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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노령지방에서의 한인민족주의 교육

by 8866 2008. 11. 17.
노령지방(露領地方)에서의 한인(韓人)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
 
이 명 화(李 明 花)*
 

1. 머 리 말

2. 노령지방(露領地方)에서의 초기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
   1) 한인사회(韓人社會)의 형성(形成)과 노화교육(露化敎育)
   2) 노일전쟁(露日戰爭) 이후 한인사회(韓人社會)의 변화와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시작

3. 강제병합(强制倂合) 이후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발전(發展)
   1) 강제병합(强制倂合)과 민족운동(民族運動)
   2) 국민회(國民會)의 결성(結成)과 민족주의교육운동
       (民族主義敎育運動)
   3) 권업회(勸業會)의 조직(組織)과 민족주의교육
       (民族主義敎育)
   4) 한민학교(韓民學校)의 설립(設立)과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

4. 노령지방(露領地方)의 정세변동(情勢變動)과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대처(對處)

   1) 제 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의 발발과 교육(敎育)의
       위기(危機)
   2) 러시아혁명(革命)의 진전(進展)과 민족주의교육
       (民族主義敎育)의 부흥(復興)
   3) 일제(日帝)의 시베리아출병(出兵)과 민족주의교육
       (民族主義敎育)의 대응(對應)

5. 3·1 독립운동(獨立運動) 이후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
    義敎育運動)의 추이(推移)

   1) 노령지방(露領地方)에서의 3·1독립운동(獨立運動)
   2) '사월참변(四月慘變)'과 일제(日帝)의 식민주의교육
       (植民主義敎育) 강요(强要)
   3) 시베리아의 소비에트화(化)와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소멸(消滅)

6. 맺음말

 
1. 머리말
 
   러시아 영토라는 뜻의 노령(露領)은 이주한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연해주(沿海州)와 흑룡주(黑龍州), 그리고 후패가이주(後貝加爾州), 즉 극동(極東) 시베리아지방을 가리킨다. 노령(露領)지방에 이주한 한인들은 허허벌판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재락사회(材落社會)를 형성하였고, 여기에 일제(日帝)의 식민통치(植民統治)를 거부하고 망명한 한인들이 정착하면서 노령지방은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기지화(基地化)되어 이곳에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령지방이 일제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세력권 밖에 있었다 하여도 자유롭고 안정된 지역이라 할 수는 없었다. 노령지방은 러시아의 대아세아정책(對亞細亞政策)과 일본의 대륙침략정책(大陸侵略政策)의 이해와 갈등관계가 맞물려 있던 지역이었으므로 자연 이 안에서의 한인의 위치는 불안전하며 유동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한인사회를 굳건히 다지고, 이를 기반으로하여 각종 단체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한편 노령지방에서 일어난 정세 변동이 민족운동의 외압으로서 작용하여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지만,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결속을 다져나갔다.
   타국(他國), 타민족(他民族) 사이에서 생존경쟁을 거쳐 정착해야 했으며 아울러 조국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던 노령지방의 한인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히 당면한 문제는 2세들의 교육(敎育)이었다. 노령의 한인들은 러시아사회로 동화(同化)되어가는 2세들에게 근대교육(近代敎育)을 실시하여 급변하는 시대를 주도할 수 있도록 육성해야 했으며, 한편 러시아 · 일본 양국이 서로 한인을 자국(自國)의 "신민(臣民)"으로 파악하고 자신들의 정세와 이익에 부합될 수 있는 인물로 교화(敎化)시키고자 하였던 노예적인 식민지(植民地) 교육(敎育)으로부터 2세들을 보호하고, 나아가 독립운동의 동량(棟樑)으로 키워야 하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도는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을 일으키고, 언론활동을 전개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다.
   본고는 노령지방에서의 한인들의 민족주의교육운동의 전개 과정을 한인사회가 형성된 이래부터 소비에트화(化)하기까지 순차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이 지방에서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교육(敎育)에 한정된 일면적 연구이므로 노령 한인사회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점에서는 미흡하나 교육(敎育)과 언론(言論) 부문에서의 민족운동(民族運動) 전개의 추이(推移)와 그 성격을 해명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2. 노령지방(露領地方)에서의 초기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
 
1) 한인사회(韓人社會)의 형성(形成)과 노화교육(露化敎育)

   1858년 5월 28일 러시아와 청국간(淸國間)에 애혼조약(愛琿條約)이 체결되면서 흑룡강(黑龍江) 좌안(左岸)이 러시아령이 되었고, 이어 1860년 11월 14일 역시 우국(雨國)사이에 북경조약(北京條約)이 체결되면서 연해주(沿海州) 일대가 러시아령이 되었다.1) 이로써 러시아는 한국과도 국경(國境)을 접하게 되었다. 시베리아 지방의 영토 확장에 성공한 러시아는 이곳을 완전한 러시아령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식민정책(植民政策)을 적극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1858년 연흑룡이민규칙(沿黑龍移民規則)을 제정2)하여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매년 국고금 10만루불을 이민 보조금으로 지출하였고, 농업이민 250가족(家族)이 우수리 · 흑룡 양강(兩江) 합류(合流) 지점에서 소브친스크에 이르는 500노리(露里)의 연안지릭에 이식(移植)되었는데 정착성적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러시아정부는 1861년 자유이민법(自由移民法)을 제정하여 외국인들의 자비 이민을 인정함으로써 러시아인들만이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특귄3)을 부여하여 시베리아지방으로의 이주(移住)를 적극 유도하였다
   이후로도 러시아정부는 식민사업(植民事業)을 적극 추진하였고 여러가지 이민(移民)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이민자(移民者)를 유도하였으나 러시아인들에게는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반해 한인들의 이민수(移民數)는 매년 중가 추세였다. 일찍이 1744년(영조(英祖) 20년)에 발포(發布)된 《속대전(續大典)》에 보면, '서북연변(西北沿邊) 범월채삼전렵자(犯越採蔘佃獵者) 수종개경상참(首從皆境上斬)'4)이라 하여 법률로써 국경을 넘는 행위를 참수형으로서 엄금했음을 알 수 있으나, 아마도 이것이 지켜지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5)
   초기 월경한인(越境韓人)들은 우수리지방 포셋(해항(海港))을 내왕(來往)하며 농경에 종사하였는데, 경작 ·추수기에 도강(渡江)하여 농사를 짓고 다시 돌아오는 가농(稼農)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정착 이주는 1860년대로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워지게 되었다. 일제측 기록에 의하면, 한일가(韓一歌) 일가가 1853년에 포셋에 이주한 것이 시초라 하였고,6) 우리측 기록에는 무산(茂山)사람 최운보(崔運寶)와 경흥(慶興)사람 양응범(梁應範) 일가가 간도 혼춘으로 갔다가 흑룡강(黑龍江)을 건너 얀치까와 노우키에프스크에 정착한 것으로 되어있다.7) 그러다가 1863년 북한지방을 휩쓴 가뭄으로 인해 생계의 위협을 받은 함경도 평안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면서 한인들의 이주는 본격화되었다. 여기에 당시 러시아정부는 시베리아 식민을 위해 이민을 장려하는 입장으로써 한인 이주를 환영하였으므로8) 한인들의 이주는 더욱 원활히 진행되어 남우수리지방 치무지헤강안(江岸), 청국(淸國)과의 국경 지점, 포셋지방, 그리고 시메타, 망구이하(河) 일대에 한인 촌락이 형성되었다.9) 1891년에는 한인들에게 여러가지 이주 특권이 부여되자 흑룡강지방으로도 이주를 넓혀 블라고웨시첸스크(무시(武市))에서 534노리(露里) 떨어진 흑룡강 하류 좌안(左岸)의 브라고스라부엔카라고 하는 곳에도 한인촌이 형성되었다.10)
   한인들의 이주가 대량적으로 이루어지자 1884년에는 러시아와 조선정부 사이에,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면서 양국사이에 '조선인이주제한'의 협정이 협의되었다. 이때에 체결된 협약에 의하면, 연흑룡(沿黑龍)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을 3종으로 구분하였는데, 제 1종은 1884년 이전에 노령에 이주한 자들로, 이들의 노령(露領) 토착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귀화를 요구하였다. 제 2종은 제 1종 이외의 조선인으로, 사업을 정리할 동안의 일정기간을 부여하고 이후에는 조선으로 귀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노령에 온 한인은 제 3종으로 구분하였다. 러시아정부는 제 1종 한인들에게 호(戶)당 15데샤친의 토지를 분여하고, 인두세와 20년간의 지조(地租)를 면제해 주었으며, 제 2종의 한인에게는 출국 기한을 연기해주고 가능한한 그들을 제1종에 편입하도록 조처하였는데, 제 2종의 한인은 5년이상 노령에 거주하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러시아당국이 러시아귀화의 조건을 유리하게 배려하자 한인이주제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령(露領) 이주는 크게 증가하였다.11) 한인들은 노령에 정착하면서 농지개척에 놀라온 능력을 발휘하였고,12) 노동, 상업, 무역 등 산업 각부문에서 시베리아 개척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인들의 이주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때 러시아당국의 호의가 계속하여 원활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13) 여러 방면에서 한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극동시베리아로 이주한 러시아인들의 주인의식에서 오는 불편한 질시를 받았으며, 토지 경작조건도 매우 열악하였다. 귀화인인 원호(元戶)의 경우는 토지를 분배받아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였지만 비귀화인 여호(餘戶)는 토지소유권을 갖지 못함으로써 귀화한인의 토지나 러시아인의 토지를 소작하였다. 그들이 러시아인들의 황무지를 기간(起墾)할 경우는 보통 1∼2년간은 소작료를 물지 않았으나 3∼4년 이후부터는 소작료를 지급해야만 했고, 5∼6년 후 토지가 잘 개간되어 양전(良田)이 되여 소출량이 늘어나면 러시아인 지주들은 이 토지를 빼앗고 새로운 황지(荒地)를 기간(起墾)토록 하는 등 비귀화인들에 대한 횡포가 심하였다.14)
   이와같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노령(露領)으로 이주하는 한인 수는 점차 증가하여 기록에 따라 약간 차이는 있으나 1910년대 초반에 대략 10만 정도였고, 1920년을 전후로 해서는 대략 20만 정도로 헤아렸으며, 최저 50만이라는 기록도 보인다.15)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주 한인의 수가 증가한 데에는 우선 한인들이 극심한 가뭄과 일제 침략에 의한 경제침탈로 향촌 사회로부터 이탈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생사(生死)를 걸고 이주했던 이유도 있지만 극동 시베리아 지방에 인구를 늘려 개척을 행하고, 이를 식민지화하려 했던 러시아 극동정책에 편승한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극동 시베리아의 연해주(沿海州)·흑룡주(黑龍州)는 러시아제국에서 파견한 연흑룡총독(沿黑龍總督)의 지배를 받도록 되어있는데, 총독(總督)은 원칙적으로 러시아황제에 의하여 군대 통수권을 포함한 일절의 정무(政務) 권한을 위임받았던 행정관(行政官)이자 군사령관(軍司令官)이었다.16) 따라서 총독(總督)의 개인적 견해와, 그에 의하여 행해지는 정책은 권위가 부여되었고 노령한인(露領韓人)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역대(歷代) 연흑룡주(沿黑龍州)총독의 한인(韓人) 정책(政策)은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인의 시베리아 식민(植民)이 러시아의 극동정책(極東政策)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견해이며, 또 하나는 한인(韓人)을 시베리아 식민(植民)에 적극 이용하고 대신 노화(露化)시켜야 한다는 견해이다. 초기 한인사회가 형성될 즈음에 한인에 대한 입장은 후자쪽이었다.17) 이때에 한인들 역시도 근면성과 자연 개척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으며, 러시아의 적극적인 동화책에 편승하여 한인 스스로도 자진 동화을 원함으로써 2세대에 와서는 급격히 노화(露化)되어갔다. 러시아가 한인 동화책으로서 제일의 방책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노어교육(露語敎育)과 학교 교육의 노화(露化)였다. 그러기 위하여 러시아당국은 한인촌에 관립학교(官立學校)를 세우고 여기에 한인자제(韓人子弟)의 입학을 유도하였는데, 1883년에 설립된 노우키에프스크에 설립된 관립학교(官立學校)는 한인노화학교(韓人露化學校)의 시초였다.18) 러시아당국은 관립학교(官立學校) 외에는 일체 한인(韓人)의 독자적인 교육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논어(論語)》· 《맹자(孟子)》 · 《천자문(千字文)》 《명심보감(明心寶鑑)》등 한학(漢學)을 공부하던 서당식교육(書堂式敎育)마져 허용되지 않아 비밀리에 교육이 진행되었다.19) 러시아의 강제에 의한 관립학교(官立學校)의 운영은 성공리에 한인사회로 침투하였다. 귀화를 조건으로 하여 토지소유(土地所有)를 비롯한 많은 특권을 부여받아 이주 러시아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귀화한인, 즉 원호인(元戶人)들은 유창한 러시아어로써 대화하고 구라파식으로 생활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고,20) 이러한 풍조에 따라 귀화 2세 한인들의 대부분은 관립학교에 입학하여 러시아식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관립학교(官立學校)에서 교육받은 세대는 한인들끼리도 러시아어로써 대화하는 성공적인 노화(露化)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00년대로 들어오면서 노령 한인사회가 의식면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게 되었다.

