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주거문화

四合院과 한옥

by 8866 2009. 3. 20.

四合院과 한옥

 

 

사합원은 중국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이다. 漢나라때 화북지방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주거형태로 자리잡게 된 사합원은 한족漢族과 함께 중국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그 곳의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맞도록 변형이 되기는 하였지만 중정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기본 구성은 지켜져 갔다. 이러한 유사성은 한족의 주거문화가 중국의 주거환경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합원은 중국 특히 한족의 문화적인 요체이다. 사합원에는 음양오행사상, 유교와 도교, 풍수사상 등과 같은 중국의 정신세계가 작용하였고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위계적 가족제도도 크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합원은 단순히 살기 위한 도구만은 아닌 중국의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문화의 총화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사합원과 우리의 한옥을 비교하여 봄으로서 어떠한 문화의 배경에서 이러한 주거문화가 발전하였는지 알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합원의 구성은 전국적으로 산재하여있지만 발생이 시작된 북경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사합원의 역사와 구성(깊게본 중국의 주택 내용을 중심으로)

 

가) 사합원의 발생사합원은 건물로 둘러싸여 폐쇄된 형식의 집을 말한다. 사합원은 내향적이고 폐쇄적인 공간구성을 하고 있으며, 축적軸的구성,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한 구성, 위계적 공간구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합원의 주택은 이미 한나라 때 완성이 되었다. 한나라 때 만들어진 가형도기家形陶器와 묘상전墓像塼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 사방이 건물과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삼문협三門峽에서 출토된 가형도기에서는 누각 주변에 무사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광주에서 출토된 토기에서는 네 모퉁이에 각루가 설치되어있고, 앞 뒤 대문에 문루가 설치되어 있고 문루아래 병기를 든 무사가 지키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있다. 이러한 가형도기를 통해서 봉건시대의 주택은 요새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불안하고 동요된 상태에 처해있어서 건물을 설계할 때 방위성防衛性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건물의 외벽은 안전을 위한 것이며 문과 창도 주변이 담에 달아 임의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채광과 통풍을 위해서 중정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사합원식 배치는 장기간 존속하였고 다른 형태로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다. (중국고전건축의 원리/117-118쪽)

 

사합원은 상류층의 주택으로서 주로 귀족, 상인, 지주, 부농 등이 거주하였던 집이다. 농촌에도 많이 건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도시의 주택으로 발전되어 왔다. 사합원의 기본 구조는 중앙에 거실을 두고 양측에 침실을 일명이암(一明二暗)으로 규정되는 단위 건물로서 둘러싸여 있다. 이 건물은 전면은 개방되어 있지만 후면과 측면은 폐쇄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북방의 찬바람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단위 건물이 ㅡ자형으로 배치되는 것을 기본으로 좌우에 날개 형식으로 뻗어내려온 3합원으로 발전되고 최종에는 중정을 중심으로 폐쇄형구조를 가지는 사합원으로 발전한 것이다.

 

사합원의 배치는 남북의 종축을 중심으로 대칭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의 사합원의 대문은 종축에서 벗어나 남동쪽에 치우쳐져 있다. 이렇게 변화된 것은 송대에 들어서이다. 송대에 들어서 선천팔괘先天八卦를 주창하는 중수지리설이 일반화되면서 대문을 중심축에 놓지 않은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정남보다는 건향乾向(북서쪽)과 곤향坤向(남동쪽)이 가장 길한 방위라는 풍수설을 근거로 주택의 대문을 결정한 것이다. 즉 도로를 남쪽에 면하고 있는 주택은 남동쪽에 대문을 두고, 도로를 북쪽에 면하고 있는 주택은 북서쪽에 대문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동쪽은 그 다음으로 좋은 향으로서 우물이나 부엌을 두는 것이 좋고 제일 나쁜 향인 남서쪽에는 창고나 변소가 위치하는 것이 좋다는 설이다. 이러한 풍수설은 최근까지도 지켜져 왔다.

