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맨발로 글목을 돌다
공지영
1
나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있었다. 종일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아이를 재우고, 챙겨둔 트렁크를 정검했다. 비행기표와 여권 그리고 봉투에 든 엔화. 나는 H를 취재하러 가야 했다. 오래전부터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신 기자가 내게 새로 펴내는 H의 책과 근황의 취재를 부탁했다. 신 기자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이 나오면 한국에서 어떤 형식이든 H가 낸 책의 홍보를 도와주어야 할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흔쾌히 그러마 했던 터였다. H는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정말 몇 안 되는 번역자였고 내 책 두 권을 이미 일본에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었다. 공항에 나가려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소주를 한 병 집어왔다. 창작으로 인해 온 신경이 고슴도치처럼 일어서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덮쳐올 때 과거의 아픔이 새삼 시큰거리며 몰려올 때 나는 언제나 투명하고 다정한 그 액체의 따뜻함을 빌려 교감신경을 가라앉히고 잠을 이루곤 했었다. 그런데 탁자 앞에 따라놓은 그 소주를 한 잔 마셔버리기도 전에, 내 가슴으로 이상한 통증이 지나갔다. 무엇인가 나를 치고 지나갔던 것이었다. 더듬거리며 만져보니 완강한 갈비뼈의 감촉이 여전했는데 무언가가 내 속에서 왈칵 빠져나갔고 그리하여 그 갈비뼈의 안쪽 공간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배구공만 한 크기의 검고 서늘한 그 공간 속으로 내 삶이, 대부분은 고통이라고 기억되고, 그리하여 살기 위해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머리를 부볐던 시간들이 찬바람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집 안은 따스했지만 등줄기가 섬뜩해져서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했는데, 밤은 이미 깊어 전화를 걸 대상조차 없었다.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는 것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가슴을 좀 웅크리고 편한 자세를 취해보았는데, 그때 문장들이, 장대비처럼 내게 내렸다.
2
2007년 사월 어느 날 하네다 공항에서 나는 H를 만났다. 사월의 도쿄는 아주 더웠다. 그는 연한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키는 훌쩍 컸지만 비대한 몸집은 아니었는데 더위를 많이 타나 싶었다. 나는 내 소설의 일본판 출간 기념으로 일본을 방문한 길이었고 그는 내 소설의 번역자이자 이 만남의 통역자 자격으로 그곳에 나와 있었다. 택시 안에서 그는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낯설지가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먼 육촌을 만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는 일본인보다는 북한인에 가까운 얼굴,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그런 느낌을 주는 얼굴과 용모를 하고 있었다. 택시가 출판사로 가는 동안 출판 관계자가 나에게 물었다. H씨가 어떤 분인지 알고 계신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국에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를 ‘고독한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신 일도 있고 <말아톤>을 비롯해서 많은 책을 번역하셨다는 걸요. 그리고 한때 북한에서 사셨다는 일도.”
나는 그다음 말을 잇지는 않았다.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는 한때 북한에 납치당했었다. 그때 한국말을 익혔고 지금은 귀국해 그것으로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처음 한국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북한에 납치를? 참 안 됐네. 그리고 그걸로 번역 일을 하며 생계를 잇다니. 역시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나 말고도 세상에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 는 투의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사고였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일본 사람답지 않게 천연한 그의 미소를 대면하고 그의 북한 억양이 섞인 말투를 듣고 있는 동안 나의 생각은 점점 더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안다고 대답한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나를 스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네이버의 지식 검색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입력하고, 그리고 그에 대한 이력과 기사와 이런 것들을 읽는 일이 다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나를 스쳐갔던 것이다.
"이 년 전 저도 북한에 갔었어요. 평양 시내에 머물며 묘향산과 백두산에도 갔지요. 남북 작가회담에 참석하는 길이었는데‥‥‥ 그래서 얼마간은 H씨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분위기를 알 수 있으니까요."
H의 눈이 강렬하게 반짝였다. 의외였다.
"그래요?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그의 질문은 간결했다. 그런데 그 간결함 속에는 어떤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를 무심히 두고 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김승옥 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삶이 '내 삶 속으로 끼어드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슬펐구요."
그러고 나서 나는 그의 삶과 내 삶이 이 지점에서 서로에게 끼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따스해졌다. 아마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도 그랬을 것이다.
3
인터뷰의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 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왜 이렇게 많은 일본 기자들에게 줄을 서게 했는지 아직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소설이 너무 훌륭해서일 거야, 라는 식의 어이없는 발상은 물론 하지 않았지만 책을 낸 출판사가 일본 최대의 문학 전문 출판사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식의 약간은 피곤하고 또 편리한 생각은 했다. 두 시간 간격으로 이어진 세 번째 인터뷰는 M신문과의 인터뷰였다. 문학 담당 기자가 아니라 부장이 직접 왔다고 했다. 그는 오십대 초로로 보였는데, 이제껏 그렇게 기사를 써대고도 아직도 에너지가 넘쳐서 이제는 남의 일뿐 아니라 온 세상의 일을 다 간섭하지 않고는 스스로 배겨날 수 없다는 듯 볼이 붉고 눈이 부리부리한 중년이었다. 남자는 작가인 나와 내 작품을 영화화한 송 감독을 함께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그의 질문은 오직 H에게만 퍼부어지고 있었다. 통역을 해야 하는 H는 연신 땀을 닦으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기 자에게 답하고 있었고 연신 나와 송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실내는 이상하게 점점 더 뜨거워졌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고, 배석한 출판사 관계자들의 얼굴 위로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해졌다. 언제나처럼 왔을 티셔츠에 청바지만 걸친 자유스러운 송 감독은 줄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어쨌든 영화의 홍보를 위해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다. 나는 자유스럽고 신선한 그러나 일견 꼴통적 기질을 가진 송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릴까봐 겁이 났다. 어쨌든 이곳은 일본, 우리 둘은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러 여기 왔다는 식의 특사적 망상도 내게 있었을 것이다.
"저기‥‥‥ 송 감독, 이해를 좀 해야 할 거 같아. H씨가 북한에 납치되었던 사람이래. M신문이 워낙 보수 꼴통 신문이고 저 기자가 북한혐오주의자쯤 되는 모양인데‥‥‥그래서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고 H씨에게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야."
