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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체코군단

by 8866 2008. 11. 18.

 

 

체코군단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과 4월 미국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선전 포고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에 일대 전환기가 되어 1917년 5월 마사릭은 러시아의 수용소에 있는 전쟁포로들을 석방하는 교섭에 성공하여 체코슬로바기아 용병인 체코군단을 조직하였다. 임시 정부가 확충하여 1917년 9월에는 2개 사단 약 3만 명의 대 군단으로 성장했으며 전쟁기간 동안에는 약 9만의 체코슬로바키아인이 이 군단에 소속되었다. 주로 투항한 오스트리아군 포로를 중심으로 러시아 거주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으로 편성되었지만 지휘관 중에는 러시아인 장교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1차대전이 터지자 러시아의 니콜라이2세는 러시아영토 내의 체코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편성을 요구하는 체코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처음에 이 부대는 중대규모에 불과했으나 망명자들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싸우다 잡힌 체코인 포로들 중의 전향자들, 탈주병 중의 지원자들의 보강을 받아 1917년에는 여단규모로 불어났으며 그해 가을 볼세키들의 10월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는 2개 사단으로 구성된 군단 규모(38,500명)로까지 성장했다. 그해 여름 체코의 독립운동가인 마사리크는 2월혁명 이후의 게렌스키정부와 교섭하여 이들을 미래에 독립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 편입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후에도 부대는 계속 성장하여 브레스크-리토프스크조약 즈음에는 6만 1차 대전 기간 중 동부전선에서 명을 헤아렸으며 최종적으로 4,112명 장병이 전사했다. 볼셰비키도 마사리크와의 협약을 수용했다. 당시 부대는 임시정부(게렌스키정부)시절, 프랑스참모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지휘를 맡고 있었으나 이들의 수는 십 수병에 불과했으며 현실ㄷ적으로 부대 전체를 컨트롤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볼셰비키정부는 프랑스, 체코군단과 협약을 맺어(1917년 12월) 조속히 이들을 서부전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아르한겔스크나 페트로그라드 등 러시아의 유럽지역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시베리아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 미국을 경유하여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편 이들의 무장을 보충하기 위해 5만정의 모신-나강소총이 미국에서 제작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졌다.

 

당시 우랄산맥 이동지역은 사실상 무정부상태로 각 도시에 모스크바가 보낸 활동가들이 수십명 단위로 결성되어 임시적으로 통제하는 상황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도시를 운영하는 대부분은 제정시대의 하급관리 또는 공용원들었다. 한편 시베리아철도자체는 구 철도노조가 그대로 소비에트가 되어 옛 철도관리국의 하급관리들의 보조를 받으며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바이칼호수부터는 코사크부대의 아타만이었던 세묘노프가 인솔하는 백군이 산발적으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여, 때때로 철도운행이 되지 않기도 했다. 따라서 프랑스 무관은 일본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만주리, 대련 경유의 철도수송을 의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수송행렬은 1918년 5월 경 첼랴빈스크에서 큰 사고를 일으켰다. 이 사건의 진상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은데... 그 중 가장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에 의하면 그 원인의 일부를 아마 볼셰비키정부의 부주의에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실은 군용열차는 첼랴빈스크기차역에서 며칠간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동안 브레스크-리토프스크조약에 의거하여 중앙동맹국으로 돌아가는 독일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이 중에는 소수의 체코인들도 있었다고 한다)포로들과 충돌이 새겼다. 특히 체코군단병사들은 보로실로프공세 기간 동안 대량의 헝가리군 포로를 잡았으며 이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군 포로들과의 충돌에서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다.