가) 사합원의 공간구성북경의 사합원은 단층의 건물이 중정을 감싸고 있는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강남의 중층의 건물보다는 한결 여유로운 배치가 되고 있어 강남의 건물과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경의 사합원의 공간구성은 매우 명쾌하다. 사합원의 기본 구성은 네 동의 건물이 중정을 중심으로 ㅁ자형태로 배치되는 구조이다. 집 가장 안쪽에서 남쪽으로 면하여 배치된 건물이 집의 중심이 되는 정방正房이고 정방 앞쪽 좌·우에 상방廂房이라는 건물이 배치된다. 그리고 정방의 정면에 길을 따라 길게 도방倒防 또는 도좌방倒座房이 배치된다. 정방과 상방은 1명2암의 구조이다. 사합원을 구성하는 건물 중에서 정방이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최연장자가 거처하는 곳으로서 정방 중앙의 방에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조당祖堂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가족의 거실로 사용됨으로서 실질적, 상징적 중심이 되는 곳이다. 좌우의 상방은 기타의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도 동쪽이 상위로서 윗사람이 거주한다. 도방은 하인과 손님이 거처하는 방으로 사용된다. 중정은 화북지방에서는 원자阮子라고 불린다.

 

앞서 언급한 사합원의 기본공간은 최소공간으로 이러한 대규모 저택에서는 중정 중심의 공간이 덧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확장되어간다. 최초의 ㅁ자 공간에 ㄷ자형공간이 북쪽으로 부가하여가는 방식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간다. 이러한 공간단위를 진進으로 부르는데 왕족의 경우는 7진 또는 9진으로 축조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일반화된 것은 최소단위인 1진에서 시작하여 4진까지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사합원에는 기본 구성에 몇 가지 시설들이 더 추가된다. 첫째 대문은 건물의 얼굴로서 주인의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었다. 대문은 신분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설치되었다. 동일한 계층은 동일한 형태의 대문이 설치되었는데 크게는 두 가지 형식이 존재하였다. 첫 번째는 완전히 집의 형태의 대문으로서 고관들이나 부유한상인들의 주택에 사용된 것으로 옥우식屋宇式대문이라고 불리고 두 번째는 벽식壁式대문이다. 벽식대문은 벽의 일부에 개구부를 만든 것으로 간소하게 처리된 것이다.

 

길에 면하여 설치된 벽을 조벽照壁이라고 하고 대문을 들어서서 바로 마주보게되는 벽을 영벽影壁이라고 한다. 사합원에서는 조벽에는 문 외에는 개구부를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합원이 밀집해 있는 주택가를 돌아보면 매우 건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영벽은 실내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설치한 벽으로 집의 얼굴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양한 문양과 길사송어吉辭頌語로 장식하게된다. 이 영벽에서 좌측으로 돌아들어 중앙통로를 이용하여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큰 규모의 사합원에서는 우측으로 별도의 통로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주인과 손님은 좌측의 중앙통로를 통해 들어가고 우측의 통로는 여자와 하인들이 사용하는 통로이다. 손님은 영벽을 지나 좌측으로 돌아 들어가 전원前院 중앙에 설치된 안채와 구분을 짓는 수화문垂花門을 지나야한다. 수화문은 내외를 구분하는 중요한 문이다. 예전 正중앙에 있었던 대문이 남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대문의 역할이 감소한 반면 내문인 수화문이 실질적인 입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외부인은 주인의 허락없이는 수화문을 통과할 수 없다. 수화문은 2중문으로 되어있는데 외부로 면한 문은 기반문棋盤門으로 불리는데 방어를 위한 문으로 낮에는 열어놓지만 밤에는 닫아 놓는다. 내부에 설치된 문은 병문屛門이라고 불리는데 차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문은 시각과 소음으로부터 내부공간을 보호하려고 설치된 문이다. 병문은 결혼식과 장례식과 같이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닫아놓는 문이다.

