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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박완서/너무도 쓸쓸한 당신 2

by 8866 2009. 2. 27.

 

박완서/너무도 쓸쓸한 당신 2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오빠한테 아버지 얘기를 끝내자 오빠는 갑자기  앉은 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비비  틀면서 하품을 해댔다. 빨리 결론부터 말하라는 소리 같아서 아버지의 근황은

생략하기로 했다.   "아버질 우리집 근처로 모셔올까 해서. 마침 옆라인에 마땅 한 전세가 나왔거든

몇년 외국에 나가 있게 되는데 세간을 맡길 데가 마땅찮아 다두고 가고 싶대. 안방하고 거실만

비워주고. 그래서 아주 싸."   나는 나도 또르게 죄지은 것처럼 위축되어 오빠의 눈치를  살폈다.

 

"왜 아버지 동네 그린벨트라도 해제된다던? 아니면 정서방이 부도라도 네게 생겼던지  ."

오빠가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물었다 매사가 귀찮다는 듯 늘 피곤해 보이는 오빠의 시선이 일순 짓궂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제서야 나도 저자세로 나온 걸 후회하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아차렸다. 그러나 오빠하고 다투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고 싶진 않았다. 오빠는 좀 그런
데가 있었다. 속마음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빈정거리길 잘했고 남한테 고약하게 보이고 싶은
객기를 애꿎은 나에게 발산할 적이 많았다.


  "친정집 그린벨트 해제되는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장손이 이렇게 시퍼렇게 건재하신데.
그리고 우리 그이, 큰돈은 못 벌어도 착실하게 사업 잘하고 있어요. 내가 설마 아버지  집이
욕심나서 그러겠수. 가 보면 사시는 게 말이 아니고 자주 가 뵐 수는 없고... 오죽 멀어야 말이죠.

 

그래서 가까이 계셨으면 하는 거야. 왜 있잖아요?  서양 속담에도 그런 말이...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가 자식네하고 가장 적절한 거리라는... 아버지도 팔십이 내일모레유.  돌아가
신 지 며칠 만에 시신이 발견되는  일 우리라고 당하지 말란 법 없잖우  "  "알아, 나도 다
알아, 네가 천사푠 거. 그렇지만 천사  옆에 서면 보통사람도 나쁜 새끼밖에 해먹을게  없이
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너. 어머니 때 그만큼  이 오래비 망신시켰으면 됐지, 이번엔 또
무슨 망신을 시키려고..." “그때 오빠가 무슨  망신을 했다고 또 그 소리야.  약속대로 임종
즉시 영안실로 모셨잖아. 딸네서 죽은 시신은 관에 그렇게 써붙이 기라도 한대?"


  내가 할 수 없이 언성을 높이며 세게 나오자 오빠는 단박 풀이 죽으면서 심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있잖냐?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거. 그리고 젤 죽겠는게 정서방  앞에서 기
죽근 거야, 너.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하고 같이 벌어야 사나 하고 속으로 얼마나 날  무시하
겠냐?" "오빠, 정서방이 그런 사람이면 내가 엄말 모셔 갔겠수."


  어머니가 우리집에서 돌아가시게 한 걸 오빠는 늘 그런  식으로 못마땅해했나. 위암 수술
을 했지만 개복해보니 암이 모든 장기로 번저 육개월을 못 넘길 거라고 했을 때 나도  중환
자를 우리집으로 모시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하는 올케한테 모셔가라는 건, 말을 안  꺼내니
만도 못할게 뻔해서 내가 모신 거였다. 그때도 오빠는 자기  네만 못 모시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모시는 것도 반대했다. 딸이 모셔간 줄 알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겠냐면서 간
병비나 서로 분담하자고 했다.


  오빠는 고등학교 윤리선생이고 올케는 국민학교 선생이었다. 남 보기에 부부가 안정된 직
업을 가지고 남매 기르는게 넉넉할 건 없어도 그닥 궁상을 떨진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오빠
는 안 그랬다. 직접 아쉬운 소리를 해서가 아니라 삶을  짜증스러워하는 태도 때문에 늘 찌
들어 보였다. 대학원도 가고 외국  유학도 가고 싶었는데 난봉 피우는  아버지 때문에 그게
여의치 않았다는게 지금까지도 오빠에게 자기 직업에 대한 비하가 되어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육개월이 보통 간병인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됐더라도 아마  오빠의
뜻대로 됐을 것이다. 암환자의 말기가  거의 다그렇다지만 어머니도 숨을  거두시는 날까지
의식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명료했다. 그러나 뒤를 가리지 못했다. 수술 후 어떻게 된  게
항문의 괄약근이 고무줄이 빠진 것처럼 열런 채 오므라 드는 작용을 못하니 아무리 깔끔한
어머니도 속수무책이었다. 처음엔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했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
어 하셨다. 자기가 거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어진 걸 너무도 기운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여
기는 듯 뭐든지 주는 대로 열심히 잡수셔서 몸을 보하려 드셨다.


  그때만 해도 간병인이 어머니를 돌보고 가는 일주일에 두세 번 잡술 것만 해 나를 적이었
는데 경험 많은 간병인은 그런 나를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했다. 이 지경이 되고 나서 회복된
환자를 본 일이 없다, 이런 환자에게 가장 좋은 약은 덜  먹이는 것밖에 없으니 먹을 것 좀
작작 해 나르라는 거였다. 네가 안 볼 때 그 여자가 어머니에게 잡술 걸 제대로 드릴 리 만
무했아. 그걸 안 이상 어머니를 그 여자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내가 설사 그 여자보다 어머
니를 더 구박하게 될지라도.


  내가 떠맡고 싶은 건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똥구멍이었다.  생판 남이 어머니의 똥구
멍을 진저리를 치며 구박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건  효도 따위보다 훨씬 진실하고
씩씩한 분노였다.
  하필 항군의 고무줄이 빠질 건 뭐였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에게 그
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대
가로라도 그 치욕을 다소나마 가려주는 일을 맡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회갑을 앞두고 비로소 시부모 봉양에서 놓여나고 아버지도 마지막 소실이 떨어져나가  집
에 들어와 계시게 되어 어머니도 노후에 비로소 삶의 구색을 갖추고 사시는가 싶을 때였다.
친정집은 낡을 대로 낡은 구옥이었지만 터가 넓고 마당을 잘 가꿔서 여름이면 어머니 연세
의 동네 노인들의 쉼터가 되곤 했다. 노인네들만 남아서  그린벨트 해제나 기다리며 소일하
는 퇴락한 마을이었다. 아버지가 들어와 계시고부터 오빠네는 더욱 부모와 최소한도의 의무
적 관계 이상은 기피하는지라 나라도 자주 찾아뵈려고 한달에  한번 정도가 고작이었다.

 

별러서 간 날이 마침 동네 노인네들이 마당에 모여앉아 수박과 부추부침 따위를 나누며 잡담
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내가 가자 어머니가 여봐란듯이 나에게 노인네들 시중을 맡겼다. 그
때, 부추에다 깻잎을 더 썰어넣고  고추장을 약간 푼 내 식의  지짐이도 부쳐보고 사가지고
간 과일과 케이크를 모양있게 썰어서 느티나무 밑 평상으로 나가기도 하면서 들은 노인네들
얘기는 주로 죽을 걱정이었다.


  요샌 왜 생전 안 보이던 친정어머니가 자꾸 꿈에 보이나  모르겠어. 우리 기택이 대학 붙
는 것까지는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아이고, 듣기 싫소. 또 그소리. 기택이는 효손이요. 저의 할매 죽지 말라고 남 안하는 삼수
꺼정 했으니.
  자네 손주 첫번에 척 대학 붙었다고 기택이 할매 너무  구박 말거라. 기택이가 그게 보통
손준가. 맏며느리가 딸만 내리낳고 단산한 줄 알았다가 그게 생겨났으니 자네라면 안그러겠나.


  중한 자식일수록 그렇게 자꾸 입초시에 오르내리 게 아니란 소리 아닌감. 아들 손주 하나
만 보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다고 저 마누라 얼마나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녔는지 생각들
안 나우? 오죽해야 저 마누라 아들  손주 본 날, 아마 곧 초상도  날 거라고 수군거렸잖우?
초상이 뭐야. 손자 본 날부터 그애 가방 메고 소학교 가는 건 보고 죽어야 한다더니, 소학교
가니까 또 중학교 가는 것까지는 봐야 한다고 글강 외듯 하다가 이젠 딱 대학 가는  것까지
만 보겠다니 타고난 명은 길고, 기택이가 대학을 자꾸 떨어질 수밖에.


  요 할망구가 악담을 하네그려.
  악담이 아녀. 우리덜 다 과히 박복한 팔자는 아니지만 지금 죽어도 누가 그렇게 애통해할
것도 아닌데, 천금같은 손주한테 잘난 명을 빌붙지 말자, 이거지.
  증말 그래. 아직 거정은 수족이 성해 파 한뿌리라도  다듬어주면 주었지 저희들한테 양말
한짝, 사루마다 빨래 한번 내놓은 적이 없건만도 툭하면  며느리가 시집살이하는 유세를 떠
니, 만약 죽치고 들어앉았게 되면 무슨 꼴을 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답답하면 이렇게 훌쩍 동네 마실도 다니고, 더 속상하는 일이  생기
면 훨훨 딸네라도 다녀올 근력이 있을때꺼정만 살아야 할 텐데.
   무슨 복에 그렇게까지 바라겠소. 난 내 발로 변소 출입할 수 있을 때꺼정만 살게 해달라
고 조상님한테도 빌고, 부처님한테도 빌고, 예배당 앞을 지날  때도 빌고, 잠자리에 들기 전
에도 비는데, 글쎄 어떤 귀신이든 신령이든 들어주셨으면 좋으련만.
  난 뒷간 출입보담은 망령인지 치맨지 그게 더 걱정입디다. 그놈의 건 안 걸리고 죽었으면
쓰겄는데.


  난 아냐 변소 출입만 할 수 있으면 그까짓 망령 좀 들면 어때?
  아이고 그게 따로따로가 아니라니까. 망령이 드니까 똥오줌을 못 가리게 되는 거지 , 정신
만 멀쩡하면 기어서라도 됫간에 못 가겠수.
  아이고, 그렇지도 않아요. 늙어서도 젤로 서러운 게 몸 따로 마음 따롭디다. 난 우리집 제
삿날 생일날뿐 아니라 일가친척의 이름 붙은 날도 안  잊어버려서 정신 좋기로 소문났잖우.
우리 며느리한테는 그것도 흉이긴 하지만 글쎄 그렇게 똑똑한 내가 툭하면 오줌을 지린다니
까요, 자다가도 아니고 백주 대낮에, 한번 마렵다 생각이 들면 못 참아요.


  어머 , 집이도 그래? 나도 그런데.
  그건 약과예요. 난 서울서 변소 찾다 말고 그냥 절절 다 싸버린 적도 있다우. 망신도 망신
이지만 어떡허든지 며느리한테 숨겨야 한다는게 더 서러웁디다. 영감만 있어봐요. 젊어서 고
생한 탓을 해가며 보약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앙탈을 부리련만.


  그러구 보니 여기서 민영이 할머니 팔자가 제일이구랴. 과부 아닌 이는 저 마누라밖에 없
잖아? 그러게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후분이 좋아야 한다니까.
  민영이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들며  나며 신바람이
나서 노인네들 시중을 들고 있었다. 죽는 문제만 남겨놓고 모든 가능성을 다 소진해버린 노
인네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나는 사십대라는 내 나이에 울렁거리는 기쁨을 느꼈다.


  춤추듯이 경쾌하게 깡총거리며, 느티나무  잎을 흔들고 난 푸른  바람에 주름치마가 부풀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치 갓스물같은  싱그러운 젊음에 흠뻑 도취해 있었다.  고작
배설이 주제인 노인네들의 넋두리에 동정어린 경멸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아직도 성적인  상
상력에 충만해 있고, 성적인 화제가 가장  즐거운 내 나이에 새삼 황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난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싶다우 .
  처음으로 그 화제에 끼여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노인네들이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아마
방귀처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고루 웃길 수 있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방귀는 뀌는 소리
그 자체도 하나의 완성된 유머였다. 애  업은 젊은 엄마의 방귀, 시아버지 진지상  들이다가
뀌는 새며느리의 방귀, 맞선보는 자리에서 누가 뀐 건지 아리송한  방귀 등은 또 얼마나 꾸
준하게 사람들의 유머감각을 자극하고 웃음을 재생산해왔던가.


  그러나 나는 느닷없이 끼여든 그 말이 마치 순조로운 차의 흐름속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면서 진저리가 쳐졌다. 우습기는커녕 여지껏의 즐거운 기
분이 일시에 깨어나는 듯했다. 어머니는 사람들이나 웃기자고 그런 말을 할 분이 아니다. 깔
끔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어머니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늙어갈
수록 생리현상을 참는 기능이 헐거워지는 건 사실이나 어머니가 못 참아낼까봐  두려워하는
건 단지 그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체면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온갖 것들이 포함된 것처
럼 느껴지는 건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믿는 딸의 감상 이상의 것, 연민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완벽하고 당당하고 한결같이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냈는지는  친척간에도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로 말미암아 어머니에게  늘 따라다니는 품위에다가 위엄  같은 게
어릴 적엔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거치고 인생에 대해  뭘 좀 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면서부터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자존심 없는 사람을 가장 경멸스러워할 때였다. 머
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자존심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존심은커
녕 배알도 빼놓은 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란 적어도 익으면 돌돌 말리게 돼 있
는 오징어 따위를 반듯하게 익히려고 일직선으로  꿰는 쇠꼬챙이하고는 달라야 할 것  같았다.


  네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철저하게 어머니를 무시했다. 구박하거나 아옹다옹 다투는 것
하고는 달랐다. 옛말에도 있는 소 닭 보듯 한다는 표현이 아마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런 재
미없는 사이는 맞선볼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양가어른까지 합석한
거창한 맞선자리였는데, 소학교밖에 안 나온 어머니는 수줍어서 신랑  얼굴 한번 재대로 쳐
다보지도 못했는데 신랑 쪽에선 다들 마음에 있어 한다는 통고를 받게 되었다.

 

박색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한창 꽃다운 나이에도 예쁘단 소리 한번을 못 들어봐서 용모에 자신이

없는 어머니는 맞선자리처럼 위축되는 자리가 없었다.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자기 생각은 네색도
못한 채 신랑집 마음에 들었다는 것만을 감지덕지해하는 부모님 뜻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세라복 입은 여고생을 동경하던  멋쟁이 아버지에게 투덕 투덕 복스럽다는  것 외엔 볼
게 없는 어머니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찼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몇번째 맏아들의 연애질에 속을

썩어온 부모는 그 듬직한 색싯감이 마음에 쏙 든다고 바싹 아들을 조이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부모가 강력하게 주장하면, 코찡찡이나 곰보가 아닌 이상 승복하는 게 자식된 도리였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부모한테 순종하고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질  장남이란 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철저하게 교육받아온 터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아내가 된 게 아니라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됐을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
은 첫날밤부터였다고 한다. 당신이 할 일은 시부모를 극진히  받들고 시동생 시누이 들하고
우애있게 지내는 거라는 걸 엄숙하게 선언했을 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어도 시
집 문지방을 베고 죽어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명제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남편이
소 닭 보듯 하는 아내가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은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낳고 시부모님의
눈에 드는 거였다. 어머니는 그걸 해냈다. 한술 더 떠서 아버지가 갈아들이 없는 소실에  대
해 전혀 투기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성군의 중전마마처럼 품위있고 당당해졌다.


  아버지도 어머니에 대한 조강지처 대접 하나만은  깍듯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제시대부
터 다니던 경전을 해방 후 한전이 된 후에도 눌러서 다녔는데, 당시로서는 안정되고 대우도
괜찮고 가욋돈도 생기는 꽤 좋은 직장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직장 근처에 딴살림을 차리
고도 월급봉투 하나만은 한푼도 안 건드리고 큰 집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소실하고 아버지가 무슨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월급봉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나마 오래 누리진 못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사회를 정화한답시고 관청이나 국영기업체에서 축첩한 자는 자진해서  사
표를 쓰라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었다. 상습적인 바람둥이들도  서로 눈치를 봐가며 그럭저
럭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는데 아버지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소실을 두고 있다는건
사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엄포가  내린 이상 실적을 올
려야 하는 건 피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당연히 최초의 희생양이 되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다냐?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로 인하여 돌아가시는 날까지 박정희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후 다시는 아버지 월급봉투를 받아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 일에 대해 원망도 고소해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삼촌  고모 들을 다 결혼시킨 후라
생활비 걱정도 훨씬 덜 됐고, 마침 서울 근교의 도시화에 힘입어 농토를 야금야금 팔아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에 방앗간을 열었고, 그게 꽤  잘됐기
때문에 땅 팔 일이 생기는 건 주로  이것저것 사업에 손댔다가 조금 돈을 만져보기도 하고
실패도 하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마 사업하면서 돈 좀 만질 때였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할머니 환갑 잔칫날 어머니나 어
른들에게 미리 아무런 연통도 안하고 꽃같이 야들야들 예쁜 소실을 대동하고 나타나 큰절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맏며느리다운 체통을 지켜 냈다.
여고생이던 네가, 어머니처럼 저 여자의 존재를 무시해버릴 것인가, 덤벼들어 머리채를 쥐어
뜯을 것인가, 어떤 것이 어머니를 더 위하는 길인지 몰라 붉으락 푸르락하면서도 한가닥 위
안이 됐던 건, 미남에다 멋쟁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버지가 연세가 들수록 경박하고 볼
품없어지는 반면 어머니는 그 정반대라는 걸 발견한 거였다. 어머니는 젊어서는 별로였지만
늙어가면서 점점 더 보기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그게 아버지한테는 고소하면서도 내 나름으
로는 가슴이 뭉클하니 슬펐다. 사십세 후의 얼굴은 본인  칙임이라지만 양귀비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배알을 빼놓지 않은 이상 어머니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욕망이나 분노를 감추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때 내가 알면 뭘 얼마나 알았겠는가. 어머니의  비장하다 못해 결사적인 자존심
에 대해 어렴풋이 짚이기 시작한 것은 나 역시 시집갈 날을 앞두고였다.
  넌 연애결혼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서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일러두는 건데, 혹시
첫날밤 네 신랑이 제 부모 잘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제일 먼저 하거나 계집은 또 얻을  수
있어도 부모는 또 얻을 수 없다는 식의 수작을 하거든, 그  자리에서 그 혼인 파투 치고 나
와도 나는 너를 내치지 않으마. 야단도 안  치마. 그쪽만 귀하게 기른 자식인 줄 알지  말거
라. 너도 똑같이 귀하게 길렀어.
  어머니한테 그런 소리를 교훈이라고 듣고 시집간 딸은 이 땅에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 또한 당신이 견디어온 굴욕에 대해 그 정도의 원성이나마 외부에 발산한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추태라 할지라도 그렇게 철저히 갈무리해온 어머
니였다.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다던 어머니가 하필 말년에 괄약근이 열린 채 다물
줄 모르게 될 건 또 뭘까. 나는 도저히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난해한 아이러니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어머니의 발병과 수술과 항문이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은 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가 역시 팔아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안 남은 집으로 들어와 계시
게 된 후에 일어난 것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녔기 때문에 암이라는 것도 내가 가장 먼저 알
았다. 어머니가 당신이 암이라는 걸 알고나서 제일 먼저 한 말은 아버지한테는 알리지 말아
달라는 거였다


  오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들어와 있긴 해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소 닭 보듯  데면데
면하게 굴기는 소실 두고 살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나는 그런 어머니가 속으
로 불쌍하기도 하고 조금은 가소롭기도 했다.  마나님이 곧 죽게 될 걸 알아봤댔자,  부리던
하녀가 죽게 됐다는 것만큼도 충격을 받을 아버지가 아닌데 뭘 숨기자는 걸까. 텔레비전 극
같은 데서 본 품실 좋은 노부부 흉네를 내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곧 죽을 마누라한테
도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굴 영감꼴을 보게 될 것을 피하려는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로서는 그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자식들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했어도 분위기로 봐서 대수술이라는 것쯤은 눈치챘으련만 입
원하러 들어가는 날 아침까지 아버지는 태연하게  어머니가 사력을 다해 손수 차린  밥상을
받았고, 근심하는 말 한마디 없이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수술하는 날에도, 그후의 입원기간
에도, 어머니가 와보실 것 없대요라는  우리의 전갈한마디에 그대로 한 아버지였다.  퇴원할
때도, 싸우고 친정으로 갔다가 제풀에 걸어들어오는 마누라 대하듯 평소보다 더 데면데면하
게 굴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 부탁이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하나도  안 놀랄 것이 두렵다기
보다는 너무도 뻔해서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까지 무자비하다는게 어찌 어머니에게만 고통스러운 일이었겠는가. 자식한테도 못할 노룻이었다.


  입원하기 직전까지 당신 시중을 들던 어머니가 퇴원하고는 뒤도 못 가리게 된 것을 보면
서도, 아버지는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기는 커녕 병원 욕만 했다. 멀쩡한 사람  병
신 만든 의사를 그냥 놔두냐는 거였다. 어머니에 대한 근심은 조금도 안하면서 괜히 길길이
뛰는게 마치 의사를 걸어서 돈 뜯어낼 빌미라도 생긴 깡패 같아서 가뜩이나 낯설기만 한 아
버지가 더욱 정떨어졌다. 한약이나 몇첩 쓰면 나을 병을 가지고 괜히 자식들한테 엄살을 부
려서 몸에 칼을 대게 하더니 꼴 좋다고 우리까지 싸잡아 비꼬기도 했다.  우린 그저 기운이
떨어져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니 조금만 참으시라고 아버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머니의 소원이라지만 주인 앞에 병든 동료를 숨기고 감싸야 하는 종년 심정과도 같은 마
음으로 아버지한테 절로 앙심이 품어졌다.


  어머니를 우리집으로 모셔갈 때도 우리 모녀를 같잖아하는 아버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
었다. 그동안 혼자서 불편해할 걱정조차 안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얼마나 철저한 무시인가.
  그래도 어머니는 뒤도 못 가리는 주제에 온종일 똥구덩이에 빠지다시피 해서 허덕이는 딸
에게 아버지 밑반찬을 해 나르지  않는다고 성화를 했다. 그럴 경황도  없었지만 내 손으로
아버지 밑반찬을 만든다는 것 조차 자존심이 상해서 시장에서 파는 걸 몇가지 사고 어머니
옷가지도 좀 가져올 겸 해서 친정집에 갔을 때였다. 아버지는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추레해
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놈의 똥구멍은 언제 아문다더냐고, 항문  걱정만 함으로써 어머니 안
부는 생략하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억지로 아버지 진짓상을  봐드리고 나서 어머니 옷장을
뒤졌다. 속옷이 무진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옷갈피에는 어디서 난 건지 흔히 향비누라고 일컫는 냄새 좋은 세숫비누가 구메구
메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옷장 버선갈피마다에서 지폐가 쏟아져나왔다고 하
더니 어머니는 향비누였다. 화장품을 살 때 선물로 얹어주는 작은 향수병도 몇개 마개가 헐
겁게 닫힌 채 들어 있었다. 행여 늙은이 냄새가 날세라 그렇게 철저히 대비를 했던  것이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추레해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다운 자기관리였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 딸네 집에 악취를 풍기며 누워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
로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희롱해도 된단 말인가. 하필이면 우리 어머니를. 나는 천방지축  도
무지 종잡을 수 없이 조화를  부리는 인간살이에 분노를 걷잡을 수가  없었고, 그건 곧바로
아버지를 향해 폭발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한테 당해 싸게 굴었다. 어머니 반찬솜씨를  한번
도 칭찬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시장 반찬은 도무지 못 먹어주겠다는 얼굴로 그놈의 똥구멍
때문에 언제까지 이 고생을 시킬 작정이냐고 투덜거렸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지금 말기 암환자고, 남은 명이 다섯 달도 안될 거라고 말해버리고 나서 아버지
의 반응 같은 건 살피지도 않고 친정집을 뒤로 했다. 말해버리고 나니 허망했다. 뭐가  허망
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길거리만 아니면 목놓아 울고 싶게  산다는 것 자체가 허망했다. 어
머니에게는 간단하게 이제 아버지도 아시게 됐다고만 말했다. 어머니는 왜 그랬냐고 야단도
안 치셨지만, 그 소릴 듣고 뭐라시던? 하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날 밤이었다. 아버지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엔 누군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목쉰  소
리로 어머니를 바꾸라고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직접 통화를 하고 싶어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콧물을 들이마시는 것도 같고 딸꾹질을 참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서,
나는 어머니에게는 무선전화기를 갖다드리고, 계속해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엿들을  작정
이었다. 어머니의 전화 바꿨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도 뜻밖인지 약간 어눌하고  떨
리는 소리였다. 저쪽에선 아직도 짓눌린 딸꾹질 같은 소리만  들렸다. 전화 바꿨어요. 전 괜
찮아요. 많이 나았어요. 참다 못해 어머니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 아버
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그 흐느끼는 음성을 통해 여지껏 들리던 그 이상한 잡음도 복받치는 울음을 참는 소리라
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나는 웃음이 폭발할 것 같아 얼른 전화통을 손바닥으로 틀어막
고 방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까 통화가 끝난 어머니도 아픈 배를 움켜쥐고 그렇
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번씩 그 통화를 생각하고 웃음을 걷잡지 못했다. 어머
니는 의사가 예언한 생존기간도 미처 못 채우고 돌아가셨지만 칠십에 처음 들은 사랑의 고
백 때문에 그 동안을 즐겁게 보내셨다. 똥구덩이에 빠져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도
말로만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어머니를 문병했고 똥도 치우고 싶어했지만 어머니가  그것만
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죽을 때까지 사랑받고 싶어서 그 꼴만은 안 보이고 싶었나보다.

 

어머니 묏자리를 잠는 데도 정성을 다하셨고, 장례 때도 수시로 그 딸꾹질을 참는 것 같은 소리
를 내며 눈물을 뚝뚝 흘려서 우리를 민망하게 했다. 아버지에 비해 자식들은 솔직히 슬픔보
다는 시원한 쪽이 더했을 것이다. 상주인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길고 지루한
영화가 끝났을 때의 관객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나는 지쳐 있기라도 하지, 오빠는 장남된 도
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자책감을 어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제나 저제나 임종 소식만 기다리기
가 얼마나 지루했을까.


  "아무튼 고맙다. 나도 아버지를 언제까지 거기서 그렇게 지내시게 할 순 없다고 생각하긴
했었어." "그럼 됐네 뭐. 아직 정정하시겠다, 가끔  모셔가기도 하고 방문도 하고 그러면 되
잖아. 나도 가까운데 계셨으면 하는 거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건 아냐." "그래봤댔자 기
죽는 건 마찬가지지 뭐." "기가 왜 죽어?" "네 따위가 장남 심정을 어떻게 아냐?" "그래, 난
참새구 오빠는 대붕이다. "


  "참 나이가 무섭군 그 능력은  다 어떡허구 이제 와서 자식  신세를 지게 되다니. 당신이
생각해도 한심하실걸, 아마 " "오빠는 아버지가 능력이 없어서 새장가를 못 든다고 생각해?"
"그럼 수절이라도 하신다는 거냐? 웃기지 마, 야 그게 아버지한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오
빠는 뭘 몰라 지금도 중매가 꽤 쏠쏠히 들어와요. 내가 접수한 것도 두어 건 되는걸." "아직
도 돈푼이나 있는 척하고 다니나보지, 자식들 고혈을 빨아서 연명하는 주제에. 말년엔  그래
도 개과천선한 줄 알았더니..."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우. 아버진 아직 집이 있잖아."

 

"그까짓 것도 재산 축에 드나." "아까 오빠가 그랬잖아. 그린벨트라도 해제됐냐고. 해마다 될
듯 말 듯 소문이 무성한 데가  거기잖아. 장래성을 보고 그러는지, 꽤 젊은  여자들한테서도
프로포즈가 들어오나보던데 " "안돼. 그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 여자문제를 내
가 이러구저러구 할 입장이 못 됐지만, 이제부턴 아냐. 입적까지 시킬수도 있는 문젠데 어떻
게 가만히 당하기만 하겠냐? 안 그러냐?" "오빠, 그렇게 무섭게 눈을 부라릴 것 없어. 그 문
제는 벌써 아버지가 입장을 분명히 하셨으니까. 재혼문제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셨어. 웬 줄
알아? 장남한테 그 집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물려주고 싶다고 하셨어. 내가 가까이 모시겠다
니까 나한테도, 너는 남부럽지 않게 사니  그 집 욕심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는걸, 솔직히  나
그때 조금은 기분 나빴다.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도 내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
기 전에 저 계집애 저의는 뭘까, 그 계산부터 하는 게 역력했으니까." "솔직히 말해 너 같은
딸이 어딨냐? 나도 좀 기분이 나쁘다, 야."


   나는 내가 효녀도 아니고 착한 여자도 아니란 것을 오빠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냥 그런 척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도  설명되어지지 않는 복잡하고 난
해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승낙도 받은 셈이겠다, 이제 아버지하고 몇가지 최종적으로  의논할 것만 남아 찾
아뵙겠다는 연락을 했더니 매일 서울에 오니까 서울서 만나자는  거였다. 아버지가 주로 나
오시는 데는 롯데월드 들어가는데 있는  지하광장이라고 했다. 전철을 한번만  갈아타면 갈
수 있는 재미에 거의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하니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아무 때나 나와서
찾으면 된다는 아버지의 말투는 마치 그  광장의 주인처럼 당당해서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차를 갖고 다니는 나에겐 교통체증 때문에 자꾸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친정이
새로운 전철노선 개통과 함께 훌쩍 수도권이 된 것도  신기했다. 반사적으로 친정집의 삼백
평이 넘는 평수가 떠올랐다. 어느새 일흔보다는 여든에 더  가까워진 아버지지만 살아 생전
에 부자가 되는 것도 아주 허황된 공상만은 아니다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무도 마당을 가꾸지 않아 친정집은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
게 퇴락한 모습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무나 꽃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추해진 집 모습을 가리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마당을 가꾸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
이니까 일생을 오로지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사신 분이니까.


  롯데월드 지하광장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넓고 휘황하고 시끌시끌 했다. 마침 성탄절을
앞둔 연말이었다. 브래지어나 팬티를  세일하는 임시매장을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해 놓고 젊은 여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는가 하면, 그 옆  폭포 앞에서는 볼에 솜털이 보
송보송한 앳된 무명 보컬그룹이 불우이웃돕기 성금함을 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앉을 자리도 많이 마련돼 있는데도  슈퍼로 통하는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앉아서  통행에
지장을 줄 만큼 광장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만나 잡담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우두커니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한 사람들 사
이로 뭐가 그렇게 바쁜지 신경질적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급류를 이루고 있
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혼잡 속에서도  아버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인네들끼리만
모여앉아 있는 데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가 남자 노인들이고 여자 노인은 어쩌다 섞
인 한떼의 노인들이 광장 한복판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었다.


  눈에 잘 띄게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노래는 한창 나이
의 중년 남자 못지않게 끈적끈적 엉겨붙을 것처럼 기름진 목소리였다. 마이크가 있을 리 없
는, 기껏 육성이, 보컬그룹이 부르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를 압도하
고 훼방놓는 것처럼 들리는 건 피붙이로서의 민망함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케케묵은 옛날
유행가, 진주라 천릿길을 내 어이  왔던가를 눈을 스르르 감아가며 한껏  기분을 내 부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무기둥을 얼싸안고'라는  가사를 슬쩍 '남의 계집을 얼싸안고'
라고 바꿔 부르면서 옆에 앉은 여자 노인네의 허리에다 팔을  감는 것이었다. 구렁이 담 넘
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수적으로 단연 열세인 여자 노인의 옆자리를 아버지가 차지한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닐 듯
싶었다. 그 여자 노인도 아버지의 팔이 허리를 감는 게  싫지 않은지 그때까지 꼬나물고 있
던 담배를 얼른 비벼끄고는 아버지의  노래에 능숙하게 화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남이라면
얼마든지 웃어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내 아버지가 그러는 건 창피하고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
질 법한데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른 아버지 얼굴에 나는 피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그때도 아마 어쩔 수 없이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여학교 때, 부득이한 일로 아버지 소실 집
에 내가 심부름을 가야 할 일이 몇번인가 있었다. 그때  내 앞에서 아버지가 소실과 희희덕
댄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소실  집에 있는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하고는  전혀 딴사람 같은
게 이상했었다. 집에서는 경직되고 근엄하고 불편해 보이던 아버지가 거기서는 편안하고 자
유스럽고 느긋해 보였다.

 

롯데 월드 광장에서 본 아버지도  그렇게 편안하고 거침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장남 노릇이 몸을

옥죄는 걸 참지 못해 편안하게 퍼질 자리를 찾아 난봉을 핀게 아니었을까. 소년적엔 그렇게 풀린

아버지가 추악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난봉기도 도가 트니까 관록 같은게 생겨 멋있고

풍류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늙을수록 괜찮아지는 타입이고 아버지는 늙을수록

경박하고 추레해 진다는 내 예상도 결국은 들어맞지 않았다.


  사람 팔자는 관뚜껑 덮을 때까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난해한 숙제로구나. 아버지가 어떻게 죽게 될지 그걸 누가 알랴. 까딱하면 아버지의 임
종을 책임지게 될 지도 모를 이번 결정을 후회할지 안할지는  더군다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생을 자기의 한숨소리 한번 제대로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잔뜩 오므리고만 사신 어머니
가 자기 항문도 못 오므리게 된 치욕적인 마지막을 보냈으니까, 식구들한테 못할 노릇만 시
키면서 너절하게 산 아버지는 혹시 우아하게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요행수를 바란 건 아닐
까? 그건 아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해드린 은혜 갚음을 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
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어머니 편에만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공식이  통하지
않는 그 난해함 때문에 그 일을 한번 더 해보고 싶다는 게 조금은 더 맞는 말이 될지도  모
르겠다.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종일관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마침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상주노릇을 했다. 길고 재미 없는 영화는 아무도 또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러나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수가 있다.


  나는 웃으면서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고, 아버지는 그제서야 그  노파의 허리에서 팔을 풀
었다. 노파가 담배를 꼬나물자 아버지는 나에게 찡긋 윙크를  하고는 찰카닥 라이터를 켜서
노파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나서 일어섰다. 

(라쁠륨 1997년 봄호)

 

 

    너무도 쓸쓸한 당신
  그녀가 경험한 졸업식은 하나같이 추웠었다. 그녀 자신의 졸업식을 비론해서 아들딸의 각
급 학교 졸업식의 공통점은 혹독한 추위였다. 그러나 가장 추운 졸업식은 교장 관사의 따뜻
한 아랫목에서 목소리로만 듣던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다. 시골 공기는  도시보다 보통
3,4도는 더 춥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도시 아이들보다 입성이 부실한 시골 아이들이  얼마나
추울까 하는 최소한도의 배려조차 없이 교장의 졸업식사는 장장  반시간 이상 계속됐다.

 

해마다 같은 소리였다. 짖어대듯 정열없는 고성도 변함이 없었다.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보태어 실의까지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귀를 틀어
막아도 보고,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어보아도 그 소리를 참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언 발
이 결국은 무감각해지듯이 들끓는 분노가 체념으로 잦아들 무렵에나 교장의 식사는 끝났다.
그녀는 남편 직장과 겨우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는데  절망적인 염증을 느꼈다.
교장선생님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후기 졸업식은 처음이었다. 후기 졸업식을 코스모스  졸업식이라고도 한다는 소리를 어디
선지 들은 것 같지만 그 가냘픈 꽃들이 피어나게 할 산들바람이 스며들 여지가 있을 것  같
지 않게 늦더위는 견고하고도 끈끈했다. '파바로티'라는 밝고 넓은 찻집 안은 별천지처럼 냉
방이 잘돼 있었다.

 

갑작스러운 냉기가  데친 토마토처럼 농익은 신열을  알팍하게 개칠해서 그녀의 감각을 헷갈리게

했다. 종업원들은 다들 타이츠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매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처럼 군더더기 없이 청순하고 깡말라 보였다. 저런 걸

유니섹스라고 하는 걸까. 여자인지 남자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되는 젊은이들이었다. 하나같이

화장기 없이도 얼굴은 희고 곱살하고, 정결한 생머리를 짧게 커트한 애도 있고 뒤로 묶은 애도 있었다.