첼랴빈스크볼셰비키당국은 이를 진정시키고자 사태의 추종자들을 붙잡아 연행했는데 이것이 실수였다. 중앙제국 포로들과는 달리 체코 군단 병사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체포되는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무력을 쓴다는 것이 통제를 벗어나 그만 첼랴빈스크 전체를 휩쓸어 버렸다. 프랑스군에서 파견된 장교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수가 너무 적었다. 트로츠키는 그들을 무장 해제시키려했으나 체코군단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으며 이들은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순식간에 바이칼지역의 제1도시인 이르쿠츠크를 점령했다. 이 사태를 단시 연합군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치 체코군단이 동부전선을 부활시키기 위한 비장의 카드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동부전선의 부활의 촉매가 되리라고 실제로 기대한 것은 영국뿐이었다. 프랑스 역시 기대하는 바가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이들을 빨리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던 카이저대공세를 막는데 관심이 있었으며 미국 도한 그러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정부상태가 된 시베리아에서 이들의 수송을 가능하게 하려면 당시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일본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체코군단의 구출을 위한 파병이 무익하다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지만(심지어 극동러시아에서의 일본인에 대한 테러사건들조차 일본육군이 꾸민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분위기였다.)미국이 파병을 결정하자 분위기가 급반전, 최종적으로 2개 사단 7만여 명(당시 일본군 1개 사단은 3만 5천 명 가량)을 파병한다. 이들의 목표는 체코군의 구출과 더불어 시베리아 극동 3주(연해주, 흑룡강주, 바이칼주)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1918년 7월 6일 체코군의 한 부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 점령하여 연합국의 보호 하에 있음을 선언했다.

한편 제정러시아의 흑해함대사령관이었던 콜차크제독이 영국장군 녹스의 청을 받고 이들을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미일연합군도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극동러시아에 상륙했으나 막상 구조를 받을 체코군들은 영불군의 지휘 하에 옴스크로 돌진했다. 따라서 미일연합군도 이들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으며...애초에 볼셰비키정권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미국까지도 체코군을 구하려다보니 간섭연합군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7월 10일 체코군은 시베리아철도를 따라 전개해 우랄산맥을 돌파했다. 1918년 9월 콜차크휘하의 체코군은 콜차크를 수반으로 하는 옴스크(시베리아정부)정권의 수립에 큰 역할을 했으며 실패로 끝난 황제의 구출작전에도 참가했다.

옴스크정권의 수반이 된 콜차크는 우랄 코사크인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한때 그 수는 25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하비만 그는 해군출신으로 육전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육군출신인 D.A레베데프에게 맡겼데....이 때문에 망하는 군대의 전형대로 지휘계통에 관한 심한 대립이 있었다. 당시 적위군상황도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에 1919년 5월까진 우파(ufa)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새로 전장에 도착한 적위군 제5군의 사령관이 그 유명한 투하체프스키였다.

 

옴스크정권의 붕괴와 체코군단의 유럽송환

 

결국 우파는 넘어가고 시베리아전선도 점점 적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지만 당시 시베리아에서 가강 강력한 군사조직이었던 체코군단은 소중한 인적자원의 소모를 두려워한 프랑스참모부에 의해 소극적인 활동만을 펼쳤다. 옴스크도 마침내 적위군과 대치하게 되었고...�은 열전 끝에 소규모의 영불군과 일본군은 퇴각했다. 일본군은 프랑스참부에게 “왜 체코군단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는가?”라고 따졌지만 그 대답은 “콜차크 한 명과 수만 명의 체코군을 교환할 수는 없다.”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프랑스의 주의는 언제나 체코군의 병력보존에만 있었다. 게다가 미군조차 옴스크정권이 일본의 시베리아 동부 3주의 세력권화를 위한 완충지대일 뿐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유럽지역에서의 미군은 라인란트에 주둔한 16,000명을 제외하면 이미 전원 철수한 상태였다.)이제 사실상 옴스크정권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19년 11월 14일 마침내 옴스크는 적위군에게 넘어가고 남은 옴스크정권의 추종자들은 이르쿠츠크로 �겨갔다. 이 철수는 아주 무시시한 것으로 후대에 “죽음의 시베리아행진”이라 불렸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철수 도중에 동사했다.

이 시범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은 바이칼주를 제외하곤 사실상 시베리아에서 백군의 세력은 소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체코군단 역시 이러한 백군 편에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백군 병사들과 전투를 벌여 옴스크를 탈출한 후 일본군 특부기관의 보호를 받고 있던 콜차크를 체포하여 안전한 송환의 교환으로서 볼셰비키측에 인도하였다. 한때 영국, 프랑스, 일본의 공식인정을 받은 옴스크정부를 이끌던 콜차크는 이듬해 2월 처형되었다.