 

수화문을 통과하면 곧 중정이다. 집이 몇 개의 진으로 구성되어있을 때 처음 나오는 중정은 공공적 성격을 띤다. 첫 번째 중정에 면하여 있는 정방은 남자 주인의 사랑방 및 응접실 또는 서재의 역할을 하며 관혼상제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렇게 공공공간으로 사용되는 정방을 별도로 청방廳房이라고 부른다. 청방좌우에 있는 와실은 서재 등으로 활용되고 기타 용도로 사용되는 이방耳房이 붙어있다. 이방은 좌우측 와실에 붙어 있는 방으로서 와실에 보조적 기능을 하고 있다. 주택의 규모에 따라 이방이 각각 2개씩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방이 설치된 것은 명대에 확립된 주택의 규제 때문이다. 명대에는 1,2품의 관리의 청당은 5칸9가이고 3,5품은 5칸7가, 6품에서 9품까지는 3칸57가로 규제하였고 서민은 3칸5가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중국고대건축사/유돈정/세진사/466쪽) 이러한 규제를 피하기 위하여 부속채 형식으로 지어 이러한 규제를 벗어났던 것이다. 청방은 중국주거의 구성원리인 전조후침前朝後寢에서 전조에 해당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다. 청방 뒤에 있는 또 하나의 중정은 후침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곳은 가족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곳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사적私的 공간이다. 이곳의 정방은 주인부부가 사용하는데 조당祖堂이라고 부른다. 이 곳에는 조상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가족의 일상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곳의 중정은 나무와 꽃 등으로 장식을 하여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중정에는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회랑을 설치하는데 이것을 유랑游廊 또는 주랑走廊이라고 부른다. 이 회랑은 송대 이후에 도입된 것으로서 날씨의 변화와 상관없이 건물간의 이동이 편이하도록 하여준다.

 

중규모 이상의 사합원에서는 정방 후면에 후조방後 房 또는 후조루後 樓라는 건물이 놓였다. 후조방과 정방사이의 좁고 깊은 공간을 후원後院이라고 한다. 후조방은 서비스 건물로서 부엌, 창고, 가사용작업실, 여자하인의 거처 등으로 사용되었다. 규모가 매우 큰 사합원에서는 후조방과 정방사이에 또 하나의 긴 건물을 배치하는데 이곳에는 미혼의 딸이나 첩 등이 기거하였다. 또한 대규모의 사합원에서는 주택의 오른쪽에 별도의 통로가 있었다. 이 통로는 피농避弄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하인들과 여인들을 위한 통로로서 서비스를 위한 통로이다. 피농은 강남의 주거에서는 집안식구들 만의 전용통로로 매우 적극적으로 설치되어있다. 강남의 피농은 손님과 주인이 기거하는 청당을 거치지 않고 뒤에 있는 거주공간으로 들어가고, 또한 중정이 좁고 건물간에 간격이 없이 배치되어 있어 건물간에 방화를 위하여 설치된 공간이다.(넓게 본 중국의 주택/69-70쪽) 그러나 화북 지방에서는 중정이 상대적으로 넓어 이러한 피농의 필요성이 감소되었다. 그리고 사합원 중에서 귀족의 집에는 도좌방과 수화문 사이에 요방腰房이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곳은 가마 등의 탈것이나 수행인의 대기실 등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다) 실의 구성개개의 건물은 1명2암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중앙의 공간을 당堂이라고 부르고 주로 거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좌우의 공간은 와실臥室로 불리는데 침실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구성은 정방이나 상방할 것 없이 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정방에서 중정으로 연결하는 문은 당에만 있다. 좌, 우측에 있는 와실은 중정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이 좌우의 방도 위계가 있어 동쪽 방이 더 높은 위계를 차지하여 남자가 동쪽방을 여자가 서쪽 방을 사용하거나 첩이 같이 기거할 경우 정부인이 동쪽방을 첩이 서쪽 방을 사용한다. 특히 정방의 중앙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조당이라고 불렸다. 조당은 제사와 관혼상제의 장소로 사용되는 곳으로서 가장 품위있게 장식한다. 와실은 침실로 쓰이는 사적공간이다. 와실에는 침대와 기타 개인이 쓰는 가구가 설치된다. 북경을 포함한 화북지방에서는 침대대신 쪽구들 형식의 캉( )을 설치한다. 와실과 당의 구분은 칸막이로만 구분한다. 이것은 주택의 방을 보다 다양하게 쓰기 위한 장치이다. 와실과 당사이에 있는 칸막이는 다양한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합원의 주택에서 부엌과 변소 욕실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집의 구조가 1명2암으로 구조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합원의 부엌은 전체에 분산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각 가구단위별로 식사는 각자가 만들어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각 당별로 부엌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사합원의 부엌은 가장의 식사는 후조방에 있는 부엌에서 처리하고 나머지 건물에서는 당의 한쪽 와실을 부엌으로 만들거나 이방을 부엌으로 만들어 사용하였고 일부는 야외에서 조리하였다. 물은 공동우물에서 길어다 먹었기 때문에 부엌에는 물항아리가 설치되었다. 중국에서는 욕실이 만들어져있지 않다. 세면이나 목욕은 대야나 항아리에 물을 날라 방에서 씻었다. 화장실을 가장 불길하다고 하는 남서쪽 즉 도좌방 남서쪽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필요에 따라 후조방 등에 설치하였다. 각 와실에는 호자虎子나 의자식으로 된 이동식 변기(馬桶)를 설치하여 사용하였고 변은 모아 별도로 수거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동아시아의 뒷간/330,341쪽)

