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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고려시대의 상업과 무역

by 8866 2009. 7. 30.

 

고려시대의 상업과 무역

 

고려의 상업

 

개경에는 시전을 설치하여 부귀층이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개경, 서경, 동경 등...큰 도시에는 관영상점을 두었다. 개경의 시전은 태조 2년에 처음 설치되어 경시서의 감독을 받았으며 상설시장으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였다. 시전은 국가가 지어 상인이게 대여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관부나 지배층 사원과 연결된 상인들이 상업활동을 하였다. 시전 상인외에 장작감과 같은 정부관청에 드나들면서 물품을 조달하는 어용상인도 있었다. 시전 상인은 도시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판매하였는데 주로 중앙지배층. 사원 등을 주요 소비층으로하는 고급상품을 조달하였다.
서경에도 시전과 비슷한 상가가 존재. 숙종7년[1102]에는 서경의 습속이 상업에 힘쓰지 않아 그 이득을 얻지 못한다는 이유로 화천별감을 파견하여 시장을 감독하고 상업을 장려하였다.
지방은 상업이 크게 번창하지 못햇고 수도 개경에 재화가 집중되었다,

 

1. 고려의 무역 활동 
(1)
예성강의 하류에 있었던 벽란도는 수도인 개경에 가깝고 비교적 물이 깊어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있어서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2) 개경에서도 수백 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 활동을 하였다.
(3)
고려는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와는 육로를 이용해서, ,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 일본과는 바닷길을 통해 교역하였다.
(4) 아라비아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동서 문화 교류에 공헌을 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나라를 거쳐 고려까지 왔는데 이들의 왕래와 소개에 의해 고려라는 이름이 서방 세계까지 알려져 외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5) 고려의 무역품

 

 

수출품

수입품

송나라

  , , 나전 칠기, 화문석, 종이

  비단, 약재, 서적, 악기

요나라(거란)

  곡식, 문방구, 구리 ,

  털가죽,

금나라(여진)

  곡식, 철제, 농기구, 무기, 포목

  은, 모피,

아라비아

  고려라는 이름이 알려짐

  수은, 향료, 산호

 

 

무역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이 매우 활발하였는데...고려 조정에서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조공무역 외에도 私商활동도 매우 활발하였다.
송과의 무역은 조공무역과 민간무역으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조공무역은 조공품과 회사품의 형식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양국간에 교류되었던 국산물은 그 품목이 30가지가 넘고 물량면에서도 막대하였다. 문종 32년 6월 송나라 사신이 왔을 때 가져온 물품은 국왕의 옷 두벌....허리띠 2개, 채찍 2개 금으로 꽃을 수놓은  은그릇과 여러가지 빛깔로 된 천금이 100필...색깔이 다른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이 100필...광종13년부터 명종 3년 사이에 고려 사신이 송에 간 것이 약 60회이며 송의 사신이 고려에 온 것이 약 30회였다.

민간무역은 공적인 조공무역보다 훨씬 더 활발하였다. 현종 떄부터 빈번해져서 문종 때 가장 활발하였다.
수출품- 금.금은기구, 화문릉, 세저, 생포, 인삼, 문피, 백지, 향유, 송자, 화문석, 나전, 장도, 지필묵, 선 등...
수입품- 의대, 안욕, 채단, 칠갑, 옥, 금은기, 금상, 차, 향료, 약재, 서적, 악기, 화폐, 상아, 공작 등...
고려의 수출품인 종이는 송의 수도 항주는 물론 장강 유역 안쪽까지 널리 유통되며 중국인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송상의 무역활동은 상품을 고려왕에게 헌납하고 그에 더하여 무역허가와 회사를 받는 사헌 무역 형태를 취했다. 반대로 고려 상인들이 송나라에 가서 무역활동도 했다. 고려 상인들이 머무르던 객관이 송나라 때 있었다.

거란과는 조공무역이 중심이 되었다. 거란 사신의 객관으로 양은관. 인은관,  선은관이 있었다. 조공무역으로는 수출품- 금, 은, 동, 표면류, 화문석등...공예품과 문방용품 및 인삼, 차 등... 수입품은 말, 양, 능라...거란판 대장이 다수 입수되었다.
여진의 경우: 문종 27년 7월. 지즐촌. 나발촌. 료와촌. 대신촌, 서호촌, 무주기촌등...부락 번장이 토산물과 명마를 바쳤다는기록이 있다. 금 성립 전부터 교류가 있었는데 금이 성립된 이후 공무역이 중심 일부는 사무역을 하였다. 금나라에 파견되는 사행은 큰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에 다투어 파견되기를 희망하였다 명종13년 8월 기록에 그런 내용이 있다. 국경선 부근에 각장을 설치하여 교역을 하였는데 압록강 방면으로는 의주, 정주동쪽으로는 정평과 청주에서 각장 무역을 하였다. 각장 무역이 주는 경제적 이익은 국가재정으로나 상인 개개인들에게 대단한 것이어서 왕실에서도 이 각장에서 무역을 했다. 각장에서 고려의 쌀과 저포가 金측의 견사나 비단, 은 등과 교환되었는데 북방 국가의 정권 교체로 변방이 혼란스러울 때 고려의 미곡은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고려 무역 활동의 특징 : 육로보다는 해로를 이용.

개방적인 무역활동을 하여서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하였다는 점.

 

무역항 : 예성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는 벽란도.

원래는 예성항으로 불리었으나 그 곳에 있는 벽란정이라는 곳의 이름을 따 벽란도라 하였으며 수심(물의 깊이)이 깊어 배들이 왕래하기가 쉬어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교역품

 

[가죽 皮] 고려전기부터 곰가죽, 소가죽, 표범가죽 등은 중요한 공부(貢賦) 품목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원 간섭하에서는 처음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의 일방적인 강제교역이 이루어졌으나 대외원정이 마무리 된 뒤에는 왕이 원을 방문하거나 사신의 교환을 통한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민간차원에서 행해졌으며, 문종 10년에 일본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자못 활발해 졌다. 그러나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상인이나 지방세력들이 進奉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려의 상인들도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하였으나 왜구침입 이후에는 거의 단절되었다.
2) 주요 내용 : 가죽은 갑옷뿐만 아니라 다래 등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고려전기부터 곰가죽, 소가죽, 표범가죽 등은 백성들이 바치는 중요한 공부(貢賦) 품목이었다. 그리고 거란과는 공식적인 무역은 없었지만 민간을 통해 모피를 수입하고 있었다. 여진의 경우에도 그들이 고려에 바친 중요한 방물을 보면 수달피와 다른 짐승의 가죽이 들어있다. 그리고 송나라 상인들이 고려로부터의 수입품 가운데 금ㆍ은ㆍ동ㆍ인삼 과 함께 물소가죽, 표범가죽 등이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고려의 가죽은 중요한 무역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에서 각종 가죽을 고려에 요구하였으며, 고려정부는 민가에서 가죽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고려왕이 원나라에 방문하여 방물을 바칠 때의 주요 물품 가운데 곰가죽, 표범 가죽과 수달피 등이 들어 있어 고려의 가죽이 원에서 귀중한 물품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화 高麗貨] 요의 호시에서 교역되던 고려의 물품을 통틀어 말함

 

요나라 때 웅주(雄州),고창(高昌),발해(渤海)에 호시(互市)를 세워 송(宋)과 서북제부(西北諸部), 그리고 고려의 상품을 교역하였는데, 왕래하는 상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음을 『요사(遼史)』식화지에서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여진(女眞)이 금,백(帛),포(布),밀납(蜜蠟),약재를 가지고 왔고, 철리(鐵離),말갈(靺鞨),우궐(于厥) 등의 부(部)가 진주(蛤珠 : quahog pearl)와 청설모(青鼠),담비(貂鼠),교어(膠魚)의 가죽, 소,양,낙타,말,모직물(毳罽) 등을 가지고 요나라에 와서 교역하였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어떤 것이 고려의 상품이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술은 없다.

 

[공평포 貢平布] 요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보통 베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거란(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고려시대에 공물로 바치는 보통 베를 말한다.
1066년(문종 20) 6월에 여러 주현(州縣)에서 해마다 바치는 공물의 일부인 소가죽, 힘줄, 뿔을 평포(平布)로 환산하여 대신 바치도록 하고 있고, 1114년(예종 9) 10월에는 왕명으로 공중포(貢中布) 1필은 공평포(貢平布) 1필 15척(尺), 공모시(貢紵布) 1필은 공평포 2필, 공면주(貢緜紬) 1필은 공평포 2필로 환산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궁전기장 弓箭器仗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요의 공식 회사품 중 하나로 활과 화살 등의 무기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거란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가운데 하나로 활과 화살 등의 무기를 가리킨다.
기장(器仗)은 기장(器杖)이라고도 하며, 무기의 총칭이다. 요나라는 모두 2벌을 회사하고, 고려사절에게도 1벌을 하사하였다. 사절에게 하사한 것의 명칭은 궁전기(弓箭器)로 ‘장(仗)’자가 빠지고 없다.

 

[금 金]  교환수단으로 사용

 

금은 그 아름다운 색채와 희귀성, 그리고 불변성으로 인하여 문명의 발상과 역사를 함께 하였다고 일컬어질 만큼 일찍부터 사랑받아 왔다.  금은 곧 권력과 부귀의 상징으로 신의 영광에 대한 표현으로, 또는 사후세계의 장식으로 각지에서 독특한 문화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고대에 금은 주로 공예품,장식품,기명(器皿),불상 제작에 쓰였으며, 중국,일본과의 외교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는 금을 이용하여 화폐를 주조하기도 하였다.『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금에 대한 기사보다 유동(鍮銅)에 관한 기사가 많이 보이고 있으며,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지소금은다동(地少金銀多銅)’이라 하여 금의 산출이 많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어서 이미 이때에는 금의 사용이 흔하지 못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실제 유물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고려시대 금공기(金工器)의 명문(銘文) 가운데에 동종(銅鐘)을 금종(金鐘)이라 쓴 예가 많이 있어서 아마도 동종의 색깔에 따라 금종이라 지칭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정지원명삼존불상(鄭知遠銘三尊佛像)의 경우에도 조금상(造金像)이라 한 것을 보면 도금한 금공예품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금기(錦綺) 錦綺] 고려 사절단에게 준 요의 하사품(下賜物)의 하나로 여러 빛깔을 섞어 짠 무늬가 아름다운

비단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 사절단(使節團)에게 준 요나라 하사물(下賜物)의 하나로 여러 빛깔을 섞어 짠 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비단을 말한다.
요나라에서는 고려에서 파견된 사절단에게도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하사물을 주었는데, 공식사절에게만 이 비단 30필을 하사했다.

 

[금기(金器) 金器] 고려의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금으로 만든 기물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금으로 만든 기물을 말한다.
진상된 양은 200량(兩)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금포두(金抱肚),금초라(金鈔鑼)와 함께 포괄적인 의미의 금은 세공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금도안비마 金塗鞍轡馬 요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중 하나로 금칠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요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가운데 하나로 금칠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이다.
모두 2필(匹)이 회사되었는데 안장과 고삐 등의 구체적인 모양은 알 수 없으나, 함께 회사된 장식 없는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素鞍轡馬)보다는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거란에 진상했던 공물에도 금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 1필이 있었다.

