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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극동(시베리아)공화국 역사

by 8866 2008. 11. 17.

극동공화국 역사

 

10월혁명 후 「체코슬로바키아군단사건」이 발발하는 1918년 5월 중순까지는 시베리아·극동의 각지에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1918년 4월 일본군이 극동에 출병했다. 러시아 국내는 적군, 백군, 일본군이 혼잡한 전투를 벌였다. 조선인도 각각의 파로 나누어져 싸움에 참가했다.
8월 12일 일본은 미국의 공동출병의 제의에 따라「체코군구출을 위해」시베리아에 군사를 보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 육군 제12사단은 대량의 조선은행권(http://cafe.daum.net/51.10/697h/48?docid=1EVOb|697h|48|20081111221037&q=%C1%B6%BC%B1%C0%BA%C7%E0%B1%C7&srchid=CCB1EVOb|697h|48|20081111221037)을 뿌렸다. 조선은행의 영업소가 용정을 비롯한 만주 각지에 개설되어 신용이 실추한 루블지폐를 대신해 키타 미츠루로부터 중동철도연선, 연해주와 시베리아철도연선, 그리고 치타방면으로까지 그 유통구역이 확대되었다.
8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는 일본군함을 눈앞에 두고 「국치기념집회」를 개최했다.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10월에는 츠키우라 군사령관을 파견하여 노령한인에 대해 반일행동의 중지를 명령하고 은닉한 무기를 압수했다.

 

볼셰비키를 지지한 것은 주로 노동자와 병사였다. 그러나 시베리아와 극동은 광대한 농업 지역이어서 공업은 불과 얼마밖에 없고 노동자는 고작 15만 명(주민의 2%이하) 정도로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농민과 코사크(바이칼, 아무르, 우스리스크 등의 코사크)였다. 방대한 미개간지를 가진 이 지역은 지주의 토지소유와 무관하여 농민은 전체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유복하고 부농의 비율도 비교적 높았다. 또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도 많아 지방자치의 슬로건을 내거는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의 영향력이 강했다. 한편 시베리아 각지의 수비대는 약 30만의 병사가 있었다. 톰스크에는 7만, 옴스크에는 5만, 크라스노야르스크에는 4만, 블라디보스토크에는 4만 6000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볼셰비키는 1917년의 가을에 일련의 소비에트를 장악했다.

 

서시베리아의 행정, 상업의 중심도시 옴스크에서는 11월말에 행해진 옴스크소비에트의 개선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했다. 12월 2일에 제3회서시베리아소비에트대회가 열려 서시베리아 전역의 소비에트 권력이행이 선언되어 소비에트 권력의 포고를 실행하기 위한 주 집행위원회가 선출되었다.

 

톰스크의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1917년 10월 25일에 페트로그라드로의 무장봉기의 통지를 받아들이고 즉시 10월 혁명 지지를 표명해 임시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에스엘)과 멘셰비키가 우세한 톰스크시의회, 젬스트보(지방자치 조직), 농민 대표소비에트 등은 소비에트권력의 승인을 거부해 「전 시베리아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반혁명적인 시베리아지방의회를 설립했다. 이에 대해 임시군사혁명위원회는 12월초에「시베리아지방의회」를 해산하고 멤버의 대다수를 체포해 톰스크시를 제압했다.

 

애니세이현의 중심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는 10월 28일에 소비에트병사부가 군사사령부를 마련했다. 붉은 위병들은 시의 최대 중요 지점을 점령하고,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권력을 장악했다. 무력으로 저항하는 힘을 갖고 있지 않았던 반혁명에 대해서 무장병력을 가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볼셰비키는 1917년 말에는 애니세이현 전역에 걸쳐서 소비에트권력을 확립하녀 또 근린 제현의 소비에트권력수립을 지원했다.

 

동 시베리아의 행정, 상업, 문화의 중심 도시 이르쿠츠크에서는 10월 16일부터 24일까지 제1회전시베리아소비에트대회가 열려 볼셰비키가 우세한 동안에 소비에트에 의한 권력 장악 투쟁을 위한 전 시베리아 지도조직인「시베리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에는 군 관할구역 사령부나 육군사관학교, 소위보학교와 코사크부대가 있었다. 또 여기서는 사회혁명당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볼셰비키조직은 약소했지만 대중 속에서의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급속히 증대해 11월말에 이르쿠츠크소비에트가 개선되며 볼셰비키와 거기에 동조하는 에스엘 좌파가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2월초에는 붉은 위병 부대와 반혁명 세력과의 사이에 격렬한 무장투쟁이 전개되어 12월 17일에 사관학교학생과 코사크는 무장해제 되어 볼셰비키측이 승리했다. 1918년 2월 16일, 제2회전시베리아소비에트대회가 열려「시베리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가 선출되어 시베리아인민위원회의가 설립되었다.

