉의 퇴계 존숭은 경당 장흥효를 거쳐 존제 이휘일(경당의 외손),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갈암의 아들), 대산 이상정(밀암의 외손)으로 이어졌고 다시 입제 정종로, 정제 유치명, 서산 김흥락(학봉의 후손), 심제 조경섭,
손제 남한조를 지나 의와 이원조 한주 이진상 면우 곽종석등의 한말 이학자에까지 연결된다. 서애계의 학맥은 우복 정경세,수암 유진(서애의 계자),
졸제 유원지(수암의 조카), 활제 이구, 식산 이만부, 청대 권상일로 이어진다. 한강의 문인도 일파를 형성할 정도로 많았는데 외제 이후경, 낙제
서사원, 교천 황종해, 미수 허목등이 대표적인 한강의 제자였다. 이중 미수 허목에 의하여 기호의 퇴계학파가 성립되었는데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하려 황덕길, 성제 허전으로 학맥을 잇는다. 한강을 종유한 여헌의 문인으로는 학초 김응상, 쌍봉 정극후, 수암 유진을 들 수 있다.
이들 퇴게학파의 네 분파중 학봉계와 서애계는 퇴계의 학설을 부연 설명하여 퇴계의 리를 중심으로하는 성리설을 그대로 잇고 있으나 미수계와 여헌계는
퇴계학파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퇴계의 학설과 꼭 부합하지는 않는다. 여헌과 미수가 모두 탈주자학적인 경학을 전개한 백호
윤휴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기호남인(기호의 퇴계학파)의 성격과 더불어 흥미있는 점이라 하겠다.
위에서 볼 수 잇는 바와 같이
퇴계학파라고 해서 그냥 퇴계 일변도가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사상적 갈래를 치고 있지만 여기서는 율곡학파에 대립되는 학파로서의 퇴계학파가 지니는
사상적 특징을 알아 보기 위해서 율곡, 사계, 우암등의 호발설 비판에 대한 퇴계학파 유학자들의 역비판과 퇴계설 옹호를 위주로 - 우복과 갈암의
성리설 - 퇴계학파의 사상전개를 살피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율곡과 율곡학파 학자들의 퇴계비판은 주로 퇴계의
이기결시이물,사단과 칠정의 분리,사단과 칠정의 이기호발에 집중되어 잇었다.이 부분에 관련된 퇴계의 사상체계는 기묘사화로 붕괴된 성리학적
보편가치의 이론적 재정립이라는 당시 사림계 성리학자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단 성 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논리적인 무리가 있게 된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율곡학파의 퇴계비판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론을 펴기 시작한 학자는 서애의 문인인 우복
정경세였다. 우복은 사계가 퇴계의 호발설에 대해 '이기를 이물로 나눈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한데 대해 "이기는 본래 일물이 아니다.다만 일찍이
서로 떠나지 않은 까닭에 혼융무간이라 하였을 뿐이지 무간 두 글자를 자세히 살피면 그것이 이물임은 분명하다. 율곡이 반드시 이기를 일물로 삼은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컨대 아마 그대가 잘못 기억하였던 듯하다. 하물며 이와 기가 합하여 성을 이룬다는 것은 주자의 설인데 이조항은
북계도 쉽게 공파하지 못했음에랴"고 하여 주자에서 전거를 구하고 혼융'무간'을 분석하여 퇴계의 호발성를 옹호한다. 또 고봉,율곡의 七情包四端에
대해 "요사이 사람들이 희.노.애.락을 인.의.예.지에 분배하고자 한 것은 억지로 갖다붙인 설에 지나지 않는다. 칠정은 그대로 칠정이고 사단은
그대로 사단이어서 아마도 서로 합치할 수 없을 것이다. 맹자의 희와 문왕의 노가 어째서 리에서 감발된 것이 아니겠는가"고 하여 나름대로 칠정과
사단의 일치를 주장한 율곡학파의 설에 반박하고 있다. 이러한 우복은 율곡설을 따른 사계와 깊은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성리설에 관한 사계와의
예설과 격물치지의 해석에 관한 논변중에서 율곡을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퇴계에 대한 숭모에서 나온 것이지 당쟁과 결부된 것은
아니었다.
율곡의 성리학과 율곡학파의 퇴계비판에 대한 보다 격한 반응은 송시열 이후 율곡학파의 퇴계설 비판이 본격화되고 이것이 당쟁과
결부된 이후 즉 퇴계몰후 약 백년이 지난 때 부터 시작되는데 학봉의 학통을 잇고 있는 갈암 이현일과 그의 벗 우담 정시한의 율곡설
비판이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갈암은 율곡이 "퇴계의 이기호발에 입각한 사단칠정론이 의리불명하고 고봉의 전설이 명백직최하다"는 비판에
대해 '백세후에도 의심할 수 없는' 퇴계의 사단칠정에 관한 정론을 재천명하기 위하여 <율곡이씨론사단칠정서변>을 저술하여
율곡의 설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갈암은 율곡이 우계에게 보낸 서한에서 19개 항목을 발췌하여 율곡의 사단칠정론과 기자이설 인심도심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우선 사단칠정론에 대해서 갈암은 다음과 같이 율곡을 비판하고 퇴계의 호발설을 옹호하고 있다.
