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남원을 중심으로 -
高 星 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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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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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 리 말 Ⅱ. 전라도 내륙 지역의 장시 분포 1. 내륙 지역의 상업권 2. 내륙 지역의 장시 분포 Ⅲ. 전라도 내륙 지역 장시권의 변동 1. 전주?남원 장시의 변화 2. 장시권 변화의 특징 Ⅳ. 맺 음 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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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 리 말
조선후기 특히 18세기에 들어서 급격한 상업적 변화는 도시의 경우 도시상업자본의 축적을 낳았고, 지방의 경우 場市1)의 발달과 확대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괄목할 만한 것은 전국적으로 1천여 개가 넘는 場市가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상업 발달에 따른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이 가져온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定期市, 즉 장시의 출현과 그 수의 증가라 할 수 있다.
장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주요한 유통 기능을 담당하면서 일정한 사회․문화적 기능 또한 담당하였다. 15세기 전라도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6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개설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규모가 확대되었고, 확대된 장시는 개설 초기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것이 장시간의 상호 연계를 통해 운영되었다. 이러한 장시 규모의 확대는 기존에 있던 장시가 폐지되거나 신설되는 형태를 통해 이루어졌고, 장시수의 증감은 곧 기존에 존재하던 장시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장시 상호간의 흡수와 신설 또는 폐지된 것으로 장시와 장시의 사이에 나타난 변화는 대동법의 실시와 동전 유통의 확대, 상업적 농업의 발달 등 당시 경제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
현재까지의 조선 후기 장시 연구는 일제시기 일본학자들의 식민지 정체성론에 입각한 시전과 시전상인에 관한 연구2)를 시작으로 조선 후기 농업 및 수공업 분야에서 상품 생산 증대와 그 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밝힌 연구3) 18세기 이후 경상도 지방 장시수를 통해 당시 지방 장시의 질적인 변화를 밝힌 연구를4) 비롯해 조선후기 장시의 전반적인 운영 상황에 대한 연구5), 15세기말 장시의 대두와 확대 보급의 원인에 관한 연구6)가 있었다. 최근에는 경기도 지방의 장시에 대한 연구7)와 전라남도 해안 지방의 장시 연구를 통해 도서 지방의 장시와 그 특징을 밝힌 연구8)가 있었으며, 충청도 지방 場市網의 변동에 대한 연구9) 등이 있었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조선 후기 장시 연구는 전반적인 상품 화폐 경제 발달에 초점을 맞추면서 장시 문제를 부분적으로 다루어 온 연구가 주로 많았으며, 장시 연구의 주된 방향은 일반적인 數의 증가와 감소에 따른 변화를 살피거나 당시 장시를 중심으로 한 상업의 성격 또는 농촌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는 등, 場市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는 장시를 통해 당시 사회의 일면을 살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場市網의 변화나 場市圈 구조의 변동에 대한 연구 사례에 있어서도 경상도와 충청도 그리고 목포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 등 일부 제한된 사례 연구가 있으나 아직은 희소하다.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후기 장시의 구조와 변화를 일반화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전라도 지역은 높은 농업 생산력과 어울려 장시가 가장 먼저 개설된 바 장시의 선진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전라도 지방 장시 연구는 지금까지 장시연구에 있어 괄목할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포괄적인 부분을 통해 고찰되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전라도의 내륙 지역이자 조선 후기 大邑인 전주와 남원을 중심으로 지역적 범위를 한정하고, 장시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문헌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전라도 내륙 지역의 상업권을 구분해 본 후 이를 바탕으로 당시 大邑인 전주와 남원의 장시의 변동 요인과 장시 변동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같은 사례 연구를 통해 大邑을 중심으로 전라도 내륙 지역 장시 분포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大邑에 형성되어 있던 장시권 내에서 장시와 장시권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Ⅱ. 전라도 내륙 지역의 장시 분포
1. 내륙 지역의 상업권
전라도 내륙 지역의 장시를 파악하는데 있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상업권 구분이다. 장시권의 변화를 분석하고자 한다면 일정한 장시를 중심으로 구성된 상업권이 먼저 확정되어야 한다. 조선후기 상업권은 장시에 바탕을 두고 그 권역이 설정되었고, 당시의 교통사정을 고려할 때 상업권 구분은 곧 장시권을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업권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가장 설득력 있는 구분은 거점장을 중심으로 각 소장시권이 연계되어 나타나는 대장시권을 통해 상권을 구분하는 방법과 자연적 조건에 따라 형성된 지역을 인위적으로 설정한 행정 구역과 비교해 보는 방법이 있다.10) 자연적 조건에 따른 구분법은 주로 당시 편찬된 지리지에 따라 강과 산맥을 통해 지역을 구분하는 것으로 본고에서는 먼저 소장시권이 연계되어 형성하는 대장시권을 파악하여 보고 지형에 따라 당시 지역권을 구분하여 보고, 이를 토대로 당시의 행정 지역을 비교하여 동시에 만족하는 상업권을 설정하고자 한다.
일정 지역내의 중심이 되는 장시 A가 1․6일에 개설된다고 할 때 장시 A를 중심으로 30~40리 정도 떨어진 거리의 장시 B는 2․7일에 개설되며, 이와 비슷한 거리의 장시 C는 3․8일, 장시 D는 4․9일, 장시 E는 5․10일에 개설되어 일정 지역 내에서는 연중 무휴로 교역하는 장시권이 형성되었다. 물론 이 30~40리의 거리는 사람이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이며, 일정 지역은 중심이 되는 장시 A를 중심으로 원형 내지 타원형을 이룬다.
따라서 각 장시 주위의 지역민이 해당 장시의 開市日에 물화를 매매하지 못하였어도 필요에 따라서는 다음 장시가 개시되는 4일 후를 기다리지 않고 개시일을 달리하는 인근의 장시에서 교역을 할 수 있는 교역 체제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 장시 A․B․C․D․E는 지역적으로나 개시일별로 각각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나 지역 내의 주민들이 이용함에 있어서는 時空間的으로 하나의 장시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小場市圈은 행정 구역의 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설정되고 있다.11)
다음의 <그림 1>은 1830년대 전라도 지방의 장시일들을 개시일과 장시간의 거리․연결 도로 등 자연지리적 조건을 고려하여 小場市圈을 설정하여 본 것이다. 이를 보면 1830년대 전라북도 지방의 장시들은 31개의 소장시권을 형성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중 개시일을 달리하는 5기의 장시가 개설되어 지역민이 연중무휴로 필요한 물화를 교역할 수 있었던 장시권은 5개뿐이며 나머지 장시권은 2기 혹은 3기의 장시가 연결되어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따라서 1830년대 전라북도 지방의 小場市圈은 대체로 한달에 6일내지 12일이 無時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9개의 小場市圈으로 이루어진 1830년대 전라북도 지방의 장시권은 1일 장시권을 형성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서로 연계되어 中․大場市圈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중․대장시권의 형성은 소장시권이 한달에 6일 내지 12일이 無市日이 되는 공백을 메워주는 기능을 하였다.