 

바지에 비해  다소 헐렁한 윗도리를 걸친 가슴은 아무렇지도 않게 빈약했다. 그녀는 그애들의

중성적인  엉덩이나 넓적다리를 슬쩍 만져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 곳은 아이스바처럼

단단하고도 시릴 것 같았다. 그애가 만일 남자라면 그 짓은 성추행이 될 것이다. 온몸 도처에서 

개칠한 냉기를 뚫고 열꽃처럼 피어나는 열망에 그녀는 으스스 전율했다.


   이런 요상한 느낌은 얼마 만인가. 난생 처음인 듯도 했다. 대학가 커피숍은 나이  지긋한
이들이 갈 데가 아니라는 소리는 여러번 들어서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은밀
하거나 퇴폐적이지 않을 뿐더러 음악이  옆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도록  시끄럽지도 않았다.
나무랄데 없이 건강하고 정결하고 쾌적한 분위기였다. 음악도 첼로인 듯싶은 음색이 파스텔
조로 은은하게 실내에 번져들도록 있는 듯 낮춰놓고 있었다.  튀는 점이 있다면 종업원들의
검정 유니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기도 전인 남편의 촌티에 자꾸 신경이 써
질 만큼 그녀가 보기에 이 커피숍의 세련미는 완벽했다.


  남편과 만날 장소를 파바로티로 정해준 것은 딸 채정이었다. 채정이 졸업식 때도 그들 부
부는 별거중이었다. 시골서 당일로 올라오는 남편과는 졸업식장 근처에  있는 초대 총장 동
상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대학에는 그 동상말고도 동상이 너무  많았다. 남편은 누구
동상이라는 것은 확인해보지 않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동상 앞에 마냥 죽치고 앉아 있었으
니 식구들하고 만나질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날은 채정이가 오랫동안 연애하던 남자친구
네 부모하고 처음으로 상견례를 치르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식이 다 끝난 후까지 찾아헤맨
끝에 가까스로 만나긴 했지만 그날 촌스럽고  변변치 못한 남편 때문에 속상하고  초조했던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새록새록 울화가  치밀었다. 사돈 될 집에 비해  내세울 거라곤 없는
집안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그날의 조바심은 더욱 피를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객들이
반 이상 빠져나간 후에 겨우 만나진 남편은 차라리 안 만나니만 못했다. 그 추운 날 오버도
없이 세탁을 잘못해 모양이 망가진 누비 파카에다 색 바랜 껑뚱한 면바지를 입은 모습은 사
돈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못 봐주게 추비했다.  채정이가 울상을 하고  엄마 귓전에다
‘난 몰라, 아빤 우리들이 미워서 일부러 거지처럼 하고 왔나봐’라고 속삭일 정도였다. 

 

평소에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뭐든지 거지에다 빗대는 건 채정이의 아주 나쁜 버릇이었지만 그
때는 듣기 싫지도 않았다. 그쪽 식구들 앞만 아니라면 더 심한 말도 해두고 싶었다.
  그녀가 두고두고 채정이 졸업식날을 악몽처럼 기억하는 건 남편의 무신경한 옷차림  때문
인데 채정이는 하마터면 아빠를 못 찾을뻔했던게 더 기억에  남는 모양이었다. 동생 채훈이
의 졸업식을 앞두고도 또 아빠 못 만나면 어떡하냐고 그  걱정부터 하더니, 제가 미리 학교
앞을 답사하고 와서 제일 찾기 쉽고 노인네들도  눈치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정해준 곳이 파바로티였다. 딸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는 하면서도  후기 졸업식에는 그닥 사
람들이 많을 것 같지 않아 괜한 일이다 싶었다.


  채정이는 부모가 서로 못 만날까봐 보다는 따로따로 오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을
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집가서 제 자식 낳고 살면서 겉보기에도 안정되고 철들어가
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딸 때하고 달라서  사돈한테 그닥 신경이 써지지 않
았다. 생각할수록 아들이 좋다 싶은 게, 사돈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거였다. 사돈한테 죄지은 거 없이 저자세로 굴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결혼식까지 치른 후가 아닌가. 흉잡혀 봤댔자였다. 확실하게 칼자루를 쥐고 있
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들하고 대학동기인 며느리가 아들이 군대가  있는 동안 마음 변치
않고 조신하게 기다려준게 기특하긴 해도 꼭 그래 줬으면 하고 바란 것은 아니었다. 특이하
게 여기는 마음보다도 여자로서는 한물간 동갑내기라는 걸 서운해하는 마음을 더 드러내 보
이고 싶은게 시에미의 꼬부장한 심정이었다. 지금 처가살이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사
돈한테 면목없을게 없었다. 식 올린 지 한 달도 안됐고, 곧 둘이 같이 유학을 떠나기로 예정
돼 있었다. 그동안 시집살이를 안 시킨걸 그쪽이 고마워할 일이지 이쪽에서 미안해 할 일은
아니었다.


  까만 타이츠의 소년, 어쩌면 소녀가 유리컵에 얼음물을 갖다 놓고 잠시 그녀 앞에서 지체
했다. 뭔가 시키기를 바라는 몸짓이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뭘로  하실거
냐고 묻는 건 주문을 재촉하는 걸로 여길까봐 삼가고 싶은  듯, 나이에 맞지 않는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는 가버렸다. 졸업식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아빠는 분명히 일찍  오실
테니 엄마도 늦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채정이었다. 딸의 아버지에 대한 그런 확신은 애정이
나 믿음보다는 촌사람 취급 쪽이 더 강했을 거라고, 그녀는 여기고 있었다.


  기다린다기보다는 방심한 시선으로 문 쪽을 보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오고 있었다. 불그죽
죽한 넥타이로 목을 잔뜩 졸라맨 정장 차림이었다. 그녀가 일어서서 여기예요 여기,  하면서
손짓을 하려는데 먼저 그의 메마른 고성이 넓은 홀 안에 고루 퍼졌다. “여기가 페스타롯치
다방 맞소?”


  종업원들은 물론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손님의 대부분은 고등학생 티
가 가시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웬 페스타롯치? 하면서  여기저기서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
다. 그녀는 여기라고 외치는 대신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소매를 끌었다. 마누라를 보자 안
심한 듯 그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내가 그래도  옳게 찾아왔구먼. 많이 기다렸는
가?”


  그러나 마주앉자 두 사람은 할말이 없었다. 졸업식까지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그가  꾀죄
죄한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반들반들 구겨진 구릿빛  정수리에서 샘솟듯 땀이 흘러내리
고 있었다. 교장선생이었을 때의 별명이 놋 요강이었다. 그는  워낙 땀이 많았다. 그러나 처
음부터 대머리였던 건 아니다. 검은 머리가 뻣뻣하게 곤두서 약간은 사납게 보이던  젊은날,
아아, 덥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들입다 한번 머리를 흔들면  땀방울이 샤워처럼 사방으로 튀곤 했었다.

 

그땐 그를 사랑했었나? 그녀는 생각날 듯 날 듯 감질나는 옛 기억을 붙잡으려는
시늉으로 양미간을 모았다. 한때 있었던 것의 사라짐. 그게 사랑이든 삼단 같은  머리칼이든
간에, 그 뒤엔 일말의 우수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나 그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우린 부딪치면 안돼. 피차 보호막이 없이 부딪친다는 건 잔인한 일이야. 그녀가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충분히 땀을 들이고 난 남편은 큰 소리로 주문을 했다. “여기
뜨거운 코피 두 잔 다고. 생각 같아서는 비싼 냉코피를  팔아주고 싶다만 이렇게 춥게 해놨
으니 어떻게 찬 걸 먹냐?”


  구석구석까지 잘 울려퍼지는 예의 건조한 고성에 그녀는 허를 찔린 듯이 질겁을 했다. 페
스타롯치에 웃던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킬킬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어련히
주문을 받으러 올라구요.”“여기서 뭣하러 마냥 앉았나. 얼른 자릿값이나 하고 가봐야지.”
“아직 시간 많아요. 여기 좀 좋아요? 시원하고 요새 애들 구경도 실컷 하고...”“기름 한방
울 안 나는 나라에서 백주에 놀고먹는 아녀석들을 위해서 전력을 이렇게 낭비를 하다니, 내
원 한심해서.”


  입만 열었다 하면 옛날 고렷적 도덕책 같은 소리만 하는 남편을 외면하면서 그녀는 아무
래도 안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 마음을 누군가가 읽고 안되겠는 게 뭐냐고 묻는다 해도
아마 대답을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두서가  없고 애매했다. 커피가 왔다. 남
편은 나도 요새 블랙인가 원가에 맛을 들였는지, 괜찮더라고  하면서 육개장 국물 들이마시
는 소리를 냈다. “언제 떠난대? 갸아들은.”“미국  학기 시작할 때 대가야 한다니까  일간
떠나겠죠 뭐.”“떠날 때까지 데리고 있지 그랬어? 새며느리 말야. 아들 가진 쪽에서 그 정
도는 본때를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적어두.”“아들 좋아하시네.”그녀는 울컥 치미는  반감
때문에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는감?” 당신이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수, 하고 되받으려다 말고 그
냥 픽 웃고 말았다. 70년대 말까지 남편은 평교사였다. 남편은 교감, 교장이 된 후에도 그때
를 한창 날릴 때였다고 회상하곤 했는데 시골 소학교 선생이  날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교
감이나 교장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그러니까 그나마 출셋길이 열려 있던 시절이란 뜻이었
을까. 새마을 정신이 어린이들 의식까지 짓누른 유신시대였다. 그녀는 그때 생각을 하면  지
금도 숨이 막혔다. 그가 담임 맡은 반은 온통 국민교육헌장으로 도배를 했고, 한 아이도  빠
짐없이, 지진아까지 그걸 달달달 외우는 반으로 유명했다. 그걸 입술로만 외우는 게  아니라
뜻을 충분히 새겼다는 걸 알아보려는 경시대회가 군내에서 있었는데 그의 반은 거기서도 일
등을 먹었다.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된 것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였는데 그의 교장
실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 사진이 가장 높은 정면에 으리으리하게 걸렸다.

 

그건 시골학교라서가 아니라 장관실이라 해도 아마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문제는 갈등없는 추종
이었다. 마치 주인니 바뀐 노예처럼 주인의 이름이나 인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이
라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사진이 바뀌고  나면 그의 표정과 말투도 사진을 닮아  달라졌다.
조회 설 때마다 늘어놓는 장광설의 내용도 물론 그 최고 권력자의 어록에서 따왔을 것이다.
그가 만일 출세지향적인 권력의 측근자였다면 그런 언동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알아서
기는 교육공무원의 소심증이었다고 해도 아내에게만이라도 그걸 더럽고 치사하게  여기면서
참아내기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그녀도 어떡하든 위로해주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
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가부장의 고독한 책무는 어쩌면  정의감 이상으로 비장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편은 위로가 필요없는 사람이었다. 위로가 필요없는 인간처럼 참을  수 없는 인격이 또
있을까. 그의 체제순응은 강요된 것도 의도적인 것도 아닌 체질적인 거였다. 그의  매력없음
의 본질 같은 거였다. 그와 다시  합친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생각하기가  싫어서였
다. 그러나 오늘은 표면적인 별거의 이유가 완전히 소멸되는 날이다.


  그녀가 교장관사에다 남편을 혼자 남겨놓고 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온 것은 채정이가 대학
에 붙고 나서였다. 채정이가 다닌 시골 고등학교에서 서울의  웬만한 대학에 합격자를 내기
는 채정이가 처음이어서 학교 정문에다 크게 플래카드를 내걸  정도로 영광스러워 했다. 부
모가 우쭐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의 뒷바라지는 유난스럽고도 고
달픈 거였지만 자신의 학부모 노릇에 자신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드디어 딸이 떳떳하게
그 시골 구석을 벗어나게 됐다는 데 그녀는 터질 듯한  기쁨을 느꼈다. 채정이 밑으로는 고
등학교에 진학한 채훈이가 남아 있었다.

 

아들은 딸 보다 더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그녀
의 욕심과, 과년한 딸을 혼자 객지로 내돌릴 수 없다는 남편의 생각이 맞아떨어져서 그들은
남 보기에도 그들끼리도 조금도 무리없는 별거상태로 들어갔다. 그녀가 처음 자리잡은 서울
의 지하 셋방은 위층에서 오줌 누는 소리, 입맛 다시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그래도 그런 소
리를 들으며 교장관사를 벗어난 게 꿈이 아니라 생시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건 실로 황홀한
기쁨이었다. 조회 설 때마다 판에 박은 듯 만날 똑같은 교장의 훈시에 귀가 다  먹먹해지고,
언제나 저 놋요강 두들기는 소리 안 듣나 하고 지겨워하는 아이들의 수군거림까지 들릴 듯
한 교장관사 생활은 고문의 기억처럼 진저리가 쳐졌다.


  아이들 뒷바라지는 핑계일 뿐 그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것은 교
장 사모님 노릇을 안하는 거였다는 걸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별거에 들어간 후에도 남편
의 봉급은 다달이 거의 다 그녀의 통장으로 입금됐다. 아무리 혼자라도 어떻게 그 나머지로
살까 싶게 남편이 떼어낸 액수는 미미했다. 그러나 서울생활  역시 그 봉급으로는 빠듯했으
므로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 안 살고 나서 채훈이 과외공부를 시키기 위해
그녀도 돈벌이를 하게 됐다. 아파트를 낀 상가의 화장품  할인매장을 하는 친구를 도와주다
가 그 가게를 아주 인수하게 됐고, 국산 화장품 외에도  외제 소품을 겸함으로써 수입을 늘려나갔다.

 

자신이 생각해도 돈버는 수완이 있었고, 운도 따랐다. 아이들 복인지도 몰랐다. 둘
의 학비가 한창 들 때 그녀의 수입도 피크에 다다랐다가 근처에 대형 백화점이 생기면서 조
그만 상가가 사양길에 들어서자 학비 걱정도 줄어들다가 아주  안하게 됐으니 말이다. 돈을
못 벌때는 세 식구가 전적으로 남편 수입에 의지해야 했으므로 남편 사정을 볼 여유가 없었
고, 돈을 넉넉히 벌게 되자 상대적으로 남편 송금이 하도  쩨쩨해 보여서 또한 남편 걱정을
안하고 말았다. 그렇게 역대 정권에 충성을 다하던 남편도 어찌  된 일인지 정년을 한참 남
겨놓고 명예퇴직을 당했다.


  그 소식은, 남편이 근무하던 고장과는 얼토당토 않게 휴전선하고 가까운 시골에다 헌집하
고 거기 딸린 약간의 땅을 사놓은 게 있는데, 거기 가서 살기로 정했단 소리하고 동시에 들
었기 때문에 은퇴 후 같이 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근심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마
이크 대고 연설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고 살까 싶어 피식 웃음이 났을 뿐이었다. 은퇴 후에
도 연금은 꼬박꼬박 그녀의 통장으로 입금돼왔다. 아이들은 가끔  그 시골집에 다니러 가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시라고 위로하고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이들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전원생활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그녀에게도 조금만 더 참으란 소리를 자주했
다. 엄마가 저희들 때문에 아빠와 떨어져 사는 걸 늘 미안해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지
도 모른다. 저희들이 결혼 후까지도 부모에게 신경을 쓰거나 책임을 지게 될까봐 그걸 미연
에 방지하고 싶어할 수도 있으리라. 엄마 아빠를 붙여놓는  거야말로 완전히 상쇄시키는 최
상의 방법이고, 그럼으로써 저희들은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은 속셈이 있을 지라도 어쩌겠
는가.


  그녀는 일부러 한번도 남편의 전원생활을 가 보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싶었다. 또 남편이 그녀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 정도로 착실
하게 혼자 살 궁리를 해온 걸 보면, 별거상태를 고정시키고  싶은 건 남편도 그녀와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한다는 자존심 대결 같은 것도 있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데 그가 어떻게
살든 뭣하러 아는 척을 하겠는가. 초가집이 썩고 썩어 주저앉듯 고요한 파탄이었다.  한지붕
밑에 사는 자식들 귀에도 안  들리는. "그 양복밖에 없으시우? 오늘은  딴 양복을 입으시지
않구." 그녀는 마직이라 구김이 많이 난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윗도리 깃
에는 김칫국물 자국인 듯한 얼룩도 보였다.


  "왜 이 양복이 어때서? 최고급이라면서." "아무리 최고급이라도  그렇죠. 며늘네한테 예단
받은 양복 아니우? 예단 받은 건 결혼식날 하루 입었으면 됐지 줄창 입으면 그 집에서 어떻
게 생각하겠어요?" "줄창 입긴, 결혼식날 입고 오늘 처음 입었소.  여름에 넥타이 매는 양복
은 누가 억만금을 준대도 줄창은 못 입겠습디다."


  "사돈 보기에 줄창이란 소리예요. 결혼식날 보고 오늘이 처음 보는 거 아뉴.  조금 신경을
쓰시지 그랬어요." "예서 어떻게 더 신경을 쓰나?  채정이년은 며칠 전부터 꼭 정장하고 오
라고 전화질이지. 넥타이 매는 양복은 이거 한벌밖에 없는 걸 낸들 어떡허란 말요." "아이고
알았어요. 알았으니 그만 둡시다." 더 길게 말하단 밑천도 못 건질 것 같았다.


  "양복보다 더 중요한 건 사돈  보기에 우리가 보통 부부 사이로  보이는 걸 거요, 아마“
남편은 한결 가라앉은 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서더니 찻값을  내러 갔다. 그녀는 남편
의 짧은 눈길에서 연민 같은 걸  읽고 당황했다. 내가 저를 불쌍해하면 했지  왜 저가 나를
불쌍해한담, 아니꼽게스리. 시계를 보니 졸업식에 대가기 맞춤한 시간이었다.


  후기 졸업식은 졸업생이 적어서 그런지 식장이 야외가 아니고 대강당이었다. 사돈 내외를
비롯해서 채훈이 처남, 처형, 동서 등 처가 식구가 열 명도 넘게 식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
었다. 채정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잡아놓으러 미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채정이 덕에
양쪽 사돈이 가장 좋은 자리에 나란히 앉고 다른 식구들도 흩어지지 않고 모여앉았다. 안사
돈끼리 가운데 붙어 앉고, 바깥사돈들은 각각 자기 마누라 옆에 앉게 되었는데 식이 진행되
는 동안 계속해서 채훈이 장모는 그녀의 귓전에다 대고 야죽야죽 잘도 소곤거렸다.

 

하긴 한 달 가까이나 사위를 데리고 있었으니 할 얘기도 많을 것이다.  주로 두 내외가 얼마나 금실
이 좋은가 하는 얘긴데 흉보는 것 같으면서도 자랑이요, 어려웠던 것 같으면서도 재미본 얘
기였다.


  "딸자식은 소용없단 소리가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니까요. 큰딸은 미리 그러
려니 하고 길러서 몰랐는데, 막내는 우리집 양반이 유난히 애지중지하셨거들랑요. 저도 덩달
아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설거지 한번을 안 시키고 떠받들어  길렀더니 , 글쎄 시집가고 나
더니 당장 부엌에 나와 제 신랑 먹을 거 먼저 챙기느라고 어찌나 법석을 떠는지. 그뿐인 줄
아세요? 즈이 아버지가 아침마다 드시는 녹즙까지 즈이 신랑은 왜 안 주냐고 따지더니 아침
엔 저보다 먼저 나와서 제  손으로 녹즙을 짜가지고 이층으로 살짝  올라 간다니까요. 이왕
짜는 길에 즈이 아버지 것도 한잔 더 만들면  어때서 글쎄 딱 한잔 제 신랑 거만  해가지고
가는 걸 보면 나는 얄미워 죽겠는데 우리집 양반은 속도 없이 뭐라는 줄 아세요? 이제야 철
났다고 기특해하는 거 있죠. 아무튼 막내사위라면 예뻐서 그저 이래도 허허허, 저래도  허허
허, 입을 못 다무신다니까요. 우리 수정이도 시집 잘 갔지만 정서방이 장가 하나는 정말  잘
갔어요. 안 그렇습니까?" "아무려면요." 마지못해 그렇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이 여자가 누구
약을 올리기로 작정을 했나 싶어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신혼의  딸 내외를 꽃 본 듯이
어르면서 옥시글옥시글 즐거워할 그 집안과 대비되어 떠오르는 것이 자신의 옹색한  샅림살
이가 아니라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남편의 시골집인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외딴집 홀아비 살
림의 썰렁함, 스산함,그런 것들이 옛날 영화처럼 구질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사위는 백년
손이라던데 어려움이 많으시죠. 저희 집으로  보내셔도 좋은데... 그녀는 인사성으로  그렇게
말해놓고는 말끝을 흐렸다.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화도 났다. 안사돈끼리의  이런
미묘한 심리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앉은 남편은 고개를 길게 빼고 무대 위에서 진행되
는 졸업식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고,아니에요. 정서방이 얼마나 소탈하고 붙임성이 좋다고요.  하긴 저희 집에 드나든
지가 어디 일이년입니까. 신입생 시절부터 서로  단짝 친구였으니, 사위 될 줄 모를  적부터
아들처럼 얘, 쟤 이름 부르고 먹던 밥상에 숟갈 하나 더 놓고 같이 먹고 했으니까,  정이 들
대로 든걸요 뭐. 그래도 막상 사위가  되고 나니 어찌나 든든하고 귀여운지. 우리집  양반은
더해요. 며칠 전에 즈희 시아버님 제사였잖습니까. 우리 큰애네는 미국 가 있으니까 제사 참
예 못 한 지가 오래됐지만 작은아들이 엄연히 있는데 글쎄 턱하니 아들 제쳐놓고 막내사위
먼저 잔을 올리게 하지 뭡니까. 조상님한테 새 사람을 먼저 인사시켜야 한다나요. 우리집 양
반이 워낙 소탈해서 제사에도 격식이 없어요. 영정만 모시고 지방은 안 써요. 제수도 격식보
다는 생전에 좋아하시던 걸 자주 하죠. 지방을 안 쓰는 대신 우리집 양반은 마치 살아 있는
어른들한테 하듯이 자상하게 요새 사는 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잘 봐달라고 조
르기도 한다니까요. 이번에 새사위를 생면시키면서도 어찌나 웃기시는지 제사가 엄숙하기는
커녕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니까요."


  안사돈은 지금 생각해도 다시 한번 즐겁다는 듯이 호호거렸다.  새사람이라니, 아무리 세
상이 두서없이 바뀌었다고 해도 수정이가 우리집 새사람이 되면 됐지 왜 우리 채훈이가 자
기 집 새사람이란 말인가. 격식을 안 차리기로는 이쪽이 사돈집보다  한술 더 뜨는 집 안이
었다. 그녀가 시댁 제사에 참예해본 지가 언젯적인지도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남편이 지차
고 큰댁이 외진 산골이라 새댁 적 빼고는 남편 혼자  다녀오곤 했다. 남편도 다음날 아이들
가르치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으면 돈만 부치고 안 가기도  했고, 그 버릇은 그런 신경 안
써도 되는 교장이 된 후까지도 계속됐다. 제사에 채훈이를 데리고 가본 것도 아마 손가락으
로 꼽을 정도밖에 안될 것 이다. 제사는 자기가 보고  기억히는 조상에 한해서만 지내면 된
다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었다.


  채훈이도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제사를 그닥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
도 그렇지, 제 처를 제 조상 제사에 참예시키기도 전에  제가 먼저 처가 제사에서 꾸벅꾸벅
절을 했을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영 고약했다. 아유, 못난 녀석, 더리쩍은 자식...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게 분했다. 그녀는 야죽거리는 안사돈에 대한 적의를, 스스로 아들에 대한  배신감
으로 증폭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장 졸업식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옆에  앉
은 남편의 손을 잡았다. 손잡고 나갈 사람이 필요했다. 남편은 손을 잡힌 것도 의식하지  못
하는 것처럼 단상에서 진행되는 일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마치 이제나 저제나 자기가
상 받으러 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모범생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거둬들이고 말았다.


  남편에게 단상이 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단상을 좋아했다. 단상에만  올
라가면 저절로 목소리에 권위적인 억양이 붙고, 아무도 흠잡을 수 없는 지당한 소리만 줄줄
이 나왔다. 아무리 조그만 집단에서도 단상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는 단상에 있을 때, 단
하에 있는 단 한사람이라도 자기를 주목하지 않는 걸 참지 못했다. 주목만이 아니었다. 그가
단상에서 단하에 요구한 것은 경배였을 것이다. 단상에 있을 때 단상의 권위에 충실했던 것
처럼 단하에서는 단하의 의무에 충실코자 하는 걸 누가 말리랴.


  그런 그가 집안 식구에 대해서는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던 것은 자상하거나  가족적이어서
라기보다는 월급봉투만 축내지 않으면 가장의 권위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
이 아닐까? 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심없이 받아들인 후에도 그랬고, 은퇴 후까지도 월
급이나 연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금 축내고 전액 식구들한테로 가게 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의 집념에 가까웠다. 요새는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뭐 해먹고  사는 것일까? 그녀는 조금
전에 잡았던 남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톱 밑에 때가 낀 투박한 손이었다. 그녀는 직접  잡
아보았을 적에도 못 느낀 이물감에 허방을 밟은 것처럼 움찔했다.


  박사, 석사 학위 수여식이 끝나고 학사 학위를 수여할 차례였다. 그녀는 아들이 학위 받는
걸 똑똑히 봐두고 싶었다. 사진은 채정이가 찍기로 돼 있었다. 채정이뿐 아니라 그쪽 식구들
중에서도 서너명이나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것 같았다. 졸업생보다도 더  많은 사진사들이
무대를 가려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사돈이 다시 조근조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
내의 웅성거림 때문인지 귓불에 숨결이 닿을 듯 안사돈의  속삭임은 친근했다.  "보려고 애
쓰지 마세요. 사진이나 잘 나오면 되죠 뭐. 무슨 행사든지 사진밖에 남는 게 뭐 있나요.  참,
아이들 결혼사진 잘 나왔죠? 사진사가 찍은 것말고도 카메라 사진까지 다 챙겨서 보내드렸
는데." "예, 잘 받았습니다. 카메라 사진은 저희들한테도 꽤 있는데, 웬 걸 그렇게 많이 꼼꼼
하게 정리를 해서 보내셨어요?" "저희는 아이들 자라는 모습뿐 아니라  걔들한테 무슨 행사
가 있을 때마다 사진으로 남겨놓는게 큰 낙이랍니다. 취미도 되고요. 상이나 임명장 받는 사
진도 안 빠뜨렸는데 혼인이야 인륜지대산걸요. 이렇게 꼭 기록을 남기다보니, 기록 때문에라
도 할 건 다 하고 살아야지 대충 넘어가면  안되겠더라고요. 사진첩을 정리하다보니 신혼여
행 못 보낸게 그렇게 서운하더라고요." "못 보내다니요? 저희가 안 가겠다고 우겨서 그렇게
된 게 아니던가요?" 그녀는 계속해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색을 하고 따졌다.

 

결혼식을 마침 바깡스 시즌에 치렀을 뿐 아니라, 유학갈 날을 한 달 남짓 남겨놓은 시점이라 채훈
이는 채훈이대로 수정이는 수정이대로 각각 일이 많았다. 비자도 새로 내야 하고, 짐도 배로
미리 부쳐야 하고, 운전면허도 갱신해야 하고, 이런저런 해결 안된 일 때문에 마음들이 한갓
지지 않아 신혼여행은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며칠 쉬다 가는 걸로 대신하겠다고
저희끼리 합의하고 양쪽 부모는 통고만 받았는데 지금 와서  웬 트집인가 싶었다. 

 

 "그러문요, 그러문요. 그래도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더라구요. 더군다나 양가가 다 언제 또 해볼 것
도 아닌 마지막 자식 경사가 아닙니까.  남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말인데
요, 졸업식 끝나는 대로 제주도로  삼박사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도록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아직 걔네들은 모르고 있어요. 놀래켜주려구요.  까다로운 절차도 다 끝나고 모처럼  여유가
생겼으니 좋아할 거예요. 여행 다녀오자마자 다시 비행기 타야  하는 게 안됐지만 사나흘이
라도 하릴없이 서울에서 빈둥대면 뭘 합니까? 술친구한테  끌려나가기가 십상이죠. 안 그렇
습니까?" "그렇겠군요." 그녀는 자신  속의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걸 위태롭게 느끼면서
쓰겁게 대답한다.

 

안사돈은 무슨 요량인지 핸드백에서 흰 봉투에 든 걸 꺼내서 그 내용물을
살짝 보여주었다. 왕복 항공권과 하얏트 호텔을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이었다. 보여주고  나서
그걸 가볍게 그녀의 무릎 위에다 놓아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이따가 사부인께서 아이들
한테 주세요." "왜요?" 그녀는 당장  귀밑이 달아오르게 놀라면서 물었다  "아, 아무나 주면
어떻습니까? 거기다 명토를 박아놓은 것도 아니고, 사부인께서  주시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거예요. 저희 쪽에선 따로 여비나 쥐여주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상냥
하면서도 속셈을 드러내지 않는 이 여자의 진의는 뭘까? 잘못한 것도 없이 사람을 남루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안사돈의 수법에 걸려넘어진 것처럼  그녀는 무참해지고 말았다. 혼란스러
워 허둥대는 손길로 무릎 위의 봉투를 사돈 쪽으로 거칠게 밀어놓았다. 그러나 미처 어째볼
틈도 없이 그 하얀 봉투는  이번에는 그녀 핸드백의 사이드 포켓  속에 꽂혔다.

 

민첩하고도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스스로도 분간  못할 감정이 모닥불처럼

그녀의 표정을 달구었다. 하필 그때 졸업식이 끝나고 하객들은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우르르 몰
리기 시작했다. 안 넘어지려고 버팅기면서, 정신없이 사람들한테 밀리며 밖으로 나오니 오후
의 열기가 지글지글한 엿물처럼 엉겨붙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지겹다는 소리를  몇번이나
연발했다. 녹아내리듯이 조금씩 흐느적대는 인파 속애서 남편도,  채정이 내외도, 사돈집 식
구들도 찾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되는대로 인파에 밀려난 자리엔 한 뼘 그늘도 없어서
그녀는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자포자기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제일 먼저 그녀를 찾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저만치 큰 느티나무 아래 모여
있는 하객들을 가리키며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큰 소리로  나무라기부터 했다. 그녀는 남
편을 보자마자 아직도 검정 핸드백에, 웨이터 주머니에 꽂힌 풀먹인 손수건처럼 삼각형으로
빳빳하게 꽂힌 봉투가 갑자기 생각나 얼른 안으로 보이지 않게 밀어넣었다. 남편을 따라 느
티나무 아래로 갔다. 거기 다 모여 있었다. 채정이 내외만 겨우 아는 척을 하고  딴사람들은
채훈이를 둘러싸고 번갈아가며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채훈이는 꽃다발과 선물 꾸러미
에 묻히다시피 해서 바보처럼 싱글거리고 있었다. 식장에서 바깥사돈이 포장을 요란하게 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는 걸  보고, 집에 데리고 있으면 집에서  주면되지 뭣하러 식장까지
가지고 왔나 다소 아니꼽게 여겼었는데 다른 친척들도 다들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자
식한테도 빈손을 부끄러워해야 되나? 아무리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해도 부끄럽게 만들고 있
었다. 어쩌면 아까 건네준 흰 봉투는 아무것도 준비 안한  우리들의 빈손에 대한 일종의 야
유나 동정이 아니었을까. 아들은 그들하고 단체로 또는 삼삼오오  끼리끼리 사진도 찍고 인
사치레도 하느라 아직도 정신이 없고, 이쪽의 찍사를 자처하고  나선 채정이까지도 그 사진
찍기 좋아하는 족속한테는 손을 들었는지 중심에서 밀려나 관망을 하고 있었다.


  채정이 졸업식 때도 그랬다. 상견례를 겸한 최초의 만남이었는데도 이쪽은 제쳐놓고 저희
끼리 채정이를 끼고 돌면서 사진도 찍고, 요리 보고 조리 보면서 귀여움도 표시하고 넌지시
위엄도 보이느라 이쪽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그래도 그땐 별로 분한 줄을 몰랐다. 딸  쪽
이니까 으레 그러려니 했고, 그 밑에 아들이 있으니 아들  가진 쪽은 어떻게 세도를 부려야
되는지를 보고 배울 기회다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를테면 마음만 먹으면 몇곱으로 갚을 수
도 있는 복수의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닥 굴욕스럽지  않았다. 또 재학중에 애인이 생
겨 졸업식에 벌써 시집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걸 부러워하는 눈길을 의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랬건만 이게 무슨 꼴이람. 누구누구 나무라  무엇하랴, 내 아들이 저 꼴이
니. 그녀는 강력한 권리 주장처럼 눈을 부릅뜨고 아들을 주시 했다.


  채훈이가 마침내 엄마의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아들의 눈길을 그
녀는 잽싸게 낚아챘다. 마치 잡아끌리듯이 채훈이는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약간 계면쩍
은 듯이 웃는 채훈이는 아무리 내 아들이라도 바보 같았다. 아들은 엄마를 버려 둔 걸 보상
이라도 하려는 듯이 얼른 학사모를 벗어서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주려고 했다. 채정이도 이
제야 자기가 나설 차례가 왔다는 듯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러나 그녀는 온몸으로 강력하
게 반발하며 학사모에서 벗어났다. 엄마를 뭘로 보니? 그러나 그런  말이 미처 나오기 진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임자 좋으면 좋다고 그럴 것이지, 괜시리 암상은 부리고
그래, 이 좋은 날 훈아, 느이  엄만 싫단다. 나나좀 써보자. 그 뭣이다냐,  학사몬가 뭣인가...
머쓱해 있던 채훈이가 구원받은 듯 아버지  머리 위에 학사모를 올려놔주고 정답게  팔짱을
꼈다. 채정이뿐 아니라 사돈네 식구 중 카메라 가진 이는 몽땅 무슨 살판이나 난 것처럼 일
제히 효자 아들과 장한 아버지를 겨냥해 초점을 맞추었다. 졸지에 남편은 스타가 되었다. 남
편은 마치 소 팔고 땅 팔아 대학 졸업시킨 70년대 농사꾼처럼 멍청하고도 순진하게 사진을
찍히고 또 찍혔다. 저렇게 좋아하시는 걸 보니, 정서방이 하루빨리 미국서 석사도 따고 박사
도 따서 아버님을 초청해야 한다는 덕담도 흐드러졌다. 다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고 시간
은 야비다리를 피우며 흘러갔다.


  누군가가, 연못가도 좋고 민주학생기념탑이 있는 노천극장 주변은 또 얼마나 좋은데 주변
머리도 없지, 여기가 뭐가 좋아서 꼼짝을  못하고 같은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또  찍느냐고,
그들의 사진찍기에 제동을 걸었다. 그  말에 아무도 이의가 없었던지  대식구가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있는 경치  좋은 곳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자연히  그 집 식구는
그 집 식구끼리, 이 집 식구는 이 집 식구끼리 어울려서 걷고, 채훈이는 앙쪽 눈치를  다 보
느라 엄마곁에 붙었다가 장모곁에 붙었다가 하느라고 요령껏 걸음을  조절 하고 있었다.

 

북새통이 더 심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양가 식구들은 서로 놓칠 뻔하다가도 채훈이가 이어줘
서 서로 못 찾는 불상사는  안 일어났다. 장모 곁에서 뭐라고  정답게 소곤거리던 채훈이가
어느 틈에 그녀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낄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알랑거리는 버릇을 어디서
배웠을까 징그러워서 눈을 보얗게 흘겨주며 뿌리치곤  했다. 노천극장에서는 마침 재학생들
이 마당놀이 연습을 하고 있어서 기념탑 근처는 인산인해였다.  슬쩍 자리를 피하기에는 알
맞은 장소다 싶었다. 안사돈은 아마 그동안에  봉투가 자리를 옮긴 줄 알 것이다.  그동안에
그럴 수 있는 기회도 시간도 충분했으니까.


