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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배수아 소설

by 8866 2009. 1. 22.

[평론]배수아 소설/김주연

배수아의 소설은 , 말하자면 그림이다.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다음 몇 장면들의 작품의 부분 인용만으로도 이미 모자랄 것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이른 바 90년대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과 절묘하게 부합된다.

<전등이 없는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면 반쯤 열려 있는 내 사촌의 방문이 보인다. 아직 밖의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고 넓은 커다란 이파리들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창밖으로 그대로 볼 수 있지만, 처음에 들어온 집 안의 밤의 한가운데인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창가의 화분이 있던 자리나 낡은 소파를 치워 버린 마루가 쓸쓸하게 드러난다.>
『바람인형』.13쪽

<상점들이 열려 있었지만 바다에는 사람이 없다. 멀리에는 리조트 아파트를 짓는 공사장이 보이는 바다이다. 모래는 희고 깨끗하다. 사촌과 결혼한 남자는 붉은 담요를 흰 모래에 깔고 커피가 든 보온병과 맥주캔을 놓고 사촌은 꽃을 들고 서 있다. 바람이 불어와서 햇빛이 찰랑찰랑 소리가 나듯이 맑고 깨끗하게 느껴진다.
(.....)사촌과 결혼한 남자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고 하면서 먼저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마신다
-50쪽-

<버스를 타러 가는 도중에 해가 지고 있었다. 낮은 지붕들과 논들 사이로 어둡고도 붉은 셀로판지 같은 노을이 번지고 있다. 길의 끝 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숙모의 아이가 손을 들자 버스가 멈추었다. 초록빛 모자를 쓴 노인들이 타고 있는 버스였다. 전등도 초록빛이고 운전사의 얼굴도 초록빛이었다.>
-98-99쪽-
<화려한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텔레비젼의 만화 영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꿈속 같은 트리가 흑백의 텔레비젼에 가득 찬다. 흰 눈이 덮인 끝없는 서부의 평원, 언제나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는 장작 난로, 긴 금발의 여자아이들.눈 덮인 숲속의 사냥, 테이블에 넘칠 듯이 가득한 호두와 치즈와 초콜릿 케이크, 달콤하고 향기로우면서 소금기 있는 치즈의 냄새,세 살 위인 언니는 벌써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엄마는 치즈를 작게 찢어서 언니의 밥그릇에 올려준다. >
103.104쪽

<헝겊 인형이 춤춘다. 뜨거운 프라이팬 위의 콩과 기름처럼. 달콤한 향수, 샐러드 기름에 튀긴 당근의 냄새, 오랫동안 닫혀진 채 어둡고 낡은 방, 창으로 스며드는 새벽의 빛과 싸늘한 바람. 한낮이 되면 방은 찌는 듯이 더워지고 의자에 앉은 채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남자의 손톱이 푸르고 ,방 밖에서 누군가가 벨을 울리다가 사라져 간다. 빛이 충분하지 않은 방, 화분의 붉은 꽃 식물은 물이 그립다.>
135쪽

1996년에 발간된 소설집 『바람 인형』에서만 인용된 부분들인데, 그것들은 이 책에 수록된 7편의 단편들 가운데 6편 각각으로부터 하나씩 발췌되었다. 인용문을 여기에 갖지 못한 작품은 「갤러리 환타에서의 마지막 여름」인데, 이 작품의 제목「갤러리~」는 마치 다른 6편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는 화랑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서 무언가 그 함축성이 쉽게 간과되지 않는다. 위의 인용문들은 그 중 가장 전형적인 예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배수아 소설들 전편에 편재해 있는 그림의 이미지는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만하다.