<그림 1> 1830년경 전라북도 지방의 장시권
더불어 이러한 中․大場市圈의 형성은 읍을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전라도 지방의 중․대읍이라 할 수 있는 전주․남원․김제․고부․임피․무장․태인 등의 지역에서는 2개~4개의 小場市圈을 연결하는 大場市圈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다음의 <표 1>은 위의 <그림 1>을 통해 추정하여 본 1830년대 전라북도지방의 대장시권과 소장시권이다.
<표 1> 1830년대 전라북도 지방의 장시권
규모 |
대장시권 |
소장시권 |
읍 명 |
전주, 남원, 익산, 함열, 지경, 흥덕, 고부, 김제, 태인, 정읍, 만경 |
원평, 부안, 임피, 임실, 오수, 황등, 관촌 |
위 표를 통하여 전라북도 지역을 전주를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 살펴보면 북부에는 김제․만경․지경․임피․황등․함열․익산 등 6개의 읍을 중심으로 11개의 소장시권이 연계되어 대장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중부 지역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4개의 소장시권이 연계되어 대장시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부 지역에는 고부․흥덕․정읍․태인․원평을 중심으로 6개의 소장시권이 연계되어 대장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동부 산악 지대인 남원․무주․장수 지역은 각기 독립된 장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하여 보면 전라북도의 장시권은 지경․임피․함열․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익산장시권, 전주․삼례․김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주권 그리고 정읍․고부․고창을 중심으로 하는 고창권과 독립적인 장시권을 형성하고 있는 남원권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자연 지형은 어떤 권역을 구분할 때 기준12)이 되는 바, 본고에서도 지역적 범위로 설정한 전라도 내륙 지역을 하나의 독립된 경제 단위로 보고 권역을 구분하여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1751년에 이중환이 지은ꡔ택리지ꡕ의 다음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德裕山 在忠淸 全羅 慶尙三道交會 西出一枝 至全州東 爲馬耳山 雙石峰 聳秀人天 昔恭靖大王 講武于湖南 以形肖 命名曰馬耳 馬耳一豚 西南行從任實 全州之交. 一西爲金溝母岳 止於萬頃․東津二水內 一西南 爲淳昌復興山 爲井邑蘆嶺 是爲南北通行大路. 自嶺分居 西止靈光 西南之務安 北之扶安邊山 又東南爲潭陽 光州以下之山13)
이를 통해 볼 때 전라도 내륙 지역을 구분하는 기준은 마이산․모악산․덕흥산․노령 넷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ꡔ택리지ꡕ에서 언급한 주요 지형을 통해 전라도 내륙 지역을 구성해 보면 다음 4개의 권역으로 나뉜다.
즉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하여 진안 마이산과 금구 모악산을 거쳐 옥구에 이르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북부권, 금구 모악산을 중심으로 남으로 뻗어 순창에 이르는 노령의 한 지류는 임실․장수․순창․ 남원을 포함하는 내륙의 동쪽인 동부 남원권, 순창․ 영광․장성을 포함하는 남부권과 해안 지역을 묶는 부안․고창권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전라도 내륙지역은 3개의 대권역으로 나뉜다. 그 권역은 ①전주를 중심으로한 북부 전주권 ②임실․장수․순창․남원을 권역으로한 산악권인 동부 남원권 ③ 해안지역을 묶는 서부 부안․고창권이 그것이다.
이렇게 ꡔ택리지ꡕ에서 나타난 지형적 구분은 ꡔ호남청사례ꡕ와 ꡔ호구총수ꡕ를 비교한 아래 <표 2>에서 그 구분이 명확해진다.
<표 2> 조선후기 전결수와 인구수
전결수 |
해당 지역 |
인구수 |
대읍 |
전주 남원 |
72,505 43,411 |
중읍 |
순창 김제 고부 임피 무장 태인 |
26,849 27,585 28,631 22,131 27,149 31,205 |
소읍 |
여산 익산 금산 금구 만경 용안 부안 함열 임실 흥덕 고산 고창 장수 운봉 정읍 옥구 |
19,011 15,811 20,795 9,242 14,674 5,625 38,448 15,943 27,516 10,115 16,773 8,402 17,539 7,005 9,674 10,115 |
잔읍 |
무주 진산 진안 용담 |
14,032 7,940 22,210 12,860 |
* 출처 : 전결수 - ꡔ호남청사례ꡕ, 인구수 - ꡔ호구총수ꡕ
* ꡔ호남청사례ꡕ에서는 전결수 6천결 이상을 대읍, 4천결 이상 6천결 미만을 중읍, 2천결 이상 4천결 미만을 소읍, 2천결 미만을 잔읍이라 구분하였다.
위 표를 통해서 볼 때 전라도 내륙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보이고 있는 전주․남원․부안이 그 권역 구분의 대표성을 띠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이 역시 거점장을 통해 구분한 상업권 구분과 일치하고 있다.
이상 전라도 내륙 지역을 거점장을 통해 상업권을 구분하고 다시 자연 지형에 따라 3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보았다. ꡔ택리지ꡕ에 나타난 자연 지형을 통해 구분해 본 전라도 내륙 지역의 각 지역권은 인위적으로 설정된 당시 행정 구역과도 대체로 일치함을 다음 몇 가지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조선 초기 전라도는 원래 현재와 같이 남도․북도 경계에 준하는 상도와 하도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선조 2년(1569)에 좌도와 우도로 바뀐다.
