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건축사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건축사
서양건축사는 건축의 본질·실체·의미·기술·구조·형태·공간·미·재료·장식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준다. 서양건축은 기원전의 주거지와 건축 유구(遺構)들을 남기고 있는데, 선사시대의 거석 건축 또한 공간을 한정하는 점에서 건축이라고 할 수 있는 실존적 개념을 지닌다.
서양건축은 다양한 건축사론, 양식론, 시대구분론, 시·공간론, 지역성, 총체성, 국제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선사시대 이후의 서양 고대 세계는 여러 건축 문화의 변천·계승·융합의 계통을 거쳐 BC 2000~1500년경을 전후하여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문명의 시작과 함께 건축경험이 형성되었다.
에게 건축
동지중해의 에게 해 주변 및 그리스 본토 일대에 형성된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은 서양 건축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 지역은 중동 일대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는데, 당시 세계 건축문명의 중심을 이루었던 서아시아와 이집트의 건축문명이 BC 3000년경부터 서방으로 팽창하면서 이 일대에 뿌리내렸다.
에게 문명은 기존의 신석기문명이 청동기문명으로 바뀌면서부터 BC 1200년경 철기시대가 시작할 때까지 서아시아의 건축 주제와 기술이 지방 고유문명과 결합한 것으로, 1870~73년 및 1876년 H. 슐리만이 소아시아·미케네·크레타 섬 일대를 발굴하면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은 20세기초 A. 에번스 경이 발굴·복원한 크노소스의 궁전 등으로 실체를 나타냈는데, 신석기시대부터 BC 14세기경 그리스 본토에서 들어온 그리스인에게 멸망할 때까지 단절되지 않은 건축문명이 이 지역에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크레타의 왕들은 해상권을 제압했기 때문에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또한 크레타인들은 들판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신전을 건립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중정(中庭)을 둘러싸며 방을 배열하는 방식과 창문을 외벽으로 내지 않은 점은 서아시아와의 접촉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며, 복도를 길게 내는 방식이나 물을 공급하는 방식 역시 동방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서양 건축에서 출입구를 내기 위해 기둥이 사용된 것은 크레타 궁전이 처음이다.
미케네 건축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부 이르골라스 지방에 있었던 성채도시 미케네는 미케네 문명의 중심지로 BC 1400~1200년에 번영을 누렸다. 미케네 건축은 에게 건축의 융성·쇠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유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편이나, 아치 대용품으로 사용한 3각형태의 상인방에 사자 조각을 한 미케네의 사자문과 아트레우스의 보고(寶庫)가 있고, 특히 티린스 궁전의 생활 중심지인 메가론은 그리스 고대 신전 건축의 모태이다.
그리스 건축
스스로 헬레네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은 발칸 반도, 에게 해 주변의 지중해와 소아시아 서부를 중심으로 온화한 기후와 목재·석재 등 풍부한 양질의 건축재료, 무역·군사·문학·철학·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이용해 서양 건축의 고전을 이루는 그리스 건축을 발전시켰다. 그리스 건축가의 주된 역할은 제사용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 색인 : 종교건축).
신앙의 중심은 제단이었으며 초기에는 야외에 건립했다. 신전은 세속 건물과 구별하기 위해 건물을 길게 짓고, 신의 집(oikos)을 상징하는 신상을 건물 속 깊숙한 곳에 모셨다. BC 650년경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이집트와 교류하면서 목격한 석조기념건축은 그리스 석조건축과 조각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목조기둥과 목구조, 벽돌건물을 석조로 바꿈에 따라 비례와 패턴의 표현이 가능해졌으며, 이는 석조로 된 오더(order)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더는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를 지지하는 입면 형태를 발전시켜 그리스 신전건축의 기본형이 되었다. 장중·단정하고 남성적인 도리아식 오더, 경쾌·우아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오더, 우아·화려하며 철저한 장식성을 보이는 코린트식 오더는 오랫동안 그리스 오더의 기본이 되어 현대건축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사이의 아폴로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파이스툼의 헤라 신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에렉테온 신전 등은 대표적이다. 그리스인들은 또한 도시국가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위한 광장인 아고라를 중심으로 스토아 형식의 재판소·도서관·시장·신전·야외극장 등을 건설했다.
로마 건축
로마는 전설적인 인물 로물루스가 BC 753년 로마의 티베르 강변 일곱 구릉지에 건설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공인까지의 건축을 로마 건축으로 본다. 티베르 강에서 포 강에 이른 토스카나 지방에서 에트루리아 건축을 발전시킨 에트루리아인은 BC 6세기가 되면서 밀려났으나 그들이 개발한 아치와 볼트 구조법은 로마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 건축은 로마 제국만큼이나 지리·기후·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복합적인 건축이다. 오늘날 로마 건축에 관한 내용은 로마 제국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유구와 기록에 의해서 알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비트루비우스가 BC 27년경에 로마 건축가들의 지침서로 쓴 〈건축십서 De architectura〉는, 그리스 건축을 교본으로 사용한 점과 로마 건축 전성기 이전에 쓰여진 책이란 한계점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의 건축에 관한 모든 사항을 망라하고 있다.
초기의 로마 건물은 주로 강도가 불균일하고 약한 응회암으로 지어졌다. 후대에는 거의 모두 석회석이 쓰였으며 대리석은 주로 장식용이었다. 공화정시기 개인 주거에는 주로 굽지 않은 막벽돌이 쓰였고, 제정 시기에는 팽창하는 영토에 신속히 건설해야 할 필요성에 맞추어 벽돌과 콘크리트가 쓰였다. 특히 콘크리트는 거의 모든 로마 제국의 건물에 사용되어 로마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로마 건축의 벽은 조적조나 콘크리트조였으며 기타 지지하는 구조로 기둥이 사용되었는데, 콘크리트 재료의 발견으로 아치 사용이 더욱 촉진되었다. 볼트는 주로 원통형 볼트와 교차 볼트를 사용했고, 아주 중요한 기념 건물에는 원형 평면 위에 돔을 얹었다.
디자인에서 로마 건축은 선·면·매스·볼륨 등으로 이루어진 공간구성이 뛰어나며 이 점에서 로마인들은 전(前) 시대의 지중해 사람들과 다르다. 로마인들은 비록 이전부터 전래되던 것이라도 그들의 취향에 맞게 다시 고쳐 사용했다.
로마의 오더는 그리스의 3가지 오더에서 유래했지만 토스카나식 오더와 복합식 오더를 더하여 5가지 오더로 발전시켰다. 로마의 오더는 그리스 것보다 비례가 더 가늘고 주신에 홈이 없으며, 점차 세부 장식화되어 빛과 그림자의 강한 대조를 자아내기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신전 건축은 낮은 3단의 그리스 신전 기단과는 달리 정면에만 계단이 있는 높은 단으로 되었고, 동서방향의 장축을 자유롭게 변화시킨 결과 입구 정면이 강조되는 건물이 탄생했다. 프랑스 님(Nîmes)의 메종카레는 대표적이다. 로마인들은 원형 신전도 세웠는데, 현존하는 가장 큰 원형 신전은 판테온이다. 모든 신에게 봉헌한 판테온은 하늘을 표상하며 돔과 로툰다는 수평과 수직의 축을 통합한 구조로 로마 건축을 대표한다.