 

라) 사합원의 규모사합원의 규모는 원의 수도로 大都(현 북경)을 정할 때 기본규모가 결정되었다. 원의 세조인 쿠빌라이칸은 새 수도로 이전할 때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각 8묘(1묘 170평*8=1360평)에 해당하는 택지를 나누어주었다. 옛 가로구획의 발굴 결과 택지의 크기는 60m*70m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것은 당시의 가로 배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도의 중심에 남북으로 설치된 주도로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동서간의 도로체계가 70m를 기준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즉 가로와 가로사이에 폭을 60m를 가지는 구획을 한 단위로 하여 분배하여 준 것이다. 이러한 규모는 주로 고관이나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주택은 전면폭의 반정도인 30m를 주택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원림으로 조성한다. 지금도 북경에 남아있는 대규모의 사합원은 이러한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고 중규모의 사합원은 폭이 30m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즉 현재의 사합원은 원나라때 만들어진 규모를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합원의 규모가 명나라 때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만 청나라 후기에 와서 많이 축소되었다. 18세기 말 건륭연간(1736년-1795년)에 들어서 과거 5,6천만명을 유지하던 인구가 1억 명에 이르렀고 이러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어 도심에 집들의 규모가 축소되었던 것이다.(중국고전건축의 원리/이윤화/119쪽) 이때 과거 원림으로 사용하던 부분이 주택으로 변화되면서 주택의 규모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원림 만을 주거로 전용한 주택은 폭이 30m에 깊이 70m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보다도 규모를 줄인 경우도 있어 남쪽 부분은 원주인이 사용하고 북쪽 부분을 분할함으로서 북쪽으로 문이 나는 주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사합원과 한옥의 비교

 