내가 낮은 목소리로 송 감독에게 속삭였다. 송 감독은 별로 이 자리를 뛰쳐나갈 생각은 없었고 그저 H와 신문사 부장 두 사람이 일본말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지루해서 싫었던 모양인지, 별 표정의 동요 없어 그래? 하고 반문했다.
"일본인을 납치했단 말이지‥‥‥ 어디서?"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거야‥‥‥ 일본에서겠지."
송 감독이 웃었다. 그리고 잠시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짧게 한마디 했다.
"북한 애들‥‥‥ 쎄다!"
오십대 초반 M신문사 간부의 질문은 열을 띠고 있고 H는 점점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고 출판사 관계자들의 낯빛은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우리 둘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역시 영상을 다루는 사람들은 활자를 다루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가 없다, 비이성적이다, 선진국 일본,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나라 시민을 납치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라고 내가 소설에 표현해야 할 말을 그는 한 단어로 표현해버린 것이다. 쎄다!
"그런데 지네들은 몇 백만을 끌고 갔었잖아."
송 감독이 다시 낮은 소리로 내게 물었다. 물론 내 머릿속으로 종군 위안부—아아, 나는 이 단어도 싫다. 위안은 무슨 위안을, 대체 누가 누구에게 준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어쨌든 개념이 자리 잡기까지 그저 '책상은 책상'인 것을—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잠깐 그들과 관계했던 것, 그들의 증언, 그들의 눈물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위안부뿐이었는가, 소위 의용군과 징용자들 등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분노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러지 마. 아까 일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깐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북측이 도무지 임진왜란까지 쳐서 너희는 몇 백만이지만 우리는 겨우 몇 십 명이다."
송 감독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북측이 이제 우리 말문까지 막히게 하는구만."
"그러면 이번에는 작가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정해진 인터뷰 시간을 거의 오 분 남겨놓고 M신문사 부장이 물었다. 나는 흰지 검은지 속을 그대로 드러내버리는 내 단점을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속을 그대로 드러내자면 나는 첫눈에 그가 싫었다. 왜? 모르겠지만 그건 나의 직감이었고 몇 년 전부터 나는 나의 직감을 절대 무시하지 말자고 굳게 마음먹은 터였다.
"H씨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통역자로서의 앵무새 같은 한계를 절감한다는 듯 H의 눈은 내게 미안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부장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약간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분명, "너 한국인이지? 너희 조선인들과 형제지? 그러니 너도 결국‥‥‥ 그러니 스스로 자복을 하지?" 뭐 이런 투의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절대! 열을 내지 말자, 저런 부류의 인간에게 송 감독의 말대로 "그래요? 그럼 당신들은 우리 위안부들, 징용자들, 살육들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고 삿대질을 하며 물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역사는 우리들의 말장난으로 바로잡아지는 게 아니다. 나는 나를 달래고 있었다. 나는 준비했던 대답을 했다.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M사의 부장의 눈이 야릇하게 반짝였다.
"……더 할 말이 없습니까?"
"계속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같은 말을 반복하자, M신문사 부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번에는 송 감독을 향해 물었다.
"이런 어이없고 분한 일을 영화화할 생각은 없습니까?"
잠깐 실내에 어색한 침묵이 떠돌았다. 모두 다 송 감독을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송 감독은 잠시 망설이더니 태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너무 어이가 없는 일은 영화화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사화 할 일이지요."
숨죽이던 배석자들 사이에서 킥킥 웃음이 터졌다. 이 어이없는 분위기에 대한 우려가 안도로 바뀌는 웃음이었다. M신문사 부장 혼자 웃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호쾌한 송 감독의 대답 앞에서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소우데스까?" 하고 떫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정도의 일본어는 아는 송 감독이 한국말로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송 감독, 쎄다!
4
그날 밤 우리는 일본의 한 출판사가 주최하는 만찬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갈한 이탈리아 식당은 도쿄 한복판에 새로 조성되었다는 공원 안에 있었다. 신록들이 내뿜는 초록빛 열기로 공기는 물렁거리고 있어서 미지근한 물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피곤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강행군 끝인데 H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고 택시를 타고 내릴 때,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닫을 때 언제나 나를 배려하기 위해 멈추어 섰고 오래 기다렸다. 고맙습니다. 내가 말하면 그는 말없이 웃었는데 그때마다 눈가에 오래도록 웃어서 패었을 주름들이 선명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이십사 년 동안 완전한 단절 속에서 살아왔던 저 사람, 언제 저렇게 주름이 패도록 웃었을까.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았다. 나는 공항에 도착해 그의 인생이 내 인생에 끼어드는 것을 느꼈던 그 순간부터 내내 어떤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십사 년간 그는 북한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왜? 어떻게? 가장 가까이 서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물을 수가 없었다.
참 이상하다. 어떤 이는 일 년을 보아도 낯설고, 어떤 이는 보는 순간,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마음에 와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H를 만난 지 겨우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그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터뷰 중간 중간 기자 둘이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언제부터 아는 사이세요?"
우리는 오늘 아침 하네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고, 그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마 당사자인 H와 나 둘 다 혹시 이건 농담이 아닐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그와 나는 말없이도 서로 통하고 있었다. 그건 연배가 비슷한 남자와 여자의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아니었다. 변명하듯 굳이 이야기하자면 오누이와 같은 감정이었다고나 할까? 이제와 돌이켜보면 운명의 손톱에 생을 할퀴어 본 상흔을 나누어 가진 오누이라고나 할까. 몽고반점처럼 시퍼런 멍을 가진 동족이라고나 할까.
5
스물두 살, 당시 법대 3학년생. 니가타에서 한 시간 반 더 가야 하는 도시 가시와자키 해변에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던 도중 H는 북으로 끌려간다.
