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蘇)측의 권력구성
복안
대통령 고당, 군부책임자 김일성 안(案)
조만식에 대한 소련측이 관심은 특별했다. 그것은 당시
고당의 위상이 그러한 탓이기도 했지만 소련측은 그들의 의도를 명확히 내비치지 않으면서 여러 각도로 그들의 이해와 관련지어 북한을 맡길 장래의
지도자들을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진영 인사들에게 가해졌던 테러와 암살의 위협이 고당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군정측은 오히려 고당을 비호했다. 마침내 45말 신탁통치 문제가 거세게 제기됐을 때 소련은 「조만식 대통령·김일성 군부책임자」안(案)을
제의하기까지 했다.
고당의 거절로 소련이 민족진영 인사를 내세우려했던 계획을 포기할때까지는 적어도 소련군은 고당에게 우호적이었다.
메크레르씨는 해방 직후 고당에 대한 공산진영의 테러계획과 이를 소련군이 저지한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하고 있다.
『1945년 10월
1일부터 4일 사이 어느날 오후 3시쯤으로 기억합니다. 조만식이 인민위원회 앞에서 일단의 청년들에 의해 체포되어 그들의 「특수 가옥」에
구금됐다는 정보가 입수됐지요.』
당시 북한의 상황으로는 이같은 소문이 평양시내에 알려지면 군중들이 벌떼같이 몰려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몰고올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 책임은 메크레르 중좌를 비롯, 고위장교들이 져야함은 물론이었다. 메크레르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며칠 전 나는 김일센 주위에서 「조만식을 없애 버리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지요. 김일센을
불렀지요. 「당신 지금 정신이 있소. 조만식을 제거할 경우, 그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헛된 수작을 부리는 거요」라면서 김일센을 몰아붙였지요.
김일센은 금시초문이라고 펄쩍 뛰었지요. 나는 그 길로 부하 4명을 대동하고 김일센 부하들이 비밀리에 사용하는 「감옥」(그는 이렇게 표현했으나
다른 증언자들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특수 가옥」일 거라고 보고 있음)을 찾아갔지요.』
그는 조만식이 있었던 특수가옥의 상황을
상세히 기억했다.
『조만식이 일단의 청년들(이름은 하나도 기억 못함)사이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내가 도착할 때까지 조만식에게 폭언이나
폭행은 없었다지만 만약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분위기였지요.
조만식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젋은이들이 잠시 조용한 곳에서 시국과
민족장래에 대해 얘기를 하자길래 그냥 따라왔습니다」고 말하더군요.』
메크레르씨는
다행히 조만식은 이들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여기까지 데려왔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김일성, 45년 10월 「고당 제거」기도
『조만식과 함께 사령부로 돌아와 김일센을 불러놓은 자리에서 조만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김일센에게 오해가 없도록 사과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조만식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너무 과민하지 마십시오」라며 큰
지도자다운 자세를 보이더군요. 이 사건 이후 조만식은 나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줬습니다.』
당시 고당의 주위에서 개인비서격으로
일하다 47년 5월 월남한 박재창씨(78·고당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는 메크레르씨가 공개하는 이같은 비사(秘史)를 처음 듣는다고 했다.
『선생께서 워낙 과묵하셔서 어지간한 일은 주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당시 소련군정의 막후 실력자였던
정치장교 메크레르씨의 회고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어지러웠던 평양의 상황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했던 일이었지요. 「조만식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많이 나돌기는 했어요. 선생께서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때문에 고당과
김일성의 관계는 표면상으로는 좋았다. 초창기 北韓공산당 창설에 관여했던 서됻규(徐容奎)(70·가명·그는 해외로 망명한 고위 노동당원으로 신분을
아직 노출시킬 수 없음)는 『고당이 김일성환영대회도 잘해주었다』고 증언한다.
『환영사는 고당이 직접 만들거나 김일성진영에서
준비해준 것을 그대로 읽기도 했어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김일성의 가족연을 베풀어 줬는데 그것도 고당이 발의했었지요.』
北에서는
金日成이 평양군중대회에 나타나기 전날인 10월 13일 서남5도 열성자비밀대회에서 「새 조선 건설과 통일전략」에 대해 연설했다(김일성선집 1권)고
해서 이미 김일성이 지도자로 내정되어 있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막후 정치설계자로서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정치위원
스티코프 상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던 25군 정치사령관 레베체프씨(87·당시 소장)는 그것을 반박하는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북한 정권설립의 실질적 후원자로서 그후 수차례 김일성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 환대를 받기도 했던 레베데프 소장은 모스크바의
비루소프거리 그의 아파트에 불편한 몸을 일츠켜 증언에 응해 주었다.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에서 아직은 공산당원을 정권 전면에 절대
부상시키지 말고 정권 초기에는 민족주의자 또는 민주주의자를 내세우라는 지시가 계속 떨어졌습니다. 때문에 치스차코프 총사령관을 비롯, 로마넨코
장군·이그나치프·메크레르 중좌 그리고 김일성등이 수차례 조만식을 찾아가거나 사령부로 불러 「후견제」(신탁통치제)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지요.』
소군의 성격 묻는 고당, 『해방군인가 점령군이가』
레베테프소장의 증언은 이어진다.