羅州의 赴擧儒生이, 上道․下道를 左道․右道로 고쳐 줄 것을 청하니 監司가 따랐다. 좌도는 光州․綾城․和順․長興․順天․淳昌․南原 등의 고을로 하고, 우도는 全州․羅州․海南․靈巖․靈光․古阜․扶安 등의 고을로 하였다.14)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전라도는 원래 上道와 下道로 나뉘어 있었고, 이는 다시 좌도와 우도로 나뉜다. 전라좌도와 전라우도에 속한 전라북도 지역을 살펴보면 먼저 좌도에 순창․남원이 있고, 우도에는 전주․고부․부안이 있다. 순창․남원이 전라도 내륙 지역의 동부 권역으로 나뉘고 전주가 다시 북부권으로 나뉘고 고부․부안이 서부 해안권으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볼 때 이는 지형 지역에 따른 권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 지형에 의한 당시의 구분이 인위적으로 설정된 당시 행정 구역과 일치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업권과 행정 체계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15) 권역 구분에 따라 설치된 장시가 행정 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장시가 갖고 있는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시는 15세기 말 전라도 지방에서 설립되기 시작하여16) 시기를 더하여 가며 물화 유통 뿐 아니라 중앙 정부 차원에서의 정보 수집과 교환 그리고 국가 시책 홍보의 장으로 기능을 담당하였다.17) 이것은 당시 중앙 정부가 백성에게 광범위하고 효율적인 정보 전달이 지금과 비교해 한계가 있었음을 고려할 때 국가가 설정한 행정 구역에 따라 고을이 형성되고 형성된 행정 단위 사이에 장시가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할 수 있다.
2. 내륙 지역의 장시 분포
조선 후기 경제 상황의 진전은 거시적으로 볼 때 농업․상업․수공업 등에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고, 그 잉여 생산물의 유통이 불가피해지면서 상업 활동도 예전과 달리 활성화되었다. 본래 조선 왕조는 重農 政策을 내세워 농업을 제외한 산업 모든 분야 전반에 걸쳐 국가가 그 활동을 규제하여 상업 활동은 市廛商人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하여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이에 따라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이 시기 이후 널리 확산된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을 촉진시켰다. 조선 후기에는 인구의 자연 증가 및 농민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고, 그들이 상업인구 또는 소비 인구가 되면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졌다.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화폐, 즉 銅錢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 각지에 場市와 浦口가 개설되고, 이들을 연계하는 원격지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조선 후기 상업계의 가장 큰 변화인 장시가 발전하게 된다.18) 이 시기에 이르러 장시는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독립적으로 설치되어 운영되던 장시가 상호간에 연계성을 가지고 18세기 중엽에는 그 수가 1천여 개로 증가하였다.
권역별 장시 분포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조선 후기 각 도 사이에서 전라도의 장시 수는 아래 표와 같다.
<표 3> 18세기 이후 장시 수의 변동
도명 |
읍수 |
시기별 장시 수 | |||
동국문헌비고 (1770년) |
만기요람 (1809년) |
임원경제지 (1830년) |
증보문헌비고 (1908년) | ||
경 기 충 청 전 라 경 상 황 해 평 안 강 원 함 경 |
33 53 53 71 23 42 26 11 |
101 157 216 278 82 134 68 28 |
102 157 214 276 82 134 68 28 |
93 158 188 268 109 143 51 42 |
102 162 216 283 82 134 68 28 |
계 |
312 |
1,064 |
1,061 |
1,052 |
1,075 |
* 출처 : 四方博, ꡔ朝鮮社會經濟史硏究ꡕ 上, 國書刊行會, 1976, 272쪽.
위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 후기 장시는 전국에 걸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전라도는 경상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장시 수를 기록하고 있다. 전라도 장시는 전국적인 장시 수에서 시기별로 볼 때 최고 20.3%에서 최저 17.8%의 분포를 점하고 있다.
<표 4> 조선 역대 전결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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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10(1786) |
순조3(1803) |
순조28(1828) |
경기 |
110,602 |
57,521 |
90,430 |
충청 |
255,679 |
127,730 |
256,936 |
전라 |
349,045 |
216,550 |
340,189 |
경상 |
341,863 |
209,783 |
337,319 |
강원 |
40,219 |
11,842 |
41,626 |
황해 |
129,276 |
73,593 |
132,056 |
평안 |
106,293 |
83,744 |
119,138 |
함경 |
109,166 |
65,134 |
117,702 |
* 출처 : ꡔ度支志ꡕ 總要․ꡔ經世遺表ꡕ 田制考․ꡔ靑丘全圖ꡕ 軍國總目表
<표 4>를 보면 전라도 내륙 지역에 나타난 장시 분포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파악된다. 먼저 장시 분포는 곡물 생산과 밀접히 관련됨을 알 수 있다. 이에 더하여 각 도별 장시 수는 인구와 농산물 생산량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 도별 전결 수는 전라․경상․충청․황해 순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장시 수와 비교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총 전결 수에 비례해 장시 수가 많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미곡 생산량이 인구의 집중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시장의 발달은 주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한 것인데 인구 밀도의 증가와 상품 경제의 진전이 그 하나이고, 전결 수에 따른 인구 부양 능력이 하나이다. 전라도 지방의 농업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기원되었으며 백제시대에 이르면 오곡 잡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농산물의 재배가 이루어졌다.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서도 이 지역은 농업 생산이 경제의 근간으로 부각되었다. 이에 더하여 東高西低 지형으로 인하여 형성된 하천은 灌漑와 연결되어 水田農業을 부각시킨 이외에도 旱田이 결부되어 경작지의 廣汎化로 나타났다.19)
