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1. 김치 이야기
채소류는 일반적으로 육질에 즙이 많고 특유한 향미를 가져서 우리의 기호성을 충족시키고 식욕을 증진 시킨다. 이러한 채소류는 수확 후 저장 중 호홉작용과 미생물의 작용 등으로 인하여 장기 저장이 어렵다. 따라서 저장성을 향상시키고 향미를 개선할 목적으로 소금, 식초, 간장 등에 절여 염분을 침투시키고, 효소나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숙성된 식품을 제조하는데 이를 '절임식품'이라고 한다. 절임식품은 세계 여러 민족의 식단에 공공연히 존재한다. 중국의 파오 차이, 일본의 즈게모노, 서양의 피클 등이 모두 이러한 채소절임식품이다. 그러나 이들은 김치와 비교해 아주 단순한 발효식품이라 하겠다. 김치는 단순한 발효식품의 단계를 넘어 다양한 맛으로 발전하였다. 김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절임식품으로 쌀 위주의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식 중의 하나이다. 김치는 소금에 절인 배추나 무, 오이 등의 채소에 젓갈류, 양념 및 향신료 등을 가미하여 일정기간 숙성 발효시키는 복합 발효식품으로써, 독특한 향미를 지닌 한국의 전통적인 발효식품이다.
김치의 유래
서양의 피클이나 일본의 즈게모노를 먹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우리 김치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채소절임음식이라는 기본적인 조리원리는 김치나 즈게모노, 피클이 모두 비슷하다.
채소절임음식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면서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음식이다.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영양 생태적으로 채소음식 섭취가 필수적이다. 곡물에 부족한 비타민 A와 C를 채소에서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경험적 방법에서 나온 영양학의 지혜이지만, 채소를 맛있게 먹기 위해 날 채소를 먹지 않고 절임을 한다는 사실은 매우 이상적이다. 인간이 날 채소를 많이 먹기는 어렵다. 채소에 맛을 들이는 방법 중 하나로 소금이나 식초에 절이고 이를 발효시켜 맛을 내는 법을 인간들은 발명하였다. 김치는 대표적인 채소절임음식이다.
외국인들은 김치를 빨간색의 매운 채소음식으로 여긴다.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있는 김치에 대해 그런 관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소금에 절이는 기본제법은 다른 채소 절임 음식과 같다. 그러나 마늘, 파, 생강, 고추와 같은 양념이 들어가고 젓갈이 김치맛을 낸다. 고대 김치의 모습은 오늘날의 이런 김치와 확연히 달랐다. 적어도 임진왜란 후 고추가 수입되기 전까지는 김치는 단순히 소금에 절인 음식이었다. 농업기술의 발달과 각종 내, 외부요인으로 인하여 오늘날의 김치로 변한 것이다.
김치의 기원
인류가 발명한 음식저장방법 중 가장 오래되었고, 성공적인 것은 음식을 소금 같은 매개물로 절이는 방법이다. 채소를 오래 저장하는 데에도 이러한 절이는 방법이 매우 유용 하다. 채소를 절이는 음식 중 대표적인 것이 김치이다. 김치라는 말은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나왔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침채라는 말은 '채소를 절인다'는 뜻이기에 김치는 '채소절임음식'을 총칭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채소절임음식-김치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치에 관한 첫 기록은 2600∼3000년 정에 쓰인 중국 최초의 『시경(詩經)』의 「소아(小雅)」편에 등장 한다. "밭두둑에 외가 열린다. 외를 깎아서 저(菹)를 담자."는 구절이 있는데, '저'가 채소절임음식, 즉 김치의 시조(始祖)다.
『여씨춘추(呂씨(氏)춘추(春秋)』에서는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는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말(韓末) 경의 사전인 『석명(釋名)』에도 '저'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석명』에는 김치에 대해, "채소를 소금에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의 짓무름과 부패를 막는다."라고 풀이했다. 여기서 '저'가 채소를 젖산 발효시켜 저장해 온 산미 가공 식품 이었음 을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때의 『주례천관염인(周禮天官鹽人)』에도 순무, 순채, 아욱, 미나리, 죽순, 부추 등의 칠저(七菹)를 담가 관리하는 관청에 관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경』의 연대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2000년대 유물 중, 볍씨와 함께 박씨, 오이씨 등이 경기도 일산에서 출토됐다. 중국의 중원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오이를 비롯한 다른 야채류를 재배해 '저'와 같은 발효식품으로 간수해 먹은 것이라 추축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음식에 관한 서적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 문화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일본 문헌을 근거로 그 시대의 식생활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의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나 평안시대(平安時代, 9 00∼1000년 경) 문헌인 『연회식(延喜食)』에 의해 소금, 술지게미, 장, 초 느릅나무 껍질, 대나무잎 등에 쟁인 절임류가 삼국시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지 외 파, 미나리, 순무, 생강, 산초 등을 소금 절임했고, 외나 생강으로 술지게미 담금도 했으며, 순무, 외, 동아, 가지 등을 된장이나 간장에 담그기도 했다. 또 순무나 동아를 식초 절임하거나, 채소를 쌀겨와 소금에 쟁인다는 기록도 있다. 쌀겨로 담그는 김치는 500년 경의 중국의 식품서인『제민요술(齊民要術)』에도 나와 있다.
