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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22

by 8866 2009. 1. 12.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22

 

“나도 조과부네 집에 무슨 정신에 달려갔는지 모르겠어. 귀신에 홀렸었나봐.”

엄마가 계집질하는 남편에게 눈물로 항의하면 아빠는 늘 이렇게 애매한 변명을 골라내곤 했다.

“귀신에 홀리긴. 제 아비 닮아 그렇지. 피는 못 속여. 영감쟁이가 평생 계집질로 날 괴롭히더니 인젠 그 아들이 대를 이어 며느리를 괴롭히는구나.”

할머니는 아들대신 오히려 며느리를 두둔했다. 아마 할아버지도 젊어서는 장구나 두드리고 앉아있진 않은 모양이다. 굿하러 다니며……

그러면 나는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원망할 것이고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원망할 것이고……

이건 내가 아니야. 난 이렇게 유치하지 않아. 꾀죄죄한 모습으로 마약이나 복용하고 약속도 없이 혼자 사는 아가씨 집에 슬금슬금 기어드는 그런 엉큼한 심보를 품은 탕아가 아니야. 그럼 지금 이 2080호 문 앞에 서서 가도오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늑대 같은 이 작자는 누구란 말인가?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앞에는 지금 네 갈래의 갈림길이 놓여져 있다. 그냥 프랑스에 남아서 음악공부에 정진하느냐 귀국하여 국악을 전공하고 은정과 결혼을 하느냐 윤미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랑 미지와 불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느냐 아니면 이 모든 인연에서 벗어나 나만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하느냐이다.

그러나 결국 손가락은 내 (내 속의 수많은 나중의 어떤 나인가?) 의지와는 배치되게 초인종버튼을 향해 슬금슬금 뻗어갔다.

집에 없어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빌면서 버튼을 눌렀다.

응대가 없다.

그러자 이번엔 도리어 집에 없을까봐 초조해진다. 더 힘 있고 급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그래도 묵묵부답이다.

어디 나갔나?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여자. 키가 훌쩍 크고 눈동자가 파란 프랑스총각과 함께…… 나한테 했던 것처럼 속옷단추까지 벗겨달라고 하면서……

나는 돌아서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잡이를 슬쩍 건드려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이 스르르 열리는 바람에 흠칫했다. 도둑놈처럼 남의 빈집에 잠입한다는 건 무례함을 넘어 범죄가 될 수 있음에도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내 발길을 방안으로 유혹했다. 돈이나 금품 같은 것을 훔칠 내가 아니라는 도덕적 결백의 믿음으로. 도대체 어떤 내가 어떤 나를 믿는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를 더구나 놀라게 한 것은 방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실중앙의 방석위에 윤미가 그린 듯이 앉아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가부좌를 튼 그녀는 고개를 쳐든 채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감고 있었다. 잠이 들었는지 무슨 깊은 명상에 잠겼는지 사람이 들어온 줄도 전혀 모른다. 그녀의 모습이 그토록 평화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 관음보살의 모습 같다.

나는 꼼짝 못하고 문지방 앞에 우두커니 굳어버렸다. 윤미의 무념삼매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성진 씨?”

느닷없이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새어나왔다. 말소리만 들릴 뿐 가부좌자세는 흩트리지 않은 채 눈썹 하나 까딱 안한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잠시 망설였다. 들어온 것이 후회되었다. 그냥 나가버렸을 걸.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문밖으로 회전했다. 감았던 눈까풀이 가만히 쳐들린다.

“어머. 정말 성진 씨군요! 느낌이 이상하다 했어요. 드뇌브 같았으면 들어서면서부터 수다를 떨었을 텐데 아무 말씀도 없으시기에. 어서 이리로 들어와 앉으세요.”

윤미는 방석에서 일어나며 나를 소파에로 안내했다.

“커피 드릴까요? 연락도 없이 이렇게 오실 줄은…… 전 성진 씨가 절 잊으셨나 했어요.”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윤미는 조금은 들뜬 표정이다.

“그날 그림을 두고 갔기에…… 그걸 가지러……”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나는 잔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었다거나 오고 싶었다거나 하는 식의 신사다운 솔직한 표현을 할 만큼도 나는 사내답지 못한 자신의 구질구질한 모습이 싫었다. 은정과도 그랬듯이 나는 늘 여자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다. 언제나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편이다. 둘러막고 임기응변하고 그러다가도 갑자기 달아올라 실수를 범하고는 금방 후회하고…… 도대체 대책이 없고 정리가 안 된다.

“이렇게 오실 줄 알았어요. 그림 때문이 아니라도.”

「그림 때문이 아니라도」라는 말은 나의 고질병인 허영과 체면을 한마디로 구겨놓았다.

윤미는 주방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커피 두 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림이 마음에 드셨나 보죠.”

“그림이 절 닮았다기보다는 제가 그림을 닮아서요.”

“인당동자스님을 닮아서 그리기가 쉬웠어요. 동자스님은 눈을 감고서도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녀가 건네는 커피 잔을 받았다. 구수하고 깊은 향기가 가느다란 수증기를 타고 올라와 후각을 자극했다.

“동자스님을 사랑하셨나보죠?”

오늘은 부담 없이 한국말을 했다. 내 입에는 그래도 한국말이 적격이라는 생각을 고르면서. 대신 윤미도 어색한 한국말이 아닌 유창한 프랑스어를 했다. 서로 이해 못하는 부분은 분위기나 표정으로 소통이 되었다.

“과고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에요.”

그녀의 얼굴에 연인을 사모하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짙은 홍조가 익고 있었다.

“현재진행형이라니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추억이라면서요.”

“흔적은 지워지지 않아요. 새로운 흔적에 가려질 뿐이지요. 언제라도 추억이 부르면 현재를 물리치고 앞에 나타나는 게 과거잖아요.”

“혹시 망향심이나 조국애가 동자스님에 대한 연모심으로 착각된 건 아닙니까?”

결례였지만 그것이 궁금했다.

“착각이 아니에요. 그것은 분명한 사랑이었어요. 성진 씨가 첫눈에 호감이 든 것도 동자스님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어요.”

영문 없이 정서가 격해진 윤미의 눈에는 맑은 이슬까지 찰랑거렸다.

“굳이 동자스님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령 곁에 있다고 해도 성사될 수 없는 사랑이 아닙니까. 단지 그가 같은 동포라는 의미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에요. 전 앙리부인의 폭력에 저라는 존재의 원초적 이미지가 파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어요. 앙리부인이 만들기 좋아하는 요리인 푸아그라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노리개가 될까봐 두려워요. 그녀는 제 몸 속에 흐르는 혈액을 세탁하려고 해요. 다른 사람이 아닌 저라는 존재를 이루는 그 혈액을 말이에요.”

“피 갈이를요?!”

“네?”

“아니,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립니다.”

“그래요 피 갈이를요. 그 표현이 더 실감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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