또한 이 지역의 농업 생산은 전통적으로 稻作 經營이 위주가 되어 이미 백제시대부터 중농정책의 일환으로 이를 보급했다. 이것은 稻作 生産을 확대시키기 위한 기본 조치로서 灌漑事業은 역대의 주요한 관심사이기도 하였다.20) 동시에 이것은 전라도 전결 수와 장시의 분포 특징을 설명해주는 바가 크다. 전라도 내륙 지방은 동부 산악 지대인 남원․진안․장수 지역이 지리산과 덕유산을 끼고 있어 경작지가 적은 관계로 장시 분포가 서부 평야 지대와 비교해 분포 밀도가 적은 점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경작 지대에 많이 분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곡물의 상품화가 가져온 영향도 크다. 18세기 중엽 이후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장시가 확대되면서 농촌 장시에 있어서 곡물의 상품화21)는 지주층이나 부농층뿐 아니라 영세농이나 빈농층 역시 각종 세곡의 금납화 추세에 따라 곡물을 판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급자족적 자연 경제의 해체와 더불어 일상 생활에 필요한 수공업 제품을 사기 위해 곡물을 판매해야만 했다. 영세농이나 빈농들 역시 農糧이나 종자를 농업 노동자들은 그들의 식량을 시장에 의존해야만 했던 사정도22) 전결 수에 따른 장시 분포의 집중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장시 분포의 특징은 행정 중심지와 교통 중심지에 장시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고도의 행정기능을 가진 곳은 대체로 상업적 기능이 활발한 곳이었다.23)
ꡔ호남청사례ꡕ에서 읍 규모를 대읍․중읍․소읍․잔읍 등 4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전라도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대읍 - 나주․전주․광주․남원․순천․영광․영암 등 7읍
중읍 - 장흥․담양․장성․순창․김제․보성․고부․임피․무장
흥양․강진․해남․태인․함평 등 14읍
소읍 - 능주․여산․익산․낙안․금산․진도․금구․만경․창평
용안․무안․부안․함열․임실․흥덕․광양․곡성․옥과
고산․구례․장수․운봉․정읍․옥구․남평 등 26읍
잔읍 - 무장․진산․용담․진안․동복․화순 등 6읍24)
이렇게 분류된 전라도의 읍에는 다음과 같이 대부분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의 驛制는 군사적 행정적 목적에서 제정된 전국적인 육상 운송 기관이었으나 그 기능이 점차 상인, 관부의 수취물을 수송하는 교통 기관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25) 조선시대 전라도에 설치된 역은 半石(전주)․鶯谷(완주 이서면)․鳥原(임실 관촌)․葛覃(임실 갈담) ․蘇安(임피)․林(才)谷(함열)․良才(여산)․居山(태인)․川原(정읍 천원)․瀛原(고부)․扶興(부안)․內才(익산)․契樹道(남원, 임실 오수)에 昌活․東道․應領․潺水․引月(운봉), 濟原道(금산 제원)에 所川(무주 소천)․達溪(용담)․丹嶺(진안)․玉包(고산), 그리고 靑嚴道(나주)에 속한 靑松(무장), 景陽道(광주) 소속의 昌新(순창) 등 이었다.26)
<표 5> 조선시대 전라도의 驛 분포
구 분 |
察訪道 |
驛丞道 |
驛 名 |
全羅道 |
|
參禮道 |
參禮(전주) 半石(전주) 鳥原(임실) 葛覃(임실) 蘇安(임피) 村谷(함열) 良才(여산) 鶯谷(전주) 居山(태인) 川原(정읍) 瀛原(고부) 扶興(부안) 內才(김제) |
契樹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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獒樹(남원) 昌活(남원) 東道(남원) 應嶺(남원) 인월(雲峰) 潺水(구례) 知申(곡성) 良栗(순천) 洛水(순천) 德陽(순천) 益申(광양) 蟾居(광양) | |
靑巖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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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나주) 丹巖(장성) 永申(장성) 仙巖(광주) 申安(나주) 綠沙(영광) 加里(함평) 永保(영암) 景申(무안) 光里(남평) 鳥林(남평) 靑松(무장) | |
景陽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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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陽(광주) 德奇(담양) 加林(화순) 人物(綾州) 黔富(동복) 昌新(순창) 大富(옥과) | |
碧沙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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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沙(장흥) 可申(보성) 波靑(보성) 揚江(흥양) 洛昇(낙안) 鎭原(강진) 通路(강진) 綠山(해남) 別珍(해남) 南里(해남) | |
濟原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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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原(錦山) 所川(무주) 達溪(용담) 丹嶺(진안) 玉包(고산) |
* 출처 : ꡔ新增東國與地勝覽ꡕ
이러한 驛과 장시의 위치 관계는 장세 징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는 17세기 중반 이래 상업계의 변동과 함께 장시의 증가로 종래의 상업 정책에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장시 개설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하되 장시에 출입하는 상인들로부터 일정한 장세를 징수하는 것으로 정책 변화를 꾀하였다. 장세는 지방관아 재정 수입의 일부로 보충되는 잡세의 일종으로 민고세를 중심으로 한 각종 지방세와 중앙 정부로부터 용인된 일부 교부세를 일컫는데 지방마다 종류와 징수 방법이 다르고 수세 내역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27)
18세기 이후 지방 재정은 지방관 및 관속에 의한 중간 수탈과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담세자인 농민의 열악화, 향촌 사회의 변동 상황을 수렴하지 못한 부세 제도의 경직된 운영, 그리고 지방 재정의 팽창에 따른 재정 악화와 중앙 재정의 부족에 따른 상납분의 증가 등과 같은 요인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세 징수의 목적은 지방 관아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28) 장세 징수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차원에서 행정 중심지인 읍과 역에 장시를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Ⅲ. 전라도 내륙 지역 장시의 변동
1. 전주․남원 장시의 변화
조선 후기 장시는 15세기말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개설되었다. 장시가 개설되었던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느 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羅州牧使가 場市 禁壓을 반대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나주를 비롯한 인근의 몇몇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9) 16세기에 이르러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갔고,30) 이러한 경제 변화 속에서 충청도에도 장시가 개설되었다. 이어 明宗 대에 이르러 경상도까지 장시가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말에는 장시가 전국적으로 산간까지 확산될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18세기 말에 이르자 장시는 고립․분산되어 운영되던 것이 차츰 상호 연관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31) 이처럼 시간에 따라 개설, 확산, 상호 연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장시는 양적인 증가 추세에서 질적인 발달 추세로 옮겨가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장시권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1770~1830년까지의 장시의 변화를 살필 필요가 있다. 다음 <표 6>은 ꡔ동국문헌비고ꡕ와 ꡔ임원경제지ꡕ 그리고 해당지역 읍지에 나타난 전라도 전주 지역의 장시 변화이다.