2) 노일전쟁(露日戰爭) 이후 한인사회(韓人社會)의 변화와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시작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승리로 끝내고 한국(韓國)에서 우위전을 장악한 일제는 본격적인 한국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연이어 체결하였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植民地)로 전락해 가고 있을 때 수많은 의병(義兵)과 애국계몽파지사(愛國啓蒙派志査)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국외로 망명하였다. 미주(美洲)·만주(滿洲)·노령지방(露領地方)은 주된 망명 대상지였는데 노령지방(露領地方), 특히 연해주 지역은 두만강 바로 건너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의병전쟁(義兵戰爭)에서 패주한 의병(義兵)들과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근거지로 삼고자 대량 이주하였다. 이들은 우수한 병력으로 무장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지속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이 어려워지자 정치적(政治的) 망명(亡命)을 한 자들로서, 의병파 지사들은 4∼500명의 의병군단을 조직하여 국내로의 진입을 꾀하였고, 애국계몽파 지사들은 노화(露化)된 한인사회에 조국에 대한 의식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발간하였으며21) 정신무장을 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로부터 노령한인사회(露領韓人社會)는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통해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일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식(意識)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애국계몽파 지사들은 회권회복(匯權回復)을 위해서 동포자제(同胞子弟)에게 근대적(近代的)이면서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인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정치적 망명자가 아니라도 나라를 등지고 국외로 이주한 모든 한인들은 보편적으로 교육(敎育)의 부재(不在)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였고 민족의 장래는 교육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22)
   노일전쟁(露日戰爭) 이후 극동 시베리아지역은 연흑룡주총독(沿黑龍州總督)으로 운테르베르겔(1905∼1911)이 재임하고 있었다. 앞서도 기술한 바있듯이 이 지역의 통치는 전적으로 총독의 권한에 달려 있었다. 당시는 러시아가 요동과 만주방면의 경영에 착수, 극동 시베리아지방에서의 식민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어 식민사업에 적극성을 띠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테르베르겔총독은 한인에 의한 시베리아개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것은 1900년대로 들어 오면서 시베리아 철도공사가 상당 진척되어 철도 화물차를 타고 러시아인 농민 ·노동자가 대량 이주해 들어와 러시아인들의 식민이주사업이 원활해 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인들의 정치적 망명자가 늘어나 동화된 한인사회에까지 영향을 주자, 운테르베르겔총독은 한인을 동화되기 어려운 민족이라고 판단하고 '동화되기 어려운 한인'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백성의 이익이 침식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한인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개척된 땅이 한인에 의해 점유되는 실태를 매우 위험시 하였다.23) 그리하여 한인방축정책(韓人放逐政策)이 취해지고 한인들은 농업, 광업 등 한인들의 생활 터전에서 배척되었다. 그러나 저렴한 임금에 비해 놀라운 영농(營農) 능력을 갖춘 우수한 노동력이었던 한인 인력(人力)이 무조건 배척될 수는 없었다. 일시적이나마 정책상 한인을 방축했던 금광업계들은 노동력부족으로 큰 타격을 받자 한인 인력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해 줄것을 당국에 요청하기도 하였다.24)
   노령(露領)에 정착해 가면서 이주 한인(韓人)들이 깨달은 것은 아무리 한인(韓人)들이 동화(同化)하여 노화(露化)된다고 해도 러시아인들이 필요로 할 때면 피땀 흘려 개척하였어도 축출당하고 만다는 사실과 언제든지 '자기 나라 백성의 이익(利益)을 도모(圖謀)하기 위하여 외국인(外國人)을 불가불배척(不可不排斥)'25)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연해주(沿海州) 지역의 한인사회에는 정치적 망명 한인들이 속속 이주하여 민족의식을 계몽함으로써 동화 정도가 적었던 반면, 흑룡주(黑龍州) 지역의 한인사회는 지역적으로 대륙내에 깊숙히 위치한 관계로 국내와의 연락이 단절되어 동화(同化)정도가 심하였다. 블라고스노웬노(사만리(沙滿里))는 흑룡주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개척된 곳인데, 러시아당국은 이지역 한인의 노화(露化)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일례로 한인소녀학원(韓人少女學園)의 운영을 들 수 있다.26) 동학원(同學園)은 장차 어머니가 될 소녀들에게 러시아어로 교육시키고 그들이 일상어로 러시아어를 통용하게 된다면 후대는 반듯이 태어나면서부터 러시아어로써 말할 것이라는, 즉 언어동화(言語同化)를 통하여 완전한 동화를 꾀한다는 목적을 갖고서 설립, 운영된 것이다.
   연해주(沿海州) 지역은 1905년 이후 정치적 망명으로 인한 한인이주민(韓人移住民)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27) 이들 망명 한인들은 귀화인 중심의 자치조직인 민회(民會)에 나아가 국권회복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귀화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로써 자치행정기관일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장으로써 민회(民會)는 발전되었다 한편 2세 청년층의 민족·국가의식이 크게 성장하여 이전 언어(言語) ·생활면(生活面)에서 노화(露化)되어가던 한인들은 국어(國語)를 모르고 러시아어(語)로써 대화하는 것을 크게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28)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1907년 이후에는 국권회복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운동을 전개하고자 단체를 조직하였다. 단체의 형태는 결사조직이었으며 반일구국(反日救國)의 성격을 확실히 하였다. 조직에 참가한 청년층들은 국내 진입 의병전에 참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해서 청년층의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의무감을 갖고 민족주의 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노령지방(露領地方)에서의 민족주의(民族主義) 교육운동(敎育運動)의 전개를 검토하기에 앞서 간단히 한국에서의 민족주의 교육의 정의를 집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민족주의교육운동의 시발은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질풍처럼 밀려오는 외세에 침식 당하는 조국에 대한 민족적 자각과 각성을 촉구하면서 교육을 통하여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전개한 것이다. 초기 개화사상가(開化思想家)에 의하여 전개된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은 애국계몽사상가(愛國啓蒙思想家)들에 의해 전수되었고, 학교 ·언론기관의 설립, 그리고 학회의 설립을 통하여 실천되었다.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의 요지는 조국(祖國)의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을 위하여 대내적(對內的)으로는 우수한 전통문화를 발전시키고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유럽의 선진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이라는 뚜렷한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근대 학문을 교과목으로 하여 보편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습득케 하였으며 아울러 국어(國語) ·역사(歷史) ·지리(地理) 등 국학과목과 음악·체육 과목을 통한 반일애국적 의식화 교육이 실행되었다. 이로 보아 민족주의교육은 근대지향적 성격과 민족주의적 성격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민족주의 교육이 노령지방에서 일어난 것은 1907년 이후라고 하겠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 스챤(수정(水靑)) 지방에서 청년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고자 대한청년교육회(大韓靑年敎育會)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그 후 공진회(共進會)와 통합하여 1913년 대한청년교육연합회(大韓靑年敎育聯合會)로서 확대, 발전하였다.29) 위 단체는 총 24개의 지방회30)가 조직되었으며 이들 지방회가 주축이 되어 각지역마다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청년교육연합회(大韓靑年敎育聯合會) 소속의 학교가 총 25개였고 이 중에는 교원(敎員)을 양성하는 사범과(師範科)가 설립되기도 하였다.31) 이와같은 청년회 단체는 스챤지방 외에도 니콜리스크(송왕영(松王營)), 블라디보스톡(포조(浦潮)) 등지에도 조직되어 교육(敎育)의 진흥과 보급에 기여하였다.32) 또한 의병전(義兵戰)에 참여하던 안중근(安重根)은 1908년 <단지동맹(斷旨同盟)>을 조직하여 연해주(沿海州) 각지를 회력(廻歷)하면서 약70여개소 학교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33) 당시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한 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청년단체 외에 노령 한인들의 자치단체인 거류민회(居留民會)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주민(住民)들의 공동연금으로 학교건물을 마련하였고, 우수한 교원을 초빙하였으며 주민 전체가 학교운영을 위해 합심하여 전력을 기울였다.34)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 1908년 중에 노령 한인사회에 학교가 설립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다.
   블라디보스톡 한인 민회에서는 주민들의 의연금으로 계동학교(啓東學校)·세동학교(世東學校)·신동학교(新東學校)를 각기 운영하다가 1909년 10월 이들 학교를 합병하여 새로이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출발시켰다.35) 한민학교(韓民學校)는 규모면에서나 수업내용면에서 노령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수준으로, 한인의 민족주의교육과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민학교(韓民學校)에 관한 내용은 138면부터 기술하고자 한다.
   학교설립(學校設立)과 함께 노령의 한인들이 진력한 사업은 신문(新聞) ·잡지(雜誌)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교육(敎育)만큼 신문화의식(新文化意識)과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인사회 최초의 발간물은 1907년 차석보씨(車錫甫氏)가 주간(主幹)이 되어 발간한 《신종(晨鐘)》이라는 잡지(雜誌)로 나타나 있다.36) 그리고 이어 동년(同年)에 최봉준(崔鳳俊)이 제공한 자금을 재원으로 《해조신문(海潮新聞)이 간행되었다. 정순만(鄭淳萬)이 주간(主幹)이었고, 장지연(張志淵) ·이강(李剛)이 주필(主筆)로 활약하였다.37) 동 신문은 한인사회의 소식을 전달함은 물론, 논설(論說)을 통하여 시종 반일애국의식(反日愛國意識)을 키워주었고 교육(敎育)의 중요성을 계몽하였다. 1907년 이후 교육운동이 크게 번성하게 된 배경에는 교육을 담당할 민족주의 학교의 유지 방침을 강구하고 교육진흥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학교건립에 필요한 의연금을 모집하는 운동을 실시하는 등38) 《해조신문》이 주체가 되어 민족주의 교육운동의 기운을 조성한 점에서 일요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해조신문》은 일제의 압박으로 제75호(1908. 8. 11일자)를 끝으로 종간되고, 그 후신으로 《대동공보(大東共報)》가 발행되었다. 동신문은 《해조신문(海潮新聞)》을 후원했던 최봉준(崔鳳俊)과 김병학(金秉學)의 자금 보조와 주식 발행 그리고 기부금 모금으로 재정을 삼았다. 주 2회 4면으로 발간된 《대동공보(大東共報)》는 일제의 방해가 있을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신문 발행인을 러시아인콘스탄틴헤드로윗치 ·미하이로프로 하여 당국의 허가를 받았고39) 공립협회(共立協會) 인사인 유진율(兪鎭律)이 발행인(發行人)으로, 이강(李剛)이 주필(主筆)로 활약하였다. 동신문은 노령 각지방에 탐방원(探訪員)을 두어 기사(記事)를 취제하는 등40) 활반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발간되었던 노령지방의 한인 발행 신문들은 노령지방은 물론, 상해(上海), 샌프란시스코 등 한인이 거류(居留)하고 있는 지역에 송부되었고, 한편 상대편 쪽편 신문도 노령한인들에게 전달되어 피차간의 정세를 전달하였고 민족운동의 연계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3. 강제병합(强制倂合) 이후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발전(發展)
 
1) 강제병합(强制倂合)과 민족운동(民族運動)

1910년을 전후하여 노령 한인사회는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로 부상되었다. 국내에서 일제(日帝)와 항전(抗戰)하다가 북상한 의병(義兵)과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전개하다가 망명한 지사(志士) 양대 세력이 나름대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 들어오면서 좀더 연합적인 조직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동년 6월 21일 의병(義兵) 중심이 되어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편성되고 도총재(都總栽)에 유인석(柳麟錫)이 추대된 바 있었다. 그리고 8월 23일 강제병탄의 소식에 접한 노령의 총 8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한 >   1910년을 전후하여 노령 한인사회는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로 부상되었다. 국내에서 일제(日帝)와 항전(抗戰)하다가 북상한 의병(義兵)과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전개하다가 망명한 지사(志士) 양대 세력이 나름대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 들어오면서 좀더 연합적인 조직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동년 6월 21일 의병(義兵) 세력이 중심이 되어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편성되고 도총재(都總裁)에 유인석(柳麟錫)이 추대된 바 있었다. 그리고 8월 23일 강제병탄의 소식에 접한 노령의 한인사회는 총 8,624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한 <성명회(聲明會)>를 발족하고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하였는데,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전노령한인대회를 개최하고 '한인(韓人)이 동맹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을 기도'하기로 결의하였다.41) 성명회(聲明會)는 각국정부에 합병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선언문(宣言文)을 보내어 의병투쟁과 외교투쟁을 동시에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동공보(大東共報)》에 합병의 부당성을 통렬히 비난하는 등 일제의 침략성을 조직적으로 공개적으로 폭로하였다.42) 그러나 일제는 강제병탄이 있기전인 1910년 7월 4일 러시아와 제 2차 노일협약(露日協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양국의 특수이익을 서로 옹호하고 공동의 행동을 취하며 상호 원조한다는 내용으로서,43) 이로 말미암아 일제는 한국에 대한 강제병탄을 러시아의 간섭없이 원활히 자행할 수 있었다. 강제병탄으로 인한 노령 한인사회의 반일기세가 드높아지자 일제는 노일협약(露日協約)에 따른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한인 민족주의자들의 체포를 러시아당국에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8월 30일 러시아군은 한인촌을 급습하였으며 이 때 십삼도의(十三道義) ·군성명회(軍聲明會) 간부 20여명이 체포되었다.44) 이에 앞서 8월 10일자로 《대동공보(大東共報)》는 폐간 당하였고,45) 9월 11일에 성명회가 해산되었다.46)
   이와같은 억압 상황에서도 새로이 조직을 결성하여 노령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된 것은 <국민회(國民會>와 <권업회(勸業會)>로서 양 조직의 활동은 주목할만 하다.

2) 국민회(國民會)의 결성(結成)과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

   국민회(國民會)는 1909년 2원 1일에 미주(美洲)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 합성협회(合成協會)가 통합하여 결성된 단체로, '교육과 실업을 진발며 동포의 영예를 증진케며 조국의 독립을 광복케 에 잇'47)을 그 설립목적으로 하였다. 미주의 국민회가 극동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사회에 조직을 두고자 한 것은 1908년 1월에 스챤과 치타지방에 이미 공립협회(共立協會) 지회가 설립된 바 있어 그 기반이 있었고.48)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이 출석한 후 미주(美洲)에 와있던 이상설(李相卨)과 미주 국민회총회장이자 이전《공립신문(共立新聞)》 편집자인 정재관(鄭在寬)을 1909년 5월 원동(遠東)특파원으로 파견하여 국민회의 사명을 노령지방에 심고자 하였다.
   원동특파원들의 2년 동안의 노력으로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는 그 관하에 16개의 지방회가 설립되었고, 회원은 1,150명에 달하였다.49) 국민회가 시베리아지방총회와 만주지방총회를 설립한 것은 독립운동기지를 설립코자 하는 준비활동이기도 하였다. 미주 국민회에서는 원동지역의 독립운동기지 설립을 위한 자본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태동실업주식회사(泰東實業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특파원으로 파견한 정재관(鄭在寬)으로 하여금 중국령 목릉현(穆陵縣) 밀산부(密山府)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미간지 2,430에이커를 매득(買得)하도록 하였다.50) 이곳 봉밀산(蜂密山)부근은 니콜리스크에서 서북쪽으로 300리(里) 떨어진 중국령과 노령의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여기에 한흥동(韓興洞)이라는 한인촌(韓人村)이 개척되었고 이주자제들을 대상으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설립되어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51) 이곳의 교육 실정을 돌아보기 위하여 북간도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의 정재면(鄭載冕)이 순회하면서 국민회관계 인사들과 함께 새로이 건설된 독립운동 기지에 세워질 학교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당시 서로 교환한 의견은 북간도지역에는 보통의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봉밀산(蜂密山) 부근에는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설립, 군사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52) 이와같은 계획이 진행되기까지는 신민회 소속의 애국지사들이 1910년 4월의 청도회의(靑島會議)53)와 9월의 블라디보스톡회의(會議)에서 논의된 결론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다. 양 회의를 통해 의결된 안은 이종호(李鍾浩)가 3천달러를 내기로 하고 국민회 태동실업회사(泰東實業會社)의 토지 약 30팡자(약70평방리(平方里))를 사서 그 땅을 개간하여 독립군기지로서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만들고 농업경영을 하면서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자는 내용이었다. 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김희선(金羲善) 등이 사관학교 교관을 맡기로 하고, 신채호(申采浩)는 국사(國史)와 한문(漢文) 교사를 담당하기로 했으며, 김지간(金志侃)은 농업경영의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54) 그러나 이러한 계획안은 자금을 약속했던 이종호(李鍾浩)가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면서 자금지원의 약속을 파기함으로써 계획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노령 국민회 북미총회의 자금지원을 받아55) 봉밀산자(蜂密山子)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였고56) 그외에도 여러가지 개척 업무를 수행하였다. 국민회의 중요 업무는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주의 교육운동을 실행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이강(李剛) ·이갑(李甲)·김지간(金志侃)·안창호(安昌浩) 등이 블라디보스톡의 교회(敎會)와 학교(學校)에서 노령 한인의 의식을 개조하고자 유세(遊說)하면서57) 시작되었다. 이후 16개처에 지방회가 조직되었고, 특히 지방총회가 조직된 스챤지역에는 장기영(張基榮)·명희조(明羲朝)·박영갑(朴永甲) 등이 사범학교(師範學校)를 설립하여 장차 설립될 민족주의 학교의 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직접 교수를 담당하였다.58) 그리고 지방회가 설치된 지역에는 지방회가 주도하여 학교를 설립하였고, 학교 설립이 여의치 않은 곳에는 야학교를 설치하였다. 한편 노화(露化) 정도가 심한 흑룡주와 시베리아 오지(奧地) 금광지역(金鑛地域)에까지 들어가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들 지역은 러시아계 혼혈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국민회에서는 혼혈 한인에 대한 교육도 주요 사업 과제로 설정하였다. 1914년 6월 15일 개최된 시베리아 지방총회 제 2회 대의회에서 결의된 의결안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혼혈로 산출된 동은 특별히 아령에 만히 잇스며 한 준슈 한 쟈도 만흐나 만일 그들을 교육지 안으면 조국신과 민족관념이 업슬지니 그 거류 그부근 디방 학교에 교육일"59)  