공화정 말기부터 공공욕장은 로마인들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황제들의 욕장은 이상적인 설비를 갖추고 아치, 원통형 볼트, 돔 등의 구조법을 구사했으며 카라칼라 욕장(217),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298~306), 막센티우스 욕장(313)이 유명하다. 타원형 투기장으로 가장 큰 것은 로마의 콜로세움(70/72~82)이다.
이밖에도 긴 U자형의 전차경주장(circus), 개선문 등이 있으며, 급수시설, 공공욕장, 광장의 분수 등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이는 고가수로교(高架水路橋)를 아치와 콘크리트를 사용해 건설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점령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카푸트 문디(caput mundi:세계의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그대로 많은 도로를 건설했다.
한편 로마 귀족들의 주거용 건축은 중정인 아트리움을 향하여 방들을 배열하고, 그 뒤로 열주 회랑이 있는 페리스타일을 둔 도무스(domus)와 교외의 빌라가 있다. 폼페이의 유구에서 발굴된 도무스들과 티볼리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빌라(123)는 대표적이다.
서민용 주거로는 한 블럭으로 된 3~4층의 임대 아파트인 인술라(insula) 등이 있었다. 비트루비우스는 로마인들이 일찍이 도시계획의 기본원칙을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도시는 초기 로마의 마을이나 군대 병영에서 발전한 것이다. 전체 배치형태는 4각형으로서, 주 도로가 도시 중앙을 가로질러 만나며 나머지 부분은 격자형이다.
중앙이 도시생활의 중심이며 상업지역인 포룸이 있다. 로마의 포룸에는 바실리카·재판소·은행·시장 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313 완공)가 유명하다.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식민도시 타무가디는 로마 시대의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
20세기초까지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건축은 그리스도의 사후, 혹은 적어도 1세기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으나 후대의 연구 결과 진정한 그리스도교 건축 양식은 2세기말이나 3세기초까지는 시작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은 밀라노 칙령(313) 이전 시기와 그리스도가 국교로 채택된 이후의 2시기로 나뉘는데, 전자의 건축은 비밀집회소였던 카타콤베를 제외하고는 예배장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단순하며 숫자도 적은 반면, 다음 시기의 건축은 양과 규모 면에서 엄청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교회당은 건축가의 설계 대상이 되었다 (→ 색인 : 종교건축).
이들이 참고한 건축은 이교도들이 우상을 숭배하던 신전건축이 아니라 실용성을 지닌 세속건축이었다. 특히 제단·사제석·회중석이 필요한 교회 건물은 바실리카에서 그 형식을 채택해 이것이 그후 서유럽 교회건축의 원형이 되었다. 유명한 로마의 구(舊)성베드로 대성당은 330년, 산파올로 성당은 380년 봉헌되었다.
바실리카 교회의 평면형식은 동서로 주축을 잡고 서측 정면의 현관·중정(atrium)·전실(narthex)을 지나 교회당 내부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내부 홀은 3~5개의 긴 아일[側廊]로 구성되었으며, 가운데 아일의 천장이 높아서 높은 측창에서 채광이 된다. 입구 반대편에는 반원형의 앱스[後陣]가 있는데, 상부에 반쪽 돔을 덮었다. 홀은 간단한 목재 지붕이고, 양편 아일은 가운데 네이브[身廊]와 분리되어 4각 형태의 구조물로 지지되며, 후대에 연속된 아치로 바뀌었다.
초기 교회는 주로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기능은 평면 형식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이나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교회는 더 복합적인 요소를 수용했고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서는 기념·예배의 기능을 합친 교회가 세워졌다. 영웅이나 죽은자를 의식하는 그리스와 로마 풍속의 차이는 집중형의 그리스 십자형 교회 평면과 장방형의 라틴 십자형 평면을 각각 탄생시켰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그리스 영웅들을 기리듯, 예수의 탄생·부활 등 현세적인 것을 기념하는 기능을 가진 교회를 지었고 라틴 지역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기리는 기능을 하는 교회를 지었다. 그러나 중앙집중형 평면, 원형·다각형·십자형 평면은 주로 4~5세기경까지 동부·서부 유럽에 공통으로 사용되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때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고 그후 유럽이 서방의 교권(敎權)과 동방의 제권(帝權)으로 갈라지면서 그리스도교 교회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비잔틴 건축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4년 보스포루스에 새 수도를 세우자 로마의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이주했다. 따라서 비잔틴 건축의 초기 양식은 로마 건축에 바탕을 둔 바실리카 교회 평면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독립적인 비잔틴 교회의 특성이 발전해, 5세기 때의 실험을 거쳐 로마의 장방형 평면과 대비되는 중앙집중형·정방형 평면이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크게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중 하기아 소피아 성당(532~537)이 가장 대표적인데, 장방형의 바실리카식 평면과 중앙집중형 평면 형식의 개념을 모두 수용한 교회당이다. 구조적특색으로는 상부의 돔이 하부의 펜던티브에 의해 지지되는 점을 들 수 있다. 사각형 평면에 원형 돔을 얹는 방법에는 스퀸치(squinch)를 두어 사각형 평면을 팔각형 평면으로 바꾼 뒤 돔을 얹는 것과 펜던티브를 사용하는 것이 있다.
펜던티브는 그때까지의 역학적 해결법과는 다르게 추력으로 반력을 고안한 건축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의 하나이다. 후기 비잔틴 건축은 콘스탄티노플과 발칸 반도 전역에 남아있는데, 중기 비잔틴 양식을 계승한 돔은 작고 높으며 외벽은 벽돌 등으로 장식되었다.
러시아 예술은 비잔틴 양식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는데, 건축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전역에 전파되어 러시아 절충주의 건축의 특성을 이루었다. 중심 돔, 즉 큐폴라의 디자인과 지지방법은 러시아 건축의 중심주제가 되었고 비잔틴 건축 양식을 지역에 맞게 바꾸어 추운 날씨와 폭설에 적응하도록 좁은 창문과 급한 지붕, 불거져 나온 듯한 돔 형태의 러시아 교회 건축이 발전했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양파 모양의 돔 큐폴라가 등장해 러시아의 민족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건축
고트족의 이주는 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으로 인한 유럽 제민족 이주의 전주곡이었다. 고트족은 200년경 이동하기 시작, 남부 러시아까지 진출해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져온 건축 양식을 전파시켰다. 375년 훈족이 러시아로 들어옴에 따라 고트족은 다시 서부로 이주해 민족대이동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이동은 서부·남부 유럽에 새로운 예술 형태를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네스크는 유럽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 이후 12세기 중엽에 고딕이 출현할 때까지의 예술을 총칭한다. 로마네스크란 말은 1818년 드 제르빌이 로마풍 또는 로마 건축 양식을 변용하여 발전시켰다는 뜻의 'romanico', 'romanisch'라는 말을 쓰면서 처음 건축 용어로 등장했다.