<표 6> 전주 지역의 시기별 장시 변화
동국문헌비고(1770) |
임원경제지(1830) |
호남읍지(1872) | |||
장시 |
개설일 |
장시 |
개설일 |
장시 |
개설일 |
남문 |
2 |
남 |
2 |
남 |
2 |
서문 |
7 |
서 |
7 |
서 |
7 |
북문 |
4 |
북 |
4 |
북 |
4 |
동문 |
9 |
동 |
9 |
동 |
9 |
봉상 |
5, 10 |
봉상 |
5, 10 |
봉상 |
5 |
소양 |
1, 6 |
(소멸) |
|
(소멸) |
|
인천(仁川) |
2, 7 |
인천 |
2, 7 |
인천 |
2 |
삼례 |
3, 8 |
삼례 |
3, 8 |
삼례 |
3, 8 |
옥야 |
4, 9 |
옥야 |
4, 9 |
(소멸) |
|
이성(伊城) |
1, 6 |
이성 |
1, 6 |
이성 |
1, 6 |
이성(利城) |
1, 6 |
(소멸) |
|
(소멸) |
|
|
|
상아(신설) |
3, 8 |
(소멸) |
|
|
|
석불(신설) |
1, 6 |
(소멸) |
|
11개 |
|
11개 |
|
8개 |
|
* 출 처 : ꡔ동국문헌비고ꡕ, ꡔ임원경제지ꡕ, ꡔ호남읍지ꡕ
위 <표 6>을 보면 전주 지역의 장시가 시기에 따라 그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장시가 신설․폐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시 폐지 요인으로는 흡수․소멸․통합 등이 있고 신설 요인으로는 시장권 형성․연계관계 형성․독립적 기능 등이 있다.32) 이외 장시 폐지의 또 다른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있다. 純祖 대에 장시의 실태 파악이나 감독을 소홀히 하여 지방관에 의한 장세의 수탈이 격화되고 이로 인해 장시의 상품유통과 지역주민의 개설 욕구가 위축된 요인33)과 19세기 말기에 찾아온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궁핍으로 위축되었거나 수요 기반의 정보가 불완전한 산채에서 장이 흐지부지하게 서다가 서서히 소멸되는 요인이 그것이다.34)
이러한 유형에 따라 전주와 남원의 장시를 살펴보자. 먼저 17세기 전주에 나타난 장시는 전주부내에 위치한 동․서․남․북문의 장시를 중심으로 남쪽을 제외한 동․서․북 방향으로 장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장시권은 서쪽으로는 김제․금구 원평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삼례를 거쳐 황등․여산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대장시권을 형성하여 운영되던 장시는 19세기에 이르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장시 수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표 6>을 통해 증감 내용을 살펴보면 ꡔ동국문헌비고ꡕ에는 없으나 ꡔ임원경제지ꡕ에 나타난 장시는 상아장과 석불장이고 ꡔ동국문헌비고ꡕ에는 있으나 ꡔ임원경제지ꡕ에서는 사라진 장시는 소양장과 이성장(利城)으로 18~19세기에 전주부내에서는 2개의 장시가 신설되고 2개의 장시가 폐지되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ꡔ동국문헌비고ꡕ에는 있으나 ꡔ읍지ꡕ에서 사라진 장시는 옥야장․상아장․석불장 등 3개 장시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주부내 장시는 11개에서 8개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전주부내의 장시 변동을 앞서 말한 변동 요인에 따라 살펴보자.
<그림 2> 1770년경 전주 지역의 장시 분포
18세기에서 19세기 초엽으로 넘어오면서 전주부내에서는 상아장과 석불장이 신설되었다. 전주의 四門 밖에 위치한 장시의 개시일은 2, 7일과 4, 9일이다. 이러한 개시일을 갖고 있는 시장권내에서 석불장은 1, 6일의 개시일을 가지고 신설되었다. 전주부 주변에 개시되는 장시는 3, 8일의 개시일을 갖는 삼례장과 역시 같은 개시일의 금구장이 있고 5, 10일이 개시일인 봉상장이 있다. 석불장이 신설되기 이전 전주부내의 재화 거래는 2, 7日→3, 8日→4, 9日→5, 10日 순으로 개시되는 장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시 순서에 따르다 보면 1, 6日은 장시가 열리지 않는 無市日이 된다. 전주는 ꡔ만기요람ꡕ에서 언급한 전국 최대장 15개 중 하나이다.35) 전주부의 시장 규모에 대해 ꡔ임원경제지ꡕ에서 찾아보면 전주부내의 大場은 중국, 일본 상인에 의한 중개 교역품이 거래되었고 국내의 상인이 운집하여 상품 교환을 하였기 때문에 전주부는 지방적인 需給의 중심이었다.36)
<그림 3> 1830년경 전주 지역의 장시 분포
특히 전라도는 주곡인 곡류․약재․우마․포류․종이 등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상인이 많이 몰려들었다.37) 이와 같은 시장 규모를 갖고 있는 장시가 無市日을 갖고 있다면 재화 거래에 불편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無市日인 1, 6일에 개설되는 장시를 신설함으로써 1, 6일→2, 7日→3, 8日→4, 9일→5, 10日 순으로 장시가 열리고 無市日이 없게 된다. 석불장의 신설은 각 장시 사이에 연계 관계 형성을 통해 시장권을 확대함으로써 재화 거래의 효율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4 > 1872년경 전주 지역의 장시 분포
상아장의 신설 역시 석불장의 신설된 요인과 마찬가지로 신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아장이 신설되기 전 익산․황등․김제 지역에는 익산․황등․옥야․이성․독산․임피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이 지역 장시는 1, 6日→2, 7日→4, 9日→5, 10日 순의 개시일을 가지고 있어 3, 8日이 無市日이었다. 1, 6일에 이성장을 이용한 후 익산장 2, 7일을 거쳐 3, 8일의 개시일을 갖고 있는 함열장이나 나포장을 이용하기에는 위치 간격이 넓다. 따라서 위치 간격이 좁은 지역에 상아장을 신설함으로써 개시일이 1, 6일→2, 7日→3, 8日→4, 9일→5, 10日 순으로 이루어져 익산 황등 김제 지역에서의 장시 이용과 시장권 형성에 효율을 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 전주부내에서 개설되었던 장시들이 소양․이성(利城)․석불․상아 순으로 폐지된다. 소양․이성(利城)․석불 3개 공통점은 개시일이 1, 6日 이다. 대장시권인 전주부내에 1, 6일의 개시일을 갖고 있는 소양․이성(利城)․석불 3개의 장시 모두 대장시권인 전주부내에 개시되고 있다. 흡수는 동일규모의 장시가 병존하다가 상품 화폐 경제의 일정한 발전 추세에 따라 장들 간에 규모별 분화가 발생하여 보다 대규모화 해가는 장시가 이웃한 장시를 포섭해 버리는 것으로38) 소양장과 이성장은 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대장시권 내에서 동일한 1, 6일의 개시일을 갖고 개설되어 운영되었으나 석불장이 1, 6일의 개시일을 가지고 전주부로부터 접근이 용이한 위치에 신설됨에 따라 거래 규모에 타격을 받아 전주부에서 가까운 석불장과 전주부내장에 흡수 된 것으로 여겨진다. 1830년 이후 석불장 역시 1872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석불장은 전주부내의 장시와 매우 인접한 시장으로 동일 상권내에서 개시일이 동일한 소양장과 이성장을 흡수한 후 소양장과 이성장이 폐지 이유와 동일한 이유로 전주부내장에 흡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전주부의 상업적 기능은 분화되어 가고 있었다. 전주의 四門外場은 개시일 뿐 아니라 취급하는 상품이 기능화 되었다. 동문외장은 한약재와 특용 작물의 판매, 서문외장은 소금, 깨와 같은 양념류와 어물의 판매, 남문외장은 생활품과 곡식 판매, 북문외장은 포목과 잡곡을 판매하였다.39) 현존하는 장시에 대한 문헌에는 석불장의 판매 품목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석불장은 전주의 4문외장과 동일한 품목을 판매하였거나 전주부내의 상설 점포와 판매 품목이 동일하여 흡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40)
다음 <표 7>은 ꡔ용성지ꡕ․ꡔ동국문헌비고ꡕ․ꡔ임원경제지ꡕ에 나타난 남원 지역 장시의 시기별 변화이다. 남원 지역의 장시를 기록한 문헌 가운데 특이한 점은 1699년에 편찬된 것으로 ꡔ용성지ꡕ가 존재하며 장시에 관한 기록이 있다. 시기별 문헌에 나타나 있는 남원 지역 장시의 변동을 살펴보자.
