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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현대사]해방후 김일성 귀환 실상

by 8866 2006. 6. 19.


일제로부터 광복되던 해인 1945년. 그 해 추석은 올해보다 열흘 가량 이른 9월 20일이었습니다. 광복 후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고, 또 여느 명절과는 다른 추석이고 보니 사람들의 감회도 예전과 같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추석 하루 전날인 9월 19일 동해안의 원산 앞 바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련군함이 한 척 나타났습니다. 배가 항구 가까이에 닿자 소련군 복장을 한 50여 명 가량의 대원들이 신속히 소형 선박에 옮겨 탔고 이내 육지로 상륙하기 시작했습니다.이들의 상륙에 때맞춰 원산항에는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지 일단의 인사들이 나와 이들을 마중했고 서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 뒤 이내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날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에 도착한 사람들은, 북한이 일제를 쳐부수고 민족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며 '민족재생의 은인'으로 칭송해마지 않는 김일성과 그 일행이었습니다.

 

북한 공식 출판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0년대 중엽에 이르러 급변하는 정세를 깊이 헤아리시고 1945년 5월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공격작전계획을 세우시고 8월 9일 조선인민혁명군 전부대에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한 최후공격명령을 내리시였다.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은 총공격에로 넘어가 대일전쟁에 참가한 쏘련군대와 함께 일제의 100만 관동군을 일격에 소탕하고 드디여 1945년 8월 15일 력사적인 조국해방위업을 이룩하였다."

 

김일성은 1930년대 만주에서 일제에 대항해 빨치산 활동을 했고, 30년대 말 일제의 대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1940년 10월 하순 아무르강을 건너 소련으로 넘어갑니다.

 

소련 땅으로 넘어가 처음 그가 머물렀던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병영이었습니다. 흔히 남야영(南野營) 또는 B야영(B-Camp)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김일성은 42년 7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곳이 북야영(北野營) 또는 A야영(A-Camp)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남야영·북야영이라는 표현은 두 야영이 상대적으로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때문입니다. 또 A야영·B야영이라는 표현은 야영에서 가까운 지명의 머릿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입니다. A야영은 인근에 있던 아무르(Amour)江에서, B야영은 근처의 보로쉴로프(Boroshrov; 雙城子)市에서 그 머릿글자를 따 붙인 명칭입니다. 보로쉴로프는 현재 우수리스크로 지명이 바뀌었습니다. 일본자료에는 오케얀스크로 표기되어 있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김일성은 42년 7월 남야영에서 북야영으로 이동했고 그 전인 42년 2월 현지에서 김정일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김정일이 북야영의 바츠코예(또는 브야츠크)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김일성 일행이 남야영에서 북야영으로 이동하면서 두 야영의 대원들이 하나로 합치게 됐고 42년 8월 1일 세간에 알려진 소련 극동방면군 산하 제88특별저격여단이 출범하게 됩니다. 김일성은 제88특별저격여단의 1대대장에 임명됩니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 45년 8월 해방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40년대 초 그러니까 남야영에 머물던 기간 소수 대원을 이끌고 두 차례 정도 만주로 출격한 적이 있지만 정찰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고 전투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고 김일성 일행이 바츠코예 병영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것은 45년 9월 9일 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아이들이 딸린 여자대원을 남겨두고 먼저 육로를 이용해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노정은 바츠코예를 떠나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 길림성 왕청·도문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입국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일행이 목단강에 이르렀을 때 예기치 못한 사태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만주지역에 산재해 있던 일본 관동군 패잔병들이 목단강 남쪽에 있던 노흑산(老黑山) 터널을 폭파하고 주변의 비행장 활주로마저 파괴한 것입니다. 이로써 김일성 일행은 당초의 노정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행은 바츠코예로 되돌아가 보로쉴로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그곳에서 소련군이 마련해준 군함을 타고 해로를 이용해 귀환길에 오릅니다.

 

김일성 일행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승선한 것은 9월 18일 저녁. 이들은 이튿날인 19일 원산에 상륙함으로써 그리던 조국 땅에 첫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바로 그 입국 장면입니다.

 

당시 이들이 탔던 배는 푸가초프라는 이름이 붙은 군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배는 미국이 건조한 3000t급 트롤선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의거해 소련에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배를 넘겨받은 소련 극동선박국은 여제 에카테리나 2세에 의해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처형된 18세기의 유명한 농민반란 지도자 예멜란 푸가초프(Emelyan Ivanovich Pugachyov)의 이름을 빌려 이 배를 푸가초프호로 명명했습니다.

