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다소(茶所)의 고찰
동복현의 와지다공리와 평교 다촌을 중심으로
공동연구|이형석 가천길대ㆍ본지주간·박용구 경북대 교수 ·김정운 보성 차시험장
1. 취지 및 필요성
우리나라 차의 역사적 산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지리지'나 <고려사>의 '식화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수록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 이후에 차의 산지가 적힌 문헌으로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 <여지도서>, <여재촬요>, <대동지지>, <고사신서>, <임원십육지> 등이 있다.
모로오까(諸岡 存)박사는 그가 지은 <조선의 차와 선>에서 '조선의 차는 거의 사원차이다. 그리하여 불교 특히 선(禪)을 떠나서는 차란 없는 것이어서 지금도 남한지역에서 발견되는 자생차는 모두가 사원부근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할 일이다'고 기록하였으나 김명배는 그가 지은 <다도학>에서 '한때 절에서 술을 빚거나 종이를 만들어 바치기는 했어도 절에서 쓰일 차나무 재배 이외에 나라에 차를 바치게 하는 제도나 법규도 없었다. 다만 나라에 차를 공급하던 곳은 '다소'라는 곳으로 이는 지방제도의 일환이었다'고 이를 부인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동복현의 와지다공리(瓦旨茶貢里)와 평교 다소에 대하여 현재의 지명과 다소의 역할, 현재 유물, 유적이 남아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소(所)제도의 고찰
고려시대 특정한 공물을 생산하던 소(所)제도는 향(鄕), 부곡(部曲), 장(莊), 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지역을 구성한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다소를 비롯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지소(紙所), 자기소(磁器所), 염소(鹽所), 묵소(墨所) 등이 있었다.
'소제도'는 향, 부곡이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들어와 특정의 공물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된 제도로 추정된다. 소의 주민은 특정 생산물을 직접 생산하는 전문기술자인 장인(匠人)과 이의 생산을 돕기 위해 생산과정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은호(銀戶), 염호(鹽戶), 묵호(墨戶) 등으로 구성되었다.
소의 주민은 반역 등의 행위로 주거민 전체가 집단적으로 특정한 역(役)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보다는 수령과 향리들이 특정물품의 생산을 위하여 주변의 촌락민들을 요역의 형태로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따라서 요역에 동원되는 기간 외에는 일반 농민들처럼 토지경작에 종사했다고 본다. 또 소가 일반 군현과 구별되고 그 거주민이 지는 역이 과중하여 일반 군현과 차별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고려 정부는 소민이 특별한 공을 세웠을 때,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기도 했으며 고려 무인집권기인 1176년(명종 6) 공주의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를 중심으로 하여 반란이 일어났을 때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켰고 몽골의 침입 때 공을 세운 충주의 다인(多仁) 철소를 익안현으로 승격시킨 것이 그 예이다.
소는 점차 없어져 조선 초기에 이르면 향, 부곡과 함께 소멸되어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때는 고적조(古蹟條)에서나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소민이 졌던 기능은 조선의 신량역천(身良役賤) 계층인 간척지도(干尺之徒; 고려-조선초기의 鹽干, 烽火干, 水站干 등과 津尺, 水尺, 禾尺 등의 계층)에게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3. 우리나라 다소의 고찰
1486년(조선 성종조) 노사신 등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무안현'편에 '다소(茶所);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는 다소에 관한 기록이 보이며 같은 책 '동복현'편에 '와촌소(瓦村所);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1485년(단종2)에 편찬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나타난 다소(茶所)는 '전북 무장현에 2, 전남 장흥도호부에 13개소 여기에 동복현에 1개소를 포함하여 16개소가 설치 운영되었다'고 하며 이 외 <동국여지승람>, <동국이상국집>에는 '남평현에도 1 개소가 있다'고 한다.