사합원과 한옥을 비교하는 것은 양국의 문화인식의 차이를 이해하고자 함이다. 집은 단순한 건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집에는 그 집이 속한 지역의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가족관계, 종교, 문화적 취향, 사회환경에 대한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집을 잘 해석하면 그 지역의 문화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한자라는 문자를 공유하면서 유교라는 종교까지도 공유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문화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편적으로 본 것일 뿐이다. 집을 비교하여 보면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전혀 다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인 사합원과 한옥을 비교하여 보면서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가) 배치의 비교사합원은 매우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구조는 분명 외부로부터 오는 위해적 요소에 대한 대응의 방법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은 격동의 시기가 많았다. 그러한 환경이 집으로 하여금 방어적 형태를 유지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하여 우리의 집은 매우 담이 낮다. 이것은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사회가 안정되어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집의 폐쇄성은 사회적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중국인과 마음을 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을 열 수 있는 단계가 되면 전폭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성향이 만들어진 원인은 집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합원은 대외적으로 폐쇄성은 가지나 대내적으로는 개방되어 있다. 사합원에 들어와 가족이 거주하는 중심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일단 중심공간에 들어서면 모든 실이 중정으로 개방되어 있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집의 구조가 되어 있다. 이러한 집구조가 사람을 사귀기는 힘들지만 일단 사귀면 철저하게 마음을 열어주는 사회적 성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집 구조와는 달리 한옥은 유교의 남녀유별의 개념을 적용하여 개방적인 사랑채와 폐쇄적인 안채로 구분되어 있다. 같은 집 가족끼리라도 남녀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남녀를 구분하는 집구조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데 일조를 하였다. 반면에 중국은 내적으로 개방된 집의 영향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중국의 주거는 축과 대칭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사합원이 정면출입구를 제외하고는 건물의 배치는 완벽하게 대칭구조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우리의 건축은 이러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집은 보다 자유로운 모습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배치는 궁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금성이 완벽한 대칭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축선은 도성으로 계속 이어져 간다. 이것은 황궁에서 황성까지, 황성에서 도성까지 밖으로 이어진다는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3천년전 주대부터 비롯된 것이다.(중국고전건축의 원리/122) 즉 황제가 질서의 중심에 있음을 나타내고자하는 것이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로서 모든 것에 우선하고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황제의 궁도 천하의 중심으로서 작용하여야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중심의 사상이 집에서도 표현되었다. 북에서 남을 바라보며 축선에 따라 질서정연한 배치가 이루어진 것은 집에서도 정방을 중심으로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는 질서관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서관은 집의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집은 조당이 있는 정방이 가장 높고 그 외의 건물은 이보다 낮게 지어진다. 또한 집의 치장에 있어서도 정방이 가장 화려하고 다른 건물은 그 격이 낮게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의 집은 이러한 질서를 찾기가 힘들다. 하회의 북촌댁 처럼 가문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일부러 안채를 크게 지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안채와 사랑채가 근본적으로 크기에 차이를 가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위계보다는 경사지에 배치됨으로서 자연스럽게 뒷 쪽에 위치한 안채가 더 상위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사랑채를 누마루 식으로 지어 높게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대부분 경사지에 집을 짓는 경우이다. 평지에서도 누마루식의 사랑채를 만들기도 하지만 건물을 크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집을 배치할 때 기본적으로 집도 자연의 일부라는 관념이 강하였기 때문에 자연지세에 순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집에 대칭성을 강조한다든지 하는 인공적인 성격을 가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도성의 구성도 고려시대 이래로 자연에 순응한 배치가 채용되었다. 