 

[금도은대 金塗銀帶] 고려 사절단에게 준 요의 하사물 중의 하나로 금칠한 은허리띠

 

고려 사절단에게 준 요나라 하사물(下賜物)의 하나로 금칠한 은허리띠를 말한다.
요나라에서는 고려에서 파견된 사절단에게도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하사물을 주었는데, 공식사절에게는 이 은대 2개를 하사했고,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에게는 백은대(白銀帶) 1개를 주었다.

금안비마 金元沖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 하나로 금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금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이다.
당시 진상된 것은 금 50량(兩)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 1필로, 이에 대해 요나라에서는 금도안비마(金塗鞍轡馬) 2필과 소안비마(素鞍轡馬) 5필을 공식 회사품으로 주었다. 또한 고려사절에게도 안비마(鞍轡馬) 2필과 산마(散馬) 5필,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에게도 말 1필을 하사하였다.

 

[금초라 金鈔鑼]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금으로 만든 대야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금으로 만든 대야를 말한다.
초라(鈔鑼)는 사라(䤬鑼), 사라(沙鑼), 사라(鐁鑼)라고도 하며, 세수할 때 쓰는 그릇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구리(銅)로 만든 것을 쓰지만, 궁중용으로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당시 진상된 것은 50량(兩)짜리 금대야로, 금기(金器), 금포두(金抱肚)와 함께 포괄적인 의미의 금은 세공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금포두 金抱肚]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금으로 만든 허리띠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연감류함(淵鑑類函)』에 옥대(玉帶)를 옥포두(玉抱肚)로 부른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금으로 만든 허리띠(金抱肚)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상된 것은 50량(兩)짜리 한 개로, 금기(金器),금초라(金鈔鑼)와 함께 포괄적인 의미의 금은 세공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금흡병 金吸甁] 요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금으로 만든 병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거란(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금(金)으로 만든 병(甁). 그 구체적인 형태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제화폐로서 거란에 수출된 물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당시 대중국 조공품의 가장 대표적인 기본 물품인 금,은,동기(金銀銅器)의 하나이다.

 

[기악 妓樂] 고려가 요나라에 바친 여성가무단

 

994년(성종 13)에 고려가 요나라에 바친 여성가무단이다. 당시 요나라의 황제였던 성종(聖宗)은 이들을 물리치고 고려에 돌려보내서 『요사』의 논찬(論贊)에서 칭송받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宋,遼,金,元)과 모두 음악,무용 등에 능한 예인(藝人)들을 교류하고 있어, 당시 대중(對中) 외교에서 문화교류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사』 편집자들의 논찬(論贊)에는 여악(女樂)으로 기록되어 있다.

 

[뇌원차 腦原茶] 고려 중궁에서 음용하던 어용차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거란(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차(茶)의 한 종류이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뇌원차(腦元茶)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자료에 등장하는 뇌원차는 공을 세운 신하가 죽었을 때 하사하는 부의품(賻儀品)이나 장수(長壽)한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또는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물품으로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려 궁중에서 음용하던 어용차인 것으로 보인다.
가장 이른 기록으로는 989년(성종 8) 5월에 최승로(崔承老)가 죽었을 때 200각(角)을 부의품으로 하사한 것을 들 수 있고, 그 후 같은 성종 때 최량(崔亮)이 죽었을 때 1000각, 문종 때 80세가 넘은 국로(國老)인 최보성(崔輔成)과 조옹(趙顒)에게 각 30각을 하사한 기록이 보인다. 이 차를 세는 단위가 무게(斤)이 아닌 각(角)인 것을 들어 엽차(葉茶)가 아닌 떡차(餠茶 : 벽돌차)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고, 또한 차의 이름에 관해서도 용뇌(龍腦)를 섞어 만든 떡차라서 뇌원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전남지역에 있던 뇌원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능라채단 綾羅彩段 요나라에서 바친 사헌물로 능라와 채색비단

1095년(헌종 1) 5월에 요나라에서 동경회례사로 온 고수(高遂)가 개인적으로 바친 사헌물(私獻物)로 능라와 채색 비단을 가리킨다.

 

[대요사적 大遼事跡] 고려에서 만든 요나라와 관련된 사적을 모든 책

 

고려에서 만든 요나라와 관련된 사적을 모은 책의 이름이다.
『요사』 병위지(兵衛志)의 기록에 의하면, 요나라에서 입수한 이 책은 요(遼)와 동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고려와 여진 등의 군비 현황과 그 배치 상황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대요사적(大遼事蹟)』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지 大紙 고려와 요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종이의 한 종류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요(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종이의 한 종류이다.
고려지(高麗紙)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유명하여 중국의 문인들에게 그 수요가 많았다. 중국의 문인들 사이에 고려지(三韓紙, 白硾紙)을 구하고 증여하는 정황을 묘사한 시나 글들이 많이 보인다. 그 종이의 색깔이 하얗기가 명주와 같고 질기기가 비단과 같아서, 여기에다 글씨를 쓰면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다고 평하고, 중국에는 없는 귀한 물건으로 여겼다. 이외에도 금(金) 나라 장종(章宗)은 일찍이 염색된 고려의 청자지(靑磁紙)에 글씨를 썼고, 명초(明初)에 송렴(宋濂) 등이 『원사(元史)』를 편집(編輯)하며 고려의 취지(翠紙)를 택해서 책 표지를 장정하기도 했으며, 명(明)나라에서 『영락대전(永樂大典)』을 편찬할 때 사용한 종이도 고려지였다.
한편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종이는 누에고치로 만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의 종이가 닥나무를 베어다가 그 속에 있는 흰 껍질을 사용하여 찌고 다듬이질해서 비단같이 치밀하면서도 매끄러워 누에고치와 비슷하므로, 닥나무 껍질로 만든 것인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국에서는 불경지(佛經紙) 등의 용도로 자주 고려의 종이를 요구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지(大紙)가 어떤 종이를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폭이 넓은 큰 종이를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세지묵(細紙墨)으로 기재되어 있다.

 

[동기 銅器]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중의 하나로 구리로 만든 여러 가지 기물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구리로 만든 여러 가지 기물을 지칭한다.
고려사람들의 구리를 다루는 솜씨가 좋아 아름다운 동기를 제작하였으므로, 당시 중국에서 송,요,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송나라의 소식(蘇軾)도 고려 동기의 애호가였고, 채양향(蔡襄向)이나 증공(曾鞏)과 같은 사람들도 고려에 파견되는 사신들을 통해 구매를 특별히 부탁할 정도였다. 이와 다른 이유로는 당시 요,금(遼金)시대의 중국 북방에서는 구리가 부족해서 고려의 구리제품을 선호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금나라의 경우에는 1194년(명종 24)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하는 이들이 구한 고려의 동기(銅器)를 해당 관청에서 모두 사들이는 일까지 있었다.

등조기물 藤造器物 고려와 요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등나무로 만든 공예품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등나무로 만든 공예품(藤造器物)을 지칭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등나무자리인 등석(藤席)과 『고려도경』에 보이는 등나무광주리인 등비(藤篚)와 등준(藤尊)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표피를 제거한 등나무로 짜서 꽃이나 동물의 문양을 넣고, 안에다 적황색의 무늬 있는 비단을 대어서 만든 품질 좋은 등비(藤篚)는 큰 것과 작은 것 한 벌에 백금(百金) 1근이나 될 정도로 가격이 비쌌다. 따라서 요나라에 진상된 등나무 공예품 50가지는 앞에서 언급한 등비와 같은 고려왕실용 등나무 공예품이었을 것이다.

 

[말 馬] 고려시기 요,금과의 교역품의 하나로기제목(奇蹄目) 말과의 포유류

 

인간에게 중요한 가축의 하나로, 전세계에서 널리 사육되고 있다. 옛날에는 인간의 식량을 위한 사냥의 대상이었으나, 그 후 군마(軍馬)나 밭갈이에 이용되었고, 최근에는 주로 승용(乘用)이나 스포츠용으로 이용된다.
고려시기 말의 교역은 주로 북방민족과의 군수물자 획득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 고려와 여진족 사이의 교류는 금(金)이 성립하기 전부터 있어 왔다.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 온 것이 230여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하였다. 고려에서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으나, 안보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여진과 교역을 하였다.
여진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의 대부분이 군수품과 관련이 있는 갑옷,병기,기치,말 등의 품목이었다.

 

[매 鷹] 고려와 요,원간의 교역품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대표적인 고려의 진상품이다. 매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해에 나서 길들여진 것을 ‘보라매’라 하고 야생으로 여러 해 된 것을 ‘산진(山陳)’이라 하며, 집에 있으면서 여러 해 된 것을 수진(手陳)이라 하고, 흰 것을 송골(松鶻), 청색인 것을 해동청(海東靑)이라고 한다.
신라의 진평왕이 매를 놓아 사냥하기를 즐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매를 이용한 사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매사냥은 13세기 들어 고려가 원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욱 성행하였다.
고려인들은 매로 인하여 크나큰 고통을 겪었는데, 원이 고려를 복속한 뒤에 조공품(朝貢品)으로 매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1275년(충렬왕 1)에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지방의 역(驛)과 외군(外郡)에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응방을 경영하기 위하여 원에서 기술자인 응방자(鷹坊子 : 鷹坊人)를 불러오고, 지방의 응방에는 응방심검별감(鷹坊審檢別監)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매 잡는 일을 독려하였다. 고려는 원에서 매를 보내라는 요구가 잦자 1283년(충렬왕 9)에는 응방을 관장하는 응방도감을 두기도 하였다.
응방에서 길들인 매는 원뿐만 아니라 고려의 왕에게도 바쳐 매의 수요는 늘어만 갔고, 응방에 속한 관원들은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횡포가 극심하였다. 한편 반대로 원 황실에서 고려에 매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멥쌀 粳米] 국내에서 광범위하게 교역된 물품으로 요(遼)에도 부정기적으로 교역한 물품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가 횡진(橫進)한 품목 중의 하나로 멥쌀[粳米]를 뜻한다.
요,금(遼金)시대에는 고려에 부정기적인 사절인 횡선사(橫宣使)를 파견하곤 했는데, 이와 반대로 고려에서 부정기적으로 진상한 물건이 횡진물건(橫進物件)이다. 이에 대해 유목민족인 거란[遼]이 횡선사를 통해 그들의 토산품인 양(羊)을 보낸 것에 대하여 농업국인 고려가 농산물로 답한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지만, 사료상에는 횡선사가 가지고 온 하사품의 목록이 거의 기록된 것이 없고 1099년(숙종 4)에만 대장경[藏經]을 하사하고 있으므로, 고려의 부정기적인 진상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금나라의 경우는 횡사사(橫賜使)를 통해 고려에 양(羊)을 하사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요나라에 보낸 수량은 500석이다.

 

[면포 米] 국내외 교역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교역품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원 간섭하에서는 처음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의 일방적인 강제교역이 이루어졌으나 대외원정이 마무리 된 뒤에는 왕이 원을 방문하거나 사신의 교환을 통한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민간차원에서 행해졌으며, 문종 10년에 일본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자못 활발해 졌다. 그러나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상인이나 지방세력들이 進奉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려의 상인들도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하였으나 왜구침입 이후에는 거의 단절되었다.
2) 주요 내용 : 면포(綿布)는 목화로 부터 얻어진 면으로 짠 직물이다.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덕흥군에게 붙었다가 그가 패하자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서 돌아왔다. 문익점은 그의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자기의 외삼촌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심었으나 첫 해에 다 말라 버리고 몇 그루밖에 남지 않았다. 세 해만에 결국 재배에 성공하였고, 목화씨에서 실을 뽑고 켜는 물레를 만들어 냈다.
그 후 면포는 고려의 주요 의복 재료로 쓰였다. 면포는 또한 외국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고려 말에 명나라에 말을 바칠 때 그 가격의 기준을 면포로써 헤아렸는데, 대개 말 1마리를 면포 5필로 계산하였다. 원 간섭기 원과의 교역에서 고려는 금ㆍ은세공품과 자기ㆍ직물류ㆍ가죽 등을 주로 수출하였고, 반대로 원으로부터는 금ㆍ은ㆍ비단 특히 목면을 수입하였다.