  그녀도 줄창 핸드씩 바깥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봉투를 의식 안 한 건 아니었다. 의식 안
할 도리가 없었다. 그건 줄창 내복에 달라 붙은 가시처럼  그녀의 의식을 편안치 못하게 했
으니까. 그녀는 사돈네 식구들과 채훈이가 함께 보이지 않는 틈을 타 남편의 소매를 힘차게
잡아끌었다. 돌연 떠오른 생각이 결정적 기회와 맞물렸다.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
녀는 자신의 엉뚱한 생각에 놀라서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고 다리가 후들댔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한 걸 알자 돈을 갖고 튀는 악당  같은 스릴과 쾌감으로 온몸이 파열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그건 쾌감이 아니라 살인지도 몰랐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살처럼 뻗
치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남을 해코지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생긴 것 같은 느낌
이 어찌나 좋은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어금니를 물었다.


  남편은 끌려오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꾸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화장
실이라도 찾는 줄 아는지 남편은 순순히 따라왔다. 교문이 보이는 데까지 와서야 그녀는 헛
된 흥분을 가라 앉히고 덤덤히 말했다.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려고 그랬어요. 처가에서 채훈
이 내외를 오늘 제주도로 여행을 보낸다는군요. 졸업축하겸 신혼여행겸이라나요. 우리가  있
으면 시간도 얼마 안남았는데 길게 인사해야 하고, 떠나보낸  후엔 양가가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헤어져야 할 것처럼 미쩌거려야 하고, 아직 서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럴거  뭐 있어요."


"그래? 참 사돈댁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구먼. 그래도  그렇지 잠깐이라도 인사를 하고 오는
게 도리지, 우리가 길 잃어버린 줄 알고  찾으면 어떡하라고." "걱정 말아요. 아까부터 내가
눈치줬으니까 채훈이는 아마 짐작했을 거예요. 적당히 둘러대겠죠  뭐." "우리가 용돈이라도
줘보네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소만" 남편의 나중 말엔  다소 빈정
거리는 투가 섞여 있었다. 어차피 손발이 맞아서 저지른 일도 아니건만 그녀는 울컥 야속했
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의 즐거움을 잠시 훼방놓거나 하루쯤  유예하는데 불과한 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소모한 좀전의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으로부터도 밀려난  것
같은 느낌은 여지껏 겪어본 어떤 외로움하고도 닮지 않은  이상한 외로움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지만 하는데까지 해볼 작정이었다. 몸을 달구던 정열은 환각처럼

온데간데 없었지만 훼방놓고 싶은 심술은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우리끼리지만  저녁이라도
먹고 헤어집시다."  남편의 제안은 전혀 은근하지 않고 사무적이었다.  "이렇게 해가 높다란
데요?"  살핏한 해는 어쩌자고 아직도 지칠 줄 모르고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입추 처서 다
지났다고는 믿기 어려운 더위였다. 

 

"그래도  한끼 때우고 들어가는게 안 낫겠소?  혼자 밥
해먹는게 얼마나 을씨년스럽다고...”  어쩌자고 이 남자는 이렇게 정직한 걸까. 그녀는 남편
의 촌스러움, 초라함, 변변치 못함이 다 겉에다 주렁주렁 달고 있는 흔자서 밥 해먹은  티만
같이 여겨져 바로 보기가 싫었다. "오늘은 당신 따라서 바라니나 한번 가볼래요.  왜 그렇게
늘라요? 내가 어디 못갈데 가본다고 했어요?"  바라니란  낭편이 자리잡은 동네이름이었다.
채정이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채정이는  동네이름이 참 예쁘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때 기분이 안 좋았었다. 행여나 누가 찾아 오나 고개를 길게 빼고 동구 밖
만 바라보고 있는 늙은이들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남편은 잠시 놀란 듯하다가 금방 덤덤해지더니 전철을 타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말없이
남편 뒤를 따랐다. 상실감을 메우려고 너무 허둥거리고 있는  자신이 딱했지만 어차피 오늘
은 빗나가기 시작한거, 가는 데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개통된 지 얼마 안된 전철 노선은  오
래된 노선보다 한결 시원하고 정결했다.  왕십리에서 국철로 갈아타고 종점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야 한다고 남편은 양해를 구하듯이 앞으로 이용할  교통편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
는 듣는 척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게  없었다. 남편보다 더 서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어렵게 확보해 놓은 단골을 잃게  될까봐 처음 자리잡은 가게를 한번도  옮긴 적이 없었다.


주로 아파트에 사는 단골들은 물론 자주 바뀌었다. 잃은 만큼 얻어지는 게 단골이었으니 단
골이 꾸준히 있다는 게 중요아지 단골이 누구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세상사를 빠
삭하게 꿰뚫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단골들 덕이었다. 그녀는 좁은  가게 안을 요령껏
편안하게 꾸미고 단골들이 필요한 것 없이도 들러서 수다를 떨고 싶은 곳으로 만들었다. 근
처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고 나서 그녀의 가게 앞은  백화점 비스정류장으로 변했다. 처음
에는 가게에 들어와서 구경하는 척하다가 백화점 버스가 오면 냉큼 나가 타던 단골들이 이
제는 탈때도 내릴 때도 그녀의 가게를 못 본 척하게 됐다. 마치 거기 가게가 없는 것처럼.


  국철로 갈아타기 위해 계단을 여러번 올라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은
좁고 숨어 있듯이 외진 데 있었다.  지상은 아직도 해가 지기 전이었다. 고층건물  모서리에
걸려 있는 석양은 강한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쩌라고 국철을  기다리는 정류장은
해가리개 하나 없는 노천이었다. 차를 태워주기 위해 서가 아니라, 벌을 세우기 위해 마련한
정류장이다 싶었다. 그러나 햇볕이 온종일 달군 시멘트 바닥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당하건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듯 방기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편의 대머리가 둔탁하게 빛나면서 다시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만지면 송진처럼 찐득할
것 같은 땀이었다. 생각만 해도 싫어서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국철은 전철처럼  자주오는게
아닌 모양이었다. 시멘트 기둥에 열차시간표가 써 있었다. 이십분에 한번씩 오기로 돼  있었
다. 그녀는 이건 더위를 견디는게 아니라 굴욕을 견디는 거라고 생각했다.


  참고 기다린 보람은 있어서 국철 안도 지하철 안과 다름없이 서늘했다. 그러나 국철 구간
의 풍경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시골 같지도 않고,  도
시 같지도 않은, 단지 버려진 것 같은 들판으로는 걸쭉하게 썩은 샛강이 흐르기도 하고,  어
디로 가는지 모를 굽은 다리를 받쳐주기 위한 육중한 시멘트 기둥들이 질척한 늪지대에 괴
기스럽게 뿌리내리고 있기도 했다. 녹슨  쇠붙이, 썩은 널빤지가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더미
사이를 비집고 기승스럽게 자라는 풀들은 독초처럼 잔뜩 약이 올라 저 만치 폐가처럼 설렁
한 집들을 위협하는가하면, 갑자기 네모난 단층집 동네가 철로에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오
기도 했다. 빨래가 널린 옥상과 백일홍, 맨드라미가 빨갛게 핀 마당이 사람사는 동네다우나,
서운케도 열차를 향해 주먹질을 하는 동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깨달음처럼 국철 구간하고 남편이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
다. 그런 생각이 들자 거기 타고 있는 사람들이 지하철  승객하고는 인종이 다른 것처럼 이
상해 보였다. 남은 자는지, 자는 척하는지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그녀에게 아들을 빼앗긴 상실감은 마치 허방을 밟은 것처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순탄한 길을 걷다가도 휘청거릴 나이에 이런 허방이 숨어 있을 줄이야.  허방치고
는 너무도 깊은 허방이었다. 그녀는 한없이 추락중인 삶의  허방에서 움켜진 한가닥의 지푸
라기를 바라보듯이 어이없어하며 자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역에서 그녀는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으로 남편을 흔들었다. 얼떨
결에 밖으로 따라나온 남편은 한  정거장 더 가야 종점이라면서 다시  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층층다리 쪽으로 거세게 잡아끌며 말했다. "갈 데가 있어서 그래요 " "어딜?
별안간."  "그애들은 오늘 신혼여행 가서 마냥  재미볼 거 아뉴? 우리도 기분 좀  내봅시다.


바라니에 가봤댔자 모기밖에 누가 우릴 반겨주겠어요."  채정이가 바라니 갈 때마다 모기약
을 사 나르던 생각을 하며 말했다. "바라니로 가잔 것은 당신이었소." 남편이 침착하게 타이
르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휭하니 앞장을 서더니 돼지갈비집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대신 천장
에서 옛날 비행기 프로펠러처럼 생긴 선풍기가 돌아가는 집이었다. 식탁마다 지글대는 불갈
비 위로 후드가 바싹 내려와 있건만도 넓은 홀이 연기로 매캐했다. 마침 저녁시간이기 때문
인지, 혹시 잘하기로 소문난 집인지, 거의 빈자리  없이 시끌시끌하고 활기차보였다.

 

남편이 어리어리하지 않고 익숙하게 굽는 것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재미  좀 보자는 걸
겨우 돼지갈비 정도로 이해한 남편을 속으로는 한심해하면서도 수굿이 따른 것은 별안간 의
식하게된 심한 허기증 때문이었다. 근수로 주문한 돼지갈비와,  숯불이 이글대는 풍로와, 밑
반찬만 갖다줄 뿐 나머지 일은  다 셀프서비스였다. 남편은 알맞게 익은  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서 접시에 옳겨주는 일에서부터 석쇠를 새걸로 가는 일까지 하나도 그녀에게 안 시키고
척척 혼자서 잘했다. 가끔 영양 보충하러 오는 싸고 잘하는 집이란 설명도 했다.


  옷서부터 머리카락까지 돼지갈비 냄새에 푹 절 만큼 포식을 하고 나오면서 남편은 이렇게
먹어도 계산은 얼마 안 나온다고 또 한번 싼 타령을 했다. 그런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앞
서 나온 그녀는 마침 갈비집 앞에서 손님을 내려놓은 택시를 잡고는 남편을 손짓해 불러 먼
저 밀어넣었다. 얼떨결에 올라탄 남편  곁에 앉자 어디 경치 좋은  러브호텔로 가자고 외눈
하나 까닥 안하고 말했다. 러브에다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하고 나서, "당신 그런  데 처음이
죠?" 했다.  "당신은 처음이 아닌 것처럼 구는구려." "그래요? 저도 처음이에요."  그녀는 오
금을 박듯이 힘주어 말했다. 그런 데  한번도 못 가봤다는 걸 서로 믿을  뿐만 아니라 설사
어느 한쪽이 거기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고 해도 바람 피우러 들어간다는 의심도 안할 위인
들이었다.

 

그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은 부부란  말인가. 왜 이 지경까지 되고
만 것일까. 스산한 낭패감으로 잔뜩 추슬렀던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다행히  택시를
한강이 바라보이는 별장풍의 삼층집 앞에 대준 운전기사의 태도만은 노골적으로 그들을  늙
은 잡것들 대하듯 했다. 마냥 끌고 다닌 끝이었다.


 그래도 앞장서서 택시값도 치르고 프런트로  간 것은 남편이었다. 잠시  쉬었다 가시게요?
아니오, 하룻밤 묵어갔으면 하오, 하는 소리에 고개를 붉히며 그녀는 돌아서서 복도 끝 창밖
으로 그제서야 해가 지고 말간 맨얼굴을 드러낸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돈도 많구려
."  키를 받아든 남편을 쭐레쭐레 따라가다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꺾이는 곳에서 멈춰
선 그녀는 약간 시비조로 말했다. 세상에 없는 구두쇠로만 알아온 남편이 저녁값은 물론 호
텔비까지 선선히 지불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여유 돈이 있을 턱이 없는 남편이었으므로
구두쇠 노릇을 민망하게 여길지언정 미워한  적은 없었다. 서로 의심할  건더기가 아무것도
안 참은 무관심한 부부 사이건만 돈문제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민감하다는 데 그녀는 스스
로도 놀라고 한편 부끄러웠다. 

 

"채훈이 졸업식 아닌감. 사돈댁하고 식사라도 같이하게 되면
내가 낼려고 벌써 얼마 전부터 여축해온 돈이라오." 남편의  쓸쓸한 듯 담팜한 대답에 그터
는 할말을 잃었다. 실내는 어둑시근하고 쾌적할 뿐 상상한 것처럼 야하진 않았다. 한강과 대
안의 언덕에 산재한 별장인지 호텔인지 모를 아름다운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잔디가 곱
게 다듬어진 이 집 정원도 그 끄트머리에서면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있을 것처럼 한강하고
가까웠다. 그녀는 오래도록 창가에 서서 남편의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이고 시인하다" 욕실에서 나오는 남편을 돌아보다가 그녀는 에구머니, 소리를 끼를 뻔하
게 놀라면서 얼굴을 돌렸다. 팬티만 입은 남편의 하체가 보기 흉했다. 넓적다리에 약간 남은
살은 물주머니처럼 축 처져 있고, 툭 불거진 무릎 아래 털이 듬성듬성한 정강이는 몽둥이처
럼 깡말라 보였다. 순간적으로 닭살이  돋을 것처럼 혐오스러웠다. 징그러운 것하고는  달랐
다. 징그럽다는 느낌에는 그래도 약간의 윤기가 있게 마련인데, 이건 군더더기 없는 혐오 그
자체였다. 살을 대고 산 적이 있는 부부 사이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같이 살 때도 살
가운 부부는 아니었다.

 

 남편은 그때도 여름이면 집에 들어와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길 잘했
다. 이 다음에 며느리 얻어도 당신 때문에 같이 살긴 틀렸다고, 남편의 그런 버릇을  걱정한
적은 있어도 보기 싫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렇다고 매력있어한 것은 아니고 그냥 집에 있는
구닥다리 장롱이나 책상 밥상 보듯, 있을 게 있을 자리에 있을 때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낭 무심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느낌에 놀란 김에 그녀가 황황히 생각해낸 게 안사돈한테 받은 하얀 봉
투였다. 바로 눈앞에 전화기가 보였다. 오늘 안에 전화는  해야 된다는 것은, 그녀가 미리부
터 생각하고 있던 각본이었지만 당장 떠오른 생각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화를 받은 것
은 안사돈이었다. 그녀는 인사말 제쳐놓고 호들갑부터  떨었다. "이를 거쩝니까? 사부인, 아
이들한테 그걸 전하는 걸 그만 깜박 잊어버렸지 뭡니까? 우리집 어른이 어찌나 서두르시는
지요. 오늘 같은 날 글쎄  아들을 처가댁에서 독점할 수 있도록  우리는 피하는게 예의라고
그러시지 ?니까? 우리가 끼면 거북해하실 거라나요. 워낙 신식이 지나치신 어른이시거든요.

 
그 어른은 그 어른대로 계획이 있으셨나봐요. 저 지금 청평에  있는 그 어른 친구분 별장에
와 있어요. 혼자서 농장에서 지네실 때가 많아서 서울만  오시면 저한테 잘해주시려고 이렇
게 주책을 부리시지 뭡니까. 어머 이를  어쩌나, 급한 진화 걸고 또  딴소리네. 우리 아이들
지금 어떡허고 있나요? 제가 이걸 갖고 있으니 여행도  못 떠났을 테고...내일도 유효하겠지
요? 이 비행기표랑 쿠폰이랑. 내일 일찍 서울로 갈 테니 우리 가게로 채훈이를 보내세요. 아
무리 빠져나오기 급급했어도 이걸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었는지,  제가 생각해도 한심해
죽겠어요. 그나저나 아이들 일을 망쳐놓았으니 이를 어쩌죠?" "아이고  사부인도 참, 망처놓
으신것 아무것도 없으십니다. 예정대로 여행들 떠났습니다. 표 없다고 예약된게 어디로 가나
요. 염려놓으시고 즐거운 시간 보네셔요."


  안사돈은 야죽거리지도 않고 간결하게 말했다. 간단했지만  무시하는 투는 충분하게 여운
이 되어 남아 있었다. 흉보면 닮는다고 오래도록 야죽거린 것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이럴 수
가. 그들이 꾸민 자글자글한 행복을 조금 훼방놓거나 약간의  차질이라도 빛게 하려는 그동
안의 노력이 이렇게 허사가 될  줄이야. 음모를 꾸밀 때의 야릇한  쾌감은 간단한 비웃음이
되어 되돌아왔을 뿐이다. 허망감에다 열등감까지 엎친 데 덮친다는 건 못 견딜  노릇이었다.
남념의 금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사돈댁한테 무슨  실수한 거 아니오? 변변치 못
하게스리." "내가 뭘 변변치 못하게 굴어다고 그래요?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톡 소았다. "당신  똑똑하지. 무지무지하게. 그런 줄만  알았는데 채훈이 장모한테
비하니까 변변치 못해 보입디다."


 그녀는 무슨 말이든 대꾸를 하려면 울음이 섞일 것 같아서 잠자쿄 있었다. 다시 사뭇 의논
성스러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훈이 전공한  학과각 유학이라도 하고 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밥벌이하기도 어렵다고 해서 내 말리지는 못했소마는 학비를 보탤일이 큰  걱정이구
려. 나는 돈 안 쓰는 재주밖에 없고, 당신 고생이 언제 끝날지 앞이 안 보이는 게 미안할 뿐
이오." "미안할 것 업어요. 걔들을 우리가 왜 보태줘요? 그만큼 해줬으면 됐지."  "우리가 걔
들한테 물 해줬다는 거요?" "며느리 시집올 때  혼수고 예단이고 다 접으라고 했잖아요. 요
새 혼수랑 예단이랑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드는지 알기나 아시우?  왜 그만두라고 했는지,
그 집에서 당장 알아듣고 그만큼 딸라로 바꿔 보내겠다고 합디다. 제가 꼬셔서 가는 유학인
데 그만한 각오도 없이 가겠어요?" 

 

 "그래도 그러면 쓰나. 우리가 애끼고 줄여서 다만 얼마
라도 다달이 보내도록 노력을 합시다." "노력 좋아하시네. 난 더 아낄 수 없어요. 가게도 장
사가 안돼서 조만간 정리하려고 하니까 내가 벌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마시구요. 정 그러고
싶으시면 당신이나 아껴서 송금을 하든지 미국 구경을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구랴." "나야말
로 얼마나 최소한도로 쓰고 산다는 걸 당신 정말 모르겠소?"  그 소리의 슬픈 울림에  퉁기
듯이 그녀는 발딱 일어났다. "쉬고 계셔요. 잠간 바람  쐬고 올게요."  침대에 벌렁 누운 남
편을 외면하고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게끔  핸드백은
둔 채로 나왔다. 이층 복도는 빈집처럼 조용했다. 복도  끝에 있는 비상구는 가볍게 열렸고,
그 밖에는 잠시 담배라도 피울 수 있는 공간과, 정원으로  통하는 나선형 철제 계단이 설치
돼 있었다. 내려와 본 정원은 작은 연못까지 있고, 나무 그늘에는 강을 향해 벤치도  알맞게
배치돼 있었지만 거니는 사람 없이 괴괴했다.


  올려다본 삼층집의 방방은 불이 켜진 데도  있고, 깜깜한 데도 있었다. 켜진 방의  불빛도
밝지 않고 은은했다. 오늘 하루 쓰잘데없이  애만 썼다는 사소한 허전함이, 일생을 헛산  것
같은 거대한 허전함이 되어 그녀를 한없이 미소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고 뭔가
로 메우려고 너무 허둥댔음일까. 검부러기라도 움켜잡듯이  마지막으로 움켜잡은 확실한 게
펴보니 고작 남편의 정강이였다. 그건 그와는  도저히 다시 살을 대고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절망감의 생생한 실체이기도 했다.


  오늘 남편을 여기까지 유인한 것은 섹스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이제 그럴 나
이도 아니었지만 한창 나이일 때도 둘 다 그런 쾌락을  밝히는 부부는 아니었다. 겨우 관행
적인 섹스를 유지하다가 별거로 들어가고는 누가 먼저 그러자고 한 바도 없이 그들은 서로
의 몸을 원하거나 그리워하는 일을 안하게 되었다. 하다 못해 스킨십조차 없는  남남이었다.
스킨십이라도 있었다면 남편의 정강이가 그렇게 꼴보기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을 비비는 행동이 끊긴 것과 그의 몸이 그렇게도 보기 싫었던 것이 무관하지 않다면 비비는

행동이란 그닥 얕볼 일도 아니다 싶었다. 그녀가 오늘 느낀 것은 결코 구체적인 욕망이 아니었다. 

흔히 등을  긁어 준다는 식의 스킨십 정도였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 거대한 허전함을 메우고
싶어했다면 그건 욕망보다 크고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가망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동안 완전히 단절됐던 몸의 만남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
다. 그것이 이렇게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그녀는 남편이 잠들기에 충분한 시간을 흐르는 강물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으로  보내다가
방으로 되돌아왔다. 방안은 강바람 부는 강변보다 더 시원하고 남편은 침대 덮게도 안 걷어
내고 그 위에서 헐렁하게 낡아빠진 팬티만 입은 채 코를 골고 있었다. 보기 싫은 것은 둘째
치고 감기가 들 것 같아 덮어주려고 꽃무늬 덮개 자락을 들추다 말고 어쩔 수 없이 벗은 하
체를 가까이 보게 되었다. 모기 물린 자국이 시뻘겋게 한창 약이 오른 것도 있고,  무르스름
가라앉은 것도 있고, 무수했다. 이 말라빠진 정강이에서 피를 빨다니, 아무리 미물이라도 어
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떡하고 살기에 제 몸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때가 낀 손톱과 함께 그의 지나치게 초라하고 고달픈 살림살이가 눈에 선했다. 그렇게까지 안 살
아도 될 만한 연금을 받고  있는 남편이었다. 스스로 원해서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마냥
얽매여 있으려는 남편에 대한 연민이 목구멍으로 뜨겁게 치받쳤다.  그녀는 세월의 때가 낀
고가구를 어루만지듯이 남편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문학동네 1997년 겨울호)

 

 

    그 여자네 집
  지난 여름 작가회의에서 북한동포돕기 시낭송회를  한 적이 있다. 시인들만  참여하는 줄
알았더니 각계 원로들도 자기가 평소 애송하던 시를 낭송하는  순서가 있다고, 나한테도 한
편 낭송해달라고 했다. 내가 원로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북한돕기라는 데 핑
계를 둘러대고 빠질 만큼 빤질빤질하지는 못했나보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낭송하고 싶은 시가 있었다는 게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나는 김용택의 (그 여자
네 집)이라는 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용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한 사람일 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그 여자네 집)이 그의 많은 시 중 빼어난
시에 속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그 여자네 집)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생각하면 그리웁고/바라보면 정다운 집/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
이면/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살아 있는 집/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살구꽃이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꽃잎이 떨어
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싶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눈 오는 집/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마당에 내리고/그 여자
가 몸을 웅숭그리고/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속눈썹에  걸
린 눈을 털며/김칫독을 열 때/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내리는 집/김칫독에 엎드
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
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
은 밤/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
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
고 싶은 집/그/여/자/네 집


  어느날인가/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마주쳤을  때/“어머
나”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않고/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
며 웃던 그/여자 함박꽃 같던 그/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우리 동네 바로 윗 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그 집 앞을 다  지나
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그 여자네 집/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가/있던  집/그/여자네
/집/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내가 (녹색평론)에서 그 시를 처음 읽고 깜짝 놀란 것은, 이건 바로 우리 고향마을과 곱단
이와 만득이 이야기다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칠순이 훨씬  넘은 장만득씨는 아직도 문학
청년 기질을 가지고 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신춘문예 철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고 했다. 가슴만 울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응모도 해봤으리라고 나는 넘겨짚고 있다.

 

그 울렁거림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울렁거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시가 김용택
이라는 유명한 시인의 시가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시인의 시였다면 나는 장만득씨가 가명으
로 등단을 했으리란 걸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 희미했
던 영상이 마치 약물에 담근  인화지처럼 점점 선명해졌다. 숨어있는  수줍은 아름다움까지
낱낱이 드러나자 나는 마침내 그리움과 슬픔으로  저린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혼자서
느릿느릿 포도주 한 병을 비웠다.


  곱단이는 범강장달이 같은 아들을 내리 넷이나 둔 집의 막내딸이자 고명딸이었다. 부지런
한 농사꾼의 아버지와 착실한 아들들은 가을이면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이엉을 이었다.
다섯 장정이 휘딱 해치울 일이건만 제일  먼저 곱단이네 지붕에 올라앉아 읍내  중학생이라
품앗이 일에서는 저절로 제외되곤 했건만 곱단이네가 일손이 모자라는 집도 아닌데 제일 먼
저 달려들곤 했다. 곱단이 작은 오빠하고 만득이는 친구 사이였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만득이가 곱단이네 집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싶어하는 게 친구네 집이라서가 아니라 그 여자, 곱단이네 집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엌에서 더운 점심을 짓느라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따뜻한 가을날, 곱단이네 지붕에 제일 먼저 뛰어올라 깃발처럼 으스대는 만득이를
보고 동네 노인들은 제 색시가 고우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더니만, 하고 혀를 찼지만
그건 곧 만득이가 곱단이 신랑이 되리라는 걸 온 동네가 다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증
거였다.


  둘 사이는 그들보다 어린 우리 또래들 사이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은 그들 사이
를 연애를 건다고 말하면서 야릇하게 마음 설레곤 했다. 40년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도
젊은 남녀가 부모 몰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나보다. 누가 누구하고
바람이 났다던가, 눈이 맞았다던가, 심지어는 배가 맞았다는 소문까지 날 적이 있었다. 그건
부모가 얼굴을 못 들고 다닐만한 스캔들이었고, 그 뒤끝도  거의 다 너절하거나 께적지근한
것이었다.


  곱단이하고 만득이가 좋아하는 것을 바람났다고 말하지 않고 연애 건다고 말한 것은 그런
스캔들과 차별짓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을사람들로서는 일종의 애정이요 동경이었
다. 남자들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고 여자들은 어깨 너머로 언문을 해독할 수 있을 정도
로 까막눈은 면했다 하나 읍에서 이십여리나 떨어진 이 마을에서 신식학교 교육은 아직 먼
풍문이었다. 그러나 기회만 닿으면 자식에게만은 시켜보고 싶은 거였다. 연애에 대해서도 비
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도시에서 배운 사람들이 하는  개화된 풍속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트집잡기 좋아하
는 노인네들 한테까지 그들의 연애는 일찌거니 인정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처 연정을 느끼기 전부터 둘이 짝이 된다면 얼마나 보기 좋은 한쌍이 될까 눈을 가느스름
히 뜨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워한 게 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만득이나 곱단이네나 일년
계량하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을 만한 토지를 가진 자작농이었고 인품이 후하여  어려
운 사람 살필 줄 아는 집안이었다.  만득이는 위로 누나들만 있고, 곱단이는 오빠들만  있어
서, 기다리던 귀한 아들 딸이었다. 제집에서 귀히 여기는 자식은 남들도 한 번 볼 거  두 번
보면서 덕담을 아끼지 않는 법이다. 그들 또한 그러하였다.


  곱단이는 시골 아이답지 않게 살갗이 희고, 맑은 눈에 속눈썹이 길었다. 나는 그녀의 속눈
썹이 얼마나 길었는지 표현할 말을 몰랐었는데 김용택의 시 중에서 마침내 가장 알맞은 말
은 찾아냈다. 함박눈이 내려앉아서 쉴 만큼 길었다. 함박눈은 녹아 이슬방울이 되고  촉촉이
젖은 눈썹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면, 목석의  애간장이라도 녹일 듯 애틋한
표정이 되곤 했다. 만득이는 총명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생긴 것 또한 관옥 같
았다. 촌구석에서는 드문 인물들이었다. 만득이가 개천에서 난 용이라면 곱단이는  진흙탕에
핀 연꽃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장차 신랑  각시가 되면 얼마나 어여쁜 한쌍이
될까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구동성으로 두 사람의 천생연분을 점친 것이다. 

 

양가의 처지 또한 서로 기울지도 넘치지도 않았고 어른들은 소박하고 정직하여 남들이 사윗감 며느
릿감으로 점찍어준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눈여겨보며 아름답고 늠름하게 자라는 걸 서로  기
특해하며 귀여워하였다. 곱단이와 만득이는 우리 마을의 화초요 꿈이었다. 그러나 한두 번이
라도 중매를 서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남 보기에 하늘이 정해준  배필처럼 어울리는 한쌍이
있어 그들을 맺어주는 것은 거의 소명의식 같은 걸 느끼고 중매에 나서지만 본인은 의외로
냉담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연정을 느끼는 건 신의 장난질처럼 인간의
계획 밖의 일이다. 남이 나서서 잘되기를 꾀하거나 도와주려고 하면 되레 어깃장을 놓는 속
성까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만득이와 곱단이는 마을 사람들의 꿈을 배반하지 않았다. 곱단이가 만득이만 보면
유난히 부끄럼을 타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곱단이가 만득이 때문에 방구리를 깨트린 일
은 두고두고 동네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렸다. 윗말 아랫말 합쳐야 이십여호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라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다.  물긷는 일은 전적으로 아낙네 몫이었고,  물동이를
이고도 동이를 손으로 잡는 법 없이 두 손을 자유롭게 놀리며, 고개도 이리저리 돌려 볼 것
다 보고 다닐 수 있어야  비로소 살림에 관록이 붙은 주부였다. 

 

계집애들은 엄마들의 그런
솜씨에 찬탄의 눈길을 보내는 한편, 언젠가는 자기들도 그런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
면 안된다는 압박감을 가졌음직하다. 계집애들은 어려서 물동이를 이고 싶어했다.  아이들도
능히 일 수 있는 작은 물동이를 방구리라 했다.  방구리는 실용보다는 딸애들의 놀이기구에
가까워서 깨트리기도 잘 했다. 계집애를 얕볼 때, 쬐그만 계집애란 말 대신 방구리만한 계집
애로 통하는 게 우리 마을이었다.


  곱단이는 귀한 딸이고 올케가 둘씩이나 있어서 물동이 같은 거 안 이어도 됐건만 자기 몫
의 방구리는 가지고 있었고, 동무들이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은 나이였다. 그러나 머리에 인
방구리 손잡이를 양손에 움켜잡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못  떼는 초보였다. 그렇게 방구리로
물을 길어 가는데 저만치서 만득이가 오는 게 보였다. 

 

만득이는 방구리를 들어주려고 급히
달려오고 그걸 본 곱단이는 에구머니나, 흘러내린 치마말기를 치켜올리려고 급히 방구리 손
잡이를 놓아버린 것이다. 방구리가 깨진 건 말할 것도 없다. 곱단이가 열너덧살 가슴이 살구
씨만큼 부풀어 올랐을 무렵이었다. 저고리를 짧게 입고 치마말기를  가슴에 동일 때라 임질
을 할 때면 겨드랑과 가슴이 드러나게 돼 있었다.

 

그  무렵의 우리 고장의 풍습으로는 젊은
여자들도 수치감이 별로 없었다. 임을 이고 가는 엄마 뒤에  업힌 아이가 겨드랑 밑으로 엄
마의 앞가슴을 더듬거나 끌어당겨 빨기까지  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슴에 대한
수치심도 일종의 문화현상이 아닐까. 그 시절엔 엄마의 가슴은  아이들의 밥그릇 정도로 여
겼던 반면 배꼽을 드러내는 건 수치스럽게 여겼다. 처녀는 좀 달랐겠지만 그런 풍토에서 방
구리를 깨트리면서까지 가슴을 가리고 싶어했던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서 만득이가 제일 먼저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자 곱단이는 아버지를 졸라 십리
밖에 새로 생긴 소학교 분교에 입학했다. 방구리 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분교를  간이학교라
고 불렀고 입학하는 데는 연령제한 같은 것도 없었다. 남학생  중에는 아이 아범도 있을 정
도였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만득이도 소학교만 나오고 나서 몇년 집에서 농사를 거
들다가 서울로 시집간 큰누나가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서 상급학교에 가게 됐으니  늦
공부인 셈이었다.


  간이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읍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긴내골이라는 오십여호가 넘는, 인근
에서는 가장 큰 마을에 있었다. 고개를 두  번 넘고 시냇물을 한 번 건너야 했다.  만득이와
곱단이가 등하교길을 자연스럽게 같이 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이
유별나 보이지는 않았다. 늘 곱단이가 한참 뒤져서 걷고 만득이는 휘적휘적 앞서 가다가 기
다려주곤 했다. 부부가 같이 외출을  해도 나란히 걷지를 못하고 아내가  한참 뒤에서 걷는
걸 예절처럼 알던 시대였다. 곱단이보다 갈 길이 곱절이 되는 만득이가 갑갑한 곱단이의 걸
음걸이를 참지 못하고 휭하니 먼저 가버린 적도 있었다.


  들을 적시는 개울물이 도처에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물이  흔한 고장이었지만 다리를 통
해 건너야 하는 긴내골의 시냇물은 유난히 아름다운 강이었다. 물은 깊지 않았지만 골이 깊
어서 길에서 수면까지 비스듬히 가파른 둔덕에는 잗다란 들꽃들이 봄 여름 가을 내 쉼없이
피었다 지곤 했고, 흰 자갈과 잔모래와 꽃그림자 사이를  무리지어 유영하는 물고기들과 장
난치듯 부서지는 잔물결은 수정처럼 투명했다.  그 시냇물에는 흙다리가 놓여 있었다.  양쪽
둔덕을 두 개의 기둥목으로 가로질러 놓고 그 사이를 새끼줄이나 칡넝쿨 같은 것으로 엮고
는 진흙으로 빤빤하게 싸바른 흙다리는 마치 오솔길의 연속처럼  편안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거나 봄의 해토 무렵엔 흙다리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도 하고 미끌거리기도 했다.

그런 불편은 잠깐, 곧 누군가의 손길로 감쪽같이 보수가 되곤  했지만 문제는 장마중이거나 미처
보수를 하기 전이었다. 특히 계집애들은 구멍난 흙다리를 건너기를 무서워 했다. 차라리  둔
덕을 내려가 신발 벗고 점벙점벙 강물로 들어가는 게 안심스러웠다.

 

물이 불어 봤댔자 허리 정도밖에 안 찼지만 그럴 때는 앞서서 작대기로 물의 깊이를 알려주고 계집애들을 인도하는 게 남학생들의 중요한 사내 구실이었다. 그러나  만득이는 곱단이가 사내녀석들하고

치마를 배꼽 위까지 걷어올리고 속바지를 적셔가며 물을 건너는 걸 참을 수 없어했다. 등교길은 물
론 하교길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지키고 있다가 구멍 뚫린 흙다리 위로 건너게 해주었다.

 

흙다리를 건너면서 곱단이가 얼마나  무섬을 타고, 앙탈을 하고,  그러면 만득이는 그걸
다 받아주며 다독거리느라 길지도 않은 흙다리 위에서 둘이 몇번씩이나 서로  얼싸안는다는
소문이 자다하게 퍼지곤 했다. 그러나 구닥다리 노인들도 그런 소문을 망신스러워하지 않고
귀엽게 여겼다. 둘은 어차피 혼인할 테고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
운 한창의 새가 부리를 비비는 것처럼 예쁘게만 보였다.  흙다리가 아니라 연애다리라는 소
리도 악의라곤 없었다.


  중학교 상급반으로 오르면서 만득이는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한동안 그는 (오뇌
의 무도)라는 시집을 책가방에 넣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멋
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이도 남자들은 한문을 다 읽을 줄  알았다.


서당이 마을 사내애들의 의무교육기관처럼 돼 있었다. "오뇌의 무도"라고 붙여서 읽을 수는
있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확  오는게 아니었다. 글자는 한자건만 그  낱말이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는 이국적이고 하이칼라한 것이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말인지 하이칼라란 말이 우
리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할 때였다. 어딘지 이국적이고 약간 겉멋 들어 보이는
건 뭐든지 하이칼라라고 했다.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 춘원 바람을 일으킨  것도 만득이였다. (흙) (단종애사)(무정) 같은
춘원의 책이 젊은이들 사이를 돌며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혔다. 책은 나달나달해졌지만 거
기 한번 맛들인 청년들의 눈빛은 별처럼 빛났다. 그러나 곧 춘원이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청
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연설을  했다는 말을 퍼트려 청년들을  실의에 빠뜨리고, 헷갈리게
만든 것도 만득이였다. 그가 마을  청년들의 정신의 맥을 쥐었다 폈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마을의 형편도  날로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젊
은이들의 정신의 기갈은 그보다 더 심각하였기 때문에 먹혀들기도 그만큼 쉬웠다. 만득이가
퍼트린 책 때문에 마음이 통하게 된 젊은이들이 모여서 문학 얘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
에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는 모임이 자연히 형성됐는데, 거기서도 중심인물은 물론 만득이였
다. 그러나 고작 만학의 중학생이었다. 식민지 청년의 의식있는 모임이라기보다는  만득이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장이었다. 그는 가끔 자기가 쓴 시를 비장한 어조로 읽어주곤 했
는데 그 중 곱단이가 눈물이 글썽할 정도로 좋아한 시가 나중에 알고 보니 임화의 시  뒷부
분이었다.