따라서 중국과 같이 축선이 강조되는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배치의 개념은 도시의 주거에서도 반영되어 건물을 축선에 의하여 배치하기보다는 대지의 환경에 맞추어 배치하는 것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사합원의 배치는 중정을 중심으로 건물이 주변으로 배치되며, 대지를 경계짓는 담과 건물의 벽체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한옥은 행랑채 등과 같이 부속건물의 경우는 외부의 담과 건물의 벽체가 공유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점이 발생하는 것은 사합원이 외부에 방어하는 성채의 개념에서 출발하였고 한옥은 전원형 주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여유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법은 건물을 외벽에 붙여 짓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충실하게 지어진 건물이 사합원이다. 한옥도 도심형 주거에서는 사합원처럼 중정형의 건물이 지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여유가 있는 부자집들은 사합원과 같은 형식의 집을 짓지 않았다. 큰집들은 모두 대지 경계에 면하여 창고 등과 같은 부속채 건물을 돌리고 안채와 사랑채는 독립하여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즉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은 사방을 트이도록 하였다. 이렇게 집을 짓는 것은 대청과 같은 특수 구조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대청은 여름을 나기 위한 공간으로 통풍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통풍이 잘되기 위해서는 앞뒤로 개방된 구조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요소를 살리기 위하여 집 주변에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사합원과 한옥의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사합원은 1명2암의 구조로 완결된 각 건물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면서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지만 한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합원은 후조방과 도좌방과 같이 부속건물을 제외하고는 정당과 상방과 같은 주건물은 각 건물이 완성된 구조를 가지며 이러한 건물이 중정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되는 형식으로 집이 구성된다. 사합원의 확장은 건물이 감싸고 있는 중정을 한 단위로 하여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지어진다. 이러한 사합원의 구성은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효율적인 구조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 사합원이 그러한 변용을 의식하고 계획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집은 쉽게 부셨다 지었다 할 수 없는 것이므로 변화에 적응한다는 관점에서 우수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의 주거에서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검토하여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한옥에서는 사합원과 같은 규칙성이 없다. 한옥의 경우 똑같은 평면을 구성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기본적 구성 예를 들어 마루와 온돌,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원칙은 있어도 내부 구성이 똑 같은 한옥을 찾아 볼 수 없다. 한옥은 각각의 집이 집주인에 대한 맞춤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옥은 대지조건 가세형편에 따라 완결형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되는 것에 대하여는 최준식의 우리문화에 대한 해석을 인용하고 싶다. 최준식은 한국의 해학과 파격성이 남다른 데가 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연은 자신을 들어낼 때 정제된 모습이나 대칭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비대칭적이고 엄격하지 않으며 예측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면 인위서 안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소라도 일탈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해진 규율에 맞게 짜 맞추어져야하고 정해진 대로만 해야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걸 싫어한다. 익살을 부려서는 안 되는 뜻밖에 상황에도 익살을 부리고 또 파격적인 일탈을 작품 속에 반영시키기도 한다."(한국인은 왜 틀을 거부하는가/44쪽) 최준식은 이러한 파격의 미가 원천적으로 한국인에 내재되어 있는 무속신앙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원천적인 대칭에 대한 거부가 건축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의 사합원 기타의 한족 계열 또는 한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집을 보며 대칭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질서의식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에 반하여 한국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성격이 있어 집에서도 대칭성이 거부된 것으로 생각한다.