1984년 김명배저 <다도학>에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근거하여 경상도 2개 처(화개-화개. 평교-언양), 전라도 18개 처(동복현의 와지다공리, 무장현의 용산ㆍ재역, 남평현, 장흥의 요량, 수태, 칠백유, 정산, 가을평, 운고, 정화, 창거, 향여, 웅점, 가좌, 거개, 안칙곡 등)으로 정리, 기록하였고 다만 '화개다소는 화개부곡(花開部曲)이었으므로 신라시대 부터의 다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4. 동복현의 와지다공리 다소
① 지명유래 / 동복현(同福縣)은 본래 백제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동복현으로 고쳐서 곡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와천리(瓦川里)는 와촌(瓦村, 지와물)과 모로내(毛老川)의 합성어에서 와천리(瓦川里)로 변하였지만 지금은 동복댐 수몰로 모로내는 없어지고 와촌만 남아 지금의 와천리 마을이다. 화순 <마을유래지>에는 고려시대에 와촌소(瓦村所)가 있으며 1789년 <인구총수>에는 동복현(同福縣) 내북면(內北面) 와촌(瓦村), 모로천리(毛老川里)로 기록 되어있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동복군 내북면(內北面) 상와리(上瓦里), 하와리(下瓦里), 모로리(毛老里)로 기록 되어오다 1932년 행정 개편에 따라 화순군 북면 와천리(瓦川里)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곡리(多谷里)는 상다리(上多里), 하다리(下多里)의 다(多=茶)자와 웅곡(雄谷)마을의 곡(谷)자를 취하여 다곡리라 하였는데 마을 유래지에 보면 '상다(上多), 하다(下多)마을은 원래 다소가 있는 마을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789년 <호구총수>에는 동복현(同福縣) 내북면(內北面) 상다촌(上多村), 하다촌(下多村)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3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의 화순군 북면 다곡리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조사는 보성 차시험장 김정운과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이다.
② 다소의 위치 / 와촌(瓦村)에서도 초기에는 기와를 만드는 와기소로 운영되어 오다가 고려중엽부터 조선 초기에 차를 생산하는 다소로 운영되어 왔다.
와지다공리 다소가 있었던 와천리와 다곡리는 화순군 북면에 위치하며 이 마을은 서로 인접한 마을로 몇 개 마을이 서로 합쳐져 이루어졌다.
③ 차나무와 유적 / 와지다공리 다소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화순군 북면 와천(瓦川)리와 다곡(多谷) 마을이 있는 주변에 차가 심어져 있는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다. 다곡마을의 바로 뒤산 너머에 있는 직선거리로는 약 1km 정도의 거리인 동복면 안성리에 소재하고 있는 곳에 약 1ha 규모의 야생차밭을 발견하였다.
그 외에도 이곳에서 가까운 동복현(同福縣)내인 칠정리, 구암리, 연월리, 신율리 탑동부락 등 곳곳에서 차 야생지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다곡마을의 산너머 뒷산인 동복면 안성리 야생 차밭은 지금은 보병학교 유격훈련지로 지정되어 있어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으나 차밭이 잡목림에 혼재(식생밀도 6주/평) 하고 있다.
이 곳이 '와지다공리 다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70년대 제다 업체들에 의해 많은 양의 야생 차잎을 이곳에서 매년 수집했다'고 한다.
다소가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있는 다곡(多谷)삼거리는 국도 15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그 옆에 폐교가 된 있는 다곡(多谷)초등학교 터가 남아 있다.
5. 평교(坪郊) 다소
① 근거자료 / 통도사의 역사와 경계(사방경계 4만 5천 보)를 표시하고 비보(裨補)하는 장생표(長生標; 國長生石標)를 기록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舍利袈裟事蹟略錄; 1705년 민오작성)에 '절 북쪽에 동을산(冬乙山)이 있는데 장생표 하나를 두었다. 동을산의 차마을(茶村)은 차를 만들어 절(통도사)에 바치던 곳이다. 차아궁이와 차샘(茶泉)이 지금도 오히려 남아 민멸(泯滅)하지 않으니 후세사람들이 다소촌(茶所村)이라 하였다.
사방 장생표지기의 직위별 논밭은 동남쪽의 동네와 북쪽의 차마을인 평교(坪郊)에 나뉘어 엎드렸으니 거화군(居火郡; 현 언양)의 경계이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장생표는 도합 12개를 세웠다.
② 지명유래 / 통도사가 위치한 경남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는 불로초로 일컫는 영지(靈芝)와 관련된 이름으로 지산(芝山), 지산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서리동을 병합, 지산리가 되었다. 북쪽에는 취서산, 동쪽에는 순지리, 남쪽에는 초산리가 위치한다.
위 글에서 '평교'는 현재 평산(平山)으로 추정되는데 평산은 본지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 서리(당전, 당앞)의 서남쪽에 있는 중마을(平山)이다.
현 울주군 언양면에는 다개리(茶開里), 다개지(茶介池) 등의 땅이름이 남아 있다.
③ 차나무와 유적 / 통도사 일대는 차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는데 통도사 금강계단(일반인 출입 통제)의 차나무는 높이가 3m70cm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들게 키가 큰 차나무이다. 이 조사는 박용구교수와 합동으로 조사, 계측한 결과이다.
하북면 백록리에는 '통도사 국장생석표'(보물74)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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