『해방 10일이
지난 1945년 8월 25일 蘇25軍총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성흥(成興)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어요, 나는 3일 뒤인 28일 평양에 들어왔는데
치스차코프가 내게 조만식 얘기를 들려줬어요. 치스차코프가 도착한 이튿날인 26일 조만식이 소련어를 잘하는 박정애(朴正愛)를 대동하고 치스차코프
사령관을 찾아왔더랍니다(박정애는 해방 전 사회주의 여성노동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해 평양형무소에서 수감중 해방과 함께 출감한 인물).
조만식이 찾아와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아니면 점령군인가」라고 묻더라는 거지요. 치스차코프 대장이 「소련군이 온 목적은 조선
해방이다」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순수군인이니 정치적인 문제는 2일 후 정치전문가인 레베데프 소장이 오면 그에게 물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내가
평양에 도착한 하루 뒤인 29일 역시 조만식이 박정애와 승리양조장 주인 최아립을 대동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 평양의
정치·경제·사회상황 등을 상세히 설명하더군요. 그리고는 소련군이 영토확장을 위한 점령군이 아니라면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나도 이점을 굳게 약속했지요. 그후 조만식과 나는 10월 7일, 13일, 14일 등 여러 차례 만나 건국문제
등을
깊이있게 협의했습니다.』
그는 『조만식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면서 『스탈린 정부로부터 김일센을 북한의 지도자로 추대하라는
특별한 지시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그리고 이튿날인 10월 14일 「김일성장군
환영」평양시민대회, 12월 17∼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 등을 통해 김일센이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고
말했다.
레베데프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김일성은 12월 17일∼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일약
책임비서가 돼 사실상 북한공산당의 1인자로 부상한다. 그렇지만 김일성은 아직 북한의 지도자로 지목된 상황은 아니었다.
레베데프
장군은 김일성이 당지도자로 지목된 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련공상당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추천했습니다. 결코 소련군대가 추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한낱 집행자였을뿐 자세한 내막은 스티코프 장군이 잘 알고 있어요.』
김일성도 소련군의 요청을 받아 조만식에게
민족진영을 결집해 정당을 결성(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하는 것이 좋지않느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당은 김일성이 소련군정의
군인들과 함께 오는 것을 싫어했다고 했다.
서용규씨의 증언-.
『고당은 김일성이 소련군인들과 함께 오면 「김장군.
왜 노랭이들하고 같이 와요. 나는 노린애가 싫으니 데려가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그 다음엔 최용건을 데리고 갔지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련군정은 신탁통치문제가 등장하자 한때 비록 「소군정에 협조하면」이란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붙이기는 했지만
조만식을 북한의 초대 대통령에, 김일성을 군부책임자인 민족보위상에 내정하기도 했었다고 레베데프씨는 증언하고 있다. 소군정의 고위책임자가 조만식을
초대 대통령에 내정하고 이를 그에게 통보했었다고 직접 밝힌 것은 처음이다.
신탁통치 둘러싼 로마넨코와 조만식의 대좌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에서 후견제(신탁통치)가 결정된 직후인
1945년 12월 30일 또는 31일 밤으로 기억합니다.
소련군 25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 장군이 조만식을 찾아가 신탁통치만 찬성하면 그를 북한의 초대대통령에, 그리고 김일성을 군부책임자인 민족보위상에
각각 추대하기로 했다고 통보했지요.』조선중앙통신사 주필 등을 역임하다 59년 월남했던 한재덕(韓載德)씨(사망)는 그의 증언 「김일성을
고발한다」에서 로마넨코 민정사령관과 김일성등이 신탁통치문제로 조만식을 찾아가 「曺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김일성은 수상이나 군부책임을 맡도록
하겠다」는 유혹을 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李庭植)교수(美 펜실베니아大·정치학)도 자신들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로마넨코 장군이 만약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수락한다면 초대 대통령에 지명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었던 것 같다고 주장했으나
명확한 증거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메크레르씨도 레베데프 장군과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다. 『지도부에서 줄곧 조만식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여론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탁통치를 놓고 우리와 결별선언을 했지요. 지도부는 정권 초기에는 원로를 앞세워야
한다는 당 방침 때문에 조만식 대신 김두봉(金枓奉)을 원로로 추대했지요. 그러나 김두봉은 인민들의 신망이 조만식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그때까지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공산당과도 되도록 심한 충돌을 피하고, 타협할 수 있는 데까지 타협해 왔던
고당이 반탁투쟁으로 고려호텔에 감금된 채 사회와의 연락이 일체 단절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자면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이제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각축하게 되는 것이다.
46년 2월 김일성의 지도권이 확립되기까지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나름의 숱한 변환요인들이 있었던 셈이다. 레베데프는 말했다.
『북한의 역사는 소련군의 진주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소련군의 진주에서부터 김일성이 최종 선택되어 김일성정권이 탄생되기까지 혁명과 독립의 열정 속에서 소련군을 낀 권력자의
암투과정을 되짚어 보기로 한다.
(계속)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현대사]소련의 김일성정권 만들기(4) (0) | 2006.06.19 |
---|---|
[스크랩] [현대사]소련의 김일성정권 만들기(3) (0) | 2006.06.19 |
[스크랩] [현대사]소련의 김일성정권 말들기(1) (0) | 2006.06.19 |
[스크랩] [현대사]해방후 김일성 귀환 실상 (0) | 2006.06.19 |
관복 (0) | 2006.05.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