 

[모시 苧麻] 모시풀의 인피 섬유로 제직한 직물

 

쐐기풀과에 속하는 모시풀의 인피 섬유로 제직한 직물을 지칭하며 저마(苧麻)라고도 한다.
모시는 우리 나라와 인도,중국에서 고대로부터 재배, 사용되었다. 모시는 섬세하거나 단아함, 또는 청아함을 복식미에서 중요하게 여긴 우리 민족이 많이 선호하는 직물이었다.
모시는 삼국시대 이래로 일정한 폭이 정해져 있었다. 여러 기록을 통해 분석한 결과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모시 제직 기술은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고려사』에는 혜종 때 진나라에 보낸 세저(細苧)에 대해 ‘마저여설(麻紵如雪)’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세저의 제직기술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세저뿐만 아니라 문저포(紋紵布),사저포(紗紵布)는 고려의 특산물로서 원나라에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원나라에서 이들 직물을 선호해 수출을 요구해 온 기록도 많다. 이와 같은 모시의 제직 기술이 뛰어나자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중요한 물품으로 취급되었다. 고려의 대표적 상인으로 꼽히는 손기(孫琦),충혜왕(忠惠王)은 원나라와의 무역에서, 이숭인(李崇仁)은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많은 양의 모시를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세저 이외에도 홍저포,황저포 등 염색 모시도 제조하였다. 모시의 생산 지역은 삼베의 전국 분포와는 달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매우 제한되어 있다. 특히 충청남도 지역의 모시가 품질과 제직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산의 세모시가 유명하다.

무회목도파 無灰木刀擺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무회목으로 만든 칼 진열대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무회목(無灰木)으로 만든 칼 진열대[刀擺]인 것으로 추정된다.
무회목은 불회목(不灰木)이라고도 하며,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불에 타지 않은 나무라하여 이름하였다고 한다. 파(擺)는 진열이나 배열한다는 의미의 한자이므로, 도파는 칼을 진열하는 진열대 내지는 거치대로 추정할 수 있으며, 모두 10개가 진상되었다.

 

[백면주 白綿紬]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흰 명주를 지칭한다.
면주(綿紬)는 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피륙을 말하며, 명주(明紬)라고도 한다. 당시에는 500필의 명주가 진상되었다.

 

[백은대 白銀帶] 요나라 고려 사절단에게 준 하사품의 하나로 은으로 만든 허리띠

 

고려 사절단에게 준 요나라 하사물의 하나로 은허리띠를 말한다.
요나라에서는 고려에서 파견된 사절단에게도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하사품을 주었는데, 이 허리띠는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에게 하사한 것이고 공식사절에게는 금칠한 은허리띠 2개를 주었다.

법청주초 法淸酒醋 제사용 술인 법주, 청주와 시큼한 맛이 나는 액체인 초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제사용 술인 법주(法酒),청주(淸酒)와 시큼한 맛이 나는 액체인 초(醋)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청주라는 이름을 가진 술은 찾을 수 없고, 고려에서 국가적인 제사용으로 쓰인 법주와 청주는 찾아볼 수 있으므로, 두 가지 술을 함께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초(醋)의 경우에도 고의서(古醫書)에 법초(法醋)와 청초(淸醋)가 모두 약재를 가공하는 데 사용되고 있어, 주로 의료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술과 초를 모두 합해 100병(甁)이 요나라에 진상되었다.

 

[벼루 硯] 문방사우의 하나로 완상품으로도 거래되었던 물품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2) 주요 내용 : 먹을 가는 부분은 연당(硯堂),연홍(硯泓)이라고 하고, 먹물이 모이는 오목한 곳은 묵지(墨池),연지(硯池)라고 한다. 그 형태는 원형부터 4각형,6각형,8각형,12각형 또는 물건의 형태를 본떠 만든 금연(琴硯),풍자연(風字硯) 등 다양하며, 크기도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다. 재료로는 돌,옥,수정,도(陶),자(磁),철,금동,은,대나무,조개껍질 등이 사용되는데 대개는 돌을 사용한다. 돌은 석질(石質)이 아름답고 연지의 물이 10일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친다.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돌로 된 벼루가 만들어졌다. 벼루는 단지 먹물을 만드는 기능 뿐만 아니라 완상품으로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자벼루의 존재는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보검 寶劍 고려가 요나라에 보낸 진상품의 하나로 양쪽이 날이 이는 귀한 검

『요사』에 기록된 고려가 요나라에 보낸 첫 진상품이다. 하지만 915년 10월은 고려가 건국되기 전이므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고려가 보검을 보냈을 때, 신라에서도 방물(方物)을 공물로 보낸 것으로 보아 신라를 고려로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이 기록은 실제로 없었던 일이 『요사』에 편입되었거나, 고려의 전신인 궁예의 태봉(泰封)을 고려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보초 寶鈔] 고려 시대 사용된 원나라의 지폐(紙幣)

 

고려 시대 사용된 원나라의 지폐(紙幣)이다. 원나라의 화폐제도는 초기에는 금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교초(交鈔)를 인조(印造)하기도 하였지만, 세조 때부터 지폐 전용책을 추진하면서 중통보초(中統寶鈔),지원보초(至元寶鈔) 등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와같은 원나라의 화폐가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고려에도 유입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유통되던 보초는 고려 왕실의 빈번한 원나라의 왕래나 사신 파견 등의 소요경비로 많이 사용됨으로써 다시 원나라로 흘러들어가 유통되기도 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는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의 설치와 저화(楮貨)의 인조,유통이 논의될 때 송나라의 회자(會子)와 함께 화폐의 표본으로서 참고되었다. 고려시대 대표적 거상으로 활동했던 남궁신(南宮信)과 충혜왕(忠惠王) 등은 원나라와 무역에서 보초를 비롯하여 금은세공품을 주요한 무역품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두 幞頭] 고려와 요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두건의 일종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요(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일종의 두건(頭巾)을 말한다.
북주(北周) 무제(武帝) 때 처음 복두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직각(直脚),국각(局脚),교각(交脚),조천(朝天),순풍(順風) 등 다양한 형태의 복두가 있었다. 처음에는 두건 형태의 복두에서 나중에는 관모(冠帽)로 발전하게 된다.

 

[불경 佛經] 고려와 송,요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책

 

고려와 송,요 간에는 불교 교류가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대장경이다.
중국에 전래된 시기가 불분명한 고려 불경이기는 하지만, 남송(南宋)의 왕적(王寂)이 지은 『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에 보이는 의주(懿州) 보엄사(寶嚴寺)에 소장된 946년 고려 정종 발원의 대진(大晋) 개운(開運) 3년본 은자장경(銀字藏經)과 953년 광종이 발원한 고려 광덕(光德) 4년본 대반야바라밀다경 1부가 있으며, 이외에도 어떤 불경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요나라가 승

 

[붓 筆] 문방사우의 하나로 국내와 송나라에 교역되었던 물품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2) 주요 내용 : 문방4우(文房四友)의 하나이며, 짐승의 털을 모아 나무관으로 고정시킨 것이다. 진(晉)나라의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 博物志〉에는 BC 3세기에 몽염(蒙恬)이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문헌분석과 출토유물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은대(殷代)의 갑골(甲骨) 가운데 붓으로 쓴 듯한 것이 출토되었고, 갑골문과 금문(金文) 가운데 붓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들이 있고, 신석기대말인 용산(龍山)과 앙소(仰韶)의 채색토기에 붓이 아니면 묘사할 수 없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2500년 이전부터 붓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으로는 서사(書寫)가 시작된 때부터 붓이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에 붓은 이규보의 국선생전에 모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문관 지배층들은 좋은 붓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고려의 붓은 품질이 우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와의 교역에서 당시 고려의 주요 수출품으로 붓과 종이가 언급되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비단 綾]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원 간섭하에서는 처음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의 일방적인 강제교역이 이루어졌으나 대외원정이 마무리 된 뒤에는 왕이 원을 방문하거나 사신의 교환을 통한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민간차원에서 행해졌으며, 문종 10년에 일본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자못 활발해 졌다. 그러나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상인이나 지방세력들이 進奉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려의 상인들도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하였으나 왜구침입 이후에는 거의 단절되었다.
2) 주요 내용 : 누에실로 짠 고귀하고 화려한 견직물(絹織物). 비단 직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의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왕실에서 짠 비단을 어의(御衣)로 사용하였으며, 개선장군에게 금포(錦袍)를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한나라 때 한금(漢錦)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西域)에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는데, 비단은 금(金)값에 맞먹는다고 해서 글자도 금(錦)으로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소지왕 때 방인(邦人)도 금수를 입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비단의 역사는 신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금직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여 비싼 값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사람들이 양잠에 서툴러서 실과 옷감은 모두 상인을 통하여 산동성이나 절강성과 복건성 지방에서 사들인다고 하였다. 지극히 좋은 비단은 문라화릉(文羅花綾) 등이다. 고려는 중국산 비단을 수입하였다가 이를 일본에 다시 수출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상인들이 원나라에 갈 때 말ㆍ모시ㆍ베ㆍ인삼 등을 가지고 가서 팔고, 명주비단ㆍ능라비단 등을 사가지고 귀국하여 국내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고 한다.

산마 散馬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안장을 얹지 않은 말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거란의 공식 회사품(回賜品)과 사절단에 대한 하사품 가운데 하나로 안장을 얹지 않은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모두 20필이 회사되었고, 고려사절에게 5필, 그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에게도 1필 등 차등 있게 하사되었다.

 

[색견 色絹]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빛깔 있는 얇고 성기게 짠 무늬없는 견직물

 

고려 사절단에게 준 요나라 하사물의 하나로 빛깔 있는 얇고 성기게 짠 무늬 없는 견직물을 말한다.
요나라에서는 고려에서 파견된 사절단에게도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하사물을 주었는데, 공식사절에게는 이 비단 100필을,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과 하절종인(下節從人)에게는 얇고 성기게 짠 무늬 없는 견직물을 하사했다.

 

[서옥요대 犀玉腰帶]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무소뿔과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요(遼)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가운데 하나로 무소뿔과 옥으로 장식된 허리띠이다.
무소뿔과 옥 등 모두 귀한 재료로 장식된 허리띠 2개는 공식 회사품이고, 고려사절에게는 금칠한 은허리띠(金塗銀帶) 2개, 그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에게는 은허리띠(白銀帶) 1개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허리띠는 관복을 입을 때 꼭 필요한 물품으로 대표적인 회사물의 하나이다. 당시 요나라는 서하(西夏)에는 이 허리띠 대신에 금허리띠를 회사했다.