  오늘도 연기는/구름보다 높고,/누구이고 청년이 몇,/너무나 좁은 하늘을/넓은 희망의 눈동
자 속 깊이/호수처럼 담으리라./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이런 시였는데 팔을 벌리고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할때는 어찌나 격정적으로 목
메어 부르는지 곱단이는 그때마다 만득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내놓아야 할 것 같아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곱단이는 나에게 가끔 만득이가 보낸 편지를 보여줄 적이 있었다. 누가 보여달랜 것도 아
닌데 보여주는 게 계면쩍었던지 혼자 보기 아까워서...라는 말을 덧붙이곤 하였다.  연애편지
를 혼자보기 아까워한다는 건 실상 말이 안되는 소리다. 그건 보여줘도 무관한 담백한 편지
라는 뜻도 되지만, 곱단이 보기에 그럴듯한 문학적 표현을  자랑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을 것
이다. 그중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곱단이네 울타리 밑의 꽈리나무를 '꼬마 파수꾼들이 초롱
불을 빨갛게 켜들고서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 거였다. 당시  우리 동네 집들은 거의 다 개
나리로 뒤란 울타리를 치고 살았다. 그리고 뉘 집이나 울타리 밑에서 꽈리가 자생했다. 봄에
서 여름에 걸쳐서는 거기에 꽈리나무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전혀 눈에 안 띄는 잡초나
다름없었다. 꽈리가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울숲이 누렇게 생기를 잃고 난 후였다.

 

익은 꽈리는 단풍보다 고왔고, 아닌게아니라 초롱처럼 앙증맞았다. 그러나 그맘때면 붉게 물든
감잎도 더 고운 감한테 자리를 내주고, 들에서는 고추가 다홍빛으로 물들 때였다. 꽈리란 심
심한 계집애들이 더러 입안에서 뽀드득대는 것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찮은 잡초에 불
과했다. 우리집 울타리 밑에도 꽈리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흔해빠진 꽈리 중 곱
단이네 꽈리만이 초롱에 불켜든 꼬마 파수꾼이 된 것이다.  만득이는 어쩌면 그리움에 겨워
곱단이네 울타리 밑으로 개구멍을 내려다 말고  발갛게 초롱불을 켜든 꼬마 파수꾼  때문에
이성을 찾은 거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흔해빠진 꽈리 중에서 곱단이네 꽈리만을 그
렇게 특별한 꽈리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마을엔 꽈리뿐 아니라 살구나무도  흔했다. 살구나무가 없는 집이 없었다.  여북해야
마을이름도 행촌리였겠는가. 봄에 살구나무는 개나리와 함께  온 동네를 꽃대궐처럼 화려하
게 꾸며주었지만, 열매는 시금털털한 개살구였다. 약에 쓰려고 약간의 씨를 갈무리하는 집이
있긴 해도 열매는 아이들도 잘 안 먹어서 떨어진 자리에서 썩어갔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엔 자운영과 오랑캐꽃이 들판과 둔덕을 뒤덮었다. 자운영은 고
루 질펀하게 피고, 오랑캐꽃은 소복소복 무리를 지어가며 다문다문 피었다. 살구가 흙에  스
며 거름이 될 무렵엔 분분히 지는 찔레꽃이 외진 길을 달밤처럼 숨가쁘고 그윽하게 만들었
다.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면서 돌이켜보니 행촌리의 그 흔한 살구나무 중에서도 곱단이네 살
구나무는 특별났던 것 같다. 다같은  초가집 중에서도 만득이에겐 곱단이네  지붕이 유난히
샛노랬던 것처럼, 그 흔해빠진 꽈리나무 중에서 곱단이네 꽈리나무만이 특별났던 것처럼. 곱
단이네는 행촌리 윗말 첫 집이었다. 됫동산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곱단이네를 휘돌아 아랫
말로 흐르면서 만득이네 문전옥답 논배미를 지나게 돼 있었다. 곱단이네 살구나무는 곱단이
아버지가 딸과 딸의 동무들을 위해 튼튼한 그네를 매줄 정도로 큰 나무였다. 만득이는 아마
개울물이 하얗게하얗게 실어나르는 살구꽃을 연서처럼 울렁거리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1945년 봄에도 행촌리에 살구꽃 피고, 꽈리꽃, 오랑캐꽃, 자운영이 피었을까. 그럴 리 없건
만 괜히 안피고 말았을 것 같다. 그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만득이와 곱단이의 연애도 끝나
고 말았을까. 만학이었던 만득이는 읍내의 사년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징병으로 끌려나갔다.

 

며칠간의 여유는 있었고 양가에서는 그 사이에 혼사를 치르려고 했다. 연애 못 걸어본
총각도 씨라도 남기려고 서둘러 혼처를 구해 혼사를 치르는 일이 흔할 때였다. 더군다나 만
득이는 외아들이었고 사주단자는 건네지 않았어도 서로  연애 건다는걸 온 동내가 다  아는
각싯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혼사 치르기를 거부했다. 그건 그의 사랑법이었을  것
이다. 남들이 다 안 알아줘도 곱단이한테만은 그의 사랑법을 이해시키려고, 잔설이 아직  남
아 있는 이른봄의 으스름달밤을 새벽닭이 울 때까지 곱단이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곱단이
가 그의 제안에 마음으로부터 승복  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끌고 다니지를 않고 어디 방앗간 같은 데서 밤을 지냈다고 해도 만득이의 손길이 곱단이의

젖가슴도 범하질 못하였으리라는 걸 곱단이의 부모도, 마을 사람들도 믿었다. 그런 시대였다. 순결한 시대였는지, 바보 같은 시대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우리가 존중한 법도라는 건 그런 거였다.
  만득이네 대문에 일본 깃대와  출정 군인의 집이라는 깃발이  만장처럼 처량히 휘날리고,
그 집 사랑에서 며칠씩 술판이 벌어져도 밀주 단속에도  안 걸리고...그렇게 그까짓 열흘 눈
깜박할 새 지나가 만득이는 마침내 입영을 하게 됐다.

 

만득이가 꼭 살아 돌아 올 테니 기다리라고 곱단이를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곱단이가

 딴데 시집갈 아이도 아니거니와 식구들 역시 딴데 시집보낼 엄두라도 낼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설득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그럴 것이면 왜 혼사를 치르고 나서  떠나면 안되냐는 곱단이의 지당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곱단이는 이름처럼 마음씨도 비단결 같은 처녀였지만 옳다고 생각하
는 걸 굽힐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았으니까.

 

사위스러워서 아무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만득이가 사지로 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곱단이를 과부 안 만들려는 그의 깊은 마음을 내심 여간 대견히 여기는 게 아니었다. 만득이와 곱단이는 요샛말로 하면 마을
의 마스코트라고나 할까. 둘 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재앙이라도  내릴 것처럼 지켜주고 싶어
했고, 만득이의 처사는 그런 소박한 인심에도 거슬리지 않는 최선의 것이었다.


  만득이가 떠난 후에도 마을 청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마을
에 남자라고는 중늙은이 이상만 남게 되었다. 곱단이 오빠들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한
셋째오빠와 부모님을 모시는 큰오빠 빼고 두 오빠가 징용으로 나가 아들 부잣집이 허룩해졌
다. 장정만 데려가는 게 아니라 양식 공출도 극악해져 그  풍요하던 마을도 앞으로 넘길 보
릿고개 걱정이 태산같았다. 궂은날 부침질만 해도 서로 나누느라 한 채반은 부쳐야 했던 인
심도 스스로 금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주 나쁜 소식이 염병보다 더 흉흉하고 걷잡을 수
없이 온 동네를 휩쓸었다 전에도  여자 정신대에 대해서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본토나 남양군도에 가서 일하고 싶은 처녀들은 지윈하면 보내주고 나중에 집에 송금도
할 수 있다는 면사무소의 공문이 한바탕 돈 후였지만 그럴 생각이 있는 집은 한 집도  없었
고, 설마 돈벌이를 강제로 보내리라고는 아무도 짐작을 못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은  그
게 아니어서 몇사람씩 배당을 받은 면사무소 노무과 서기들과 순사들이 과년한 딸 가진 집
을 위협도 하고 다짜고짜 끌어가는 일까지 있다고 했다. 설마설마  하는 사이에 더 나쁜 일
이 생겼다. 그건 같은 면 내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소문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동구
밖에서 감춰놓은 곡식을 뒤지려고 나타난 면서기와  순사를 보고 정신대를 뽑으러 오는  줄
지레짐작을 한 부모가 딸애를 헛간 짚더미 속에 숨겼다고  했다. 공출 독려반들은 날카로운
창이 달린 장대로 곡식을 숨겨두었음직한 곳이면 닥치는 대로 찔러보는게 상례였다.  헛간에

짚가리로 창을 들이대는 것과 그 부모네들이 안된다고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창 끝에 처녀의 살점이 묻어나왔다고도 하고, 꿰진 창자가 묻어나왔다고도  하고, 처녀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피를 많이 흘리면서 달구지로 읍내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아무튼 그 소문의 파문은 온 면내의  딸 가진 집을 주야로 가위 눌리게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도시에서 군수공장에 다니는 곱단이 오빠가 종아리에  각반을 차고 징 달린 구두를  신은
중년남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신의주에 있는 중요한 공사판에서 측량기사로 있는, 한번 장가
갔던 남자라고 했다. 곱단이 부모로부터 그 흉흉한 소문을 듣고 급하게 구해온 곱단이 신랑
감이었다.

 

첫장가 든 부인이 십년이 가깝도록 아이를 못낳아  내치고 새장가를 든다는 그는
곱단이의 그 고운 얼굴보다는 별로 크지 않은 엉덩이만 유심히 보면서, 글쎄, 아이를 잘  낳
을 수 있을까? 연방 고개를 갸우뚱, 그닥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총각이 씨가
마른 시대였다. 게다가 지금 그 늙은 신랑감이 하고 있는  일은 군사적인 중요한 일이라 징
용은 절로 면제된다고 한다. 곱단이네는 그 고운 딸을 번갯불에  콩 궈 먹듯이 그 재취자리
로 보내버렸다.


  곱단이가 어떤 심정으로 그 혼사에  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피를  보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회까닥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피 묻은 소문도 마찬가지였다. 곱단이네 식구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이성을 잃고 말았다. 만득이와 곱단이의 연애를  어여삐 여기고 스스로 증인
이 된 마을 어른들도 이제 곱단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군한테 내주지 않는  일뿐이었다.

 

더군다나 곱단이 어머니는 피가 무서워 닭모가지 하나 못 비트는 착하디 착한 위인이
었다. 그 피 묻은 소문에 살이 떨려 우두망찰했을 것이다. 곱단이는 만득이와의 언약을 저버
리고 딴데로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아버리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곱단이네서 혼사를 치르고 사흘 만에 신랑을 따라 집을 떠나는 곱단이는 사자를 분단장해놓
은 것처럼 섬뜩하니 표정이라곤 없었다.


  멀고먼 신의주로 시집가 첫 근친도 오기 전에 해방이 되었다. 그녀는 열아홉에 떠난 지붕
노란 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고장은 아슬아슬하게 38 이남이 되어 북조선의 신의
주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만득이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 이듬해 봄 만득이는 같은 행촌리
처녀인 순애와 혼사를 치렀다. 순애는 투덕투덕 복 있게 생긴 처녀였지만 곱단이에겐 댈 것
도 아니었다. 혼삿날 마을 풍속대로 신랑을 달았는데 군대나 징용 갔다가 심성이 거칠 대로
거칠어져 돌아온 청년들이 어찌나 호되게 신랑 발바닥을 때렸던지 만득이가 엉엉  울었다고 한다.

 

만득이 또한 군대가서 고초를 겪을 만큼 겪었는데 그까짓  장난삼아 치는 매를 못 견
디어 울었을까? 울고 싶어, 실컷 울고 싶어 울었을 것 같다. 이렇게 만득이의  일거수일투족
을 곱단이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싶은 게 아직도 두 사람의 어여쁜 사랑을 못 잊어 하는  마
을 사람들의 심정이었으니 그리로 시집간 순애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 금실을 확인해볼 겨를도 없이 곧  서울로 세간을 냈다. 외아들이었지
만 서울 누나가 동생의 일자리를 구해놓고 데려갔다.


  6·25 동란 후 38선 대신 그어진 휴전선은 행촌리를 휴전선 이북땅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동안 서로 만나지는 못했어도 귀향길에 만득이가  순애하고 곧잘 산다는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못 듣게 되었다. 6 25때 죽지 않았으면 같은 서울 하늘 밑 어디메 살아
있겠거니, 문득문득 생각이 나던 것도 잠시 만득이는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사라져버렸다. 서
울살이라는 게 촌수 닿는 친척도 결혼청첩장이나 부고나 받아야  마지못해 챙길 정도로, 이
해 관계가 닿지 않는 인간관계는 지딱지딱 잊게 돼 있었다.


  만득이를 서울에서 다시 만난 지는  채 십년도 안된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때까지는
생존해 계시던 삼촌이 우리 고향 군민회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간 자리에서였다.
실향민들이 마음을 달래려는 자리가 흔히 그렇듯이 노인네들 천지였다. 매년 열리는 군민회
라지만 삼촌처럼 처음 간 분은 서로 알아보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알아보는 걸 도와
주려는 주최측의 배려로 면 단위로 나눠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끼리 다시 리 단위로 무리를
만들었다. 행촌리는 나하고 삼촌하고 낯 모르는 노부부 네 사람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 돌아가신 삼촌은 그때도 이미 여든 가까운 연세셔서 고향의 흙냄새 대신 고향 사람

채취라도 맡고 싶은 마음에 느닷없이 군민회 나들이를 하고 싶어한 것  같다. 죽을 날이 가까우면

안하던 짓을 하게 되는 걸 자손들은 가벼운 망령 정도로  취급했다. 오죽해야 조카가 모시고 가
게 됐을까. 행촌리 노신사도 삼촌을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어른 대접으로  행촌리
살던 아무개라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아 못 알아들었다. 나중
에 그가 나에게 명함을 주며  인사를 청하지 않았으면 아마 끝까지  못 알아보았을 것이다.


무슨 전업사 대표 장만득으로 돼있는 명함을 보고 나서야 뭔가 이상해서 다시 한번 쳐다보
니, 젊은 날의 그가 어디 숨어 있다가 고개를 내밀듯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몸집도 별로  불
지 않고 얼굴도 잘 늙지 않은 동안이었다. 나하고 그는 그닥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곱
단이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우리 또래들은 다들 그를 소 닭 보듯 하는 걸 예절로 알았다. 그
건 장만득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워낙 마을에서 유명했지만, 유명인사가 팬을 알아
보란 법은 없다. 나는 그에게 하나도 안 변했다고 말하고 나서 쑥스럽게 웃었다. 한참  동안
못 알아본 주제에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순애를 떠올리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이 유복하고 금실 좋아 보이는  노부부 중 한쪽이
순애인지도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순애 쪽에서는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하나도 안 변했다
고 해줘서 순애려니 했다. 나는 학교 다닌답시고 학교도 안 다니는 집에서 바느질이나 배우
는 나이 많은 애들하고 동무한 적이  없었다. 만득이하고 순애는 보기 좋은 부부였다.  그냥
헤어지기는 섭섭하여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는데 뜻밖에도 순애가 자주 전화를 해서  점심
도 같이 하고 쇼핑도 같이  하는 교분이 이어졌다. 그 여자는  장만득씨가 아직도 곱단이를
못 잊고 있다는 얘기를 하소연했다.


  아우님, 다들 나더러 팔자 좋다고 하지만 나 같은 빚 좋은 개살구도 없다우. 아우님이니까
얘기야. 딴사람들한테 아무리 얘기해 봤댔자 나만  이상한 사람 되지 누가 내 속을  알겠수.
돈 잘 벌고 생전 외도라곤 모르고, 애들한테 잘하고, 나한테도 죄지은 것 없이 죽는  시늉도
하라면 하는 그런 남편이 어디 있냐고들 하지만, 아마 나처럼  지독한 시앗을 보고 사는 년
도 없을 거유.

 

 곱단이년이 내 남편한테 찰싹 붙어 있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머리채를 잡
을 수가 있나, 망신을 줄 수가 있나, 미칠 노릇이라우. 그래도 내가 아우님을 만났게 망정이
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억울한 사정을 누구한테 말이라도 할 수가 있겠수. 그 영감  지금도
글쎄 그년한테 연애 편지를 쓴다니까요. 설마라고? 나도 처음엔 설마했지. 지도  쑥스러운지
시를 쓴다고 합니다. 내가 몰래  훔쳐봤더니 뭐 ‘그대 어깨에  살구꽃 내리네’‘살구꽃은
해마다 피는데, 우리 임은 왜 한번 가고 다시 아니  오시나’ 이따위가 연애편지지 그래 시
란 말이유.

 

그뿐인 줄 알아요? 우리가 작년에 중국여행을 갔을 적에도 얼마나 내 오장을 뒤
집었다구요. 속 모르고 따라간 나도  배알 빠진 년이지만. 백두산  구경하고 나서, 단동인가
어디서 배 타고 북한땅 가까이까지 가보는 압록강 유람선 관광이라는 걸 했는데, 정말 저쪽
북한땅 강가에 놀이 나온 아이들까지 보이게 배가 가까이 가니까 나도 마음이 좀 이상해집
디다. 그냥 뱃놀이를 편하게 즐기는 건  다 중국 사람들이고,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는  건
다들 남한 사람들이더라구요.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근데 우리 영감은 별안간 뱃전에다 고
개를 떨구고 소리내어 엉엉 울지를 않겠수.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온몸을 들먹이면서,  분단
의 슬픔이라구? 아이구, 그게 아니라 거기서 보이는 땅이 신의주였어요. 곱단이년 사는 데가
닿을 듯, 닿지는 않으니까 미치겠는 거지 뭐. 단장  강으로 밀어 처넣고 싶더라구요. 헤엄쳐
서 어서 그년한테 가라구요. 그뿐인 줄 알아요. 여기서 돈 잘 벌고 사업을 잘 하다가 느닷없
이 아이들은 여기서 키우고 싶지 않다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잔 적이 다 있었다니까요.

 

지나 내나 영어 한마디 못하는 주제에 이민을 가자는 속셈이  뭐였겠수? 뻔하지. 미국 시민권
을 얻으면 북한을 마음대로 드나든다면서요. 내가 그 꼬임에 넘어갈 성싶어요. 가려면  혼자
가라구. 가서 그년 데려다 잘  살아보라고 했더니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주저앉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끔찍한 양반이니까요. 실상 그거 하나 믿고 여지껏 서러운 세상 견딘 거죠.


  간추리면 대강 그런 얘기였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얘기는 곱단이와 만득이가  연애 걸던
시절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먹혀들것 같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여자 레퍼토
리는 그 몇가지의 에피소드에 국한돼 있었다. 아직도 만득이가  곱단이 생각만 한다는 증거
를 더는 대지 못했고, 나도 비슷한 얘기를 하도 여러번 반복해서 들으니까 넌더리가 나면서
그 여자보다는 장만득씨가 불쌍해질 무렵 그 여자의 부음을  듣게 됐다. 장만득씨가 상처를
한 것이다. 고혈압으로 몇년째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돌연 쓰러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
한 채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문상을 가서 그 여자의 영정 사진을 보고 섬뜩했다.


이십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진이었다. 요샌  영정 사진도 너무 늙은 건 보기  싫다고,
아주 늙기 전에 찍어놓는다고는 하지만 칠순의  남편이 눈물을 떨구고 있는 앞에  이십대의
사진은 너무했다 싶었다. 자식들이 문상객들의 그런 눈치를 채고, 어머니는 평소에도 나  죽
거든 늙어빠진 영정 쓰지 말라고 부탁하시더니, 돌아가신 후  보니까 손수 마련해놓으신 영
정 사진이 있더라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여자의  젊었을 적과 곱단이의 젊었을 적을
머릿속으로 비교하고 있었다. 댈 것도 아니었다. 내 상상 속에서 곱단이는 더욱 요요해지고,
그 여자는 젊다는 것 외엔 흔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 여자가 불쌍해졌다.  아
아, 저 여자는 일생 얼마나 지독한 연적과 더불어 산  것일까. 생전 늙지도, 금도 가지 않는
연적이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적이었을까.


  그 여자가 죽고 나서 만득이를 따로 만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를 우연히 만난 것은 그가 상처하고 나서도 이삼년 후 엉뚱하게도 정신대 할머니를 돕
기 위한 모임에서였다. 뜻밖이었지만, 생전의 그의 아내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주입된  선
입관이 있는지라 그가 그 모임에 나타난 것도 곱단이하고 연결지어서 생각되는 걸 어쩔 수
가 없었다. 모임이 끝난 후 그가 보이지 않자 나는  마치 범인을 뒤쫓듯이 허겁지겁 행사장
을 빠져나와 저만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그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다짜고짜 따
지듯이 재취장가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하고 나서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
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이는 것이었다.


  왜요? 곱단이를 못 잊어서요? 여긴 왜 왔어요? 정신대에 그렇게 한이 맺혔어요? 고작 한
여자 때문에. 정신대만 아니었으면 둘이서 혼인했을 텐데 하구요? 참 대단하십니다.
  내 퍼붓는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앞장서서 근처 찻집으로  갔다. 그 나이에 아직도 싱그러
움이 남아 있는 노인을 나는 마치 순애의 넋이 씐 것처럼 꼬부장한 마음으로 바라다보았다.
그가 나직나직 말했다.


  내가 곱단이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건 순전히 우리집 사람이 지어낸 생각이에요. 난 지
금 곱단이 얼굴도 생각이 안 나요. 우리집 사람이 줄기차게 이르집어주지 않았으면 아마 이
름도 잊어버렸을 거예요. 내가 곱단이를 그리워했다면 그건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젊은 날에 대한 아련한 향수였겠지요. 아름다운 내 고향에서 보낸 젊은 날을 문득문득 그리
워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내가 유람선상에서 운 것도 저게  정말 북한땅일까? 남의 나라에
서 바라보니 이렇게 지척인데 내 나라에선 왜 그렇게 멀었을까? 그게 서럽고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복받친 거지. 거기가 신의주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늘 여기 오게
된 것도, 글쎄요, 내가 한 짓도 내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아마 얼마전 우연히
일본 잡지에서 정신대 문제를 애써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려는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분통이 터진 것과 관계가 있겠죠. 강제였다는 증거가 있느냐?

 

수적으로 한국에서 너무 부풀려 말한다. 뭐 이런 투였어요. 범죄의식이 전혀 없더군요.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비록 곱단이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곱단이가 딴데로 시집가면서 느꼈을 분하고 억울하고 절망적인 심정을요. 나는 정신대 할머니처럼

직접 당한 사람들의 원한에다 그걸 면한 사람들의 한까지 보태고 싶었어요.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
이나 똑같이 그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고 생각해요. 면하긴  했지만 면하기 위해 어
떻게들 했나요?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리 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
조리 질식시켜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장만득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
해졌다.

(13월의 사랑, 예감 1997)

 

 

 

    꽃잎 속의 가시
  아침에 언니의 부음을 받았다. 언니가 미국으로  쫓겨간 지 두 달도 채 안돼서였다.  나는
당장 상가로 달려가야 할 것처럼 영안실이 어디냐고 황황히  물었다. 그건 웃기는 질문이었
나보다. 질부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언니가 여기 어디가 아닌, 미국땅에서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그렇지, 웃음이 나오다니. 전화기를 통해  들어서 그런지 질부의 웃음소리는
상제답지 않게 들떠 있었다.“어딘 줄 알면 가시게요?” “못 갈 것도 없지, 하나밖에  없는
언닌데.”그 소리를 하면서 울음이 복받쳤다. 오남매 중 나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게 막막하고
무서웠다.

 

 “이모님도 참, 미국이 저기 어디 부산이나 대구쯤으로 아시나 봐.”“시방 너 있
는 데는 어디냐?”“어딘 어디예요, 반포죠. 즈이가  어디 사는지도 잊으셨나봐.”“그럼 맏
며느리도 미국이 멀어서 여적지 못 가고 있단  말이지?”“아범이 방금 떠났어요. 비수기니
까 그나마 비행기표를 구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모르겠어요. 미국은 뭘 찾아먹
으러 그렇게들 드나드는지.”“그럼 넌 비행기표가 없어서 못 갔단 소리냐?”“이모님, 막내
가 고3이에요. 고3 엄마가 어딜 가겠어요?”


  질부의 목소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팽팽했다. 순간 나는  넉살 좋게 빌붙다가 떠다밀린
것처럼 움찔했다. 고2짜리뿐 아니라 고3을 모시고만 있어도 웬만한 법도쯤 무시하고 살아도
아무도 뭐랄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질부는 여기저기  알릴 테가 더 있으니 그
만 전화를 끊자고 했다. “에미야, 그럼  난 어떡하라구? 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야아.”난  끊긴 전화통에다 대고 이렇게  징징거렸다.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울음보다는 노여움이 치뻗쳤다. 마지막 다녀간 걸 그렇게 보내다니.  나도
언니가 서울에 와 있는 동안 살뜰하게 해주지 못했지만 질부가 처음 모신 시어머니한테 한
짓은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언니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게 60년대였으니 30년이 넘는 셈인데 그동안 언니는 단 한
번도 고국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거기서 대학 나오고 결혼까지 한 맏아들이 고국에 일자리
를 구해 영구 귀국할 때도 언니는 따라오지 않았고, 그후에도  어떻게 사나 보러 올법도 한
데 미국물을 떠나면 죽는 줄 아는지 꼼짝을 안했다. 하긴 그 동안에 거기 눌러앉은 다른 아
들딸들이 다 뿌리내리고 살 만해진 건 언니의 공이 컸고, 맏아들도 뻔질나게 미국을 드나들
었으니까 아들 보고 싶은 걸 참고 살았달 수만은 없었다.

 

언니네가 이민갈 때 고등학생이었던 맏이는 영어와 모국어를 거의 똑같이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했고,

그로 인해 발탁된 일자리니만치 1년이면 서너 달은 외국에서 보냈다. 나처럼 자식들이 외국물과는

인연이 먼 사람에게는 질부가 제 남편이 비행기 때문에 골병들고, 비행기 음식 때문에 위장 버렸다고

안달을 하는 소리도 은근한 자랑으로 들렸다. 우리집에선 내가 그래도 언니 덕에 외국바람을 가
장 많이 쐐 본 사람이었다.  언니하고 사는 거리와는 상관없이 정이  날로 애틋해져 전화도
자주 걸게 되고, 언니가 불쑥  비행기를 보내주면 즉시 날아가서 한두  달씩 머물다 오기도
했다. 물론 언니네가 그쪽에서도 잘사는 축에 들고 나서였으니까  최근 10년 사이의 일이었다.

 


  언니의 30여년 만의 귀향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었다. 지금 고3짜리하고는 10년이나 터울
이 지는 그 집 맏아들은 언니가 미국에서 받은 첫손주이자  장남이었다. 올 봄 그애가 결혼
할 때 다녀간 게 언니의 마지막이자 첫 고국 나들이었다.  언니가 도착하던 날 나도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울긋불긋한 잠바조각하며,  곱슬곱슬한 머리 위로 올려붙인  선글라스하며,
샌들을 신은 맨발에 시뻘건 매니큐어하며 칠십대 노인의 차림치고는 촌스럽다기보다는 상스
러웠다. 부조화스럽기는 언니가 밀고 나오는 짐도 마찬가지였다.

 

얼룩지고 낡은데다가  솔기에 테이프까지 더덕더덕 붙인 구럭 같은  이민가방하고 상표도 안 뗀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루이뷔똥 새 여행가방은 암만해도 잘 안 어울렸다. 그러나 곧  그 금빛 장식도

은은한 가방은 언니의 생뚱스러운 차림에 대한 우리 모두의 민망한 마음을 씻고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
으켰다. 장손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는 30년 만의 귀향이 아닌가. 언니가 조르지  않았어도
미국에서 잘사는 삼촌과 고모들이 결혼식에 오지는 못하나마 선물이 없을 수 없었다. 그 가
방은 추레한 이민가방과의 도드라지는 차별성 때문에라도 선물가방이라고 써붙인 거나 마찬
가지였다. 차에다 가방을 실을 때의 언니의 표정만 봐도 거기  값지고 좋은 것들이 들어 있
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큰아들네서 짐을 푼 언니는 그러나 이민가방만  풀고 그 고급스러운 새 가방에  대해서는
누가 물어볼 엄두도 안 나게 이상하게 굴었다. 신주단지라도 든 것처럼 아이들 발길에다 차
여도 언짢아하다가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미리 발뺌을 하면서 구석빼기로다만 밀어붙이려드
는 게, 영락없이 장물아비 장물 끼고 돌듯 떳떳지 못해 보였다. 언니가 여봐란듯이 풀어놓은
이민가방에서 쏟아져나온 선물들은 더군다나 그 새 가방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봉다리에 든  인스턴트 커피가 스무 개도  넘었고 대만제
싸구려 립스틱은 그보다 더 여러 개였다. 흔해빠진 랑콤 콤팩트가 그래도 그중 값나가는 물
건 축에 들겠는데 그건 몇 되지도 않았다. 그밖엔 언니 옷들인데, 왜 그렇게 울긋불긋  너절
한 것들뿐인지 내가 괜히 민망했다. 눈치도 없이 그까짓 봉다리 커피를 가지고 나눠줘야 할
사람들을 기억력도 좋게 사돈의 팔촌까지 엮어대면서  몫을 짓는 언니 곁에서 나는  질부와
눈을 맞추면서 "우리 언니 몰라도 뭘 너무 모른다 잉." 일부러 잘할 줄도 모르는 사투리 억
양까지 써가면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언니가 이민갈 때만 해도  미제라면 그저
커피 한 봉지라도 감지덕지할 때였다.

 

요새 웬만한 집에서는  다들 원두커피지 인스턴트 커피는 잘 마시지도 않는다는 것을 언니는

아마 모를 것이다. 내내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던 질부의 표정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번졌다.

암말 말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내가 눈치로 질부를 다독거리고자 한 것은 아직도 그 새 가방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언니는 그 깊고 깊은 이민가방 속을 충분히 다 뒤지고 나서, 뒤져낸 선물의 

수효와 자신의 기억력과 맞춰보느라 손가락 까지 다 동원했다. 뿌르르 부엌으로 나간 질부가

식사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팬  돌아가는 소리와 굴비 굽는 냄새가 끼쳐왔다. 5만원 짜리 굴비를 굽고 있을까. 언니가  없어도
나에겐 1년에 한두 번씩은 조카네 들를 일이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이 시이모에 대한 질부
의 대접은 깍듯하고도 융숭했다. 귀한 음식도 아낌없이 내놓았다. 커다란 굴비를 통째로  구
워준 적도 있는데 한 마리에 5만원도 넘는 진짜 영광굴비라고 했다.


  식탁은 푸짐했다 김치만 해도 몇가지나 됐고 갈비찜이며, 잡채며 전유어며 잔칫상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언니가 미국서도 실컷 먹던 거라는 걸 난 알기 때문에 얼른  굴비를
언니 앞으로 밀어놓았다. "언니, 이 굴비 좀 잡숴봐요. 한 마리에 오십 달라도 넘는 진짜 영
광굴비라우. "아이구머니 하늘 무섭다.

 

이까짓 조기 한  마리에 뭐 얼마라구? 미국선... 언니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으며 굴비접시를

멀찌거니 밀어놓았다.  "언니, 미국서  잡히는 건 조기 아냐, 그건 부서지. 영광굴비에다 그까짓

부서를 어떻게 갖다대우"  그러나 언니는 미국 조기가 더 진짜지 한국 조기는 중국서 건너 온 거라고

우기고 나서, 마치 살림재미에 돈독이 잔뜩 오른 여편네 처럼  그쪽 물가가 얼마나 싸다는 걸,

무  배추에서 마늘 파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기억해냈다. 외국살이하다 온 사람들한테서 흔히 듣던 소리건만 질부의 과장되고 냉랭한 무관심 때문에  마치 고부간이 맹렬히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싸움을 말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명감으로 나는 숨이 가빠왔다. 내가 주
책을 부려서라도 화제를 딴데로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언니 , 왜 그  루이뷔똥 가방은 공개
안하우? 나 가고 나면 식구 끼리만 열어보려구? 언니  그럼 못써. 보나마나 손주며느리한테
줄 예물일 텐데, 그치? 삼촌이나 고모들도 뭐 한가지씩 해보냈을 테구. 그런 건 자랑하는 거
야. 그래야 장만해준 아들딸들도 낯이 서지. 그거 못 보면 나 오늘 집에 안 갈 테니 그런 줄
아슈" "이모님두, 안 그러면  오늘 가시려고요? 장우 결혼식이  며칠 남았다구요? 그때까지
여기 계셔요. 두 분 회포도 실컷 푸시고 함 보낼 때 격식에 어긋나지 않게 이것저것 참견도
해주셔야죠." 질부의 표정이 단박에 배시시 풀어졌다  질부는 이렇게 다루기에 따라서는 싹
싹하고 뒤끝도 없었다. 며느리까지 보게 됐으니 같이 늙어가는  처지건만 제법 늙은이 위할
줄도 알았다.

 

질부나 나나 그 가방이  궁금한 것은 호기심하고도 다른, 얼른 짚고  넘어가서
개운해지고 싶은 께름칙한 그 무엇이었다. 언니가 아이 참, 하면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식사중에 보자는 소리는 아니었다고 말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언니가 휭하니 식당으로 가
져온 것은 두툼한 봉투였다.  "그러잖아도 다들 있는 데서  내놓을 참이었다 느이 시동생하
고 시누이들이 제법 큰 부주 했다. 뭘 하나씩 맡아서  해주고 싶다고 의논들을 하길래 신랑
쪽이니까 그럴 것 없이 돈으로 하라고 내가  옆에서 훈수를 뒀다. 안 그러냐? 돈이 젤이지.
얼마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길래 액수도 내가 정해뒀다. 백주에 강도 같았을 거야, 천 달라
씩 내놓으라고 공갈을 쳤으니까 걔네들은 이제 양키 다 됐어.  웬만한 양키는 지 아들이 혼
인해도 천 달라 안 내놓을걸, 얼마 나들 짠데.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근본이 있는  아이들이
니까 두말 안하고 내놓더라."


  언니에겐 그 쪽에 삼남매가 더 있으니까 그 돈은 3천불은 될  것 이다. 물건으로 뭘 해보
낸다고 해도 그 이상 가는 걸 해보낼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쪽 조카들 집도 다 한번씩
가보아서 알지만 다들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것 같아도 다 빛덩어리라고 했다. 은행 빛이라
고는 하지만 하다 못해 학비까지 빛이라니 속 빈 강정처럼 사는 건 거기 사정이나 여기  사
정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싶었다. 그런 자식들한테 말이 조카지 왕래가 있고 정이 든 것도
아닌 순전히 관념적인 조카를 위해  천불씩이나 짜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니가 의기양양해할 만했다.


  질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과용들을 해서 어떡 하나? 하면서도 흡족해하
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 가방은 뭔가? 돈봉투 때문에 잠시  흐려졌던 관심이 다시 원점으
로 돌아왔다. 언니가 그 가방을  구석빼기로 처박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존재는 정체 모를
손님처럼 이 식탁에 끼여앉아 우리의 신경을 지속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느낌
은 질색이었다. 질부도 같은 생각이라는 게 이심전심으로 느껴질수록 질부에게 미안한 생각
까지 들었다.


