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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14

by 8866 2008. 11. 20.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4

 

나는 순식간에 다리맥이 쫙 빠져나가 그냥 카펫위에 풀썩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내 혈관 속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피만 흐르고 있을까? 나에게 속한 피는 한 방울도 없을까?

“넌 국악을 전공해야 돼.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정 교수의 권고를 따랐어야 했던 걸까.

그러나 그는 국악이 싫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굿 음악이 싫다. 내 몸 안에 흐르면서도 내 것이 아닌 피가 싫다.

스트레스만 받으면 센 강가로 달려 나오는 것이 인젠 습관이 되었다.

습관!

그 역시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고 누군가 타자의 손길에 조종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파리의 하늘엔 여름의 무더위만 기승을 부릴 뿐 비 한 방울 뿌리지 않는다. 센 강변은 관광객들과 한낮의 피서객들까지 가세해 더구나 부산스러웠다.

나는 시테섬 기슭의 바토 브테트 퐁 뇌프승선장 부근의 우거진 밤나무 숲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바이올린과 오선보도 학교에 버린 채로 나왔기에 몸도 홀가분했다. 작지만 고풍스러워 보이는 유람선이 승객들의 탑승을 마치고 출항준비를 하며 뱃고동을 길게 울린다.

드뇌브라고 자칭 소개하던 프랑스인만 방에 나타나지 않았어도 어제 나는 윤미와 그 일을 했을 것이다. 그녀의 나신을 보는 순간 육신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고 정욕의 불길이 잠자던 생식기를 쇳덩이처럼 벌겋게 구워냈다. 숨결은 거칠어졌고 근육은 푸들푸들 경련했다. 육신 전체가 하나의 욕망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해나갔다. 그 순간에는 은정에 대한 죄책감, 불륜감, 결과에 대한 유려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난동하는 수욕 하나에 질질 끌려 다녔을 뿐이다. 은정의 지배권에서 도피하려는 무의식적 저항이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아침에야 건져낸 나 자신의 망동에 붙인 한 조각의 어설픈 구실에 불과했다.

은정과의 정사도 따지고 보면 단순한 수욕의 결과물이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확인도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과속은 선택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누구에게나 결과는 불리함으로 이어질 것이고 서로를 얽매는 구속이 될 거라는 우려 같은 것은 없었다. 그 한번의 정사가 나를 국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정 교수가 의도적으로 던지는 사윗감이라는 미끼를 물어 그녀가 던진 그물에 스스로 걸려드는 결과를 초래할 거라는 위기감 같은 것도 없었다. 단지 하나 수욕 그것뿐이었다.

육신의 욕망에 끌려간 행위, 그것은 과연 나 자신의 의지였던가? 본능이란 나 자신의 의지를 말하는 건가? 어제의 사건이 은정의 구속에서 해탈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였다면 은정과의 성행위는 또 누구의 의지인가?

장맛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어느 여름날, 엄마는 읍내 장에 가고 집에는 아버지만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쫓겨 할머니네 집에 놀러갔으나 문이 잠겼기에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안에서는 뜻밖에도 이웃집 과부와 아버지가 벌거벗고 뒹굴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구슬땀이 철철 흘렀지만 과부의 몸뚱이를 배 밑에 깔고 누워 엉덩이를 힘차게 들썩거렸고 밑에 누운 과부는 아버지의 목에 동동 매달려 자지러진 비명을 질러댔다. 아버지의 가슴에 짓눌린 과부의 풍선 같은 젖가슴은 옆으로 삐어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이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렸다.

“이놈아! 거기 멍하니 버티고 서서 뭘 봐? 썩 꺼지지 못해! 종아리를 분질러 놓기 전에!”

뒤늦게야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쓰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동네방네에 소문이 자자했고 그 때문에 엄마와의 싸움도 잦았다. 아버지는 종일 술에 녹초가 되어 다녔고 취중에는 유부녀고 과부고 아가씨고 가리지 않고 가능만 하면 닥치는 대로 덮쳐들어 간통했다. 간통은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생활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호방하고 방탕한 성격과는 달리 엄마는 종일 가도 말 한마디 없는 우울하고 소심하고 속이 꼬깃꼬깃한 성미였다.

“성진아. 제발 아버지를 닮지 말라.”

엄마는 아버지가 추문을 일으킬 때마다 남몰래 울면서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멀어서 안 닮겠냐. 그 아비에 그 아들이지. 제 핏줄인데 판에 박아 놓은 거지. 닮지 않으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져라.”

외할머니는 자살한다고 극약을 삼켰으나 응급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재생한 딸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위에게 향한 저주를 모름지기 손자에게 퍼붓곤 했었다.

그럼 본능은 유전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배우지 않고도 은정과의 첫 섹스를 그렇듯 무난하게 해낼 수 있었을까. 아버지처럼 헐떡거리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그게 유전이라면 그 행위는 내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내속에 숨어있는 아버지의 소행이겠지. 나는 아버지에게 휘둘린 꼭두각시였을 것이고. 그러면 섹스를 즐겼던 나는 또 누구인가? 나는 내가 아니고 나를 지배하는 다른 내가 나이고 내속에는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또 누구누구가 있고……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수많은 흔적들과 낙서들은 내속에서 나를 희롱하고 조종하는데 그 치열한 각축전에서 진정한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잠들어있는가? 실수한 나는 아버지이고 내가 아니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는 나는 또 하나의 다른 나인가.

“자네 어쩔 셈인가? 그냥 서양음악을 전공할 건가. 은정이한테서 전화가 갔을 텐데.”

“네.”

“그래 결단은 내렸나?”

“아직은……”

“선택에도 기회가 있는 법이야. 기회를 놓치면 선택도 불가능해지는 거지. 아무튼 이달 내로 확답을 주게. 자네 의사를 알아야 우리 쪽에서도 대비를 할 거니까.”

여태 딸 은정을 대변자로 내세우던 은정의 모친 정 교수는 오늘아침엔 당신이 몸소 설득에 나섰다. 속히 귀국할 것, 결혼할 것, 국악을 전공할 것을 직접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이달 내로 확답」을 달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냉정한 최후통첩을 내린 것이다. 정말이지 은정이 순결을 바친 명분으로 나더러 책임지라고 앙탈을 부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동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르셀교수의 연이은 질책이 서양음악에 대한 나의 지향을 흔들어 놓은 것도 사실이다. 정 교수의 말처럼 나에게는 정말 국악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귀국과 국악전공, 결혼 같은 인생중대사를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자의 의지에 순종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선택 앞에서 신중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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