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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17

by 8866 2008. 12. 6.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7

 

띠리리룽- 띠리- 띠리리룽-

느닷없이 휴대폰벨소리가 호주머니 안에서 울렸다. 휴대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면서 나는 이유도 없이 전화를 걸어준 사람이 윤미일거라는 직감을 받았다. 액정화면의 착신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나의 직감이 적중했음을 알고 적이 놀랐다. 면식한지 하루밖에 안되는 사람인데 텔레파시까지 통하다니……

받지 말아야지.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전화벨은 연달아 세 번이나 반복해 울리더니 나중에는 메시지가 날아든다.

 

어제는 즐거웠어요.

실수를 승인하고 사과하고 싶지는 않아요.

티 없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작하고 싶어요.

설마 절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전화 기다릴게요.

 

윤미

 

 

괜히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따르는 의문, 과연 설레는 이 감정이 내 감정일까. 불쑥 아빠엄마의 모습도 보이고 할아버지할머니 모습도 기억의 터널을 통과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우리 집에서는 가끔씩 나를 가운데 놓고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었다.

“이 녀석이 총기 좋은 건 이 할미를 먹고 게웠어.”

“악기 다루는 재주는 이 할아비의 피를 받은 게 틀림없다니까.”

“그래도 생긴 건 아비를 닮았어요.”

옥신각신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오로지 엄마만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난 엄마 닮았어. 그치, 엄마?”

내가 부리는 응석에 엄마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실 뿐이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닮고 싶은가?

아무도 닮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전라도방언의 영향 하나도 아직까지 내 억양에서 퇴치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 다닐 때는 표준발음을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누구든 내말을 한마디만 들으면 너 고향이 전라도지 하고 대뜸 알아맞히곤 하여 실망했었다. 전라도방언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설령 내가 서울말을 한다고 해도 그 억양에서 배어나오는 전라도방언의 냄새는 근절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것처럼……

전화를 할까 말까. 나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선택 앞에서 망설였다. 아침에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와 나를 한동안 망설이게 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이 진정 내 마음인가? 창가에는 엄마의 모습이 어른거릴 뿐이다.

성진아. 아니, 프루스트. 제발 너 자신의 진정한 의지를 좀 보여 다오!

윤미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저만큼 시야에 잡힌다. 그녀가 베란다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부르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녀는 절 좀 도와주세요, 할 것이고 이어 단추가 하나 둘 벗겨지고……

아버지의 거친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아버지, 왜 절 자꾸만 쥐고 흔드는 겁니까. 제발 좀 절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나는 급기야 얼굴을 싸쥐고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못나게도 빌빌 울고 있는 나만이라도 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5

 

 

 

 

윤미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마음은 테르트르광장에 가 있었다. 몽마르트언덕을 올라올 때 슬쩍 들러보았지만 동자스님을 닮은 성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인연이 하루 만에 끝나버리는 걸까. 늘 『화엄경』중의 한 구절을 들려주곤 하던 인당스님의 말이 새삼스러워진다.

 

모든 현상은 꿈과도 같고 모든 행동은 진실이 아니다

 

설사 꿈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흔적은 남았을 것이 아닌가.

“그림은 그리지 않고 어디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습니까?”

드뇌브는 그림보다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 신경을 쏟고 있다.

“인상파화가들은 빛과 색채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니까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석양빛을 빌어 순간적 인상을 화폭에 옮겨내야 합니다.”

순간포착, 빛의 변화, 인상, 현장스케치…… 이러한 것들이 인상파화가들의 화법이라는 걸 윤미도 드뇌브 못지않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의 인상을 도대체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흰색의 사크르쾨르성당은 붉은 낙조의 낙서에 의해 노란색을 띠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회색 어스름이 밀려들며 자주색으로 변하면서 그 명도와 포효도가 증발하고 있었다. 가벼움과 천박함에서 침묵과 우울로 변하는 빛의 변화. 모네의 그림 『루앙대성당』은 빛의 순간적 인상을 화폭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윤미의 눈에는 그냥 색채덩어리들의 무질서한 낙서들로만, 순간과 순간들의 낙서들로만 보였다. 구륵법처럼 선 몇 가닥으로, 몰골법처럼 명암만 다른 동일한 색 몇 터치로 낙서의 중첩을 거부한 동양화는 단순하지만 명료하고 시간의 속박에서 해탈한 초연함까지 있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던 인당스님의 『화엄경』말씀처럼 하나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순간은 현재의 낙서이다. 그러나 포착된 순간을 화폭에 옮기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순간은 이미 현재가 아닌 과거의 흔적일 뿐이다. 그 위에는 이미 새로운 현재인 순간이 낙서되고 있다. 낙서와 덧 낙서, 흔적과 덧 흔적의 중첩! 과거로 된 흔적은 지워지는가, 중첩되는가? 아니면 기억 속에 보존되는가? 그도 아니면 덧 낙서와 공존하는가? 현재의 과거 화와 미래화의 3중성, 3차원관계는 시간의 과정을 거부하는 순간과 시간의 과정 속에서만 존재 가능한 회화繪畵의 모순으로 인해 포착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순간포착은 인상(모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때의 인상은 벌써 현존의 순간이 아닌 과거화된 흔적이다. 똑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결국은 기억과 흔적에 의존하는 동양화의 수법을 대용하지 않을 수 없다. 추상에 의해 과거로 추방된 흔적을 현재화시키는 동양화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윤미는 더 이상의 관찰을 포기했다. 매순간마다 변화하는 빛의 변화를 화면에 옮긴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순간만이 존재할 뿐 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 당도하여 처음으로 성당을 관망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붓질을 해나갔다. 어느 한 순간만을 그려도 그것은 사크르쾨르성당일 것이다. 진정한 순간은 오로지 관념 속에만 있다. 변화하는 현실적 흔적들을 종합하느니 차라리 관념적인 순간을 부각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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