   이처럼 혼혈인에게도 조국정신과 민족관념을 깨우칠 수 있는 교육을 실행토록 의결하고, 그 실천운동으로서 혼혈인에게 국문(國文)·지리(地理)·역사(歷史)를 수업케 하였고 애국가(愛國歌)도 부르게 함으로써 순수한인과 마찬가지의 민족주의교육을 실행하였다.60)
   한편 국민회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운동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후패가이주(後貝加爾州) 치타에서 1911년 12월 20일자로 발간된 《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가 그것이다.61) 《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의 발간은 일찍이 청도회의(靑島會議) 당시부터 잡지를 발간, 경영한다는 안(案)이 비로서 실천된 것이기도 하다. 신민회 인사들은 청도(靑島)에서 있을 당시부터 잡지를 발간하고자 당시 청도(靑島)를 관할하고 있었던 독일측에 잡지발간신청을 하였지만, 독일측에서는 일본(日本)과의 외교관계를 들어 순수한 종교 잡지가 아니면 인허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 바 있었다.62) 아마도 노령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리라 보여진다. 따라서 《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는 종교신문으로 발간되었다. 박집지(朴執知)가 편집을 담당하고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주필이었던 이강(李剛)과 이광수(李光洙)가 주필이었다.63) 표면적으로는 종교신문으로 발간되었으나 과격한 배일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64) 또한 언론을 통한 재류한인(在留韓人)의 교류를 꾀하고 국민회 교육활동을 지원하였다.65)
   국민회의 활동은 1914년 제 일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일체의 결사·집회활동을 금하였던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거의 해체되다시피 하였으나 그후 비밀리에 활동을 계속하여 1917년까지 존속하였다.66)

3) 권업회(勸業會)의 조직(組織)과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

   앞서 기술한 바 있듯이 노령(露領)의 한인들은 운테르베르겔 총독하의 황색인종 억압책과 제 2차 노일조약(露日條約)에 의한 러일간의 유착관계로 탄압받아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했던 열망과 의지가 순조롭게 전개될 수 없었다. 이에 대처하여 한인들은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러시아당국의 인준을 받아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합법적으로 한인의 활동을 보장 받는 것이었다. 그러러면 무엇보다도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법률상 러시아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귀화한인들이 참여하여 단체를 주도하고, 표면적으로 전혀 정치적 색채를 배제하여 일제의 주목에서 벗어남이 필요하였다. 러시아당국은 이미 조직활동을 전개하던 국민회가 미국의 영향하에 있다고 보고 위험시하였으므로 합법적인 한인단체를 인가(認可)하여 국민회세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67) 권업회(勸業會)의 창설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08년이래 노령사회에서 활약하던 공립협회(共立協會)·국민회(國民會), 그리고 신민회(新民會) 관계 인사들 중 이상설(李相卨)·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신채호(申采浩)·이강(李剛)·이동휘(李東輝)·김하구(金河球)·윤해(尹海)·김성무(金成武) 등이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였다. 한편 권업회 활동이 유리할 수 있었던 것은 1911년 새로이 연흑룡(沿黑龍)총독으로 곤닷찌가 취임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곤닷찌는 이제까지 운테르베르겔총독이 한인을 유해분자(有害分子)로서 보던 입장에 비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인물이다. 곤닷찌는 '모름직이 한인교육(韓人敎育)을 일으키고 한인(韓人)에게 노국국적(露國國籍)을 부여하고 한인(韓人)에게 병역(兵役)을 부과하여 노화(露化)에 직왕(直往) 매진해야 할 것'68)이라 언명하였는데, 그의 한인정책은 한인을 러시아 통제권 아래로 완전을 끌어들이고 한인들이 갖고 있는 능력과 주어진 환경과를 시베리아 개척에 최대한 이용한다는 방침이었다. 한인을 극동 시베리아 개천에 이용하는 한편, 철저히 동화(同化)시키고자 하는 고등정책인 것이다. 그러나 한인들은 수동적인 그의 한인정책이 생활의 안정과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 유리한 기반을 제공해 줄것이 라고 기대하였다. 이상과 같은 배경아래 권업회는 1911년 5월 19일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瑢)·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 등에 의하여 발기되었고 그 다음날인 5월 20일에 57명의 찬동자가 총회(總會)를 개최함으로써 창립되었다.69)
   권업회는 기왕에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근업회(勤業會)가 그 조직의 기반이 되었다.70) 근업회(勤業會)는 러시아에 귀화(歸化)하여 정치, 경제적 지위와 신분을 획득한 귀화한인들이 조직한 단체인데, 여기에 의병(義兵)운동계열의 한인들과 망명 애국계몽운동계열의 한인들이 연합하여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한 것이다
//권업회(勸業會)의 설립목적을 보면 '실업(失業)의 동포에게 실업(實業)을 수여하며 직업에 충실하도록 하고 생활상 저축을 장려하고 동포가 상애상신(相愛相信)하는 마음을 견고케 하여 문명의 행동을 도모함에 있다'71)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권업회(勸業會)는 경제적 친목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설립목적은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동포들의 생활안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목적에 부합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권업회 설립의 진정한 뜻은 '회명(會名)을 권업(勸業)이라 함은 왜구(倭仇)의 교섭상(交涉上) 방해(妨害)를 피(避)하기 위(爲)함이오 실제내용(實際內容)은 광복사업(光復事業)에 대기관(大機關)으로 된 것이다'72)라 하여 단체 설립의 목적이 중극적으로 조국 독립에 있었으나 공인을 받기 위해 정치적 색채를 감추고 경제적 친목 단체로서 표면화해야 했던 난관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동시대에 활약하던 국민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민회는 러시안당국의 인허를 받지 못하고 '불법적'으로 활동함으로써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민회원들은 합법적 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도로써 회명(會名)을 바꾸워 경제단체로 위장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73) 더욱이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된 직후인 1911년 6월 1일에는 러시아와 일본간에 '정치상 제도 기관 또는 공공의 안녕에 반항하여 인심을 선동하고 또 음모를 계획한 근거지로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노일범인인도조약(露日犯人引渡條約)이 체결되었다.74) 따라서 한인들의 결사는 러시아당국의 인허를 받아 합법적으로 조직되어야 러시아당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11년 12월 19일 권업회는 곤닷찌총독의 정식 승인을 받아 새로이 권업회를 재정비하여 출발하게 되었다.75) 권업회는 곤닷찌총독을 비롯하여 마나아긴 군무지사(軍務知事), 레에진구 경찰서장(警察署長) 등 연흑룡주의 실력자들을 명예회원으로 하여 조직의 공인성을 인정받았다.76) 일제는 여러차례 권업회 활동에 항의를 하였지만 곤닷찌는 이를 주시하고 한인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77) 이는 권업회측에서 러시아 정세를 잘 이용하고 행정담당자이자 최고 권한을 갖고 있는 연흑룡주총독과의 친분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합법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며78) 한편 곤닷찌총독의 입장에서는 권업회 조직을 통하여 '대로서아국국민(大露西亞國國民)이라는 동화주의(同化主義)에 입각하여 노국민(露國民)의 의식과 관념을 양성'79)하는데 찬동하였던 것이다. 즉 러시아당국은 권업회를 한인동화(韓人同化)의 창구기관으로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양자 사이에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한인과 러시아인들의 의식에 깔린 공동의 반일정신(反日精神)에 있었고, 이로써 권업회(勸業會)의 항일활동(抗日活動)이 비호 받을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업회는 총회와 의사부가 있었고 여기서 의결된 사항을 집행하는 집행부를 두었는데, 13개부(部)가 있었다고 한다.80) <표 1>은 재정비된 후의 권업회 조직과 임원진이다.

<표 1> 권업회 조직과 임원진(1911. 12. 19)81)

   이들 임원진 중 의사부의장 이상설(李相卨)과 부의장 이종호(李鍾浩), 교육부(敎育部)의 정재관(鄭在寬), 서적부(書籍部)의 신채호(申采浩)는 노령지방에서의 교육(敎育)·언론(言論)부문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권업회는 블라디보스톡에 본부를 두고, 지부(支部)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하바로브스크·니콜라에프스크 시니에라니코아·이만·노우키에프스크·우리지비로· 알렉산드로프스크·띠우쩜·그로제꼽·아누치노·바라바시 등 13개처에 두었으며, 8,579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82) 권업회는 한인자치기관(韓人自治機關)의 역할을 하였으며 집행부를 통해 여러가지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그중 교육활동은 주목할만 하다. 각 지부를 통해 민족주의 학교를 설립하고 학교 설립이 여의치 않은 지역에는 야학을 설치하였다.83) 이들 학교에서 실시된 교육은 노화(露化)되어간 노령지방(露領地方) 곳곳에 '선혼(鮮魂)을 초반(招返)하며 문화(文化)를 전달하였다'84) 한편 1913년에는 이만지방의 라불류와 밀산부(密山府) 북쪽, 흥개호(興凱湖)의 이류가(伊柳街) 및 흑룡강(黑龍江)과 서화강(徐花松) 합류지점인 울라까하(조랍잡하(鳥拉河)) 지역의 영유권을 러시아당국과 교섭하여 얻고, 이 땅을 개간하였다.85)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한인사회에서 지속되어온 과제라 할 수 있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많은 한인이주민(韓人移住民)들이 개척에 참여하였다. 권업회에서는 이주한인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자 계획을 세웠고, 정착민들에게는 토지세를 징수하였으며 농업학교를 건설하여 운영하였다.86)
   한편 권업회에서는 노령한인(露領韓人)들의 애국,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각종 연설회와 애국연극회를 개최하였다. 연설회에는 권업회의 애국지사들이 열열한 애국 연설을 웅변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절규하였다.87) 그리고 연예회(演藝會)를 열어 항일의열투쟁과 독립운동을 연극화하였는데,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척결 ·이완용(李完用) 암살 스티븐슨 암살 사건 등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88) 또한 개천절 기념행사89)·안중근의사 추도회.90)·국치기념일 행사91) 등 애국기념행사를 갖음으로써 의식 고취에 전력하였고 이와같은 행사가 개최될 때 수백명의 한인들이 모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으며 조국 독립투쟁의 의지를 확고히 다짐하였다.92)
   권업회에서는 노령한인사회(露領韓人社會)의 언론활동(言論活動)의 맥을 이어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을 간행하였다. 동신문은 권업회가 설립되기 이전 조직되었다가 권업회로 통합된 바 있었던 근업회(勤業會)에서 발간(發刊)한《대양보(大洋報)》를 계승하였다. 근업회는 앞서 기술한 바 있듯이 노령의 귀화한인들이 조직한 단체이지만 기관지 《대양보(大洋報)》는 신민회(新民會)와 국민회(國民會) 계통의 인물들이 귀화한인의 재정보조를 받으면서 발행한 신문이다.93) 1911년 5월에 근업회에서는 발행인으로서 유진율(兪鎭律)을, 그리고 신채호(申采浩)와 이강(李剛)을 주필(主筆)로 위촉하여 간행되었는데,94) 강제병탄 기념호를 제작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극렬히 비난하는 등 반일적 성격으로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95) 《대양보(大洋報)》는 근업회(勤業會)가 권업회(勸業會)로 통함, 발행(發行) 주체(主體)가 바뀌면서 일단 중지되었다가 1912년 4월 22일 《권업신문(勸業新聞)》으로 재간행되었던 것이다.96)
   권업회가 러시아당국의 인허를 받아 공인된 활동을 인정받은 만큼, 권업신문도 편집자이자 발행인으로 러시아인 츄고브을 내세워 합법적 출발을 하였다.97) 동신문의 주필은 장두빈(張斗彬)·신채호(申采浩)·이상설(李相卨)·김하구(金河球) 등이 역임하였는데,98) 주필진들로 보아 그 내용이 가히 민족주의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권업신문(勸業新聞)》의 민족적(民族的)·반일적(反日的) 집필 성향은 내용이 전해오는 자료를 통해서 충분히 엿볼수 있는데, 참고로 기사를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日本)의 정치는 무도극악참혹(無道極惡慘酷)하여 고국(故國)의 현상(現狀)을 회상(回想)하면 애급(埃及) 인도(印度) 안남(安南)과 같은 나라는 태평극낙(太平極樂)의 나라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
(《권업신문(勸業新聞)》 3호, 내지(內地)의 참상(參狀))
99)
 

 

   "오호라 단군개국(檀君開國) 4245年 8月 29日 이날은 우리 4천년 역사(歷史)가 단절되고 3천리 강토(疆土)는 멸망(滅亡)하여 2천만의 동포(同胞)는 노예(奴隸)가 되고 천지일월(天地日月)은 어둡고 산천초목(山天草木)은 때문에 비수(悲愁)하며 앞길의 광명(光明)은 들어 장사지낸것이 아닌가 이날 적(敵)의 주(主) 목인(睦仁)은 사내정의(寺內正毅)를 파견하여 수만의 왜병의 배치하고 매국노(賣國奴)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등을 농락(籠絡)하여 병합(倂合)을 선언(宣言)하고 우리 조국의 황실(皇室)을 신(臣)으로 삼아 우리 민족을 내몰아 구학(溝壑)에 빠뜨린것이 아닌가. "
   (《권업신문(勸業新聞)》 8. 29일 병합기념호(倂合紀念號), 시일(是日))100)
 

   한편 《권업신문》은 신문사 파견원(派遣員)이 국내까지 파견되여 일본관헌(日本官憲)과 한인의 상황(狀況)을 취재하였으며,101) 북간도 지방에도 파견되어 민족단결과 교육부흥을 위해 개최된 북간도 민족주의 한인학교들의 연합운동회를 취재하기도 하였다.102) 이와같은 넓은 취재망을 갖고 있던 《권업신문》은 구독층 확보를 위해 노령(露領)은 물론 중국(中國)에까지 사원(社員)을 파견하여 신문 구독을 권유하였다.103) 《권업신문》의 주요 발송 지역은 연해주이나 간도 ·혼춘, 그리고 널리 미주지역에까지 발송되어104) 해외동포들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하였고, 지역을 초월하여 해외 민족운동의 소식을 널리 전달하였다.

4) 한민족학교(韓民族學校)의 설립(設立)과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

   권업회의 주요 사업은 학교를 설립,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한민학교(韓民學校)는 권업회의 관리로 운영된 학교인데, 이를 검토해 봄으로써 그 당시 권업회 소속의 타학교의 운영 내용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앞서 기술했듯이 블라디보스톡 민회에서 주민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어 오던 계동(啓東)·세동(世東)·신동학교(新東學校)가 합병하여 1909년 한민학교(韓民學校)로서 탄생되었다.
//권업회가 조직된 이후 한민학교가 권업회의 부속 학교가 되면서 이곳은 한인들의 단합의 장소가 되었으며, 민족운동의 장(場)이 되었다. 교사(校舍)는 1912년 3월 확장, 신축되어 24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건축되었다.105) 건축에 쓰인 비용은 강제병탄 직후 자결한대한제국주노공사(大韓帝國駐露公使) 이범진(李範晋)이 블라디보스톡청년회에 기부한 1천루불과 권업회 부의장 이종호(李鍾浩)가 기증한 5천루불을 건축자금으로 사용하였다.106) 그리고 100데샤친의 토지를 경작하여 여기서 나오는 수입 3,820루불과 주민들의 의연금을 학교 운영 경비에 충당하였다.107)
   한민학교는 교장·교감을 비롯한 교사들 26명을 확보하였고 인건비 지출만도 연간 8,580루불에 달하는 유례없는 규모를 자랑하였다.108) 그리고 간도지방의 민족주의학교인 명동(明東) ·창동(昌東) ·광성(光成)학교 등과 같이 학생 전원을 기숙사에 수용하였는데 이 비용이 연간 1,680루불에 달하였다.109)
   한민학교의 수업과정은 4년제 고등소학과 중학과정이 있었으며110) 근대 과학적 교육과 애국주의적 의식화 교육을 병행한 명실상부한 민족주의교육 학교의 대명사였다. 먼저 교과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기초소양과목 : 성경·윤리·국어·외국어·수학 ·역사·창가·체육

2. 실업 전공과목 :
(제 1 년)
상업대요(大要)·농업 대요(大要)·목축학(牧畜學)·경제학·비료학·회사법
(제 2 년)
부기학·식물학·토양학·동물학·재배론(栽培論)·기상학
(제 3 년)
공업대요(大要)·물리학 임업대요(林業大要) 어험법(漁驗法)·건축공학·은행론
(제 4 년)
화폐론·화학 광물학·기계학·기학·해상법(海商法)·부해양학(附海洋學)111)

