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8
그러나 화선지위에는 어지러운 색채의 덩어리들만 덧 낙서될 뿐 형태는 갈수록 윤곽을 잃어갔다. 기억자체가 혼란스러웠다.
윤미는 붓질을 잠간 멈추고 사르르 눈을 감았다. 인당스님한테서 배운 무념법의 삼매진입을 시도해보았다. 유식唯識을 현혹하는 허망한 상相을 무화시키고 본성에 대한 생각을……
갑자기 휴대폰벨소리가 그녀의 명상을 깨트렸다.
“여보세요.”
느닷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성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번호확인도 하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니 오늘은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걸까.
“줄리아니. 거기 어디냐. 학교냐?”
그러나 전화를 넣어준 사람은 성진이 아니라 앙리부인이었다.
“어머니. 나 지금 몽마르트언덕에 있어요. 리포트작업 때문에……”
“드뇌브도 같이 있니?”
“네.”
언제나 쌀쌀맞고 섬뜩한 느낌이 드는 앙리부인의 목소리는 윤미를 긴장하게 했다.
또 무슨 일이지?
“나 지금 파리에 와 있으니까 얼른 집으로 들어오너라.”
파리까지 행차한 걸 보니 예삿일이 아닌 것 같다.
“어머니.”
그러나 통화는 늘 그러했듯이 일방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날이 서고 맵싸한 독이 오른 억양이 불길한 예감을 던져온다.
“어머님이십니까? 파리에 오셨대요?”
사냥개처럼 냄새를 잘 맡는 드뇌브는 어느새 눈치를 채고 화판을 부랴부랴 거둔다. 그는 윤미보다 앙리부인을 더 좋아는 것 같다. 하긴 윤미와의 혼약도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제외된 채 그들 두 사람이 꾸며낸 작품이니까.
말없이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갖고 드뇌브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앙리부인은 윤미의 이마에 삿대질을 해댔다.
“야, 이 못난 계집애야! 내가 널 서양화를 배우라고 파리에 보냈지 너더러 화상이 되라고 돈 퍼주고 전세방까지 구해서 대학에 보냈냐. 저게 다 무슨 귀신딱지들이냐?”
앙리부인은 이번엔 돌아서서 사잇문이 활짝 열린 침실에 대고 손총을 쏘아댄다. 팔을 흔들어댈 때마다 그녀의 비대한 몸집에 주렁주렁 매달린 비곗덩어리들이 덩달아 출렁거렸다. 부인이 가리킨 침실에는 작은 청동미륵불상과 촛불, 향대, 인당스님이 준 염주, 목탁 같은 불교용품들과 『천수경』, 『화엄경』, 『법화경』같은 불경들이 진열되어있었다. 앙리부인의 굵은 손가락은 그런 물건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침실을 거쳐 거실까지 한바퀴 빙 돌아 나왔다. 거실에는 사찰들과 인당동자스님, 대공스님, 큰어머니를 그린 그림들이 도처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드뇌브 자넨 왜 이런 걸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나.”
그녀의 살이 져 뭉툭한 손가락은 드디어 윤미의 옆에 공손한 자세로 시립하고 서있는 드뇌브의 이마빡에까지 날아와 사정없이 박혀든다. 사실 윤미는 드뇌브에게 키스를 허락하는 교환조건으로 그녀가 집안에 불교용품들을 구입해 들이고 동양화를 몰래 습작하는 사실을 앙리부인에게 알려주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 결국 똥개가 먹이에 군침을 흘린 나머지 자기소임인 대문경비를 게을리 하여 도둑을 눈감아준 셈이다.
“부인. 그게 저…… 어떻게 된 일이냐면……”
드뇌브는 한번 실수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지나 않을까 우려되는 듯 다급히 설득력 있는 구실을 골라내느라 횡설수설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앙리부인도 드뇌브의 수다를 아는지라 그의 궁한 변명을 단마디로 까뭉갠다.
“듣기 싫어요.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어. 그리고 줄리아 넌 거기 멍하니 버티고 섰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저 잡동사니들을 밖에 내다버려!”
너무도 뜻밖의 호령이라 윤미는 한동안 말을 못하고 애원어린 눈길로 앙리부인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어서 버리지 못해! 내 발로 다 짓밟아버리기 전에. 그리고 이 녀석은 누구냐? 지난번에 집에 끌어들였다던 그 사내냐?”
앙리부인은 테르트르광장에서 스케치한 성진의 초상을 집어 들고 노려본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가슴이 섬뜩해졌다. 설마 앙리부인이 20여 년 전 한국에서 그녀를 입양할 때 사찰에서 작별을 고하던 인당스님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드뇌브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명령을 거역했다간 더 큰 화를 부를 테니 어서 순종하라는 뜻일 것이다.
앙리부인은 그림을 와락 구겨서 쓰레기통에 홱 집어넣었다.
윤미는 앙리부인의 분노를 달랠 길이 없음을 확인하자 하는 수 없이 쓰레기봉투를 꺼내어 그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앙리부인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서 과거의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버리려고 하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추억 속에서마저 추방하려는 걸까? 그런데도 그 모든 것들을 한사코 끌어안으려고 하는 나 자신은 또 왜 이러는 거지?
윤미가 훌쩍거리는 걸 보자 민망했던지 드뇌브가 제 딴에는 그녀를 도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부인, 원로를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일단 나가서 식사나 합시다. 제가 누아네트 다죠를 잘 만드는 레스토랑에 모시겠습니다.”
껑충한 키꼴에 어울리지 않게 고양이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앙리부인의 눈치를 흘끔거리며 슬슬 그녀의 등을 밖으로 떠밀어냈다.
“윤미 씨도 식사나 하고 해요. 내가 와서 도울 테니까.”
“오늘 낼 중으로 다 내다버려야 한다. 다음번에 왔을 때 다시 저 도깨비 물건들이 보이는 날엔 넌 그날로 대학이 마지막이라는 걸 명심해라. 리옹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될 각오를 해야 돼.”
일단 위기에서 모면하기는 했지만 이번엔 또 드뇌브에게 빚진 대가를 치를 일이 찜찜하다. 공짜라고는 한 푼어치도 바랄 수 없는 드뇌브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주고도 키스를 받아내는 치사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어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을 지켜내야만 한다. 거기까지는 비록 대가를 바라고, 교환조건을 예상한 도움이기는 했지만 위기를 넘겨준 드뇌브의 일조가 고마웠다.
다행이도 앙리부인은 식사가 끝나자 그길로 차를 운전하여 리옹으로 돌아갔다.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알아서 처리해라. 두 번 용서는 없다는 걸 알고.”
으름장만 놓고 떠나갔다.
그런데 술이 얼근해진 드뇌브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윤미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온다. 히물히물 웃으며 슬금슬금 따라붙는 모습이 먹이를 발견한 늑대를 방불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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