<표 7> 남원 지역의 시기별 장시 변화
용성지(1699) |
동국문헌비고(1770) |
임원경제지(1830) | |||
장시 |
개설일 |
장시 |
개설일 |
장시 |
개설일 |
남원읍내 |
4, 9 |
남원읍내 |
4, 9 |
남원읍내 |
4, 9 |
오수 |
2, 7 |
오수 |
2, 7 |
오수 |
2, 7 |
아산 |
3, 8 |
아산 |
3, 8 |
아산 |
3, 8 |
덕석 |
3, 8 |
산동 |
5, 10 |
산동 |
2, 7 |
백파 |
1, 6 |
번암 |
1, 6 |
번암 |
1, 6 |
|
|
동화 |
3, 8 |
동화 |
3, 8 |
횡탄 |
3, 8 |
(소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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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탄(신설) |
5, 10 |
6개 |
|
6개 |
|
7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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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ꡔ용성지ꡕ, ꡔ동국문헌비고ꡕ, ꡔ임원경제지ꡕ
남원 지역의 장시를 처음 기록하고 있는 ꡔ용성지ꡕ가 편찬된 시기인 17세기 말 남원에는 6개의 장시가 개설되었다. 이시기 6개의 장시는 각각 독립적으로 기능하였다. 아산장, 덕석장, 횡탄장은 모두 3, 8일에 설시하여 개시일이 서로 중복되는데, 이렇게 될 경우 장시권 형성과 재화 교역에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설일이 중복되는데도 불구하고 장시가 개설된다는 것은 각각의 장시가 연계되지 않고 독립적․개별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후 18세기 말에 이르러 횡탄장이 소멸되고 동화장이 신설되어 장시 수에 있어서 변화는 없지만 장시권 내부에 변화가 있었다. 이후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18세기 말에 사라졌던 횡탄장이 개설일을 달리하여 신설되어 장시 수는 모두 7개로 18세기 말에 비해 1개가 증가하였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남원 지역에 개설되어 있는 장시는 번암장에서 1, 6日 개시하여 오수장(2, 7)․아산장(3, 8)․남원읍내장(4, 9)․산동장(5, 10) 순으로 장시권을 형성하여 개시되었다. 이 가운데 횡탄장의 경우 개시일이 아산장과 동화장과 중복된다. 횡탄장의 경우 남원읍내장과 산동장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아산장과 동화장의 개시일과 중복된다 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남원 지역 장시의 경우 산동장을 제외한 모든 장시가 남원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고 장시권이 남원 북쪽으로 형성되어 있어 3, 8日에 개시되는 장시로서 기능하기에 동화장이나 아산장 보다 어려움이 있다. 반면 동화장과 아산장은 동일한 3, 8일의 개시일을 가지고 있으나 동화장의 경우 임실장이나 오수장 또는 관촌장과 소장시권을 형성하여 기능할 수 있다. 또한 아산장의 경우 남원 읍내장이나 갈담장 또는 임실장과 소장시권을 형성하여 장시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근 읍인 운봉의 경우에도 3, 8日에 개시되는 인월장이 인접해 있어 횡탄장을 이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장시의 신설은 장시 존립에 필요한 수요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전제로 한다. 기본적인 요인이 인구 밀도이고, 장시에 출입하는 지역 주민수가 장시의 개설과 유지의 관건이 된다고 할 때41) 횡탄장은 동화장이나 아산장에 비교해 주변의 장시 밀도가 낮고 타 장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변 인구가 장시를 이용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횡탄장은 접근성이 수월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장시의 기능을 잃어버려 폐지․소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이르러 횡탄장은 개시일을 5, 10日로 개시일을 달리하여 다시 신설된다. 또한 산동장은 개시일을 달리하여 5, 10일 개설되던 것이 2, 7日로 개시일을 택하여 개설된다. 18세기 말 산동장의 개시일은 5, 10일이었다. 그러나 횡탄장이 19세기 초 산동장과 동일한 개시일을 가지고 신설되면서 산동장은 횡탄장과 다른 개시일을 택한다. 이러한 횡탄장의 신설과 산동장의 개시일 변화는 동일한 장시권에 있는 장시들이 서로 연계됨과 동시에 대립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시권의 형성에 있어서도 남원을 기준으로 운봉장과 횡탄장 그리고 산동장의 개시일이 모두 동일할 경우 장시권은 형성되지 못하고 접근성과 연계성에서 타 장시에 비교해 용이하지 못한 장시는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남원 지역의 장시는 17세기 말 개별적․독립적으로 개설되다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르러 장시 사이에 좀더 연계성을 갖는 장시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2. 장시권 변화의 특징
조선 후기 전라도 내륙 지역의 大邑인 전주와 남원의 장시를 살펴보았다. 16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시대 상업계의 변화는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후 17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 본 궤도에 올랐다. 16세기 이전의 시장은 도회지의 상설 점포인 시전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과 지방의 교통 요지에 정기적으로 시장 상인과 부근 주민이 모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 등이 있었다. 이들 시장은 그 취급 품목이 가내 수공업품이나 농산물 등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교환 거래가 특수한 장소나 건물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시장마다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시장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농촌 상업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장시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또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도 대체로 三南 지방에만 장시가 섰으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그것이 중부 지방은 물론 평안도, 함경도 지방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장시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일은 무엇보다도 그 수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전기 장시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비교 할 수 없으나 정부의 禁壓 정책 때문에 그 수가 그다지 증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정부가 금압 정책을 폐지하고 大同法 실시 등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장시수의 증가는 급격히 늘어났다.