 

[서적 書籍] 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물품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성종 2년 5월에 박사 임노성(任老成)이 송으로부터 돌아와 『대묘당도(大廟堂圖)』 1폭, 『대묘당기(大廟堂記)』 1권, 『사직당도(社稷堂圖)』 1폭, 『사직당기(社稷堂記)』 1권,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 1폭, 『제기도(祭器圖)』1권, 『칠십이현찬기(七十二賢贊記)』 1권을 바쳤고, 1027년(현종 18) 8월에는 송에 강남 사람 이문통(李文通) 등이 와서 597권의 서책을 받쳤다. 1090년(선종 7) 12월에는 송에서 『문원영화집(文苑英華集)』을 보내왔으며, 1098년(숙종 3) 12월에는 예부(禮部)에 송의 『개보정례(開寶正禮)』 1부를 내린 일이 있다. 불경의 교류는 더욱 활발하여 1083년(문종 37) 3월에 왕이 태자에게 명령하여 송의 대장경을 맞이하여 개국사(開國寺)에 보관하도록 하고 도량을 베푼 일이 있다. 또한 선종 3년 5월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송에서 귀국하면서 『화엄대불사의논등제종교장(華嚴大不思議論等諸宗敎藏)』 3, 000여 권을 가지고 왔으며, 이듬해에는 송의 상인 서전(徐戩) 등 20명이 와서 왕에게 『신주화엄경판(新註華嚴經板)』을 바쳤다. 송으로부터 수입한 불경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현종 10년에 최원신(崔元信)이 가져온 금자장경(金字藏經) 등과 더불어 『개보칙판(開寶勅板)』을 들 수 있다. 이 개보판은 480질 5, 048권에 달하는 것으로 현종 때부터 문종년 간에 완성된 『고판고려대장경(古板高麗大藏經)』의 주축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송에서도 고려에 있는 서적은 좋은 판본이 많다는 말을 듣고 사신접대 담당 관원인 관반(館伴)에게 지시하여 필요한 서적 목록을 써주면서 비록 권수가 부족되는 것이 있더라도 꼭 베껴서 보내라는 말을 전할 정도였다. 그때 요구한 목록은 그 종류가 113종 5, 006권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의천이 고려에서 지엄(智儼)이 저술한 「공목장(孔目章)」 「화엄수현기(華嚴搜玄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등과 현수(賢首)의 「화엄탐현기소(華嚴探玄記疏)」, 「법계무차별논소(法界無差別論疏)」, 「십이문논소(十二門論疏)」 등과 청량(淸凉)의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 등을 가지고 가서 그곳으로써 논의하였던 까닭에 송에서 많은 학자가 모여들었는데 이로써 귀중한 장소(章疏)가 송에 전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서적 교류 가운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송은 거란에 대하여 좀처럼 나누어주기를 꺼린 서적을 당시 거란과 외교관계를 갖고 있던 고려에 대해서는 고려가 요청한 목록대로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성형인삼 成形人蔘]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인삼의 한 종류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인삼을 지칭한다.
여기서 성형(成形)의 의미는 모두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인삼의 형태가 말 그대로 사람의 모양을 갖춘 삼, 둘째는 다 자란 인삼, 셋째로는 가공을 한 인삼이란 의미로 나눌 수 있으나, 그중에 첫째와 둘째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세면기라릉 細綿綺羅綾] 고려와 요나라와의 고역품의 하나로 가는 실로 짠 여러 종류의 비단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거란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가운데 하나로 가는 실로 짠 여러 가지 종류의 비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200필을 하사했다.

 

[세묵 細墨]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하나로 먹의 한 종류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요(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먹의 한 종류이다.
고려 먹은 일찍부터 중국에서 유명하여 중국의 문인들에게 그 수요가 많았다. 중국의 문인들 사이에 고려 먹을 구하고 증여하는 정황을 묘사한 시나 글들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장력강(張力剛)이란 장인의 이름이 새겨진 고려 먹을 지인에게서 얻은 한 문인은 그 묵의 광택이 선명하면서도 깨끗한 것을 칭송하고 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먹(松煙墨)을 조공했는데, 오래된 노송을 태운 그을음을 가지고 만든 먹이었다.
중국에서는 고려에서 조공하는 먹 중에서 맹주(猛州)산을 상품(上品), 순주(順州)산을 그 다음으로 알아주었다. 그 먹 위에다가 ‘순주진공(順州進貢)’, ‘맹주진공(猛州進貢)’과 같은 글을 새겼는데, 순주(順州)는 조선시대의 순천군(順川郡), 맹주(猛州)는 맹산현(孟山縣)에 해당하나 조선시대에는 이 먹을 공물로 바치는 규정은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세묵(細墨)이 어떤 먹을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운 먹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세지묵(細紙墨)으로 기재되어 있다.

 

[세의 細衣] 고려와 요간의 교역품의 하나인 옷의 일종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거란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가운데 하나로 섬세한 옷을 말한다.
모두 2벌을 회사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다.

 

[세포 細布] 고려와 요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가늘고 고운 실로 짠 품질이 좋은 베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가늘고 고운 실로 짠 품질이 좋은 베를 지칭한다.
베는 삼실로 짠 면직물을 말하며, 당시에는 1, 000필의 고운 베가 요나라에 진상되었다.

 

[소금 鹽]

 

고려 전기의 소금생산은 일찍부터 농업에서 분리되어 거의 전업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염호(鹽戶)에 의해 주로 행해졌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특수생산집단인 염소(鹽所)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소금생산에서 그 주류가 염호인지 아니면 염소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염호가 주된 생산자이며, 염소제는 왕실이나 국가 중앙부에서 필요로 하는 소금을 직접 확보하기 위해 보충적으로 시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소금 생산에 풍부한 자연적 조건을 갖춘 연해 촌락들이 대부분 염소로 지정되어 이들이 소금 생산량의 대부분을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 생산의 주류를 달리 보더라도 염세의 성격은 별반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소금 생산의 주류가 염소민이라 하더라도 염소는 생산한 소금을 모두 국가에 바친 것이 아니라 일정액만을 염세로 바치고, 나머지는 자유로이 판매하여 생계비를 조달했던 것이다. 이처럼 염호로부터 염세를 징수하는 ‘징세제’의 형태는 충선왕 때 염법을 개혁한 후 ‘전매제’가 시행되면서, 소금 소비자가 내는 소금값의 형태로 변하였다. 즉 징세제 하의 염호는 생산량의 일부인 정액 즉 염세를 부담하는데 반해, 전매제 하에서 염호는 생산량의 전부인 공염(貢鹽)을 부담하게 됨으로써 염세는 염호가 내던 세납의 형태에서 소금 소비자가 내는 세금으로 그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소안비마 素鞍轡馬] 고려와 요나라아의 교역품의 하나로 장식 없는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거란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가운데 하나로 장식 없는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이다.
모두 5필(匹)이 회사되었고, 안장과 고삐 등의 구체적인 모양은 알 수 없으나, 함께 회사된 금칠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金塗鞍轡馬)보다는 소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쌀 米] 고려내에서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으며 중국으로 수출되었던 교역품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원 간섭하에서는 처음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의 일방적인 강제교역이 이루어졌으나 대외원정이 마무리 된 뒤에는 왕이 원을 방문하거나 사신의 교환을 통한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민간차원에서 행해졌으며, 문종 10년에 일본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자못 활발해 졌다. 그러나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상인이나 지방세력들이 進奉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려의 상인들도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하였으나 왜구침입 이후에는 거의 단절되었다.
2) 주요 내용 : 쌀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주식이기도 하지만 주현의 장시에 교역의 매개품으로써 통용되었다. 쌀은 등가기준의 화폐로서의 보편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농민들의 교역은 생필품의 거래가 중심이었고 거래규모도 적었기 때문에 쌀과 베가 교역의 중심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고려 인종 때 흉년이 들었을 때, 은병 한 개 가격이 쌀 5석, 작은 말 한 필에 쌀 1석, 암소 한 마리에 쌀 4두, 포(布) 한 필에 쌀 6승이었다고 한다. 고려 명종 11년에는 재추(宰樞), 대간(臺諫), 중방(重房) 관원들이 경시서(京市署)에 모여서 말(斗)과 휘(斛)들을 검사하고 간상(奸商)들을 검찰하였다. 이것은 당시 시장 상인들이 쌀 말에 모래와 겨를 섞어서 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당시 쌀은 주식으로서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유통과정에 대한 감시를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쌀이 시장의 주요 거래품목임도 확인할 수 있다.
쌀은 또한 교역품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종 때에는 금나라 사람들이 의주와 정주 지역에서 보물들을 가지고 와서 미곡을 교환하여 갔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교역을 강력하게 금지하였지만 상인들이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비밀리에 교역하였다고 한다. 한편 일본과의 교역에서도 고려는 인삼ㆍ콩ㆍ마포ㆍ서적 등과 함께 쌀을 수출하였다.

 

[악기 樂器] 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제례악에 사용되었던 물품

 

음악표현은 미적 요구에 따르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제사나 의술(醫術) 등 종교적,실용적인 것까지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물건이면 무엇이든 악기가 될 수 있다.
중국음악은 삼황오제의 전설시대의 원시음악은 분명하지 않으나 기원전 1500년경의 은왕조(殷王朝)이래 전개된 금석병용기에는 이미 한민족의 음악문화가 싹터 천지의 신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중심으로 경(罄),훈(壎),금(琴),슬(瑟) 등의 악기가 나타났다. 다음의 주(周)왕조 때는 다시 종(鐘),생(笙),소(簫) 등 많은 악기가 제작되고,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5성(五聲)이나 황종(黃鐘)에서 응종(應鐘)에 이르는 12반음인 12율(十二律)을 산출하는 이론도 발견되고, 유교의 예악(禮樂)사상 속에서 음악이 중요시되었다. 한의 통일왕조에는 유교가 국교가 되어 주나라 이래의 천지,조상을 제사지내는 아악(雅樂)제도가 궁정에 확립되고 한민족의 고유 음악시대의 정점을 이루어 공자가 편집한 주시대의 민요를 집대성한 『시경(詩經)』과 양자강(揚子江)지방의 가요를 모은 『초사(楚辭)』 등이 나타났다. 그리고 한대(漢代)에 서역을 통해서 서아시아와의 실크로드가 열리자 서방의 문물에 섞여 비파(琵琶)와 하프인 공후(箜篌) 등이 이란 방면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방 음악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6세기의 남북조시대이며, 인도 불교의 유입에 수반해서 인도의 고대음악도 서역(新疆省) 사람들의 손으로 중개되었다. 많은 악기,악곡,무용,이론이 중국 궁정에까지 전하여져서 7세기의 수(隋)와 7-9세기의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궁정과 국가의 예술음악이 꽃피게 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유교의 아악에 대하여 외래악을 호악(胡樂), 중국악을 속악(俗樂)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의 고대문화를 계승한 오대(五代),송,원,명,청의 10-19세기는 한민족이 자력으로 독자적인 음악을 전개한 시대로서 민족음악 시대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 중심은 서민 속에서 태어난 가극으로서 송대에는 잡극(雜劇), 원대에는 원곡(元曲), 명대에는 곤곡(崑曲)이라 불렀고, 청대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경극(京劇)이 완성되었다.
1911년 중화민국 수립이후의 중국음악의 근대화는 서양음악의 수입에 의해서 시작되고, 그 후 민족의 전통음악과 결합시키는 시도도 진행되고 있다.