로마네스크는 로마적이라는 뜻을 지니면서도 그와는 차이점이 있고, 표현의 풍부함을 지니면서 지역마다 다른, 다양성을 보인다. 650~1200년에는 수도원 건립 운동이 활발해 로마네스크 건축은 신에 대한 영광,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인의 생활, 형제애를 구현하기 위한 수도원제도라는 통일된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세 중기에 들어서 유럽 인구가 로마 시대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육로나 해로를 통한 교통과 통신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이웃 단위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를 배경으로 도시적 성격을 띠는 대규모 수도원이 주변 마을을 지배하며 예배·관리·통치·지식·정신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수도원 생활이 가장 잘 이루어진 곳은 프랑크 왕국 일대였다. 프랑크 왕 샤를마뉴 대제는 성 베네딕투스 계율을 채택하고 8세기 후반부터 수도원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820년경에는 생갈 수도원 같은 기본형이 정립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클뤼니 대수도원(910)이다.
로마 시대의 바실리카는 내화구조(耐火構造)가 아니었는데, 이는 목구조 건축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1000년경부터 건축기술자들은 볼트 구조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큰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로마네스크식 바실리카는 중정을 없애고 정면에 높은 종탑을 세우고, 교회 몸체 길이를 연장하고 성직자 전용 기도소를 측랑 끝에 설치한 것이 일반적인 특색이다.
구조적으로는 목조 지붕과 천장을 석조와 벽돌조로 교체한 원통형 교차 볼트를 사용하고 지붕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리브(rib:肋材) 구조를 창안했다. 외관은 단순·온화하나 위엄이 있고, 창문·문·아케이드에 반원형 아치를 연속성 있게 중첩해 사용했다. 진보적인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은 로마, 비잔틴 제국, 이슬람 세계, 스칸디나비아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950~1050년에 구조·스케일·디자인·볼트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건축에 조각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새로운 로마네스크 양식이 생겼다. 이것은 1075~1125년에 전성기를 이루고 이후 쇠퇴했다. 1090년 이후에는 첨두형 아치를 사용한 교차 볼트법이 개발되어 가볍고 강하고 개방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건축 외관에 변화가 생겼다.
그후 이 양식은 독일·폴란드·헝가리·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등지로 퍼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된 아미앵 대성당이 1220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다. 클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회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원을 대표하는 2개의 교파였다.
1077~85년 재건된 클뤼니 수도원은 당시 가장 큰 로마네스크 교회였으며 긴 비례, 다발 기둥, 첨두 아치, 특수화된 벽식구조와 볼트 시공법 등 고딕 양식의 탄생을 알리는 많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시토 수도회는 1098년 창립되어 급속하게 퍼졌다. 시토 수도회 건축가들은 첨두 아치를 사용하고 반(半)고딕이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개발했다 (→ 색인 : 시토 양식).
부르고뉴의 영향으로 드디어 파리 근교 생드니 수도원에서 고딕 건축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베네딕투스 수도회를 따라 영국에서 발달한 노르만 양식은 목조 지붕으로 된 네이브, 볼트로 된 아일, 장식된 내부, 공간감 있는 트랜셉트[翼廊], 깊이있는 성소가 특징이다. 더럼 대성당은 노르만 양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노르만 양식, 로마네스크 예술, 부르고뉴 로마네스크 양식, 시토 양식).
고딕 건축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영국에 이르는 지역 일대는 고딕 예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이 일대는 부유해서 훌륭한 예술가들을 데려오거나 비싼 재료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으며,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고딕 건축이 성행했다. 고딕 건축은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비롯되어 12세기 중반부터, 지역에 따라서는 16세기말까지 지속되었고 크게 초기 고딕, 성기 고딕, 후기 고딕의 3단계로 분류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고딕 건축은 리브 볼트, 첨두형 아치, 플라잉 버트레스, 창호의 증대와 스테인드글라스의 사용 등이 그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몇몇 로마네스크 건축에도 있었다. 12, 13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기술로 더 넓고 더 높은 건물을 짓게 되었으며 시각적으로 건물 외관에 변화가 나타났다.
건축의 예술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구조적 기술이 도입되었는데, 1135~44년에 동쪽 부분을 새로 지은 파리의 생드니 수도원에서 최초의 예를 찾을 수 있다. 초기 고딕의 대표적인 건축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1163 착공), 랑 대성당(1165 착공), 랭스 대성당(1210년 화재 이후 재건), 아미앵 대성당(1220 착공), 샤르트르 대성당(지금의 모습은 1194년 이후의 것) 등이다.
이 시기의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의 3랑식(三廊式) 구조를 탈피하고 클리어스토리를 높게 키웠다. 장식은 단순한 편이며 교회 정면에 커다란 원형 장미창과 트레이서리가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딕 시기 건축의 발전은 지속적이지 못했고 지역적인 특성이 같이 표현되었다.
1220~30년이 되면 건축기술의 발달로 건물을 크게 지을 수 있었으며, 또한 1230년경에 이르러 건물 규모나 크기보다는 장식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방사식(Rayonnant style) 고딕이 나타났다. 아미앵 대성당에서 이미 선보인 방사식 고딕의 대표적인 예는 1250년대에 지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며 많은 나라에서 각기 방사식 고딕이 발전했다. 1250~1300년경에는 프랑스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와는 다른 수평 형식을 발전시켰다. 길고 좁은 평면과 낮은 네이브의 볼트 구조는 내부의 투시효과와 종교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12세기말~13세기말에 이르는 시기에는 폭이 좁고 높은 첨두 아치, 첨탑과 급경사 지붕이 특성을 이루었다.
14세기에는 복잡한 기하학 형태로 구성한 화려한 장식문양이 사용되었고 볼트의 리브는 여러 모양으로 발달했다. 15세기에는 부채꼴 볼트가 등장하고 수직선이 강조되는 성당이 나타났다. 영국의 대표적인 고딕 건축은 링컨 대성당(1192 착공), 솔즈베리 대성당(1220~58),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 등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식의 웅장한 교회를 짓지 않았으나 13세기말경부터 나름대로 고딕 양식을 받아들였다. 밀라노 대성당(1385~1485)은 대표적인 이탈리아 고딕 건축물로 꼽힌다. 15세기부터 많은 고딕식 교회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건립되었다. 프랑스의 후기 고딕 양식은 화염식(Flamboyant style) 고딕이라고 부른다(→ 고딕 예술).
르네상스 건축
르네상스는 고대 고전문예의 부흥을 목표로 15세기초 피렌체에서 발생하여 그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그리고 16세기말에는 유럽 전역에 새로운 건축 양식을 전파했다. 고딕을 대체한 르네상스 건축에는 기둥, 반원형 아치, 원통형 볼트, 돔이 다시 사용되었다. 르네상스기의 고전에 대한 지식은 이탈리아 등지에 있는 고대건축의 유적과 로마 시대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 이론서에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고전과 관련, 건축의 기본요소를 오더로 받아들여 5가지 오더를 중첩시켜 사용하며 구조기술을 건축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 색인 : 고전주의). 이들은 벽체와 구조체를 합리적인 조합 원칙에 연관시켜 결합하려 했으며, 석재의 재질감을 살리고 돌림띠를 사용해 수평성을 강조했다. 직업적인 건축가가 등장하고 교회와 함께 세속적인 건축을 본격적으로 설계한 것도 르네상스 시기로, 이러한 건물은 건축가들의 중요 과제가 되었다.