많은 신세대 소설가들이 물론 이러한 그림 내지 화상 이미지에 치중하면서, 그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원근법주의적 발상에 젖어 있지만, 배수아가 쓰고 있는 소설의 지문은, 차라리 배수아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풍경이라는 말로 바꾸어놓아도 무방할 정도다. 작가는 전통적인 서사의 세계와는 아예 처음
부터 무관한 자리에서 그가 관찰한 대상을 섬세하게 , 일종의 순간문체로 담담하게 적어놓는다. 그 대상은 하나의 객관이지만, 완전한 객관인 대상은 없다는 듯, 작가의 심상 속에서 그 자리가 이동되면서 원근법의 색채를 띠고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미리 말해지지 않고, 소설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 그 풍경이 마치 연극의 무대처럼, 앞으로 진행될 혹은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사건을 예시하거나 반추함에 있어서 무슨 상징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숨겨진 그 그림의 내부가 지니고 있는 엄격하면서도 단정한 질서의 구도다. 피카소적 메타이미지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정형의 데생으로 된 스케치는 그 자체로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소설을 통한 배수아의 그림 그리기는 이런 점에서 몇 가지 의미의 지향과 관련된다.

첫째, 그것은 무질서한 세계를 시각적으로 질서화하겠다는 의도와 관계된다. 물론 그의 그림 그리기는 소설 속의 그것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지각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각적질서화다. (무질서한 세계의 질서화에 있어서 무질서한 세계가 이 작가에게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뒤에 상술된다.)
둘째, 그림 그리기라는 방법은 과거, 현재,미래로 흩어져 있는 사태의 시간성을 동시성의 차원에서 포착하고 드러내주면서, 항상 그것을 현재의 범주 안에서 지켜낸다. 셋째, 그림이라는 화면적 공간 안에서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하나의 공간속에 병존한다. 그럼으로써 인과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를 최대한 배
제하고 사물들이 함께 그 곳에 그렇게 있는 현실을 즉자적으로 표현한다. 혼란은 시간적 인과 논리에 의해 질서화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결국 화상주의 내지 원근법주의적 발상은 시간의 변화 , 공간의 차이에 따른 변화와 차이의 설명을 구차스럽다는 듯 배척하고, 지금 이곳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는데에 만족하고자 한다.

여기 등장된 인물이나 사건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시각적인 구도를 위한 기하학적인 배려뿐이다. 가령 이런 것이리라.

<군복을 입은 남자와 사촌은 일어난 채로 신발을 신고 바느질하는 여자의 방을 지나서 바로 복도로 나가 모퉁이를 돌고 스프레이 페인트도 칠해진 복도 끝에 있는 사촌이 좋아한 여자 아이의 방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은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싸늘한 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가 화장실이 있는 담벼락을 지나 녹슨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이층의 입구가 나온다. (.....)바느질하는 여자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듯이하고 어깨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28-29쪽

이러한 구도 아래에서 인물들과 사물들은 역동적인 생명체로서의 온갖 변화와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 대신, 정물적인 피사체와 같은 존재로 투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바람 인형』의 제목은 매우 시사적이다. 소설 주인공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 제목이 말해주듯이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 <바람 인형>을 포함한 그의 작품집 곳곳에 편재해 있는 그 인물들의 인형적 모습을 확인해보자.

< 형겊 인형은 외로웠다. 이 세상의 처음은 외로움과 붉게 타오르는 하늘로 가는 길. 누구인가, 어린 여자 아이가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헝겊 인형을 옥수수 밭에 버렸다. "너는 예쁜 옷을 입고 있구나" 밤새가 와
서 인형에게 말을 걸었다. "이 곳에서는 너 같은 옷을 입은 여자 아이가 없어. 하지만 너의 예쁜 옷이 젖어 있고 낡았어. 그리고 너는 상처를 입었구나. 누군가가 너를 버렸어. - 138.139쪽 >

인형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떤 형상이다. 외형만 사람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사람이 아닌 그 형상은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들의 놀이 대상, 즉 장난감일 따름이다. 장난감은 생명이 없으므로 모든 움직임 자체가 그 자신의 의지 아닌, 그것을 움직이고자 하는 제 3의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인형의 운명은 그 모양과는 아주 달리 근본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러나 인형의 비극은 그 인형을 움직이는 자의 마음을 위로하여준다. 그러면서도 그 움직이는자. 인형을 만드는 자의 마음은 인형에 의해 다시 감염되고 다시 비
감해진다. 인형은 말하자면 그것을 만들고 움직이는 자가 자신의 비극을 털어버리고 그 스스로를 객관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고안된 것이지만, 그 꼭두각시로서의 동작과 위상은 관찰자가된 조작자에게 거듭 비극적 세계 인식의 또 다른 실감을 거꾸로 얹혀주는 것이다. 이것이 인형 만들기, 혹은 그것을 포함한 그림 그리기의 모티프이자 그 결과이다.