하지만 당시 레닌으로서도 폴란드와의 전쟁 때문에 극동에는 신경을 쏟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체코군병사들은 1920년 9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1개월 간의 휴가를 즐긴 끝에 미국을 경유, 유럽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체코군단 참모장 Radola Gajda 준장(1948년 사망)은 콜차크정권(옴스크정부)붕괴가 확실해지자 옴스크정권에 대항하여 반란(1919년 11월)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체코군단본대와는 별도로 시베리아에서 탈출하면서 아직 수중에 있던 대량의 무기를 한국 독립운동 가들에게 판매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체코군단에서 구입했다고 하는 건 좀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일본 측 자료

 

해군은 영국의 요청을 수락 1918년 1월 육전대와 함께 구식 전함 2척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했다. 일본이 형세대응에 헤매고 있는 사이 체코군단은 5월에 시베리아철도연선의 첼랴빈스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계기는 헝가리인과의 싸움이었다. 체코군단은 약 4개 여단 4~5만 명으로 장비는 소형화기에 한정되어 있었다.

제당한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사실은 윌슨의 이상주의에 의해서 붕괴 당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의 상륙

 

1918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군 해군육전대가 상륙했다. 8월 11일, 제12사단(오오이 시게모토)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그리고 연해주(우스리) 흑룡주(프리암르) 동부를 9월 18일까지 제압하며 블라고베센스크에 당도했다. 한편 만주로부터는 제7사단을 치타에, 3사단(오오바 지로)은 The Baical주에 진격시켰다. 이 3개 사단(교대가 있지만) 약 7만 명은 이후 4년 3개월 동안 시베리아에 주둔하게 된다.

한편 미군도 7000명의 부대를 상륙시켰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고 체코군의 탈출을 지원하라는 본국의 지시에 따라 체코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체코군은 도리어 영-불군의 지휘 하에 모스크바공략을 노리고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백색정권 수립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기 전부터 육군은 백군의 응원을 개시하고 있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러시아의 내전은 제1차 대전과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다. 즉 기병끼리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대도시를 제외하면 기병의 전초전에서 대부분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1921년의 소련~폴란드 전쟁까지 계속되었다. 도시와 철도연선을 중심으로 주둔한 일본군은 수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기병중대를 상당수 보유했지만 마필 총량은 15,000마리로서 병원兵員의 수에 비해 적었다. 당연히 적군, 백군 모두 기병이 중심인 코사크가 전면에 나서서 싸웠다. 원정군, 간섭군은 항만 또는 철도를 중심으로 한 도시에 갇혔다. 일본군도 실제로 부두와 철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군사행동이 곤란했다.

일본육군의 백색정권 수립 공작은 10월 혁명 발생 때로부터 진척되고 있었다. 단지 이 단계에서는 정부가 크게 관여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육군이 정권 수립에 임해 적임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에, 트랜스 바이칼(트랜스 바이칼은 바이칼호수 주변의 시골을 포함한다. The Baical은 호수 주변의 주의 이름이다.)의 두령(아타만) 세묘노프가 첼랴빈스크와 교전을 개시해 거점을 만주마을에 설치했다. 그때 부하는 110명에 지나지 않았다.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백군으로 활동한 것은 세묘노프뿐이지만 야심가는 많이 있었다. 세묘노프는 제정러시아군시절 대위이며 그야말로 관록이 부족했다. 그런데 4월, 흑해함대사령장관 콜차크가 돌연 도쿄에 나타나 자신이 극동 백군의 지도자라고 자칭하기 시작했다. 없었을 것이다.

한편 적군은 라조라고 하는 수수께끼의 유태인이 인솔한 부대가 The Baical주를 중심으로 세묘노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세묘노프군도 우스리스크의 코사크 카룸이코후, 아무르의 코사크 가모후가 합류해 2000기를 넘기 시작했다.

한편 레베데프라고 하는 인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백색정권을 수립했다. 일본해군은 육군과는 달리 이 정권을 지지했다.