르네상스 건축은 선과 면을 바탕으로 한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건축가들은 원이 가장 완전한 기하학적인 형태라고 여겼으므로, 신에게 바칠 건물도 가장 완전한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해 교회 형식을 라틴 십자형에서 중앙집중형으로 바꾸고 점대칭, 원형, 정사각형, 그리스 십자형 등 변형을 발전시켰다. 또한 건축의 비례가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알베르티는 비례와 연관시켜 건축을 정의하면서 더 추가하거나 빼내거나 변화시킬 수 없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인체비례와 건축비례 간의 조화를 발견하고 이를 건축이론으로 발전시켜 설계에 반영했으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투시도법을 고안했다.
르네상스는 건축이론이 발전한 중요한 시기였는데,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의 영향으로 많은 건축가들이 건축서를 저술했다. 알베르티의 〈건축십서〉가 1485년 발간되었으며 건축이론은 16세기 후반에 더욱 번성했다.
고전을 추구한 르네상스 건축이 고대 유적이 많은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로마에서 일어나리라는 예견은 당연한 것이었다. 14세기와 15세기초 이탈리아인들은 로마 건축을 부흥시키려 했으나 로마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도시였다.
그대신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되었다. 1401년 피렌체 옛 예배당 정문 설계경기에서 낙선한 금속세공가 브루넬레스키는 이에 자극받아 건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르네상스 건축을 열었다. 1418년 중세 건축가들이 해결 못한 피렌체 대성당 돔 설계경기에 당선된 그는 고딕식 내용의 구조이지만 드럼을 도입한 르네상스식 돔을 처음 만들었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비종교건축은 팔라초이다. 고전 양식의 장대한 수평띠, 정형화된 창문과 출입 개구부, 상층으로 갈수록 거친 다듬기에서 잔다듬으로 막다듬기한 석조의 재질감과 마감방법은 르네상스 건축에 나타난 주요한 내용이다. 팔라초 건축은 그후 더욱 발전하여 건물 입면에 고전 건축의 오더를 붙박이 기둥(pilaster)으로 사용하면서 각 요소들의 조화관계에서 건축미를 추구하게 되었다.
브라만테는 초기 로마 르네상스 건축을 더욱 발전시켜 성기(盛期) 르네상스를 낳았다. 템피에토(1502), 성베드로 대성당, 팔라초 파르네세(1517~ 89)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며 또한 많은 빌라들이 교외에 세워졌다(→ 르네상스).
16세기초 이탈리아 성기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초 바로크 예술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이탈리아 예술을 마니에리스모라고 한다. 마니에리스모 건축가들은 고대 로마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원칙 대신 고도의 세련미·복합성·고귀함을 추구했다. 마니에리스모 건축으로 공간 처리는 점차 경관적인 효과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바사리의 우피치 궁전(1560)에서 그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마니에리스모 건축을 완숙하게 발전시켰고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 참여하여 돔과 드럼을 설계했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 건축
바로크 건축과 로코코 건축은 17세기에서 18세기 중기까지의 유럽 건축을 일컫는 말이다. 바로크 건축은 17세기 로마의 마데르노가 산타수산나 교회 정면을 설계하면서 모든 요소들을 중앙으로 통합하고 정확함과 우아함을 억제하며 건물의 역동성을 나타내기 위해 최초로 바로크 원리를 구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바로크 건축은 회화·조각과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통일을 이루며 하나의 종합예술로 통합시켜 근본적으로 극적이고 환상적인 건축 내용을 추구했다.
반종교개혁 이후 새롭게 얻어진 생활의 풍요와 안정감을 표현하는 바로크 교회는 천장을 회화로 채색하여 하늘로 향하는 관심을 유도했고 교회의 신앙을 선전하는 건축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절대주의 군주들에 의해 성행한 바로크 궁전 건축은 국가의 권력과 통치의 무한성을 과시했다.
바로크 건축의 공간은 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정적이고 안정되고 정돈된 공간과는 대조적으로 방향성과 운동성을 추구하며, 다양하게 변화하는 조망을 이루었기 때문에 특히 현장에서 체험해야 하는 공간이다. 건축의 스케일은 르네상스에 비하면 큰 편이며 양감 및 감각적 효과를 내기 위해 평면은 곡선이나 타원형이 즐겨 사용되는 한편, 외부 공간은 건물과 광장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축선상에 이루어져 있어서 중심 건물과 시점이 강조되었고 동적이며 경관적이 되었다.
바로크 건축은 두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로마 가톨릭 지역인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남부 독일 등에서는 자유스럽고 복합적이며 더욱 동적인 건축 형태와 표면을 추구했으며, 프로테스탄트교 지역인 영국·네덜란드, 기타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억제되고 온건하고 조용하면서 기하학적이고 단순하며 기념적인, 세련된 건물을 추구했다.
17, 18세기에는 건축이론서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중에서도 오더·토목·군사건축에 관한 이론서는 바로크 건축가들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건축가들이 많은 건축이론서를 쓴 데 비해 이론서를 쓴 17세기 건축가는 아주 적다. 이당시 프랑스에서는 블롱델이 건축 아카데미에서 강의용 노트를 발간했고 가장 중요한 페로 등의 이론서가 나왔으며, 영국에서는 헨리 워턴 경이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를 번안했다. 로마 바로크 건축으로는 베르니니의 성베드로 대성당 광장(1657경)이 있다.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 지방은 17세기에 들어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바로크 건축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1680년 이후에는 완성된 바로크 형태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건축으로는 독일 건축가 B. 노이만의 피어첸하일리겐 순례성당(1743~72경)이 있다(→ 바로크 시대).
아메리카 식민지 건축은 그곳에 정착한 민족수만큼이나 다양했다. 18세기의 영국과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건축을 조지 양식이라고 하는데, 영국에서는 1714~1820년의 건축 양식을, 아메리카에서는 1700년경부터 미국 독립전쟁 시기인 1770년대까지의 건축 양식을 지칭한다. 특히 1780~1820년의 미국 건축은 연방 양식이라고 부른다(→ 연방양식, 조지 양식).
르네상스의 도시설계 기본원리인 기하학적인 질서, 방사선형 계획 등은 기본적으로 17세기의 바로크 건축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는 유럽의 중세 및 르네상스 이론을 배척했으며, 17세기 중엽 프랑스의 르 노트르는 베르사유 궁전 등 정원 설계에 르네상스 이론을 채용하지 않고 대신 방사형 디자인을 사용, 궁전을 향해 수렴하도록 하여 당시의 이성주의적 신념을 기념적으로 나타내는 한편, 절대주의 왕권과 일맥상통하게 했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는 통일감을 강조하는 도시설계를 보이는데, 부분이 전체에 종속되는 형식이다. 이 원리는 1792년 랑팡이 기본 설계를 한 미국 워싱턴 D.C.의 도시설계에도 반영된다.
로코코 건축
1700~80년 계몽주의 시대에 다양한 경향의 후기 바로크 예술이 대두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흐름이 로코코이다. 프랑스에서 일어나 유럽의 많은 지역에 영향을 미친 로코코 건축은 우아함을 추구하는 18세기 취향에 맞는 건축이다. 로코코 건축도 바로크 건축과 같이 장식·조각·회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극적인 공간감의 연출을 위주로 한 17세기 건축 공간은 18세기가 되면서 공간을 통합하고, 구조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연속적인 장식 계획을 창조하면서 기둥의 크기를 최소로 줄이는 새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또한 교회당의 아일 천장 높이를 네이브만큼 높여 공간을 통합하기도 했다.