일본은 덮고 습하기 때문에 쌀가루로 담근 김치가 쉽게 산패하므로 쌀겨, 곡물 지게미와 껍질 등을 많이 썼다. 그래서 일본 김치의 대표인 단무지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단무지의 원조는 '조강지'라는 것으로, 그 말의 기원이나 뜻은 분명하지가 않다. 일본의 옛 사서(史書)인 『고사기(古事記)』에 오진텐노에 구다라징(百濟人)인 '조강'이 건너와서 누룩으로 술 빚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강지는 옛날 중국에서 백제로 전해졌고,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당시 백제에서는 조강지 뿐만 아니라 각종 다양한 김치들을 먹었으며, 이는 삼국 모두 같은 경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식초와 소금에만 절이던 방법에서, 술지게미, 누룩, 곡물 껍질류에 채소를 발표시키는 것과 장(薔)에 절이는 방법들이 발달하게 됐다. 이런 발효의 지혜는 곡물, 채소, 생선을 버무려 삭힌 오늘날 함경도 지방의 '가자미 식해'와 '안동식해', '복어 식해' 등에 잘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김치에 관한 문헌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6대 임금인 성종(成宗)이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음식 중에 미나리, 죽순, 무, 부추 등으로 담근 김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중엽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가표육영(家圃六詠)」조에 오이,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의 여섯 가지 채소를 읊은 시가 있는데, 여기 김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장에 담근 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되네". 고려 때 김치로는 무장아찌와 무소금절임(짠지)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옆 이달충(李達衷)이 쓴 「산촌잡영(山村雜詠)」이라는 시에는 '여뀌'라는 들풀에 마름을 섞어 소금절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귀를 비롯한 들나물, 산나물 등의 야생초로도 김치를 담가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록만으로는 고려시대의 절임류가 오늘날의 김장김치, 순무 동치미, 짠지 등의 형태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무와 배추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고려 고종년간(1214∼1259)에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 배추, 즉 숭( )은 줄기가 짧고 잎은 넓고 두터우며 광대해 순무와도 비슷하나 실털이 많은 것으로 설명돼 있다. 당시 배추의 모양은 순무와 거의 같았다. 따라서, 순무, 무, 배추가 고려시대의 절임야채를 담근 주요 재료였음을 알 수 있다.
채소절임은 가장 단순한 식품학적 의미에서 채소를 저장하는 방법으로 소금이나 식초를 이용하는 원시농경사회 어디에서나 존재했을 가능성이 놓다. 이들 음식을 저장하는 토기 항아리가 세계 대부분의 고대문화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저'가 한반도로 일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단지 이런 중국의 알선 채소절임법이 보완적으로 소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의 채소절임류는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발전을 보인다. 임진왜란 후 고추가 수입되면서 현재의 김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김치의 발전
채소절임음식의 기원을 살피면서 고대 김치의 모습이 빨간색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어도 고려시대에 있었던 순무절임은 단순히 소금절임 음식임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면 지금 우리 김치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궁금해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도입되면서 소금물에만 담그거나 천초, 희향 등의 향신료에만 의지했던 김치 절임에도 고추를 첨가하게 되었다.
고추를 사용함으로써 김치의 부패를 방지하고 소금의 사용을 줄이는 효과를 경험하면서, 고춧가루를 넣은 수십 종의 김치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고추를 양념으로 사용한 김치가 나온 것은 고추 도입 당시가 아닌, 훨씬 후의 일이다. 이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담근 붉지 않은 김치가 주를 이루었다.