영국은 체코군단을 첼랴빈스크로 보낼 생각이었다. 트로트키에 의한 체코군단의 무장해제 요구는 실패였다. 체코군단에 대한 무장해제는 홍군의 무기 부족을 보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7월 6일, 체코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완전 점령하고 연합국의 보호 하에 있음을 선언했다. 현지에 있던 소련정부의 요원 수 명이 교전 시에 사망했다. 체코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 한 뒤 프랑스 쟈난 중장의 지휘 하에 부대를 반대방향으로 서진시키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고 또 만주로부터 군을 이동시키면서 동부 3주의 치안은 급속히 회복되었다. 당시의 소련은 혁명 후여서 절망적으로 식료사정이 어려웠는데 시베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만주로부터의 물자가 유입하게 되어 시베리아에서의 기아 상태는 점차 개선되고 있었다. 그런데 시베리아철도는 중립적으로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동서로 이동했다.

8월말까지 프랑스는 아난군(베트남 북부의 지명이지만 베트남인을 중심으로 연대가 결성되고 있었다.)1개 대대(1200명), 영국군 1개 대대(그르카병을 중심으로 하는 홍콩 주재 부대)가 포염 전개를 종료했다. 그런데 일본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영-불군은 포염으로부터 갑자기 옴스크로 돌진했다. 그때 이미 옴스크 진주를 종료한 체코군과 미리 짜고 든 극본이었다. 9월말에는 일본군은 The Baical에서 포염까지, 체코군단은 옴스크에서 포염까지, 영-불군은 옴스크, 미군은 포염만을 전개한 포진이 되었다. 극동에 주둔한 연합국군이 각기 행동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고 포염파견군사령부(오오타니 요시히사)를 수립했다. 일단 이 사령부가 체코군단, 영-불군, 미군, 일본군 그리고 그 밖의 8개국 군을 통괄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대화소통이 전혀 불가능했다. 당시 육군은 타국의 정규군을 지휘하는 교육은 전혀 받지 않았다.

 

첼랴빈스크에 의한 황제 일가의 살해

 

1919년 7월 10일 레닌은 4월 30일 예카체린브르크로 이송되고 있던 니콜라이2세 황제 일가의 살해를 우랄 소련 군사위원 고로시쵸킨에 명했다. 황제 일가는 기사 이파체프가 소유하고 있던 관저에 유폐되고 있었다. 7월 16일, 예카체린브르크의 최카(비밀경찰 KGB의 전신) 차석 유로프스키가 인솔한 처형단 12명이 관저의 지하실에서 황제 일가 7명과 근친자 3명 합계 10명을 총기로 살해했다. 사체는 트럭으로 옮겨져 가까운 폐갱에 던져졌다. 그리고 수류탄을 투하했다. 유로프스키는 살인현장이 발견되지나 않을까 불안한 나머지 며칠 후 시신을 다시 파내어 트럭에 실었다. 그런데 트럭이 진창에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해머로 박살낸 다음 땅에 매장했다.

체코군은 황제살해사건이 벌어진지 일주일 뒤 예카체린브르크에 들어갔다. 콜 지퍼는 사건의 엄정한 조사를 명해 유품이나 증언인 정도의 윤곽은 잡을 수 있었다. 레닌은 여러 나라의 비난을 면하기 위해 다음 해인 1920년에 사회혁명당원 25명을 체포해 그중 4명을 황제 살해의 죄로 처형했다...


 

‘한밤중에 무슨 사진을 찍는다는 거야?’
갑작스러운 명령에 일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지하실로 내려가 두 줄로 나란히 섰다. 이들이 달아났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사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지하실에 들어선 사람은 사진사가 아니라 무장한 병사 10여 명이었다. 누구인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간단한 처형명령서가 낭독된 뒤 총알이 난사됐다.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은 총검에 찔려 마지막 숨이 끊겼다.
1918년 7월 16일 밤 우랄 지방 예카테린부르크 근교.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는 이렇게 처형됐다. 3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 온 로마노프 왕가도 14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894년 부황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즉위한 니콜라이 2세는 군주로서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천성이 소심했고 지적인 자질은 거의 없었다. 좋아한 것은 그저 군대의 제복과 계급장, 행진 같은 것뿐이었다.
그는 제국의 유지를 위해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펼쳤다. 유대인을 상대로 대규모 약탈과 학살을 방조했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끌려들어가면서 나라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내각의 대신들을 불신하고 황후 알렉산드라의 말에 따라 심령술사와 신앙요법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악마의 사제’로 불린 괴승() 라스푸틴이 황실을 움직였다.