"칠월 삼십일 일 오후 여섯 시 반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 칠월 삼십일 일이면 아직 훤한 여름이어서 해변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에 돌아온 지 오 년, 그러나 그는 집요한 일본 언론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6
우리는 단둘뿐이었다. 우리 둘의 진술은 다를 뿐 아니라 아무런 합치점도 없다. 모순된 것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다. 나는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고 하고, 그 남자는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던 참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남자가 식탁에 있는 컵을 내게로 집어던지며 나를 공격했다고 하고, 그 남자는 그날 밤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다고 한다. 둘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과민성 신경증을 앓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는 나다. 나는 신경과민증 환자냐 거짓말쟁이냐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나는 거짓말쟁이의 패를 뽑아들고 싶었으나 심혈을 기울여 뽑으면 패는 대개, 어쩌면 자주, 종내에는 모두 다, 신경과민증 환자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보다는 신경과민증 환자의 말을 더 믿지 않는다. 거짓말은 가끔씩, 그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경과민증 환자는 대개 그들의 것이 되기는 힘든, 희귀한 질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남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상식적인 진술을 하고 있었고 나는 비상식적인 진술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당사자이고 증언자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진술이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이야, 정말이라구!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나는 차츰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친한 친구들까지도 그랬다. 설마, 하고 그들은 말한다. 그때 그 남자가 나섰다. 그 남자는 가장 뻔한 부정에서부터 가장 정교하고 고상한 종류의 합리화까지 일련의 인상적인 논쟁을 늘어놓는다. 저 여자가 거짓말을 한다, 저 여자가 과장을 한다, 저 여자가 초래한 일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든 이제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 일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일찍 소름이 끼치는 표정으로 웃으며 진실이라는 것이 때로는 참으로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실은 정교한 거짓말들 앞에서 단지 이런 말들을 되뇌게 할 뿐이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구요. 참 아니라니까요 진짜!!"
나는 더 일찍 도망칠 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억압은 분명 존재했지만 창살도 없고 담도 없다. 대개의 경우 묶여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벽은 매우 강력했다.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법적 종속…… 그리고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내 미래에 대한 종속이었다. 그 종속은 너무도 부드러웠고, 너무도 천천히 시작되었으며, 사랑이라는 명찰을 달고 서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도무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 남자가 연출하는 그 역할을 맡았다. 한 막이 끝나면 내 역할은 바뀔 수 있을 거라는 부질없는 희망‥‥‥ 희망이라는 가면을 쓴 집착 때문이었다.
7
그날 밤, 우리는 유리벽 너머로 아름다운 공원의 밤 풍경이 내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산뜻한 전채요리와 파스타로 저녁을 먹었다. S출판사의 간부 몇이 따뜻하게 나를 영접했다. 그들은 내 친구나 동료들처럼 알타이계통의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선진국 일본의 국민들답게 정중했다. 술이든 물이든 마시는 일을 좋아하는 나는 이미 그들이 주는 대로 여러 병의 비싼 와인을 홀짝거리며 다 비워내고 있었다. 남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하는 것을 지상명령처럼 여기고 있는 그들은 숨기는 일에 서투른 나의 직설적인 어법을 재미있어 했다. 그들은 유쾌하게 웃으며 나를 아주 훌륭하고 유명한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사치레로 밝혔다. 그들은 내가 이미 한국에서 이룬 판매 부수에 감동하고 있었다. 인구 일억의 일본 시장에서도 한 소설가가 내기 힘든 성과였으니, 그럴 수 있었다. 일본이었기에, 나는 그냥 그들의 대접을 가만히 받아들이기로 한 터였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다른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나는 호방한 여자처럼 일본 술인 사케와 말 사시미를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택시를 불러 나를 도쿄의 가장 유명한 말 사시미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일본 사케를 주고받으며 1950년대 중후반과 196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우리 한국과 일본인 남녀 네 명은 일본과 한국 그리고 문학에 대해 커다란 소리로 웃으며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그들 중의 하나가 내게 물었다.
“H씨가 납치되었던 일에 대해,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 말을 통역해주는 H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꿔놓는 일을 저는 가장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건배를 권했다. 이해해주어서 고맙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맑고 순한 사케를 입에 다 털어넣고 다시 한 잔을 받아 호기롭게 입에 대는 순간‥‥‥ 몇 년 전 내가 찾아갔던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시덤불 같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무렵 힘겹게 책장을 넘기던 기록들도 떠올라왔다.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술기운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고, 오로지 술기운 때문이었다고 해도 아무 상관은 없다. 갑자기 선명하게 빨간색을 띤 싱싱한 말 사시미를 씹을 수가 없었고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밤, 그 술집을 나와 호텔 쪽으로 걸어가다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나는 울먹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H가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나는 아주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미안해요 H.”
어이가 없다는 듯 H는 먼 곳을 보며 웃었다.
“그냥 미안해요.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H는 맨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힘없이 웃었다. 나는 아까 말 사시미를 마저 입에 넣을 수 없었을 때, 그때부터 당신에게 미안해졌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왜 당신이 내게 미안하죠? 참 이상해요. 한국 사람들 나 만나면 그런 이야기 많이 해요. 착한 사람들이 그러는 것 같아요. 난 대답하죠. 뭐가 미안합니까? 당신들이 날 납치 했던 것도 아닌데.”
다음 날도 인터뷰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기자들이 또 물었다.
"H를 알고 계십니까? 어떤 느낌이 드나요?"
나는 이제 당황하지도 않고 천천히 대답했다.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왜 착한 사람들에게만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H를 만나고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착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만이, 선의를 가진 그들만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긍지로 운명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지요."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8
편의상 미얀마 전선으로 끌려간 열네 살의 그녀를 순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순이에게도 이런 일들은 일어난다. 그들은 전선에 배치된 후, 칸막이로 겨우 가려진 땅 속에 널브러진다. 순이의 증언은 이랬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일해주던 주인집 아들이 나를 강간하려 해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하며 겨우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빠져나와 부산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몇 명의 일본 군인들이 나타났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고 입과 눈을 틀어막힌 채로 군용 트럭에 실렸다. 당시 나는 열네 살이었다.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졸병, 장교가 섞여 왔다. 하루에 상대한 군인의 수는 삼사십 명쯤 되었으나 공일날에는 군인들이 팬티만 입고 밖에 줄을 서 있을 정도로 많았다. 어떤 사람은 팬티까지 벗고 다른 사람이 하는 도중에 커튼을 열고 들어오기 도 했다. 조금만 시간을 끌면 문밖에서 안에다 대고 "하야쿠,하야꾸" (빨리 빨리)라고 외치기도 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은 죽을 둥 살 둥 힘을 다해 하고. 어떤 사람은 울면서 하기도 했다. 자궁이 붓고 피고름이 나와 일을 할 수 없던 어느 날, 한 장교가 와서 일을 못하겠거든 대신 자신의 성기를 빨라고 했다. 나는 "네 똥을 먹으면 먹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더니 마구 때리고 던지고 해서 나는 기절했다 깨어나니 사흘이 지났다고 했다.