바이칼주에서는 바이칼 코사크의 일등 대위 G. M. 세묘노프(ГриголийМихайловичСемёнов 1890-1946)가 1917년 여름 이후, 반혁명세력의 결집을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1918년 2월에는 소비에트권력이 수립되었다.

 

아무르주의 도브라고베시첸스크에서는 시장이며 헌법제정회의의원이기도 한 A. N. 알렉세이옙스키(АлександрНиколаевичАлексеевски 1878­?)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헌법제정회의에 출석하여 블라고베센스크를 떠나있을 때인 1918년 2월 25일에 제4회 아무르주 농민 대표자 대회가 개최되어 거기서 아무르주의 권력의 소비에트에로의 이행과 아무르주 자치청과 블라고베센스크 시의회의 해산이 선언되어 노농 병사 소비에트 의장에 볼셰비키의 F. N. 무힌(ФедорНиканоровичМухин 1878-1919)이 선출되었다. 3월 6일, 아무르 코사크가 반 소비에트 쿠데타(가모후의 반란)를 일으켰지만, 14일에는 부근의 붉은 군대의 지원을 얻어 소비에트가 권력을 회복했다. 블라고베센스크 시장인 알렉세이옙스키는 헌법제정회의가 해산(1918.1. 6(19)) 된 후 블라고베센스크로 돌아왔지만 쿠데타를 지지한 용의로 무힌의 정권에 체포 투옥되었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꽤 빨리 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되고 있었지만 소비에트 내에서는 협조주의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26일에 10월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볼셰비키의 요청으로 페트로그라드봉기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노동자, 병사, 해병의 무장 데먼스트레이션이 시작되어 소비에트총회가 행해지고 있던 회장에 밀어닥쳐 소비에트집행위원회를 점거한 결과 블라디보스토크소비에트는 시의 권력 장악을 선언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하바로프스크에서도 소비에트권력이 수립되었다. 12월초에 행해진 소비에트의 점거로 볼셰비키는 완전한 승리를 얻은 후 12월 12일~16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제3회극동지방소비에트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극동에 있어서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넘기는 것이 결정되어 볼셰비키의 A. M. 크라스노쉐코프(АлександрМихайловичКраснощёков, 1880-1937 훗날의 극동공화국의 수반)를 의장으로 하는 극동지방소비에트집행위원회가 선출되었다.

 

1918년 5월 25일에 발발한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반란은 우랄이나 시베리아에서의 전면적인 내전 개시의 신호가 되어 시베리아철도연선의 제 도시들은 순식간에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부대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5월 27일부터 28일에는 옴스크와 이르쿠츠크, 29일에 펜더, 31일에 톰스크, 6월 8일에는 사마라 등이 체코슬로바키아군부대의 점령 하에 놓여 거기에 호응한 반혁명백계세력은 각지에서 반 볼셰비키정권을 수립했다.

체코슬로바키아군단에 의한 반 볼셰비키의 반란은 러시아에 대한 군사 간섭을 겨냥하고 있던 연합국에 대해서 절호의 구실을 주게 되었다. 일본을 포함한 연합국(영, 미, 불, 일, 이탈리아, 중국 등)은「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구원」을 명목으로 즉시 간섭행동에 착수했다.

 

극동군관할구역의 역사의 기점은 우수리스크전선의 적군대대가 카우리스키에 고지, 슈마코후카 및 스파스크 지구에 있어 백위군을 격파한 1918년 7월 31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백위군은 주도권을 탈환해 1918년 8월 바이칼지구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연말까지 바이칼과 극동의 소련권력이 붕괴되었다. 소비에트정권은 1918년 9월부터 1920년 3월까지 일, 미 간섭군에 대해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다.

1920년 2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와 러시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의의 결정에 의해 바이칼주, 아무르주, 연해주, 사할린주, 캄챠카주와 토우신 철도의 수용지로부터 완성되는 극동공화국이 완충국으로서 건국되었다. 동시에 붉은 군대에 준한 인민혁명군이 조직되었다.