 

[안비마 鞍轡馬] 고려와 요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

 

고려 사절단에게 준 요나라 하사물 의 하나로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을 말한다.
요나라에서는 고려에서 파견된 사절단에게도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하사물을 주었는데, 공식사절에게는 이 말 2필과 안장을 얹지 않은 말 5필을,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에게는 그냥 말 1필을 하사했다.

약재 藥材 중국에서 수입되었고 국내에서도 유통되었던 교역품

약재의 수입은 의술의 교류와 함께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의학 전문기관이 생긴 것은 신라 효소왕 때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이 분야가 더욱 발전하여 태의감(太醫監 : 후에 典醫寺)이라는 전문기관에서 의약과 치료의 일을 관장하였다. 특히 문종은 일찍부터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의학에 관한 책을 수입하기도 하였고, 또한 본인이 풍비(風痺 : 중풍)을 앓고 있어서 여러 나라에 양의와 양약을 널리 구하였다. 당시 의술과 약재가 뛰어난 송나라와의 의술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문종의 적극적인 의술도입에 대한 사실을 적고 있으며, 중풍을 앓고 있는 문종의 질병치료를 위해 송의 신종(神宗)은 1079년(문종 33) 7월에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왕순봉(王舜封), 의관 형조(邢慥),주도능(朱道能),심신(沈紳),소화급(邵化及) 등 88명과 경주(瓊州)의 침향(沈香)과 광주(廣州)의 목향(木香) 등 약품 100종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양 羊 고려와 요,금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소과에 속한 동물

고려의 진상품에 대한 요나라 회사물(回賜物)의 하나이다.
고려후기 대규모 양의 유입은 거란의 1차 고려 침입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증여한 1000마리가 있었고, 1088년(선종 5)에 사신을 파견하여 2000마리, 그 후 요나라의 회사물로 200마리씩 꾸준히 유입되었다. 금나라의 경우에 횡사사(橫賜使)를 통해 고려에 양을 하사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1154년(의종 8)과 1169년(의종 23)에 2000마리씩 고려로 유입되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이렇게 유입된 양들은 왕공귀인(王公貴人)이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고 하고, 1186년(명종 16)에는 문무 참관(參官) 이상과 근신(近臣)들에게 양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던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까지는 양을 식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 玉]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사치품

 

옥(玉)은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귀히 여겨 왔으며, 세공하여 장식석,옥기(玉器)로서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고려 지배층의 사치품이나 장식용으로 사용되기 위해 교역되었다.
옥(玉)은 치밀하고 경질(硬質)이며, 투명하여 아름답게 빛나고, 연마하여 광택이 나는 것을 말한다. 광물학적으로 연옥은 각섬석의 일종이며, 경옥은 알칼리휘석의 일종이다. 연옥은 유백색인 것이 많으며, 녹색,황색,홍색 등도 있고, 경옥은 녹색,백색이다. 색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백옥과 비취(翡翠)가 대표적인 것이다.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귀히 여겨 왔으며, 세공하여 장식석,옥기(玉器)로서 사용되어 왔다. 연옥은 터키와 중국 등지에서, 경옥은 미얀마와 중국, 티베트고원에서 산출된다. 주로 장식용과 사치품으로 유통되었다.

 

[용수초석 龍鬚草席]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골풀로 만든 돗자리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요(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골풀(龍鬚草)로 만든 돗자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용수석(龍鬚席), 용수석(龍須席) 또는 용수등석(龍鬚䔲席)이라고도 하는데, 용수석과 초석(草席)을 구분하여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 돗자리의 재료를 왕골(莞草)로 보는 설과 동북해안의 명천(明川) 부근에서 나는 특수한 풀인 용수초(龍鬚草)로 보는 설이 있는데, 어떤 설이든 이 돗자리가 현대 우리나라 화문석의 원형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는 용수등석이지만, 『요사(遼史)』에는 용수초석 또는 용수석으로 기재되어 있어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용수초석과 함께 고려의 대표적인 공예품인 등석(藤席)은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등조기물(藤造器物)로 기재되어 있고, 몽고(元)에서도 요구하는 대표적인 조공품의 하나이다.

 

[은약병 銀藥甁]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요(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거란에 바쳤던 진상품의 하나로 은(銀)으로 만든 약병(藥甁)으로, 당시 조공품의 가장 대표적인 기본 물품인 금,은,동기(金銀銅器)의 하나이다. 그 구체적인 형태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제화폐로서 요에 수출된 물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의 衣]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인 옷

 

고려 사절단에게 준 요나라 하사물(下賜物)의 하나이다.
요나라에서는 고려에서 파견된 사절단에게도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하사물을 주었는데, 공식사절에게는 이 옷 2벌을, 수행원인 상절종인(上節從人)과 하절종인(下節從人)에게는 각 1벌씩을 하사했다. 다른 품목과는 달리 상,하(上下) 구분 없이 사절단 구성원 모두에게 하사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사행길이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으므로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의복을 지급하는 것이 관례화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의착견 衣著絹]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의복으로 만들 견직물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거란의 공식 회사품(回賜品) 가운데 하나로, 의복으로 만들 용도의 견직물로 생각된다. 모두 1000필이 회사되었으나, 그 형태나 정확한 용도는 알려진 바 없다.

 

[인삼 人蔘]

 

다른 나라에서 인삼으로 불리는 약초와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의 인삼을 고려인삼이라 하고 ‘삼(蔘)’으로 쓰며 외국삼은 ‘삼(參)’으로 쓴다. 그러므로 화기삼(花旗參),동양삼(東洋參),관동삼(關東參) 등은 외국삼을 일컫는 말이다. 수천년 동안 신약영초(新藥靈草)로 계승되어 내려온 우리 나라 인삼을 고려인삼, 일본에서는 ‘조선인삼’, 서양에서는 ‘Korean ginseng’이라 부른다. 산삼(山蔘)이라고 불리는 자연삼의 산출은 현재 아주 희소하기 때문에 인삼산지로서 가장 적합한 천연적 조건을 갖추고 재배 및 가공법의 기술을 개발, 계승해 온 우리 나라가 인삼의 주 산국으로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시대의 영토는 한때 요동 및 남부 만주와 연해주에까지 뻗어 있었다.
인삼을 채취하여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원래 인삼이라고 하면 야생인삼을 말하였으나, 점차 인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야생인 천연삼의 채취만으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된 것이 인삼재배기술의 개발을 촉구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와 백제에서 양(梁)나라,수(隋)나라,진(陳)나라 등에 인삼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이고, 신라 소성왕 때에 경상북도 경주지방에서는 재배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1123년(인종 1)에 중국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간 후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고려인삼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백삼(白蔘)이 좋기는 좋은데 여름을 지내면 좀이 먹기 때문에 솥에 쪄야 보존성이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도 이미 홍삼(紅蔘)이 있었다는 것이다. 개성삼(開城蔘)은 대략 백삼,홍삼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 백삼은 흙에서 캔 삼을 그대로 말린 것이며, 홍삼은 그것을 가마에 넣고 쪄서 붉은 빛이 나게 한 것이다. 한편 고려 고종대에는 인공적으로 산양삼(山養蔘)을 재배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인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말엽에는 인삼이 부족하게 되었으며, 중국의 요구와 왕실 귀족층의 수요증대로 인해 수탈을 당하는 백성들이 거주지를 떠나거나 인삼 재배기술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가 인삼의 주요 생산지로 알려짐으로써 인접 국가들과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인삼을 둘러싼 관계가 성립되어 왔으며, 따라서 고려인삼을 매체로 하여 정치,경제적 국제관계가 촉진되어 왔다. 이와같은 관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가 산삼향(産蔘鄕)으로 알려져 중국의 여러 나라와 일본 등에 공헌품 및 예단물(禮單物)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표적 거상으로 분류되는 조윤통(曹允通),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충혜왕(忠惠王) 등이 중국과 교역하는 주요 물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이시진(李時珍)의『본초강목(本草綱目)』에도 조선에서의 인삼재배 및 거래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16세기 무렵에는 이미 우리 나라에서 인삼재배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현재의 인삼재배 분포는 남한에 있어서는 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경상남도,전라남도 및 제주도를 제외한 각 도에 분포되어 있다.

 

[자기 磁器] 청자(靑磁),백자(白磁),흑유자(黑釉磁),철유자(鐵釉磁) 등 고려시대에 제작된 자기를 지칭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원 간섭하에서는 처음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의 일방적인 강제교역이 이루어졌으나 대외원정이 마무리 된 뒤에는 왕이 원을 방문하거나 사신의 교환을 통한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2) 주요 활동 : 고려 시대 도자기의 총칭이다. 청자(靑磁),백자(白磁),흑유자(黑釉磁),철유자(鐵釉磁) 등 고려시대에 제작된 자기를 일컫지만, 일반적으로는 고려청자를 지칭하는 말로 인식되어 왔다.
청자는 993년(성종 12)에 만든 순화사년명(淳化四年銘) 항아리가 지금까지 전한다. 이 항아리는 고려 태조의 태묘(太廟)에서 제향(祭享) 때 쓰던 그릇이다. 이 항아리의 유약(釉藥)은 담록조(淡綠調)의 황회색계(黃灰色系)여서 청자로 보았다. 11세기 초 거란(契丹)의 성종(聖宗) 영경릉(永慶陵)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음각문편(高麗靑瓷陰刻文片)은 고려청자의 발전을 상징한다. 11세기 초 외국 왕실에 선물로 청자를 보냈다는 사실은 이미 청자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음을 뜻한다.
그 후 고려자기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크게 질적으로 발전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청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도준(陶尊), 도기의 푸른 빛깔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리 같으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도로(陶爐), 즉 사자 모양을 한 향로 역시 비색이며, 위에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 : 위로 향한 연꽃)가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청자와 유사하다”. 이와 같이 고려청자는 큰 발전을 하여 중국이나 일본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이 되었다.

 

[자릉대삼 紫綾大衫]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자주색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만든 중국식 두루마기

 

고려 사절단(使節團)에게 준 요나라 하사물(下賜物)의 하나로, 자주색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만든 중국식 두루마기를 말한다.
대삼(大衫)은 장삼(長衫)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두루마기 형태로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한 겹으로 된 옷이다. 요나라에서는 고려에서 파견된 사절단에게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하사물을 주었는데, 이 옷은 하급 수행원인 하절종인(下節從人)에게만 한 벌씩 하사했다.

 

[자화면주 紫花綿紬]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의 하나로 꽃문양이 들어 있는 자주색 명주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꽃문양이 들어 있는 자주색 명주를 지칭한다. 면주(綿紬)는 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피륙을 말하며, 명주(明紬)라고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은 염색을 잘했는데 그 중에서도 붉은색과 자주색 빛을 내는 염색이 절묘했다고 하니, 꽃문양이 들어간 자주색 명주가 100필이나 진상품에 들어간 이유를 알 수 있겠다.

 

[저포 紵布] 고려와 요간의 교역품의 하나로 모시풀로 직조된 평직직물
 
모시는 모시풀로 직조된 평직직물로 저(紵)라고도 한다.
모시의 품질은 승수(升數)로 평가하여 한 폭에 날실(經絲)이 80올로 직조된 것을 1승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30승저삼단(三十升紵衫段)이 생산되어 869년(신라 경문왕 9)에 당나라에 공물로 보내졌다. 고려시대에도 그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혜종 때 진(晋)나라에 진상한 모시는 눈과 같이 희다(紵麻如雪)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던 백저포(白紵布)를 기본으로, 세저포(細紵布),사저포(紗紵布),문저포(紋紵布) 등의 다양한 특산 모시가 생산되었다.
1038년(정종 4) 4월에 김원충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요(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 바쳤던 진상품은 그 중에서도 사저포(紗紵布)였다. 모시는 우리나라의 특산품으로 역대 주요 대 중국 조공품이자 무역품의 하나였는데, 예를 들면 1185년(명종 15)에 서북면병마사 이지명(李知命)이 왕명으로 용주(龍州) 창고에 있는 저포로 거란사(契丹絲)를 교역하여 바친 것을 들 수 있다.