9
창밖으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빗소리였다. 바람 소리도 거세어지고 있었다. 어제 해질 무렴에는 서쪽 하늘이 홀연 열리고 가을의 표징 같은 새털구름이 하늘을 황홀히 뒤덮고 있었는데,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은 일이 없어서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보자 어김없이 비가, 회색빛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어쨌든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비가 있으니 이제 이 비가 가을과 겨울의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나는 소주잔을 들고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어지러운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그걸 글로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끈질기게 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세상의 밭에서 언어를 캐다가 다듬고 토막 내고 끓이며 맛이 있는 음식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 소통하고자 하는 행위는 언어 자체의 한계에 궁극적으로 방해받는다. 사랑하는 남녀가 육체를 사용하여 하나가 되려 하지만, 마지막에 결국 그 육체 때문에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아 하는 수 없이 핀으로 고정시키고 상자에 넣는 일, 죽어 핀으로 고정된 채 상자 속에 넣어진 나비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는 것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숨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는 수 없이 생명을 빼앗아 핀으로 꽃은 나비를 다시 살려낼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어떤 나비를 잡아넣었다 한들 죽음과도 같은 딱딱한 사체만 만지게 될 테니까. 그럴 때 가끔 나는 영상이 부럽다.
‥‥‥아니다. 영상 또한 글과 같다.
모든 운명은 새벽처럼 유리를 덮치기도 하고 안개처럼 서서히 스며들기도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한 장면은 그래서 내게 오래 각인되어 있다.
처음 만나 몸을 섞고 사랑에 빠지게 된 여자에게 남자는 묻는다.
"인숙이는 좋은 사람인가?"
여자가 대답한다.
"선생님이 그렇게 봐주시면요."
작가 김승옥에게 이 구절은 어떤 나비였을까. 나는 이 구절을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데리고 살았다.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한쪽 날개를 찢긴 흰나비가 팔랑팔랑 삐뚜름한 비행을 하고 있었다.
10
H를 처음 만날 무렵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납치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마침 내 조카가 미국에서 이 년 만에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내게 들렀다. 조카는 한국에 살 때 탈레반에게 습격당한 젊은이들이 속한 그 교회에 다녔었다. 많이 울어서 눈이 벌게진 채로 그녀는 우리 집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장만한 음식을 권하면서 나도 젓가락을 자꾸 멈칫거렸다.
“만일 미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들과 함께 그 봉사를 떠났을 거 같아. 재작년에 그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봉사를 다녀왔었거든.”
조카는 이야기를 마치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랬다. 조카가 미국으로 간 것은 대단한 결단이 아니었다. 그들의 부모인 언니 부부가 그리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 몇 년 전 조카의 아버지인 형부는 9 ‧ 11테러가 있기 석 달 전쯤 급작스레 미국 지사에서 다시 한국으로 발령 받았었다. 언니와 형부는 회사의 부당한 처분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석 달 후, 형부의 사무실이 있던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으로 비행기가 처박혔다. 급작스럽고 부당한 발령을 받지 않았으면 형부가 앉아 있었을 바로 그 층이었다. 조카는 자신의
아버지와 그가 다니던 회사의 납득할 수 없는 결정 덕택에, 목숨을 건진 자기 아버지를 보면서 어쩌면 운명이 인간들을 농락하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조카의 신앙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이모‥‥‥ 몸이 잡힌다는 거, 내가 여기 무사히 살아 있다는 거‥‥‥ 안전하다는 거. 그게 뭘까? 그리고 정말 그게 다일까? 그게 다가 아닌 거 같아.”
너무 많은 충격을 받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너무 많은 것을 깨달은 자가 그렇듯, 조카의 말은 두서가 없었고, 그리고 낮았다. 우리는 저녁을 먹을 때에도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도 애써 그 이야기는 피했다. 굳이 뉴스를 시청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카는 자꾸 코를 풀며 눈물을 닦았고 우리의 이야기들은 자주 끊겼다. 지금은 탈레반의 인질이 되어 삶과 죽음의 기로, 고통과 긴장의 극한에 있을 젊은이들은 언젠가 내 조카와 함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름 수련회에서 함께 카레라이스를 퍼 나르고, 그리고 순한 술을 홀짝이며 몰래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을 것이었다. 아마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 어떤 곳에 갇힌 그들도 그걸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단한 추억이랄 것도 없다. 자잘한 일상사, 그가 겪고 했었던 하잘것없는 일과와 사건의 언저리 속에서 그의 기억은 자꾸만 맴돌 것이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열쇠로 문을 따던 일, 친구와 문자메시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일,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윗입술에 묻었던 하얀 거품을 혀로 핥으며 웃던 일. 일상이 박탈당할 때 일상의 기억들은 따스하게 흘러나와 넘친다. 빨간 눈으로 조카는 나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모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열심히 일기를 쓰던 초등학교 시절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를 존경한다고 고백한 일도 있었다. 조카의 눈은 '왜?'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이 순간은 그녀가 믿는 신보다 내가 더 부담스러웠다.
"넌 운명이란 것을 믿니? 어느 날 운전면허시험의 한 과정처럼 돌발 상황이라는 것이 생의 급브레이크를 밟게 하고, 우리가 믿었던 질서들을 뒤죽박죽을 만들며 이상을 무력화시키고 상식을 비웃으며 단 한 번뿐인 우리 생의 모든 것을 똥창에 거꾸로 처박아버릴 수 있는 난데없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류가 생긴 이래로 그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친 적이 없어. 여기 푸른 별 지구 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과 서에서.”
나는 그녀에게 프레모 레비, 빅토르 프랭클같이 어느 날 갑자기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이들과 어느 날 갑자기 부두에서 끌려가 성노예로 짓밟히는 순이, 혹은 가시와자키 해변에서 북한으로 끌려가 이십사 년 만에 일본에 돌아온 H 같은 사람의 이름을 굳이 거론하지는 않았다.