로코코 양식의 시작으로 18세기초 유럽 예술의 중심지는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갔다. 망사르 밑에서 1679년 샤토드마를리의 실내작업을 하던 피에르 르 포트르가 바로크 건축의 새로운 장식수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해 기하학적인 문양을 이용한 전형적인 17세기 실내를 만들었다.
이후 건축가들은 바로크적인 양감과 무거운 부조를 배격하고 경쾌하고 섬세한 문양을 선호하며 개인의 사생활을 위주로 한 실내공간을 꾸미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로코코의 특징(→ 로코코 양식)을 이룬다.
신고전주의 건축
바로크·로코코 건축을 지나 근대 건축에 이르는 과도기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말에 이르는 시기에는 신고전주의, 고딕 복고, 절충주의 건축이 크게 대두되었다. 신고전주의 건축은 1750~1830년에 꽃피웠으며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고대 로마나 르네상스 건축과 구분하기 위해 신고전주의 건축이라 하지만 18세기에는 아직 이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바로크가 절대주의와 관련 있다면 바로크에 대한 반동으로 순수하고 본질적인 건축미를 지향한 신고전주의는 계몽사상이나 이성의 시대와 관련이 있으며, 자연과학의 발달과도 연관된다. 신고전주의의 과거 문명에 대한 향수는 역설적으로 낭만주의와도 연관된다. 즉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건축이 각각 추구한 그리스 로마 건축의 복고와 고딕 건축의 복고는 다른 내용이지만 그 근본은 같은 것이다 (→ 색인 : 그리스 복고양식).
낭만적 고전주의라는 용어는 20세기 건축사학자들에 의해 신고전주의 건축의 몇 가지 측면을 일컬어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결국 신그리스·로마식 형태를 인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인도·중국·이집트·이슬람·고딕식 등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건축의 다양성이 고조되어 고대 로마 건축에 대한 관심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조는 19세기 근대건축 양식이 탄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8세기말 영국인들이 로마를 방문하면서 과거 건축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었는데 폼페이, 헤르쿨라니움의 발굴작업과 피라네시의 로마 건축 석판화의 발간(1743), 그리고 고고학 관계 서적의 발간으로 그리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면서 그리스 건축 복고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빙켈만의 저서 〈그리스의 회화와 조각에 대한 고찰 Gedanken ü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hauerkunst〉(1755)로 인해 로마 건축보다 그리스 건축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그결과 건축의 원초성, 본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이성주의 건축이 대두했다.
M.A. 로지에는 〈건축에 관한 수상 Essai sur l'architecture〉(1753)에서 이성주의와 단순성을 지닌 건축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면서 원시 오두막이 가장 근본적인 건축적 욕구의 표현이라며 신고전주의 건축의 바탕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건축의 국제적인 중심지는 로마였다. 1740년대부터 능력 있는 건축가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로마 대상 수상자들은 로마 건축을 연구한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 신고전주의의 특성을 살려 설계했다. 이 시기의 건축 경향은 고전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정확한 것만을 엄밀하게 적용하려는 건축가들과, 고전에서 건축의 원형을 찾아 기본적인 기하학 형태에서 출발해 이를 이념적으로 적용하려는 건축가들로 나눌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다시 로지에·수플로·라브루스트 등의 구조적 고전주의와 르두·불레·길리·싱켈 등으로 대표되는 낭만적 고전주의로 나뉜다.
영국에서는 1720년대부터 팔라디오풍 건축이 대두했는데, 비트루비우스, 팔라디오, 이니고 존스 등을 추앙한 벌링턴 경, 캠벨과 그 후계자들이 대표적이며 특히 1780년대 이후에는 고귀한 단순성, 고풍스러운 장려함 등을 추구했다. 1800년대가 되면 존 손 경을 대표로 영국 전역에 신고전주의 건축이 성행했으며 후기에 들어서 그리스풍의 복고건축이 계속 강화되었다 (→ 팔라디오 양식).
프랑스에서는 1671년 루이 14세가 왕립 건축 아카데미를 만들면서 고전의 창조이념에 따라 건축을 표현하기 시작, 1714년 A. 코르드무아의 저술에서 이성주의 건축이 거론되었으며 1740년대에 로코코 건축에 대한 반항이 나타났다. 특히 로지에의 저술은 프랑스 이성주의 건축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건축가는 수플로로서, 1750년대에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유적을 연구했다.
대표작은 파리에 있는 생트준비에브 교회(1757 ~90, 지금의 팡테옹)이다. 혁명적인 건축가 E.-L. 불레는 1780년대 이후 신고전주의 건축 형태의 특성인 순수한 기하학과 단순성을 추구했는데, 1780년경의 뉴턴 기념비 계획안은 대표적이다. 또한 C.-N. 르두는 1765~80년에 여러 개의 건물을 설계하면서 프랑스 고전주의 전통과 고전건축의 새로운 정신을 조화시키며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건축을 시도했으며 뒤랑은 건축서와 교육을 통해 신고전주의 건축을 전개했다.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루이 16세 양식은 독일로 흘러들어가 독일의 신고전주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86~97재위)는 베를린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기로 계획하고 건축가 칼 랑간스, 다피트 길리 등을 불러들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독일은 신고전주의 건축을 가장 강하게 추구하고 잘 이해하는 나라가 되었다. 특히 길리의 제자 싱켈은 1815년 궁정건축가가 되어 베를린을 이성적인 그리스 양식 건축물의 도시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알테스 미술관은 그의 대표작이다.
미국에서 신고전주의 건축은 19세기에 번성했다. 거의 모든 주요도시에 그 실례들이 남아 있는데,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한 버지니아 주 의회의사당, 몬티첼로, 버지니아대학교 캠퍼스 등이 대표적이다. 러트로브는 1796년 미국에 건너온 최초의 미국 직업건축가였다 (→ 그리스 복고양식).
고딕 복고건축
고딕 복고건축이란 용어는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중세건축을 모방하여 세운 건축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된 후 신고딕 건축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되었다. 낭만주의와 가장 밀접한 고딕 복고건축은 173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널리 유행했으나, 유럽 대륙에선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이 양식은 주로 교회나 대학 건물에 사용되었으며 고딕 건축과는 쉽게 구별하기 힘들다.
영국에서는 고딕 건축에 대한 향수 때문에 18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했고, 특히 19세기에 회화적인 정원을 계획하면서 이에 가장 적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당시 고고학 발굴에 크게 힘입어 이 양식의 의의와 도덕성이 공식화되었는데, 그것은 지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양식은 자기 민족과 국가에 대한 향토주의, 평민주의가 크게 작용해 이를 이상화한 낭만주의 건축으로, 대표적인 건축가인 A.C. 퓨진(1762~1832)은 고딕 복고건축을 처음으로 규범화했다.