 

[종이 紙] 송, 일본과의 교역품

 

1) 시대적 배경
『고려사』에 종이와 관계되는 짤막한 문장이 군데군데 보이고, 도륭이 쓴 『고반여사』에서는 고려의 종이를 소개하기를, "견면으로 만들었으며 빛은 희고 비단 같으며, 단단하고 질기다. 여기에 글씨를 쓰면 먹빛이 아름다운데 이것은 중국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진귀한 물품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우리나라의 제지술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불교가 성행하였던 고려에서 불경을 적을 종이제조가 발달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종이는 고려에게 있어 대중국 수출품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2) 주요 내용 :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종이에 대해 “전혀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를 간간히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다 매끈하며, 좋고 낮은 것의 몇 등급이 있다.”라고 하였다.
고려와 송의 조공무역에서 양국 간의 수출입물품을 보면 고려에서는 금ㆍ은ㆍ동ㆍ인삼ㆍ황칠ㆍ문피ㆍ유황 등과 함께 白紙를 송에 보냈다. 백지는 송에 보내는 주요 수출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고종 8년에는 몽고와 동진에서 사신들이 와서 황태제의 편지를 전하며 물품을 요구하였는데, 이 때 요구한 물품 가운데 붓 2백 자루와 종이 10만장이 들어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종이는 몽고 등 중국에서 큰 인기가 있었던 물품이었다.

 

[주과자 酒果子]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

 

고려의 조공물에 대한 요의 공식 회사품(回賜品)과 사절단에 대한 하사품(下賜品) 가운데 하나로, 술과 다식(茶食), 과일 등 식품의 총칭이다. 주과(酒果) 또는 주과(酒菓)라고도 한다.

 

[지리도 地理圖]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

 

1002년(목종 5) 7월에 고려가 요나라에 보낸 진상품의 하나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의 지도는 국가기밀에 속하는 중요한 정보이므로, 고려 스스로 진상했을 이유가 없고 요나라의 요구에 의해 보냈을 것이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010년(현종 1)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변을 빌미로 고려에 침입했을 때, 이 지도는 고려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요나라는 지어진 시기를 알 수 없는 고려의 『대요사적(大遼事跡)』을 입수하여, 요와 접하고 있는 고려와 여진의 수비군 규모와 그 배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요나라가 고려의 군사정보 수집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직물 織物] 대외 교역품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였지만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사신을 교환할 때 국신물 형태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금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여진의 추장들이 來往하면서 이루어졌다. 금이 건국 된 후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 사무역도 행하여졌다.
2) 주요 내용 : 고려의 직물은 중국으로 보낸 중요한 진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각종 수를 놓은 모직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흰 색의 저포와 마포도 많이 보내졌다. 혜종 때 중국 진나라에 보낸 모직은 화려하다고 칭송까지 하였다(혜종 2년). 또한 고종 때는 몽고가 사신을 보내어 회사품으로 좋은 직물을 요구하기도 하였다(고종 18년 12월).
고려후기 우왕 때 강회백은 왕에게 상소하면서 궁중에서 쓰이는 의복감을 창고에서 매매해서 바치게 하니 직물의 가격이 수배에 이르며, 앉아서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이 많으니 창고 하인들에게 비단 짜는 법을 가르치자고 하였다(강회백 전).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직물은 중요한 상거래 물품이었으며, 직물 가격의 변동이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고, 상인들이 직물의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직성오채어의 織成五彩御衣 고려와 요나라와의 교역품

고려가 횡진(橫進)한 품목(橫進物件) 중의 하나로 다섯 가지 색깔로 짜서 만든 어의(御衣)를 말한다.
요,금(遼金)시대에는 고려에 부정기적인 사절인 횡선사(橫宣使)를 파견하곤 했는데, 이와 반대로 고려에서 부정기적으로 진상한 물건이 횡진물건(橫進物件)이다. 이에 대해 유목민족이 세운 요(遼)가 횡선사를 통해 그들의 토산품인 양을 보낸 것에 대하여 농업국인 고려가 농산물로 답한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지만, 사료 상에는 횡선사가 가지고 온 하사품의 목록이 거의 기록된 것이 없고 1099년(숙종 4)에만 대장경을 하사하고 있으며, 횡진물건에 이 어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고려의 부정기적인 진상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금나라의 경우 횡사사(橫賜使)를 통해 고려에 양을 하사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이 어의에 대해 정교한 직조물로 보이기 때문에 고려의 생산품으로 볼 수 없고 송나라 상인에게서 구입하여 요에 보낸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당시 고려의 직조기술이 높았고 945년(혜종 2)에 후진(後晋)에 보낸 공물에도 정교한 직조물이 다양하게 다수 포함되어 있어 고려에서 직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란국지』의 원문에는 직성오채어의금(織成五彩御衣金)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맨 뒤의 “금(金)”자는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차 茶] 대내외 교역품

 

차(茶)는 차나무의 잎을 따서 만든 기호음료를 말한다.
사람들은 불을 발견하면서부터 물을 끓여 마시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거기에다 식물의 뿌리,잎,열매,줄기 등을 첨가시켜 마시게 되면서 맹물보다 훨씬 맛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점차 차 마시는 생활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차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경(茶經)에 신농씨가 인간에게 맞는 약을 찾아 산과 뜰을 돌아 다니면서 초근목피를 채취하여 먹었는데 하루에도 수십번씩 독초를 먹게 되었다. 그때마다 ‘차의 잎’으로 해독하였다고 한다. 차가 대중음료로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당(唐)나라 무렵으로 추측된다. 당시 대도시였던 장안이나 낙양 등에서는 일반 가정에서도 차를 마셨고 거리에는 다점(茶店)이 많이 출현하였다. 또 차에는 떡차라고 불리우는 차가 있었는데 차의 잎을 따서 절구로 찧어 떡모양을 굳혀서 보전하는 고형차이었다. 마실 때는 빻아서 분말로 만든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셨는데 생강과 감초, 소금 등을 넣어 마셨다. 원(元)대에는 북방의 유목민족과 교류가 생기면서 차에 버터와 우유를 넣어 즐겨 마셨다. 고형차로부터 오늘날의 엽차 형태로 바뀐 것은 명나라 때부터인데 가마솥에다가 차를 볶아서 만드는 형태로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차에 쟈스민 등의 꽃향기를 첨가하기 시작한 때도 이때 부터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목종 때 개경에 다점(茶店)이 관영상점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음다(飮茶) 풍속이 대단히 발전하였고 중국차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찹쌀 糯米 고려전기 중국, 일본 등과 교역했던 물품

고려가 횡진(橫進)한 품목 중의 하나로 찹쌀을 뜻한다. 요,금(遼金)시대에는 고려에 부정기적인 사절인 횡선사(橫宣使)를 파견하곤 했는데, 이와 반대로 고려에서 부정기적으로 진상한 물건이 횡진물건(橫進物件)이다. 이에 대해 유목민족인 거란(遼)이 횡선사를 통해 그들의 토산품인 양(羊)을 보낸 것에 대하여 농업국인 고려가 농산물로 답한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지만, 사료 상에는 횡선사가 가지고 온 하사품의 목록이 거의 기록된 것이 없고 1099년(숙종 4)에만 대장경(藏經)을 하사하고 있으므로, 고려의 부정기적인 진상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금나라의 경우 횡사사(橫賜使)를 통해 고려에 양을 하사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요나라에 보낸 수량은 500석이다.

 

[추포 麄布] 고려전기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고려의 공식 조공품목 중의 하나로, 굵고 거칠게 짠 품질이 낮은 베(麄布)를 지칭하며, 추포(麤布)라고도 한다. 베는 삼실로 짠 면직물을 말하며, 당시에는 5000필의 거친 베가 요나라에 진상되었다.

 

[토산물 土産物]

 

토산물(土産物)은 토물(土物) 혹은 방물(方物)로도 불리는데, 그 나라의 현지에서 생산되는 천연생산물을 우선적으로 지칭한다. 혹은 원자재를 가지고 일정한 작업 공정을 거쳐 만든 가공품(加工品)이나 세공품(細工品)을 말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토산물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천연생산물인데, 금(金),은(銀),동(銅),인삼(人蔘),잣(松子),수달가죽(水獺皮),호랑이가죽(虎皮),황칠(黃漆),벌꿀(蜜) 등이 유명하다. 다른 하나는 가공품(加工品)이거나 세공품(細工品)인데, 모시(苧布),흰모시(白苧布),삼베(麻布),능라(綾羅),나전칠기(螺鈿漆器),화문석(花紋席),종이(白紙),부채,화살,향유(香油),금은동기(金銀銅器),금은장도(金銀粧刀),청자(靑磁),완초석(莞草席),낭미필(狼尾筆),송연묵(松烟墨) 등이 주목받았다. 이것들은 고려 전체 토산물을 대표할 만 했으며 대외무역(對外貿易)에 있어서 외국인이 애용하는 주요한 전략품목(戰略品目)으로 각광 받았다.
고려의 토산물은 대외무역(對外貿易)에 있어서 각 국에 수출되었다. 먼저 고려가 송나라에 수출한 토산물은 금,은,구리,인삼,잣,황칠 등 원료품(原料品)과 각색 능라,세저포(細苧布),세마포(細麻布),종이,금은동기,나전칠기,완초석,부채,송연묵 등 가공품이 주를 이루었다. 거란(契丹 : 요(遼))에 수출한 품목은 금,은,동 등 금속류(金屬類), 저포 등 포백류(布帛類), 용수초석(龍鬚草席),등기(藤器) 등 공예품, 필묵(筆墨),종이 등 지묵류(紙墨類), 그리고 응골류(鷹鶻類)가 주종이었다. 여진(女眞 : 금(金))에 수출한 품목은 은기(銀器),의대(衣帶),포금류(布錦類) 등이었다. 일본에 수출한 품목은 인삼,사향(麝香),홍화(紅花),호피(虎皮),표피(豹皮),면주(綿紬),미곡(米穀) 등이었으며, 대식국(大食國 : 아라비아)에 수출한 토산물은 금과 비단(帛)이 대표적이었다.
토산물 가운데서도 특히 고려인삼,청자,종이는 중국 송나라 상인들이 그 상품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고려인삼은 그 효능이 동아시아 최고였으며 없어서 팔지 못할 지경이었다. 고려청자는 송자(宋磁)와 대등한 위상을 지녔고 송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당대 최고의 고가품이 되었다. 고려 종이는 아름답고 질겨서 필기에 쓰이는 외에도 장정이나 배첩(背貼)에도 많이 쓰였으며, 송나라 온주산(溫州産)보다도 상품적 가치가 컸다. 고려 종이는 사신이나 상인이 잘 다니는 수도나 항구만이 아니라, 장강(長江 : 양자강(楊子江)) 유역 안쪽에까지 유통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내 토산물을 획득하는 방법은 국가가 관리하는 관청 수공업자들로부터 토산물을 직접 공급받는 것 이외에 백성들로부터 공부(貢賦 : 조(調))를 조달받음으로써 가능했다. 관청 수공업자들이 제작하여 납품하는 토산물은 대개 왕실과 관청의 일부 수요에 충당시키려는 것이었으므로 그 수량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토산물의 대부분은 일반 군현민(郡縣民)과 소민(所民)으로부터 공물 납부 형태로 징수하였다. 일반 군현민은 베(布)를 삼세(三稅)의 하나인 공부로써 국가에 납부했다. 일부 주요한 천연물과 가공품의 경우, 소(所)에 거주하는 소민이 전문적으로 그 생산과 제작을 담당하였다. 소민은 천민(賤民)처럼 천시되었던 양인(良人)의 최하층(最下層)으로서 그 신분이 고정되어 있었고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전문 수공업 종사자였다. 이들은 소라고 하는 군현제(郡縣制) 하부의 특별행정구역 내에서 소리(所吏)의 통제를 받으며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이라는 형식으로 국가에 토산물을 납품하였다. 이른바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철소(鐵所),사소(絲所),주소(紬所),지소(紙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곽소(藿所),자기소(甕器所),어량소(魚梁所),강소(薑所) 등 모두 15개 종류의 소가 오도(五道)에 지정되어 있어서 각기 상공과 별공을 통해 할당된 물품을 국가에 납품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여러 종류의 소를 통해서 필요한 토산물의 대부분을 획득할 수 있었고 국가 재정을 채울 수 있었으며 대외무역에도 활발히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향료 香料]