인형으로 파악되고 있는 일련의 피사체들이 의미하고 있는 문제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작가의 시간 의식.공간 의식에 대한 것이다. 인형은 조종되고 축소되고 과장될지언정, 자라거나 죽지 않는다. 인형 안에는 생성과 소멸의 법칙이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다. 인형을 통해 표현되는 세계는 결코 시간에 의해 변화되는 세계가 아닌, 그 자신의 몸짓과 자리에 의해 의미되는 세계이다. 인형은 그러므로 그림의 기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원근법주의의 중심 캐릭터로 이해된다. 누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의 무게와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많은 사건과 시간의 추이 속에서 추적. 분석되지 않고, 그 사람의 크기와 움직임, 자리잡기에 따라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모습은 왜, 그토록 큰 과장에 의해 앞화면에 돌출되어 있는가. 혹은 그 사람의 모습은 왜 아주 희미한 F.O로 작게 처리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할 뿐이다. 결국 이 세계와 인생에서 우리 앞에 뜨는 것은 공간의 감각일 따름. 시간의 문제는 감각과 인식 밖에 있다. 배수아를 포함한 90년대 소설가들의 대부분이 이 점에 있어서는 의식.무의식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수아의 소설에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이러한 시간 의식과 관련해서는 성민엽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썩 적절한 듯하다. 장편『랩소디 인 블루』에 관한 해설 「성장 없는 성장의 시대」에서 의문의 형태로 제기된 지적이다.

< 형태상으로 보면 『랩소디 인 블루』는 회상형 소설인데, 그 회상은 세 가지 시간대의 복합으로 이루어진다. 혼란은 우선 이 복합의 양상에서부터 나타난다. 일인칭 화자의 나이를 기준으로 말하면(미호라는 이름의 이 일인칭 화자의 나이는 작가 자신의 그것과 일치한다.)세 가지 시간대는 각각 '열아홉의 '과 '스물네 살의 여름'그리고 '서른살이 금방 지나 돌아온 오늘'이라고 할 수 있다. 『랩소디 인 블루』. 323쪽 >

이 지적 속에서 중요한 부분은 '혼란은 우선 이 복합의 양상'에서부터 나타난다고 본 대목이다. 여기서 복합이란 세 가지 시간대의 복합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소설 화자가 처한 세 가지 시간대, 즉 열아홉 살, 스물네살, 서른 살의 시간대가 별다른 구별이나 발전 없이 얽혀 있다는 이야기다. 성민엽은 이것을 '혼란'과 '복합의 양상'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으나 , 보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 시간 의식의 실종이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그림이나 인형에 있어서 시간 개념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림이나 인형은, 다른 모든 사물
들이 그렇듯이 그저 바래가고 삭아갈 뿐 그 도구나 구성 등 원형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삶의 애환과 그 중요성을 이처럼 원근법만을 통해서 파악하겠다는 생각은 일종의 정태주의라고도 할수겠는데, 요컨대 정적 세계관의 발로다. 따라서 시간은 흘러 가지만, 작가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상하게도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열아홉 살 때나 스물네 살 때나 그저 그때가 그때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혼란과 착시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의식은 이 작가의 작품 도처에 미만해 있다.