   이상과 같은 교과과정을 통해 보면 기초소양과목에서는 근대교육과 아울러 조국과 민족에 대한 의식화 과정을 수업하였고, 실업전공과목에서는 권업회의 설립목적이기도 한 실업부흥을 통하여 경제적 안정을 꾀하고자 전문적인 실업과목을 수업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교육목표 달성을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는데, 당시 해외동포들에게 일관되게 요구되었던 독립운동의 준비책은 확고한 재원을 마련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한민학교의 교과과정은 이러한 독립운동 방향에 충실했다고 하겠다.
   기초소양과목 중 창가(唱歌)시간에는 보국가(保國歌)·대한혼(大韓魂)·국기가(國旗歌)·운동가(運動歌)·국민가(國民歌)·소년건국가(小年建國歌)·한반도가(韓半島歌) 등이 불리워졌다고 한다.112) 이러한 창가들은 제목만으로도 국가의식(國家意識)·애국의식(愛國意識)·민족의식(民族意識), 그리고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고취시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창가(唱歌)는 노령·간도지방의 민족주의학교에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방편으로 교과과정에 주요 과목으로 포함되어 있었으며, 국내에까지 전파되어 애국창가(愛國唱歌)로 널리 불리워졌다. 특히 간도지방으로부터 전해진 애국창가(愛國唱歌)는 유인물(油印物)로 만들어져 국내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고 한다.113) 애국창가(愛國唱歌)가 도처에서 애창되자 조선총독(朝鮮總督) 사내정의(寺內正毅)는 각도장관(各道長官)에게 훈시한 교육방침(敎育方針)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사립학교(私立學校), 중에서 창가(唱歌)나 그외의 다른 것으로 독립(獨立)을 고취하며 일본(日本)으로의 반항(反抗)을 장려(奬勵)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사용을 허락치 않았으므로 취체(取締)상 가장 주의(注意)를 요(要)한다. "114)  

   이처럼 독립정신을 키워주고 반일의식을 키워주는데 창가(唱歌)는 그 교육적 효과가 매우 컸으므로 일제 관헌의 특별한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민학교에서도 학생과 교사들이 단군탄신일·국치기념일 등 행사일에는 나팔을 불고 큰북을 치며, 늠름한 기세로서 독립 ·애국창가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하였다.115) 또한 앞서 기술한 바 있는 한민학교에서 개최된 권업회 주최의 연예회(演藝會) 공연에는 한민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였고,192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4. 노령지방(露領地方)의 정세변동(情勢變動)과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대처(對處)
 
1) 제 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의 발발과 교육(敎育)의 위기(危機)

   러시아의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는 제 1차·2차에 걸친 러일조약체결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보장하는 평화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진정한 유화관계는 아니었다. 양국사이에는 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이해가 얽혀 내면에는 긴장사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14년는 노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난지 10주년되는 해로, 양국간에 또다시 개전(開戰)의 조짐이 급박하다는 설(說)이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116)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등 제씨(諸氏)는 그간 교육(敎育)·언론(言論) 등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노일재전(露日再戰)에 대비하여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제를 공격하고자 준비하였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호기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한인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렸다. 러시아는 일제와 더불어 대독일(對獨逸)의 동맹국이 된 것이다. 적대관계에서 공동 운명의 우호관계로 양국 사이는 긴밀히 연결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러시아제국은 치열한 배일활동을 전개하는 한인의 민족운동을 제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한인의 결심력을 이용하여 대일본 견제 세력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그런나 대전 발발 이후에는 일본과 정치적이지만 우호 동맹국이 되었으므로 한인의 민족운동 탄압을 요구하는 일제의 요청을 러시아에서는 이전처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11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바 있는 노일범인인도조약(露日犯人引渡條約)이 그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117) 민족운동가들을 체포 탄압하는데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태 진전에 크게 당황한 것은 한인사회였고 러시아당국에서는 일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인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118) 탄압대상이 된 주요 한인단체는 권업회와 국민회였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1914년 9월 권업회는 해산당하였으며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 역시 126호를 끝으로 정지되었다.119) 권업회의 주요 인물로서 당시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이종호(李鍾浩)는 블라디보스톡 요세밖으로 퇴거 명령을 받았고,120) 국민회의 주요 인물인 이강(李剛)과 정재관(鄭在寬), 그외 많은 인사들인 러시아 헌병대에 구인투옥(拘引投獄)되었으며121) 국민회 기관지 《대한정교보(大韓正敎報)》역시도 극단의 배일 폭설(暴說)을 게재한다는 이유로 발행 중지 당하였다.122)
   노령지방(露領地方)의 정세가 이상과 같이 한인민족운동을 탄압하는 기운으로 돌자, 이에 대한 한인 민족운동가들의 대안책은 중국령으로 이동하여 그간의 사업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종호(李鍾浩)·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장기영(張基永)·김하석(金河錫)·오영석(吳永錫)·한홍(韓洪)·김성남(金成南) 등은 1914년 12월에 왕청현(汪淸縣)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 라자구(羅子溝)로 이동하여 앞서 설립한 동림학교(東林學校)(대전학교(大甸學校))에 참여하여 이곳에서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과 군사교육(軍事敎育)을 실시하였다.123) 동림학교(東林學校)의 교육(敎育)은 노령지방의 민족학교 대부분이 실업교육(實業敎育)을 중시하여 동포들의 경제적 안정을 주요 교육 목표로서 삼고 있는데 반해 직접적인 독립투쟁에 선봉이 될 인재를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의욕적인 출발을 하였으나 이 역시도 일제의 방해 교섭에 의하여 1915년 5월에 중국당국에 의하여 강제 폐교 당하였다.124) 그러나 짧은 기간이나마 이곳에서 수업받은 80여명의 학생들은 후에 중국 노령 양지방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에 투신함으로써 그 교육목표를 달성하였다.125)
   한편 러시아당국에서는 엄격히 시행되지는 못하였지만 귀화한인들에게 관립학교(官立學校) 입학을 의무화하고 1912년 4월부터 '조선어(朝鮮語)로써 수업하는 학과(學科)는 매일 1시간으로 하고 그밖의 3시간 또는 4시간은 노어(露語)로써 교수'토록 하였고, 소학교의 교원은 러시아 문부성(文部省)에서 인정한 교원자격을 갖은 자만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등 시중 교육(敎育)에 있어서의 동화정책(同化政策)을 고수한 바 있다.126) 그러다가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일절 조선어(朝鮮語)로써의 교육(敎育)을 금하고, 러시아어(語)로써만 교육(敎育)하도록 강제하였다.127)

2) 러시아혁명(革命)의 진전(進展)과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부흥(復興)

   러시아에서의 2월혁명의 여파가 극동시베리아에까지 전달되자 러·일 양국의 긴밀한 동맹관계로 탄압받았던 노령(露領)의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혁명세력들은 언론(言論)·집회(集會)·결사(結社)의 자유를 선포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공격하였으며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선전의 영향으로 한인들은 러시아혁명의 성공이야말로 일제를 분쇄해버리고, 한국에 독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호기(好機)로서 파악하여 혁명에 대한 열열한 찬동을 보냈다. 그리하여 혁명세력이 주도하는 각종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128) 한인에게 있어서 러시아혁명은 한인의 독립운동과 동일 가치로써 연결되었다.
   한인사회에서는 권업회와 국민회가 탄압으로 인해 지지부진하던 조직활동을 재개하고 한민족의 대단결을 꾀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노령 각지에는 국민권리연구회의 명의로 '아영전체(俄領全體) 한인(韓人)의 일대단체(一大團體)를 조직(組織)'하고자 각처마다 대표 1∼2인을 선정하여 니콜리스크로 파송해줄 것을 요구하는 전보(電報)와 통지서(通知書)가 당도하였다.129) 이에 따라 각지에서는 매 50호(戶)에 1명의 대표원을 선출하여 니콜리스크로 파견하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족중앙대표자회(韓族中央代表者會)(후에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로 개칭)가 조직되었다.130) 1917년 6월 2일에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에서는 다음과 같은 중요 사항이 결의되었다.

   1. 귀화선인(歸化鮮人)은 헌법회의(憲法會議)에 대표자(代表者)를 보내는 일
   2. 한족대표자(韓族代表者)를 조직할 일
   3. 농업용토지문제(農業用土地問題)를 요구할 일
   4. 학교(學校)의 독립(獨立)에 관한 일(향어(鄕語)를 사용할 일)
   5. 정기간행물(定期刊行物)을 출판(出版)할 일
    니콜리스크에서는 《청구신보(靑邱新報)》
    포조(浦潮)에서는 《한인신보(韓人新報)》
   6. 촌회자치제(村會自治制)는 본래 노국제(露國制)를 본받았으나 구한국제(舊韓國制)도 짐작(斟酌)한 일131)

   이상의 결의사항을 보면 귀화한인을 한인대표로 하고 귀화인들의 생활안정과 민족자치 문제를 우선으로 하는 입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을 우선 과제로 하였던 비귀화한인들과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반발하고 회의석상에서 퇴장해 버림으로써132) 회의는 귀화 한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목할 결의사항으로 문화적 자치와 민족교육·민족언론의 실시가 논의된 것이다. 1차세계대전 이후 강요된 러시아어에 의한 동화교육책에서 벗어나 우리 언어 (향어(鄕語))에 의한 독립적인 민족주의교육을 실행하고, 일제와 러시아 제정의 야합으로 탄압받고 폐쇄당한 언론활동을 재개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그리하여 회의는 결렬되었지만 이러한 사항은 실천되어 그 해 12월경에 한인학교에서는 종래 사용하여 오던 노문교과서(露文敎科書)를 폐기하고 국문교과서(國文敎科書)를 편찬하여 각 한인학교에 보급, 사용하게 하였고, 민족문화(民族文化)·역사(歷史)·과학(科學) 등의 수업을 할 수 있었다.133) 한편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가 한족 탄압을 위해 진통을 겪고 있을때 하바로브스크에서는 비귀화한인들과 귀화인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1918년 1월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가 발족되었다. 동회(同會)는 '우리는 섞히지 아니한 피 단군조상(檀君祖上)의 자손이라 본시 둥근 의형대로 통일적 모듬을 위하여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를 발기하노라'라는 취지문을 발하고,134)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 "아령(俄領)에 재류(在留)하는 한인남녀는 입�, 비입�을 물론하고 년령 십팔(十八)세 이상인 자를 다거두어 단결하야 식민디발뎐과 국가장에 필요한 교육보급, 실업진흥을 할 터이오.135)  

.. 여기서 제시했듯이 노령에 거주하는 18세 이상의 한인 남녀는 귀화·비귀화의 여부에 관계없이 참여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설립목적을 '교육보급'과 '실업진흥'에 두었다. 설립목적에 있어서 앞서 조직된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와의 차이점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양단체 모두가 노령사회에서의 한족의 대표 조직이 되고자 한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양단체 모두가 앞서 본바와 마찬가지로 조직에서 입적, 비입적의 구분을 두지는 않았지만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는 귀화인이 조직의 주축이 되었고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는 비귀화한인이 중심이 되었다.136) 이로써 러시아혁명 이후 노령한인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한족 단체로 부상된 것은 니콜리스크의 고려족중앙총회, 그리고 하바로브스크의 아령한인회였다.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는 1917년 12월 29일부터 1918년 1월 1일까지(러시아 구력) 열린 회의에서 회명을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로 개칭하고 실질적인 한인 대표회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본회의에서는 고려족중앙총회와 아령한인회가 만사 제휴하여 입적, 비입적의 제한을 타파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그간 귀화 ·비귀화의 입장으로 분열되었던 한인사회가 단결할 수 있는 내적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명실상부한 민족대표를 러시아 노농정부에 파견하고자 하였다.137) 통합의 의지로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에서는 동회회장(同會會長)인 김보(金甫)가 1월 14일부터 하바로브스크에서 개최된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의 회의에 출석하여 양단체의 통합을 제의하자 이에 아령한인회에서 합의하였으며 통합조직의 명칭을 한족회(韓族會)로 하였다.138) 여기서 다음과 같은 한족회(韓族會) 임시약장(約章)이 결의되었다.

   1. 한족회는 러시아내에 있는 한족(韓族)으로 조직하고 국적의 구별없이 대동단결(大同團結)할 것.
   2. 한족회는 지방회·지연방합회·중앙회 3계급으로 한다.
   3. 금후 5개월내에 의장회의(意章會議)를 소집할 것.139)

   이와같이 하여 탄생된 한족회(韓族會)는 비로소 귀화·비귀화의 한계를 극복하여 민족대동단결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140) 한족회 결의에 따라 1918년 5월 31일(러시아구력) 니콜리스크에서 명실상부한 대동단결체로서 전로한족대표자회의(全露韓族代表者會議)가 개최되어 토지·노동·교육 및 한인거주지 확정과 법규제정 등의 16개조안이 결의되었다.141) 16개조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교육에 있어서는 일전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에서 결의한 바 있는 사항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한족회의 교육활동을 보면, 동화교육(同化敎育)의 담당체인 러시아 관립학교(官立學校)의 제도를 변경하여 한인학교는 한족회 소속으로 정리하였고, 민족주의교육을 인정하지 않았던 교과과정을 변경하여 한문과 국어과를 주요과목으로 넣고, 러시아어는 3학년부터 외국어 교과로 채택하는 등 동화교자(同化敎者)에서 벗어나 민족주의교육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142) 이와같은 교육분위기는 혁명정부가 교육에 관한 중대관심을 표명하던 중 1918년 6월에 열린 전로교육대회(全露敎育大會)에서 새로이 혁명정부에서 채택할 신교육제도(新敎育制度)의 원리(原理)와 목적(目的)을 다음과 같이 선명(宣明)한 바 있어 가능하였다.

 

  "···진실(眞實)한 인도적(人道的)으로 되어 모국어(母國語)로써 교(敎)하고 모국(母國)의 역사(歷史)와 사회상태(社會狀態)에 관(關)한 지식(知識)으로써 교수(敎授)함은 물론(勿論)이어니와 그 원리(原理)와 방식(方式)은 동시(同時)에 세계적(世界的)일 것이라."143)  

   이와같이 노농(勞農)정부의 교육제도 방향은 제국(帝國)러시아가 제민족(諸民族)들에게 러시아로의 동화교육(同化敎育)을 강제했던 정책과는 달리 민족교육(民族敎育)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시세의 변화로 말미암아 한족회를 중심으로 한인사회는 점차 러시아 혁명정부를 한인 민족운동의 동반자로서 인식하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동화된 2세들에게 민족주의교육을 시키기 위한 전제는 국어를 상용케 하는 것이다. 앞서 기술한 바 있듯이 한족회에서는 '국어과' 수업이 폐지되었던 관립(官立)학교에 국어수업을 재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어교육을 담당할 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내와 간도지역 학교에까지 학생을 유학보냈다.144) 또한 한족회에서는 관립학교(官立學校) 외에 학교를 직접 설립하여 국어·지리·역사·동양윤리과목을 교과과정에 넣어 교수하는 등 적극적으로 민족주의교육을 실행하였다.145) 한편 중요 사업으로서 교과서를 편찬하여 각 학교에 배부하기도 하였는데, 교과서 출판사로는 하바로브스크 보우스가야가(街) 27호에 소재한 보문사(普文社)가 유명하였다. 보문사에서는 《본국역사(本國歷史)》 《최신동국사(最新東國史)》등 역사책을 비롯하여 지리(地理)·애국적 문서들이 간행되었는데,146) 특히 계봉우(桂奉禹) 저서의 《최신동국사(最新東國史)》는 노령지역뿐만 아니라 만주 각지의 민족주의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었고, 전내용이 일제 침략을 폭로하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애국청년을 양성하려는 뚜렷한 의도를 담고 있음으로 인해 일제가 가장 위험시하였다. 또한 한족회의 주목되는 교육운동으로는 사범학교를 설치하여 교원을 양성하고, 크게 부족한 중등교육시설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는 한인사회에서 시급히 해결되어야할 교육문제로서 수차 지적된 바 있었다. 한족회는 니콜리스크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하바로브스크에 문덕중학교(文德中學校)를 설립하여147) 교원을 양성하였다.
   한편 <권업신문>과 <대한인정교보>가 폐간된 이래 일체의 언론활동이 불허되었으나 혁명정부가 언론 ·출판의 자유를 선언하자 이에 고무된 한인들은 적극 언론활동을 재게하였다. 니콜리스크에서는 조완구(趙琬九)·박은식(朴殷植) ·윤해(尹海) ·남공선(南公善)이 주필로 활약한 《청구신보(靑邱新報)》(한족회(韓族會)의 성립과 함께 《한족공보(韓族公報)》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장기영(張基永)·김하구(金河球) 등이 주필로서 활약한《한인신보(韓人新報)》가 발간되었다.148) 이들 신문 외에도 한인 애국 단체들이 각기 기관지를 발간하여 언론운동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당시 출판물로는 신민단(新民團)에서 《신민보(新民報)》, 일세보(一世報)에서 《일세당(一世黨)》,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서 《자신보(自申報)》, 장기영(張基永)·김가현(金家鉉)이 발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 그리고 니콜리스크 청년회에서 발간한 《독립잡지(獨立雜誌)》가 있었다. 이들 출판물들의 대부분은 '조출모거(朝出暮去)'라 표현될 정도로 짧은 기간내에 발간, 폐간되었는데,149) 그 연유는 대부분이 재정부족과 시세의 불리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언론·출판 활동을 끊임없이 시도, 전개함으로써 '아령교거(俄領僑居)한 동포(同胞)의 조국정신(祖國精神)을 환성(喚醒)하여 청년교육(靑年敎育)을 편촉(鞭促)'하였고,150) '한국의 재흥(再興)을 호소하고 배일(排日)사상(思想)을 고취에 노력 '하였다.151)

