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장혜영
연재21
나는 (나라고 나인 것처럼 생각되는) 내 몸을 이끌고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면으로 마주치는 어느 문안으로 들어갔다. 눈결에 보인 간판은 무슨 카바레였다. 발목을 잡는 손길도 없지 않았으나 단호히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깃털 속옷만 걸친 쇼걸들의 나체무를 추는 카바레. 그게 어째서. 다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닌가.
은정도 따라 들어오고 정 교수와 윤미도 따라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죄송하지만 입장료 내셔야 합니다.”
현관에 들어서자 카운터직원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얼마죠?”
“450프랑입니다.”
나는 말없이 돌아섰다. 내 지갑의 돈이 모두 해서 400프랑이 빠듯했다.
그 다음 내가 들어간 곳은 어느 록 클럽이었다. 다행이도 입장료는 100프랑이기에 나는 요금을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날이 어둡지 않았는데도 홀 안은 일요일여서인지 젊은이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뽀얀 담배연기, 홀 안을 어지럽게 누비는 장식등불빛, 떠들썩한 취객들의 잡담소리, 술잔 부딪치는 소리, 따다닥- 툭탁거리는 드럼의 연주소리, 미친 듯이 육신을 비틀어대는 춤꾼들……
금방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폭격이라도 맞은 듯 헤어스타일이 고슴도치처럼 푸시시한 한 아가씨가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얹는다.
“안녕.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려면 이런 것이 필요하실 텐데요.”
허리를 굽히자 아가씨의 젖가슴이 와르르 땅바닥에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내 턱밑에 내민 그녀의 손바닥엔 하얀 알약 몇 개가 있었다. 엑시터시였다. 대학캠퍼스 내에서도 이런 마약들이 종종 암거래된다.
몇 알 집어 들었다. 이건 자신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학행위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어쩌면 엑시터시야말로 나의 의식 속에서 나를 지배하는 저 오만무례하고 끈덕진 낙서와 흔적들을 모두 제거하는 유력한 에너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요행심리도 없지 않았다.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한 뒤 나는 막 배달된 맥주를 컵에 따라 엑스터시를 그 속에 떨어트려 단모금에 바닥을 비웠다. 조금 후 의식이 흐리멍덩해지자 이어 서서히 침습되는 황홀경을 체험하면서 나는 오로지 공부 하나에만 열중했던 자신의 유학생활이 모두 허망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파도처럼 전신의 구석구석으로 번져가는 몽환 같은 약 기운에 떠밀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느 아가씨의 손목을 잡고 홀로 나갔다. 내 눈에는 아가씨의 심하게 노출된 가슴과 계곡의 비옥하고 깊숙함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기름진 윤기가 그 계곡으로 흘렀고 믿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유방이 세차게 비틀어대는 춤동작에 따라 강한 스프링처럼 탄력 있게 흔들렸다. 황홀하고 현란하고 어지러웠다. 애조가 어린 리듬 앤드 브루스 곡에 컨트리음악이 가미된 록 롤의 열광적인 선율에 맞춰 나 또한 그녀가 리드하는 대로 전신을 비틀어대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몸이 영 내 것 같지 않게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쇠막대기처럼 꿋꿋하기만 하다. 나는 금시 땀투성이가 되었고 숨이 차 헐떡거렸다. 다행이도 약효의 덕분으로 당금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탈진한 육신을 간신히 버텨낼 수 있었다. 여자의 살진 가슴이나 어깨, 엉덩이가 내 몸을 스칠 때마다 나는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여체는 그대로 불덩이 같았다. 은정도 내 곁을 돌았고 윤미도 내 옆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굳어졌던 내 몸이 유연하게 풀리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팔과 다리 허리와 어깨는 내가 뜻하는 대로 조금도 거침없이 움직여주었다. 나는 신이 난 나머지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춤사위를 펼쳐나갔다. 두루미가 되어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예는 것 같았고 꽃잎이 되어 봄바람에 산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가씨의 경악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춤이죠?”
그제야 나는 주위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나에게 집중되어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그때까지 추고 있던 춤사위는 그 무슨 현대무인 록이나 댄스가 아닌 할머니가 굿을 할 때 추던 굿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깜짝 놀란 나는 너무도 무안한 나머지 사람들 속을 뚫고 허망지망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아니, 내가 왜 무당춤을 추었지?! 생전 춰본 적도 없는 춤이잖아. 어렸을 때 할머니네 집에서 장난삼아 지전이나 부채 또는 방울이나 삼지창을 들고 놀았던 일 말고는. 지금껏 무대에서 연주되던 반주음악이 할아버지의 해금, 장구, 태평소, 피리연주로 들렸다는 사실도 늦게야 깨달았다.
내가 정신이 나갔나봐. 그 모든 것을 다 잊으려고 여길 찾아 왔잖아. 그런데도 그것들은 나를 물고 늘어진 채 한 치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나를 지배하려고 한다. 나를 저희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한다. 어딘가 깊숙이 칩거했다가도 내가 방심하는 틈을 타 뛰어 나오곤 한다. 그 지워지지 않는 낙서들, 흔적들은 나를 보잘 것 없는 노리개로 여긴다.
진저리가 난다. 소름이 오싹 끼친다.
광장에 나섰지만 정작 갈 곳마저 없었다. 자취방은 또 하나의 감옥일 따름이다. 속박의 공간, 그곳에는 나를 괴롭히는 온갖 흔적들과 낙서들이 도사린 채 대기하고 있다. 은정의 기억, 정 교수의 회유, 윤미의 전화, 마르셀교수의 리포트, 엄마아빠와 할아버지할머니……
나를 칭칭 감고 꽁꽁 얽어매는 이 모든 속박들에서 멀리, 아주 멀리 도망가고 싶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기차를 타고 유람선을 타고……
그래서 지하철을 탔다. 갈아타고 또 갈아탔다. 퍽이나 멀리 도망쳤을 거라는 판단이 서서야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나왔다. 거리 몇 개를 지나고 무슨 공원도 지나고 어느덧 나는 어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내 눈앞에 나타난 방 번호는 2080이다.
아, 2080호. 방 번호가 눈에 익다.
그렇다. 윤미네 방 번호다. 그날 그녀와 그 사건이 벌어질 번했던 그 방이 틀림없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한 기분이다. 멀리 도망간다고 피해온 곳이 윤미네 아파트라니 말이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찾아온 것이다. 누군가 내 손목을 잡고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아버지가 과부네 집에 달려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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