나는 얼치기 목사처럼 그냥 욥기의 이야기를 했다. 욥의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 신이 악마에게 그냥 그를 괴롭히도록 허용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그리하여 욥은 아내와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잃고 어둠의 구덩이 한가운데로 던져진다. 왜? 훌륭하신 분들은 욥기가 성경에 포함된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고통의 불가해성에 대한 인류의 통찰이라고.
카인과 아벨은 어떠할까? 아벨은 죄가 없고 의로웠으나 죽었다. 요컨대 너의 종교나 희생 제사로도 이런 살해를 촉발하는 원인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약자가 아니요 무고한 자였지만, 죽어 사라질 존재로 선고된 자였던 아벨의 족속이다. 우리 모두란, 권세, 무기, 통치권을 소유한 카인의 족속들을 포함한다. 카인과 아벨은 둘 다 헛됨의 내부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이다. 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어. 나는 두서없이 말했다. 그러나 나의 말들은 헛되고 헛되었다.
왜? 라는 질문에 왜냐하면, 이라는 대답은 듣지 못한 채로 조카는 할머니 댁으로 돌아갔다. 밤일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글을 쓰기 위해 진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시고 있는데 학원에 갔던 딸이 돌아왔다. 딸은 그 무렵 글을 힘겨워하고 있던 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내 허무한 시선을 알아차린 영리한 딸은 사과를 베어 물고 내게 다가오면서 무심히 말을 꺼냈다.
"왜 그러고 있어?"
"그냥 써야 하나? 정말 써야 하는지 생각하느라고."
"그래? 엄마 좀 오래전에 말하곤 했어‥‥‥ 언젠가 나도 글을 다시 쓸 거야. 꼭 써야 해."
순간 오래된 일기장의 고통스러운 기록을 발견한 것처럼 잠깐 숨이 멎는 듯했고 가슴 한구석으로 긴 시간들이 지나갔다. 칠 년이라는 시간이었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지냈던 그 시간들. 나는 벌써 그때의 시간들을 다 잊고 내가 언제나 글을 써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11
딸은 대학 2학년이었다. 그 무렵의 나도 대학 2학년이었다. 그 무렴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론적 세계사와 인식론과 경제학들, 내가 밑줄을 그어가며 청춘을 지불했던 그 활자들은 내게 많은 것들을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의 도면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도 인지했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1차 대전은 교과서에 씌어 있던 대로 세르비아 황태자의 암살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 시장 다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그 지식들은 내게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위력에 대해 알려주었으며, 교과서가 늘 바른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정권이 알려주고 싶은 말을 알려준다는 깃을 알려주었으며, 아직도 l차 세계대전이 세르비아 황태자의 암살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보이거나 정권에 적당히 기대고 싶어 하는 보수 꼴통일 거라는 지레짐작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 나는, 돈이 없어도, 권력이나 직함이 없어도 세르비아 황태자의 암살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믿는 부류들보다 내가 훨씬 더 세상을 많이 안다는 오만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간은 옳았고 얼마간 옳은 것이 가지는 얼마간의 미덕이 늘 그렇듯이, 한동안은 빈 지갑을 가슴에 품고도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데 쓸모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책들은 내가 깊은 밤, 슬픈 꿈에서 깨어나 아직도 귓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대체 내가 무슨 꿈을 꾸었지, 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아직도 남은 울음의 끝을 입 밖으로 쏟아내다가 스스로 내 입을 틀어막아야 할 때, 그때는 아무 소용이 없긴 했다.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경찰서와 병원과 예전에 남겨두었던 그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에‥‥‥ 아니요, 걱정이 되는 건 아니구요,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구요, 그냥 한번 혹시나 해서요." 하고 애매한 웃음을 흘리던 그런 시간에, 난장판이 된 집 안에서 아이가 다칠까 집 안 곳곳의 유리 파편을 치우며, 내 생애의 기록들 중에 이혼의 기록이 하나 더해진다면. 이제는 나 자신마저 나를 배반하게 될까, 생각하던 귀기 어린 시간 속에서는 소용이 없긴 했다. 그때 1차 대전이 세르비아 황태자를 암살해서 일어났든,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세력 다툼으로 일어났든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누군가 제1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나요? 묻는다면. "네, 그건 당연히 세르비아 황태자가 암살되었기 때문이에요!"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물론, 아무도 내게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비슷한 스무 살을 보낸 친구와 나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고만고만한 여대생들이었다. 친구와 나는 세르비아 황태자의 암살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우리의 지적 허영심을 은밀하게 채워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가지고 함께 논문을 썼었다. 거기까지 우리 삶의 행로는 지나치게 일치했다. 다만 결혼을 하고 친구는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나 혼자 소설을 쓰게 되었고 그녀는 그저 눈 밝은 독자로 남아, 마음이 따뜻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내 이웃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아이를 낳고도 언제나 틈틈이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다는 사실을 아내에 대한 최고의 자랑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내가 결혼 생활 중에 손톱으로 얼굴을 잔뜩 긁힌 채로 정형외과의인 그녀의 남편에게 진단서를 떼러 갔을 때, 나는 그만 그의 따스하고 연민 어린 눈길을 보아버렸다. 그것은 그저 내 친구가 "좋은 남편하고 행복하게 산다"라는 한 문장으로 치환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은 아니었다. 그때 내 친구는 남편에게 이렇게 선하고 따스한 눈길을 받으며 산다고 생각하자, 얼굴을 손톱으로 북북 긁힌 채로 그녀의 남편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비루하고 비참하게 느껴져서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냥 다른 병원으로 갈 걸 깊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그 애와 내가 영영 다른 왕국의 시민인 것을 알았고 우리가 한때 아무리 1차 대전이 세르비아의 황태자 암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해도 이제 다시는 그녀에게 나와의 동질성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를 이웃 왕국에게 영원히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죄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병원을 나서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게는 우산이 없었는데 하늘까지 언제나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만일 하느님이 너를 만들었다면, 어쩌면 네가 그냥 평범한 결혼 생활 속에 안주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말하자면 너의 소명…… 같은 게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
나는 무표정했고 착한 내 친구는 울먹였다. 친구는 아직도 내가 조금만 노력을 한다면 자신의 왕국의 입장권을 사서 그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얼굴에 피 비가 내리듯 죽죽 그어진 상처에 앉았던 딱지가 떨어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겨울 내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마스크를 벗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운명이 생을 덮치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안다. 그 포충망 속에 사로잡히고 나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을 중심으로 하여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슬픔의 계절이 있을 뿐이다."라고 어느 날 갑자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구경거리가 되어 런던 감옥에 갇혀야 했던 오스카와일드는 썼다.