고딕 복고건축을 옹호한 중요한 인물은 영국의 존 러스킨, 프랑스의 비올레 르 뒤크 등이었으며 러스킨은 이 운동을 도덕적·지적 운동으로 확대했다. 19세기 후반기는 고딕 복고건축이 가장 활발하게 나타난 시기로, 건축가들은 고딕 건축에 내재하는 원리를 추구하고 그 정신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 양식은 구조의 진실성과 자유스러움을 추구함으로써 건축에 공헌했으며 건축가들은 필요에 따라 구조적인 요소들을 건축 디자인에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비올레 르 뒤크는 고딕 건축 구조의 적응성을 찬양했는데, 골조는 당시 대두되기 시작한 철골구조와 비슷했다. 고딕 복고건축은 고딕 건축이 가장 흥성했던 영국·프랑스·독일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 이들 국가에서 국가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16세기말부터 고딕 복고운동과 낭만주의 건축 기운이 나타났다. 그후 1818년 영국의 교회 건물법으로 고딕 건축이 더욱 강조되었으며 1836년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을 재건하면서 국가적인 양식으로 정착했다. 퓨진은 고딕 건축을 가톨릭 정신을 표현하는 건축으로 발전시키려 했는데, 그의 주장은 영국국교회 개혁가들에게 채택되었다.
한편 러스킨은 확고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고딕 건축을 받아들였고 1853년 〈베네치아의 돌 Stones of Venice〉을 출간하면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고딕을 영국에 크게 유행시켰다. 1850년대 중엽 고딕 건축은 영국 교회건축의 기본이 되었고 20세기까지 일종의 절충 형식으로 지속되었다.
프랑스 건축가들은 고딕 건축이 지닌 합리성을 추구했다. 생트준비에브 교회는 신고전주의적이지만 그 구조원리는 고딕에서 찾은 것이다. 비올레 르 뒤크는 중세 건축 연구의 대가로서 고딕 건축이 지닌 구조와 구성의 합리적인 체계를 추구하며 건축 형태의 논리적 발전을 강조한 반면, 형태 자체나 상세는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는 19세기 건축은 19세기의 재료와 기술로 19세기의 기능을 표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에서의 고딕 복고는 그 기원이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모방한 피상적인 수입이었으며, 특히 목구조 고딕 건축이 성행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의 거의 모든 고딕 복고 건축가는 영국에서, 특히 러스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가장 창의적인 건축가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활약한 프랭크 퍼니스가 있다. 20세기에는 주로 대학 건물에 많이 적용되었다.
러스킨의 건축관계 저술과 퓨진의 건축활동은 미술공예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건축가이며 사회개혁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르네상스 이후, 특히 산업혁명 이후 쇠퇴한 에술의 시회적 기반을 인식하고 공업 생산에 저항하며 중세의 정신적·미학적 원리가 담긴 수공예 제품의 복고를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시민들의 실생활문제를 해결하는 저렴한 제품을 생산하지 못했으며, 사회변혁을 이룰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못했다. 1859년 모리스를 위해 웨브가 설계한 벡슬리히스에 있는 ' 붉은 집'은 미술공예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모리스의 가르침은 애슈비(1863~1942)·크레인(1845 ~1915)·보이지(1857~1941)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딕 복고양식, 미술공예운동).
고전주의 및 절충주의 건축
최근까지의 건축사에서 19세기는 역사주의 건축가들이 기술과 공학에 바탕을 둔 기능주의 건축가들을 가로막은 시기라고 평가되어왔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20세기는 기능주의 건축의 승리라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기능주의 건축가들은 역사를 참고로 할 필요가 없고 새로운 재료와 기술로도 건축설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새로운 해석이 대두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역사적인 건축에 대한 19세기의 진지한 연구는 그 자체가 높은 수준의 독립적인 건축운동으로 재평가되었다는 것과, 둘째, 1970년대의 포스트 모던 건축의 대두로 근대건축이 현대건축의 영원한 고지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근대 건축의 신화에 감추어져 보지 못했던 1830~1930년의 건축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30년대까지 세워진 거의 모든 건축은 고전적·전통적인 양식이다.
그당시 파리의 에콜데보자르는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교육기관이었다. 이는 1819년 왕립건축 아카데미의 후신으로 창립되어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1850년 이후에는 미국에서도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건축은 공익사업으로 취급되어 기념비적인 공공 건축을 고전양식으로 설계하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대표적인 건축가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1862~75)를 설계한 J. L.C. 가르니에, 파리 시 개조계획을 한 B. 오스만, 파리 국립도서관의 열람실(1859~67)을 설계한 H. 라브루스트 등이다. 1889년 철과 유리를 사용한 건물들이 주류를 이룬 파리 박람회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후에 페레는 이에 대한 반항으로 가구식 구조 건물을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해 고전적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러트로브 추종자들은 창의성이 부족했다. 1846년 헌트가 미국 최초의 에콜데보자르 학생으로 등록했으며, 1859~62년에는 H. H. 리처드슨, 1867~70년에는 리처드슨의 제자 매킴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매킴은 윌리엄 러더포드 미드, 스탠퍼드 화이트와 동업해 미국 토속 건축인 싱글 양식을 발전시켰다 (→ 색인 : 싱글 양식).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콜럼버스 국제박람회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회장으로서 '맥킴-미드-화이트 사무소'가 주도했다. 이 박람회를 통해 이들은 공공건축 설계에 고전적인 디자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때의 책임건축가 버넘은 미국 주요도시에 '위대한 백색 도시' 운동을 전개했다.
19세기말 건축
영국의 산업혁명은 철골구조 건물을 등장시키면서 새로운 유형과 구조법을 가져왔다 (→ 색인 : 골조식 건물). 1770~72년 도드는 리버풀에 주철기둥을 사용한 세인트앤 교회를 건설했으며, 그후 J. 와트와 M. 볼턴은 맨체스터의 목면공장에 주철제 기둥과 주철제 보를 사용했다.
이 시기의 많은 건축가들은 고전양식에 철골구조를 사용한 건물을 지었으며, 보수적인 건축가들도 철과 유리를 사용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장 건물인 팩스턴이 설계한 수정궁은 온실구조처럼 철과 유리로 된 건물이다. 이때의 표준화된 공장제품 생산, 현장조립 시공방법 등은 후기의 국제박람회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에펠이 설계한 1889년 국제박람회장의 에펠 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으로서 주철 아치와 트러스 구조로 건설되었다.
미국에서는 이른바 시카고파가 태동하면서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유형이 탄생했다. 특히 은행·증권거래소·사무소·백화점 등이 최대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지가가 비싼 도심에 고층으로 건립되었다. 철과 유리를 이용하는 건축재료의 변화와 엘리베이터의 발명은 고층화를 촉진하고 골조를 그대로 노출한 직접적이고 새로운 건축어휘를 개척하면서 상업적인 고층건축이 가진 상징성을 추구하게 만들었으며, 건축미에 대한 철학에 변화를 일으켰다.
재래의 건축방법을 따른 건축가들이 설계한 고층건물은 조적조 구조로서 탑과 비슷한 외관이었으나, 1884~85년의 시카고 건축가들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했다. 그중에서 W.Le B. 제니는 시카고파의 창시자로서 그의 가정보험회사 건물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그당시 시카고 건축가들은 철골조가 나타낼 수 있는 더욱 미적인 구조를 개발했다.