 

한국일보 자료

 

1918년 5월14일, 러시아 중부 첼랴빈스크시. 체코군단이 총을 들었다. 체코군단은 오스트리아에서 강제 징집돼 러시아군에 잡히거나 투항한 체코출신병사들을 독일과 싸울 군대로 재편성한 외인부대.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고 연합국대열에서 이탈한 레닌에게 체코군단은 뜨거운 감자였다. 독일과 계속 싸우겠다며 항전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체코군단을 러시아에서 빼내 프랑스 전선에 투입하자는 연합국의 종용에 대한 레닌의 선택은 우회귀국. 국경을 바로 넘기가 여의치 않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를 돌아 선박으로 유럽전선에 보내는 길을 택했다. 문제는 시베리아열차편에 독일군 포로도 같이 있었다는 점. 독일, 오스트리아군포로들과 체코군단의 우발적 충돌을 정리한다며 붉은 군대가 체코 병사들을 구금하자 군단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결과는 붉은 군대의 완패. 체코군단 4만 7,000여명은 교통의 요지인 첼랴빈스크시를 완전히 점령했다. 군자금도 없었던 체코군단은 갈수록 강해졌다. 수천 량의 열차와 러시아 황제가 감춰뒀던 금괴며 무기를 탈취한 덕분이다. 시베리아철도노선에서 은행과 우체국, 신문사까지 운영하며 동진을 계속하던 체코군단의 소식은 전 세계에 체코독립의 당위성을 알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또 다른 체코군단이 만들어졌다. 무기는 물론 병력까지 보낸 열강의 지원에 힘입어 체코군단은 첼랴빈스크 사건 발생 2년 후 전원 블라디보스토크에 안착, 고국 행 배에 올랐다.

귀국 직전 체코군단은 자신들처럼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조선청년들과 만나 패물을 받고 무기를 넘겼다. 당시에 로씨야는 홍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군단이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체코군단의 무기로 무장한 독립군은 청산리에서 청사에 길이 빛날 대승을 거뒀다. 요즘도 체코에서는 조선의 금가락지와 금비녀, 옥구슬을 간직한 체코군단의 후손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고 한다.

 

인터넷사이트 자료

 

러시아로 들어갔던 외국군대 중에서도 우연히 이 분쟁에 말려든 체코군단처럼 오랫동안 싸움을 계속했던 부대는 없었다. 또한 체코군단만큼 효과적으로, 그리고 그 절반 정도로나마

좋은 목적을 위하여 싸운 군대도 없었다.

이 부대는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 및 탈주병으로 편성된 4만 2천명의 체코군단이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과 나란히 대 독일전쟁에 참가했던 것이다. 연합국은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하자 볼셰비키에게 체코군단의 고국 송환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체코병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적의를 품고 있던 중앙위원회는 서쪽으로 통하는 길을 이들에게 거부했다. 그 때문에 체코군단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5,000km의 길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여기서부터 다시 배를 타고 서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 체코군단은 그것을 무시한 채 총을 메고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불안을 느낀 볼셰비키가 출발 직전에 그들을 무장해제하려 했다. 이것은 실수였다. 체코병들은 금새 그곳의 적군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보선구를 점령하여 기관차, 객차, 화차를 모은 열차를 편성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들은 가는 도중에 몇 가지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중에는 백군을 원조해 달라는 윈스턴 처칠의 요청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백군사령관 알렉산드르 콜차크 장군 밑에서

적군과 싸우기도 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초기의 목적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체코군단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노획한 무기로 열차를 더욱 튼튼히 무장하여 더욱 강력한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병사들은 도중에서 태운 여자들과 함께 그리운 고국의 풍경을 그려서 개조한 유개열차 안에서 지냈다. 잡동사니 차량으로 구성된 이 열차에는 은행, 우체국 그리고 체코말로 발행되는 신문도 있었는가 하면 임자 없는 재물을 탈취하여 적재한 차량도 있었다. 화차 29량에는 금, 은, 백금, 보석이 가득히 실려 있었다.