< 문득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엇에 대해서부터 말해야 진짜 나의 모습을 당신이 알게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혼라스러워요.
『랩소디 인 블루』. 11쪽

<빛나의 숙모는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서 아니, 내가 많이 나이들었구나. 내가 날 못 알아보겠어. 하면서 양수리로 놀러갈 때 입을 옷을 옷장에서 꺼낸다. 왜 이 세상은 이토록 혼란투성이로 알 수가 없다.
『바람 인형』. 70쪽

배수아의 소설들은 그림이 되고 있지만, 세상은 애당초 이 작가의 눈에 그림의 이미지로 이미 투영되고 있다는 점이 보다 강조되어야 한다. 어떤 모습이나 사건을 보든 그것을 그림이나 영상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습관은 하나의 거대한 원초적 체험을 이루고 있다. 그 장면 또한 여기저기 수두룩하다.

< 교실은 어둡고 축축하였다. 빗물에 잔뜩 젖어버린 우산들이 입구에 놓여 있었고 여자 아이들이 종이 팩에 든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흐리고 어두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랩소디 인 블루』. 18쪽 >

< 소설가시죠? 당신의 글은 인상적이었어요. 난 그림을 그려요. 물론 그냥 취미로 해요. 당신의 소설은 그림 같아. 회화적이라고 하나요. 그런 걸?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30쪽 >
< 나에게 이 세상은 언제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 처럼 어두어지려 하고 있었어.
『바람 인형』. 102쪽 >

2.
세상과 삶을 그림으로 바라보고 그 모습을 다시 그림 같은 소설로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의식에는, 당연한 결과로 많은 혼란과 무리가 야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은 물론 그림이 아니며, 나아가 그림 같은 구석이라곤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여기에는 무엇보다 시간 의식의 결핍이 나타나며 그 결과 모든 사고와 행동, 사건들에 얽혀 있는 인과 관계가 지극히 희박해진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인과율의 지배 아래 있느냐 하는 문체는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불확실한 범주에 속하는 일이지만, 지금으로서 그법칙이 완전히 배척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상학에서, 그리고 그 발전된 모습인 실존주의에서 이 법칙은 극단적으로 약화되었으나, 오늘의 일상 생활에서 인과율은 여전히 사회적 준거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결여된 소설 공간은 , 그것이 환상이라는 독특한 질서에 연결되지 않는 한 정상적인 독서를 저해하게 마련이다. 성민엽이 '혼란'이라고 부른 상태도 이와 관련된다. 그러나 문제는 작가 배수아의 현실 관찰이 원초적으로 그림 이미지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소설을 그쪽으로 몰아가도 있다는 점에 있다. 대체그는 '세계 혼란의 질서화'라는 문학의 저 전통적 희망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배반을 노리는 것일까. 전자의 경우가 아니라면 후자의 의도에 우리의 주목은 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과율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배수아 소설 공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회화화된 이 공간에 대해서는 '성장이 없는 성장 시
대'라거나 '어른이 없는, 어른 돈, 어른이 아닌(정과리)이라는 분석들이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배수아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다. 그들은 열하홉 살 때에도 아이이며, 스물네 살 때에도 아이이며, 심지어 서른 살이 되었어도 아이다. 스물넷이 열아홉 다음에 온다는 원리도 , 서른이 스물넷의 진화나 노화라는 의식도 애초에 그의 소설 속에서는 의식되지 않는다. 시간의 인과 관계에 그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무심하다. 장편 『랩소디 인 블루』에서 그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자.

<넌 성장해서도 껍질 속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언제까지나 그 속에 있고 싶어하는 두루미 같아. -124쪽 >