리처드슨의 마셜 필드 백화점(1885), 설리번의 개런티 빌딩(1895), 웨인라이트 빌딩(1890~1901), 버넘의 릴라이언스 빌딩(1890 ~95)은 대표적이며, 이로써 시카고는 새로운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카고파를 통해 근대건축은 상징적으로 그에 합당한 형태를 얻어 철구조와 효율적으로 이용이 가능한 공간, 뼈대를 표현하는 외관, 장대한 스케일을 갖추었다.
아르누보 건축
19세기말의 절충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아르 누보 건축은 자연물의 형체에서 볼 수 있는 길고 굽어진 선이 특징이며,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널리 퍼졌다.
1881년 브뤼셀에서 발간된 〈아르 모데른 L'Art Moderne〉지는 전위예술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이를 계기로 1893년 '20인 그룹'(Les XX Groupe)이 탄생했다. 아르누보의 명칭은 벨데가 실내를 설계한 파리의 화랑이름(Maison de l'Art Nouveau)에서 유래했다. 미술공예운동과는 반대로 아르누보는 개인의 취향을 우선하는 예술을 지향해, 견고한 생활상이나 사회현실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과는 다른 건축을 추구했다.
아르누보는 비올레 르 뒤크의 구조의 진실성과 설리번의 유기적 건축이론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철과 유리를 건축 표현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지향했다. 빅토르 오르타는 유럽 대륙의 아르누보 운동을 대표하는 건축가로서 과거의 양식에서 탈피해 형태나 구조의 측면에서 철을 사용한 선형 장식을 즐겨 썼으며, H. 반 데 벨데는 이론 및 실무면에서 흐르는 듯한 순수형태를 주창했는데 우클레 소재 자택은 대표적이다.
한편 A. 가우디는 또다른 측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르누보 건축가로서 고딕의 구조적인 합리성에 기초해 자신이 활동한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건축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성 가정 교회(1883~), 카사 밀라 아파트(1905) 등이 있다. 영국의 C. R. 매킨토시는 유럽 대륙의 아르누보 건축가들과는 달리 글래스고 지방에서 장식을 배제한 단순하고 우아한 입방체를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미국에서는 아르누보가 건축공간보다는 장식 요소로 사용되었다.
한편 빈 분리파(Sezession) 운동의 건축가들은 이성이나 논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아르누보와는 대조적으로 고전주의 건축을 시도했다. 오스트리아의 O. 바그너, J. M. 올브리히, J. 호프만 등은 대표적인 건축가들이다. 분리파운동의 건축은 리트벨트의 슈뢰더 주택(1924) 등에 계승되었다(→ 아르 누보).
20세기 건축(근대건축)
근대건축운동은 비역사적인 기능주의에 바탕을 둔 건축을 창조하기 위한 시도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공간 개념은 새로운 건축이념과 재료로 실현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19세기 건축 양식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20세기 건축은 근대적인 인간에게 합당한 건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색인 : 근대미술).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은 디자인을 맡은 예술가와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가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H. 무테지우스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그후 P. 베렌스가 1907년 아에게(AEG)회사의 건축 고문에 취임해 근대 디자인을 주도하면서 더욱 발전했는데, 1914년에는 쾰른에서 최초로 공작연맹 전시회를 개최해 새로운 건축을 선보였고 이념논쟁도 벌였다. 1927년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바이센호프 집합주택단지 주택전시회를 개최하여 외국의 여러 선도적인 건축가들이 참가했다. 당시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은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근대건축을 수업했다.
아돌프 로스는 1908년 논문 〈장식과 죄악〉에서 그 시대 문화에 대한 조형적인 가치가 없는 장식은 죄악이라고 주창하며, 건축가들은 실제와 내용이 분리된 허구의 건축을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빈에 있는 슈타이너 주택(1910)은 그의 근대건축 이념이 표현된 대표작이다.
그로피우스는 1915년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1919년에는 이를 미술 아카데미와 통합해 바우하우스로 발전시켰다. 그는 수공예 방식보다는 예술과 공업과의 협력을 통해 조형예술을 종합화해야 한다는 건축과 건축 교육에 대한 확고한 사상을 확립하고 1923년에 건축선언문을 발표했다.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여 1925~26년 선구적인 새로운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신축한 바우하우스 교사를 통해 근대건축의 본보기를 보였다. 1928년에는 H. 마이어가, 1930년에는 미스가 바우하우스 교장직을 이어받았다. 미스는 자연적이며 우아하고 단순한 질서를 표현한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당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건축학교였는데, 그후 강제 출국당한 많은 바우하우스 교사들은 전세계에 바우하우스 교육원리를 전파했다.
그로피우스는 1934년 영국으로 이주했다가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에서 M. 브로이어와 함께 바우하우스 교육이념을 교과과정에 도입했다.
프랑스에서는 T. 가르니에가 재료·구조·구성 등을 새로운 경향으로 개척하고, 1901~04년에 ' 공업도시계획안'(Cité industrielle)을 제안하고 1917년 이를 발간했다. 그는 근대건축, 근대도시를 위해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1903년 A. 페레는 파리의 프랑클랭가(街) 공동주택에서 철근 콘크리트의 기술적인 가능성을 과시했다.
한편 미래파 운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건축가 산텔리아의 미래도시 설계가 1914년 밀라노에서 전시되었다. 그는 도시는 새로운 기술 시대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래도시에 대한 확고한 환경을 제시할 것을 역설했는데, 1914년 ' 미래파 건축선언'으로 발표되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1920~25년경에 전개된 표현주의 건축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제2제국의 붕괴에 따른 혼란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술의 내적인 느낌을 철·유리·콘크리트를 사용해 표현하는 조형적인 외부형태를 추구했다. 관련 건축가는 B. 타우트, E. 멘델존 등이다.
1917년 레이덴에서 조직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은 예술 및 디자인 운동으로서,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 서로 직교하는 직선과 단순하고 명확한 표면을 사용하며 더욱 추상적인 건축 형태 언어의 순수성을 추구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건축가는 J. J. 오우트, G. 리트벨트 등이다. 위트레흐트에 세운 리트벨트의 슈뢰더 저택은 데 스테일의 건축 내용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건축의 이론적인 기초가 된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1923)를 발간하고 국제주의 건축을 지지했다. 그는 주거·도시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볼셰비키 혁명 후의 소련은 1920년 V.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결성 이후 건축 모델은 자연보다는 기계적인 미학임을 주장한 구성주의 건축이 대두되었으나 1930년대에 스탈린 정부가 근대건축을 싫어하여 고전적이고 기념적인 건축 양식을 채택하자 쇠퇴했다.