조선 중종 20년(1525년)에 간행된 『간이벽온방』에 '박딤'하는 것이 나오는데, 한자와 함께 쓰인 원문으로 "쉰 무수나 박딤칫구글집 안해 얼운이며 아폁螡돌히 다 하나 져거나머그라." 라고 돼 있다. 순무 나막김치의 국물을 어른 아이 대소 간에 모두 모두 마시라는 듯이다. '나막김치'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데, 순무 김치가 동치미형과 나막 김치형으로 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중엽 『주방문(酒方文)』에도 각종 채소절임류들이 나와 있다. 가지, 외 죽순을 후추, 마늘, 파 등의 양념에 무쳐 볶은 다음 끊인 간장을 부어 담근 '약지히', 생강을 식초로 절인 '생강침', 고사리를 소금에 절인 '팀고사리', 외, 가지, 무를 뜨거운 소금물에 담근 침채류, 청태콩을 소금에 절인 '청태침' 등이 있다. 어떤 절임류든 아직 고추를 쓰지 않았다.
1670년 경의 『음식디미방』은 안동 장씨가 지은 한글요리서로, 『규호시의방(閨壺是議方)』이라고도 한다. 동아를 절여 담그는 소금절이 김치나, 산갓을 단지에 담아 따뜻한 물을 부은 후 뜨거운 구들에 놓아 삭히는 김치가 나와 있다.
1665년 신속이 엮은 『농가집성(農歌集成)』에 「사시찬요시(四時饌饒草)」라는 월령식 농서가 들어 있는데, '침과저'와 '침즙저(간장에 담근 자지 짱아찌의 일종)'의 기록이 남아 있다.
1600년대 말엽의 『요록(要錄)』에는 열 한 종류의 김치류가 기록돼 있다. 이들 김치에도 고추를 사용한 흔적은 없으며, 무, 배추, 동아, 고사리, 청태콩 등의 김치와 무를 소금물에 담근 동치미에 대한 설명이 있을 뿐이다.
1715년 경 홍만선(洪萬選)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치선(治膳)」조에 김치류를 소개한다. 대부분 고추를 넣지 않고 소금 식초에 절이거나 향신료와 섞어 만든 것이다. 오늘날의 생선 식해와 비슷한 것도 나온다.
1766년 경에 나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는 영조 때 유학자 유중임(柳重臨)이 쓴 책이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가 나온다.
무짠지 담그는 「침나복함저법(沈蘿蔔鹹菹法)」에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 호박, 가지 등의 채소를 넣고, 고추, 천초, 겨자를 향신료로 섞어 마늘즙을 듬뿍 넣어 담근다"라고 되어 있다.
또 「황과담저법(黃瓜談菹法」은 '오이에 세 개의 칼질을 만들어 그 속에 고춧가루, 마늘을 넣어 삭이는 것'으로 오이소박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 문헌은 고추와 고춧가루를 김치의 양념으로 사용했으며, 마늘, 파, 부추 등도 주재료가 아닌 김치 양념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유득태(柳得泰, 1747∼1800)가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의 「잡저(雜菹)」에는 석밖지 만드는 법이 나와 있다. "끊여 식힌 새우젓 국물로 무, 배추, 마늘, 고추, 소라, 전복, 조기 등을 섞어 담근 뒤 저장하면 매운 맛으로 삭는다"고 했으며, 김치 만드는 데 젓국물과 조기 등을 넣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9세기에 접어든 우리 나라의 김치제조기술은 1872년 서유구가 지은 『임원십육지(林圓十六志)』로 집대성된다. 『임원십육지』 속의 김치들은 대부분은 『산림경제』나 『증보산림경제』에서 인용된 것이다. 재료나 종류에서 여러 채소들이 정리되고, 무김치류가 부상했다.
이후 1849년 홍석모가 편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당시 서울의 김장 모습이 잘 설명돼 있고, 1934년 방신영이 지은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서는 김치를 담그는 방법에 대해 현대식 조리 용어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김치가 완전 본류의 음식으로 다뤄진 것이다. 단순한 절임식의 김치에 고추, 파, 마늘, 생강과 같은 양념과 젓갈이 들어가고, 다양한 재료를 김치의 원료로 이용하는 변화는 17세기 말 ~ 19세기 말의 2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추가 김치에 쓰이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배추나 호박, 감자, 고구마와 달리 고추는 향신료이기 때문이다. 고추가 김치에 쓰이게 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농업기술의 변화, 홍수나 가뭄의 빈번과 같은 자연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기근의 빈발이 내부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때부터 김치는 현재의 우리 김치의 모습으로 확연하게 달라졌던 것이다.
'음식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떡 이야기 (0) | 2009.09.26 |
---|---|
고려 다소(茶所)의 고찰 (0) | 2009.09.25 |
전통차 (0) | 2009.09.25 |
[스크랩] 고려시대의 차종류 (0) | 2009.09.25 |
중국의 다문화 (0) | 2009.09.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