 

식료품,화장품 등의 생활용품에 향기를 가하기 위해 첨가하는 향기가 강한 유기물질로 이들은 상온(常溫)에서 휘발성이 우수하다.
종류는 400-500종에 이르며, 장미,레몬 등에서 얻는 천연향료, 값이 싼 천연향료,콜타르 등의 원료로부터 분리,정제한 단리향료(單離香料), 화학반응을 거쳐 합성시킨 합성향료 등으로 대별된다. 단리향료와 합성향료를 합쳐 인조향료라 한다. 향료는 인류 역사상 초창기부터 신에게 방향(芳香)을 바치는데 사용되었다. 향료 제조기술은 인도유럽어족에 의해서 약 2만 5천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의 문헌에는 이미 향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사향은 중국에서 초기의 향료제조에 큰 기여를 했다. 향료제조기술은 중국인에게서 힌두교도,이집트인,이스라엘인,카르타고인,그리스인을 거쳐 로마인들에게로 전승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여러 가지 목적에 향료가 사용되었다. 성서에는 유향,몰약,향신료,발삼,방향물질,사향,히야신스,아몬드,육계(肉桂),창포,계피 등의 방향물질이 여러차례 언급되어 있으며, 「출애굽기」에는 구체적인 향료제조법이 기술되어 있다.

 

[화문석 花紋席 ] 왕골을 덧겹쳐가며 엮은 후에 무늬를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로 주요 수출품

 

1) 시대적 배경과 기능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이다.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던 우리의 생활문화에서 화문석은 살림살이의 하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요한 공산품으로 여겨졌다. 화문석의 생산은 삼국시대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라에는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즉 직관조(職官條)에 나타나는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화문석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 또는 선사품이 되었다. 고려초에 요나라에 보낸 특산품 가운데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탐냈다고 하였는데 송나라에 수출하는 주요물품 가운데 왕골방석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며 고려의 화문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용문염석(龍紋簾席),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만화석(滿花席),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채화석(彩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황화석(黃花席),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황칠 黄漆 고려의 특산물로 황금빛이 나는 칠의 한 종류이며 송, 요, 금, 원과 거래하던 교역품

고려의 특산물로 황금빛이 나는 칠(漆)의 한 종류로 가구의 도료로 사용하며, 백제칠(百濟漆), 신라칠(新羅漆), 고려황칠(高麗黄漆)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황칠나무는 섬에서 자라고 6월에 나무를 찔러 수액을 채취하는데, 색깔이 황금과 같고 햇볕을 쪼여 건조시키며, 원래 백제에서 생산되었으나 송나라 사람들은 신라칠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나라에서도 고려에 황칠을 요구하여, 이를 진상한 기록들이 보인다. 황칠의 사용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다가 명맥이 끊어졌으나 최근에 다시 기법이 복원되었다.

 

고려와 금의 교역

 

12세기 초에 여진족이 금을 건국하고, 1125년(인종 3)에 요를 멸망시키고 나서, 송을 남쪽으로 쫓아냈다. 그 후 중국 대륙은 북방 여진족의 금과 남방 한족의 송이 서로 대립함으로써, 고려에게 다시 한번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우는 외교정책을 펼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을 제공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고려로 하여금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금에 대해서 정치,군사적인 관점으로, 송에 대해서는 송상(宋商)을 통한 문화,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서로간의 교류를 지속함으로써 실리에 바탕을 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당시 고려와 금 사이의 무역 형태로는 요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국가간의 조공과 회사(回賜) 형식을 띤 조공(朝貢)무역, 사절로 간 사신들의 공,사적 무역, 국가의 공인 하에 국경에서 이루어지는 각장(榷場)무역, 국가의 눈을 피해 이루어지는 국경에서 이루어지는 밀무역(密貿易)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양국간의 조공무역을 살펴보면, 왕래한 사신들의 횟수로는 요와의 관계에 비해 활발한 교류를 보이고 있으나, 교역 내용이나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고려와 금이 수교를 맺을 때, 금측에서 사신의 왕래는 모두 요의 옛 제도를 따른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요나라 때 조천관(朝天館)에서 고려사신을 접대하던 것이 금나라 때 회동관(會同館)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고려에서 금의 사신을 접대할 때나 금에서 고려의 사신을 접대하는 규정도 모두 요나라 때의 규정을 적용했다. 따라서 금에 보내는 공물이나 고려에 주는 회사품이 요나라 때와 비교해서 큰 변화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 주목되는 몇 가지를 들어보면, 동(銅)이 부족했던 요에서 고려의 동기(銅器)를 선호했던 것처럼, 금 장종대에 와서는 고려에 파견된 사신들이 구해온 동기까지 모두 정부에 매도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고려의 문방구류도 금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상품으로, 금 장종은 늘 고려의 청자지(靑磁紙)에 글씨를 썼다. 금의 회사품도 정확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의종 때 금에서 보낸 사,견 등의 물건을 국왕의 개인용도와 국가 재정으로 나누어 절반씩 썼다는 구절로 보아 회사품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회사품의 하나인 양(羊)도 요나라 때부터 있던 품목으로서, 고위 관리와 근신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과 식용 고기를 언급할 때 돼지고기보다 양고기를 먼저 언급한 『고려도경』의 기록으로 볼 때, 모두 식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일반백성들에게까지 대중화되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금에 파견된 고려 사신들 중에 상당수가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호부(戶部) 소속 관원이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공물의 내역을 알 수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후대에는 호부에서도 무역을 통한 재정 수입의 확대를 시도한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사신들의 공,사적(公,私的) 무역 관행을 살펴보면, 먼저 고려사신만이 유일하게 사사로이 사진례(私進禮)을 한다고 금 세종이 이를 금지시킴으로서, 그때까지 계속되었던 고려 사신들의 공적 무역 관행은 공식적으로는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행은 원래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사절로 파견된 한 나라의 신하는 다른 나라의 임금에게 사사로이 예물을 바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신하된 자로 동시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으로 금기(禁忌)시 되는 일이기도는 했지만, 송에 파견되어 공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물건을 사헌물(私獻物)로 바친 최유청의 예로 보면, 당시 고려 사신들의 사헌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서하(西夏)에서 온 사신들에게 허용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틀 동안 교역을 허락하기도 했기 때문에 사신들의 사적 무역은 계속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금으로 사신가는 사람은 관하 군인에게서 1인당 은 1근씩을 받는 게 관례였지만, 나중에 무역으로 이득을 보고자 하는 자들은 사신에게 은 몇 근을 뇌물로 주고서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렇듯 금에 파견되는 사신과 수행원은 큰 이익이 보장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금 조정에서 서하사절단의 하급 수행원에게도 은 235냥과 견(絹) 235필을 하사하고 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양국의 공인 하에 국경에서 이루어지는 각장(榷場)무역은 요나라 때 보다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진국(東眞國)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고려에 보낸 글에서 본국은 청주(靑州)에, 귀국은 정주(定州)에 각각 각장을 설치하여 이전대로 매매하자고 청하는 것을 보아도 고려가 이 지역에서 금과 각장무역을 계속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218년(고종 5)에 금에서 호시(互市)를 다시 열자는 요구를 해 온 것을 보면, 양국간에 각장무역이 끊임없이 계속된 것으로도 볼 수 없다. 일찍부터 의주와 정주에서 각장무역을 실시했으나 고종 3년경에는 금 정국의 불안과 거래가격의 불공정성으로 호시를 금지했고, 식량이 부족한 금에서는 2년 후 호시의 재개를 강력히 요구하여 다시 열렸으나, 각장무역이 밀무역(密貿易)의 장소로 변할 가능성은 늘 내재해 있었다.
국가의 눈을 피해 국경에서 일어나는 밀무역은 고려 전시대에 걸쳐 변경지대에서 성행되었다. 예를 들면, 1101년(숙종 6) 정주(定州)의 장금남(長今男)이 관가 창고에 있는 철갑옷 네 벌을 훔쳐서 동여진에 판 경우도 있고, 서북면병마사 이지명(李知命)은 용주(龍州) 창고에 있는 저포(紵布)로 거란사(契丹絲) 5백 속(束)을 교역하여 바치라는 왕명에 따라 국법을 어긴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밑으로는 일반 백성까지 밀무역에 관여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에는 장사치들이 5-10명씩 패거리를 지어 마소와 금, 은을 가지고 날마다 외국으로 나가 파는 까닭에 국내에는 나귀, 노새 따위의 느리고 둔한 것만 가득하다고 할 정도로 밀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1185년(명종 15) 서북면병마사 이지명(李知命)은 의주가 비록 여금(麗金)간의 호시(互市)를 금하는 곳이나 용주 창고에 있는 저포로 거란사(契丹絲)를 교역하여 바치라는 왕명에 따라 국법을 어긴 경우도 있다. 고려 말에는 장사치들이 5-10명씩 패거리를 지어 마소와 금, 은을 가지고 날마다 외국으로 나가 파는 까닭에 국내에는 나귀, 노새 따위의 느리고 둔한 것만 가득하다고 할 정도로 밀무역이 성행하고 있다.
양국간의 문화교류 부분을 보면, 송이나 요와의 관계처럼 유교나 불교를 통해서 고려에 영향을 끼친 부분은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에 보이는 의주(懿州) 보엄사(寶嚴寺)에 소장된 고려 정종 발원의 대진(大晋) 개운(開運) 3년본 은자장경(銀字藏經)과 광종이발원한 고려 광덕(光德) 4년본 대반야바라밀다경 1부를 통해 보다 넓은 교류의 가능성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고려와 금의 교역은 송이나 거란과의 관계처럼 문화나 사상적으로 고려에 영향을 끼쳤거나, 활발한 교역활동을 통해 경제교류를 이루지도 못한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면이 강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의 이러한 사대외교 역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국초부터 지속해 온 실리외교의 일환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수출품

 

송 : 화문석 / 나전칠기 / 금 / 은 / 삼 /종이

여진 : 농기구 /  곡식 / 포목

거란 : 곡식 / 문방구 / 구리 / 철

아리비아 : 청자 / 구리 / 철

 

수입품

 

송 : 비단 / 약재 / 서적 / 도자기 / 인쇄술

여진 : 은 / 모피 / 말

거란 : 은 / 모피 / 말

아라비아 : 수은 / 향료 / 산호

 

해상무역

 

원양무역선

 

 

 

당두리선인 평선 위 한 가운데에 판자로 뱃집을 세웠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고려의 관선은 뱃집의 위를 뜸으로 지붕(덮게)을 이었다"고 하였다.