목적지 가까이까지 와서 그들은 적군의 대군을 만났다. 그들은 재물을 실은 차량을 제공하고 콜차크를 적군 총살대 손에 넘겨주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자유통행을 요구했다. 그들의 조건은 받아들여졌다.

 

1920년 말, 2년이라는 기나긴 세월과 2만4,000km를 답파한 방랑의 여로 끝에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고국은 체코슬로바키아란 신생 독립국이 돼 있었다.

 

체코군단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과 싸웠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군 포로들 중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인 위주로 이뤄진 군단이었으며 연합군 측으로 전향한 이들 포로들은 3만면 이상의 병력편제로 구성된 정규군단으로(이 당시 유럽 각국의 군단은 2개 사단 3만 명이 정수였음) 동부전선에서 과거의 아군과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던 이 군단은 러시아가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독일과의 전쟁에서 떨어져나가자 연합국의 요청에 의해 서부로 이송되어 서부전선에서 계속 독일-오스트리아군과 전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복잡한 사정(러시아와 연합국, 독일과의 외교 분쟁)으로 인하여 이들은 어쩌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송환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연합국은 이들의 송환을 요구하면서도 러시아혁명 직후 발생한 적-백 내전에 이들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또한 과거의 적군이자 연합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 체코군단을 불신한 볼셰비키의 적군군사위원회(레닌과 더불어 유명한 트로츠키가 적군군사위원회의 수장이었지다)는 이들을 서쪽으로가 아닌 동쪽으로, 시베리아에서 배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빙 돌아서 귀환하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내전 상태인 러시아 내에서 정예군인 체코군단은 무장을 해제할 생각이 없었던 데 반해 이들이 백군에 가담할 것을 우려한 적군은 무장을 해제시키려 하여 충돌이 일어났고 이들은 가볍게 적군을 물리친 후 자체적으로 차량을 징발하여 동방으로의 머나먼 여정에 나서게 된다. 중간에 이들은 연합군의 요청으로 백군에 가담하여 1918년 여름부터 이어진 러시아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백군은 내전 초반에 우세를 유지하였다.

 

또한 이들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1차 대전 직후의 연합국세력이 갓 생겨난 사회주의국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출병하였으며 일본군과 미군이 시베리아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중 유럽각국의 군대와 미군은 1년 여 정도의 개입 후 적군이 우세하게 되자 철수하였으나 일본군은 2개 군단 7만 3천명의 대병력을 시베리아에 진주시켜 이권을 탈취하려 시도하였으며 이후 만주의 관동군은 2차 대전시기까지 러시아의 시베리아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대치하는 정세가 이어졌다.

체코군단은 혼란한 러시아의 대륙횡단철도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수 천량의 철도화차 안에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였으며 이들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세력은 누구건 전투를 벌였다.

 

마침내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들 체코군단은 이제 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적군과 교섭하여 재물과 백군 인사들을 넘겨준 후 무장을 해제하고 고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장을 처분하면서 당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세력을 확충하던 독립군과의 교섭에 나서게 되고, 그 결과물로 1,200정의 소총(주로 모신-나강 위주)과 80만발의 탄약, 박격포 2문과 기관총 6정 등 다량의 당시로서는 신식무기를 넘겨준다. 이 무기들은 곧바로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의 주력무기로 사용되어 일본제국군을 도륙하였으며 당시 만주지역 무장독립 세력의 주력무기가 거의 체코군단의 재고 무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콜챠크

 

러시아 해군대장.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러·일전쟁에 종군해 수뢰정장(水雷艇長)에 임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주로 기뢰작전을 지휘하였다. 1916년 여름 흑해함대사령관이 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후 수병(水兵)과 대립해 사직한 후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10월혁명 후 극동·시베리아로 돌아와 영국의 지지 아래 활동하다가 1918년 11월 4일 옴스크에서 성립된 시베리아정부 육해군장관이 되었고 그 달 18일 쿠데타로 군사정권을 수립, 러시아국가최고집정관이라고 자칭하였다. 1919년 3월 모스크바를 목표로 대공세에 나섰으나 적군(赤軍)의 반격을 받아 패하여 이르쿠츠크에서 총살되었다.