18세기에 이미 1천여 개로 증가한 지방 장시는 이후 계속하여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지만 대부분이 정기 시장이었을 뿐 쉽게 상설 시장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르러서 발달하였고 대도시 주변의 경제적 요지와 지방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에서는 장시들이 차츰 상설시장화 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인구의 증가로 인한 도시 발달과 더불어 상업 자본의 누적과 상품 경제화의 진도에 따라 자연적으로 상설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42)
이러한 상품 경제의 발달 추세에도 불구하고 전주 지역의 장시는 시기를 더할수록 오히려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 전주 지역에 개설되고 있는 장시는 기록에 의하면 18세기 말 11개였던 것이 19세기에 이르러 8개로 감소한 것이다. 반면 남원 지역의 장시는 미약하나마 그 수가 증가하였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나타난 상이한 변화는 상품 경제의 발달이 곧 시장의 증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정기시의 발달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를 따른다. 하나는 인구 밀도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정기시의 밀도가 증가하여 시장권이 축소되는 전통적인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 경제의 발달과 교통 수단의 발전 등으로 인해 대장이 주변의 소장을 흡수하면서 시장권이 확대되는 근대적 변화이다.43)
전주 지역 장시의 경우 2개의 장시가 소멸되고 2개의 장시가 신설되었다가 다시 신설된 장시 2개를 포함한 4개의 장시가 소멸되었다. 신설된 장시는 주변 지역 장시가 가지지 못한 개시일을 갖게 됨으로써 시장권 연계와 확대에 기여하는 형태로 기능하였으나 경제 규모가 발달됨에 따라 개시일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근의 주변장 또는 대장에 흡수되었다.
<그림 5> 1770년경 남원 지역의 장시 분포
석불장의 경우 전주 四門外場과 인접하여 있음으로써 더욱 큰 전주 四門外場에 흡수되었으며 소양장과 상아장 역시 인접 지역에 개설된 장시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주 四門外場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기능하였으나 소멸 또는 폐지된 각각의 장시는 인근의 장시와 개시일, 접근성에 있어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주 지역 장시는 정기시 발달 형태로 볼 때 전통적 변화를 겪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6> 1830년경 남원 지역의 장시 분포
남원 지역의 장시는 17세기 말 개시되고 있던 6개의 장시가 상호 독립적으로 기능하였다고 여겨진다. 17세기 말 이후로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면서 장시수의 증가가 1개에 그쳤다. 표면적으로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원 지역 장시의 변동은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곧 기존의 장시가 개설일을 달리하여 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산동장과 횡탄장에서 나타난다. 산동장의 경우 다른 장시와 동일한 개시일을 피함으로써 계속해서 상업적 영향력을 행사하려했던 것이다. 만일 산동장이 횡탄장과 동일한 개시일을 가졌다면 횡탄장이 대장인 남원읍내장과 인접함으로써 접근성이 용이해 산동장은 경쟁 관계를 유지하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며 곧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전주부내 인접한 장시권이 전통적인 변화를 겪었던 반면 남원 읍내장을 중심으로 한 남원 지역 장시들은 당시 안정적인 시장 구조를 이루었고 이를 통해 근대적인 발전 방향으로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남원은 전주와 더불어 장시권의 중심으로서 기능을 담당함과 동시에 같은 시기 전주와의 사이에 새로운 장시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리산 주변의 구례와 함양에서 새로운 장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전주와는 별도로 상업적 영향력을 형성하여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Ⅳ. 맺 음 말
앞에서 살펴본 바를 요약함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본고는 조선후기 장시 발달에 대한 사례 연구로서 전주와 남원을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 내륙 지역의 장시의 분포와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전라도 내륙 지역의 상업권을 추정하여 보았다. 1830년대 전라도 지방의 장시들은 31개의 소장시권을 형성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중 개시일을 달리하는 5기의 장시가 개설되어 지역민이 연중무휴로 필요한 물화를 교역할 수 있었던 소장시권은 3개의 장시권 뿐이며, 나머지 28개의 장시권은 4기 혹은 3기의 장시가 연결된 모습을 나타낸다. 28개의 소장시권으로 이루어진 1830년대 전라도 지방의 장시권은 1일 장시권을 형성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서로 연계되어 中․大場市圈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중․대장시권의 형성은 소장시권이 한달에 6일 내지 12일이 無市日이 되는 공백을 메워주는 기능을 하며 이러한 중․대장시권의 형성은 읍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또한 전라도 지방의 中․大邑이라 할 수 있는 전주․남원․김제․고부․임피․무장․태인 등의 지역이 적게는 2개에서 많게는 5개의 소장시권을 연결하는 대장시권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내륙 지역의 상업권은 지형 지역에 따라 ① 전주를 중심으로 한 북부 전주권, ② 임실․장수․순창․남원을 권역으로 한 산악 지형인 동부 남원권, ③ 해안 지역을 묶는 서부 부안․고창권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러한 상업권으로서의 장시 분포는 다음과 같은 양상을 가지고 있다. 먼저 장시 분포는 곡물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 도별 전결 수는 전라․경상․충청․황해 순으로 장시 수와 비교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총 전결 수에 비례해 장시 수가 많은 특징이 나타난다. 이것은 미곡 생산의 증가가 인구의 집중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장시 분포의 특징은 행정 중심지와 교통 중심지에 장시가 분포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고도의 행정 기능을 가진 곳은 대체로 상업적 기능이 활발한 곳이었다. 驛이 설치된 전라도의 읍에는 대부분 장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행정 중심지와 장시의 관계는 장세와 관련이 있다. 조선은 지방 재정 악화를 장세 징수를 통해 해결하려 하였고, 장세 징수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부분의 읍과 역에 장시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전주에 나타난 장시는 전주부내에 위치한 동․서․남․북문의 장시를 중심으로 남쪽을 제외한 동․서․북 방향으로 장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운영되던 장시권은 19세기에 이르러 상품 경제의 발달 추세에도 불구하고 전주 지역의 장시는 시기를 더할수록 오히려 그 수가 감소하였다.