3) 일제(日帝)의 시베리아출병(出兵)과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대응(對應)

   러시아혁명이 점차 극동시베리아로 전파되고 한인의 민족운동도 이에 따라 활기를 띠어가자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 하는 한편, 혁명세력과 한인 민족운동세력의 제휴를 두려워한 일제는 더이상 극동시베리아 정세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러시아혁명 와중의 혼란한 틈을 타 힘의 공백지대와도 같은 극동시베리아를 점령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적 야욕이 겹쳐, 일제는 1918년 시베리아에 출병, 4월 5일에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하였다.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미국·독일·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혁명의 확산을 견제하고자 국제간섭군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였는데, 이중 일본은 간섭군 중 최대의 병력을 연해주와 흑룡주에 파견하여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당시 일제는 '제국(帝國)(일본)에 대해 반란(反亂)을 기도(企圖)하는 자(者)는 국적급령토(國籍及領土)에 여하(如何)를 묻지 않고 우선 이를 토벌하는 것은 자위권(自衛權)의 행사로서...'152)라고 하여 매우 당연한 처사로서 표명하고 있었다. 시베리아를 불법 점령한 일제는 반혁명세력(反革命勢力)인 백위파(白衛派) 세미요노프·카르미코프정권을 지원하고 이곳에서 대권을 장악하고자 본격적인 한인 민족운동의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를 시행하는데는 앞서 일제가 한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조사한 바 있는 한인에 대한 상태 조사 자료가 이용되었다. 이 조사는 일반적 조사와 부분적 조사 두 부분으로 나뉘어 조선총독부의 지도 아래서 시행된 바 있는데, 학교와 출판물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조사되었다.

  학교 :귀화 비귀화인 설립 학교, 서당(書堂)의 교명(校名), 노국정부(露國政府)의 인허(認許)의 유무(有無), 학교소재지(學校所在地), 학교역사(學校歷史), 수업(授業) 과목(科目), 교사(敎師)들의 성향(친일(親日)·배일(排日)의 구별), 학생수(學生數), 학적(學積), 유지비
출판물 :출판물 명칭, 내력, 목적, 실제상기사의 친일·배일의 구분, 주간자(主幹者)·주필(主筆)의 /////// 배일사상의 유무(有無), 자금, 발행부수, 구독자(購讀者)의 소재지별 다소(多小), 노국외(露國外) 발송선지명(發送先地名)과 인명(人名)153)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민족운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학교와 출판물에 대한 기초 조사를 하고 학교와 출판물의 성향과 역량을 검토한 후 이를 기초로 하여 민족적 역량을 갖춘 학교와 출판물에 대하여 철퇴를 가하고자 조사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일제는 한인 거류민회를 일제 세력 아래 두고자 하였고, 한인 학교를 재정적으로 보조하고 일인교사 혹은 친일한인교사를 학교에 파견하며, 조선총독부 편찬의 교과서를 학교에 무료 배급하여 사용토록 함으로써 식민주의교육을 실시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러한 준비 계획은 "4월참변"이 자행된 이후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백위파정권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힘입어, 그들의 협조 아래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와 블라디보스톡 한인 민회를 해산시켰다. 아울러 백위파정권은 러시아혁명 이후 활발히 재게된 언론활동의 결실인 《한족신문(韓族新聞)》와 《한족공보(韓族公報)》양신문에 대해서도 반일언론활동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발행 정지 처분을 내렸다.154) 이리하여 일제의 시베리아출병에 따른 한인 민족운동의 탄압으로 러시아혁명의 기운을 타고 고무되었던 한인들의 민족대단결은 또다시 시련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와 백위파 옴스크 정부와의 야합에 의한 탄압이 가해졌다 하여도 한인들에게 이미 불타오른 독립에의 열정을 식히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위협과 탄압에 두려움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볼세비키 혁명주의자들과의 깊은 연대감을 느끼고 적극적인 투쟁을 벌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18년 11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에 참전했던 귀화한인들이 속속 귀환하였다. 이들은 러시아 국민의 의무로서 군복무에 임했던 2세 청년층들인데 거의 노화(露化)된 자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경험한 러시아의 민족차별책과 전쟁에 출전한 다른 약소민족들의 치열한 민족의식에 감명을 받고, 귀환 직후에는 한족회에 참여하여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는 러시아 귀화한인 2세들의 중대한 의식의 변화로서 '우리는 황족(黃族)이오, 또는 황족중(黃族中)에도 고려족(高麗族)이다'라는 확고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민족의식의 절실한 깨우침을 바탕으로 하여 학교에서 시행되는 노화교육(露化敎育)을 불식하고 민족주의교육을 확산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한편 귀환 한인 장교출신자들은 학교에서 군사조련(軍事操練)을 실시하여 장래에 있을 일본과의 일전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한인 청년들에게 교육하였다.155) 이와같이 교육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전쟁 경험을 발휘하여 볼세비키 혁명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반혁(反革) ·반일(反日) 빨치산투쟁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혁명세력과의 연대투쟁에 참여했던 것은 혁명의 성공이 한인의 독립을 가져온다는 확신을 갖고 빨치산투쟁에 참여 함으로써 전쟁 경험을 쌓고 무기를 공급받아 독립군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실리가 있었다.156)

 
 
 
 
5. 3·1독립운동(獨立運動) 이후 민족주의교육운동(民族主義敎育運動)의 추이(推移)
 
1) 노령지방(露領地方)에서의 3·1독립운동(獨立運動)

   일제는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옴스크 백위파 정원과 야합하여 한인 민족운동에 물리적 탄압을 가하였지만 한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에는 전혀 손상을 가할 수 없었다. 1918년 7월에 공포된 중앙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에서는 '인류를 자본주의 제국주의에서 구축하고, 비합병비배상급민족자결주의(非合倂非賠償及民族自決主義)에 찬성함을 결(決)한다'고 제시하였고, '동양수억만 민족이 오랜 침략주의에 곤고를 당하였으나 우리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를 원조하여 그 자유를 얻게 하리라'는 대대적인 선전을 함으로써157) 약소민족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한민족 역시도 노령지방에서 일제와 백위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소비에트화하는 길이 민족독립을 가져다주는 길로 여겼으며, 이러한 믿음에 따라 일제와 백위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8월 29일에 신한촌의 한인들은 일본 무장군대가 바로 눈앞에 정박해 있으면서 무력시위 중이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대대적인 국치일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다. 158)
   1919년 초에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에 접한 노령 한인사회는 국내와 해외 각지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세력과 연락을 취하고, 대표자를 선정하여 파리에 파견하고자 하였다. 국제외교를 통해 세계만방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한 것이다.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는 1919년 2월 5일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조선인총대표'로 선출하여 파리로 파견하였고159) 2월 25일에는 전노한족회중앙총회(露韓族會中央總會)가 중심이 되어 국내와 간도지방을 망라한 득립선언식을 갖기 위한 준비로서 니콜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全露國內朝鮮人會議)를 개최하였다.160) 여기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작성과 발표, 시위운동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해 나갈 조직 구성문제를 협의하였으며, 이로써 2월 28일에는 간도지역과 국내지역의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조직되었다. 그러던 3월 1일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국민의회에서는 노령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3월 15일에 시위계획을 세웠다.161) 그러나 독립운동 시위계획의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블라디보스톡 요세 사령관과 연해주 콜쟈크 정무위원에게 시위 계획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요구하였고, 옴스크 백위파 정권은 3월 14일에 '집회(集會)는 전혀 허가하지 않으며 또한 그 밖의 국교(國交)를 해치는 행위는 일절 엄금한다고 엄명'하고, 대한국민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시위계획의 중심지가 될 한민학교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시립학교로 흡수하였다. 그리하여 한민학교는 한인민회 경영에서 포조시(浦潮市) 경영으로 변하였고, 명칭도 시립 제28소학교라 하였다.162)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17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대대적인 독립선언식과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후 4시 일제(日帝)의 포조영사관(浦潮領事館)을 비롯한 11개국 영사관(領事館), 러시아 관청(官廳)에 노문(露文)과 한문(韓文)의 선언서를 전달하였고, 5시가 되자 신한촌에서는 각 호(戶)마다 일제히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6시 무렵에는 수대의 자동차에 분승한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주도 하였다. 옴스크 백위파정권은 시위운동을 탄압, 해산시키고 게양된 태극기를 내리게 하였으며 시위 학생 2명을 검거하였다. 18일에는 한인 노동자들이 모두 휴업하고 신한촌에 집합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63) 이어 17일에 니콜리스크, 18일에 스바스코에, 21일에 라스토리노에, 그리고 4월 3일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 시위 운동이 계속되었다.164)
   3·1독립운동은 해외의 독립운동에도 새로운 기운을 조성해 주었다. 그것은 그간 간도지역과 노령지역의 한인학교에서 민족주의교육을 받고 성장한 학생층이 3·1독립운동을 계기로 독립투쟁의 전위로써 활약하게 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반이 크게 확대된 것이다. 독립운동의 연대투쟁을 위하여 양지방의 학생 ·청년층은 해외에서의 연합전선을 형성, 독립군을 조직하여 국내로 진입하며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대하여 일제를 물리치고자 준비하였다. 3월 13일 이후 파급된 간도지방의 3·1독립운동에 참가한 간도지방 학생들은 연대 투쟁을 위하여 대거 노령(露領)지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간도의 명동학교(明東學校)에는 대한국민의회 지부가 설치되었고, 명동(明東)학교· 영신(永新)학교·정동(正東)학교 등 주요 민족주의학교 학생들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노령과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 방향으로 이동, 독립군 편성에 참여하였다.165) 이들 학생들은 노령지방에서 이동한 학생들과 만나 독립투쟁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 청년학생들을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 밀산(密山)에 소재한 한국무관학교, 그리고 니콜리스크에 소재한 도화동(桃花洞)·사개정자(四個頂子) ·대지안자(大地安子)의 한인학교에서 전술(戰術)과 사격(射擊) 등 본격적인 군사교련을 받았다.166) 밀산(密山)의 무관학교는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오주혁(吳周爀)이 경영하던 곳으로, 노령과 간도지방에서 3천명에 달하는 청년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167)
   한편 3·1독립운동 이후의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운으로써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수의 무장결사단체가 조직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대한노인동맹단, 대한부인독립단 등 일찍이 조직되어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비밀결사단체들은 3·1운동이후 청년 학생층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조직 단체는 감사대(敢死隊)·결사대(決死隊)·암살단(暗殺團)·신민단(新民團)·의용단(義勇團)·창의단(彰義團)·소년독립단(小年獨立團)·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한인청년단(韓人靑年團)·구창모험단(救昌冒險團)·청년운동구락부(靑年運動具樂部)·길성친목회(吉城親睦會)·마듸아도회구원조합(都會購員組合)·임시위생회(臨時衛生會)·한인사회단(韓人社會團)·유위회(有爲會)·양조단(兩造團)·동령일근회(東嶺一勤會)·한국소녀회(韓國小女會), 그리고 각 지역의 청년회(靑年會) 등이었다. 그리고 한민학교학생들은 대한동우결의부(大韓同友決議部)라는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168) 이들 대부분의 단체들은 비밀결사 조직으로 시베리아점령과 함께 치열해진 일제의 밀정·첩보활동을 무너뜨리고 친일파 처단, 밀정 색출을 하였으며, 친목단체나 조합, 혹은 사회운동 단체로 위장하여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3·1독립운동 이후 니항(尼港)의 빨치산 부대에는 한인 천여명이 가담하여 혁명군과 연대 투쟁하였는데,169) 이들을 통해 많은 무기가 간도지역의 독립군들에게 전달되었고170) 블라디보스톡에서 무역하여 구입한 무기들과 함께 독립군 전투 무기로 공급되었으며 후에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2) '사월참변(四月慘變)'과 일제(日帝)의 식민주의교육(植民主義敎育) 강요(强要)

   1919년 말 콜차크 백위파정권이 혁명군에게 무너지면서 1920년 1월 31일에 사회혁명당계와 젬스트바(지방자치회의)파가 연합한 연해주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리하여 연해주 주정부와 군대의 권력은 볼세비키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따라 국제 간섭군들은 속속 시베리아에서 철병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지리적 근접'을 주장하며 계속 주둔하였는데 러시아 극동지역에서의 정치상환은 조선과 만주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므로 즉각 군대를 철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대었다. 일제는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음에도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르 한 연해주 일대의 한인의 동향을 간과할 수 없었다. 더욱이 1920년 3월 1일에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주도로 24개 독립운동단체가 참여하여 대대적인 3·1독립선언기념회를 개최하였고171) 오후에는 한민학교에서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 ·한민학교(韓民學校)·진명학교(震明學校)·대농학교(大農學校) 등이 공동 참여하여 애국적 연극을 공연하였다.172) 앞서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연해주 임시정부에 한인 취체를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기념식장에 임시정부 수반의 부관과 해군총사령관의 부관이 대리 참석하여 기념회를 축하하였고 대신 전달한 축하전문에는 오히려 한인 독립운동을 고무 찬양하였다.
//백위파정권과는 사뭇 달라진 연해주정부의 동향에 대해 일제는 '러시아는 오히려 비밀리에 불령행동을 선동한다.'173)고 보았고, 러시아정권에 위임하여 간접적으로 한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하던 일제는 극동 시베리아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고 한인을 직접 통치하고자 꾀하였다. 일제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1919년 9월 2일 3·1독립운동 이후 새로이 조선 총독으로부임하던 사이또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된 대한인노인동맹단(大韓人老人同盟團)의 일원인 강우규에게 폭탄 투척을 당하고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였던 사건이 있었으며, 콜차크정권이 볼세비키혁명군에게 점차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면서 극동 시베리아지역은 또다시 일제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지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제는 1919년 10월 이후 육군성(陸軍省) 촉탁 명의로 총독부사무관 속관(屬官)을 노령지방(露領地方)에 파견하여174) 이곳의 한인들에 대한 동정을 정탐하도록 하고 한인사회를 직접 통치하고자 행동에 착수하였다. 한인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한인사회의 환심을 사야 했으므로 일제는 한인의 교육구제산업(敎育救濟産業) 등의 사업을 원조한다는 회유책을 구상하였다.175) 그러나 노령지방 한인 민족운동은 일제가 평가했듯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일제는 노령지방에 거주하는 비귀화한인을 '일본신민(日本臣民)'으로 파악하고 일제의 통치 아래 두고자 하였지만 이를 받아들인 비귀화 한인들은 전무(全無)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인은 단순히 애(愛)만으로써 회유할 수 없으며 적당한 기회에 대철퇴(大鐵槌)를 내려 후에 이를 원호하는 수단을 채택'176)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회유책을실시하기에 앞서 반일세력을 섬멸코자 한 것이다. 일제는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고 그 명분을 다음과 같이 내세우고 있다.