 

 

고려 동경 뒷면에 조각된 배를 통해 유추한 고려 시대 원양무역선.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무역선의 크기는 탑승 인원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송상의 배 중에서 30~50명이 타고 온 배가 31척으로 가장 많았고, 60~69명이 12척, 100명 이상 타고 온 경우가 10척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30~50명 정도의 선박이 일반적인 크기였으며, 100명 이상이 탑승한 배는 대선(大船)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은 1,123년 송나라의 서긍(徐兢)이라는 사신이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책인데, 고려의 배에 대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관에서 쓰이는 배의 만듦새 : 뱃집의 위에는 뜸으로 지붕(덮개)을 덮었고 아래는 문짝과 창문을 달았다. 둘레에는 난간이 있고, 가로다지 나무(멍에)로 양쪽 삼판을 서로 꿰뚫어 빼어 낸 것(뺄목)은 사령이 된다. 배밑은 평평하고 넓다.”

선체 내부를 살펴보면 나무 널빤지나 대나무 삿자리를 가로로 대어 막지는 않았다. 잘 다듬은 긴 막대기(장쇠)를 활같이 휘어서 차례로 삼판(뱃전)마다 하나씩 꿰어 박았다.(긴 막대기의 양끝은 엇비슷한 장부 솔을 만들고, 양쪽 삼판에는 장부 구멍을 뚫어 긴 막대기 끝을 이 구멍에 꿰어 박고 턱을 따낸 쐐기로 고정시킨다.) 이물의 배 위에는 닻줄을 감는 닻줄물레(호롱)가 있고, 큰 돛대를 함께 세웠다. 베로 만든 돛은 20여 폭이 된다.

 

고려동경에 나타난 원양무역선

이밖에, 고려동경(高麗銅鏡)을 통해서도 고려시대 원양무역선의 형태를 엿볼 수 있는데, 배 그림이 새겨져 있는 거울은 현재 두 종류로 알려져 있다. 모두 '황비창천(煌丕昌天)'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고려동경의 뒷면에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조각되어 있는데 배의 크기는 길이가 약 10발(1발은 양팔을 벌린 길이)쯤 되는 중선 크기다. 거친 파도가 치는 것으로 보아 왼쪽에서 바람을 받아 오른쪽으로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울 위쪽에는 해(3발 달린 까마귀가 들어 있다)와 달(계수나무와 옥토끼가 들어 있다)이 떠 있다. 그 아래 구름 속에 용이 조화를 부리고 있으며 바다 속에는 큰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고물 쪽의 배 위에는 방향을 조종하는 노를 잡고 있는 사공과 조선식 큰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이 보이는데 모두가 위를 바라보고 있다. 배의 삼판은 7폭을 올린 것으로 보이며 멍에 위에 신방(信防)을 얹고 그 위에 난간을 세웠다. 창문을 낸 뱃집 안에는 2명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돛대는 뱃집 위에서 세웠다 눕혔다 할 수 있으며 삼판(뱃전)의 곡선이 평행선을 이룬 것으로 보아 배의 이물과 고물은 평평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 같다.

배의 이물과 고물은 높이 솟아 있는데 이렇게 활처럼 구부러진 뱃전의 곡선을 현호(舷弧)라고 한다. 현호가 높은 배는 항해용 원양선이다. 고려동경에 나타나는 이 배는 현호를 크게 하였는데, 거친 파도가 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먼 바다로 항해할 수 있는 원양 무역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해상 무역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 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사절을 교환하며 국교를 다지고 무역에도 종사했다. 특히 후주(後周)를 대신하여 새로 일어난 송(宋)나라와는 오래도록 관계가 긴밀했다. 그러나 송나라가 성종 12년(993년)부터 현종 10년(101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해옴으로써 고려와 송과의 관계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 후 현종 3년(1012년)부터 충렬왕(忠烈王) 4년(1278년)까지 260년 간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화친 관계에 따라,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활발한 해상왕래와 문물의 교류가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송상(宋商)이 내왕한 횟수는 120여 회이며, 총인원이 5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수입된 물품은 주로 중국 명산인 각종 비단을 비롯해 자기, 약재, 차, 서적, 악기 등이었고 수출한 품목은 금, 은, 동 및 세공품과 각종 피혁, 인삼, 기타 특산물 등이었다

 

연안무역선

 

 

수심이 얕은 바닷가에서 항해하는 배로,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배를 통해 복원.

 

고려 시대 연안 무역선은 수심이 얕은 바닷가에서 항해하던 배로, 1983년 완도 근해에서 발견된 배를 통해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배는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의 배 중 가장 오래된 구조선(構造船)으로 11세기 후반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 배의 역사와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완도에서 발굴된 연안 무역선 개요

① 발굴시기 : 1983년~1984년
② 발굴장소 :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 바다
③ 제작시기 : 1세기 중기 후반(고려 시대)
④ 유 물 : 고대 선박 1척, 고려청자, 선원 생활 용품 등 30,701점
⑤ 잔존선체크기 : 길이-9.0m, 너비-3.5m, 깊이-1.7m
⑥ 복원규모 : 길이-10.0m, 너비-3.5m, 깊이-1.7m (추정치)

 

완도 발굴 연안 무역선의 특징

1. 배밑은 두꺼운 통나무 밑판 5쪽을 평평하게 맞대어 붙였고, 배밑의 이물과 고물이 위로 솟아 있다.
2. 뱃삼은 아래 삼판의 윗면을 반턱 따서 윗삼판을 얹어 겹쳐 붙이는 역(逆)-크링커방식(reverse clinker built methods)으로 묶은 다음 굵은 피삭으로 위에서 아래로 꿰어 박고 산지로 꼬챙이를 해 박았다.
3. 장쇠는 양쪽 삼판에 네모진 장부 구멍을 뚫고 장부촉을 꿰어 박은 다음 쐐기 마감을 하였다. 이러한 배의 형태는 한선(韓船)의 전통적인 조선 기법을 보여준다.

이 배가 발견됨으로써 문헌을 중심으로만 논의되어 왔던 한선의 형태가 밝혀지게 되었고, 전래되거나 혹은 전승되고 있는 한선에 대한 조선공작 기법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사용한 목재는 주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 남해안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도 있어서 남해안 지방에서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배와 함께 인양한 2만여 점의 내부 유물로 볼 때, 해남/완도/장흥 일대 해안을 항해하면서 생활용 도자기와 생활용 토기 등을 무역하던 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元代의 무역선 

 

 

 

원대무역선의 복원 도면은 ‘중국고선사화’, ‘고려도경’, ’고선도보‘, ’한국의 배‘, ’신안 해저유물‘, ’고려전선도-원구의 역‘ 등과 주로 ’신안해저유물-선체 보고서‘를 참고로 하고 김재근 교수의 고증 및 지도에 따라 중국 원양선의 설계 기법으로 도면을 작성하고, 전통 한선 조선 기술 기능 보유자가 전통 한선의 조선 공작 기법으로 원대 무역선을 복원 건조 하였다.

 

배의 길이 : 5.20자(1.56m)
배의 너비 : 1.40자(042m)
배의 깊이 : 0.43자(0.13m)

▷고증 : 김재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해양조선공학과 명예교수
▷고증 복원 설계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선장(船匠=배 목수) : 이동수, 안광천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중국 원대의 무역선.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원대 교역선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배가 발굴 인양되었다. 발굴 장소의 이름을 붙여 신안무역선(新安貿易船 , 이하 신안선)이라 했는데, 이 배와 배 안의 유물은 중세 동북 아시아의 정치,경제, 사회, 조선술, 교역, 공예, 미술 등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이 배는 중국 영파(寧波)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신안선 개요

1. 발굴시기 : 1976~1984년(9년 간 10차 발굴)
2. 발굴장소 :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 바다
3. 제작시기 : 14C 초
4. 유 물 : 고대 선박 1척, 도자기 금속 동전 유물 등 2만 2천여 점
5. 잔존선체 : 길이-28.4m, 너비- 6.6m, 깊이-3.6m
6. 복원규모 : 길이-34.0m, 너비-11.0m, 깊이-4.5m(추정치)
7. 기 타 : 국가 사적 274호로 지정

 

발굴 당시 신안선의 선체는 600여 년 동안 빠른 물살에 쓸리고 바다 해충인 선소에 의하여 많이 부식된 상태였다. 심한 부식 상태와 빠른 물살 때문에 선체를 물 속에서 해체한 후 인양했는데, 총 720편의 선편이 인양되었다. 좌측 선체는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우측 선체는 갑판 일부까지 남아 있어서 신안선의 구조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신안선의 구조

신안선은 현판의 중앙횡단면 선형이 V자 모양으로 뾰족한 첨저형(尖底型) 선박이다. 사각 단면의 단조 용골(龍骨)이 배밑에 놓여 있다. 용골 위에 보조 늑골과 칸막이 벽을 세운 다음 삼판의 제 일판인 익판(翼板=한선의 부자리)을 붙였다. 한 쪽 현측에 모두 15장의 삼판을 반턱을 따서 겹쳐서 이어 붙였다.

선창에는 격창벽을 설치하였다. 격창벽은 선창 안에 판자를 대서 가로로 막은 것을 말한다. 신안선은 7개의 칸막이벽이 설치되어 있다. 용골 위쪽에 수안(水眼)이라고 하는 배수구가 있는데, 필요한 때만 사용하고 그 외는 막아 놓는다.

선각(船殼)을 이루는 판자를 삼판(杉板)이라고 한다. 신안선의 삼판 축조방식은 삼판 아랫면에 반턱을 따고 아래 삼판의 윗면에 겹쳐서 부착하는 클링커 방식(clinker built methods)으로, 삼판은 한 겹으로 되어 있다. 삼판의 바깥 면 위에 삼판의 부식과 선소에 의한 침식을 막기 위하여 3cm 두께의 보판재인 부판(付板)을 덧붙였다. 반면, 한선의 삼판 축조 방식은 아래 삼판의 윗면에 반턱을 따고 윗판의 아랫면을 올려 겹쳐서 부착하는 역(逆) 크링커(reverse clinker built methods) 방식이다.

신안선의 이물비우는 용골에 이어져서 올라온 이물 용골 위에 역삼각형을 이루는 평판으로 되어 있고, 고물비우는 양쪽 삼판 안쪽에 수직으로 판자를 대어 막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신안선에는 돛대 받침대인 대굽(竹蹄 ; 죽제 또는 檣座 ; 장좌라고도 함)이 두 곳에 있다. 제 4번 격벽(隔璧) 앞에 놓인 대굽은 한판돛대를 세우기 위한 것이고, 제 7번 격벽 앞에 놓인 대굽은 이물돛대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제 4번과 제 5번의 격창벽 사이에는 식수(먹는 물)를 저장하는 수조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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