1922년 가을 인민혁명군은 백위군의 코사크부대를 소탕해 일본의 시베리아출병에 대해서 게릴라전을 계속 전개했다. 1922년 11월 16일 전로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의는 “극동을 소련, 러시아의 일부이다.” 라고 선언했다. 인민혁명군은 제5적기군(본부 치타)으로 개칭되었지만 1924년 6월 제5군은 해산되어 소속 부대는 시베리아군 관할구역에 편입되었다.

 

시베리아, 극동지방에서의 열강에 의한 군사 간섭이 개시된 이래, 블라디보스토크, 치타, 하바로프스크, 블라고베센스크 등 극동지방의 각지가 일본군이나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반혁명백위군에 의해서 점령되고 있었지만 1920년 1월 5일에 아메리카 합중국이 시베리아로부터의 철병을 결정하여 일본도 정치적 중립(극동 각지의 정변에 대해서는 불간섭)을 선언하면서 바이칼주 서부의 울란우데에는「연Baical 임시 정부(임시 울란우데 정부)」, 아무르주의 블라고베센스크에는「노농, 병사, 코사크 대표소비에트임시집행위원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는「극동 임시 정부(포염임시 정부)」 등, 시베리아·극동의 각지에서 혁명세력이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복수의 지방정권이 존재하는 것은 완충국가의 편성에 대한 문제로 각 지방 정권 사이에 불일치를 일으키게 하여 울란우데의 연Baical 임시 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 임시 정부는 모두 지방정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1920년 3월 3일 완충 국가의 설립 때문에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극동 사무국이 조직되었다. 완충 국가의 건설을 둘러싸고 당내나 극동 사무국에 있어서도 각각의 입장 차이에 의해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전시베리아의 소비에트화(소비에트 권력의 수립)」를 목표로 하는 그룹은「민주주의적 완충 국가 구상」에 반대했고 완충 국가의 수도를 어디로 할까 하는 문제에서도 울란우데의 정권과 블라디보스토크정권의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게다가 극동 임시 정부(포염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완충 국가의 설립 안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부나 군부의 일부에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20년 3월 반혁명파의 G. M. 세묘노프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던 울란우데가 적군과 유격대에 의해서 해방되어 그 땅에「연Baical 임시 정부ВременнаяземскаявластьПрибайкалья 또는 임시 울란우데 정부」가 성립되었다.

3월 28일~4월 8일 울란우데로의 근로자 유격대·더 Baical 지방제헌대회에서 극동 공화국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республика의 결성에 대한 심의를 했다. 그리고 4월 6일에 극동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는 포고가 채택되어 극동 사무국의 A. M. 크라스노세코프(하바로프스크에서 1918년에 조직되고 있던 극동인민위원회의의 의장)가 임시정부의 수반에 종사했다. 이때 수도의 베르후네우진스크(현재의 울란우데)를 중심으로 한 연Baical 지방(더 Baical주 서부)만이 공화국의 실효 지배가 미치고 있던 영역에서 만났다.

반혁명의 G. M. 세묘노프가 치타를 아직 점거하고 있어 더 Baical주는 양분되고 있었다.

5월 14일에 러시아 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 정부는 극동공화국임시정부를 공식으로 승인했지만 극동공화국의 재정, 외교, 경제, 군사지원 등은 소비에트공화국에 맡길 수 있고 소비에트공화국의 지원 하에서 상비국군인 극동공화국인민혁명군이 설립되었다.

 

소비에트공화국(모스크바 정부)에 의한 극동공화국임시정부의 승인은 극동 제 주의 각 정부에 대해서 통일에로의 압력이 되었다. 일본이나 구미제국은 극동공화국을 소비에트공화국의 괴뢰국가 혹은 위장국가라고 보고 있어 극동공화국을 공식적으로는 승인하지 않았다.

5월 24일~7월 15일 치타로부터 120km의 곤고타역에서 극동공화국임시정부대표와 일본의 대표단이 교섭을 해 일본군의 더 바티칼주로부터의 철퇴와 적군의 극동공화국에로의 진주 금지가 협정되었다.