1930년대 이후 근대건축은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토목 분야에서는 R. 마야르의 아름다운 구조미를 보여주는 철근 콘크리트 교량들이 건립되었으며, 핀란드에서는 A. 알토가 지역에 맞는 근대건축을 전개했다. 미국의 시카고파 제2세대로는 F. L. 라이트가 가장 대표적인데, 그는 초원의 건축을 통하여 건물이 들어설 대지·지역·구조·재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축 배치와 평면, 특성 있는 공간주제 등이 돋보이는 유기적 건축을 설계했다. 그의 후기 작품인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낙수장(1936)은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총서 제1권으로 발간한 〈국제주의 건축 Internationale Architektur〉(1925), 193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근대 건축 전시회, 그리고 H.히치콕과 P. 존슨이 같이 쓴 〈국제주의 양식:1922년 이후의 건축 International Style:Architecture Since 1922〉의 발간은 근대건축의 국제화를 가속시켰으며, 기능주의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입체파와 신조형주의 회화가 지닌 미학의 영향을 받은 기능주의 건축가들은 건축 역사를 배제하고 장식을 거부하며,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의 기능과 기계미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건축가는 발터 그로피우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리처드 노이트라, 필립 존슨 등이다(→ 국제주의 양식).
미스는 초기에는 실제 작품보다 사무소 건물 계획안(1919), 유리 마천루(1921), 일련의 벽돌조 전원주택안(1923) 등의 계획안으로 그의 건축방법을 탐구하여 제시했으며,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 독일관(1929)은 근대건축에서 기억될 가치를 지닌 중요한 건축이다. 1937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일리노이공과대학에서 건축교육을 하며 시카고를 중심으로 철과 유리로 된 격자형 입방체 형태의 건축을 추구했다.
1933년 이후 독일·이탈리아·소련을 탈출한 건축가들의 미국 유입으로 미국은 국제주의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합주택안을 제시한 도미노 주택 계획안(1914~15), 시트로앙 주택안 전시(1922), 새로운 건축의 5가지 요점의 제시(1926), 국제연맹 설계경기 응모안(1927), 사부아 주택(1931) 등으로 근대건축을 체계적·논리적으로 전개했다.
근대건축국제회의(CIAM)는 S. 기디온, 르 코르뷔지에 등을 중심으로 1928년 스위스의 라사라즈 제1차 회의에서 결성되어 아카데미즘에서 건축을 해방시키고 건축과 도시 계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미학과 환경을 창조하기 위한 근대건축운동을 전개했다. 그후 1959년, 10차 회의를 끝으로 해체할 때까지 진보적인 건축가들 사이의 국제적인 교류를 활성화하며 근대건축과 도시계획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토론하고 주장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근대건축가인 그로피우스, 미스, 르 코르뷔지에, 라이트, 알토 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배적인 건축가로 활동했다. 또한 근대건축국제회의 해체 이후 J. B. 바케마, A. 반 아이크, 스미스슨 부부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 팀 10'(TEAM 10)에 참여한 건축가들은 근대건축에 회의를 품고 이를 보완, 발전시키는 새로운 건축을 시도했다. 1960년에 결성된, 아키그램을 중심으로 활동한 P. 쿡(1936~) 등의 건축가들은 잡지 〈아키그램 Archigram〉을 통하여 '가동적 개념'을 도입한 건축을 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축에서는 상업 및 산업 사회의 상징으로 사무소 건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뉴욕 시에 있는 '스키드모어-오윙스-메릴 사무소'의 레버 하우스(1952), 미스의 시그램 빌딩(1954~58) 등이 대표적이다. 1952년경부터 근대건축의 전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근대건축이 추구한 기능주의, 국제주의 양식에서 기념적인 형식주의로 바뀌면서 건축가들은 조소적인 형태와 공간 처리에 큰 관심을 가졌다.
라이트의 뉴욕 시 구겐하임 미술관(1956~59),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 아파트(1946~52)와 롱샹의 교회(1950~55), 라투레트 수도원 (1957~60), 우트손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1956~73), 사리넨의 T. W. A. 공항(1956~62)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루치우 코스타, O. 니마이어 등 남아메리카의 건축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즈음 활동한 근대건축의 다음세대 건축가로는 J. L. 세르트, E. 사리넨, L. 칸, I. M. 베이, P. 존슨, 단게 겐조, K. 로치, C. 펠리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규모가 큰 많은 건축물들은 거의 모두가 문화 센터, 교육기관, 연구기관의 발주로 지어졌다. 예를 들어 한스 샤룬의 베를린 필하모니 홀(1963), 루이스 칸의 리처드 의학연구소(1960), 예일대학교 브리티시 미술관(1969~74), 폴 루돌프의 예일대학교 건축학부 건물(1963), 렌초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퐁피두 센터(1971~77), J. 스털링의 슈투트가르트 미술관(1980~83) 등이 있다.
다른 한편 항공교통, 박람회, 운동경기장 건축 등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건축의 발전에 기여했다. 단게 겐조의 1964년 동경 올림픽 체육관, 사리넨의 댈러스 공항, F. 오토의 몬트리올 박람회 서독관, B. 풀러의 미국관, M. 사프디의 주거관 67(Haitat 67), 그리고 오사카 엑스포 1970 등이 대표적이다. 고도로 발달한 건축구조 개념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건축을 탐구한 건축가로는 이탈리아의 P. 네르비, 미국의 풀러, 스페인의 E. 토로하와 F. 칸델라, 독일의 오토 등이 있다.
현대건축(탈근대건축)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건축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 색인 : 포스트모더니즘). 이러한 경향은 특히 미국에서 관련 저술의 발간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J. 제이콥스는 〈위대한 미국 도시의 죽음과 삶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1961)에서 근대건축의 이상향에 의한 도시의 파괴를 지적했으며, R. 벤투어리는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1966)에서 근대건축이 상실한 건축의 상징성과 의미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며, 이는 근대건축이 너무 단순하고 순수한 것만을 추구하며 디자인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성을 지닌 건축을 만들 것과 상업건축도 건축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것을 주장하며, 건축에 역사적인 양식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야마사키가 설계한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프루트 이고우 아파트의 폭파 철거(1972)는 근대건축의 종말을 알리고 탈근대건축이 대두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탈근대건축가로는 C. 무어, M. 그레이브스, R. 스턴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P. 존슨이 설계한 에이티앤드티(AT&T;) 빌딩(1978~84)과 그레이브스의 포틀랜드 공공사업 건물(1980~82)은 탈근대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거의 모든 탈근대건축가는 실제로 근대건축가들에게 건축 수업을 받으며 훈련을 받았거나 근대건축가로 건축을 시작했기 때문에 탈근대건축에는 근대의 건축 내용이 많이 계승되어 있다.
또다른 탈근대 계열로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이성주의 건축가들이 있다. 이들은 도시 구조와 환경을 새롭게 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주었는데, 상업주의와 근대건축으로 파괴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도시를 역사 속의 도시와 건축의 유형에서 그 단서를 찾아 건축의 고유한 자율성 위에서 건축을 한다. A. 로시의 〈도시의 건축 L'architettura della città〉(1966)은 이러한 건축이념을 나타낸 대표적인 저술이다.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A. 로시, O. M.웅거스, L. 크리어, 그리고 스위스 티치노 지방에서 활동을 하는 M. 캄피, M. 보타를 들 수 있다.
그외에도 근대건축 이후에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C. 스칼파, R. 마이어, P. 아이젠만, H. 홀라인, 마키 후미히코, 이소자키 아라타, N. 포스터, F. 게리, R. 크리어, R. 보필, H. 얀 등이 있다. → 건축
Macropaedia | 이상해(李相海)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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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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