"율곡은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니 사단이 칠정이 아니고 칠정이 사단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했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사단과 칠정이 각각 하나의 설이 된다. 억지로
일설로 합해서는 안 된다. 주자도 '사단시이지발 칠정시기지발'이라고 했다. 따라서 칠정을 사단에 분배하는 학설은 불가하다. 율곡은 이 점에서
깊이 생각하여 그 같고 다름을 유의하지 않고 갑자기 일도로 묶어 버렸다.그의 학설은 한결같이 촉과 월처럼 먼 것을 억지로 지리하게 끌어 붙이는
병통이 있으니 애석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갈암의 율곡에 대한 비판은 주자의 이유동정과 사단이지발 칠정기지발이라는 말에
근거하여 퇴계의 이자유동정과 사단이발기승 칠정기발이승이라는 이기호발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사단칠정론의 이러한 논리를 계속 확대하여 율곡의
'음양동정은 기가 스스로 그러할 뿐 그렇게 되게 하는자가 없다'고 하는 기자이설에 대해서는 "이가 무위하기는 하지만 조화의 추뉴 만물의
근저이다"고 전제하고 주자의 "이에 동정이 있는 까닭에 기에 동정이 있다"는 말을 들어 율곡의 설이 주자의 설과 어긋남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율곡의 이기설, 사단칠정설, 인심도심설은 나정암의 설을 취한 것으로 주자의 본령과 어긋난 선학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한다.
"율곡이
나정암의 인심도심 체용설에 대하여 겉으로는 그 설을 배척했으나 속마음으로는 그 뜻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 큰 근본에서는 착오가 없다'고 했던
것이다."
갈암의 벗인 우담의 율곡설비판도 이통기국설을 분석하여 그것이 이일분수라는 주자학의 대전제와 모순됨을 밝힌 것이외에는 갈암의 위와
같은 비판과 대동소이 하다. 갈암과 우담의 이러한 율곡비판은 당파에 얽매인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義와 利를 근원적으로 구분하는 유가의 전통적 입장 -따라서 義의 근원이 되는 사단과 이를 추구하는 형기의 칠정은 구분되어야하고 그 형이상학적
근거인 이와 기도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가져야 한다.- 을 이론적으로 사수하려는 17세기 후반의 조선 사대부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갈암과 우담의 율곡설 비판이후 퇴계의 이기호발, 이유동정설은 더욱 극단적으로 해석되어 대산에 이르러서는 理는 無爲而爲 不宰而宰하여
理動氣生하는 活物로 보기까지 한다. 다음장에서 다루겠지만 조선조 말에 이르러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때가 되면 퇴계학파
율곡학파를 막론하고 극단적인 주리설을 취하게 됨을 볼 수 있다.결국 이발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퇴율양학파의 입장차이는 주자학적 명분의
고수, 즉 유교적 사회질서자체의 위상에 관계된 것이지 논리적인 세계해석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율곡학파에서도 이발을 인정하지는 않으나
리가 보편적 존재이고 기에 우선하는 존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갈암.우담의 위와 같은 비판은 이러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닌
유교사회라는 범위안에서 나름대로의 일정한 타당성을 지닐 수있게 되는 것이다.
Ⅲ. 퇴·율절충론과 탈주자학적 유학사상의 등장
1. 퇴·율절충파의 사상
앞장에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학자의 성리설을 이기성정론을 중심으로살펴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에 속하면서도 그 성리설이나 관심분야가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성리설이나 사단칠정론이 공통점이 있어서 하나의 학파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주자학의 양대조류인 퇴계와 율곡의 설을 절충하고
있거나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에 퇴율절충파라는 이름으로 묶어 그들의 유학사상을 살펴볼까 한다.
