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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현대사]소련의 김일성정권 말들기(1)

by 8866 2006. 6. 19.

1. 해방직후의 권력 향배(向背)

소(蘇)군정의 선택, 반드시 김일성(金日成)만은 아니었다.

1945년 9월 30일 오후 6시, 평양(平壤)시내 일본(日本)식 요정 「화방(花房)」에서는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의 운명적인 첫 대면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자리를 주선한 사람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蘇聯軍) 25군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메크레르 중좌였다.

북한정권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진주군(進駐軍)의 막후 실력자가 당시 북한 내 두 갈래의 큰 정치적 줄기였던 민족주의 세력의 거두와 소련군에 밀착된 빨치산의 한 지도자를 첫 대면시키는 자리였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한낱 술자리에 불과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45년 10월 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전후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날 메크레르 중좌의 주선아래 비공식적으로 따로 만난 것이다. 지금 모스크바에 생존해 있는 메크레르씨(83)는 이렇게 당시를 말하고 있다.

『그날은 김일센(소련인들은 김일성을 이렇게 발음)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있기 보름 전이었습니다. 나는 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1945년 9월 30일 오후 6시 평양시내 「화방」이라는 요정에서 두 지도자의 첫 대면을 주선하게 됐지요.』

소련군 정치장교,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植)선생, 빨치산 김일성의 3자 만남은 당시 상황의 한 축도였다.

소련에 있어 북조선은 「작은 변수」 대부분의 역사는 김일성이 이미 소련군으로부터 북조선을 이끌 지도자로 내정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권력장악 과정은 바로 그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메크레르씨는 이를 단호히 부인한다.

『당시 소련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만주(滿州)였어요. 조선은 하나의 조그만 변수에 지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김일센을 데려다 교육시켜 북한을 담당하게 했다는 건 소련을 잘못 보는 겁니다.』

그는 『극동방면군 정치위원 스티코프 장군에게서도 아직 언질을 받은 바가 없었으며 스탈린의 지령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고 단언하면서 『김일성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의 한사람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것은 조만식선생도 마찬가지였고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그리고 훗날의 박헌영(朴憲永)도 마찬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소련은 어느 누구도 지도자로 지목하지 않은 상태였지요. 소련 25군 정치사령부는 이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날의 자리는 더더구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소련군은 일본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가 그해 8월 9일 조선 북단에 첫발을 들여놓았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붉은 군대가 평양에 입성한 8월 24일 이전에 조만식은 이미 건국준비위를 구성해놓고 있었다.

평양에서는 8월 17일 고당을 비롯, 22명의 지도자가 평양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성북을 제외한 이북 각 지역에서도 자치위원회·인민위원회 등 제각기 자연발생적인 정권기관이 속출했다.

8월 24일 평양에 들어온 소련 극동군 25군사령부는 북한의 지도자를 지목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의 핵심이 서울에 있는 데다 이북지역의 토착 공산세력들을 일천해 수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자 일색인 지역인민위원회 등을 민족·공산 양세력으로 절반씩 배치, 지역행정권을 장악하는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북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첫 진주군과 함께 평양에 들어왔던 메크레르 중좌는 『평양은 조만식판이었다』고 회상했다. 평양의 경우 8월 27일, 평남건준(平南建準)이 외견상 민족진영 16명, 공산진영 16명의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탈바꿈되고 위원장은 그대로 조만식이 유임됐다.

소련군과 함께 재소(在蘇)고려인2∼3세의 공산주의자들도 속속 북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있던 88특별여단의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뒷날 북한정권 창립의 주체가 되는 항일 빨찌산들도 속속 입국했다.

이같은 정세 속에서 소련군정은 민족주의자 고당(古堂)과 자신들이 후원하는 공산주의자 김일성 등의 협력관계를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메크레르씨는 「화방」의 술자리를 이렇게 추억했다.

『「화방」은 일본조선총독부의 고위관리·지주들이 주로 들락거리던 평양의 대표적인 기생집이었지요. 나는 통역을 맡은 강미하일 중위와 같이 갔어요. 김일센은 2∼3명의 부하들을 대동하고 왔지만 그들은 술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으며 조만식 쪽은 혼자였습니다. 나는 물론 소련군 장교복에 권총을 차고 다녔죠.

처음 보는 조만식은 하얀 수염이 드문드문 난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엷은 잿빛의 한복 두루마기 왼쪽 팔목에 내용을 알 수 없는 한문으로 쓴 완장,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더군요.』 김일성은 당시 귀밑까지 바짝 올려깎은 소위 닷분깎기머리와 약간 그을린 얼굴로 촌티가 흘렀다고 한다.

『김일센은 밝고 쾌활한 청년이었죠. 나와 姜중위가 먼저 가서 기다렸고 10여분 후 조만식이, 그리고 김일센은 맨나중에 도착했어요. 나와 강중위가 요정 대문을 들어서니 기생들이 마루에서 버선바람으로 마당까지 허겁지겁 내려와 우리를 곧바로 안방으로 안내하더군요.』

메크레르와 강중위·김일성은 이전에도 몇 차례 이곳에서 술을 마신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생들은 메크레르와 김일성을 「장군」으로, 강중위를 「부장」이라고 불렀다.

