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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한수선]

by 8866 2005. 11. 23.

훈족이야기2

2.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

스키타이인의 가족구성은 1부 다처제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이 모계사회였다고 보고 있으나 고고학자들이 남부소련 지방에서 발굴한 그들의 묘는 그리스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몇 명의 처를 거느리며 사후에는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처를 소유 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 여자들은 별다른 권한 없이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사는 존재에 불과했다. 스키타이인의 이웃인 사마시안(Smartian) 여자들이 말을 타며,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활동적인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스키타이인 여자들은 마차를 이용해서 자식들과 함께 이동을 하는 정도의 능동적인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물고기와 야생의 짐승이 풍부한 이들에게 양식은 항상 풍부했다. 이들의 기본식품으로는 현재도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중요한 식품인 발효한 말우유, 치즈, 파 마늘 콩 등이 이들의 주식이었다.

헤르도토스 본 스키타이인들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수염을 기른 얼굴에 깊숙하게 패인 눈에 검은 눈동자와 바림결치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출처-김성모님

필자주1. 위사진 설명에서 말탄 사람이 아랍인이라고 했으나 그는 헤르도토스 설명한 스키타이인이다. 앉아있는 사람은 여성이 아닌 남장한 무당(한국의 남자박수 무당)을 만나고 있는 장면이다.
말에 달려있는 곡옥은 신라의 곡옥과 같은 형태로 다산을 뜻하며 그리스에서 스키타이인들이 몽골초원에서 유목민에게 전해진 스키타이 문화가 신라경주 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스키타이인이라는 확증은 그가 입고 있는 하의가 바지여서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한 스키타인이라고 고증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스키타이인들이 세계 최초로 말을 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필자주2. 왼쪽은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무용수들이 입은 바지는 스키타이 문화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바른쪽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에 등장한 인물에서 보이는 수염 기른 인물은 이랍인이라고 설명되고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스키타이민족이 고구려까지 진출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47년 2천 년 전의 스키타이인 묘지에서 발굴된 그들의 시신에서 굽이 달린 부드러운 장화와 함께 이들이 문신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들의 신앙은 무속신앙으로 미신을 믿으며 귀신을 쫓는 부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길흉을 점치는 무당은 특별한 집안에서 배출되며 최고의 무속인은 에나리스(enarees) 라고 불린 남자 무당이다. 남자와 여자의 중간 즉 반남반녀로 불린 이 남자 무당은 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항상 여자 옷을 입고 생활했다.

스키타이인들은 왕이 사망했을 때 시위적인 애도의 슬픈 행위는 장기긴 계속되었다. 모든 부족이 모여 40일 동안 장례의식은 거대하게 치러지며,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직계 가족들은 머리를 몽땅 자르거나, 귀와 앞이마나 코와 팔에 칼로 그어 상처를 내어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장례식 때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무기와 모든 집기를 함께 묻은 후 장례를 주관하는 집단은 왕의 처 중에서 한사람과, 술시중인, 하인과 전령을 목 졸라 죽이고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말을 죽여 왕의 주위에 함께 묻었다.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60 피트 높이로 봉분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왕의 장례식이 끝난 것이 아니다. 왕이 죽은 지 일 년 후에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최고 50여명의 젊은 사람들을 목졸라 죽여 왕의 무덤 주위에 묻어 사후왕의 시중을 들게 했다. 헤르도토스가 기록에 남기지 않은 부분은 스키타이 전사들이 남긴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예술품들이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스키타이 인들은 동물을 주제로 자연적인 모티프의 장신구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은 첫째 사슴을 시작으로 말, 야생염소, 산돼지, 곰, 늑대, 고양이과 짐승, 독수리 물고기 등이었다.

스키타이인의 문화는 기원전 1,000 년 전에 이미 중국의 북쪽 유목민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지난 2백년간, 알타이 파직과 중앙아시아 남부시베리아에서 스키타이 고분의 발굴로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스키타이민족의 예술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에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많은 금으로 제작된 장신구이다. 스키타이인들이 번성기에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해서 황금광이 많았든 그 지역에서 황금을 채굴해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알타이 지방에서 금의 산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으로 만든 혁대와 장식품 및 수많은 금장신구, 금관 같은 장식품은 스키타이 문화가 한반도 남단까지 영향을 미처 스키타이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은 신라의 문화가 이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1세기경에 제작된 아프가니스탄
황금의 계곡에서 발굴된 금관




신라금관

신라금관과 아프가니스탄 금관은 스키타이문화의
산물이다. 지구상에서 면류관이 아닌 금관을 제작한
국가는 한국과 아프가니스탄 두 나라 외에 없다.

 

 
출처 : 블로그 > 북청물장수의 인간탐구 | 글쓴이 : 북청물장수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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