반면, 남원 지역의 장시는 그 수가 증가하였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나타난 상이한 변화는 상품 경제의 발달이 곧 시장의 증가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기시의 발달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를 따른다. 하나는 정기시의 밀도가 증가하여 시장권이 축소되는 전통적인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 경제의 발전 등으로 인해 대장이 주변의 소장을 흡수하면서 시장권이 확대되는 근대적 변화이다.
전주부와 인접 지역 장시권이 전통적인 변화를 겪었던 반면, 남원 읍내장을 중심으로 한 남원 지역 장시들은 당시 안정적인 시장 구조를 이루고 있었고 이를 통해 근대적인 발전 방향으로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 군산대 사학과 강사
1) 조선 후기 문헌에는 定期 市場을 ‘場市’라는 용어로 표기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정기시․정기시장 또는 5일장․장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본 논문에서는 문헌에 표기된 대로 장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2) 善生永助, ꡔ朝鮮の市長ꡕ, 朝鮮總督府, 1924.
2) 善生永助, ꡔ朝鮮の市長ꡕ, 朝鮮總督府, 1924.
________, ꡔ朝鮮人の商業ꡕ, 朝鮮總督府, 1925.
________, ꡔ朝鮮人の商業ꡕ, 朝鮮總督府, 1925.
________, ꡔ朝鮮人の市場經濟ꡕ, 朝鮮總督府, 1929.
________, ꡔ朝鮮人の市場經濟ꡕ, 朝鮮總督府, 1929.
四方博, 「朝鮮時代 都市와 農村에 관한 一試論 - 大邱戶籍의 관찰을 基礎로 하여」, ꡔ京城帝大法學論集ꡕ 12冊, 1941.
3) 홍희유, 「18~19세기 전반기 장시들에서의 상품유통의 발전」, ꡔ역사과학」 5, 1962.
4) 한상권, 「18세기말 -19세기초의 場市發達에 대한 基礎硏究」, ꡔ韓國史論ꡕ 7, 1981.
5) 김대길, ꡔ朝鮮後期 場市硏究ꡕ, 국학자료원, 1997.
6) 이경식, 「16세기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 ꡔ韓國史硏究ꡕ 13, 1985.
7) 김대길, 「朝鮮後期 京畿道의 場市」, ꡔ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ꡕ 上, 1992.
8) 고석규, 「朝鮮 後期 場市 變動의 樣相」, ꡔ韓國文化ꡕ 21, 1998.
9) 이헌창, 「朝鮮後期 忠淸道地方의 場市網과 그 變動」, ꡔ경제사학ꡕ 18, 1994.
10) 고석규, 「朝鮮 後期 場市 變動의 樣相」, ꡔ韓國文化ꡕ 21, 1998, 210쪽.
11) 오정윤, 「조선후기 충청도지방 장시에 대한 연구」, 인하대 석사학위논문, 1995, 30쪽.
12) 고석규, 앞의 논문, 120쪽.
13) ꡔ擇里志」, 「全羅道」, 한국자유교육협의회, 1974, 109~110쪽.
14) ꡔ선조실록ꡕ 3, 2년 7월 갑신.
15) 고석규, 앞의 논문, 217쪽.
16) 김대길, ꡔ朝鮮後期 場市硏究ꡕ, 국학자료원, 1997, 21~22쪽.
17) 김대길, 위의 책, 238쪽.
18) 최원기, 「조선후기의 경제」, ꡔ한국사ꡕ 33, 국사편찬위원회, 1997.
19) 윤원호, 「조선시대 전북지역의 경제」, ꡔ전라문화논총ꡕ 2, 1988, 2쪽.
20) 윤원호, 위의 논문, 3쪽.
21) 홍희유, 앞의 논문, 60쪽.
22) 이세영, 「18,9세기 穀物市場의 형성과 流通構造의 변동」, ꡔ한국사론ꡕ 9, 1985, 220쪽.
23) 이헌창, 앞의 논문, 9쪽.
24) ꡔ湖南廳事例ꡕ, 규장각도서, No. 15232. “大中小殘邑 六千結以上爲大邑 四千結以上爲中邑 二千結以上爲小邑 菫過千結以上爲殘邑”
25) 오명모, 「李朝都市의 社會 經濟構造 分析」, ꡔ전북대학교 논문집ꡕ 15, 1973, 267쪽.
26) 최병운, 「전라북도의 연혁」, ꡔ전라문화논총ꡕ 3, 1989, 30쪽.
27) 오영교, 「朝鮮後期 地方官廳 財政과 殖利活動」, ꡔ學林ꡕ 8, 1987, 7쪽.
28) 오영교, 앞의 논문, 8~13쪽.
29) 김대길, 앞의 논문, 22쪽.
30) 김대길, 앞의 논문, 33쪽.
31) 한상권, 앞의 논문, 181~183쪽.
32) 한상권, 앞의 논문, 207~222쪽.
33) 이헌창, 앞의 논문, 29쪽.
34) 이헌창, 앞의 논문, 35~38쪽.
35) 전주부내장은 ꡔ만기요람ꡕ의 기록을 보면 남원 읍내장과 더불어 전국 장시 가운데 최대장으로 꼽고 있다. 이것은 미곡 생산이 많고 紙物이 특산물로써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36) 김제군청, ꡔ김제군사ꡕ, 1978, 519쪽.
37) 오영모, ꡔ조선시대 지방경제사 연구ꡕ, 교음사, 1992, 80쪽.
38) 한상권, 앞의 논문, 207쪽.
39) 장명수, ꡔ성곽발달과 도시계획연구-전주부성을 중심으로ꡕ, 학연문화사, 1994, 125쪽.
40) 장명수, 위의 책, 133쪽.
41) 이헌창, 앞의 논문, 38쪽.
42) 강만길, 「朝鮮後期 商業의 問題點」, ꡔ韓國史硏究ꡕ 6, 1971, 65쪽.
43) G.W.Skinner(양필승 譯), ꡔ中國의 傳統市場ꡕ, 1989, 96~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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