 

사실 알렉산드르 콜챠크 제독의 경우 군인 이전에 극지 탐헙가(�었을 때에는 아주 유명한 북극 탐험가로 한 때에는 '북극' 하면 그의 이름이 떠오를 정도임)로 유명하였고, 볼셰비키 혁명 후에는 결국 시베리아 옴스크 지방에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백군정부(흔히 옴스크정부 라고 함. 백군 내부 사이에서도 권력투쟁이 상당히 심하였는데 그는 일련의 쿠데타 이후에 백군의 사실상 혹은 명목상 총사령관의 지위에 오르게 됨)를 세워 치열하게 레닌-트로츠키의 볼셰비키 세력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이때 소위 '옴스크의 황금; 이라고 하여 제정러시아정부로부터 넘겨받은 막대한 양의 황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황금은 적-백 내전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 기자들을 초빙하여 그 존재를 보여줌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다만 이 황금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데, 즉 당시 시베리아지방에 주둔하고 있었던 체코 군단(원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의 체코군 병사들의 집단으로 1차대전 때에 러시아 군에 포로로 잡힌 후 러시아제국에 의해 反오스트리아-헝가리를 표명하는 군사집단으로 성장(사실 이 부분은 적군 포로를 이용한 행위로 제네바협정 위반임)한 것이 그 시초. 적-백 내전 중에 그들은 발이 묶이어 시베리아에 갇힌 상태이었는데, 그들은 곧 이어 무력을 사용하여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완전 장악하고 시베리아 지방에서 反볼셰비키 세력의 중요한 축이 됨.)이 알렉산드르 콜챠크 제독이 가지고 있었던 막대한 양의 황금을 시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콜챠크 정부가 볼셰비키 세력에 쫓기게 되었을 때, 이 체코군단이 장악하고 있었던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하여 탈출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체코군단에서는 오히려 이를 황금을 빼었을 좋은 기회로 보고 일련의 속임수와 배신을 거듭하여 결국은 황금을 실은 기차(8량 이던가)를 모두 빼앗고 알렌산드르 콜챠크 제독을 일단의 급진파 사회주의자 그룹에게 넘기게 되고 이들이 그를 다시 볼셰비키 군에게 인도하게 되어 결국 그는 볼셰비키 군에 의해 총살당한다. 한편 황금을 빼앗은 체코군단은 이 황금을 가지고 볼셰비키 정부와 협상을 벌이는데 이 협상에 따라 그들은 황금을 볼셰비키에 넘기고 대신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안전한 출구를 보장받고 전원 미국을 거쳐 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오게 된다. 문제는 과연 이들이 알렉산드르 콜챠크 제독으로부터 빼앗은 황금을 전부 볼셰비키에게 넘기었느냐에 대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황금 중 상당수를 빼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짙은 혐의를 받고 있다. 즉 최소한 기차 1량 정도의 황금이 볼셰비키에 반환되지 않고 이들의 수중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루머는 후에 그들 체코군단이 자기들만의 은행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 은행건물이 너무 화려하고 온통 금으로 화려하게 데코레이션을 하였기 때문에 더욱 증폭되기도 했다.

말이 옆으로 새었는데, 여하튼 이 알렉산드르 콜챠크 제독 같은 경우 백군 지휘관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에서 새롭게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며 그런 노력의 하나로 러시아 극동지방 오지의 몇몇 섬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새롭게 명명되기도 하였다.

 

블라디보스톡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한때 소비에트 권력 아래에 들어갔으나 1918년 4월 일본과 영국군이 상륙하였고 8월에는 미군이 상륙하였다. 같은 해 6월 체코군단의 반란 중에 반 볼셰비키의 시베리아임시정부가 성립되었고, 이어 콜챠크군이 시를 지배하였다. 1920년 1월 시민봉기가 성공하여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었으나 4월에 일본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10월 일본군의 철수를 선두로 외국군대가 떠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반혁명세력은 무너졌고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다.

 

 

 

 

 

 

 체코군단

 

                       니콜라이 2세

  

 

              콜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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