 

    "노국대표자(露國代表者)에게 불령(不逞)의 무리가 노령(露領)을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책원지(策源地)로서 하여 매번 조선내(朝鮮內)을 선동하고 있음은 우리(일제(日帝))가 참을 수 없는 바로서 노국(露國)에게 충분히 이를 취체하게 하고 만약 노국(露國) 스스로 이를 취체하지 않으면 우리가 자위권(自衛權)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177)  

   1920년 4월 4일 밤 10시 일제의 포조(浦潮)헌병분대와 보병 1개중대가 '자위권(自衛權)'행사를 명분으로 하여 신한촌을 공격, 파괴하였다. 이때에 민가와 학교가 방화되었고 380명의 한인이 체포되었다.178) 이 공격때에 한민학교와 한인신보사 건물은 배일단의 집회장소로 충용되었다는 이유로 방화되었다.179) 그리고 한인사회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며 교육자들인 최재형(崔才亨)·김이직((金理直)김이직(金利稷))·엄주필(嚴周必)·황경섭(黃景燮) 등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180) 이것이 이른바 '4월참변'으로, 이로인해 대한국민의회는 블라고웨시첸스크로 이전하게 되었고 연해주지역은 일제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제는 무력적 공격을 단행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후, 한인들의 황화(皇化)는 기대할 수 없다고 의심하면서도 친일단체를 내세워 '재류선인(在留鮮人)의 행복증진'을 내세운 회유책181)을 세우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한인사회 분열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방법은 헌병대를 설치하여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친일적 경향을 갖은 자를 규합하여 이들 중심의 민회(民會)를 조직하게 하는 것이다. 이들 친일민회에는 재정적 보조와 여러가지 특권을 부여하여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이를 일본 영사관에서 통치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일찍이 노령의 한인사회에는 지방 단위로 자치단체적(自治團體的) 기관들이 민회형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민회에서는 학사(學事)·징세(徵稅)·경찰적취체(警察的取締) 등 제반 행정을 집행하였고 절대적인 재판권도 행사하였다.182) 민회의 자치행정에 참여하였던 유력자들은 대부분이 배일적 인물들이었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민회조직이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역할하였다.183) 일제는 한인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기존의 민회조직을 무시, 해체하고 1920년 4월 13일 포조한인거류민회(浦潮韓人居留民會) 조직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 친일 민회를 조직하였다.184)

<표 2>'4월참변' 이후 조직된 친일민회(親日民會)
위 치
회 명
설립일
교육관계 사항
블라디보스톡 선인거류민회 (鮮人居留民會) 1920.4.3 한인 민족주의학교인 한민학교(韓民學校)·삼일여학교·백산학교(三一女學校)·해광학교(海光學校)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일제 식민지교육 학교화를 기도함
니콜리스크 선인간화회 (鮮人懇話會) 1920.4 친일신문(親日新聞)인 《新時民報》 간행
니콜리스크 조선인회 (朝鮮人會) 1920.10 반독립군주의(反獨立軍主義)의 인민보신총회(人民普信總會)를 개최 식민주의교육 소학교경영
바니야신 이도구선민회 (二道溝鮮民會) 1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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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선민회 (安山洞鮮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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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냐 조선인거류민회 (朝鮮人居留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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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교육학교 설립
스이야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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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교육기관 설립
구노리엔테 선인거류회(鮮人居留會) 1920.4 식민주의 교육학교 설립
포셋 조선인거류민회(朝鮮鮮人居留會) 1920.5 식민주의 교육학교 설립
시마고프카 선인간화회(鮮人懇和會) 1920.6  
라스토리노에 간 민 회 (墾 民 會) 1920.8 식민주의 교육학교 설립
바라사시 조선인민회 1920.8 식민주의 교육학교 몇 개소 경영
시고도브 조선인거류민회 1920.8  
보크라니치나야 조선인거류민회 1920.  
그로테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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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英進)·긴영(緊英)·화흥(和興)·기성(基聖)·광진(廣進)·진흥(進興)·성흥(誠興) 등 7개교(校)를 부속학교로 운영 의도적으로 권업회·한족회의명맥을 잇고자 함
스라브얀카 남부오소리상신회
(南部烏蘇里相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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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교육학교 운영
총독부원조의 공립학교(公立學校) 설치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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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회(朝鮮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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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키에프스크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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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스고에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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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교육학교 운영
조선총독부, 《만주급서비리아(滿洲及西比利亞)における조선인사정(朝鮮人事情)》, 연해주(沿海州))に어(於)ける조선인간(朝鮮人間)の자치적기관조(自治的機關調), 233∼238면 참조.

   친일민회를 앞세우고 가장 주력한 것은 교육을 통한 기만적인 회유책이었다. 일제는 기존의 한인학교들을 강제로 총독부 보조학교로 편제하고 혹은 학교를 새로이 설립하여 식민지 교육을 강요하였다. 식민지교육의 내용은 국내에서 실시된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한인학교에 총독부 파견교사를 배치하고, 기존에 사용중인 교과서를 몰수하고는 총독부 발간 교과서를 무료 배급하였다. 한편 '4월참변' 당시 일병(日兵)에 의해 방화된 한민학교를 재건하여 총독부 보통학교화하고자 획책하였다.185)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방화와 살륙이라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강압적으로 추진되었지만 한인들의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불식시킬 수는 없었다. 또한 이미 일제는 노령지방에서는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0년 4월 6일 성립된 치타의 극동공화국과 대연(大連)·장춘(長春) 회담을 갖고 전면적인 철수를 교섭하고 있었던 일제로서는 언젠가는 시베리아 철병이 불가피한 이상 한인사회가 다시 원상복귀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한편 앞서의 식민지교육과 함께 일제가 중시한 것은 선전활동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 통치를 미화시키고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무용론을 유세하였다. 선전활동의 방편으로 이용된 것은 순회강연, 선전활동 사진 영상, 그리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와 《조선(朝鮮)》의 무상배포 행위였다.186) 한편 니콜리스크에서는 민족지인《한인신보》를 대신하고자 일제 주둔군의 후원을 받아 《신시민보(新時民報)》라는 친일선전신문(親日宣傳新聞)이 발간되기도 하였다.187)
   일제의 무력탄압과 식민지교육 강요, 선전유세를 피하여 일제 주둔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난한 한인들과 단체들은 학교를 새로이 건립하고 《최신동국사(最新東國史)》·《애국창가(愛國唱歌)》를 교재로 수업하고 민족주의교육을 계속하였다.188)

3) 시베리아의 소비에트화(化)와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의 소멸(消滅)

   소비에트 볼세비키 정권은 일제가 시베리아를 불법, 점령하였음에도 일제와의 전면 전쟁을 피하였다. 그것은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한 힘의 분산을 막고자 한 자위(自衛) 정책이었다. 소비에트는 극동 시베리아에 완충정부인 극동공화국을 수립하고, 이를 내세워 일제와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언젠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제와의 일전에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음으로 원조하고, 조선 독립을 위한 후원을 약속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文昌範)은 흑룡주 블라고웨첸스크로 이동하여 1920년 8월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189) 치타 극동공화국의 수석카라한과 '독립군과의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비밀협정'190)을 체결함으로써 한층 결속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밀약(密約)을 체결한 이후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원동일보(遠東日報)》를 간행하여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아울러 전개하였는데, 공산주의 선전활동은 극동공화국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사관양성소도 규모를 확대하여 분교(分校)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분교(分校)는 합시(哈市)에 설립되었으며 본교(本校)와 분교(分校)에서 약 1천여명의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191) 그러나 이러한 소비에트와 한인독립운동과의 결속 관계는 일제가 시베리아에서 철병을 결정하면서 변화되었다. 일본공사(日本公使) 방택겸길(芳澤謙吉)과 소비에트 대표 카라한은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문제를 체결하는 회의석상에서 '소련 영토내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인 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는데 합의하였고, 일제는 이미 체결된 바 있는 한인 독립군과 극동공화국 간의 군사협정(軍事協定)을 취소하고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192) 한인 독립군의 양성은 소비에트에 있어서는 반일투쟁의 방파제로서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었으나 일제의 시베리아 철병이 시작되면서 그 필요성은 사라지게 되었다.193) 이리하여 극동공화국 역시도 그 역할을 다하고 해체되었으며 한인독립 군들은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로써 극동시베리아지방은 소비에트화하였고 한인사회 역시 소비에트 통치권 안으로 편제되었다.
   교육(敎育)의 경우는 1920년 9월에 이미 소비에트 교육령에 따라 한인학교들이 시교육위원회(市敎育委員會)에 편재된 바 있다.194) 그러나 한인들은 한인 나름대로 일제의 철병 이후를 대비하여 식민지교육으로 오염된 학교를 정리하고 다시금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철병 이후 1922년 1월에 시베리아한인교육회(韓人敎育會)를 창립하여 교육문제를 해결하고자 분주하였다.
   동회(同會)는 1) 의무교육실시(義務敎育實施), 2) 학제통일(學制統一), 3) 교과서(敎科書) 도서(圖書)의 편집, 4) 교원양성(敎員養成), 5) 일반적(一般的) 사회교육(社會敎育)의 진작(振作) 등의 사항을 실천과제로 삼고 활동하였다.195) 기록에 의하면, 소비에트 교육령에 의하여 편제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연해주 지역에는 2백여처의 학교가 의연히 민족주의교육을 전개하고 있었다.196)
   그러나 소비에트 노농정부(勞農政府)는 소비에트 교육령에 의거, 민족교육(民族敎育)은 인정하여 국어(國語)·역사교육(歷史敎育)을 허용하였으나 원칙적으로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은 인정하지 않았다.197) 따라서 1922년 이후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은 노령지방에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1926년, 1927년도에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한인사립학교(韓人私立學校)들도 모두 노농정부가 유지 , 경영하는 학교화되었다.
   노령(露領)의 한인들이 항일(抗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시종일관하였지만 한인들이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극동 시베리아의 정세가 큰 변수로 작용함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한인들에게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지하던 볼세비키와의 연합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노령의 한인들은 항일전선의 선봉으로서, 그리고 사회주의 선전의 선봉으로서 투쟁하였지만 결국 일제의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함으로써 항일운동의 선봉 역할을 지속할 수 없었으며, 이로써 더이상 한인들의 단채조직과 무장활동을 노농(勞農)정부는 원치 않았다. 그러나 노령의 한인들은 극동시베리아의 소비에트 공산주의화가 달성되면 곧 이어 조국독립의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공산주의운동과 한국독립운동이 일정하게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던 점은 앞서의 기대감에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1922년 9월에 일제가 조사한 노령 한인들이 발행한 신문 ·잡지들이 경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표 3>) 즉 1922년을 전후로 발간된 신문 잡지의 내용은 독립운동(獨立運動)과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후는 점차 공산주의화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표 3> 노령한인(露領韓人) 발행 신문(新聞)·잡지(雜誌)
신문·잡지명
발행지
발행일
경향
자유보(自由報)
적 성(赤 星)
원동일보(遠東日報)
독익보(獨謚報)
적 기(赤 旗)
동아공산일보(東亞共産日報)
신세계(新世界)
노농신보(勞農新報)
노농세계(勞農世界)
군 성(群 聲)
블라고웨시첸스크
흑하(黑河)
이르크츠크
이르크츠크
아네키세브스크
치 타
하바로브스크
연해주
1921
1921
1920
1921
1920.4
1921
1921
1921
1921
1922
독립운동·공산주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공산주의
공산주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공산주의
공산주의
김정주편(金正柱編), 《조선통치사료(朝鮮統治史料)》(7), 재외불온신문잡지일람(在外不穩新聞雜誌一覽)(1922. 9 ),
158∼163.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조선(朝鮮)に어(於)ける출판물개요(出版物槪要)》, 계속차압피처분이수입간행물일람표(繼續差押被處分移輸入刊行物一覽表), 177∼179면

<표 4> 노령(露領)지방에 소재한 한인학교
학교명
위치
설립연도
경영형태
비고
계동(啓東)학교 연해주 신한촌(新韓村)
1907
주민 의연금
1909년 10월 한민학교(韓民學校)로 통합
세동(世東)학교          
신동(新東)학교          
계동(啓童)학교     블라디보스톡
1907
 
 
동령(東嶺)학교     동령(東嶺)
 
 
 
희랍교(希臘敎)부속소학교     신한촌(新韓村)
 
 
 
보의(保義)학교     블라디보스톡
 
 
 
한민(韓民)학교     신한촌(新韓村)
1909
 
 
한민(韓民)여학교          
1914
단체기부금
포조자혜부인회(逋潮慈惠婦人會), 대한여자단(大韓女子團) 연합조직
향산동(香山洞)학교     향산동(香山洞)
1915
주민기부금, 보조금
 
연둔자(蓮屯子)학교     연둔자(蓮屯子)
 
 
 
진명(震明)학교     시생류애(市生流涯)
1919.5
월사금, 민회보조금
 
명진(明進)학교     동령(東領)
1919.9
 
 
동흥(東興)학교     신한촌(新韓村)
 
주민부담
주민 일동이 설립
백산(白山)학교          
1920
 
 
삼일(三一)여학교          
1917
 
 
명의(明義)학교     마두애(馬頭涯)
1920
 
 
가제게우체브학교     가제게우체브
 
 
 
이급(二級)소학교 수북하소(水北下所)
 
 
배일주의
대전의숙(大甸義塾)     자천구(煮川溝)
 
 
배일주의, 대한지리·역사·애구가수업
얀츠베소학교     얀츠베
 
 
..
화동(華東)학교     도병하(圖屛河)
 
 
배일주의
전천포(前川浦)학교     오브체코브
 
주민부담
 
맹산(孟山)학교     바라바시
 
민회에서 설립
명성(明成)학교     몽고가이
 
 
동명(東明)소학교     세치미
 
유지 기부금
 
세동(洗東)학교     하강하자(下江河子)
 
경영자 기부금
 
보명(普明)소학교     상강하자(上江河子)
 
주민부담
주민일동이 설립
아치미서당(사숙)     연해주 아치미
 
주민일동이 설립
일신(日新)학교
    노우오키에브스고
 
유지 기부금
1920년 총독부로부터 일시 보조금 수령
창동(昌東)학교     차비고오우
 
 
 
동흥(東興)학교     포셋
 
주민부담
주민부담
창명(彰明)학교     포셋
 
학부형부담
주민일동이 설립
남양(南陽)학교     바라바시
 
민회에서 설립
청호(淸湖)학교     하구(河溝)
 
 
간명(間明)소학교     슬라브얀카
 
주민일동이 설립
한인사범학교     
 
 
대한국민의회에서 설립,경영
영신(永信)학교  
 
 
남감리교회에서 설립,경영
정교(正敎)학교  
 
 
희랍교에서 설립,경영
자명(紫明)학교 연해주 노우오니고라에프카
 
 
 
대진(大震)학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농평(農坪)소학교     농평(農坪)
 
 
 
일신(日新)학교     시고도브
 
민회부담
시고도브민회 설립
청흥(淸興)학교     청흥리(淸興里)
 
민회 설립
광동(光東)학교     유랑촌(柳浪村)
 
일흥(日興)학교     노량촌(路良村)
 
숭실(崇實)학교     인수동(仁水洞)
 
광신(光信)학교     차거우(車巨隅)
 
장동(壯東)학교     광필수(光弼壽)
 
청산(靑山)학교     청산동(靑山洞)
 
명신(明新)학교     명산동(明山洞)
 
계동(啓東)학교     기암동(奇岩洞)
 
우일(宇一)학교     청류애(淸流涯)
 
보성(普成)학교     신훈동(新訓洞)
 
영락(永樂)학교     호룡치(護龍峙)
 
신흥(新興)학교     홍거치(紅巨峙)
 