메크레르씨의 증언.

『나와 조만식이 방 아랫목에 앉아 있는데 김일센이 들어옵디다. 「金日成장군님, 늦으셨군요. 인사하십시오. 조만식선생님입니다.」 방문턱을 들어서는 김일센을 강중위가 벌떡 일어서면서 조만식에게 인사를 시켰습니다. 김일센은 한국식으로 큰절을 하면서 「선생님, 김일성입니다」하고는 뭐라고 또 인사말을 하더군요, 曺晩植은 앉은 자세에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어요.』

빨찌산 대장과 민족주의자의 만남

이렇게 하여 조선이 해방된 지 꼭 한달반만에, 김일성이 소련(蘇聯)에서 入北한지 열하룻만에 63세의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33세의 빨찌산 대장 김일성이 처음 만나게 됐다. 이후부터 두 지도자는 동상이몽 속에서도 얼마 동안 蘇軍政하의 북한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 다시 메크레르씨의 증언이 계속된다.

『이날 밤 우리는 3시간여 동안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평양에 가기 전 하바로프스크 극동방면군 시절 한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전문정치용어 등을 알아 들을 수 없어 강미하일중위가 통역을 했습니다. 조만식선생은 이전에도 사령부와 인민정치위원회 등에서 나와 몇 차례 만났지만

김일센과 조만식은 처음 만난 자리여서인지 이날 밤은 두 사람간에 깊은 얘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주로 내가 조(曺晩植)선생에게 소련군정에의 협조를 부탁했고 조만식은 「민족통일 국가 건설」에 협력해달라고 한결같이 요구하는 정도였지요.』

메크레르씨는 이날 밤 술자리에 대해 분위기까지 상세히 기억했다.
『나는 여러 차례 조만식과 김일센에게 술잔을 권했습니다.
그때마다 김일센은 술잔을 덜렁덜렁 받아 마시더군요. 그러나 조만식은
「기독교장로이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면서 거절합디다. 이를 보다 못한 기생들이 「선생님, 장군님의 소원인데 오늘 밤만 한잔하시지요」라고 하기도 했지만 조만식은 삶은 닭고기 등 안주 몇점만 먹을 뿐 끝내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날밤 이 요정의 술은 우리 지도부와 친밀했던 사람(고당(古堂)의 비서였던
朴在昌씨는 최아립으로 기억)의 양조장에서 제조한 「승리」라는 이름의 도수 높은 곡주였거나 소련에서 공수해온 보트카였을 것이라고 기억됩니다. 내가 조만식에게 술을 권하는 동안 김일센은 왕성한 식욕을 과시했고 가끔 소련제 담배를 꺼내물고 옆 기생들과 농담하며 주석을 화기애애하게 이끌어 가기도 했지요.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김일센의 농담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조만식선생 등 한국 사람들은 그때마다 파안대소하더군요. 나는 남보다 술이 센 편이었지만 혼자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맞추다보니 술자리가 끝날 무렵 약간 취했습니다.』

김일성 환영대회 위원장 맡은 고당

그러나 메크레르씨는 이날 밤의 술자리가 이날 이후부터 전개되는 「역사적인 일들」을 진행해나가는 데 있어 매우 뜻있고 성공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밤 술자리는 그후 열린 조선공산당 이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45 10월 10∼13일)개최를 앞두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보름 후로 다가온 김일센장군 개선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를 앞둔 시점이었기에 매우 뜻있는 자리였지요. 김일센은 이 대회에서 비로소 처음 군중에 얼굴을 내밀게 되는데 우리는 이 군중대회를 曺선생이 책임을 맡도록 계획했지요.』

그러나 그 술자리에서는 조만식은 아직 김(金日成)에 대해 그리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게 사실인 듯하다.

이날 술자리를 확인해주는 익명의 前 북한요인(현재 70세인 그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아직 신분을 밝힐 수 없는 해외망명객으로 초창기부터 노동당에 참여했던 인사다)은 이렇게 기억한다.

『고당이 김일성을 처음 만난 것은 9월말이었지요. 로마넨코 군정부(軍政府)에서 소련군인들과 만나고 메크레르가 두 사람 관계를 돈독히 할 요량으로 술자리를 주선했다지요. 그런데 고당은 처음 보는 김일성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어리고 나이 차이가 많아 별로 대답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 했답니다.
김일성은 이날 상당히 겸손한 태도로 예절을 지켰다고 들었어요.』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건국문제가 나오자 완전자주독립과 각계각층의 단결·협력을 강조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조만식도 공감을 표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후 조만식은 몇 차례 더 김일성과 만났고 결국 김일성환영대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고당이 위원장직을 맡은 그 심증은 헤아릴 길이 없으나 소련군과 김일성은 이 완강한 민족주의자로부터 그들의 목적을 일단은 달성한 것이다.

 

 

(계속)

 


출처 : 밝은 미래 건설
글쓴이 : 무영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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