 

폐기 처분을 기다리던 푸가초프호는 공교롭게도 김일성 일행을 태워 나르면서 한낱 고물선에서 일약 '역사적 존재'가 되었고, 현재 원산 앞바다에 정박해 사적선박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개선호'라는 거창한 새 이름까지 부여받고 말이죠.

 

김일성은 원산에 상륙하기 직전 일행에게 자신의 입북소식을 비밀에 부칠 것을 당부했습니다. 원산에서 지역 인사들을 만나 인사할 때도 자신을 본명인 '김성주'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또 누가 김일성을 아느냐고 물으면 "김일성은 나중에 부대를 이끌고 들어올 것"이라고 대답토록 일행에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철저히 자신의 입국 사실을 숨긴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뜻깊은 전통명절인 추석 전날, 그것도 '민족재생의 은인'의 개선이라면 그에 걸맞은 떠들썩한 환영의식이나 환영인파가 있어야 어울리겠지만 그런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기차를 이용해 원산을 떠나 평양으로 향한 것은 9월 20일. 마침 먼저 평양에 진주해 있던 소련군사령부 대표가 평양에서 김일성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원산을 향해 오던 중이었습니다.그런데 쌍방이 탄 열차는 강원도 부래산역 근처에서 운행실수로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다행인지 큰 피해는 없었고 22일 목적지인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일행이 평양에 도착할 때도 이들이 평양에 입성한다는 사실을 아는 조선사람은 없었습니다. 소련군정사령부의 몇몇 인사들만이 아는 극비였기 때문입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100만의 일본 관동군을 쳐부수고 조국에 귀환하는 개선장군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행색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평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자신의 귀환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심지어 조부모가 살아있던 만경대의 생가에도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평양시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10월 14일.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현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조선인민해방축하대회'에서 '김일성장군'으로 등장해 연설하면서입니다.

 

북한은 이날 행사가 '김일성장군 환영 군중대회'였다고 모든 출판물과 매체에서 적고 있지만 어불성설입니다. 이날 33세의 김성주 청년이 김일성장군이 되어 나타나자 군중들이 '가짜'라며 술렁이기 시작했고,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만경대의 생가에 가서 조부모와 '대질' 확인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37년 6월 보천보전투가 발생했을 때 그 주인공이 김성주이고 고향이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현재 평양 만경대)이며 거기 조부모가 살아 있다는 보도가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이 고향에 돌아온 후 조부모를 대면한 것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의 본의 아닌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에는 '민족재생의 은인'의 조국개선을 기리는 갖가지 '개선' 시리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평양의 정원이라는 모란봉 아래에는 나폴레옹의 파리 개선을 기념해 건립한 에뜨왈 개선문보다 10m나 더 높은 김일성의 개선(60m)이 우뚝 서있습니다. 개선문이 있는 거리는 '개선거리'이고 그 옆에 있는 공원은 '개선청년공원'이며 일대의 광장은 '개선광장'입니다.

 

그가 평양시민들 앞에 처음 나타나 한 연설은 '개선연설', 그 연설문을 화강석에 새겨 세운 비석은 '개선연설 친필교시비'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개선'호(푸가초프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설적인 김일성장군이 '개선'하는 마당이면 이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려 만인의 축하와 환영 속에 맞이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거의 한 달에 가까운 기간동안 입국은 물론 평양귀환 사실까지 숨겨야 했던 사연에 대해 북한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바츠코예 병영에 남아있던 여자대원들은 11월 16일 경 상부로부터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으며 11월 하순 역시 군함을 타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이들 중에는 김일성의 처 김정숙도 끼어 있었습니다. 김정숙은 어린 김정일과 그의 동생(나중에 사망)을 데리고 김철호(전 인민무력부장 최현의 부인), 김옥순(전 인민무력부장 최광의 부인)을 비롯한 여러 명과 함께 11월 25일 웅기(지금의 선봉)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바로 청진으로 이동해 여장을 풀게 되지요. 청진에 도착한 이들은 평양에 있는 김일성에게 무사히 귀환했음을 알린 뒤 12월 22일까지 청진에 체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숙 일행이 평양에 도착한 것은 12월 29일께였습니다. 김정숙 일행이 머물렀던 청진시 청암구역 해방동의 2층짜리 숙소는 오늘날 사적건물로 성역화되어 있습니다.

 

 

 

출처 : 밝은 미래 건설
글쓴이 : 무영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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