 

치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제5사단)은 8월 16일에 치타로부터 철병해 20일에는 더 바이칼주로부터의 철퇴가 완료됐다. 치타에는 G. M. 세묘노프가 인솔하는 반혁명군이 잔류하고 있었지만 10월 15일 극동공화국인민혁명군과 유격부대가 치타에 진격해 치타에 남아 있던 세묘노프군부대를 구축하고 22일에는 치타를 개방했다. 이때, 세묘노프는 비행기로 치타를 탈출했다. 다음날 23일, 극동공화국임시정부는 치타에 국민의회가 설립되었음을 선언했다. 극동공화국임시정부는 극동 제 주의 각 정부를 해체해 극동공화국에 통일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블라고베센스크의 아무르주집행위원회,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임시정부(포염임시 정부)등에 대해「극동 제 주 대표자회의」의 소집(10월 28일~11월 10일 치타)을 호소했다. 아무르주집행위원회는 이해(1920년) 8월에 극동공화국임시정부에 종속되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의 정부는 울란우데의 임시정부와 합병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나타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20년 1월말에 에스엘(사회혁명당)의 A. S.메드베데프(А. С. Медведев)의 연해주자치회임시정부(ВременноеправительствоПриморскойобластнойземскойуправы 포염임시 정부)가 성립하고 있었다. 연해주자치회임시 정부는 사회혁명당정권을 자칭해, 과격파(볼셰비키)와는 선을 긋는 태도를 나타냈지만 실권은 볼셰비키에 잡아지고 있었다.

 

1920년 3월 29일 러시아공산당극동위원회회의는 연해주자치회임시정부에 대해서 정권을 극동의 모든 주들로 넓히는 것을 진행시키는 결의를 채택해 4월 2일부터 시작된 연해주근로자대회에서 임시정부 승인이 채택되었다. 연해주자치회임시정부는「노농파와 타협하여 극동정부의 이름아래에 각 정파를 연합해 새롭게 정부를 조직」하고 입법기관으로서 국민의회가 신설되었다. 그해 6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국민회의의 선거를 해 제 정파에 의한 연립정부「극동임시정부」가 조직되어 볼셰비키의 강한 영향 하에, 그 수반에는 A. S.메드베데프가 올랐다.

 

1920년 11월말 극동공화국임시정부가 울란우데로부터 치타로 옮기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는 치타의 정부를 승인하고 극동임시정부(포염임시 정부)를 해체하여 연해주를 치타정부의 통할 하에 둘 것을 결정해 1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극동공화국연해주청ПриморскоеобластноеуправлениеДВР이 생겼다. 건국 당초에는 울란우데를 중심으로 한 연Baical 지방뿐이던 극동공화국의 영역은 Baical호수로부터 태평양기슭에 이르는 극동 전역에 이르게 되었다.

 

1921년 1월 극동공화국의 헌법제정과 최고기관의 설립을 심의하는 선거를 했다. 이 제헌회의에서는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해 농민유격부대의 대표자들과 동맹했다. 제헌회의의 기간 중(1921년 2월 12일~4월 27일 치타)에 의회제공화국가로서의 극동공화국의 국체(최고 국가 권력은 오로지 극동의 인민에 속한다)를 반영한 헌법을 채택했다.

극동공화국은 소비에트체제를 취하지 않고 국민의회를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공화국(부르주아민주주의국가)에서 멘셰비키나 에스엘(사회혁명당), 사관후보생(입헌민주당), 무당파 농민도 결집하면서 주도권은 볼셰비키가 잡고 있었다.

극동공화국정부의 수반에는 볼셰비키의 A. M. 크라스노시쵸코프(1920.4-21.9 입법기관 의 장, 동시에 1920.11-21.2 각료회의(집행기관) 의장 겸 외상)가 올랐지만 1921년에 크라스노시쵸코프는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일본군의 철병과 극동공화국의 임종

 

1921년 5월 26일 블지보스토크 주둔 일본군의 지지 하에서 반혁명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코르챠크군의 잔당인 캅페리 군단의 메르크로프 형제(братьяС.Д. иН.Д. Меркуловы)가「연아무르 임시정부Приамурскоевременноеправительство」를 수립했다. 이해 말부터 다음 해 22년 초에 걸쳐 메르크로프의 반혁명군은 다시 북상해 한때는 하바로프스크를 점령하지만 극동 공화국인민혁명군에게 반격되었다.