  축의금 봉투가 출현하고부터 다들 입맛을 잃었는지 숟가락을 놓았다. 언니만이 누구 약을
올리고 싶은 건지 오래도록 못마땅한 듯 반찬접시를 께적거리면서 식사를 계속했다 맨 나중
까지 수저를 붙들고 있는 언니 때문에 나는 자꾸 식구들  눈치가 보였다. 내가 왜 미안해해
야 하는지 이치가 닿지 않는 미안감에 떠다밀리듯이 불쑥 또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언니,
그만 먹어. 이제 그만 먹고, 남은 짐이나 풀릅시다. 궁금 해 죽겠네." "다 풀렀잖냐? 가방 맨
구석빼기 속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온 돈 봉투까지  꺼내다 광고를 쳤으면 고만이지 뭐가  또
궁금한 게 남아 있냐?" 언니는 일부러 굼뜨게 수저를 놓으며 나를 나무랐다 

 

 "새 가방을 아직 안 풀렀잖우?" "그 안엔 아무것도  없어, 뱌아."  "그럼 빈 가방이란 말유?" 

"아니, 그건 아니고 미제는 이제 아무것도 안 남았다구... 언니는 다시 장물아비처럼 떳떳지 못하게

우물거렸다.  "언니두, 우리가 뭐 미제에 걸신이 들린 줄 알우? 미제면 어떻구 중국제면 어떠우.
언니가 신주단지 위하듯 하는 게 뭔지 그냥 보자 는 거지."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자꾸나."
  언니가 식탁에서 일어서 자기 방으로 정해진 곳으로 향했다. 나는 뒤따르면서 나도모르게
고약한 일에 말려든 것처럼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장난스러운 호기심
정도였는데 왜 이렇게 심각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집 분위기 탓이라고, 몇
십년 만에 노모를 맞는 태도치고는 은근하거나 따뜻한 배려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조카네들
하는 짓에 휘말렸을 뿐이 라고, 누가 묻지도 않는 변명을 궁리했다.


  허섭스레기를 넣어두던 곳을 대강 치운 빈방이라 제물장 속도  어수선했다. 어느 틈에 거
기 넣어두었는지 루이뷔똥 가방은 그 안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었다. 언니가 손수 그걸 꺼냈
다. 뒤따라온 식구들이 둥글게 에워싼 한가운데서 언니는 답답하도록 느리고 서툴게 가방을
열었다. 마치 가방 밑에 용수철이라도 장착된 것처럼 안의 것들이 둥실 부풀어올랐다.  대나
무숲을 스친 미풍 같은 상쾌 한 소요와  함께 그것들이 코끝까지 부풀어오를 것 같은 환각
때문에 우리는 다들 비명을 억누르며  뒤로 한걸음씩 물러났다 누런  베옷들이었다. 우리가
그 느닷없는 이물감을 미처 어째볼 새도 없이 언니는 그 안의 것들을 한가지씩 끄집어내면
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원삼,당의,천금,지요,멱목,악수‥‥그것들  은수의였던
것이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그만요." 조카가 먼저 격앙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만류했고, 질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방을 뛰쳐나갔다. 딴 식군들도  우르르 질부를 따라나가 뭐라
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이 왜 조카며느이가 울고불고 위로받아야 할 일
로 둔갑을 했는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언니가 꺼내놓은 것들을 가방에 도로 쑤셔넣 기에
바빴다 졸지에 분란을 일으킨 것들을 우선 안 보이게  하는 게 수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갖은수의로 해달라고 했지."


  언니가 이를 악문 듯이 야무지게 말했다. 언니답지 않게 도전적인 표정이었가. 갖은수의란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식을 한가지도 생략함이 없이 고루 갖춘  수의를 말한다. 그게 어쨌다
는 것인가 더군다나 장손의 경사를 앞둔 집에 수의가 아랑곳인가. 그러나 언니는 자신이 일
으킨 파문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일찍 자고싶다고
했다 나는 잠간 바깥동정에 귀을 기울이고 나서, 질부가 처음 모셔보는 시어머니를 위해 새
로 꾸며놓은 폭신하고 가뿐한 이부자리를 깔아주었다. 언니는 자신이 졸지에 구박데기로 전
락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매사가 귀찮은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푸석하고  미련스러워
뵈는 언니를 내려다보다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질부는 전화로 누군가와 다투고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격정적인 언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식구들의 분위기는 침울
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면? 아니면? 그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잘난 딸들은 생판 모르는 일이라고  앙큼
을 떨더니 자네는 또 그게 아니라구? 오해라구? 칠십 노인한테 수의를 안동해서 보낸게 여
기서 돌아가란 소리가 아니면 무슨 소리냐구? 여직껏 이 집 저 집 조리를 돌려 가며 식모처
럼 알뜰하게 부려먹다가 이제 자식들 다 길렀겠다 아쉬을 거  없을 때, 노인네 근력 떨어지
니 마침 잘됐다 이거지? 그럼 난 뭔가? 말이  좋아 맏며느리지 누굴 등신인 줄 아나? 맏며
느리는 배알도 없는 줄 아나본데 잘 들어둬. 자네나 나나  땡전 한푼 없는 이민자 가족한테
로 시집와서 자수성가하긴 마찬가지야. 그래도 자넨 노인네 노동력이라도 이용했지만 난 일
찌거니 시집 그늘 벗어 나서 덕 본 거 하나도 없어. 그만큼 떳떳하다구. 노인네가 귀찮아 질
무렵에 마침 고국 나들이 할 기회가 생겼으니 그걸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겠지.

 

그 기분 나도 알아, 이제사 말인데 나도 시집 식구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영어 잘하는  남편한
테 기회도 많고 여자들 살기 좋은 그 좋은 땅  버리고 한국에서 새롭게 기반을 닦았으니까.
왜 이래. 나도 그런 여자라구 자네가 나한테 미리 자네  속셈을 넌지시 귀띔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막 나가진 않았을 거야. 자네가 본데없이 자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맹랑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그려. 설사 웬수지간이라도 남의 개혼에  어떻게 그 흥측한 수의를
얹어 보낼 생각을 하냔 말야. 난 그게 분하단 말야 어머님이야 여적지 부려먹은 사람들한테
로 가시라고 비행기 태워드리면 그만이지만, 자넨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귀한 아들 혼사
에 수의 보따리를 안동을 해서 보냈냐구? 말해봐. 그게 아니면, 미국서 오래 살면 남의 경조
사에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되는게 있다는 것도 몰라도 되는 줄 아나? 덮어놓고 다 아니라
니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나는 자네 꿍수에 넘어갈 사람은 아닐세.“


  내가 듣고 있다는게 민망했던지 조카가 느닷없이 눈을 부라리며 제 댁한테서 수화기를 낚
아채 소리나게 내려놓으면서 고함을 쳤다.  "그만 닥치지 못해. 당신이야말로 자식들 앞에서
할 수리가 있고, 해서 안되는 소리가 있다는 것도 몰라?" "느이 어머니 잠드셨다. 시차 때문
에 고단하신가보더라 하룻밤 모시고 자면서 회포를 풀려고 했더니 안되겠다, 가봐야지.“
  나는 총총히 그 자리를 피했다. 아무도 나를 붙들지 않았다. 나도 알토란 같은 내  손주새
끼들과 효자일 것도 불효자일 것도 없는 아들 며느리가 있고, 기회만 있으면 나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하는 딸자식도 있는 몸이었다. 제까짓 것들이 붙들지  않는다고 아쉬을 거 없었지
만 앞으로 뭔 일을 당할지 첩첩태산인 언니 생각을 하면 뒤꼭지가 당기는 듯하여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식구들 몰대 내 방에서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요금을 그쪽 부담으로
하려면 암만해도 조카보다는 조카딸들이 만만했으므로 LA교외 라구나 비치에  사는 큰조카
딸한테 전화를 걸었다. 질부도 맨 먼저 거기다 전화를 한 듯, 조카딸은 여기서 일어난  일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왜 그렇게들 야단법석인지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큰올케는 다짜고짜 나한테 엄마 짐에 수의가 들어 있는 것도 몰랐냐고 시비를 거는데 내
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는 샌프란시스코 작은오빠네서  떠나신걸. 난 엄마한테 축의금만
보냈지 배웅도 안했어. 알았어도 그렇지. 엄마가 갖고 가고 싶으면 갖고 가는거 지 그걸  우
리가 왜 말려야 돼. 수의는 죽어서 입자고 하는 옷이잖 아. 엄마는 만약 한국 나갔다 돌아가
시는 일이 생기면 그걸 입고 싶었나보지 뭐. 그게 거기 사는 아들 며느리 짐을 덜어주는 일
도 되구. 살아 생전에 수의를 장만하는 마음이 바로 그런 거 아니겠수. 꼭 돌아가실 날 받아
놓은 것처럼 윤달 낀 해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자식들한테 보채다시피 해서 장만한거거든 그
거 얼싸나 비싼 건데. 처음엔 여기 올케한테 구걸하기 싫어서 나혼자 했었어. 소문보다 싸더
라구. 여기 노인들도 윤달 든 해엔 수의 장만하는 게 유행이라 값도 빤해. 교포사회가 좀 살
만해졌거든. 그래서 남 하는 대로 했는데 엄마가 중국베라고  시뜻해하시면서 당신은 꼭 한
국산 안동포로 하고 싶다는 거야. 엄마가 우리한테 어떤 엄만데  그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
수. 그래서 내가 해드린 건 좀 못사는 노인에게 선물하기로 하구 다시 추렴을 해서 그 안동
포라나 뭐라나 하는 최고로 비싼 베로 새로 해드린 거야. 엄마가 애착을 가질 만하지 뭐. 근
데 왜 난리들이야. 이모도 알다시피 LA가  얼마나 더운 데유. 그래도 겨을 한철  좀 서늘할
때면 밍크 입고 나오는 노인들 더 러 있다우. 나도  밍크 있다 이거지. 애교스럽지 않아. 엄
마의 수의도 그렇게 애교로 좀 봐주면 안되냐구?"


  조카딸 얘기를 듣고 보니 언니의 수의에 그닥 큰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질부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넘겨짚은 건 수의가 주는 이미지의,  경사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
는 그 생급스러움, 사위스러움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밍크코트하고 수의하고 비
교가 가능한 조카딸한테 사위스럽다는 우리 마음속의 해묵은 그늘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
가. 나는 암만해도 느이 엄마 여기 오래 계실 것 같지 않다는 소리만 하고 조카딸하고의 통
화를 끝냈다.


 그러나 언니의 수의 소동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언니가 온 지 며칠 안돼 신부집에
서 예단이 왔다고 보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신랑집의 집안네가 다 외국에 있으니까 접어두
고, 직계만 하라고 했다는데도 나한테까지 예단이 왔다는 것이었다  언니하고 나 하고는 같
은 천의 아름다운 비단이었는데 언니는 두루마깃감까지 있고, 나는 치마저고릿감만  있었다.
알맞은 차별이어서 호감이 갔 다. 언니는 연분홍빛이고 나는 황금빛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옷감을 풀어서 언니의 어깨에 걸쳐 보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잘어 울리는 색깔을 골랐
을까,라고 사돈댁의 안목을 치하해 마지않았다. 언니도 오래간만에 기죽을 펴고 활짝 웃더니
벌떡 일어서서 큰 거을 앞에 섰다.

 

그리고 한복 어깨로부터  발끝까지 치렁치렁 그 고운 비단을 걸쳐 보였다. 고급비단 특유의 우아한

주름과 속삭임 같은 살랑임에 우리는 그동안 어긋났던 마음이 편안히 녹아드는 걸 느꼈다.

그러나 거을 속의 자신의 모습에 황홀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언니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정말 너무

엉뚱했다.  "이런 옷감으로 수의 했으면 참 좋겠다. 그치?" 언니는 희고 아득하게 웃으며  가물가물한

소리로 우리의 동의를 구했다


나도 섬뜩했으니 질부가 노발대발한 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예단이  만들어준 모처럼의
화해의 틈서리에 끼여들어 오늘밤이야말로 언니하고 함께 자리를 나란히 회포를 풀어보려던
생각을 단념하고 쫓기듯이 조카네를 떠나야 했다. 내 몫의  예단에다가 바느질삯이 든 봉투
를 얹어주는 질부를, 암만해도 노망기 같으니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느냐고 다독거렸다.
  “나도 따로 알아봤는데 느이 시누이나 시동생은 노인네를 여기 떠맡길 생각 추호도 없더
라. 거기 애들이 특별히 효자라서가 아니라 노인네 앞으로 나오는 돈이 충분하고 병이 들어
도 병원비 걱정도 없는데 뭣하러 그런 혜택을 안 받겠냐고  하더라. 나도 미국에 대해선 좀
아는데 거긴 나라가 효자야. 여기서 여생을 보내려고 오신 거 아니란 거 하나는 확실하니까
괜히 지레 겁먹지 말고, 계실동안 잘 해드려. 결혼식만 끝나면 오래 계시지 않도록 나도  거
들 테니까.”


  이 정도로 질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질부는 수의라면 얼마나 지긋
지긋했던지 결혼식날도 시어머니한테 그 예단으로 옷을 지어드리지 않았다. 언니는 옥색 옷
을 입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도 언니는 한 달 가량이나 별탈 없이 아들네서 잘  지냈다.
내가 미국 가서 언니한테 받은 대접을 생각하면 마땅히 나도 언니를 우리집에 청해 단 며칠
이라도 같이 지내고, 운전 잘하는 딸한테 부탁해서 시골바람도 좀 쐬게 해드리는 게 도리인
줄은 알겠는데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기 며느리 눈밖에  난 언니가 내 며느리 눈밖에
는 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안 딴사람처럼 표정이 어둡고
거칠어진 질부만 봐도 언니가 얼마나 달값지 않은 짐이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후  내가 앞장서서 언니를 마치 고약한 짐 부치듯이 황황히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사건
이 또 한번 생겼는데, 수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수의
보다 훨씬 해괴한 사건이었다.  빨리 좀 와달라는 질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언니는
난만한 낙화 한가운데 사뿐히 앉아 있었다. 하필 사돈집에서  보내온 예단을 밤새도록 싹둑
거렸을 것으로 보이는 분홍 꽃이 파리들은  찍어낸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일정해서  언니의
요망스러운 짓거리에 괴기감을 더했다. 언니는 그 옷감이 피륙일 때 몸에 걸쳐 보일 때처럼
하얗게 바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언니, 정말 왜 이래? 겁에 질린 소리로
부르짖으며 언니를 부둥켜안았다. 또 무슨 광기가 분출할지 모르는  언니의 몸은 그러나 재
만 남은 뜬숯처럼 사뿐했다. 한줌의 바람을 안은 것 같은 허망감에 소스라치며 나는 언니를
밀어냈다.


  이래도 나만 나쁜 며느리냐고 질부가 나를 쏘아보며 대들었다.  나는 그런 질부가 정떨어
졌지만 질부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질부편을 든다는 것은  질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도 언
니를 미국으로 보낼 수 있도록 주선하는 거였다. 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카  보다는
조카딸이 만만해서 전화로, 너희 어머니가 가시고 싶어해서 어느날 몇시 비행기 태워드린다
고만 말했고 조카딸은 알았어, 이모 하고는 바쁜 듯이  전화를 끊었다. 그뿐이었다. 내가 했
으니까 그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이 됐지 질부가 했으면 아마 이러쿵저러쿵 훨씬 더 곱잖은
소리가 오갔을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마지막 만난 언니는 입국할 때와는 딴사람처럼 고상하고 품
위있어 보였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옥색 한복에다 흰 버선에 고무신까지 갖추어 신고, 그동안
자란 머리를 깔끔하게 얹어 빗은 게, 언니의 작달막한 키와 나부죽한 어께선에 잘 어울렸다.
짐도 루이뷔똥 가방만 그대로고, 구럭 같은 이민가방 대신 제대로 된 새 여행가방으로 바뀌
어져 있었다. 큰 가방을 두개나  더 장만한 걸로 보아 그쪽에사는  시동생 시누이들한테 줄
선물도 충분해 해보내는 것 같았다. 우애는 별로라도 그 정도의 허영심은 있는 질부였다.


  “미국물이 좋다지만 늙은이한테는 한국물이 좋은가보다. 몇달안되는 동안 느이 시어머니
어쩌면 저렇게 귀타가 잘잘 흐르냐?” 나는 질부에게 이렇게 아부 겸 치하의 말을 했다. 어
찌됐건 그동안 별난 시어머니를 그만큼 잘 참아낸 끝에 호사까지 시켜서 무사히 떠나보내는
질부가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출국장 앞에서는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서양식으로
알싸한고 볼도 비비며 작별을 아쉬워하는 게 어색하지 않고 보기 좋았다. 나도 남들이 하는
대로 언니를 포옹했다. 언니에게도 전송 나온 식구들은 남부럽지  않게 여럿 됐지만 끌어안
고 서로의 존재를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동기는 나밖에 없구나 싶은 게 뭉클하니 내
눈시울을 자극했다. 언니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질부는 시어머니가 싹둑거려놓은 한 바구니나 되는 꽃잎을 다  압수한 줄 았았는데, 어젯
밤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면서 보니, 루이뷔똥 가방 속  안동포 수의 갈피갈피에 흩뿌려놓
은 것처럼 아직도 많은 꽂잎이 숨겨져 있더더라고 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질부가 내 귓
전에 대고 속삭인 마지막 시어머니 흉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떠했니?” 나는 숨가뿌게  물었다.“어떡허긴 어떡해요. 그냥 못 본
척했지요.”“그래 잘했다.”나는 가슴을 쓸어내고 싶게 안도하면서 태워다주마는 조카를 뿌
리치고 버스정거장으로 향했다. 언니의 이상한 행동을  고자질할때마다 악령이라도 본 사람
처럼 불길하고 영물스러워 보이는 질부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두 달도 안돼 언니의 부음을 들을 줄이랴. 그래도 그렇지 두 달이 어디 짧은
동안인가. 그렇게 보내놓고 어쩌면 그동안  한번도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궁금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제나저제나 그쪽에서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
을 뿐 먼저 전화나 편지를 쓸 엄두가 안 났다. 나쁜 소식을 듣는다 해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같은 일종의 무력감, 무소식은 희소식으로 덮어두고 싶은 소심증 때문에 아예
알고 싶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


  공항으로 언니를 마중 나오기로 한 게 큰조카딸이었으니까 아마 언니를 끝까지 모신 것도
그애였을 것이다. 내가 언니 보러 미국 갔을 때마다 제일  잘 해주고 유복하고 그래서 마음
편하게 묵을 수 있는 곳도 그애네 집이었다. 미국서도 제일 부자동네라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산동네 같은 지형에 기화요초로 정원을 가꾼 집들이 드문드문 흩어진 그림 같은 동네
였다. 조카딸네는 맨 아래 마당이 바로 바닷가로 면한 집이었는데 천평은 됨직한 마당 끝에
서면 절벽 아래로 바다가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이 마치 갈기를 세운 맹수의 공격처
럼 사납고 무시무시해 보였다. 언니한테 안 무서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태평양인데 뭐가 무서
우냐고 했다. 태평양이면 왜 안 무서울까? 그것까지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한번은 언니하
고 온종일 그 동네를 한바퀴 돈  적이 있다.

 

세상에, 세상에, 꽃도,  꽃도 어찌나 많고, 모든
꽃들이 바로 지금이 제철인 양 어찌나 진하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지 식물원이 따로 없었
다. 버려진 공터나 낭떠러지에 물결치고 있는 노란 야생화는 멀리서  보면 한창 철 만난 유
채꽃 같은데 야생 겨자꽃이라고 했다. 그  동네엔 유명한 영화배우도 살고, 돈 맣은  변호사
도, 은퇴한 고관들도 산다고 언니는 일일이 그런 집들을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알은척을 했
다. 세상에, 경애 신랑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길래, 한국  사람이 이런 동네서 살 수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감탄을 하면 언니는 속도없이 이 동네  사는 한국 사람은 그렇지도 않다
면서 저기 저 대문이 네 개에다 풀장이 두 개나 되는 집은 한국에서 부도내고 도망온  누구
누구네, 저기 지금 한창 수리중인 성 같은 집은 몇년  전 신문을 떠들썩하게 한 빠찡꼬계의
주먹대장 누구누네 집 하는 식으로 알은척을 계속했다. 잘사는 동네답게 동네를 휘감아도는
길도 구렁이 잔등처럼 능글능글 기름쳐 보였지만 차의 통행은 어쪄다가 볼 수 있었다. 그날
언니는 유난히 즐겁고 의양양해 보였지만 밤에는 둘이서 똑같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정도
로 그건 고단한 순례였다.


  그렇게 온동일 다리품을 파는 동안 어쩌면 동네사람이건 행인이건 걷는 사람이라곤 한 사
람도 못 만난 것일까. 언니는  손가락질하며 알은척한 집에 정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을
까? 그런 사람이건 저런 사람이건 그  동네가 사람 사는 동네라는 게  맞기나 할까. 언니의
부음을 듣고 나서 왜 줄창 그런 의심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큰조카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
지 싶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힐 무렵 먼저 조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질부를 거치지 않
고 조카가 직접 전화하기는 드문 일이었다. 

 

회산데, 장례 치르고 와서 첫 출근이라  자연히 이모님 생각이 난다면서 차 보낼  테니 나오시면

점심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점심이 급한 게 아니라 할 얘기가 급한 것 같은 눈치에 사양하지 않았다.

여자형체끼리는 늙을수록 닮아가는 법이고, 그게 그 자식한테는 곧잘 상실감을 달랠 수 있는 구실이

된다는 걸 나도 경험해봐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급스러운 일식집은 그의 단골집인 듯 친절하고 공속하게 안내된 정갈한 방엔 조카가 먼
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양손으로 따뜻이 보듬으며 반겼다. 질부 앞에서라면
감히 꿈도 못꿀 침밀감의 표현이었다. 전골냄비의 야채와 어우러진 고기맛은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그러나 좀처럼 식욕은 일지 않았다. 조카도 전골국물보다는 따끈하게 데운 정종잔을
더 자주 훌쩍이면서,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더라구요. 정신 놓은  노인들을 위한. 그런 노인들
이 더 오래 산다는데 어머니가 그런 데서 돌아가신 걸 갖고 한번 뗑깡을 부렸더니, 장례 치
르고 나서 경애년이 글쎄 이런 얘기를 해주지 뭐예요. 경애가 알고 있는 일을 왜 저는 몰랐
을까요? 하긴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말예요. 제가 어머니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이 왜 이렇게 슬플까요.
이모님. 평소 과묵한 그답지 않게 이야기는 주절주절 계속됐다. 나는 어느 틈에 조카하고 마
주않은 게 아니라 언니하고 마주않아 옛날 예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미국 처음 갔을 때만도 60년대니까 한국이 지지라도  못살때였다. 사업에 실패한 남
편 형님이 미군하고 국제결혼한 처제 연줄로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이민간 지 몇년
만에 살 만해졌다고 했고, 시어머니 생신 때는 100불씩 부쳐오곤 했다. 그때는 100불이 어찌
나 큰 돈이었는지 그걸로 잔치를 떡벌어지게 치를 수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마치 아들이 미
국 가서 갑부나 된 것처럼 날로 도도해지셨고, 남편도 여기서  월급쟁이 노릇 하는 걸 불만
스러워했다.

 

그건 불만이 아니라 열패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의 경쟁은 이미  결
판이 나버린 나이였으니까, 출세할 사람은 이미  다 했고, 못한 사람은 영영 감앙이  없어진
사십대 중반이었다. 출세한 친구가 유난히  많은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것도  남편이 시시한
직장을 성에 안 차 하는  까닭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까짓  직장 당장 때려치울까보다는
소리를 누가 붙드는 것도 아닌데 줄창 입에 달고 다녔다. 

 

여기서 사는 걸 뜨내기처럼 말하는 데는 미국서 자리잡은 형님한테서 들은 풍월의 영향도 컸다.

남편은 자기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나 변두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형이 떠벌리는 원리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는

나라야말로 자기 같은 사람이 놀 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귀가

여린 사람은 아니어다. 그때는 다를 그랬다. 사회 도처에 불평불만이 팽배해 있을 때라 미국 이민은
누그나 한번쯤은 꿈꿔볼 만한 돌파구였다. 공항을 통해 이  나라를 뜬다는 것만으로도 당장
신분이 수직으로 상승한 것처럼 보일 때였다.


  남편의 꾸준한 노력 끝에 우리는 드디어 이민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무렵 시어머니가 돌
아가신 것도 낯선 나라에서 과연 적응이 잘 될까 하는  부담감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단
출한 우리 식구만도 여섯이나 되었다. 대식구였다. LA에서 잘산다는 형네는  이혼한 처제와
함께 식당을 하고 있었다. 순전히 한국인 상대의 식당은 한국의 변두리 식당보다 김치 젓갈 
따위 고타분한 냄새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 냄새가  그리워 찾는 손님이 많다고 하는데
이국적인걸 동경한 우리는 오만정이 떨어졌다.

 

남편은 더했다. 형은 처제가 독립하고 싶어하니 아우를 그 자리에 앉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민수속과 함께 영어회화 공부를 제법 착실하게 해가지고 온 남편은 온종일 영어 한마디 할 필요가

없는 일터는 천만금을 준대도 싫다는 거였다. 남편은 어떻게든 백인들 사회에 끼여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져온 돈을 조금씩 까먹었다. 형과 사이가 나빠지자 나도 그 식당에서 일을 거들 수 없게 됐고, 앞으로 아이들 공부시킬 일이 난감했다. 형네는 아이들이 좋은 학교 다닌다는 게 큰 자랑거리였고 희망
이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고 자부했다. 남편은 그 잘난 학벌 때문에 오히려 애들
을 개처럼 기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편이 잘 벌어도  부부가 같이 벌지 않으면 먹
고살기 힘든 사회라는게 우리 형편을 딱해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충고였다. 나는 그런 사
람들의 주선으로 시간제 식모 같은 일자리도 더러 얻어걸렸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나는
남편과는 달리 식민지시대에 여고에서 배운 영어가 단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입
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는 가정에 들어가 종노롯을 하기가 죽기보다는 싫었다. 그
러잖아도 유색인종에게 백인은 알아서  기어야 할 상전처럼 어렵기만  한데, 그게 일대일의
관계가 되면,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정식으로 출퇴근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은게 냉동회사였다. 내가 맡
은 일은 냉동한 새우를 크기에 따라 몇단계로 분류해서  포장하는 일이었다. 보수는 작업량
에 따라 주급으로 지급되는데, 내가 받은 주급은 동료들 중에서 늘 꼴찌였다. 내가 가장  일
이 더디니까 당연했다. 나는 내 직장에 만족했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좋았
고,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건 또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몰랐다. 동료들은 대부분 뚱
뚱한 멕시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유쾌했고  무엇보다도 그들앞에선 한결 주눅이
덜 들 수 있었서 좋았다.  백인들이 하는 영어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멕시칸의 영어는
곧잘 귀에 들어오는 것도 신기했다.


  어느날, 별안간 나에게 사무직이 주어졌다. 들어오고 나가는 물량만 기록하면 되는 간단한
사무직이었지만 보수도 오르고 손이 온통 짓무르는  막노동을 안해도 되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그러나 신참인데다가 직업능률도 가장 떨어지는 나에게 그런 출세길이 어떻게 열렸
는지를 알고 나자 괜히 동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그 회사에
서 슈퍼마켓으로 넘긴 새우가 대량으로 반품이 들어왔는데, 표시된  규격과 다르게 크고 작
은 게 함부로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반품을 받아보니 사실이었으므로, 누가 그렇게  불성실
하게 일했나를 알아보기 위해 포장하는 봉지에다가 누가 잔업한 건지를 알아볼 수 있는 특
별한 표시를 했는데 정직하게 일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진급할
만해서 한 거였는데도 제일 신참이 먼저 진급한 게 미안해서 나는 늘 아이 앰 쏘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사장한테도, 감독한테도, 동료들한테도 만나기만 하면 아이 앰  쏘리였다. 행여
나 누가 날 시기할까봐 미리 겸손을 떨었고, 마음으로부터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차 그
런 과장된 내 겸손은 비웃음거리가 되는가 싶더니, 누가 뭘 어떻게 고해버쳤는지 나는 생선
을 뼈째 가는 무시무시한 기계가 있는 곳으로 쫓겨났다. 그  기계를 청소하는 일은 아주 힘
든 막노동이었다. 엄청 큰 기계였는데, 청소를 하다가 잘못 조작을 해 팔뚝이 잘린 일이  있
는 기계라고 했다. 겁이 많은 나는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함부로 굽실대며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착실하게 배운 성싶었다. 또 하나, 같이 일하던 멕시칸들로부터 일본 사
람이 운영하는 믿을 만한 직업소개소가 어디  있다는 걸 알아놓은 것도 냉동회사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일본말엔 자신이 있었고, 통하는 말로 통사정을 할 수 있으면  반드
시 살 길이 열릴 것 같았다.


  그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소장은 나이 지긋한 여자였다. 일본말 특유의 상냥한  말투
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겠는데, 고맙게도 그 여자는 어떡하든  내 소질이 뭔가를 알아내려고
내게 말을 많이 시켰다. 나는 말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곧 제동을 걸  수 없도록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적당히 반문도 하고 맞장구도 쳤는데, 상대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알아내려는 의미있는 질문이어서, 나는 저절로 기술 한 두가지 정도는 익혀가지고
오는 건데, 하고 깨우칠 정도였다. 그 여자와 이야기하는 동안 비록 익혀 온 기술은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내 안에서 진지하게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건 덮어놓고 아무 일이나 하게 해달라고 덤빌 때하고는  딴판의 행복감이었다.

 

나는 대학도 안 나오고, 이민오기 전에 취직해본 적도 없고, 출신학교도 현모양처를 양성하기로만 

소문난 여고라는 걸 그 여자에게 몹시 미안해하며 털어놓았다. 여학교 때 얘기를 하다가 좋아
하는 과목얘기도 나오고, 양재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는 걸 아련한 그리움으로 생각해 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자들은 거의 여고가 최종학력이 되었으므로,  상급반에서
는 실생활에 필요한 요리나 바느질, 예의범절을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양재도 그 중의  하나
였는데, 선생님이 그 시절엔 희귀한 양장미인이어서 양재과목은 인기학과였다. 재봉실  시설
도 훌륭해서 우리는 좋은 선생님 밑에서 재봉틀 실습은 물론 치수를 재는 법에서부터 기본
형 옷본을 떠서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는 법까지 철저한 기본교육을  받았다. 결혼할 때도 양
재노트만은 챙겨갈 정도로 그때 받은 교육은 오래도록 쓸모가  있었다. 내가 딸애들의 원피
스는 사 입히지 않고 거의 내 손으로 해 입힌 것도 생각해보니 그 양재노트 덕분이었다.


  그 여자하고 그런 옛날 얘기까지 하게 된 것은 이미  구직을 위한 상담의 한계를 벗어난,
막혔던 대화의 욕구였다. 동년배인데다 섬세한  감정 표현까지 가능한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걸로 나는 그 여자에게 첫날부터 우정 같은 걸  느꼈다. 취직과는 상관없이 가끔 놀
러 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전엔 누구에게도 그렇게 넉살 좋게 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 이야기를 섬세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들었던 듯하다.  얼마 안돼 나는 그 여자
의 소개로 양장점에 취직을 할 수가 이었다. 특수한 고객만을 상대로 하는 맞춤옷집인데 주
인은 불란서 여자라고 했다. 임금도 냉동회사와는  댈 것도 아니게 후했다. 그 여자가  나를
과대평가해서 잘못 소개한 게 분명했으므로  뒷일이 걱정돼 사양하려고 했지만.  하필 그날
그 여자는 정신없이 바빴고,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떠다밀리 듯
이 새로운 일터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불란서 양장점은 일본인들 거주지역하고 가까운 깨끗하고  고요한 뒷골목에 있었다. 일본
여자 소개로 불란서 양장점에 왔다는 느낌 때문인지 결벽증에 가까운 청결함과 하찮은 것도
멋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나에게는 일본과 불란서의 의좋은 공존처럼 신기하게 여겨졌다.

 

양장점이라고 해도 밖으로 면한 쇼윈도는 없었고, 그림에서 본 유럽의 성당 문처럼 생긴 문을
밀고 들어가면 비로소 큰 유리창이 보이고 그 안에는 창백하고 도도하고 어딘지 슬퍼 보이
는 마네킹들이 공단이나, 사텐, 시폰 같은 고급 천으로 만든 주름이 풍부한 드레스를 치렁치
렁하게 입고 읍한 자세로 고즈넉이 서 있었다. 불란서 여자의 작업실은 이 응접실풍의 작은
홀을 거쳐서 들어가게 돼 있고 그 안은 밝고 능률적으로  정돈돼 있었다.

 

그 여자는 주름은 없었지만 깡마르고 강파른 얼굴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고, 오렌지 빛 루주를

진하게 바른 입술이 한련 꽃을 문 것처럼 생생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불란서 여자와 재봉사들이

말하는 걸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쉬운 영어로 간단한 지시를 했고
가끔 일본 말도 했다. 어떤  말도 아주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했기  때문에 눈치로 알아듣는
게 더 편했다. 거의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 땅에서 여러 번 던져졌던 침
묵 중에서 이 곳의 침묵은 아주 편안했다. 단절이 아니라 용해 같은 거였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일은 불란서 여자가 떠주는 본대로 천을 재단하는 일이었다. 나는 양재 선생한테 배운
대로 몸체의 앞뒤나 좌우를 뜰 때,  암홀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게 놓고 재단했다.  무늬가
없는 옷감인 경우 그렇게 해서 옷감을 덜 들게 하는 건 재단의 기본이었는데도 불란서 여자
는 그걸 매우 신기하게 여겼고 나를 칭찬해주었다. 얼마 안돼  나는 그 여자가 나를 신임하
고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아직도 방황 중이었지만, 나는 순전히 내 힘으로 잡
은 좋은 일자리로 인하여 비로소 이민생활이  일단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정감을 맛볼  수가
있었다.


  일감은 연달아 있었지만 나는 옷을 맞추러 오는 고객을 거의 보지 못했다. 고객인가 싶은
이도 맞춤 옷의 진짜 주인은 아니었고, 심부름꾼이었다. 미국사회에도 전화를 걸거나 하인을
시켜서 치수를 대주고 옷을 맞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귀족사회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
았지만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소녀 적에  읽은 괴기소설로다 그런
상류사회를 유추해보곤 했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에 권세와 부를  한 몸에 지닌 성주가
선택된 귀족들을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성 안에 모아놓고, 흑사병과 맞선다. 

 

흑사병은 커녕 바늘 끝이나 심지어는 시간이 흘러 들 틈도 없는 완벽한 방어 속에서도 그들은

흑사병의 공포에서 못 벗어난다. 그래서 허구한 날 질탕 같은 무도회로 그 공포를 잊으려  하지만,
어느 날 낯익은 멤버 외에 낯선 손님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불청객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불청객이 바로 흑사병이었고, 춤추던 귀족들은 차례차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다, 는 이야기였다. 그 폐쇄된 성 안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귀족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
은 옷이었다.