장편의 주인공 미호가 보여주는 세 개의 시간 공간으로 구성된 이 '그림 같은 ' 장편은 1)대학 입시를 치른 직후, 열하홉 살 시절의 여학생. 2)강릉으로 친구들과 함께 여행간 스물네 살의 졸업반 여대생. 3)서른 살의 현재 여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막상 소설의내용이나 스토리 문제로 돌아올 때, 이렇다하게 제시될 것이 빈약하다. 게다가 인과 관계에 따른 줄거리를 추적할 경우 더더욱 곤혹스러워진다. 소설의 시간 공간인 미호이ㅡ 20대 안팎 10여 년이 그녀의 인격적.사회적 발전과 무관한 자리에서 날아가버린 상태로 널려져 있기 때문
이다. 물론 여기에는 부모의 이혼, 남자 친구의 죽음 등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개입되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미호의 삶을 결정짓고 바꾸어가는 '원인'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결정적인 사건으로 은밀히 내밀어진 것이 있다면 차라리 어린 시절 강가에서 오빠와 싸우다가 다친 머리의 상처 사건이다. 오빠와의 사이에 적잖은 갈등을 느끼고 있던 미호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표면상 이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미호와 오빠와의 관계는 그녀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둘이 함께 잔다는 ,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매듭지어
질 뿐, 그 사이의 시간 공간은 그저 애매모호하기만 하다. 그러나 바로 이것, 다른 두 권의 소설집을 통해 거듭 확인되는 이 애매모호성 이야말로 영원히 '아이'의 자리에서 세상과 만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불가피한 현실 상황인 것이다. 한 권의 소설집에 7편씩의 단편이 담긴. 모두 14편의 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아이'거나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에 머물러 있다.

< "애인이 생겼어"
나중에 그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그애를 사랑하는것 같아.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야. 너도 좋아할 것만 같 은 그런 아이야.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98쪽

모든 인간들이 결국 '아이'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 소설 기술상 그림 이미지 조각에 따른 원근법주의의 소산이라는 점은, 이미 설명된 바 있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내발적 필연성의 모티프다. 즉 작가의 은폐된 동기다. 여러 소설들에 편재해 있는 그 숨은 그늘 가운데 한 부분을 가령 다음 대목은 이렇게 드러낸다.

< 생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은 돼주지를 않았으니까. 부모가 사랑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 학교에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늘 그런 식이다. 그리고 자라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기웃거리고,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면서 연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다음에 밤의 카페를 나오게 된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102쪽 >

흥미있는 것은 위의 문장 바로 다음에 나오는 표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느 날의 한적한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눈앞을 지나간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가 된다."는 구절이다. '검은 고양이'는 여기서 무엇일까. 그것은 '푸른 사과'와 어울려 기묘한 회화적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 이미지는 불길을 예시한다. 푸른 사과는 '푸른'이라는 싱싱한 젊음의색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익은 , 즉 아이로 남아 있는 미숙성과 연결되며, 길을 가로지르는 검은 고야이는 파멸과 비극의 오래된 기호이다. 오켠대 작가는 빨갛게 잘 익은 사과의 경지로 성숙해보지도 못한 채 파탄을 이미 예감해버리고 마는 삶의 끝에 가 있는 것이다. 아이의 삶에서 삶이 전체를 시각적으로 예감하고 움켜쥐는 , 그리하여 미리 미리 파멸과 불행을 하나의 시간 공간 안에서 선취하는 것이다.

인간이 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장 .노화하지 않고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 시각에서 관찰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성장 불능의 기형적 상황이며, 다른 하나는 성장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의 심리적 발현 상태이다. 그 두가지 예는 각각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잉게보르크 바흐만의『서른살』과 같은 소설에서 뼈저리게 공감된 일이 있는데, 둘 사이의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성숙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사회 비판의 요소가 강한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미숙성에 대한 옹호, 그
내면적 능력에 대한 탐구가 관심을 이룬다. 이와 관련지어본다면 , 배수아의 소설은 두 가지 측면에 모두 그 의미가 닿아 있는 것 같다. 앞의 인용문들의 잘 보여주듯이 그들은 성인으로서의 진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한, 성인으로의 진입을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다. 말하자면 성숙, 성숙한 사랑, 성숙한 사회에 대해 강한 거부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숙성에 대한 선호 역시 열렬한 것만도 아니다. 이 사회의 모든 구조와 악덕에 대한 비판으로 설정된 그라스의 아이도, 자라지 않은 순수 무구성만이 구원의 한 길이 될 수 있다고 믿은 바흐만의 아이도 배수아의 그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배수아의 아이는 원천적으로 힘이 약하다. 보모의 사랑을 대제로 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못한다는 욕구 불만의 아이- 그것이 이 작가의 아이다. 이런 면에서 배수아의 아이가 서사적 신장력을 가진 그라스나 바흐만 쪽보다 회화 이미지의 화면 구성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차원에서 배수아의 소설은 차라리 동화적이라고 할수 있다.

