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련의 선택 배경과 과정
소 정치장교가 입북 전 김일성 「면접」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45년 8월 하순, 하바로프스크에 있던
소25군정치장교 메크레르 중좌는 갑자기 사령부의 긴급명령을 받았다. 곧바로 평양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메크레르는 평양으로 들어가기 직전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비밀기지인 브야츠크로 갔다. 거기엔 중국인·조선인 빨찌산으로 구성된 88 특별여단이 있었다.
메크레르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나는 이곳에서 김일성을 처음 만났습니다. 중국인 장교(이름을 기억못함)가 김일성과 김책(金策)등을
가리키며 「이사람들이 곧 평양에 들어간다」고 소개하더군요. 그 장교의 주선으로 김일성을 비롯한 소위 빨찌산그룹 지도급 장교 4∼5명을 차례로
「면접」 했습니다.』 88특별여단은 30년대 중국 동만주 지방에서 유격활동을 하던 중국인과 조선인 빨찌산으로 구성됐으며 동북 항일연군의
후신이다. 김일성도 이 연군에 참가하고 있었다. 30년대말부터 40년대초에 걸친 일본 관동군의 대공세로 김일성과 대원들은 소련으로 피신했었다.
조선인들 모아 훈련
소련은 대일 전투가 일어날 경우 정찰활동에 이용하기 위해 중국의 지리에 밝고, 빨찌산 투쟁의
경험이 풍부한 조선인 등을 모아 극동군구 사령부 휘하에 두고 훈련을 시키기로 했다. 이런 목적으로 조직된 부대가 이른바 88특별여단이다. 이
여단의 총 인원수는 조선인 60여명, 중국인 1백여명, 소련인 40여명 등 모두 2백여명. 부대장은 동북 항일연군 지도자의 한사람인 중국인
주보중 (항일연군 제2로군 총사령)이 맡았다. 그리고 4개 대대중 김일성과 강건 6·25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50년 9월 전사)이 제1대와
제4대대장에, 김책(부수상겸 산업상·51년전 선사령관·사망)은 제3대대 정치위원이었다.
이 여단에는 해방후의 김일성 비서
문일(숙청된 후 소련 망명·사망), 조선인민군 부참모장겸 작전국장 유성철(숙청된후 소련 망명·타슈켄트 거주), 인민무력 부부장·노동당 중앙위원
김봉건(85년 대장 진급), 군단장 김학준(사망),노동당 초대 간부부장 등 10여명의 재소 고려인 출신 군인들이 들어있었다. 이들은 모두
김일성과 함께 원산항을 통해 입북했다.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계급장을 달고있었다.
김책, 뛰어난 판단력·분석력으로 후한 점수
받아
메크레르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간단한 면접을 끝내고 9월초 군용기편으로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말해둘 것은 하바로프스크 면접 당시까지 나는 김일성에 대해 특별한 지명을 받은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입북전 김일성을 비롯한 소위
빨찌산 그룹의 지도자들을 사전에 「면접」한 사실에 대해 한사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평양에 들어가기전에 사전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것이었는지,아니면 다른 특별한 비밀지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메크레르는 『상부로부터 빨찌산그룹의 활동을 보고 이중에서
지도자를 골라 보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 전부입니다』고 증언했다. 메크레르는 평양에 들어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김용범·박정애 부부를 만난다.
김용범은 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책임비서가 된다 (47년 위암으로 사망).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처음에 우리의 시야에 두명이 들어왔습니다. 한사람은 김용범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공산주의자였었습니다. 그런데
골라놓고 보니 둘 다 조직도 미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김용범·최용건·김책, 심지어는 강건도 지도자선에 놓고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참모역을 했던 김책은 시의 적절한 판단, 예리한 분석력 등 때문에 아주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북한에
대해 실시한 정책은 2,3중의 다중구조였던 것 같다. 군사적 점령과 군정 실시라는 현실적 목표와 북한을 소비예트화 하는 내면적 목표가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소련은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협력을 필요로 했고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주목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과 직접 연계된 공산주의 조직이었다. 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은 뒷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만들면서 『우리는 조직의 건설을
필요로 했다』고 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일본이 항복하기전까지는 김일성을 몰랐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후의 여러 가지
상황전개로 볼 때 소련은 하바로프스크의 빨찌산부대를 북한 경영의 중심체로 삼았고 김일성을 그 핵심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일성은 이미 소련의 「비밀스런 대안」이 되어있었던 셈이다. 소련이 김일성을 선택한 시기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진 바는 없다. 최근 입수한 북한의 비공개자료와 당시 상황에 정통한 해외의 북한 망명가들은 그때의 사실을 밝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유럽의 한 국가로 망명, 은거중인 전노동당 고위간부 서용규(徐容奎)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3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7차 회의에서 중국 동북지역의 정세와 운동에 대해 중국 공산당 동만 특위의
대표 위증민(魏拯民)이 보고했습니다. 위증민은 동북지역의 반제민족 해방 투쟁을 설명하면서 조선인 무장활동에 관해 상세히 언급했고 이때 김일성의
빨찌산 투쟁도 소개했다고 합니다.(위증민은 김이 35년부터 41년까지 중국 동만주 지방에서 유격대 활동을 할 당시 직속상관이었다).