  나는 불란서 여자가 재단한 이런 치렁치렁하고 유현한 옷보다는 그 여자가 모조진주로 손
수 수놓는 비단 실내화나, 불란서 망사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베일, 그리고 자투리 헝겊을 날
이 긴 반짝거리는 가위로 날렵하게 싹독거려서 한 송이 요염한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코사
지 등을 더 좋아했다. 불란서  여자가 몰입과도 도취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 일에 열중하는
걸 나는 숨죽이고 지켜보곤 했다. 검은색이나 은색 보라색 등 가라앉은 색상의 드레스에 한
쪽 가슴을 장식하는 코사지는 거의 비슷한 계통의 색상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현
실적인 옷에다가 놀랍도록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옷을 뚫고 걸어 나올 것 같은 생기는 생뚱스럽게도 간드러진 요염함이었다. 그  여자는 어쩌면

자기가 만든  엄숙한 옷에다가 장난을 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 여자가 다 된 옷에다가 

장난을 치기위해 코사지를 만들 때의 무아지경을 볼 때마다 아침에 거울  앞에서 오렌지색 루주를

안 칠한 그 여자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 양장점 종업원 중에서는 내가 가장 가벼운 일을 하고 있는 것같은 미안감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 대 로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마무리  청소까지 끝마치고 퇴근하려 들었다. 어디
서나 그놈의 미안감이 문제였다. 그러다보니 가게를 열고 닫는 열쇠까지 내 차지가  되었다.
커다란 거울이 걸린 잘 정돈된 불란서  여자의 작업실에서 나는 금지된 장난에의  유혹으로
가슴을 울렁거리며 아직 찾아가기 전의 맞춤옷을 이것저것 걸쳐보곤 했다. 계집앳적 엄마의
외출복을 몰래 입어볼 때 처럼 서양 여자들의 체격에 맞춘 옷들은 나에게 터무니없이 컸지
만 고급천의 감촉은 황홀했고, 가슴에서 피어나는 코사지는 내  안에 남은 화냥기처럼 요요
했다. 나는 내 하루 중 그 시간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감미롭고도, 마치 열병의 예감처럼 불
안하고 달뜬 열정의 웅성거림을 내 안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양장점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유명한 양장점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마어마
한 장비와 함께 그 지역 TV방송국 촬영팀이 들이닥쳤다. 미리 약속된 것인 듯 나만 놀라고
아무도 안 놀라며 그들을 맞이했다.  휘황한 조명등이 설치되고 여기저기다  플러그를 꽂고
마이크랑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그들은 서로 거침없이 떠들었다. 물론 영어였고, 나는 못  알
아들어서가 아니라 그런 소요가 마치 여지껏 내가 편안하게 안주해왔던 침묵이 흘러 나가는
소리만 같아서 불안했다. 장비를 설치하는 기술자중에 동양인이 한 사람 있었다.

 

동양  사람 중에도 한국 사람이 아닌가 싶게 친근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말로 이야기를

시켜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두 팔을 크게 벌려 못  알아듣겠다는 몸짓을 해 보이고는 이
내 무관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그를 관찰했고, 마침내 조작하는  기
계가 말을 잘 안 듣자 일본말로 욕을 하는 걸 들었다. 우리말만은 못해도 일본말만 해도 어
딘지 몰랐다. 그가 맡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짜고짜 일본말로 말을 시켰다.  이번에
는 그도 반가워했다.

 

내가 일하는 양장점이 TV에 나올 만큼 유명한가를 그에게 물은 게 잘
못이었다. 그들은 특이한 직업을 취재 중이었고, 불란서 여자는 부자들의 수의를 비싼  값으
로 잘 만들기로 소문난 여자라고  했다. 내가 가게에 혼자 남아  걸쳐본 야회복은 수의였던
것이다. 나는 그 날로 그 양장점을 그만두었다. 다시는 그렇게 편안한 직업을 못 가지게  되
리라는 걸 알고도 더는 그 일을 계속하기가 싫었다. 정말로  그 후로는 그렇게 편안한 직업
을 못 가져보았고, 남편이 안정된 직업을 갖기까지 안해본 고생이 없었지만 그 직장을 그만
두지 말걸 하는 후회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좀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까 해서 그
일본인 직업소개소를 다시 기웃거려보는 짓 따위도 하지 않았다.


  마치 홀딱 반해 얼싸안고 정을 나누던  사내의 정체가 실은 해골이었더라는 괴기담  속의
처녀처럼 날로 수척해질지언정 지난날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접  송장을 다루는
것도 아니겠다, 그만큼 편안한 일터를 놓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송장에  대한
금기가 워낙 격렬하고 유구한 내 나라의 문화를 극복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작가세계 1998년 봄호)

 

 

    공놀이하는 여자
  버스 종점에서 아란은 집을 지나쳐 조각공원 쪽으로 갔다. 옥죄는 가슴을 펴고 마음을 진
정시키기에는 집은 너무 좁아 터졌다. 마을 사람들이 조각공원이라  부르는 곳은 그냥 넓은
초원이었다. 왕년의 어떤 조각가가 인근의  농가를 개조해 찻집을 차리고  주변의 공터에다
조각물을 설치하고 공원처럼 꾸몄다고 한다. 찻집 자리가 어디쯤인지  지금은 그 흔적도 없
지만, 공터에 조각물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조각가는 죽었다고도 하고 이민을  갔다고도
하는데 남아있는 조각들은 거의가 온전치 못하거나 흉물스러워 아란은 거기 갈 때마다 조각
가가 공원을 임대를 했었을까 무단점거를 했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땅에도 팔자라는 게 있는지 도심으로부터의 거리나 교통편이 나쁘지 않은 편인데도 땅 값
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동네였다.  평범한 서울 근교였을 적에 철거민들한테  열 평 미만의
땅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여기다가 쓰레기처럼 실어다 부려놓고 간 후에 생겨난 동네라고 했
다. 시작이 그렇게 잘못되고 보니 그 후에 많이 발전했다는 게 고작 임대아파트와 연립주택
단지였다. 둘 다 평수가 열 평 남짓한 영세민용이었다. 아란이 최초로 장만한 다세대 연립은
동네 끄트머리여서 버스 종점에서 멀고 외졌지만  공원을 바라볼 수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편이었다.


  공원엔 벤치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조형물의 잔해가 벤치 구실을  했다.
간혹 작가의 이름과 작의 같은 게 새겨진 팻말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작품과 팻말이 제대
로 짝이 맞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작품은 없이 팻말만 남아 있는  것은 빈 무덤가에 서 있
는 비석처럼 처량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팻말이 설명문치고 겸손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이 작품은 주석을 재료로 한 것이다. 주석이란 무엇인가. 주석은 인간이 대지로부터  불
을 써서 얻어낸 것이다. 인간과  대지와 불이라는 팽팽한 긴장관계는 늘  내 영혼을 떨리게
한다. 영혼의 떨림 없는 창조적 충동을 나는 믿지 않는다.”


  거의가 이런 투였다. 잘난 척은... 시커먼 고철더미  옆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는 걸  보고
아란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용암이  흘러내린 것처럼
생긴 조형물 끝부분에 맷돌처럼 편안한  자리가 있기에 걸터앉아 블라우스  소매를 걷었다.
우윳빛 나긋한 팔뚝에 헌이 담뱃불로 지진 자리가 아직도 세 개 나란히 선연하게 남아 있었
다. 앵두처럼 고운 빛깔로 부풀어져 있던 게 찌그러들면서  갈색으로 변했다고는 하나 누가
보기에도 화상자국이라는 걸 숨길 수 없는 흉터였다. 담배를 자주 피는 편은 아니었다.

 

사는 게 곤곤하고 구질구질하고, 도대체 희망을 가져야 하는지 안 가져야 하는지 자신을 그 어느
쪽으로도 처리할 수 없을 때 문득 한대 피워물게 되는 것은 담배맛을 알아서가 아니라 미스
김의 담배 피는 모습에 반해서였다. 미스  김은 아란이네 집에 세든 여자였다. 교외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경리일을 보는 얌전한 아가씨인데 늘 돈, 돈, 돈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버는 건 얼마 안되고 쓸 데는  많고, 손 내밀 데는 마땅찮은데 손  내미는 식구는 쏠쏠하니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지배인이 담배냄새 맡으면 당장  쫓아낼 거라고 두려워하면서도 담
배를 끊지 못했다. 근무하는 동안 참다가 피워서 그런지 아주 맛있게 피웠다. 그렇게 맛있냐
고 물어보면 맛으로 피는 게 아니라, 이 개같은 기분 대신 평화를 얻으려고 핀다고 했다.

 

어머, 그렇게 좋은 거니? 나도 한번 피워볼까. 이렇게 해서 꼬나물어보긴 했어도 열심히  미스
김 폼만 흉내내다 말았지 담배맛도 평화의 맛도 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헌이 사법
고시에 네 번째 낙방한 걸 알았을 때는 정말 개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또 미스 김 담뱃갑
에 손이 갔던 것인데 연거푸 세대나 피워서  좁아터진 거실 겸 부엌이 매케해졌을 때 하필
헌이 들이 닥친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담뱃불을 빼앗아 아란의 팔뚝을  지지면서 겨우 네
번 떨어진 걸 가지고 이렇게 지지궁상을 떨기냐고 눈을 부라렸다. 아란은 서른살이었다. 

 

 겨우 네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헌이 다음에 겨냥한 건 서른살의  조바심이 아니라 서른살의
몸뚱이일 터였다. 현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팔뚝의 화상자국을, 얻어맞고 들어온 손자의  피
멍에 놀란 할머니처럼 애간장이  녹는 표정으로 호호 불어주면서  서서히, 그러나 능숙하게
아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농익은 수밀도처럼 자포자기한 단내를 풍기면서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일이 끝난 후에도 아란은 헌의 몸을 감고 놓아주지 않아, 누가 올드
미스 아니랄까봐 점점 더 바치긴,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란이  절절하
게 바친 건 색이 아니라 자꾸만 희미해지려는 한가닥의 희망, 쥐어도 쥐어도 쥐어지지 않는
한줌의 가능성이라는 걸 헌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아란이만한 미모가 서른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갔다는 건  회사에서도 화제였다. 이제 사내
에서는 군침을 삼키는 상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헛물을 켜던 총각들은  다들 아기 아빠가
돼 있고, 그녀만 못한 외모  때문에 그녀에게 주눅이 들었던 아가씨들도  짝을 찾아 회사를
그만두기도 하고 달덩이처럼 부풀어오른 배를 당당하게 내밀고 계속 출근하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에게 자신의 미모가 얼마나 같잖아 보일까. 아란은 불을 보듯이 빤히 알고 있었다.

 

미모뿐 아니라 가난까지 겸비한 그녀가, 그러나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
연하게 서른이 될 때까지 한 회사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찬탄과 선망의 대상으
로 떠오를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사법고시 합격생과의 결혼 청첩장을 꼭 이
직장에다 돌리고 말리라. 아란이 죽자구나 매달린 것은 헌의  식은 몸뚱이가 아니라 언젠가
는, 언젠가는, 아아 언젠가는 개천에서 용 날 날이었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아란은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폭발적인 성량을 허공에 날
리고 나서 옷소매를 내렸다. 회사에서 갈아입은 유니폼이 반소매로 바뀔 날도 얼마 남지 않
았다. 그러나 아란은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전에 회사를 그만둬도 그만일 것처럼 그  일
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이제부터 아무것도 참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개새끼한테 개
새끼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여직원은 아무리 오래 다니고  열심히 일해봤댔자 터줏대감 자
리가 최고위직인 회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것도, 열네 평짜리 집이라도  혼자 쓰고 싶은
것도 참을 필요가 없다. 이게 꿈이 아니고 생시일까. 이 현실적인 기쁨을 누구하고라도  교
감하지 않으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미스 김은 아니었다.

 

천만원짜리  적금도 들기만 여러번 들었지 번번이 도중 해약을 할 일이 생겨 평생에 한번이라도

천만원을 목돈으로 만져보는 게 소원인 미스 김에게 천만원의 서른 배가 넘는 돈은 너무 잔혹한

거액이 아닐까. 그건 고문과 다름없는 가혹 행위이다. 사람은 고문을 당하면 자기 보호 본능처럼
독기를 뿜게 마련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운을 독기에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미스 김을 떠올린 것은 질한 일이었다. 미스 김이 아무리  기어오르려고 발버둥쳐도 도달해본 적
이 없는 천만원의 서른다섯 배라는 곱셈으로 자신이 거머쥔 행운의 부피를 어느정도 어림짐
작할 수 있었으니까. 아란은 자신의  존재도 덩달아서 우스광스러운 잔해인  주석 조형물의
한 자락으로부터 둥실 몸을 일으켰다. 아란은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게 아니라 땅과는 어
느만큼 거리를 두고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그건 희열인 동시에 불안이었다.


  ‘존재의 아픔’은 조형물은 사라지고 홀로 꽂혀 있는 팻말  속에 남은 작품명이었다. 잘
난 척은..이렇게 코웃음을 쳐주고 지나치려다 말고 아란은 문득 땅에 발이 붙는 느낌으로 그
앞에 멈쳐 섰다.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이  초원의 빛깔이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울  때였으니
작년 이맘때가 아니었을까. 세번째의 낙방을 경험한 헌이 어디  가서 머리나 식히고 오겠다
며 여비를 타가지고 잠적한 후  소식이 없을 때였다. 화창한 휴일날  행여나 해서 고시촌에
전화를 걸어보고 나서 참담한 마음을  달래려고 조각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을 때였다.


그날도 작품은 없고 ‘존재의  아픔’이란 작품 이름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때도 아란은
‘존재의 아픔’이 자신의 마음 아픔, 가슴 아픔, 골치 아픔에 비해 너무도 유치 찬란한  말
장난만 같아서 코옷음을  쳤던 것 같다. 마침 멀리서 아란 앞으로 공이 하나 굴러왔다. 공을
굴린 사람들은 저만치 나득한 곳에서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와
젊은 부부였다. 아기가 걷어찬 공이 그렇게 마냥 구른 것은 초원의 경사면 대문이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아기의 발힘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 같았다. 부부는 깔깔대며 손
뼉을 치고 아이는 공을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하얀 공은 야구공보다는 훨씬 큰, 어른 두 손
바닥 안에 겨우 들 만한 말랑한 고무고이었다. 아란은 숨을 죽이고 요새는 흔치 않은 그 너
무도 평범한 고무공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 공의  시
발점은 아이의 발힘이 아니라 아란의 유년기였다. 아란은 그녀의 유년기로부터 굴러오는 공
을 맞기 위해 과녁처럼 상기해 있었다.


  아마 어린이날이었을 것이다. 판자촌의 아이들도 싸구려지만  다들 선물 한가지씩은 얻어
가져서 골목 안이 명랑한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아란이 골라잡은 선물은  고무공이었다.
전날 밤 늦게야 돌아온 엄마는 미처 선물을 준비 못한 걸 미안해하며 아린을 동네 문방구점
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린이날을 겨냥해 학용품 외에도 이것저것 다양한 장남감을 준비해놓
고 있었지만 빈촌의 문방구점답게 날림제품이었다. 아란은 그중에서도 제일 싼 고무공을 골
랐다. 그런 아란이가 안됐는지 인형이라도 하나 더 사자고  엄마가 권했지만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갖고 싶은 걸 골랐을 뿐이지 엄마를 생각해서  일부러 싸구려를 산 건 아니었다.

 

아란은 그 공이 저절로 탄력이 없어질 때까지 꽤 여러날 가지고 놀았다. 한 손으로 공을
치면서 한버도 놓치지 않고 동네를 한바퀴 돌기도 하고, 골목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오
른쪽 왼쪽다리를 번갈아 휙휙 공 위로 돌려가면서 공치기 하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까짓 거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공을 빌려줘봐도 아란이처럼 할 수 있는  아이
는 없었다. 그 하얀 공이 어디를 갔다가도 아란의 손바닥 안으로 되돌아왔다. 공이 되돌아올
수 있는 탄력을 잃었을 때 비로소 아란은 공놀이에 싫증이 났다.


  아이가 찬 공이 마치 자석에 끌리는 괴붙이처럼 그녀에게로 곧장 다가오리라는 것을 의심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을  따라 달려오던 아이도 멈쳐서더
니 울음을 터뜨렸다. 바라보고만 있던 엄마 아빠가 웃음소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아이에게로
달려왔다. 아란은, 아가 내가 찾아줄께 울지 마, 아이를 달래는 한 편 공이 감쪽같이 사라진
지점의 풀숲을 손으로 더듬듯이 살펴보았다. ‘존재의 아픔’ 팻말  근처에 깊은 구멍이 두
개나 나 있었다.

 

아나 조형물을 누가  철거했거나 훔쳐가고 난 흔적일 터였다. 밝은  햇살에
익은 눈으로는 구멍 속이 식별 안돼 손을 넣어보았다. 속이  어찌나 깊은지 팔을 어깨 있는
데까지 들이밀고 나서야 겨우 공의 탄탄한 탄력이 만져졌다. 다행히 첫째 구멍에서였다.  찾
았다, 아가야, 누나가 곧 꺼내줄께 조금만 기타려. 이제 울음을 그친 아이 쪽을 볼 겨르르도
없이 아란은 연방 말로 아이를 달래가며  공을 그 안에서 꺼내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공과 구멍의 지름은 거의 맞먹는 것 같았다. 만져진다고 쉬 잡아낼 수 있는게 아니었다.  아
란은 팔을 어깻죽지까지 집어넣고 손툽으로 공 주위의 흙을 후벼파고 나서야 가까스로 공을
그 안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고 저만치 양손으로 엄마 아빠
의 손에 매달려 그네를 타면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젊은 부부의 재잴거리는 듯한  속삭임과
아이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면서 아란의  볼을 약올리듯이 간지럽혔다. 그
녀는 화끈한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며 주인에게  버림받은 공을 그 구멍 속으로  되돌려주었
다. 손툽 밑의 시커면 흙보다 더 더러운 기분이었다.

 

  ‘존재의 아픔’ 팻말 근처의 두개의 구멍은 여전했다. 아직도 그  하얀 공이 그 구멍 안
에 있을까. 아란은 땅에 엎드려서 구명 안에 팔을 갚숙히 밀어넣었다. 첫번째 구멍에서는 비
닐봉지와 눅눅한 흙이 만져졌고 두번째 구멍에서 공이 만져졌다.  공은 그안에서 탄력을 잃
은 듯 둘레의 흙을 손톱으로 후벼파지 않고도 꺼낼 수가  있었다. 일년 동안 흠뻑 더러워진
공을 수돗가로 가지고 갔다. 근처 주민들이 약수라고 믿고 길어가던 지하수였다.

 

식수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후 버려진 수도꼭지는 비트니까 물이 나왔다. 아란은 뽀얗게 씻어낸

공을 잔디밭에 풀어줬다. 잔디 위에서 햇볕을  받으면서 다시 팽팽하게 부불어오른  공을 아란은
발끄트머리로 살살 건드리기 시작했다. 아란은 푸르디 푸른 초원  위로 흰 공을 자유자재로
굴리면서 발끄트머리로부터 짜릿한 쾌감이 실핏줄처럼 온몸에 고루 퍼지는 걸 느꼈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공과의 황홀한 교감이었다. 실은  공을 굴리는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공이
되어 있었다. 옴작달싹도 할 수 없이 답답하고 어두운 정해진 팔자에서 비로소 열린 세상의
햇빛 속으로 나온 자유의 기쁨을  공과의 동일시를 통해 차츰 몸에  익히고 있었다.

 

어떻게 그 꿈같은 사실에 단박 익숙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진혁부 회장의 부움을 신문에서 본 것은 달포쯤 전이고 그의 장남인 정기씨의 전화를 받
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아란이  진회장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엄마가 그 노인보다 먼저 죽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정도였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아란이 진씨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건 아랑곳없이 사람의 도리를 내세워 그 집에 가서 상제
노릇을 애걸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열살도 안됐을 어린 나이에 진회장의 소문난 칠순잔치에 엄마에게 떠다밀려 참석했다가 그 집

식구들한테 당한 모욕은 아란에게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그 사건은 엄마가 죽을 때까지

아란으로  하여금 엄마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녀는 엄마하고 싸울 때마다

그때  당한 걸 낱낱이 열거해서 엄마를 공격하고 능멸할 수 있는 무기로 삼았지만  일부러 빼먹고

 말하지 않은 게 딱 한가지 있었다.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본 느낌이었다. 한창 무르익은 화려한  파티
장 주빈석으로 아린이 곧장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용기가 있어서도, 당차서도 아니고 나는
엄마가 쏜 화살에 불과하다는 정신적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 계집애가 여기가 어디
라고 감히, 하면서 그 노인의 직계 가족이 일제히 송곳  같은 시선을 아란에게 꽂으며 에워
쌌을 때 그녀는 입술을 비죽대며 울음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진회장이 사람들을 헤치
고 아란에게로 다가와 어린 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면서  아이를 안았다.

 

아란은 작은 새처럼 할딱거리는 노인의 가슴 소리를 통해 노인이 뭇 사람의 해코지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매우 필사적일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노인은 아란을 양팔로 보듬은 채 사람들을

헤치고 파티장을 나와 누군가에게 아란을 인계했다. 아마 호텔 웨이터였을 것이다. 그는  아란을
엘리비이터에 태워 현관까지 데리고 나와 택시까지 태워주고 들어갔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그 노인은 아란의 아버지일 터였다.  할아버지라고 해도 젊은 할아버지 축에도  못 끼일 그
저승꽃 핀 신사가.

 


  그렇다면 엄마는 아마 그 노인의 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란은 엄마의 첩노릇을 본 적
은 없었다. 세상에서 첩이라는 족속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일반적인  통념, 요망스러운 미모,
나태와 사치에 대한 남다른 성벽,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화냥기, 불로소득에 대한  치사한
갈망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는 죽을 때까지 남의 집 파출부 노릇을 했지만 이
리저리 옮겨다니지 않고 서너군데의 단골집만 다녔는데 하나같이 처녀나 과부로 교수나  교
장자리에 오른 전문직 여성들 집이었다.  그들이 더 좋은 데를 소개해  준다 해도 홀아비나
부부가 같이 있는 집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좀 유난스러운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의 첩 노릇은 오직 빛바랜 사진첩 속에나 남아 있었다. 진회장과 엄마는 부부라기보다는 부
녀간처럼 보였고 둘 사이에는 어린 아란이 반드시 끼여 있었다. 둘만의 사진이 신기할 정도
로 없는 것으로 보아 아란을 위한  사진첩인 것 같았다. 사진 속의 진회장은  첫 손자를 본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고 달콤한 시선으로 아란을 바라보거나  보듬어안고 있었다. 아란의 기
억 이전의 가족 모습이었다. 이  시기는 아마 이 숨겨진 가족이  큰집에서 발각되기 이전일 것이다.

 

그 시기가 길지 않았다는 것은 사진 속의 아기가  더는 자라지 않고 유아기에 정지
돼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빛 바랜 낡은 사진들이 흔히  그렇듯이 표정이나 의상은
진부하고 생기없어 보였지만 나른한 불안 같은 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었다. 어떤 계기나
경로로 큰집에 엄마의 존재가 들켰는지 엄마는 한번도 말하려 들지 않았고, 아란 또한 묻지
않았다. 보나마나 생각하기도 입에 담기도 싫은 한바탕의 추악하고 통속적인 풍파가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진회장과 깨끗이 헤어지는 대신  아란을 진씨가의 호적에 입적시켜달라는  조건을
달지 않았나 싶다. 그게 뜻대로 안되자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약속이 틀리다고 분해하고
한숨 짓는 엄마를 아란은 여러번 보았다. 그 일에 관한 한 한숨만 짓고 가만히 있을 엄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회장과 다시 만나는 일 같은 건 없었지만  아란의 존재를 그 집에 알리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진회장 앞으로 아란이 졸업식이나 입학식의 초대장은 물론 성적표나 미술대회 글짓기 대회의 상장 같은 것까지도 복사를  해서 우송할 정도였다. 칠순잔치에 아란을 밀어넣은 것도 아마 그런 존재

과시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란이 진씨가의 입적이 된 것은 그로부터 십년이나 지난 그녀의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그 집 장남 정기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가 먼저 만나기를

 제의해온 것은, 회장님은 벌써 몇년 전에 기업 일선에서 은퇴를 했고, 은퇴와 동시에 기업체의

인수인계와  재산의 분배도 깨끗이 마무리 되었다는 걸 통고하기 위함이었다. 덧붙여서 입적을 시켜주는 대신 남남처럼 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고등학생이었다. 알 건 다 알았던 것도 같고, 아무것도 몰랐던 것도 같다. 그건 정기로서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화  상대는 엄마이고 아란은 간접통화의 도구에 불과했을 테니까.
  "느이 어머니가 네가 아버지 핏줄이라는 걸  인정해주길 왜 그렇게 바랐는지 모르겠구나.
실지로 돌아갈 재산은 땡전 한 푼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 집안이 대단한 명문도 아
니고... 할아버지가 노가다 십장 하면서 재산을 늘린 집안이다 너.“


  이렇게 아주 않됐다는 듯이 비웃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만 동기간에 대한 최소한도의
배려도 안하려 들었다. 놀부 같다고나 할까. 남 줄 물건에는 침을 뱉든지 흠집이라도 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심술궂고  야비한 인간이었다. 그후 아란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장남이
한 말과 똑같은 말로 엄마를 비웃곤 했다. 이렇듯 엄마는  아란의 진씨집 입적이 성사된 후
훨씬 더 지독한 구박을 딸한테서 받아야 했다. 엄마의 대답은 늘 똑 같았다. 재산이나  가문
이 탐나서가 아니라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받고 싶었노라고. 끝끝내 잘난 척은... 아란은
엄마의 잘난 척에 신물이 났다. 아란은 엄마가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맥을 놓더니 곧 병을 얻어 아란이 대학을 가기 전에 세상을 떴지만, 과연 여
한이 없었을까. 오랜 투쟁 끝에 아무것도 거머쥐지 못한 낙담과 충격으로 그렇게 쉽사리 목
숨줄을 놓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다.  아란은 복잡한 건 질색이었다. 아
란이 엄마가 싫은 것도 그  난해함 때문이었다. 완벽한 위선의 그  꼬이고 꼬인 난해함에는
넌더리가 났다. 엄마가 죽고 나서 삼년 안에 진회장도 상처를 했다는 걸 풍문으로 들었지만
그때 아란은 직장 다니면서 야간대학 다닐 때라 살기에 바빠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지지리 복도 없는 엄마, 혹시 살아 있었다면 그 잘난 진씨집  호적이 정식으로 오를 수도 있었으렴
만... 하다 못해 이런 생각도 못했던 것은 살기에 바빠서라기보다는 그 징글징글하도록 번족
하고 배타적인 그 집 식구에 대해선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적에만 올랐다뿐 이렇게 남남과 다름없이 지내던 진씨가에서 느닷없이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이상하게 여기긴 했어도 겁날 것은 없었다. 진씨가에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기
정사실이 아란의 배짱을 두둑하게 만들었다. 또 진씨가가 비록 야비할지언정 남해하지 않다
는 것도 아란을 마음 편하게 했다. 만나자는 장소는 회사가 아니라 어떤 아파트였다. 그러나
아란이 약속시간에 지정된 아파트에 당도했을 때 분위기는 냉랭하고 근엄했다.

 

정기씨를 비롯해 나이 지긋한 신사들이 여러 명 대기하고 있었고 머리가 허연 노부인을 비롯해서 중년
부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부인들은 하나같이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생전 웃지도 않을 것 같
은 그들의 경직된 표정과 잘 어울렸다. 아미 진혁부 회장의 딸이나 며느리들일 것이다. 상을
당한 지 달포가 됐는데도 집안에서까지 일제히 상복을 입고 있는 게 아란이 보기엔 과시용
처럼 보였다. 아란은 개나리 빛깔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빛깔에나 자신이 었
었지만 특히 노란색이 그녀를 도전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사에도 안 오고 만 년을 그래도 딸이라고...”제일 나이 맣아 보이는 노부인이 아란의
위아래를 날카롭게 훑고 나서 저만치 딴전을  보면서 중얼댔다.“형님, 쟤 옷 입은 거  보세
요. 탄할 만해야 탄하지요. 참으세요.”“그 말씀 하시려고 저를 부르셨나요. 남남처럼  살자
고 한 게 누군데요.”아란은 부인들을 무시하고 정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누님, 자리를 좀 비켜주시지요.”정기의 그  말 한마디에 상복 입은 여자들이  슬금슬금
안방 쪽으로 사라지고 남자들만 남았다. 정기 빼고는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낯선 남
자들이었다. 그중 한 신사가 아란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직업적인 정중함이 몸에 밴  신사
였다. 그는 진씨가 아니고 이씨 성을 가진 변호사였다. “아버님의 유언을 집행할  변호사시
다. 아버님이 이 집을 너에게 남기셨다는구나.”정기가 남의 말 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이 집을요? 누굴 놀리시는 거예요?”“사실입니다.”방금 명함을 건네준 변호사가 말했다. 변호
사 쪽이 훨씬 덜 사무적이었다. “그분의 뜻이 그렇다고 해도 당신네들이 줄 사람들이 아니
잖아요?”“당신네들이라고? 당찬 건 좋은데 버릇이 너무 없구나. 아닌게 아니라 안주고 싶
다만 유언장을 공증까지 하고 돌아가셨으니 어쩌겠니.”


  아란은 변호사한테 말했는데 대답은 정기가 했다. 아란이 독기를 뿜고 말했음에도 불구하
고 정기는 웃고 있었다. 억지로 꾸민 웃음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 뵈는 능글능글한 웃음이었
다. 숫제 가지고 노는구나, 가지고 놀아. 아란이 그런 모욕감으로부터 미처 자신을 추스르기
도 전에 정기가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우리 집안끼리는  너를 입적시키기 전에 상속을
끝냈으니까 이집이 아버님께서 당신 명의로 가지고 계시던 마지막 재산이란다. 당신이 운명
하신 것도 이 집에서였고. 그래 그런지 우리 식구들은 아버님이 당신의 모든 것을 너에게만
주고 가신 것처럼 느낀단다. 아머님이 생전에 우리 형제들에게 주신  것에다 대면 이 집 한
채는 극히 약소한데도 말이다.

 

왠지 액수로 비교가 되지 않고, 우리는 나눠가졌는데 너는 전부를 가졌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건  일종의 배신감이기도 하단다. 특히 누님이  아버님의 처사를 가장 뼈아파하셔서 한때는

혼절을 하다시피 하셨지. 어째 안 그렇겠니. 아버님이  몸져누우시자 누님이 이 집하고 같은 라인의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하실 정도로 전적으로 아버님 병수발을 책임지셨거든. 출가외인이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그렇지만 며느리가 시아버지 병구완하기는 더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누님이 

희생양이 되기로 작정을 하신거지.


그러기를 자그마치 오년이었어. 아들들은 아들대로 누님한테 빚진 기분이었고.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다들 누님에게 꼼짝을 못한단다. 누님은 이 아파트에 네가 들어와 사는 꼴만은 정
말 못 보시겠다는구나. 그것만은 막아달라시는 걸 어쩌겠니?  누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속
죄로서는 가벼운 편이지. 그렇다고 아버님 유언을 집행 안할 도리도 없구. 그래서 이 아파트
를 우리가 너한테서 사기로 했단다. 알아듣겠느냐?”아란은 못 알아듣겠어서 고개를 저었다.
눈이 마주친 변호사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떡여 보였다.

 

“이 아파트 시세가 작년만 해도 사억오천은 나갔는데, 너도 아이엠에프는 알 테지만, 그놈의 아이엠에프 이후  집값이 뚝 떨어져 삼억오천이라도 살 사람이 없어. 급매물은 삼억짜리도 나와 있다더라.

못 믿겠으면 이따 부동산에 들러보면 알 게다. 이변호사님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계신 분이다. 네 충실한 대리인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게다.


이변호사님하고 우리가 미리 합의한 건데 제반  비용 다 제하고 삼억오천을 너에게  주기로
했다. 제 값 이상을 주고 이 아파트를 우리가 사는 셈이지. 넌 그 돈 가지면 요새 얼마든지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아파트를 살 수도  있고 또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도 금리로 따지자면
아이엠에프 전의 사억오천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을 게다. 알아듣겠니? 이왕 이 집을
너에게 주는 걸 피치 못하게 된 이상 너한테 손해나는 일은 안한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
먹으면 먹었지. 다만 네가 여기 들어와 사는 걸 보기 싫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협상을 하게
된거야. 누님만 이 위층에 사는게  아니라 우리 형제들 대부분이 같은  단지나 근처에 살거
든.”


“그렇게 하시죠.”변호사가 훈수 두듯이 아란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며 서류뭉치를 내놓
았다. 아란은 혼이 빠져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여러 군데에다 도
장을 찍고 또 찍었다. 가끔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적진에서 만난 유일한 내 편과 암호
를 주고받은 것처럼 마음이 놓이곤 했다. 계약금이고 중도금이고 따로 없이 일주일 후에 삼
억오천을 한꺼번에 지불할 테니 그동안에 모든 것을 깨끗이 끝내달라고 정기가  변호사한테
요구했다. 그때 안방 쪽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뛰어나왔다. 아이고
형님, 고정하셔요, 이젠 다 끝난 일이에요. 여자들은 눈부신 백로떼처럼 그 뒤를 따랐다.“이
년 호적도 아주 깨끗이 파 가라. 요 요 요망한 년. 대를 물려 우리 아버지를 홀린 이 백여우
같은 년.”


  이변호사가 황급히 아란을 일으켜 세우더니 등뒤로 감싸주면서 총총히 그 집을  빠져나왔
다. 잠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정기가 따라나와 앞으로의 일에 별 차질이 없을 테니
걱정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이변호사는 아란에게 택시까지  잡아주고 나서 주차장쪽으로 갔
다. 아란은 이변호사가 진혁부씨 칠순잔칫날의 웨이터처럼 느껴졌다. 그 영감님 오래도 살았
지. 정기의 누님이란 이도 아란보기에는 거의 칠십대로 보였다.


  그리고 나서 오늘이 바로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일주일동안  아란은 삼억오천에
대한 현실감이 거의 없이 지냈다. 그런 거액이 정말 나에게로 올까 하는 의구심이나 조바심
같은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 욕심 없이도 지난 일주일은 지옥이었다. 그런 면으로 아란
은 엄마를 쏙 빼닮았달 수도 있었다. 엄마는 횡재나 금시발복을 믿지 않았다. 얘야. 이 세상
에 웬 떡이란 없단다. 그게 바로 엄마의 생활신조였다. 아란은 삼억오천의 횡재보다도  그런
거액을 들여서라도 아란을 자기네 핏줄공동체 안에 들이지 않으려는 그 집 식구들이 무서웠
다. 그들 보기에 나는 어느만큼 더럽고 천하고 불길한 것 일까. 엄마는 왜 날 낳았느냐는 아
란의 포악을 제일 싫어했었다. 그런 엄마가 없는게 천만 다행이었다. 죽은 엄마에게  맹려한
살의를 느꼈다. 아란아, 너는 어느만큼 더럽고  천하고 불길하냐? 첩질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이런 나를 낳은 엄마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죽이고 싶었다.


  정확하게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에  이변호사한테 연락이 왔다. 전번의  아파트가 아니라
정기 회사 사장실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고 이변호사도 동석한 자리에서 천만원짜리 수표 서
른다섯 장을 건네 받은 것이다.  새삼스럽게 정기가 칠순잔칫날의 부친을 연상시켰다.  거의
그만큼 늙어 보이기도 했지만 첫 대면 때와는 다른 낯익음  때문인 듯도 했다. 아란은 저절
로 우러나오는 친근감이 수치스러워서 삼억오천만원어치 수표에 대해서는 짐짓 덤덤하게 굴
었다. 그런 아란이 가소로웠던지 정기씨는 한쪽 입가로만 웃는 이상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동안 네가 집값을 따로 알아보고 다녔는지 말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이만하면 현 시세
로 과히 억울한 값은 아니니라.  이변호사도 기꺼이 동의하셨고. 금리로 따져도  아이엠에프
전 사억오천보다 오히려 더 많이 금리를 챙길 수 있을  게다. 집을 사든지 현금으로 굴리든
지 그건 네 자유다만 네가 원한다면 가장  높은 이자로 안전하게 굴릴 수 있는 금융상품을
알아봐 줄 수도 있다. 한달에 사오백을 나오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게다. 이건 내 생각이
다만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집을 사기보다는 돈을 늘리는 게 좋을 것 같다. 혼잣몸에 한달
에 사오백이면 뭘 하겠니. 보아하니  혼기도 늦은 모양인데 유학도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
아니겠니. 커리어 우먼, 그거 별거 아니다 너. 이  돈을 집보다는 네자신에게 투자해서 당당
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만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  그러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네 자유다.
삼억오천의 원금은 끄떡없이 살아 있고 한달에 사오백이면 그거 너 적은 돈 아니다.”