우선 퇴계학파에서 절충파로 거론할만한 학자를
들어보면 여헌 장현광과 미수 허목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사상체계는 절충적이라기 보다 독창적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율곡학파의
경우에는 율곡의 교우였던 우계 성혼의 성리학이 퇴계와 율곡의 대립적인 면을 절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절충적인 입장을 취한 학자들이 상당수
있는데 대표적인 절충론자로는 남계 박세채, 졸수제 조성기, 농암 김창협, 三淵 金昌翕, 창계 임영 등을 들 수있다. 퇴계학파의 여헌과 미수의
사상은 기호남인계의 학자들로 이어지고 있고 율곡학파의 절충론은 낙론으로 이어져 조선말의 화서 이항로, 성제 유중교,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등의 주리론적 성리학으로 연결된다. 그러면 이들의 사상적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여헌과 미수는 당시로서는 독특하게
이기심성론이 아닌 우주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유학자이다. 특히 여헌의 이기설은 독창적인 면이 많아 성리학의 우주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성리에 관한 견해가 잘 드러나 있는 글은 <이기경위설>인데 갈암은 여헌의 경위설이 퇴계의 이기설과 다름을 알고 "경과
위로써 이와 기를 설명하는 것은 이기가 체용이 됨을 분명히 하는 것일 뿐이라 하였으나 사실은 나정암의 도심은 체요 인심은 용이라는 주장과 앞뒤가
같은 모습이다."고 말하여 여헌의 경위설이 퇴계의 정론과는 어긋나는 나정암, 율곡과 같은 이기일물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여헌의 경위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자. 여헌은 구체적인 우주의 시원으로 도를 상정한다. 그는 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이하는
이른바 형이하자요 도는 소위 형이상자이다. 형이하자란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안이 있고 밖이 있으나 형이상자는 시도 종도 내도 외도
없다.... 이로 미루어 소급해 보면 우주가 나기전에 도는 이미 있었고 이을 미루어 앞으로 나아가 보면 우주는 없어지지만 도는
무궁하다"
도에 대한 이러한 여헌의 해설은 마치 장재나 화담의 일기에 대한 설명과 유사한 것 같다. 여헌은 이러한 형이상자로서의 도로 부터
우주와 천지가 생성되어 나온다고 한다. 이기는 이 때 작용하는 도의 두 속성이다. 그러므로 도는 곧 이기의 실체요 통합자이다.
"이른바
도는 이기를 합하고 체용을 겸한 상일 상존하는 존재이다.... 도는 그 리로써 경을 삼고 그 기로써 위를 삼는다."
따라서 이기는 이물이
아니며 도의 체용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기의 관계에서만 볼 때에는 경을 위주로하고 경으로써 위를 다스린다고 하여 전통적인 이위주의 사고방식을
따르고 있다. 여헌은 당시의 학자들이 이를 몰라서 이기를 이원적으로 해석했다고 하여 퇴계의 이자리 기자기의 결시이물설을 비판하고 있다. 여헌의
이러한 경위설은 한편에서는 이기의 근원이 같음을 밝히고 있어 율곡의 이기불상리에 부합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경과 위는 엇갈리는 두 속성으로 경 즉
리가 천지만물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여 퇴계의 불상잡을 만족시키고 있어 도체론의 면에서는 퇴율을 벗어난 새로운 이런 체계이나 이기론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절충적이라 하겠다.
미수 허목의 우주론도 여헌의 영향을 받아 우주생성론에 치중하고 있는데 여헌보다 이기의 근본이 하나임을
더욱 강조하고 있어 나정암의 설과 보다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란 기의 리이다. 이 리가 있으면 곧 이 기가 있게 된다. 기란 이의
기이다. 이기가 있으면 곧 이 리가 있게된다."고 하여 이기의 불상리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또 기는 유한하나 리는 무한하다고 하여 퇴계학파의 리를
우위로 보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율곡학파의 절충론은 말 그대로 퇴계의 학설과 율곡의 학설을 절충한 것인데 앞에서 든 우계, 남계,
졸수제 등은 이기의 불상리나 불상잡 어느 한편으로 기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불상리 중에서 불상잡의 측면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성리설을
정립하고 있다. 사단칠정론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기호발의 면이 있음을 인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퇴율을 절충하는 대개의 학설이 비슷하므로 여기서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송시열과 대립한 남계 박세채의 절충론만을 대표로 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남계의 이기관계에 대한 견해를 보면 그는
太極動以生陽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태극이 실지로 음양을 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형화가 그런 것인데
다만 음양이 동정하고 태극은 그 주가 된다는 것이다....만약이 구절때문에 호발의 설과 같다고 한다면 아마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남계는 주자가 태극은 동정한다고 말한 것은 태극이 만물의 근본이 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지 실지로 발하여 현상화 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여 율곡의 설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사단칠정론에서는 율곡처럼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여 사칠이 혼륜한 것으로 보지 않고 혼륜한
면도 있고 나누어지는 면도 있다고 하여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수용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개 사단이 발함에
반드시 기에 탄다 하더라도 바로 인의예지의 순수한 리로부터 나온 까닭에 이를 주로하니 이지발이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본연지성이 비록 기질지성
중에 있다 하더라도 단지 그 주된 바를 지칭하여 본연지성이라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남계는 기발, 기질지성으로 사단칠정을 말해야 하지만
사단은 본질적으로 이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하여 퇴계의 호발설이 율곡의 해석처럼 이발과 기발을 별개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적용에 따르는 문제라고 해석하여 퇴계의 설과 율곡의 설을 조화 일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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