한편 일본 내에서도 시베리아출병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점차 높아져 일본정부(카토유사부로내각)는 1922년 6월 24일에 시베리아파견군을 11월 1일까지 극동으로부터 철병할 것을 선언했다. 시베리아파견군의 철병은 10월 25일에 완료돼(최종 부대의 블라디보스토크 출항) 극동공화국인민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갔다. 극동공화국은 일본군의 존재라고 하는 특수한 조건아래에서 성립한 완충 국가이며 일본으로부터 계속되는 간섭의 명분을 박탈하여 일본군의 철퇴를 촉진하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1922년 11월 15일 완충 국가로서의 역할을 끝낸 극동 공화국은 정식으로 러시아 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에 합병됐다.

 

극동공화국의 국토

 

독립선언 당시 (1920년 4월 6일)의 극동공화국의 영토는 더 Baical주, 아무르주, 연해주(프리모리에주), 사할린주, 캄챠카주였다.(이중 캄챠카주는 1920년 12월 30일의 국경조약으로 러시아 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에 양도되었다.)

 

 

더 Baical주

616,000평방 킬로미터

871,000명

아무르주

399,000평방 킬로미터 261,000명

연해주

544,000평방 킬로미터 631,000명

사할린주

184,000평방 킬로미터 34,000명

캄챠카주

1,300,000평방 킬로미터 41,000명

극동공화국내의 주요 도시의 인구는 치타 79,200명(더 Baical주), 블라고베센스크 62,500명(아무르주), 하바로프스크 51,300명, 블라디보스토크 91,464명(연해주), 니코라옙스크 12,000~13,000명이였다. 도시인구는 전체 주민의 8%내외에 지나지 않았다.

 

극동공화국의 영역 이외에서는 이르쿠츠크 129,700명, 톰스크 116,664명, 옴스크 135,800명으로 당시 시베리아의 3대 도시였다.

 

극동지방의 산업

 

광업

광업산물 중에서 가장 풍부한 것은 사금이며 그 주요 산지로서 아무르주(제이야 광구)가 유명하다. 사금 다음으로는 철과 석탄인데 채굴사업은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다. 아무르주 및 연해주에는 무진장의 양질인 데쯔잔이 각처에 있다. 석탄은 연해주의 각지에서 채굴되는데 우스리철도의 연선에 가까워 수송이 편리하다. 또 사할린주의 알렉산드롭스크 부근의 탄갱은 매장량이 엄청나다. 그 외의 광업자원으로서는 시라카네, 시로가네, 동, 주석, 아연, 망간, 몰리브덴, 안티몬 등이 곳곳에 산출된다.

 

농업

연해주를 제외하고 극동지방의 농업은 미개발상태이며 자급자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대부분을 수입에 의지하고 있다. 아무르주에서는 개간 가능한 비옥한 토지는 적지 않지만 지금은 거의 경작을 하지 않는다. 주된 농산물은 밀, 귀리 등이다.

 

목축

시베리아 원주민에게 있어서 목축은 가장 주요한 생업으로 아무르주 및 연해주에서는 쇠고기와 우유용의 목축을 하고 있다. 아무르주산의 말은 우량하고 너무 큰 체구는 아니지만 힘이 강하고 원주민의 유일한 재산으로서 존중되고 있다.

 

임업

아무르주 및 연해주는 거의 전 국토가 삼림에 가려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삼림자원이 풍부하다. 조림사업은 행해지지 않지만 건축 및 공업용재로서 사용되는 수림이 풍부해 이러한 재목은 수운 혹은 철도에 의해서 각 지방으로 반출되고 있다.

 

수렵

극동지방의 도처에 귀중한 모피를 공급하는 짐승이 다수 서식하고 있어 수렵은 원주민에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직업이다.

 

어업

연해주나 캄챠카 서해안의 어장은 어종이나 어획량이 풍부하고 이러한 지역의 어업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공업

제철업 그 외의 금속품 제조,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공업으로서 제분업, 낙농품 제조업, 맥주 양조업, 수산물이나 수육의 통조림, 모피 제조 등이 있다. 임업관련공업은 제재, 제지 및 가구 제조 등이 있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

극동공화국에서는 토지, 삼림, 광산 등의 자원에 대해 사유화가 금지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유재산이나, 개인, 각종 조합, 공공단체, 국가기관 등에 의한 상거래나 수출입은 인정되고 있다.