창명(昌明)학교     마허리(麻許里)
 
학명(鶴明)학교     상토리(上土里)
 
시무(時務)학교     한샨
 
진명(進明)학교     금광동(金鑛洞)
 
 
 
화동학교(和東學校)     아메치노
 
 
 
보흥야학교
(保興夜學校)
    방천리(方川里)
  
 
 
오영(悟英)학교 연해주 스챤 신영동(新英洞)
 
주민부담
 
신흥(新興)학교     대하양(大河陽)
 
 
영생(永生)학교     상서현(上瑞現)
 
 
진명(進明)학교     고려지(高麗地)
 
 
양성(養成)학교     흥남동(興南洞)
 
 
만동(萬東)학교 연해주 스챤 강석동(江石洞)
 
 
융위(隆威)학교          초두동(初頭洞)
 
 
풍동(豊東)학교          북시차(北時遮)
 
 
춘산(春山)학교          지근오(芝根吾)
 
 
흥진(興進)학교          석문내(石門內)
 
 
다우치미소학교          다우치미
 
 
 
우치미소학교          우치미
 
 
 
촌치고우소학교          촌치고우
 
 
 
사범(師範)학교          신영동(新永洞)
1911
 
국민회계통학교
광무(光武)학교          
 
 
병식교련과 전술교육
광동(光東)학교 연해주 니콜리스크
1908
기부금·국민회 지변(支辨)
배일주의
니콜리스크학교

      

 

   

 
 
 
니콜리스크야학교          
 
 
 
입신(立新)학교     
 
주민부담
 
광동야학교     
 
 
 
아우구스트브카학교      아우구스트브카
 
 
 
유정구(柳亭口)소학교     유정구(柳亭口)
 
 
 
영신(永信)학교     니콜리스크
 
 
 
입신(立身)학교          
 
 
 
동흥(東興)학교          
 
 
 
하바로브스크소학교     하바로브스크
1910
 
배일주의
신덕(新德)학교          
1910
주민부담 · 기부금
배일주의
경애(敬愛)학교          
 
 
배일주의
문덕(文德)중학교          
1917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에서 설립
양성(良成)중학교          
 
 
 
광흥(廣興)학교      호성시(護城市)
 
주민설립
창신(昌新)학교      니콜리스크
 
 
 
영신(永新) 학교      화마우(火磨隅)
1910
   ..
동성(東成)학교      풍년동(豊年洞)
 
학부형설립
면학회(勉學會)
야학교
     코르샤코브
 
 
 
명신(明新)학교      고르샤코가
 
학부형부담
 
신명(新明)학교      외황평(外荒坪)
 
 
브치로브카학교      브치로브카
1894
주민부담
주민설립
신흥(新興)학교      도용봉(島龍峰)
 
월사금·학부형부담
 
서당(사숙)      양평치(陽評峙)
 
주민설립
촌립(村立)소학교(1)      시네로프카
 
월사금·학부형부담
   ..
            ..    (2)          
 
..   
용오평(龍奧坪)서당      용오평(龍奧坪)
 
..   
동신(東新)학교      차거우(車巨隅)
 
 
동평(東坪)학교          
 
 
보신(普信)학교      상봉령(祥峰嶺)
 
 
도화동선인(桃花洞鮮人)학교      니콜리스크
 
 
병식교련실시
사개정자(四個頂子)
학교
연해주 니콜리스크
 
 
         
대지안자(大地安子)
학교
         
 
 
         
숭명(崇明)학교          
 
월사금
         
사관(士官)학교      시베차
 
 
 
동명(東明)학교      스바스고에  그이린그
 
월사금·학부형부담
 
철일(哲一)학교                   유정구(柳亭口)
 
 
원동(遠東)학교                   안방리(安方里)
 
 
취영(聚英)학교      그로데코보..취영동(聚英洞)
 
 
화흥(和興)학교                    목화촌(木花村)
 
 
진흥(震興)학교                    장방촌(長方村)
 
 
일진(日進)소학교      우스트리노에
 
 
동흥(東興)학교      소자하(蘇子河)(수주허)
 
..
 
사범속성과
(師範速成科)
        
 
..
 
보성(普成)학교         
 
주민에게 교육금징수
 
대성(大成)학교         
 
 
숭덕(崇德)학교         
 
 
한흥(韓興)학교         
 
 
용진(湧進)학교         
 
 
영신(永信)학교         
 
 
진흥(震興)학교         
 
 
계림(鷄林)학교         
 
 
광신(光新)학교         
 
 
한광(韓光)학교         
 
 
창동(昌東)학교         
 
 
창흥(昌興)학교         
 
 
명동(明東)학교      (리포)스라브얀카
1908
 
지방유지들의 설립
동흥(東興)학교      영안평
            
창동(昌東)학교      소황령
 
            
의동(義東)학교         
 
            
선흥의숙      락털평
 
            
연추(煙秋)학교      노우키에프스크(연추(煙秋))
 
            
모현의숙      감도진
 
            
수청학교      숙청신영동ㄴ
 
            
금당서숙      금당촌
 
            
흥원학교      회령봉
 
            
보흥(普興)학교 흑룡주 니콜라에프스크
1911.4
청년동지회에서 교과서 배부
창신(昌新)학교         
 
월사금·학부형부담
민회 운영
고흥(高興)학교      사만리(沙滿里)
 
주민부담
민회에서 설립
한인 사관학교      옴스크
1919
 
옴스크국민회청년회 설립
한인 무관학교      이르크츠크
 
 
 
숭신(崇神)학교      스바스갸
1921.10
 
기독교남감리파 설립
숭신(崇神)여학교         
1921.5
 
            
회동(回東)학교 흑룡주 브라고웨시첸스크
 
 
배일사상 고취에 진력
흥성(興成)학교         
 
 
 
창신(昌新)학교      니콜라에프스크
 
월사금.학부형부담
민회운영
○○소학교      브라고스리우엔노에
 
 
 
○○소학교      브라고웨시첸스크
 
 
 
○○학교      울우샤
 
  국민회에서 설립
치타소학교 후패가이주(後貝加爾州) 치타
 
  백원보(白元普)설립, 국민회 계통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滿洲及西比利亞に於ける 조선인사정(朝鮮人事情)》 1923,
서비리아조선인교육상황(西比利亞朝鮮人敎育狀況)(1921), 77∼81면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조선(朝鮮)》 (3), 재외조선인경영각학교서당일람표(在外朝鮮人經營各學校書堂一覽表) (1916.12), 165∼170면
《독립신문(獨立新聞)》, 상해판 참고(參考)
 
 
 
 
6. 맺 음 말
 

   노령(露領)지방에서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이 형성, 발전되고, 소비에트 교육체제로 편제되어 소멸되기까지의 과정을 시베리아지방의 정세(情勢) 변동과 항일투쟁(抗日鬪爭)의 연관 속에서 검토하였다. 본고는 이 지방에서의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 전개의 외형적인 면만을 파악함으로써 민족운동 내부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한계를 갖었다. 따라서 민족주의 교육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의 입장과 운동방략의 차이,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이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해명을 못하였다. 이는 후일 검토를 요한다.
   맺음말로써 이제까지 서술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령지방으로의 한인이주는 1850년대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북한지방의 흉근(凶饉)으로 인해 몰락한 농민층이 향촌사회에서 이탈하여 노령지방으로 이주하였으며, 한편 러시아의 시베리아 식민정책에 따라 이주민을 환영했던 요인이 작용하여 한인 이주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러시아는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동화(同化)를 중시, 정책적(政策的)으로 동화책(同化策)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또한 이주 한인 역시 러시아로의 빠른 정착을 원하였으므로 어렵지 않게 러시아사회로 동화되어 갔다.
   그러나 노령(露領) 한인사회는 러·일전쟁, 을사5조약, 정히 7조약 등 역사적 사건을 거쳐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화(植民地化)되어가자 동화(同化) 우선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되였다. 이와같은 변화의 초래는 일제와 투쟁하던 의병(義兵)과 애국계몽운동가(愛國啓蒙運動家)들이 노령을 독립운동의 기지로 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동시에 민족주의교육학교(民族主義敎育學校)가 각 처에서 정열적으로 설립되어 근대교육(近代敎育)과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이 실시되었고, 또한 신문이 발간(發刊)되어 한인사회를 계몽시키고 결속시켜 나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노령한인사회는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직 중에는 <국민회(國民會)>와 <권업회(勸業會)>가 가장 주목할만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양대 조직은 지방회(地方會)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학교를 설립하였고,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교과서(敎科書) 보급과 교원(敎員) 양성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편 기관 신문을 발간하여 한인들에게 교육계몽은 물론 반일의식(反日意識)과 독립의식(獨立意識)을 심어주었다. 권업회(勸業會)와 블라디보스톡 한인민회가 운영한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韓民學校)는 노령의 민족주의교육학교로서는 가장 우수한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였다. 그리고 교과과정은 근대학문과 민족주의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충실히 짜여 있었으며, 학교교육장에서 나아가 반일애국적 의식을 키워 주는 한인 민족운동의 장(場)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군이 되면서 한인들의 민족운동은 탄압을 받았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추방되고 단체는 해산되었으며 언론은 폐쇄 당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당국은 또다시 동화교육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제정(帝政)이 무너지고 이어 수립된 노농정부(勞農政府)가 약소민족에게 언론·집회·결사 자유를 선포하자, 이에 고무받아 한인들의 민족운동은 크게 부흥하였다. 한인들은 민족간의 단합을 중시하여 전 민족단체를 조직하고자 하였고, 이에 대한 결실로써 한족회(韓族會)가 성립, 출범하였다. 한족회에서는 동포의 생황 안전과 문화교육면에서의 자치발전을 위한 방도를 꾸준히 모색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한족회에는 전쟁에 참전하고 귀환한 귀화 청년층이 솔선하여 동화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 교육·언론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인의 민족운동이 전민족적으로 확산되어 나가자 일제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고 동시에 위협 세력인 한인의 독립운동을 분쇄하고자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은 국치기념행사, 3·1독립운동 등 민족운동을 의연히 전개하였고 볼세비키 혁명세력과 연합하여 항일 빨치산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일제에 큰 위협과 타격을 주었다. 특히 3·1독립운동 이후에는 간도(間島)·노령(露領)지방의 청년·학생층이 연대하여 독립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그들은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독립군으로 양성되었고, 독립투쟁의 전위 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와 투쟁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그 간의 민족주의 교육운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으며 이로써 독립운동의 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
   일제는 간도 ·노령지방의 청년 ·학생층과 민족운동가들의 연합, 그리고 볼세비키 혁명주의자들과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연대하여 투쟁을 전개하자, '4월참변'을 자행하여 한인사회를 직접 통치한에 두고자 하였다. 군대를 동원하여 한인촌을 파괴하고 민족주의자들을 살해, 구금하였으며, 무력시위를 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한인사회의 분열을 꾀하고자 광분하였다. 먼저 친일분자를 내세워 기존의 민회를 파괴하고 친일민회를 조직하였으며 민회(民會)를 통해 학교를 설립하거나 학교에 재정적 보조를 하고 이들 학교에 식민주의교육을 강압하였다. 동시에 식민통치 미화를 위해 친일신문을 발간, 배포하는 등 선진활동을 적극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한인사회 분열책은 극동시베리아에서의 일제 세력이 이미 쇠퇴하고 있었고, 한인들은 치열한 항일 투쟁의식에 불타고 있었으므로 민족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였다. 한인의 독립운동에 오히려 큰 타격을 준 것은 연대투쟁을 약속하고 독립을 보장해 주었던 노농정부(勞農政府)가 일제가 시베리아철병을 결정함으로써 위협요소가 사라지자 한인 독립군의 무장을 해체시키고, 일체의 민족주의운동을 불허하며 사회주의 선전운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발생한 민족분열상이었다.
   이로써 1922년 이후 노령지방에서는 민족독립운동의 단절과 함께 교육에 있어서도 민족교육은 허용되었으나 민족주의교육은 점차 소멸되었고, 한인 발간의 신문 ·잡지 성격도 차츰 공산주의적 성격을 띠어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여 끝으로 한가지 지적해 둘 것은 한인 민족운동에서 초기 의병투쟁을 제외하고 이후의 무장투쟁계열과 교육으로 대표되는 실력양성계열을 상반된 노선의 갈등관계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령지방의 민족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가 깊이있게 천착되어야 하겠으나 본 논문을 작성하면서 느낀 것은 국제정세와 일제와의 관계에서 한인 민족독립운동은 이 두노선을 상황에 따라 최선으로 적용하면서 언제든지 일제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 석*