 

가) 유교적 관점에서 본 사합원과 한옥유교가 중국에서 발전되어 왔지만 민간에게 있어 유교가 종교적인 의미로 발전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교보다는 도교가 더 종교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사회생활과 가족생활의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중국에서 유교는 명교名敎 혹은 예교禮敎로도 불리웠다. '명교'란 '명예와 도덕에 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넓게 본 중국의 주택/187쪽) 즉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개인적 지위의 차이와 사회적 도덕을 바탕으로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규범으로 자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교가 종교적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유교의 덕목이 매우 중요한 생활의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자가례가 매우 중요한 생활지침이 되었다. 주자가례에서 규정하고 있는 많은 예법들이 그대로 전수되어 지켜나갔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못하였다. 주자가례가 모든 예제의 지침서가 되지 못한 것은 주자도 중국의 많은 유교철학자 중 하나이고 유교가 송대 이후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에서는 주자학 외에는 다른 유교학파가 발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주자가례에 집착하게 한 원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교에 대한 인식차이가 심하였고 그러한 인식의 차이는 집의 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교에 의한 주거형식 중 중국과 차이가 나는 것은 가묘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집에는 주자가례에서 제시한대로 집의 동쪽에 가묘를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있다. 가묘를 짓지 못하는 경우는 안채의 대청에 감실을 만들어 위패를 모시기도 하지만 이러한 것은 가세가 가묘를 지을 수 없을 경우에 한한다. 그러므로 양반집에서 가세가 허락하면 대부분 가묘를 지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위패를 별도의 가묘를 짓지 않고 조당에 모시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은 유교의 특히 주자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가묘를 모시는 제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사합원의 구조를 보면 가족을 외부로부터 지킨다는 의지는 분명해 보이지만 가족 구성원간의 남녀유별의 개념을 보이지 않는다. 피농의 설치도 남녀의 유별이라는 개념보다는 외부인에게 가족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더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 청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수화문이라는 별도의 문을 통과해야 하며 청방까지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다. 청방 이후의 공간은 순수하게 가족만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이 공간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없다. 즉 중국에서 가족 내에서의 남녀유별은 우리나라만큼 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교 경전인 예기나 예기를 기반으로 만든 주자가례에 의하여 남녀의 구분을 명확히 해왔다. 한옥에서 손님은 대문에서 만 출입을 제한할 뿐이다. 일단 대문을 통과하면 사랑채까지는 쉽게 접근한다. 즉 사랑채는 반 공공공간인 것이다. 한옥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사는 공간은 중문이라는 곳에서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 중문은 사합원의 수화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국의 수화문이 출입하는 사람 전체를 제어하는 기능인 반면에 한옥의 중문은 안채와 바깥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중문으로 인해서 안채에서는 여자들이 사랑채에서는 남자들이 생활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이 되고 보니 양반의 경우 집주인이라도 쉽게 안채를 드나들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사합원에서 외부와 구분을 지어주는 것은 영벽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내가 직접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설치된 벽이다. 최소한의 단위로 지어진 사합원의 경우 영벽은 집의 사적공간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규모 이상의 사합원에서는 내외를 구분하는 수화문이 설치되어 있어 영벽이 사적공간을 보호한다는 의미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영벽은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차원보다는 입구로서 집의 얼굴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영벽에는 많은 치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옥에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내외담은 순수한 기능적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목적도 외부인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는 의미보다는 남녀의 생활을 구분한다는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다. 즉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여성공간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기능적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내외담에는 별도의 치장을 하지 않는다.

 

사합원은 건물의 위계는 좌, 우로 구분되어 있다. 조당에서 중정을 바라보면서 좌측이 더 높은 위계를 가진다. 이러한 위계는 생활하는 사람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와실도 좌측이 높은 위상을 가지므로 주인의 남자가 좌측에서 기거하면 우측와실은 부인이 기거하게 된다. 조방도 좌측이 더 윗사람이 기거하게 된다. 조방의 와실에서도 좌측 와실이 상대적으로 상위의 사람이 기거하게 된다. 그러나 한옥에서의 위계는 건물 내에서 지정된 방으로 결정된다. 안채에서는 부엌과 연결된 안방이 위계상 상위이고 다음이 건넌방 그 다음이 아랫채의 순서로 위계가 결정된다. 사랑채의 경우는 정해진 것이 없다. 많은 경우 정면에서 보았을 때 좌측이 위계가 높지만 이것도 원칙은 아니다. 건물의 성격에 따라 누마루가 전면에 있다면 누마루가 있는 곳이 상위 위계를 가진다. 즉 특별한 시설과 연계되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즉 중국처럼 정확한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건물에서 위계가 명확한 것은 건물자체가 정확한 규칙에 의하여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옥은 이러한 규칙이 명확하지 않고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여 개성대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찾을 수 없도록 집구조가 이루어져 있다.

'주거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사합원  (0) 2009.09.16
가구의 역사  (0) 2009.08.31
중국 고대건축사  (0) 2009.08.03
한옥의 창호  (0) 2009.05.22
[삼국사기] "옥사조"  (0) 2009.05.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