 

 

 

극동공화국

극동공화국(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Республика)은 1920년 4월 6일에 건립된 국가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소련)과 일본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소비에트 정권의 지원을 받아 생겨났다.

극동공화국의 영역은 지금의 러시아 동남부, 즉 바이칼 호 동쪽의 시베리아 철도와 아무르 강에 연해 있는 트란스바이칼 주, 아무르 주, 프리모르스키 주 일대였다. 현재 지역명으로는 치타 주, 아무르 주, 하바로프스크 지구, 프리모르스키 지구에 해당한다. 처음의 수도는 베르흐네-우딘스크(지금의 울란-우데)였으며, 원래 공화국의 영역도 베르흐네-우딘스크 일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20년 10월에 아무르 지역 소비에트 정권도 극동공화국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수도를 치타로 옮겼다. 그래서 극동공화국은 '치타 공화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실 극동공화국은 캄차카 반도와 베링 해협에까지 이르는 영토 또한 보유하고 있었으나, 1920년 12월 30일, 모스크바 정부와 국경 조약을 맺음으로서 캄차카 주를 양도하게 되었다.

 

극동공화국이 건설된 계기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은 당시 러시아 혁명 간섭전쟁의 틈을 타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출병하였고(1918년 시베리아 출병), 시베리아 철도 연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소비에트 정권은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는 대신, 일본군의 점령 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완충정권의 수립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사회혁명당 등의 지원을 얻어 극동공화국이 설립되었고, 그 최초의 국가 수반은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시초코프(Александр Краснощёков, 1880~1937)였다. 하지만 극동공화국은 실제로는 볼셰비키의 영향하에 있는 정권이었고, 이 때문에 일본측과 종종 마찰을 빚어왔다. 크라스노시초코프는 건국 이후 1921년 12월까지 재임하였으며, 니콜라이 마트베예프(Николай Матвеев, 1877~1951)가 그 뒤를 이었다.

 

1922년, 일본군이 여전히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자, 국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일본 국내에서도 국력 소모를 이유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결국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은 그해 10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일본군의 철수를 완료하였다. 일본군과의 완충을 위해 건설된 극동공화국은 그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고 결국 11월 15일 소련에 흡수되었다.

 

1920∼1922년 혁명 전 제정러시아령(領) 바이칼호(湖) 동쪽에 일본군과 러시아공화국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세워진 민주주의 공화국. 수도는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 후에 치타. 동진(東進)을 계속한 적군(赤軍)은 1920년 초 이르쿠츠크에 도달했는데, 공산당은 바이칼호 동쪽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적군(赤軍)의 전진을 멈추고, 또한 극동지역에서의 소비에트정권의 수립도 피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이 때문에 1920년 4월 6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극동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어 독자적으로 인민혁명군이 조직되었다. 그 후 세묘노프군을 치타에서 소탕하자, 극동지역 여러 정부의 대표자회의를 치타에서 개최, 헌법제정회의의 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 공산당과 그 동조자가 4분의 3을 차지하여 공산당의 지도하에 소비에트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군의 철수를 국제여론에 호소하였다. 또 한편은 일본과도 다롄회의[大蓮會議(대련회의), 1921]와 창춘회의[長春會議(장춘회의), 1922]를 열었다. 인민혁명군은 1922년 10월 25일, 일본군의 철수 직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와 11월 14일에 극동공화국은 러시아공화국으로의 합류를 결정하였다.

러시아의 적군(붉은군대)은 1919년 말부터는 공세로 전환하여 시베리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고 그 결과로 1920년 초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지방에서 친볼셰비키정부가 성립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베리아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은 이를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1920년 4월에 접어들어서 연해주 전역에서 일종의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볼셰비키 정부를 전복시키고 백색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는 자연히 그동안 볼셰비키와 연대하였던 한인 독립운동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되어서 한인들은 연해주 전역에 걸쳐서 수 백 명이 희생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들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일본군과 경찰의 탄압으로 학교가 소각되고 한인지도자들이 처형되는 등 한인 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연해주의 한인독립운동이 그 지도자를 잃고 큰 타격을 받게 되었지만 이는 한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의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었다. 실례를 들자면 1919년에는 한인 무장부대가 17개 활동하였지만 1920년에는 31개의 부대가 활동을 하였고 1921년에는 34개의 부대가 활동을 하게 되어서 한인들의 활동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활동이 가속화되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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