12
나는 H와 세 번을 더 만났다. 두 번은 도쿄였고 한 번은 서울이었다. 그와 함께 도쿄 거리를 걸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거나 사인을 받으러 왔다. 문득 중얼거리듯 그가 말했다.
"영원히 평범해질 수 없는 그런 슬픔 아시죠?"
그가 내게 물었다. 내게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내가 그를 잠시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딱히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 운명의 수용소 출신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피로 새겨진 수인 번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투명하나 이미 그 낙인을 찍혀 본 사람들은 그것을 본다. 미묘한 냄새로 동족을 감지하는 것이다. 처음 만난 순간 그와 나는 그 냄새를 감지했던 것일까?
그리고 일 년 후 와세다 대학 한국문학의 밤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국제 문학대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아마도 스웨덴인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북한이라는 사회가 대체 문학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사회이며 당신은 같은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그것을 생각합니까. 여기 H라는 사람은 거기에 납치되어 이십사 년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풀려난 사람이라는데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마음이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 울컥했다. 나보다 먼저 H가 마이크를 들었다.
"그것은 여기 이분과는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그곳의 독재자가 민중 그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요. 그곳에 사는 작가들도 한때 당신들이 2차 대전이나 아우슈비츠에서 그랬듯 혹독한 운명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눈을 들어 새삼 H를 떠올릴 때마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날 저녁 H는 사람들과 떨어져나와 몇몇이서만 따로 술을 마시자고 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약간의 취기가 올랐을 때 H가 말했다.
"어떻게 살았느냐고 당신은 내게 여러 번 물었지요? 죽고 싶지 않았느냐고 당신은 내게 여러 번 물었지요? 아니요, 죽겠다, 하는 생각은 했지만 신기하게도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 말 알아요? 아우슈비츠에서 자살한 사람보다 지금 도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 그런데 어떻게 살았느냐?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죠. 아이들이 태어났고 저 아이들을 위해서 살자, 일본에 돌아갈 꿈을 포기하자‥‥‥아니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운명이 내 맘대로 내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돼야 한다는 집착을 버린 거죠‥‥‥ 그래서 살 수 있었어요."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너무나도 선량한 얼굴로, 그러나 서글픈 얼굴로 씨익 웃었다.
13
밤새 마음이 지쳐서 어둠에조차 위안을 받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맞이해야 하는 그런 아침이 있다. 그렇게 육체를 데리고 있기 힘들었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일어나 습관처럼 촛불을 켜놓고 십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편으로 이루어진 기도를 바치려고 책을 폈다. 그런데 그날의 시편의 첫 구절을 보는 순간 언어들이 화염처럼 내게 쏟아졌다.
지나온 상처마다 악취가 가득하오니, 내 어리석은 탓이오이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이제 곧 잠에서 깨어날 아이들이 들을까봐 한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활자들이 내 고름 고인 가슴을 갈고리처럼 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이라 하더라도 정확히 과녁을 맞히는 모든 것들은 어떤 쾌감을 동반한다. 그 구절에는 분명 그런 것이 있었다. 그런 고통은 우리를 불꽃처럼 정화한다. 우리는 불필요한 것들을 다 태워버리고 숯덩이처럼 맑아진다.
그러나 모호한 고통, 희뿌연 연기를 피워 올리는 듯 악의 어린 말투, 몸짓, 입으로는 미소 짓고 있으나 경멸 어린 눈빛들, 이중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미묘한 뉘앙스에 따라 욕도 칭찬도 될 수 있는 말들, 그런 것들은 우리를 서서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병들게 한다. 나는 안다. 인간은 언어로써가 아니라 영혼으로 소통한다. 나는 가끔 어떤 사람을 떠올려야 할 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영상에서 음을 소거시켜버린다. 그러면 뜻밖에도 그때, 나의 기억과는 아주 다른 영상들이 그 소리 없는 화면 속에서 드러난다.
힘이 있는 인간들은 힘이 없는 인간들을 죽게 할 방법을 천 가지쯤 가지고 있다. 가끔 정신과 물질을 모두 내게 의지하고 있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권력이 얼마나 악에 물들기 쉬운 것인가를 깨닫고 소스라친다. 내가 마음먹으면 나는 아이들을 때리거나 고문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정신병자로 만들거나 불구가 되게 하거나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할수록 그들이 나를 의지할수록, 나 이외의 것에 그들이 속수무책일수록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희망이 절망적인 유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희망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는 몰랐다. 풍랑을 만난 배가 물결을 헤치고 그저 앞으로 갈수밖에 없듯이 온몸으로, 온몸으로 물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치는 불행이라는 것이 생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늪 같은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하여 어떤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과거의 어리석음이 고름처럼 악취를 풍기는 인생의 어떤 해안에 서 있는 것이다. 운명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들 앞으로 너무도 다양한 방식의 불행을 동원해, 잔혹하고도 정확한 조준을 하며 각개 약진해 오는 것이다.
14
H와 만나던 그 무렵 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나눔의 집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일본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한 여러 가지 모색을 도모하고 국제사회에 이를 알리는 방향에 대한 세미나가 끝날 무렵 몇몇 할머니들의 소감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때 어떤 할머니가 말했다.
"안 돼!(아마도 무언가 온건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 걸로는 못 갚아I 일본인 젊은 기집애들 강제로 끌어다가 우리 젊은 애들한테 던져줘버려!"
정확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내용은 이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세미나가 마무리되던 실내로 일순, 경악스러운 침묵이 정전처럼 찾아왔다. 나 역시 앞이 약간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두 다리를 탁탁 비비며 어린아이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가 위안부로 끌려간 지, 혹은 그녀가 위안부에서 풀려난 지 반세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울 수 있는 저 회한‥‥‥ 저주, 혹은 원한. 비로소 상처의 깊이가 실감이 났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광경이 환영처럼 선명해졌다.