이때 코민테른은 위증민에게 중국인부대, 조선인부대를 가리지 말고 연합해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위증민이
동북으로 돌아온 뒤인 36년초에 국제당의 지시대로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됩니다. 그리고 김일성도 연군의 군사지도자로 참가하게 됩니다.』
코민테른은 이미 위증민 등을 통해 조선인의 무장부대들이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여러차례 받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소련이 소수민족들의 활동을 일괄적으로 파악하는 기구를 두었다는 점이다. 그 기구를 통해 김일성의 활동에 관한 정보도
축적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서씨의 증언. 『소련 공산당은 코민테른과의 연계 아래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의 반제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하는 약소민족국(혹은 동방국)이라는 기구를 산하에 두고 있었지요. 약소민족국은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공작원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부대에 소련 공작원이 파견됐다는 얘기는 없습니다만 중국인 부대에는 간간이 공작원이 파견되어 협력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소련 공산당 약소민족국의 관계자들이 김일성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김일성 43년 소 공산당 접촉
서씨는 또 다른 증거를 든다. 『소련과 김일성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김일성은 43년과 44년초의
2∼3개월간씩을 모스크바에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이 사실 때문인 듯 지금까지 김일성이 모스크바대학을 나왔다, 군사대학을 나왔다, 독소 전쟁에
참가했다, 조국해방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서 낙하산 교육을 받은 뒤 하바로프스크 밀영으로 돌아와 훈련을 시켰다는 등등의 여러 가지 소문이 확인되지
않은 듯이 나돌고 있었다.
서씨의 증언.
『61년 8월의 어느 자리에서 임춘추에게 누군가가 「수상동지 (당시에는
김일성을 이렇게 불렀다)께서 소련에서 군사대학을 나오셨다는데 사실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김일성의 빨찌산 투쟁에 동참했던 임춘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군사대학을 나온 일은 없다. 그러나 43년과 44년 연초에 한번씩 두 차례 모스크바에 다녀온 일은 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에
같이 있던 중국인 지도자 주보중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2∼3개월씩 체류한 일은 있었다.
이 얘기가 와전된 것 같다. 이때는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동유럽 해방전쟁이 과제로 등장했던 시기였으므로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약소민족의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열성자 회의
같은 모임이 모스크바에서 열려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수상동지가 모스크바로 갔었다. 그러나 그때 모스크바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 지는 같이
가지 않은 나로서는 알길이 없다」고 했답니다.』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 체류시기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주장은 있었으나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43, 44년이라면 일본의 항복을 예상하기는 아직 이르며 더군다나 「조선문제」에 대한 설계가 있었다고 보기는 더욱 이르다.
그러나 김일성이 소련 공산당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틀림없다. 더구나 김일성이 소련 진주군 장성들과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소련군의 원활한 지원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소속되어 있던 소련
극동지역의 정찰 특수부대인 88 특별여단은 원래 소련 내무성 직속의 국경경비국 소속이었고 초기 사령관은 스티코프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군에서
관할하기 이전입니다. 또 연해주의 원동사령부 정치위원은 나중에 25군으로 갔다가 북한지역 소련군정의 민정사령관으로 등장하는 로마넨코였습니다.
이런 관계로 보아 스티코프나 로마넨코는 북한에 오기전부터 김일성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박헌영은
샤브신이, 김일성은 베리야가 추천
북한 문제연구소 이사장 김창순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중립화 통일론을 계속 주장하다 지금은
돌아가신 김삼규씨는 70년대 초반에 낸 「조선 전쟁론」이라는 책에서 김일성의 부상에 관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에서 제2인자가 세명 있었는데 몰로토프·말렌코프·베리아이고 이 중 해방후 한국문제에 직접 개입했던 자가
몰로토프와 베리아라는 겁니다. 부수상겸 외상이었던 몰로토프는 당시 서울 총영사였던 샤브신의 추천에 따라 박헌영을 스탈린에게 천거했다는 겁니다.
한편 내무성의 안전계통 책임자였던 베리아가 김일성을 천거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김씨의 이같은 분석은 일본 정보문서에 따른 것이어서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김일성이 소련령에 들어가 있을때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브야츠크 야영소에 있던 88특별여단의 제1
대대장이었음이 최근 확인되고 있음에 비춰볼때 김일성을 베리아가 추천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88특별여단은
군계통이면서도 실은 국경에서 정보공작을 수행하던 내무군대 ·보안군대였고 이 점에서 베리아의 군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리아가 김일성을
스탈린에게 추천할 당시만해도 베리아의 영향력이 매우 클 때였습니다.』 김일성이 원산을 통해 입북했을 때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이 소련군
대위를 만나기 위해 열차를 타고 원산으로까지 마중 나오게 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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