  삼억오천만원에는 원금처럼 흔들리지 않던 아란의 심지가 한 달의 사오백에 비로소  강한
충격이 왔다. 오싹하고도 기분 좋은 전율과 함께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웬 떡이야말로  엄
마와 나의 숨은 욕망이었던가?
  글쎄 유학을 갈 수도 있다는구나.  아란은 그의 발밑에서 맴돌고 있는  하얀 공에게 말을
시켰다. 그리고 멀리멀리 날려보낼 셈으로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힘이 부쳤는지 공이  시원
치 않았는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공은 충실한 강아지처럼 그녀한테로 되돌아 왔다. 에이,
바보. 아란은 공을 가볍게 원래의 구멍에다 밀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란은 우선 회사에다 전화를 걸어서 들뜬 목소리를 가까스로 억제하고 죽
어가는 목소리로 감기가 심해 며칠 못 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과장은 비
교적 친절한 편이었지만 나중에 친한 동료로부터 받은 전화는 지금이 어느 땐데 그까짓 감
기 정도로 결근을 하느냐고 염려가 대단했다. 진심으로 아란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분명
한데도, 글쎄 말이다, 내가 왜 이런지 몰라, 별안간 귀골이 된 것 처럼 푹쉬고만  싶네, 라고
무성의하게 받아넘겼다. 아란보다 귀가는 늦어도  출근은 이른 미스 김도  다음날 늦게까지
드러누워 있는 아란을 보고 대뜸 언니 잘렸구나 하고 단정을 했다. 아란은 그렇다고도 아니
라고도 안하고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잘린 사람치고 태평한 아란을 보고 미스 김은 부럽다
는 듯이 또 그놈의 천만원짜리 적금 타령을 했다.“언니야, 언니는 돈 좀 모았구나.  좋겠다.
집도 있구, 딸린 식구는 없구. 난 짤리면 안돼. 어떡하든지 천만원짜리 적금 한 꼭지는 타고
나서 짤리든지 그만두든지 할거야. 두고 봐.”

 


  미스 김은 내가 모은 목돈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란은 천만원 근처에서 크
게 벗어나지 못할 미스 김의 빈약한 상상력을 생각하고 연민을 느꼈다.
  그로부터 꼬박 사흘 동안 아란은 삼억오천만원 때문에 먹지  않고도 배부르고, 잠자지 않
아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하룻밤은 붕뜬 기분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다음날부터는
열네 평짜리 집구석에 간수하기엔 너무 버거운 수표다발 때문에  입맛을 잃었다. 입맛뿐 아
니라 돈 생각외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집중력을 잃고 온종일 허둥거렸다. 수표
다발은 가지고 나가기도 겁나고 두고 나가는 것은 더군다나  말도 안되고, 그러자니 지키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골목으로 나가 집을 쳐다봐도 제 값의 몇갑절을 복장에 품고 있
는 집은 표정부터 달라 보여 더럭 겁이 났다. 내눈에도  이렇게 달라 보이는데 전문가 눈에
어찌 안 뛰고 배기랴 싶었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모조리 전문적인 도둑놈처럼 보
였다. 집뿐 아니었다. 아란은 마치 몸에도 황금비늘이 돋아난 것처럼 아주 귀하게도  낯설게
도 느끼고 있었다.


  온종일 수표뭉치를 부피로 만져보다가 장수를 세어보다가,  몇장씩 나누어 간수했다가 함
께 간수했다가, 하루에도 몇번씩 변덕을  부리느라 지칠 대로 지쳐서 딴  일에는 손끝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밤에도 수표를 책갈피에 넣었다가 옷갈피에 넣었다가 자리 밑에 깔았다
가 하느라고 정작 그 돈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삼억오천의 파수꾼 노릇이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거액을 현금으로 바꿔다가 밤새도록 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으니까. 이
렇게 아란이 삼억오천에 적응하기 위해 몸살이 날 정도로 지쳐 있을 때 정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정기도 돈의 안부를 물었다.“아직 주신 상태로 간수하고 있어요. 왜요?”“잘했다. 나
는 그동안 네가 그래도 나한테 의논을 해오리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아무 소리가 없더구나.

 

너도 그동안 쭉 사회생활을 해온 아이니까 세상물정에  어둡지는 않으려니 믿고 있다만
요새는 훌륭하게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이도 눈 뻐언히 뜨고 퇴직금을 날리는 일이 비일비재
니만치 너한테 신경이 안 써질 수가 없구나. 아버님의 뜻도  너도 남부럽지 않게 살도록 해
주는 것이지 일정액을 떼주고 나 몰라라 하라는 건 아닌 줄 안다. 그래 말인데 요새 부동산
은 값이 바닥이긴 하지만 당분간 오를 가망도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금리도 점차
내려갈 추세지만 아직은 고금리야. 우리처럼 사업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지만 예금생활자는
천국이지 뭐. 더 내리기 전에 금리가 그중 높은 금융상품에 투자하도록 해라. 현재로선 그게
최선이다. 마침 잘 아는 투자신탁에서 나한테 예금유치를 하려고  이것저것 구미 당기는 상
품을 권하러 왔길래 네 생각이 나서  전화 거는 건데 네생각은 어떠냐? 전번에도  말했지만
예금 종류를 선택하기 따라서는 한달에 사오백 이자는 거뜬히 보장되겠더라.”


  몇억보다 몇백에 더 구미가 당기고  현실감각이 생기기는 그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
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정기는 투자신탁직원을 집으로 보내주마고 했다. 두어 시간 후 여직
원한테 선물 꾸러미까지 들려가지고 나타난 직원은 보통 직원이 아니라 지점장이었다. 지점
장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기라는 정기의 전화가 다시 한번 걸려왔다. 지점
장은 요새 삼억오천이면 하루 금리도 얼만데 며칠씩이나 장롱 속에 묵혀두었느냐고  아란의
무심한 경제감각을 나무랐다. 그리고 세금우대, 확정금리 육개월 만기, 일년 만기, 다달이 이
자를 찾을 수 있는 예금 등 네 종류로 구분해서 예금하는 게 아란에게 가장 유리할  거라고 말했다.

 

서로 합의가 되자 지점장은 하루라도 이자를 밑지지 않도록 오늘 날짜로 집어 넣겠
다며 보관증을 써주고 나서 보증수표 다발을 인수해갔다. 당장  지금부터 가만히 앉아 있어
도 하루에 십만원 이상이 굴러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홀가분하기는  또 얼마나
홀가분한지. 왜 진작 이렇게 못했을까. 그동안 가만히 앉아서 몇십만원을 손해본 것은 또 얼
마나 바보짓인지. 그러나 정기가 연락할 때까지 그 돈을 가만  놓아둔 것은 잘한 짓이다 싶었다.

 

 정기한테 되바라져 보이지 않고  순진해 보였을 건 확실하니까. 무엇보다도  지점장이
몸소 방문해서 예금을 받아가는 입장이 돼보니 신분상승의 맛이 바로 이거로구나 싶게 황홀
했다. 아란은 지점장이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느긋하게 음미하면서 나른한 만족감에 빠졌다.
  잠깐 낮잠이 들었던가. 들뜬 듯 편치 못한 낮잠에서  깨어나면서 지점장이 집까지 예금을
유치하러 오는 신분은 상류사회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을걸 싶던 허영심이 퍼뜩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지점장이 집까지 찾아와서 예금을 받아가는 일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아닌
가. 내가 무엇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지. 평소에 욕심이라곤 없던 사람도 길에서  네다바이를
당할 때는 잠시 욕심에 눈이 가리어 그리 된다고 들었는데 나야말로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
히 씌었지. 하루의 이자에 눈이 멀다니.  그런 생각이 들자 미칠 것  같았다. 수표를 숨겨둘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느라 잠을 못 이루던 밤의 고통은 여기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기가 설마, 하고 그를 믿게 되다가도 그 집 족속들이라면 능히 줬다 뺏고 나서 용용 죽겠지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 같았다. 그 족속들의 낭자한 조소소리가 환청이 되어 그녀의 귓가에
잉잉거렸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은 잠
깐이었다. 그가 그런 계략을 쓸 까닭이 없다는 생각보다는  계략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훨씬
우세했다. 그러면서도 정기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를 확인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일확천금한 가난뱅이 티를 드러내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점장은 다음날 사람
을 보내거나 자기가 직접 통장을 가져오겠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보는 게 체면에 어긋
나지 않는 행동이라고 자신을 달래가며  겨우겨우 그날 밤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온다고 해도, 그 남자를 못 믿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져온 통장은 과연 믿을 수 있을
까 하는 새로운 의혹이 솟구쳤다. 다시는 그런 바보짓을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아란은  떨리는 마음으로 지점장 명함이 있는 전화번호를 돌렸다. 꼭 엉뚱한 데가 나오든지,  사용하지
않는 전화번호라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점장하고  곧바로 연결이 되자 아
란은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오실  것 없다고, 마침 그 근처로 나갈 일이  생겼으니
그리로 들르겠노라고 했다. 도심에 자리잡은 지점 건물은 장중하고 으리으리했다. 안에 들어
가자마자 귀빈처럼 정중하게 지점장실로 안내된 아란은 푹신한 소파에 다리 꼬고 앉아서 향
기로운 녹차를 대접 받았다. 여직원이 아란의 통장을 지점장실까지 자지고 왔고, 아란은  그
것을 건네받기 전에 예금 종류에 따라 약간씩 다른 이율과 이점과 특징에 대한 자상한 보충
설명을 지점장으로부터 다시 한번 들었다. 곧 유학  가신다면서요? 마지막으로 지점장은 눈
웃음을 치면서 아란에게 물었고 현관까지 배웅해주었다.


  아란은 귀빈 대우에 어울리도록 우아하고 품위있게 걸어나오다가 뒤돌아서서 한참 그  건
물을 쳐다보았다. 저 웅장한 건물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는  한 내가 거머쥔 삼억오천은
요지부동이였다. 악몽이 사라지자 세상은 아름다웠다. 아란은 깨끗하고 반듯한 건물만  모여
있는 거리를 이방인처럼 달착지근한 향수에 젖어 유유히 거닐다가 그럴듯한 찻집에  들어가
랩을 들으면서 비 오는 날은 일 나가지 않고 샹송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바보같은 엄마,
별난 파출부를 생각했다. 지금도 거금을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인데 거짓말처럼 불안은 사라
지고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렀다고나 할까, 면역성이  확
실한 열병을 앓고 났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시는 그렇게 못나빠진 불안증에 걸리는 일은 없
을 것 같았다. 따개비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살던 세상에서  어느만큼 거리를 두고 바라
보는 맛을 여유있게 즐기고 나서 아란은 집으로 향했다. 너절한 동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
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여유를  두고 바라보니 영화 세트처럼 재미가  쏠쏠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돈이라는 윤활유가 넉넉해지면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을.


  조각공원이 보이자 아직도 구멍 속에 갇혀 있을 공 생각이  났다. 초원을 구르는 맛을 안
공을 구멍 속에 처박아두는 것은 못할 짓이다. 불쌍한 나의 공, 아란은 동네로 가지 않고 곧
장 조각공원 쪽으로 갔다. 구멍  속에 처박힌 공을 꺼내 저만치  자유롭게 굴려주려다 말고
살살 발끝으로 희롱을 하기 시작했다. 속이 근질근질하면서 탄산수처럼 상쾌한 즐거움이 복
받쳤다. 집에 가면 우선 헌이한테 전화부터 걸어야지. 헌이하고 잔 게 얼마 만인지. 어서 헌
이하고 자고 싶었다. 헌이 자기한테 시키던 온갖 굴욕적이고  야비한 짓거리를 그에게 시켜
가며 데리고 놀고 싶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주도권이란 이렇게 간단히 뒤바뀔 수도 있
는 것을. 그의 비리비리한 팔뚝을 담뱃불로 지질 수도, 그로 하여금 방바닥을 기게 할 수도,
개처럼 헐떡이며 온몸을 핥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란은 혼자서 미친 듯이 킬킬거렸다.

 


  헌하고 급하게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꿈은 더이상
일편단심 개천에서 용 나기를 기다리다가 기어코  개천에서 난 용의 조강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아니라도 개천에서 용 날 꿈에 매달려 사는 너의 여덟 식구만 해도 너에
게는 버거운 악몽일 테니 나는 이제 개천바라기에서는 빠지겠노라고. 그렇더라도 헌의 쓸모
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용은  아니라도 필요에 따라 기둥서방을 삼을 수도,  싫증나면
헌신짝처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훗날 헌신짝처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 두려
워해야 할 이는 이제 내가 아니라 헌이  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네가
아니라 나다. 여태껏 모든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주도권은 항상 가진
자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쯤은 너도 알 것이다.


  아란이 지금 발끝으로 살살 굴리고 있는 것은 공이 아니라 헌이었다. 자신을 공과 동일시
할 때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었다. 힘을 모아 힘껏 걷어차보았다. 공은 한참 날아가 땅에 떨
어지자마자 감쪽같이 없어져버렸다. ‘존재의 아픔’언저리였다. 나쁘지 않은걸, 이런 게 홀
인원이라는 건가? 아란은 들은풍월로  중얼거리고는, 그러나 공을 구멍에서  꺼내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은 이렇게 진씨집과 화해를 하게 될 줄이야. 돈독인지  돈힘인지를 맛보고 나서야 진
씨집에서 여태껏 당한 것을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에게 아란은 문득 비애를 느꼈
다. 도시 한가운데서도 문득 지난날의 향수처럼 풀이나 거름냄새 같은 게 코끝을 스쳐갈 때
가 있듯이, 잡힐 듯 말 듯 모호하고도 생뚱스러운 비애였다.
(당대비평 1998년 여름호)

 


  
    J-1 비자
  선생질이 날로 고달파지고 있었다. 파김치가 되어 퇴근한 그를  아내는 늘 조심스럽게 대
했지만, 오늘은 그 조심성이 지나쳐 눈치꾸러기처럼 굴고 있다는 걸, 그는 피곤하고  피곤한
가운데도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저녁 밥상을  치우다 말고였다. 그가
저녁밥을 달게 먹고 충분히 생기를 회복했다는 싶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동민이 결혼날짜 잡았대요. 팔월 초나흘루다요. 팔월이면 그쪽도  한창 더울 때 아녜요.
왜 하필 복중이냐고 했더니 당신이 참석하려면 암만해도 여름방학이라야 할 것 같아서 신부
쪽에선 오월에 하고 싶어하는 걸 우리 쪽에서 그렇게 하자고 우겼대나봐요. 뭐든지 당신 형
편에 맞추고 싶어하는 건 우리  엄마 아빠의 못 말리는 버릇이잖아요.  그렇지만 너무 부담
느낄 건 없어요.”


  될 수 있으면 지나가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싶은  듯, 아내는 고무장갑을 낀 채
말하고 나서 돌아서서 하던 설거지를 계속했다. 동민은 막내처남이고, 처가는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낸 후 온 가족이 이민을 가 캘리포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별로 폐 끼칠 일 아닌
것 가지고도 친정일이라면 우선 저자세로 나오는 아내가 안쓰러워,  그는 짐짓 흔쾌하게 말
했다. “잘됐네. 오래간만에 쐬는 바깥바람인데 우리 느긋하게 다녀옵시다. 아이들도 데리고
가지 뭐. 장모님도  사위보다는 손자들이 더  보고 싶어 여름방학으로  정하셨을걸, 아마.”
“정말이에요, 당신? 미국 대사한테 사과 안 받고 미국 가도 괜찮겠어요?”


  아내가 고무장갑을 부랴부랴 벗어놓으면서 심각하게 물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아차, 싶으면서 아내가 여지껏 왜 그렇게 석연치 않게 굴었는지 알아
차렸다. 아내라고 그가 정말로 미국 대사로부터 사과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고 기다린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반색을 하면서도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아내가 안 잊어
버린 걸 그는 깜박 잊고 있었다니. 거기에 대해 아내가 실망하고 있다면 그는 마땅히 그 자
신에게 실망해야 했다. 아내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끌어들인 입회인이었을 뿐 그건 어디까지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는 마치 아내보다 훨씬 못생긴 여자와 정열없는 오입을 하다 들
킨 것처럼 아내에게는 화가 나고  자신에게는 정이 떨어졌다. 엉망으로 고약한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지지리 못나게도‘무시당해 싸다니까, 우리 민족은’하고 그의 건망증, 그가  당한
모욕을 민족성에다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이창구 선생이 김혜숙의 전화를 받은  건 재작년 삼월 중순이었다. 학교  교무실에서였다.
그때 그는 가르치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의 생각의 버릇일 뿐 최
근에 특별히 어려운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선생님, 이창구 선생님  맞죠?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23회 김혜숙이에요.”상냥하고 상쾌한 목소리였다.“자네가 웬일인가?”
  그는 어정쩡하게 아는 척을 했지만 특정한 얼굴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사립인  B
여자고등학교에서만 이십년을 넘어 국어 선생 노릇을 해왔고 그동안 그 학교를 거쳐간 졸업
생 중 김혜숙이란 이름을 꼽자면 몇십명은 좋이 될 것이다. 김혜숙도 그의 흐릿한 대꾸에서
그런 걸 느낀 것 같다.


  “여기 미국이에요. LA요. 유학 떠나오기 전에도 학교로 인사 갔었는데... 23회 졸업식 때
전체수석 해서 이사장상 받은 김혜숙이라구요.” 생각나다마다. 김혜숙은 그가 담임 맡은 반
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본  수석졸업생이었다. 집안 반듯하고,  용모 깔끔하고, 타고난
머리도 우수한데다 좀 융통성 없는 공부벌레이기도 해 서울대학에  무난히 합격을 했다.

 

 담임이 특별히 공들이거나 신경쓸 필요가 없는 모범생이었다. 김혜숙이 누구라는 게 분명해지
자 그는 반갑다는 생각보다도 쏜살같이 23회 졸업식 무렵이 떠올라 께름칙한 부끄러움을 느
꼈다. 그때 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교장선생을 비롯한 교직원 일동이 입을 모아  한턱내라
고 난리들을 쳤다. 전체 수석을 낸  반 담임은 으레 그렇게 하기로 돼  있는데 이번 수석은
서울대학까지 붙었으니 내도 거하게 내야 된다는 것이었다.  고3담임은 처음 맡아봤지만 그
거 비슷한 턱은 해마다 얻어먹어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수준으로 내야 하는지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이 학교는 워낙 회식이 잦았다. 심지어는 여선생이 새로 산 옷을  입고
와도 잘 어울린다, 얼마짜리 어디 젠가, 한바탕 요란을 떨고 나서 누가 착복식 하라고  조르
면 구내식당에서 먹는 점심에 불고기가 얹혀 나오기도 했다. 

 

식당 아줌마한테 고깃값을 얹어주면 그 정도는 봉사를 해준다고  했다. 그도 그 정도의 한턱을 

쓸까 하다가 겹경사니까 거하게 내야 된다는 열화 같은 요청이  마음에 걸려 조촐한 대중음식점에서

갈비로  하기로 했다. 초대할 때부터 선생들은 호텔 뷔페가 아닌 걸  이상해하는 눈치더니 갈비를

뜯으면서 한턱을 내는 주체가 김혜숙의 부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는 갈비맛이 뚝 떨어지는 얼굴
로 일제히 그를 바보취급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처럼 분개하는 선생도  있었고,
있는 집이나 공부 잘하는 아이 둔 학부모는 이러저러하게 길들여야 한다는 훈계를 하려 드
는 이도 있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맹렬히 씹히고 있는 건 갈비가 아니라 그였다. 그는 죄지
은 것처럼 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또한 그런 집단의 일원이라는 게 부끄
러워 마음이 화끈거렸다.


  그가 교직에 몸담게 된 것은 교육에 대한 남다른 이상이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단지 생계
유지 수단만도 아니었다. 그는 격렬한  데모와 휴교가 반복되던 칠십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비록 검거되거나 제적당한 적은 없어도 운동권 노래를 목이 쉬어터지게 부르면서 의롭지 못
한 권력을 규탄할 때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용기가 없다고 해야 할지, 겁이 많다고 해야 할
지 운동권에 진한 동류의식을 느끼면서도 붙들려 들어갈 만큼 적극적으로 투신하지도  못한
주제에 대학 다니는 동안 내내 관심은  그쪽에 가 있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을 것
같던 동지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의기도  결국은 일과성 정열로 끝나버렸지만 극히  일부는
위장취업까지 하면서 민중 사이로 파고 들었다. 그는 그 나중 소수가 취한 언행일치가 존경
스럽기도 하고, 그 과장된 몸짓이 못 미덥기도 했다. 그는 그런 어정쩡한 생각에 알맞은  진
로를 택했다. 한몸 바쳐 민중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민중으로 살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고 생각했다. 교직을 대학교육을 받은  먹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민중적 삶이라고 생각한
것은, 주로 여학생들이나 듣는 교직과목을 선택하면서 의식하게 된, 안됐다 쩨쩨하다는 식의
주의의 경멸과 실망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교단에 처음 선 날 얻어갖게 된 별명은 계집애였다. 남자로서는 곱살한 편인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얻다 둘지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여학생들은 총각선생이 즈네들한테 부
끄럼을 탄다고 여겼나보다.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젊고 괜찮은 남자를 손아귀에  쥐고
가지고 놀고 싶다는 숨은 욕망이 표적을 찾았다 싶은 득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에 의하면 여학생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미처 폭발하지 못한 자유에 대한 미련과, 어
쩌자고 교단에 서자마자 분명해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낭패감 때문에 그렇게 얼굴이  달아
올랐던 것이다. 계집애라는 별명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곧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
하고 재미없는 선생으로 변해버렸고, 그보다 먼저 총각딱지도 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툭하면 계집애처럼 자신이 없어져 망설이고 수줍어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다만 얼굴을 붉히
지 않는다뿐이었다. 얼굴 대신 마음이 얼마나 화끈거리는지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었다.  결
국은 시대와의 충돌을 피해 여기 이렇게 안전지대에 서 있구나 싶은 자격지심은 낯짝보다는
마음을 붉히게 했다.


  “오랜만이군. 무슨 일인가?”그는 LA 아니라 달나라라고 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은
시들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을 초청하고 싶어서요. 5월 26일 전후해서  어떠
세요?”“고맙긴 하지만 나 미국 구경 실컷 했네. 아이들 외가가 다들 그쪽에 살거든.”“관
광 오시라는 게 아니라요, 제가 몸담고 있는 C대학 동아시아학과 세미나에 정식으로 선생님
을 초청하려구요. 벌써 삼년째 매년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 한국 일본 중국의 경우’란 주
제로 해당국가 작가를 초청하는 모임을 가져왔는데 올해는 한국의 경우고, 제가 주제발표를
하게 돼 있어요.”“날더러 그걸 참관하러  오라는 소리인가?”“설마요. 제 논문이  선생님
소설「삿갓재 마을」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식민지시대를 분석한  거거든요. 제가 얼마나 열
렬한 선생님 소설의 애독자이자 성실한  연구자인지 모르셨죠?” “그래서?” 그가 듣기에
도 그의 목소리는 울컥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제자나 심지어는  제 자식한테도 헐렁하고 무
심한 편이어서 무책임하다는 소리까지 듣는 반면 그의 문학에 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과잉보호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생님,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꼭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추궁받는 것 같
잖아요. 그건 그렇구 빨리 본론을 말씀드리자면요, 선생님을  원작자로 초청하는 거죠. 우리
연구모임 참석자들에게 「삿갓재 마을」의 영어번역판을 미리 돌려서 기본 지식을 갖게  하
고 제 논문의 요약본도 보내서 그날 토론의 발제문으로  사용할 계획이에요. 당일의 진행순
서는 아마 선생님 소개가 있은 뒤, 물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서가 아니라 작가 이창구로서
소개되고 나서 제가 발제를 하고 토론이 시작될 텐데, 제 글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은  뒤에,
참석자들로부터 선생님께 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 같아요. 이 단계에서 제가 할 일은 토론의
제를 솎아내는 것과 토론과정에서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이 과정을 매끄럽
게 하기 위해서는 대략이라도 제가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어느정도
미리 인지하고 있어야 그때그때 통역이  제대로 될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그 문제의 대해
이삼십분 분량의 말씀거리를 미리 준비해 오시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면 또 번역이 문제인데, 선생님께서 미리 초안을 주시든지 하루이틀 먼저  오셔서 저하고 충분히

말을 맞추시든지...전 정말 잘하고 싶어요. 미국 내에서도 특히 캘리포니아 쪽에서 동아시아 문
화의 관심들이 많아서 연구자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거든요.”“그럼 간혹 영역하지 않은
내 소설을 우리말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친구도 있겠구만.” “아뇨. 아직 그 정도는  아녜
요. 약간 알아듣는 친구도 있긴 하지만... 통역문제는 염려 마세요. 제가 잘할 자신 있으니까
요.”“「삿갓재 마을」의 영역본이라는 것도 자네가 만든 건가.”“아니지요, 그건. 그럴 필
요가 없었으니까요. 헬렌 강이 한국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번역해서 이쪽 출판사에서 낸 한국
문화단편선집에 그 작품이 포함돼 있잖아요. 혹시 선생님  모르고 계셨어요?” “헬렌 강인
가 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네. 자네 보기엔 믿을 만한 번역가인가?”“그러문요.  일급이에
요. 국민학교 다닐 때 이민왔다는데  할머니가 계셔서인지 토속적인 우리말도  잘 알아듣고
영어야 물론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이구요. 결혼도 미국사람하고 했으니까요. 제 나이 또랜데
도 한국문학을 영어권에 알리는 데 사명감도 있고 야심도 만만찮은 여간 똑똑한 사람 아니
에요.”


  그는 거기까지 듣고 나서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주면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성마르게  대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헬렌 강의 번역본을 사용한다는 소리에  울컥 화가 치밀어 그렇게
조급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에 대해 알기로는 이십년 근속의 평범한 교사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소설가로서
는 성공한 건지 실패한 건지, 잘 나가는 편인지 못 나가는 편인지, 남이 알아주는지 안 알아
주는지,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못 읽을 정도로  두 가
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는 젬병이었다. 그런 자신의 주제를 잘 안
다고 여기면서도 둘 다 결코 쉽다고 할 수 없는  교사와 문사를 겸직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그렇게 공부 안하고 어떻게 졸업을 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공부 안하고 대
학을 나왔건 만도 그때 배운 걸 밑천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데, 공부보다 훨씬 많은 시간
과 열정을 투자한 이념을 완전히 외면한다면 그건 너무 의리 없는 짓 같아서가 아니었을까.


요컨대 자신에게 정떨어지기가 싫었던 것이다. 교직과 작가는 그의 생계와 자존심을 떠받쳐
주는 양쪽 기둥이었다. 자기 확인을 위해서도 일년에 한두  편 정도의 중단편은 어떡하든지
써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시간을 쪼개는 것보다도 교사에서 작가로 완벽하게  변신하지
않으면 한 자도 안 써지는 게 문제였다. 자연히 방학 때 아니면 못 쓰는데 변신하는 동안도
수월찮게 걸리거니와 그 동안은 안절부절 성마르게 구는 게 그의 못 말리는 버릇이었다. 학
교에선 그런 일이 없었는데 지금 느닷없이 그 증이 도진 자신이 내심 당혹스러웠다. 오월이
면 학기 중인데 왜 그렇게 쉽게 승낙을 했는지 금방 후회가 되면서도 어떡하든지 참석을 해
야 할 것 같았다. 김혜숙이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간곡하게 군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마 헬렌 강 때문이었을 것이다. 헬렌  강을 만난 적은 없지만 한두 번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번역을 하면서 미심쩍은 대목을 원작자한테 직접 묻는  태도는 칭찬을 해줄 일일지
언정 나무랄 일은 못 됐다. 그러나 오독하기 쉬운 문장이나  작가의 의도가 애매한 은유 따
위에 대해 의견교환을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사전만 찾아도 단박 알 수 있는 ‘서까래’
나 ‘무리꾸럭’따위 순 우리말의 뜻을 묻는 걸 친절하게 대답해주기란 참을성을 요하는 일
이었다. 헬렌 강의 질문이 정신대가 무슨 뜻이냐에 이르러 드디어 그는 말문이 막혔다. 사전
적인 해석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정신대가 무언지 모르면서  그 작품을 번역하고 싶어한
번역자라면 그녀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이건 아니올시다 싶었다.


  정신대 가서 어떤 일을 당했다는 건 작중에 한마디도 안 나오지만 일제 말기의 궁핍한 농
촌의 암울하고 희망없는 분위기가 작품의  바탕색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찢어지게 가난한 친정부모에 의해  팔아 넘겨 지다시피 전실 자식이  주줄이
달린 삼십대 홀아비한테 시집가 내리 삼남매를 낳고  나서 겨우 스물 세살 적인 육이오 때
과부가 되었다. 친정부모가 딸한테 그런 못할 노릇을 하고도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핑계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없는 사람이 딸자식 정신대 안 내보내려니 그 길밖에 없었다는 것이
었다.


  그는 해방 후에 태어났으니까 식민지시대에 대해 어렴풋한 기억도  없지만, 그 시대의 가
장 억울한 희생자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 어머니의 맺힌 한이 고스란히 옮아 붙기를 바라서
였을까, 온몸을 원고지에 피나게 비비듯이 쓴 작품이었다. 그렇게 겉핥기로 읽히길 원치  않
았다. 영어 좀 한다고 우리말 모르는 것에 대해선 전혀 위축되지 않는 헬렌 강의 당돌한 태
도보다도 더 한심한 건 그걸 끝까지 참아낸 자신의 참을성이었다. 한두 작품 번역된다는 걸
로 그이 문학이 변방의 언어를 벗어나 세계화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영어 잘하는 사람 앞에서 그가 버릇처럼 느껴온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그 어느 쪽이라 해도
마음이 화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영어실력이 요즈음의 고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건, 국문과를 나온 것 말고도 허
구한 날 데모와 휴교로 지새던 칠십년대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거
기에 대해 은근히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소설가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작가 대접을
받게 되고 소속된 문한단체까지 한두 개  생기게 되자 해외에서 하는 문학세미나에  참석할
기회도 자비라면 어렵지 않게 주어졌다. 처음에 그는 관광이  아닌 문화교류를 위해 출국한
다는데 우쭐우쭐 작가가 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번족할 뿐 아니라 우애가 유난스러운 처
갓집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맏사위의 자격으로 초청을 받게 되어 세 번에 한 번  꼴로
만 출국을 한다 해도 김포공항 출입에 이골이 난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여행과의 차별성이
그렇게 대견했는지도 모른다. 아내도 친정에서 비행기표를  보내주는 여행보다 빠듯한 살림
에서 여비를 쪼개 내야 하는 그의  버젓한 해외나들이를 오히려 신나하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해외모임에 한두 번 참석해보는 사이에  가족이나 학교 동료들에게 그럴듯
하게 보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외국 작가들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펴거나 주목받을 만한 발언을 할 수 있길 바란 건  아니
었다. 그는 소심할 뿐 아니라 타고난 성품이 워낙 비사교적이었기 때문에 그 떠듬거리는 영
어로 누구와 친교를 나눌 엄두도 못 냈다. 그는 그저  언어와 생김새가 다른 동업자들이 하
는 짓을 구경하고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나 느끼고 싶었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학에 대해
은밀히 품고 있는 촌스럽다는 자격지심과도 무관하기 않은, 열린  세상과의 그 나름의 소통
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문화적인 바람쐬기 정도의 바람마저도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느끼고 돌아와야 했다. 그건 그가 국제공통어를 익히지 못해서도 주제발표나 토론에
참가할 기회가 한번도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 답답함하고는  종류가 다른 괴상한 느
낌이었다. 아무리 떼거리로 몰려가 많은 자리를 차지해도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소속감이 느껴지지 않은 건 어쩌면  그만의 느낌인지도 몰랐다. 영어에  능통한 원로문인이
외국인에게 통역을 시키고 자신은 당당하게 우리말로 주제발표를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
데 격앙된 어조로 우리도 적어도 십년  안에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들으면서 온몸에 닭살이 돋아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만의 느낌이었을 뿐 딴  참석자들은, 외국인들까지도 그의 논지에  공감과 존경을 표하는
것 같았다. 그만의 느낌, 그게 문제였다.


  그가 예전에 본 영화 중에서 다만 한마디 대사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다. 유럽
사회에서 유럽인처럼 살고 있는 유대인이 진정으로 그 사회에 끼여든 건 아니라는 걸 이렇
게 술회하고 있었다. ‘냇물까지 갈 수는 있지만 그 물을 마실 수는 없다’고. 그  한마디는
영어권뿐 아니라 백인들의 언어권에서 그가 느낀 생전 끼워줄 것 같지 않은 느낌과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지. 그래서 잊혀지지 않을 뿐 그  영화의 주제와는 아무런 상
관 없는 소리였을 수도 있다. 그 영화 자체도 아마 보고 나서 당장 잊어버려도 그만인 허섭
스레기였는지도 모른다. 줄거리는 물론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재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
차 생각나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그 소리만 걸려든 것은 아마 그만이 가지고 있는 안테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만의 느낌이란 그런 것이었다. 남들이 당
연하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합류하는 일에 혼자서 망설이고 쭈뼛쭈뼛 수줍음을 타게  만드는
자기만의 느낌 때문에 처세가 변변치  못하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들이 그의
외양을 보고 그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닌 이창구라는  걸 알아보듯이, 혼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신 속에 그런 과민성은 그가 남과 다르다는 걸 스스로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정신
의 증후였다.


  자신이 그렇게도 변변치 못한 위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김혜숙의 초청을 선뜻 수락하고 만
것은 김혜숙이 의지가 될 것 같아서도, 그쪽 모임을 자신의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라도 참가
하고 싶을 만큼 대단하게 여겨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학원생들의 스터디그룹 정도의 모임
이려지 싶어 성에 차지 않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건 나중에 차차 하게 된 추측이고 당장 그
렇게 성마르게 군 것은 순전히  헬렌 강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아무리 줄거리를 제대로
옮겨 놨다 해도 거기 배어 있는 느낌을 그녀가 제대로  파악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우리말
의 행간 말고는 딴 어떤  언어에도 스며들 수 없는 정서적  호소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필 그런 작품을 번역하겠다고 나선 것은 헬렌 강의 안목 없음, 문학성의 결여라고 생각했
다. 양쪽 언어에 능통하다는 거  하나만 믿고 스스로 감동하지 않은  작품을 번역하는 것은
원작에 대한 모독을 지나 죽임인 것만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비록 바늘구멍만한 통로를
통해서라도 그가 피나게 불어넣은 생명력을  표출하고 해명하고 싶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런 애정과 의무가 그의 창피하도록 옹졸한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가 김혜숙의 전화통화와는 따로 C대학으로부터  서신을 받은 건 4월 30일이었다.  도나
화이트라는 그 연구소 책임자 명의로 된 서신은 4월 18일부로 작성된 거였고, 다행스럽게도
공문이라는 게 원래 그렇겠지만, 고 1 정도의 그이 영어실력으로도 해독에 불편함이 없었다.
C대학 인문학회의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 한국 일본 중국의 경우’ 연구모임을  대신해서
그를 초청하게 됐다는 인사말과 함께 일정과 조건 등이  명시돼 있었다. 왕복여비와 체재비
와는 따로 500불의 사례금도 지급된다고  했다. 흥, 500불 벌러 미국까지  오란 말야, 뭐야?
그는 아내 앞에서 이렇게 코방귀를 뀌었지만 그건 500불 소리가 나왔으니까 비로소 부릴 수
있는 호기였다. 남들은 어떤 조건으로 초청을 받는지 알아본 바는 없지만 사례비는 그의 예
상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여비와 체재비 정도야 주겠거니 하면서도 그게 초청에 응할까 말
까를 결정하는 전제조건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가고 싶다기보다는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500불은 많지는 않지만 싫지 않은 덤이었다.  봉투 안에는 그런 편지와 함께
이쪽의 생년월일 등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입해야 하는 서류가 동봉돼  있었다. 그는 J-1 비
자로 미국에 입국해야 하고, 그 비자를 내기 위한 서류는 그를 초청한 대학측에서 이쪽으로
보내줘야 하는데 거기 기입할 거니까 빠른 시일 안에 팩스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때 이쪽
의 여행일정과 신용카드 번호도 함께 가르쳐  주면 호텔이나 교통편을 예약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했다.