말 사시미를 먹으며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일본인들‥‥‥ 북한에 끌려갔다 돌아온 H의 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던 일본인들을 나는 떠올리고야 말았다. 진정으로 가슴이 아팠기에, 가슴 아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빨간 말 사시미를 겨우 삼키고 내가 물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일까. 해쓱해지던 그들의 얼굴. 그들이 말했다. 약간 웃으며 그랬다.
“그거야 아직 역사적으로 해명된 일도 아니고…….”
북한 역시 납치에 대해 공식 시인한 일이 없다.
사시미를 사주던 유쾌한 일본인들은 나를 애국자로 만들었고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15
친구와 나는 그 이후로는 그냥 책 이야기만 했다. 아이들 이야기도 했다. 가끔 그녀의 시댁 이야기와 나의 친가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프레모 레비 이야기를 했다. 가끔 그의 글이 아우슈비츠의 절망에 대한 이야기인 것조차 잊을 때가 있다고 나는 고백하곤 했다.
화강암에서 빛나던 반짝이는 그것이 운모였구나, 생각하고 초록 연필로 '운모' 밑에 밑줄을 그었다는 이야기. 그러고는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투명한 가을볕을 바라보면 온 세상이 화강암 위의 운모처럼 빛 아래서 반짝반짝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중 어떤 구절이 나를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이야기. 그건 바로 이런 구절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게 뭔지 알게 될 거야.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아‥‥‥ 자물쇠를 열 도구를 내가 직접 만들 거야. 억지로라도 문을 열거야." 이 희망찬 구절들이 나를 속수무책으로 멍하게 만들었다고. 그러면서 나는, 오래오래 지나 어쩌면 전생처럼 느껴지는 어떤 여름을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눈 시린 푸른 바다, 흰 갈기를 휘날리며 말 떼처럼 달려들던 파도들, 상앗빛 모래사장, 그 위에 앉아 한 움큼 내 손에 움켜쥐었다 놓았을 때 손바닥에 납작 붙어 떨어지지 않던 반짝이는 작은 가루들. 내가 그때 만일 스물두 살이었다면 그것을 사금이라고 부른들 무엇이 두려웠을까, 하고.
하지만 삶은 뼈저린 궤도로 원을 그리며 운행하고 있었다. 돌고 돌아도 그 자리에 서면 또 어깨가 시렸다. 하지만 외로웠기 때문에,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돌진하고 있었다. 어디로? 이제 와 생각하면 그 방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만일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되어 살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글쎄,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친구에게 재잘거렸다.
이런 구절을 읽었어. "다만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그리고 '낯선 것(제논)' '움직임이 없는 것(아르곤)'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 그 가운데는 공기의 일 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양이 존재하는 아르곤, 곧 '움직임이 없는 것'이 있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그 양은 이 지구상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유지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이산화탄소보다 스무 배 또는 서른 배나 많은 양이다.” 신기하지 않니? 원소들이 제 처지에 만족하고 있다는 표현이라니.
내온 크립톤 제논 그리고 아르곤 들 같은 친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주변에는 그렇게 네온 크립톤 제논 들이 있었고 한때 그렇지 않은 내 친구들도 모두 그런 원소로 변해 있었다. 나는 아르곤이 되고 싶었지만 이미 그럴 수 없었다. 하다못해 크립톤, 하다못해 제논, 하다못해 안정된 그 무엇이라도 되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 원소 군에의 입장을 제지당했다. 마지막 출구도 봉쇄되었다. 내 인생은 난파했고,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 온몸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나는 먼 훗날 있을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병원에 가서 떼어두었던 진단서들을 다 찾아 찢어버렸다. 나는 내 인생이 이런 진단서를 제출하고 그 남자가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증거하고 불타는 전투 욕으로 이 세상 모든 핍박받는 여성들을 위하여 법정에 선, 전사가 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는 내려갈 수 없이 비뚤어졌고, 모든 행복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극도로 민감했으며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만둬라 한스 한젠,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네게 무슨 상관이겠니?" 울부짖던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어. 넌 왜 이 책을 썼니? 프레모 레비가 아니라 너."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넌 왜 이 책을 썼니? 프레모 레비가 아니라 너‥‥‥ 그러니까 나.
16
삶이 어떤 순간, 우리는 바람결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초가을의 어느 날, 초봄의 어느 날‥‥‥혹은 서풍이 불어 비를 예고하는 무더운 여름날. 그날 그 순간 나는 내 마음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바람결을 느꼈다. 아직 그것이 서풍인지 동풍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서히 무언가가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있었다. 마음속에서 내가, 오래도록 재잘거리던 나에게 말문이 막혀 침묵하던 내가 더듬거리며 내게 물었다.
"너는 왜 이 책을 썼니?"
대답할 새도 없이 입술이 뒤틀리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당황스러운 사태에 처하면 언제나 그랬듯 내 마음은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 첫 번째 감정은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책이 출간된 지 벌써 이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거의 백 번에 가까운 인터뷰. 독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이 질문을 들었었다. 나는 대답했었다. 생명, 소통, 용서‥‥‥ 그리고 그 질문들에 당연히도 너무나 작가다운 대답들을 했었다. 그런데 벌거벗은 채로,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나는 울고 있는 것이다. 너는 왜 이 책을 썼니, 하는 그 물음 하나에 말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분명 내 속에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운명이 직접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두려움과 불안의 저 밑바닥에서 일종의 끌어당기는 힘. 인간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운명을 접해보고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이가 프레모 레비였던가 아니면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빅토르 프랭클이었던가 아니면 나였던가. 나는 욕조의 미지근한 물속에서 벌거벗고 웅크린 채로 운명의 부름에 답하겠다고, 내가 계획했던 모든 희망을 버리고 가보겠다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가 부르니까 내가 대답하겠다고, 봄이 오면 꽃이 피고 바람이 불면 잎이 지듯 그렇게 단순하고 단순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7
H는 대학 3학년생이었다. 그는 스물두 살, 여자친구와 해변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여자친구의 부탁을 받은 그가 잠시 음료수를 사러 간 사이, 여자친구는 바다에서 솟아오른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 둘에 의해 입을 틀어막힌 채 바다 속으로 끌려간다. 데이트를 하는 여자친구를 기쁘게 해주려고 음료수를 손에 든 채로 바닷가로 돌아온 H 역시 잠시 후 잠수함에 태워져 끌려간다. 그때 그는 신발이 벗어져 맨발이 되었다고 했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나라 어떤 바다, 신화속의 용이, 이렇듯 경쾌하고 신속하며 비밀스레 두 남녀를 해치울 수 있단 말일까.