배수아 소설들의 동화적 분위기는 그 제목들에게서 우선 짙게 풍겨나온다. 「아멜리의 파스텔 그림」「인디언 레드의 지붕」「검은 늑대의 무리」「검은 저녁 하얀 버스」「포도상자 속의 뮤리」「프린세스 안나」「바람 인형」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제목만으로도 이미 동화다. 게다가 그의 소설들은 많은 동화들에 편재해 있는 근본 모티프, 즉 주인공의 불만과 소망이 있으며, 그것들의 해결을 위해 배려되어 있는 많은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동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어진 과제들이 속시원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빡의 요소들에 있어서는 동화적이라고 부를 만한 조건들이 산재해 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좀처럼 어떤 환경에서든 발전은커녕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이와 관련된다. 물론 사태변화에 따른 현실과역할 변화는 있으나, 성격 특히 내면의 변화는 발견되지 않으며, 이런 의미에서 성장소설의 범주와 어긋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소설에 제시된 현실도 그것들대로의 상호 관련성이 희박해, 어떤 흐름을 향해 그것들이 집중되고 있는 면이 별로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산개해 있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의 작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가족관계로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혈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 유대 대신 해체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데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이때 그 가족관계가 정상적인 구도 아닌 비정상적 구도 . 이를 테면 이혼이나 이복형제 등이 적지 않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
다. 오켠대 무연성의 관계로 있는 인물들의 그물은 내밀한 긴박성 대신, 원급법적인 그림의 모습으로 부각되면서 작품 전체를 동화적인 성격으로 비추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동화적인 그림으로서의 정착은, 불만과 상처로서 출발한 작가의 근본 모티프가 형성해낼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일 수 있다. 전통적인 서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때로 무력한 나르시즘으로 비판될 수 있으나, 전면적 파괴와 연결될 수 있는 파토스의 세계가 선호되지 않는 영상 세대에 있어서 오히려 조용한 세계 비판으로 수용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인식 주체에 있어서 그들의 시각으로 확인 될 수 있는 세계이다. 줌 렌즈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 그것만이 분명하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장면은 아름답다.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다. 아름다움은 자기의 존재를 통해 세상의 더러움을 어쩔 수 없이 정직하게 드러내주며, 그 세상을 비판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자신의 모습에만 취해버릴 때 그것은 한갓 자기 소외를 유발할 따름이다. 배수아가 보여주는 화면의아름다움은 아슬아슬한 그 사잇길을 걸어가는 느낀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그의 화면은 소설 전개의 구조적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산업 문화, 광고 문화의
얼굴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 여자 주인공은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고 남자 주인공은 오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은 결국은 배를 타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원한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
포니테일의 여자 아이는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말하였다.
"그런 게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걸까. 왜 영화는 사람들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거잖아. 모두들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거야. 사랑이 영원하기를, 청춘이 아름답기를.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잊지 말기를 그렇지 않아"
나는 탁자 위의 인디언 레드 지붕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영원이라는 말은 너무 낯설어. 난 그게 뭔지 몰라. 나에게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

앞서 나는 '무질서한 세계의 질서화'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러나 영원한 그 무엇에 대한 관심이 회의되면서 화면 속에서 들어가 앉을 때, 인과적, 서사적 질서는 포기된다. 무질서는 차라리 무질서의 모습으로 다치지 않고 보여질 때 정직하리라는 숨은 기대가 이 작가의 심리학인 듯하다. 따라가기 힘든 그 세계를 지켜보는 긴장만이 내게 남겨진 몫이 된다.



『김주연 비평집』.문학과 지성사

[출처] 배수아 비평|작성자 물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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