  팩스 보내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뭐니 뭐니 해도 교장한테 사정을 말하고 허락을 얻는  일
이었다. 학기중에 외국을 나가보긴 처음이었다.  다행히 담임을 안 맡았으니까 수업만  누가
대신해주면 아이들한테 큰 지장을 주지 않고도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청장의 문맥
으로 봐서 미팅날인 5월 26일을 전후해서  관광계획을 짜도 될 것 같았지만 동부면  모를까
여러번 가본 캘리포니아 쪽에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눈치로 봐
서 거기까지 갔다가 처가 쪽 식구를 한 명도 안 만나고 온다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  회의
가 끝나고 장인 장모한테 들러 하룻밤 정도 자고 오려면 5박 6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대강 이렇게 대체적인 일정을 잡고 있는데 김혜숙한테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C대학뿐
아니라 L대학, I대학 등 딴 대학들의 동아시아  연구모임에서도 그와 미팅을 가지고 싶어하
니 시간을 할애해달라는 거였다. 연이어 일면식도 없는 시인이 그쪽 문학단체의 총무라면서
김혜숙과는 따로 그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C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으셨다면서요? 아유, 반갑습니다.  저희 재미 서부지역 문인회
에서도 국내의 저명한 문인들을 초청해서 대화도  나누고 교류도 하고 싶은데 워낙  재정적
기반이 영세하다 보니 단독으로 초청할 엄두를 못 내던 차에 그 소식 듣고 속된 말로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이렇게 전화 올립니다. 이쪽에도 선생님 독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 문인
회에 꼭 모시고 싶으니 거절하지 마시고 시간 좀  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일정이 빡빡하
신 거 감안해서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간담회 형식으로 할 테니 부담 느끼시지 않아도 될  겁
니다. 우리 회원 중 LA판 한국어신문 기자도 있거든요.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따로 벼르고
있으니 기자회견도 거절하지 마시고요.”

 


  조금 지나치다 싶게 공손하면서도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충분히 강압적 어투였다. 그
가 초대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어리벙벙하기도 하고 내가 어느새 그렇게 유명해
졌나 하고 우쭐해질 것도 같았다. 내가 나인 거 맞아? 하면서 스스로에게 농이라도 걸고 싶
은 기분이었다.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느라 처가에서 하룻밤도 묵지 못하고 가까스
로 식사나 한끼 하고 돌아올  생각을 해도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처가로부터
무시당한 적도 없건만 처가 식구들이 다시 봐줄  게 틀림없다 싶은 게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김혜숙도 하루는 모시고 꼭 관광을 하고 싶다기에 그 또한 거절하기 박절하여 일정
에 넣다보니 7박 8일도 빠듯할 것 같았다. 중간에 일요일이 하루 끼는 걸 감안해도 꼬박 일
주일을 결근하게 일정을 세우고 팩스를 넣기 전에 교장한테  허락을 맡으러 들어갔다.

 

교장은 신춘문예에 삼년 계속 떨어진 경험을 지금도 자랑하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자칭 문화애
호가였지만 그의 글을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관심은 있는 척했다. 그가  교
장실에 들어갔을 때도 대뜸, “이선생 왜 요새는 글 안 써요?  그 어려운 등단을 했으면 꾸
준히 발표를 해야지 문학상도 차례가 올 거 아녜요?”교장은 크고 작은 문학상 수상자가 발
표될 때마다 버릇처럼 이창구의 이름이 빠져 있는 걸  서운해하더니 이번에도 그 소리였다.
그는 못 들은 척 넘어가려다 부탁을 부드럽게 하려고 공손하게 말했다.“상은 못 타도 열심
히 쓰고는 있습니다. 지난달에도 중편을 한편 문예지에 발표한걸요.”“원 이선생은, 글쓰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정이 없이 메말랐어요? 나 같으면 잡지에 자기 글이 실리면 돈 아끼
지 않고 여러 권 사서 교장실에도 갖다 놓고  교무실에도 돌리겠어요. 아이들한테는 사보라
고 선전도 하구요. 내가 공짜를 좋아해서  이러는 거 아녜요. 요새는 자기 피알  시대라잖아
요. 나 듣기로는 문학상이 그렇게 많다는데 아직도 우리 이선생한테  한 개도 안 돌아온 것
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피알을 할 줄 몰라 그런 것 같아요. 아니면 비싸게 굴어서 밉
보였던지, 학교에서처럼 말예요.”“비싸게 굴다니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이  없어서
누가 내 소설 보았댈까봐 겁을 내는 편인걸요.”“그럼 뭣하러 등단을 하며 발표를 합니까?
말도 안되지.”


  그는 문제를 더 길게 논해봤댔자 이로울 게 없을 것 같아서 덮어놓고 죄송하다는 사과부
터 하고는 본론으로 들어가 C대학 인문학회로부터의 초청  건을 얘기하고 학기중이지만 수
업에 지장이 없도록 기한을 최소한으로  짧게 잡았으니 선처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이선생 작품이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이 말 아녜요? 번역은 또 언제
그렇게 됐나? 아까 자기 피알  못한다고 구박한 거 취소예요.  이왕이면 노벨상을 노리겠다
이거죠?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야심이 장하고 부러워요. 잘했어요. 아주 잘했어요.”


  다혈질의 교장이 부리부리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흥분을 하자 그는 밖
에서 누가 듣고 깔깔대는 것만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먼저 김혜숙의 초청이라는 걸 밝힐
걸 잘못했다 싶었다. “선생님 고정하세요. 노벨상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그게 아니라요.  김
혜숙 있잖습니까? 23회 전체수석  김혜숙 생각나시죠?”“생각나다마다요. 우리  학교 생긴
이래 최고 수재 김혜숙을 내가 잊어버릴 리가 있나요.”교장의  말투는 요새 유행하는 티브
이 코미디 풍의 허풍을 고스란히 닮고 있어 그는 실소를 머금고 김혜숙이 지금 미국서 뭐하
고 있으며 어찌하여 그를 초청하게 됐는지 되도록 간략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교장은 김혜숙과 그를 한데 묶어 그의 흥분을 더욱 상승시키고  싶어했다.“김혜숙 그 녀석

서울대학에 척하니 합격을 해서 모교를 빛내주더니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한국문학을 빛내려고  제
일 먼저 스승의 문학을 세계무대에 올려놓고 원작자를 초청까지 하다니, 아이구 신통한  것,
이럴 때 선생 노릇하는 보람과 글쓰는 보람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이 선생
은 참 복도 많구려.”


  또 한바탕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도  부족해 교장은 일본의 누구누구도  좋은 번역자를
만나 비로소 노벨상을 받게 된 것처럼 김혜숙과 이창구도 그런 콤비가 되지 말란 법 있느냐
고, 끝내 노벨상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다. 교장은 다음날 직원 조회시간에도 일동에게 널리
알릴 일이 있다면서 또 그 얘기를 꺼냈다. 다행히 모교를  빛낸 훌륭한 졸업생 김혜숙의 칭
찬과 선전으로 시간이 다 가버려서, 이창구 문학의 세계화 작업은  운도 떼기 전에 수업 시
작 벨이 울렸다. 수업시간 지키는 데는 칼 같은 게 교장의 좋은 점이었다. 그런 교장에게 만
일 그런 즐거운 착각이 없었다면, 학기중에 일주일 이상 수업을 빼먹는 일을 허락받기가 그
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순조로웠는데도 J-1 비자를 내기  위한 서류에 기입할 인적사항과 여행일정
을 팩스로 보낸 것은 도나 화이트의 서신을 받고 나서 이틀이 지난 5월 2일이었다. 숙소 예
약만 그 쪽에 부탁하고 비행기표는 그가 사고 영수증만 가져가기로 했다. 그가 관심을 가지
고 봐서 그런지 그해 그 무렵  신문지상에는 미대사관에 비자 신청이 쇄도하여  신청자들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자주 눈에 띄었다. 대사관 앞에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신
청자 사진까지 나오면서, 이렇게  오래 기다린 인터뷰를 무난히  통과해도 비자가 발급되는
데는 한달 이상 걸린다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지금이  바로 여름방학에 출국하려는 유학생이나 관광객들이 비자를 내기에 적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꺼번에 몰리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대사관에서는 비자 발급 능력을 전혀 늘리려 들지 않는다는 불평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건 이쪽 사정이고 미국 대사관이 그런 소리에 어디  꿈쩍이나 할 데인가.

그가 처음 방문비자를 내려고 미대사관 앞에 줄섰을 때의 굴욕감이 생각나 아는 여행사에다 전화를 걸
어 J-1 비자를 내는 데는 얼마나 걸리나 알아보았다. 전에는 이 삼일이면 됐는데 요새는 일
주일 이상 걸린다고 했다.  그의 방문비자의 유효기간은 아직 이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J-1 비자가 빨리 안 나오면 방문비자로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쪽에서 보낸 편
지를 거의 이주일 후에나 받아본 생각이 나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김혜숙은 자주 전화도
걸어오고, 그날 발표할 논문을 한국어로 요약해 팩스로 보내오기도  해 그를 귀찮게 했지만
잘하려고 그럴 뿐 아니라 그에게 충분한 준비를 시키려고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암만해도 J-1  비자를 내기 위한 서류가  도착하는 시기와 발급받는
데 소요되는 시일이 넉넉할 것 같지 않아 조바심이 나서 그녀의 논문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되지 않고 뒤숭숭하기만 했다. 그는 뭔가 엉키는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 실무자인 도나 화
이트 앞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팩스를 보냈다.


  -당신은 내 팩스 받은 즉시 서류를 우송했으리라고 믿지만 아직은 배달이 안됐다. 지금부
터 일주일 안에 그 서류를 받아볼 수 있다고 해도 이곳 대사관에서 요새 비자 발급에  소요
되는 시간을 감안할 때 빠듯할 것 같다. 나는 아직 유효한 방문비자를 가지고 있는데 왜 그
렇게 절차가 까다로운 J-1 비자로 가야 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음날 즉시 팩스로 회답이 왔다. J-1 비자라야 그 대학에서 500불의 사례금과 제반 비용
을 부담할 수 있다고 했으며 그건 그들이 초청한 어떤 학자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그
대학의 원칙이며, 필요한 서류는 벌써 우송했으니 곧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는  여행사에다
서류만 도착하면 당장 접수시킬 수 있도록 비자 신청서를 작성해놓고 5월 25일자로 비행기
표도 예약해놓으라고 일렀다. 그러나 5월 15일이 지나도록 서류는 안왔다. 여행사에서는  거
의 매일같이 어떻게 된거냐고 성화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다  못해 다시 팩스로 아직도
서류가 도착안한 사실과 지금 익스프레스로 서류를 보내주지 않는 한 비자를 내는 건 불가
능할 것 같다는 그의 생각을 밝혔다.

 

김혜숙한테도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아무튼 한국
의 우체국 종잡을 수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고, 배달이 지연되는 탓을 한국한테로만 돌리면
서, 걱정 말라고, 미대사관에서 한국의 저명한 지성인을 설마 보통 여행자와 똑같이  취급하
겠느냐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다면 그럴지도 모른
다고 솔깃하게 들었다. 도나 화이트로부터도  익스프레스로 또 한 부의  서류를 우송했다는
연락이 왔다. 팩스로 이렇게 당장당장 의견교환이 되는데 왜 J-1  비자용 서류는 꼭 우편으
로 받아야 하는지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익스프레스도 그날로 배달되는 건  아니었다.
사흘 후 먼저 부친 보통우편과 동시에 배달이 됐다. 그때가 5월 19일 금요일이었다.  아무리
서둘러 접수를 시켜도 22일 월요일이나 접수가 가능했다.


  혹시 특별히 봐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들어맞지 않았다. 익스프레스로 서류를 부친 후부
터 C대학 쪽에서도 비자 발급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짐작을 한 것  같았다. 김
혜숙은 전화로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게 보일 만큼 호들갑을 떨며 안타까워했고, 도나
화이트도 매일같이 팩스를 보내왔다. 그쪽에서 하도 난리를 치니까, 최종적으로 25일까지 비
자가 발급되기는 틀렸다는 사실을 알리면서도, 방문비자로라도 와달라고 하길 바랐다.

 

그 학회에 그의 참석이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게 그의 상식적인 생각
이었다. 많지도 않은 여비나 사례금은 어떤 편법을 써서든지 나중에 지급하면 그만이고,  정
못 준다면 그런대로 참아줄 수도 있는데 싶었다. 그러나 그건 저쪽에서 간청하면 이 쪽에서
마지못해 들어줘야지 이쪽에서 먼저 제안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항공편도 예약해놓았
겠다, 유효한 비자도 있겠다, 그 놈의 J-1 비자만 거치적대지 않는다면 제 날짜에 출국하는
건 문제도 없었다.


  그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다급하고 비루해진 것은 순전히 체면 때문이었다. 교장이 떠벌려
놔서 동료선생들뿐 아니라 학생들까지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그의 문학을 가지고  학회를
여는 데 그가 초청됐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문우나 가까운 술친구는 일부러 알리려
서가 아니라 만나자는 약속을 그 동안을 피해서 정하자니 자연히 알리게 된 거였지만, 그것
도 소문이 날 만큼 나서  C대학 가서 누구 만나면 잘  해줄 거라느니, L대학 누구누구에게
안부 전해달라느니 하는 소리까지 들어온 터였다. 그러고 보니 초청을 받은 지가 두 달이나
되었다. 그동안에 일이 손에 안 잡히게 뒤숭숭하고 치사하고  촌스러운 느낌을 이런 허탕을
치려고 참아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도 보잘것없고  왜소해졌다.

 

그렇다고 영어로 하는 회의에 대한 소심증을 완전히 극복한 것도 아니어서  안 가고 말게 된 게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도 없지 않던 차에 대학 쪽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리면 J-1 비자가 나올 수 있겠느
냐고 물어왔다. 여행사한테 물어서 넉넉잡고 일주일은 더 걸릴  거라고 했더니 그럼 학회를
이주일 후로 미루어 6월 8일로 잡겠다고 했다. 결국은 가게 되는구나, 가게 되니까 안  가면
편할 것 같은 심정에 더 미련을 두면서 교장한테도 이만저만해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렸다.
교장은 진작 자기에게 의논했으면 그날로 비자를 낼 수도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선생 노릇 좋다는 게 뭔 줄 알아요?  우리나라 방방곡곡, 높고 낮은 데, 안 통하는  데가
없다는 거예요. 고 나이 또래라는 게 우리 보기엔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배경은 천차만별
이거든요. 대통령한테도 빽줄을 댈 수 있는 아이가 없나, 쓰리맞은 다이아 반지도 당장 대령
할 수 있는 암흑가 딸내미가 없나. 교사를 흔히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별볼일 없는 직업이라
고 생각하기 쉬운데 천만에요, 교사처럼  각계각층 광범위하게 빽줄을 가진 직업도  없어요,
이선생이 몰라서 그렇지. 이학년의 윤애라 있죠. 영어 잘하는  아이. 그 애 아버지가 미대사
관하고는 직통이에요. 지금은 국회의원이지만 미국 대사도 지낸 적이 있는  외교관이거든요.
그분 빽으로 우리집 아들놈 비자는 리젝트 당한 걸 당장  다시 낼 수가 있었는걸요. 정말이
에요. 그분 참 빽 셉디다."


  마음이 화끈거리는 걸 억지로 참고 들은 그  학부형한테 연줄을 놓게 될 줄은 그는 그때
미처 몰랐다 이번엔 시간이 넉넉했으니까. 정상적으로 비자가 발급되기로  한 날 여행사 직
원은 그러나 또 허탕친 것을 알려왔다. 이유는 C대학에서 보내온 서류에는  학회날짜가 5월
26일로 돼 있는데 그날이 지난 시점에서 비자 신청을 한 걸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였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사관의 판단에 하자가 없어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제 날짜에 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자 학회날짜가 연기됐
다는 걸 직원한테 말해봤댔자 그 자리에서 그걸 번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지쳐서 화도 나지 않았지만, 그 예기치 않은 돌발사에 대해 김혜숙한테는 전화로, 도나
화이트한테는 팩스로 알렸다. 그들이 최선을 다해준 건 알지만  미국이란 데가 정이 떨어져
못 가게 된 게 섭섭하지도 않았다.


  오기가 나서인지 금방 마음이 정리돼가고 있는데 도나 화이트한테서 연락이 왔다. 서류를
정정해서 보내는 건 익스프레스로 보낸 다 해도 이미 때를  놓친 일이고, 대학 쪽에서 대사
관으로 전화나 팩스로 학회가 5월 26일에서 6월 8일로 연기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선처를 부
탁하겠다는 거였다. 깨끗이 끝내버리려고 한 일에 그는 또다시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워낙
시간도 얼마 안 남았거니와 도대체 대사관이란  켯속에서 돌아가는 일에 너무도 깜깜인  게
답답하기도 해서 교장한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물론 리젝트 당한 비자까지  당장 내주게 했다는 빽줄에다 구원을 청해달라는 뜻이었다. 

교장은 그가 기대한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윤애라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고,

염려 말라는 확답을 받았다고 했다.  여행사는 여행사대로 미국에서 대사한테 직접 전화라도 해주면

일이 수월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귀띔을 했다.

 

이주일이 연기된 가운데 일주일 이상을  허비했으니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건 학회날짜까지이고

출국해야 하는 최종일은 닷새밖에 안 남았다. 그도 몸이 달아 교장한테도 거듭 부탁을 하고,

대학측에도 정말 팩스를 보냈나 확인전화를 여러번 걸었다. 

 

 여행사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사관에서는 아직 그런 팩스 받은 일이 없다고 해서 다시 김
혜숙한테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거냐냐고 화를 냈다. 화도  내고 하소연도 하고 싶을 때는
김혜숙이 만만했다. 도나 화이트로부터 대사관에 재차 팩스를 보냈다는 팩스가 왔다.


  다시 J-1 비자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는 고약한 시간이 계속됐다. 밤에 꿈자리에
서도 길에다 여권을 떨어뜨렸는데, 길바닥이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서 능글능글한 컨베이어
벨트로 변해서 여권을 싣고 그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디론지 떠내려가는 꿈을 꾸었
다. 꿈에서도 저 여권을 잃으면 마치 죽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던 생각이 나 깨어
나서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기쁜 소식은 역시 빽줄로부터 왔다.

 

6월 5일 출근도 하기 전에 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비자가 나왔대요. 이선생이 직접  대사관
으로 찾으러 오래요, 오전중으로요. 가서 로버트를 찾으면 된대요. 나도 전에 그사람 도움을
받아서 잘 아는데 친절하고 잘생기고 우리말도 곧잘 하니까  걱정 말아요. 보통사람들이 비
자 받으려고 줄서는 뒷길말고 세종로 큰길로 난 대사관 앞문으로  가야 해요. 알았죠? 그리
고 미스터 로버트."


  교장이 강조하지 않아도 로보트처럼 들려서 잊어버릴 것 같지  않았다. 대사관 옆 한국통
신 건물에서는 무슨 일인지 데모가 한창이어서 그 주위의 경계가 삼엄했다. 그까짓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게  문득
가책이 돼, 그는 옥상에서 뿌린 삐라가 땅에 닿기를 일부러 기다렸다가 한장 주워서, 그러나
읽어보지는 않고 주머니 속에 꾸겨넣었다. 로버트를 만나기로 시간  약속이 돼 있다고 했더
니 신분증만 보관하고 통과시켜주었다.

 

그러나 그가 대사관 현관까지 도달하는 동안 스스로
밀어야 하는 문이나 회전문은 어찌나 무겁고 두꺼운지 토치카를  연상시켰다. 그런 문은 생
전 처음이다 싶은 느낌이 그를 압도하고 왜소하게 만들었다. 현관에서 용건을 말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로버트가 내려왔다. 로버트는 그의 여권을 여봐란듯이 들고 있었다. 여권이  그의
손을 떠난 지 얼마 만인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어서 여권을 받고 싶어 고맙다
는 인사부터 했다. 그러나 로버트가  찾아온 건 대사관이라는 음흉하고도  복잡한 컨베이어
벨트 위를 떠도는 여권일 뿐 비자는 아니었다.  로버트는 난데없이 비자 신청서를 내주면서,
지금 여기서 작성해 주고 가면 빠른 시일 안에 내주도록 노력하겠노라고 했다.


  신청서를 받아들었지만 분노와 모욕감으로 손끝이 떨려  아무것도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래 빈칸은 영문타자나 인쇄체로 써서 답변하십시오'라는 맨 위의 굵은 글씨 외에
는 눈이 가물가물해서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서류는 벌써 제출했을 텐데요. 왜 이제
와서 이걸 쓰라고 하나요? 내일은 현충일이니 대사관도 쉴 테고 나는 아무리 늦어도 6월 7
일 모레는 출국해야 합니다. 모레 아침에 비자가 나올 것을 믿고 여행준비를 할 것 같지 않
구요. 아침에 여기를 거쳐서 공항으로 간다는 것도 시간상 가능한 일 같지 않구요." 그가 말
을 하는 동안 여권을 팔랑팔랑 뒤적이고  있던 로버트가 푸르고 천진한 눈으로  민망하도록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 급한데 왜 하필 J-1 비자로 가려고 합니까.  여기 이렇
게 유효한 B-1, B-2 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요.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로버트가 그의
여권을 펼쳐든 채 간당간당 흔들면서 말했기 때문일까, 그는 뭔가 심한 야유와 모욕을 당하
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여권이라도 얼른 낚아채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럼 여권이나 돌려주십시오. 내가 뭘로 가든지 상관 마시고요." 로버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
선히 여권을 내주며 즐거운 여행하라며 악수를 청했다. 홀가분한 눈치였다.


  학교로 돌아가 그 사실을 알리자 교장은  그럴 리가 없다며 윤애라 아버지에게  알아봐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그는 극구 말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선생이 대사
관에 가서 변변치 못하게 군 게 틀림없어요. 변변치 못하다는 게 딴게 아녜요. 언제  고자세
로 굴고, 언제 저자세로 굴어야 하는지 판단을 못하고 뻣뻣하고 어정쩡하게 구는 거라구요."
교장은 이렇게 일이 잘 안 풀린 탓을 그에게 돌리고  나서야 그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그래
도 그동안 교장이 그에게 가장 고맙게 굴었다.

 

그는 비자문제가 자꾸 꼬일 때, 교수나  문화
계 일에 종사 하면서 외국을 자주  드나드는 친구들한테 더러는 속상한 얘기를  피력하기도
했었다. 물론 무슨 도움을 얻자고가 아니라 미대사관에서 하는  일을 같이 욕이라도 해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상대방은 그걸 자기 자랑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인터
뷰 때 아무개도 이런저런 모욕을  당했는데, 자기는 깍듯한 대접을 받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느니, 길어야 일년밖에 비자를 안내줄 때 자기는 뭘  보고 그랬는지 오년을 내주더라
느니, 그런 유의 예를 수도 없이 들어가며, 너는 참 안됐다고, 자기만 쉽게쉽게 비자를 받은
데 대해 자부심과 특권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그 생각만 하면, 누가누가 더 더리고  비천한
가, 지지리 못난 사람들끼리 키재기를 한 것처럼, 자신은 그중 가장 못나 그 비천의  밑바닥
을 핥은 것 처럼 느껴져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래도 그는 징징 울다시피 하는 김혜숙을 위로하고 나서 밤을 새워 그가 발표하고자 했
던 요지와,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머릿속으로만 굴리고 있던  것들을 글로 만들어 그녀에게
팩스로 보내면서 그가 참석을 못하더라도 기죽지 말고 이번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를 당
부했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그가 겪은 고약한 경험을 단지 개인의 재수 탓
으로만 돌리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지나 마음을 가라앉힌 후, 그는 그를  초
청한 동아시아 연구모임 앞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팩스를 보냈다. 


-귀 연구모임의 성격상 앞으로도 연사를 초청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이번 초청으로 내가 겪
었던 얼당토않은 일에 대하여 그 모임에서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편지를 드립니
다.
  그리고 나서 그간에 겪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열거 하고 나서,
-내가 정말로 분개한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아무 대답도 없다가  9일이나 지나고 나서 대
사관은 내 비자 신청을 반려했습니다. 이유인즉 처음 초청장에  나와 있는 모임일자가 지났
으니 연기되었다는 서류가 필요하다는 거였습니다. 떠나야 할 날짜는  모레인 데 이제 증명
서를 내면 다음날로 비자를 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또 열흘  후에 다른 엉뚱한 것을 요구할
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대사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업무에 정상적인 처리
기간이란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요. 하루가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미국 가는 일에 있어서 정상적인 계획을  세우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이지요.

 

바쁜 사람이 여행계획을 세웠다가 이런 이유로 취소하고, 다시  연기하여 똑같은 일을 반복하
고, 그로고 나서도 출발 전날이 되도록 비행기표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상
황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네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는지요. 그리고 이러한 불
합리한 일이 단지 미대사관의 비자  발급 업무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이러한 일을 겪고도
우리는 항의할 상대가 없습니다. 미대사관은 한국인의 민원을 받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렇
게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는 편지를 드리는 겁니다. 미국에 초청한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대
하는 것이 과연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일인지, 나를  초청한 당사자로서 미대사관에 정식
으로 항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릴  것은 초청자에게 J-1비자를 요
구하는 귀 대학의 규정에 대해 다시 검토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규정만 없었다면 아무 문
제없이 처음에 정한 날짜에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연구모임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학회는 그가 참석하지 못한 것을 모두 아쉬워하면서도 그
의 문학을 가지고 연구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매우 유익했고 그가 보낸 글을 읽은 게 얼마나
감동적이고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는 의례적인 감사의 말과 함께 이러한
구절도 있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우리의 초청계획이 무산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당신이
그 일로 미국정부로부터 당한 일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경험은  한국에서 식민주의가
종식된 게 아니라 아직도 현실적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우리의 이해를 재확인시켜  주었습니
다.


  나중 말은 그를 마음뿐 아니라 오랜만에 얼굴까지 화끈거리게 했다. 그 편지에는 그가 요
청한 대로 그들이 주한 미국 대사관에 보낸 항의문의 사본이  동봉돼 있었다. 이 엄중한 항
의문에 서명한 이들은 C대학 인문학연구소가 후원하는, 동아시아의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에
관한 세미나를 이끄는 동아시아 연구 학자들의 이름이 타대학 학자까지 총망라돼 있었다.
  항의서한은 그 연구모임이 그와 최초로 접촉한 날부터 미팅날짜를 정하고 조정하고  끝내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까지의 과정을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날짜별로 나열하고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정부의 한국 문화인사에 대한 무례와 부주의에 대해  분노하는 바입니다.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절차상의 지연에 덧붙여서 이창구씨는 J-1비자를 신청하는 무슨 다른 동기
가 있지 않나 의심하는 듯한 질문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취한 직원은, 그  비자
는 취업이 허용된 비자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직업을 구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내린 듯합니
다. 일반 한국 국민을 대하는 고압적인 태도 그대로 이창구씨를 대하는 고압적인 태도 그대
로 이창구씨를 대했으며, 한국의 문화인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의 나딘 고디머 여사가 이런  곤란을 당하리라고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군의 동아시아 연구 학자로서 우리는 아시아 국가와 수시로 학문
적이고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구와 강의의  자질은 이런 교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망발은 학문적인 열정과 일반적인 국제관계를 말살하는 것입
니다. 이번 사태는 한국의 탁월한 작가를 얕잡아본 것이고 C대학과 세미나 참석자들을 당황
하게 했습니다.우리는 또한 미국 내에서의 동아시아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증가하고 있
는 이 시점에서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런 태도로 이창구씨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은 미국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대중의 토론거리가 될 것이고 한국 지성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소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되는 것을 막는 첫걸음으로서 우리는 이창구씨에게 해명을 해주실 것을 바라며 그가 미국  대사관으로
부터 공식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번의  비자 신청에 따른 비용과 비
행기표 취소요금도 변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래 서명한 멤버로서 이 사태의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아내하고 같이 그 편지를 읽고 난 이창구는 그 창피하고 참담한 심정을 얼버무리느라 불
쑥 한다는 소리가, “ 이 사람들 우리를 남아프리카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것  같잖아.”아내
가 그를 기분 나쁘도록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왜 남아프리카가 어때서
요?” 그는 더욱 무안해져서, 미국 대사가 정식으로 사과하기  전에 내 다시 미국땅을 밟나
봐라, 하고 호기를 부렸던 것이다.
(창작과비평 1998년 겨울호)

 

 

  꽁뜨 -나의 웬수덩어리
  내 컴퓨터가 또 이상해졌다. 이번엔 망령이었다. A4용지로  30장분량이나 되는 원고를 감
쪽같이 집어삼킨지 일년도 채 안되고 나서였다. 이 기회에 이놈의 386 구닥다리를 586 신형
으로 갈아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집에 컴퓨터가 2대나 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
이었다. 새걸 들여놓고 나면 헌것은 버리든지 필요로 하는 데를 찾아서 기증을 하든지 하는
게 순서겠으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집어삼킨 30장 때문이었다.  원고
지로 환산하면 300매 가량 되고 내가 쓰고자 한 장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분
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간에 나는 처음 반의 반을 쓰기까지가 가장 힘들
었다. 시간도 지긋지긋하도록 오래 걸렸다. 반의 반만 쓰고 나면 반까지는 훨씬  수월해지고
반에서 나머지 반은 마치 천신만고 끝에  오른 정상에서 내리막길을 타듯이 휘파람을  불며
수월하게 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반의 반을 그놈의 컴퓨터가 감쪽같이  집어삼킨 거였다. 제조회사의 AS사
월을 부렸더니 백업을 안 해놓은 내 무지와 실수만  탓하고 가버렸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자칭 컴퓨터 도사라는 사람도 몇사람 불러대보았지만 살려낸 것은 불과 열 줄도 안되는 분
량이었다. 처음엔 그것도 감지덕지했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다 살려낼 수 있으려니  해서였
다. 그러나 처음에 살아난 것 이상을 아무도 살려내지 못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신기한 기
계에 대한 전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경계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수
시로 백업을 해놓는다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고, 비록 기계일망정  많은 시간을 같이하는 동
반자에 대한 불신을 피곤한 일이기도 해서 수작업  할 때가 그립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방으로 애써보았지만 그놈의 컴퓨터가 내 원고를 더는 토해놓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나
서는 도사 대신 어디서 고문기술자로도 불러대고 싶었다. 그  정도로 구슬려도 실토를 안하
면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는 발상은 내 딴에 꽤 그럴듯했다. 나는 아 나오던 라디오를 모르
고 발길로 걷어찼더니 다시 소리가 나던 옛날 경험을 살려 그놈의 컴퓨터를 주먹으로 사정
없이 쳐보기도 하고, 노크하듯이 똑똑 여기저기를 두드려 보고, 이 웬수덩어리야, 들입다 욕
을 하면서 박살을 낼 듯이 몽둥이로 위협도 해보고 나서 다시 뛰워봐도 문서이름만 남아 있
고 내용은 감감무소식 뜨지 않았다.

 

이런저런 노력과 싸움에 지쳐  며칠 동안 머리 싸고 누
웠다 일어나니 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까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결국 일생일대의 걸작이
될 뻔한 소설은 그렇게 하여 무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놈의 웬수덩어리를 폐기처분하지 못
한 것은 아무리 구박을 해도 문서작성기능에는 하등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네
놈이 나의 피땀의 결정을 감쪽같이 집어삼켜버렸겠다! 싶은 일종의 원한관계 때문이었을 것
이다. 글쓰기의 원동력은 심장의 더운 피,  고결한 양심이라고 외눈 하나 깜짝 안하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남은 구시대 의 글쟁이 중의 하나인 나 같은 사람이 그까짓 기계 나부랭이하
고 원한관계를 맺다니.


  그래도 기계한테 원한은 너무 인간적인  대우였을 것이다. 이번에 그  웬수덩어리가 보인
이상은 망령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대접을 해주니까 기껏 한다는 사람노
릇이 망령이었다. 몇줄씩 잘 쳐지다가도 느닷없이 모음과 자음이  따로 놀기도 하고 받침이
엉뚱한 대로 튀기도 했다. 이를테면  분명히 '가'를 쳤는 데 'ㄱ'만  남고 'ㅏ'는 안 쳐졌다


헛짚었나 싶어 몇번을 쳐대도 마찬가지였다. 살펴보니 아주 안  처지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엉뚱한 데로 날아가서 딴 글자를  불구로 만들어놓는 거였다 '강'을  쳤는데 'o'이 딴데 가
붙기도 했다. 어디서 그런 오류가 발생하는지 딱히 정해진 것도 아니고 모음이나 받침이 어
디로 가서 붙는다는 방향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손바닥에 침 뱉어놓고  탁 치면 어디로
튀길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중구난방이었다. 나는 또 도사들한테 전화질을 했다. 자칭  컴
퓨터 도사들도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고장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 식이었다 아
마 노망이라는 병명을 생각해낸 것도  내가 아니라 그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사람의 병
중에도 망령이 제일 힘든다더니 컴퓨터의 망령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제 그놈의 컴
퓨터라면 지긋지긋했다. 마침 급한 원고 때문에 쩔쩔매는 나를 딱하게 여긴 이가 있어 노트
북을 빌려줬다.


  노트북을 써보니 암만해도 정이 든  내 기계만 못했다. 그까짓 기계한테  정은 무슨 놈의
정, 그 속에 나의 불후의 명작이 숨어 있는 한, 아무리 버려도 아무도 안 집어갈  낡은 기계
라 해도 진주를 품은 조개나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끼고 돌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또
한번 회사에다 AS를 의뢰했다. 젊은  기술자는 기계가 어떻게 망령을  부린다는 내 설명을
알아먹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타자를 쳐서 그걸 보여주고자 했다. 참으로 요망
하기 짝이 없는 기계였다. 두어  줄마다 한번씩은 나타나던 그 이상한  실수를 한 페이지를
치도록 한번도 안 저지르는 것이었다. 진땀이 났다. 게다가 타자실력은 왜 그렇게 더디고 서
투른지 그 실력으로 내 실순지 기계 실순지 가려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보다 못한 기술자가
말했다 "이 컴퓨터 누가 쓰던 거 예요?" "쓰던 거  아녜요 내 거지요. 처음부터 네 거예요."


"그럼 할머니, 그 실력으로 채팅을 한단 말예요?"  뭔가 시답지 않아하는 것도 같고 경멸하
는 것도 같던 그의 얼굴에 잠시 능글거리는 호기심이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가 전
문직으로 글 써먹고 사는 작가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내가
괘 유명한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채팅이  뭔지 난 그런 거 몰른다
우." "그런 게임을 즐기시나 " 그는 점점 더 불손하게  능글댔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키보드
를 두들겨대더니 바이러스에 형편없이 감염됐다고 했다. 나는 부랴부랴  그 옆에 놓인 노트
북을 딴 방으로 옮겼다 "그것  뭐하러 들고 나가고 그래요?"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면서요?
이 노트북한테까지 올까봐‥‥‥ " 할머니 , 할머니가  이 컴퓨터 쓴다는 거 맞아요?" 청년
이 기가 차다는 듯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나도 그제서야 아차 싶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내
가 아무리 기계에 무지하다고 해도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게 공기나 접촉으로 전염하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나, 그러나 바이러스라는  소리를 듣자 반사작용처럼 순간적으로
떠오른 남의 기계까지 망치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그런 실수를 저지른 거였다.  "그
럼 바이러스 때문에 글자가 그렇게  깨졌을까요?" "지금은 고쳐드릴 테니까  나중에 써보면
알 거 아녜요." 청년은 제가  가져온 디스켓을 내 컴퓨터  속에다 밀어넣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나이에 왜 한 자루의 펜 대신 이런 거창한 기계는 써가지고 종당엔 이런 모욕까
지 당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분했다.

 

청년은 다 고쳤다고 말하고 나서 이 컴퓨터 할머니가
쓰는 것 맞느나고 또 물었다. 삼세번째던가.  암만해도 내 입으로 내가 작가라는 걸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젊은이, 젊은이는 이런 기계를 고치는 게 직업인 것처럼 나는  이런 기계를
이용해서 글을 쓰는 게 직업이라우."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에 짙은 연민이 어렸다. 


"할머니, 이만한 아파트에 살면서 뭘 그렇게 힘들게 사세요. 그 타자실력 가지고  하루에 얼
마나 벌겠다구. 우리 어머니는 할머니보다 훨씬 젊은데도 자식들한테 용돈 내놓으라고 큰소
리 땅땅 치면서 관광이나 다니면서  얼마나 편안하게 사신다고요." "그러게나  말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순순히 동의를 하고야 말았다.  실수의 연속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급수  딴
타자수도 얼마나 많은데 할머니한테까지  돌아올 일거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청년이
7000원짜리 수리비 청구서를 내밀며 정말로 안됐다는 듯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도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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