돌아보니 새벽이 이미 절정처럼 창을 덮친 후였다. 보랏빛과 오렌지빛, 잿빛과 푸른빛 들이 하늘을 휘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잠들기를 포기하고 내일, 아니 몇 시간 후 떠나게 될 아침을 맞으려고 결심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문자메시지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새벽 다섯 시, 친구였다.
함부르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뤼베크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도시였어.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넌 결국 쓰게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토마스만의 말대로 "그야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나 내일은 아우슈비츠로 떠난다. 잘 지내!
19
몇 년 전 나는 폴란드 여행길에 그곳을 들렀었다.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나는 그곳에 들를 일이 실은 걱정이었다. 언젠가 음악을 하는 후배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허리를 휘청 꺾으며 그대로 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춘기 시절, 그 지겨운 조회시간에 기절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을 만큼 튼튼한 나는 내 신경이 혹시 그 후배처럼 섬세할까봐 겁이 났었나 보다. 크라카우를 출발한 버스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할 무렵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비였다. 멀리서 몇 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연한 회색 구름 아래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고즈넉하고 평화로워서 얼핏 아름다운 유럽의 일상적 풍경처럼 보였다. 그 입구에 쓰인 독일어 구호 “노동만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글귀는 건전하기까지 했다. 나는 기절하지 않았다. 그 수용소 진열장에 작은 언덕처럼 쌓인 잘려진 머리카락들, 신발들, 아이들의 부서진 인형들의 규모가 내 상상을 훨씬 더 넘는 것들이어서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었다. 단테가 <신곡>에서 묘파해낸 지옥의 입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이 입가를 뱅뱅 돌았다. 두 시간 남짓 우리는 그 죽음의 수용소를 돌았다.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시체를 태우는 소각장이었다. 반지하라고나 할까, 텅 빈 듯한 공간에 난로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죽음의 흔적도, 기미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공간이었다. 아니, 이미 나 자신이 그 죽음 속에 들어와 있기에 모든 것이 무감각했는지도 모른다. 군데군데 뚫린 작은 창문 밖으로 잘린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시체를 소각하는 난로 같은 기구 옆으로 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바친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를 인솔한 분이 비석에 새겨진 그 글귀를 해석해주었다. 성서의 한 구절이었다.
어두움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순간 다 합쳐서 오십 개도 되지 않는 이 철자들이 아우슈비츠를 떠받치고 있는 그런 이상한 느낌에 나는 사로잡혔다. 몇 십만 평방 킬로에 이르는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악과 비참과 말살과 공포를 한쪽 추에 달고 이 글자 조각들을 다른 쪽 추에 단다면 양쪽이 아주 팽팽해질 것 같은‥‥‥그때처럼 언어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느껴본 적은 그 후로도 다시 없었다.
20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悅樂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 이라는 <토니오 크뢰거>의 이 구절을 넌 이해할 수 있을까? 토마스 만이 평생 단 하나 이 구절만을 썼다 해도 나는 그를 좋아했을 거야‥‥‥ 라고, 라고 쓰다가 나는 문자메시지를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처음부터다시 썼다.
“그래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좋은 여행되기를!”
21
결국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눈이 빡빡하고 피곤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따뜻한 기운들이 올라오는 듯했고 그것은 약간의 나른함을 내포한 것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신 기자였다.
"일본 가셔서 H씨에게 물어야 할 거 대충 정리해서 메일로 보냈어요,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고 참고로만요. 아무래도 나보다는 선배가 H씨를 더 잘 알겠지?"
우리는 그리고 날이 차가워지니 옷을 따뜻하게 입으라는 등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내게 불쑥 말했다.
"실은 나 한 달 전 출장 다녀오는 길에 유산했어요."
나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 나이 서른둘. 고만고만하게 자라 고만고만한 다른 이들보다 많이 뛰어나서 고만고만한 언론사에 들어간 그녀.
"이토록 운명의 벽이 단단하다는 것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어. 투명 유리창에 머리를 꽝 부딪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때 선배 생각했어."
"내 생각을 왜?"
"글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 선배가 그런 말 했거든. 그 말 생각한 거야. 그래서 병가 내고 책 많이 읽었어. 읽었던 책도 또 봤는데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하나 더 열리는 그런 느낌. 그 문을 여는 열쇠는 고통이었어. 운명처럼 보였던."
"그래? 내가 그렇게 거창한 말을 한 거 보니 꽤 젊었던 시절이었나 보지?"
신 기자가 웃었다.
"어제 H씨에게 질문할 거 뽑으려고 하다가 선배랑 내가 인터뷰한 글을 다시 보았지, 선배가 그랬더라구. 죽고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운명에 대한 대결 같은 거. 그것은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한번 껴안아보려는 그런 대결이었는데, 말하자면 풍랑을 당한 배가 그 풍랑을 이기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풍랑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대결‥‥‥ 내게 이것을 가르쳐준 것은 글이었는데 글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넘치다가 엎질러져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엎질러져 나온 글들은 상처처럼 빨간 속살에서 터져 나온 석류 알처럼 우리를 기르고 구원하니까요, 했더라구."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신 기자는 음, 하고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겨우 삼 년 전이야. 그때도 선배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댔어. 적어도 내게는 그랬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래 적어도 내게는‥‥‥그래‥‥‥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이랬다구."
나는 여행가방 안에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끼어 넣었다. 아마도 밤을 지새운 탓에 비행기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지겠지만 그러므로 나는 그 책을 굳이 다시 읽기 위해 지니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속의 구절들, 이를테면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닷물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에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그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자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들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나 혼자만의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라는 그의 약속을 지니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 기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 가는 것은 운명이다."
나는 어서 H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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