* 본연구소(本硏究所) 연구원(硏究員)
1) 평범사(平凡社), 《アジア역사사전(歷史事典)》(1), 애혼조약(愛琿條約), 1면
2)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조선휘보(朝鮮彙報)》, 1918.4, 서백리호(西伯利號), 서백리(西伯利)に관(關)する조사(調査), 202면
3) 자유이민법(自由移民法)에 제정된 법규(法規)에는 외국인의 자비이주(自費移住)를 인정하고, 이주민(移住民)의 관유지(官有地) 사용과 구매를 허용하였다. 관유지는 지가(地價)가 1데샤친(7척 평방을 단위로 하는 2,400평방척, 한국지적으로는 3,000평 정도)에 3루불로서 구매 면적에 제한을 두지 않았고, 100데샤친의 관유지를 경작할 수 있으며 20년간 지세(地稅)를 면제해 주는 등 특전을 제정하였다.앞의 조선휘보(朝鮮彙報), 202∼204면
4)《속대전(續大典)》 권지오(卷之五) 형전(刑典), 금제조(禁制條)
5) 니콜라이 2세의 명에 의해 곤닷찌 총독의 주재로 행해진 혹룡답사대의 보고서 제 5편인 에스 베 시리게비치저(著) 《연흑룡지방(沿黑龍地方)에서의 농업(農業)의 식민지적(植民地的) 가치(價値)》(남만주철도주식회사서무부조사과편(南滿洲鐵道株式會社庶務部調査課編), 내산피득역(內山彼得譯)) 《노령극동(露領極東)の농업(農業)と식민문제(植民問題)》로 개제(改題))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임의(任意)로 생국(生國)을 탈출하는 사람은 법률(法律)에 의거하여 사형(死形)으로 처벌한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朝鮮人)은 무리를 이루어 극동변경(極東邊境)으로 살대도(殺到)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인(朝鮮人)의 탈출(脫出)을방지하기 위한 특종(特種)의 목적(目的)으로 국경(國境)에 배치(配置)시킨 조선초병선(朝鮮哨兵線)도 이러한 자연(自然)의 이동(移動)을 방지할 수 없었다. 자국초병(自國哨兵)의 무자비한 박해(迫害)를 입은 조선인(朝鮮人)은 노국(露國) 국경 가까이에서 과감히 최후를 마쳤고 방기(放棄)된 수천(數千)의 시체는 두만강 조선연해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참사(慘事)도 실권(失權)과 기아(饑餓) 때문에 절망에 빠진 조선인의 이주를 억지(抑止)할 수는없었다(31-32면).
6)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만주급서비이아(滿洲及西比利亞)に어(於)ける조선인사정(朝鮮人事情)》 1923,8면
7)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2), 상해판(上海版) 《독립신문(獨立新聞)》
8) 노국정부(露國政府)는 조선이민(朝鮮移民)은 (一)농사(農事)에 특장(特長)이 잇슴으로 미간지개척(未墾地開拓)에필요(必要)한 것. (二)동화성(同化性)이 풍부(豊富)한 것. (三)영토적야심(領土的野心)이 없는 것, (四)일본(日本)에대(對)한 반항심(反抗心)을 이용(利用)할 수 잇는 것. 등(等)을 드러 조선인(朝鮮人)의 이민(移民)을 환영(歡迎)하얏슴으로‥‥‥
김동진(金東進), ⑥ 재로동포(在露同胞)의 과거현재(過去現在), 《신동아(新東亞)》 1032.7(2권 7호), 23면
9)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2) 연흑룡총독관구내재주조선인(沿黑龍總督管區內在住朝鮮人)에 대(對)한 노국정부(露國政府)의 방침(方針)에 관(關)한 건(件), 500면
10) 위의 책
11) 1910년 니콜라이 2세의 명에 따라 연(沿)·흑룡지방(黑龍地方) 총독 곤닷찌의 주재로 진행된 연흑룡지방조사사업(沿..黑龍地方調査事業)의 보고서 제11권, 웨 그라비에(B.TPABE)저(著). 《연흑룡지방(沿黑龍地方)의 지나인(支那人)·조선인급일본인(朝鮮人及日本人)》 (1912년 출판)은 시베리아지방 관공아(官公衙)의 문서와 현장 답사를 통해 관사인(官私人)에게 질문한 사실을 정리한 실지시찰기(實地視察記)로서 당시 정황을 정확히 기술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南滿淵鐵道株式會社) 서무부(庶務部) 조사과편(調査課編)(태전삼효역- 太田三孝譯)<극동로령(極東露領)に어(於)ける황색인문제(黃色人問題)>로 개제(改題)되었다.
12) 한인의 농지 개척 능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인은 노인(露人)이 도저히 개간하지 못하는 교학지(地)를 잘 개간한다‥‥‥"(109면)
"한인 대다수는 농업을 영위한다. 저들은 천성(天性)이 농민이며 일견(一見) 농작이 불가능한 땅이라도 채원(菜園)을 잘가꾸어 연맥(燕麥)과 교맥(蕎麥)을 재배한다. 사역토(砂礫土), 산의 급사면(急斜面), 소택(沼澤)과 같은 곳은 한번 한인의 손이 거쳐가면 바로 농경지(農耕地)로 된다…"(109면) 웨그라비에, 같은 책
13) 1886년 러시아는 한인(韓人)을 국경 일대에 정주(定住)케 하는 일은 국가적견지(國家的見地)에서 위험한 일로 여기고 기왕(己往)에 국경(國境) 부근 러시아령에 정주(定住)한 한인(韓人)을 내지(內地)에 전주(轉住)시키는 법률(法律)을 의정(議定)하였다. 그리하여 1886년 11월 22일 의정(議定)된 사항을 법률(法律)로 하여 국경일대의 한인 비귀화인들을 한국에 도로 귀환시킬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이주에 드는 경비를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포셋지방에서 한인을 구축할 경우 한인들에 의하여 조달되는 이 지역의 양식(養食)과 노력(勞力)을 담당할 사람이 없음으로 이 지역 러시아 주둔 군대 및 관청이 심히 곤란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한인들을 구축할 수 없었다고 한다.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같은 책 (2), 501∼505면
14) 노령조선인농촌정형(露領朝鮮人農村情形)의 금석(今昔), 《개벽(開闢)》 1925.7, 61호, 100∼101면
15) 노령거주(露領居住) 한인 인구수(人口數)게 대한 일제기관조사(日帝機關調査)와 한인측(韓人側)의 기록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12년 6월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가 노령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한인의 동향을 조사하기 위하여 작성한 노령연해주조선선인분포약도(露領沿海淵朝鮮鮮人分布略圖)에 의하면 이주(移住) 한인의 총수(總數)가 15만(萬)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나 연해주 재주한인(在住韓人) 중에 노국여권(露國旅券)을 소지한 자는 50분의 1에 불과하여 정확한 이주한인 (移住韓人)의 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겠다. (웨 그라비에, 《극동노령(極東露領)に어(於)ける황색인종문제(黃色人種問題)》, 조선인문제조사회보고, 111면)
1909년 포염일본총령사관(浦鹽日本總領事館) 조사(調査)에 의하면 이주한인(移住韓人)이 블라디보스톡에 2만(萬), 포셋과 흑룡강 해안일대에 2만(萬), 니콜리스크와 그 부근에 2만(萬), 소성(蘇城)(스챤)과 그 부근에 3만(萬), 그 외기타 지역에 5천인으로 총 85,000여명이나 조사누락까지 더하여 실수(實數)를 10만(萬) 정도라고 기록하였다.(재로한인동태(在露韓人動態)에 관(關)한 촌정헌병대위시경복명서(村井憲兵大尉視警復命書),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1), 974면)
1920년대 초반 기록을 보면, 포조(浦潮)에 48,000인, 니시(尼市) 중심 일대에 52,000인 남부(南部) 우수리 일대 5만(萬)인, 연해주를 제외한 시베리아 전체에 5만(萬)인으로 노령(露領) 거주 한인수(韓人數)를 대략 20만(萬)으로 기록하고 있다.(소송천오랑(小松淺五郎), <동부서백리아(東部西伯利亞)①조선인(朝鮮人)>, 《북만급노령조선인사정(北滿及露領朝鮮人事情)》 1922,113면)이에 비하여 한인측(韓人側) 기록은 일제측(日帝側) 기록보다는 이주한인(移住韓人)의 수를 훨씬 크게 잡고 있다. 과학적인 조사(調査)가 불가능했던 당시 실정으로 보아 일제(日帝)가 제시한 조사자료 역시 신빙할 수 없고, 한인측기록은 감수(減數)를 요(要)한다. 참고로 이주한인수(移住韓人數)가 기록된 자료(資料)를 보면,
"십년전(十年前)(1908)에 해참위이북도소리이동(海參威以北島蘇里以東), 흑룡강연해주이북(黑龍江沿海州以北). 각지방(各地方)의 이주선인(移住鮮人)을 팔십만(八十萬)으로 계산(計算)한다 하니 차(此)는 노국인(露國人)의 통계(統計)라…"(신채호(申采浩), 조선(朝鮮)의 식민지(植民地), 《매일신보(每日申報)》 1918. 4. 2)
"아령(俄領)의 한인(韓人)은 백만(百萬)으로 산(算)하나니 적어도 오십만(五十萬)은 불하(不下)한지라…"(성재선생담(誠齋先生談), 아령(俄領)의 한인(韓人). 《독립신문(獨立新聞)》, 1919. 9. 25)
16) 앞의 《조선휘보(朝鮮彙報)》, 20면
17) 토우보브스고이와 그로테고브(1898∼99) 연흑룡총독(沿黑龍總督)은 한인(韓人)을 시베리아에 식민(植民)하고, 노화(露化)시키는 것이 득책(得策)이라는 의견을 갖고 한인(韓人)들의 귀화를 장려하고 한인촌(韓人村) 건설에 우호적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같은 책 (2), 505면
18) 뒤바보, <아령실기(我領實記)>(11)
19)노문학교(露文學校)외에는 일체 허락치 않음으로 "교육을 위해서는 비밀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데 혹 관리에 발각이 되면 퍽 시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함으로 「관리가 온다」하면 모두 헤어지던지 그렇지 않으면 문을 꼭닫고 쥐죽은 듯이 가만희 있던지 하게 되는 일이 종종하다"라고 하여 당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노령조선인농촌정형(露領朝鮮人農村情形)의 금석(今昔), 같은 책, 202면
20) 김동진(金東進), 재노동포(在露動胞)외 과거현재(過去現在), 같은 책, 27면
21)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파견 촉탁(囑託) 소전사무관(篠田事務官)이 대정군사령관(大井軍司令官)에게 보낸 보고<포조방면(浦潮方面)ニ어(於)ケル배일선인(排日鮮人)ニ관(關)スル건(件)>1919. 9. 10 에서 배일사상(排日思想)의 유래(由來)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인(朝鮮人)이 노령(露領)에 이주(移住)를 개시(開始)한 것은 50년여전(年余前)에 속하나 그 당시 이주민(移住民)은 단순히 생활문제(生活問題) 때문에 조국(祖國)을 떠나 경지무한(耕地無限)한 토지(土地)를 구(求)하려 온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배일사상(排日思想)이 배태한 것은 일로전쟁이후(日露戰爭以後)에 속한다. 즉 명치(明治) 35년(年)에 청한양국간(淸韓兩國間)에 다년간 현안(懸案)이었던 간도문제(間島問題)를 해결하고자 한국정부(韓國政府)는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서 간도에 파견하지만 이범윤(李範允)은 단비사변이후(團匪事變以後) 간도국자가(間島局子街)에 주재(駐在)한 노국군정관(露國軍政官)의 무력을 빌려 간도문제를 한국에 유리(有利)하게 해결(解決)하려고 그와 결탁하고 있을 때 일로전역(日露戰役)이일어나 제국정부(帝國政府)의 충고에 의해 간도문제의 쟁의(爭議)는 전국종료흘(戰局終了) 청한양국(淸韓兩國)에서 중지(中止)하게됨으로써 이범윤(李範允)은 그 입장(立場)을 잃고 부하(部下)의 사포대(私砲隊)를 이끌고 노군(露軍)에 복종하기에 이르러 우리(일본) 북한국(北韓國)과 총화(銃火)를 교환하는 등의 일이 있었으나 평화극복(平和克復)하고 아국(我國)의 세력이 간도에 미치자 도망하여 남부도소리(南部島蘇里) 연추(煙秋)(노오키에프스고에)에 와서 우민(愚民)을 선동(煽動)하여 국권회복(國勸恢復)을 꾀하였다. 그리고 일한협약(日韓協約)에 의해 한국(韓國)은 제국(帝國)의 보호국(保護國)이 됨으로써 정치상(政治上) 불평(不平)의 무리가 간도(間島)와 노령(露領)으로달아났으며 특히 이범윤(李範允)은 학식재능(學識才能)에서 한인(韓人)의 추령(推領)하는 자되어, 와서 투신(投身)하는 자(者)가 많아 노령방면(露領方面)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은 이 때부터 일반이민간(一般移民間)에 보전(普傳)되었다. 그 후 차(次)외 일한협약(日韓協約)에 의해 한국(韓國)의 군대(軍隊)를 해산(解散)함에 의하여 불평(不平)의 군인(軍人) 등은 상솔(相率)하여 폭도화(暴徒化)하고 있는 흉폭(凶暴)를 떨치고 있으므로 아군대경찰(我軍隊警察)의 토벌에 의해 잔당(殘黨)은 역시 도망하여 이 지방에 왔으며 그후 다시 일한병합(日韓倂合)에 의하여 이들 불령의 무리들은 좋은 구실을 얻고 더욱 배일사상(排日思想)을 보전시키고 특히 저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음으로 호구(糊口)의 자(資)를 얻기 위하여 혹은 학교를 일으키고 혹은 신문지를 발행 하고‥‥‥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포로방면(浦潮方面)ニ어(於)ケル배일선인(排日鮮人)の상황(狀況), 1919.9.10, 442면
22)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도 "십수호집단(十數戶集團)이 되면 먼저 서당(書堂)을 설치(設置)하고 자제교육(子弟敎育)을 기하는 경향(傾向)"이 있었고(《만주급서비리아지방(滿洲及西比利亞地方)に어(於)ける조선인사정(朝鮮人事情)》, 52면), "약간의 생도(生徒)를 수용하여 교육을 표방하여 국권회복사상(國權回復思想)을 주입"하고 있었다. (김정명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2), 951면)
23) 운테르베르겔총독은 "일조(一朝)에 노국(露國)이 일본(日本) 혹은 지나(支那)와 개전(開戰)할 때‥‥적국(敵國)의간첩이 될 위험이 있다"(108면)고 하였고"조선인(朝鮮人)이 있는 개간지가 좋은가 조선인(朝鮮人)이 없는 개간지가 좋은가 나에게 물으면 나는 차라리 후자를 택한다…"(110면) 라고 하였다.웨 그라이에, 같은 책
24)위와 같음, 115∼116면
25)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 같은 책 (1), <해조신문(海潮新聞)> 1908. 4. 30, 993면
26) 웨 그라비에, 같은 책, 142∼143면
27) "현재(現在)는 종래(從來)의 원인(原因) 외에 조선인(朝鮮人)의 독립(獨立)을 빼앗은 일본인(日本人)에 대(對)한 수원(怨)과 증오(憎惡)도 이에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노국(露國)의 영토(領土)로 넘어오는 선인이민(鮮人移民)외 수(數)는 매년 증가(增加)하고 있다. "시리게비치저(著) 《노령극동(露領極東)の농업と식민문제(植民問題)》, 32면
28)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만주급서비리아(滿洲及西比利亞)に어(於)ける조선인사정(朝鮮人事情)》, 75면
29)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 (8)
30) 지방회(地方會)가 있었던 지역(地域)은 내외수청(內外水靑)의 중흥동(中興洞)·응암평(鷹岩坪)·상서현(上西峴)·신흥동(新興洞)·고려지(高麗地)·두도구(頭道溝)·북시차(北時次)·강거치(江巨峙)·서아현(西阿峴)·화룡동(化龍洞)·치암동(岩洞)·인수동(仁壽洞)·신한동(新韓洞)·신묘현(新妙峴)·청도(淸島)·금항리(金巷里)·도화촌(桃花村)·적양촌(赤楊村) ·만춘동(萬春洞)·개금동(開金洞)·오봉동(五峯洞)·포수동(捕獸洞)·쌍룡동(雙龍洞)·한흥동(韓興洞)이며 , 지방회 집행기관으로 회장(會長)·총무(總務)·서기(書記)·학무원(學務員) ·재무원(財務員)· 구제원(救濟員)·외교원(外交員)·사찰원(査察員)을 두었다.위와 같음.
31)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11)
32)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8)
33)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소장, 마이크로 필름 재등실문서(齋藤實文書), 조중응공술(趙重應供述)
34) 1908년 당시 설립된 학교는 개인이 설립한 학교보다는 주민들의 연금으로 세워진 것이 일반이었다. 당시 상황을 《해조신문(海潮新聞)》1908. 5. 21(57호)에서 "…지방마다 유지신사제군이 조국의 형편됨을 개탄히 여겨 어찌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까 강구하여 본즉 청년 교육하는 외에는 다른 방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교육의 필요됨을 깨닫고 혹 가옥도 연조하며 혹 전토도 연조하며 혹 금전도 연조하며 혹 서적도 보조하여 자자히 곤란을 불계하고 교과서의 서적을 매입하여 교사를 연빙하여 학교의 모양을 성립하였으니 어느 곳이던지 학교가 설립된 것이다.…"라고기술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 같은 책 (1),995면)
러시아인측 자료에는, "…조선인(朝鮮人)은 무릇 저들의 촌(村)에 학교(學校)가 없는 촌(村)은 하나도 없다. 때로는1촌(村)에 2교(校)인 곳도 있다. 조선인(朝鮮人)은 교육(敎育)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교육당국(敎育當局)에서 준돈으로는 만족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공동자금(共同資金) 중에서 3백, 5백금(金)을 교원(敎員)에계 내고 우수한 교원(敎員)을 얻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웨 그라비애, 앞의 책, 150면)
35)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소장. 같은 책(1), 재로한인동태(在露韓人動態)에 관(關)한 촌정헌병대위시찰복명서(村井憲兵大尉財視察復命書), 1910.1, 975면
36)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12)
37)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이었던 정순만(鄭淳萬)은 을사 5조약을 반대하며 대한문복합상소(大漢門伏閤上疏)를 올렸던 유생으로 그후,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과 함께 북간도(北間島) 최초의 민족주의(民族主義) 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 건립에 참여하였으며 장지연(張志淵)은 잘 알려져있다시피《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기고한 자이다 이강(李剛)은 미주(美洲)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에참여하고 기관지 《공립신문(共立新聞)》을 1년 동안 경영한 바 있다.
38) "…의연금 모집을 하는 취지를 발기하면 각 처 동포가 동숭상응하여 역부(役夫) 빈민도 연금하는 자 분분하고 부녀학도까지 의기가 발하여 먼저 보조함을 다투니…"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 같은 책(1), 《해조신문(海潮新聞)》 1908.5.21, 995면
39) 위의 책, 977면
40) 일제측 기록에 보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척결하기 직전 안중근(安重根)은 《대동공보(大東共報)》연추(烟秋)(노우키에프스크)지방 담당 탐방원(探訪員)이자 섭외파매인(涉外販賣人)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안중근(安重根)은 의병투쟁(義兵鬪爭)·학교설립(學校設立)·언론첨동(言論活動) 등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모든 방면에서 활약했던 인물로서 그의 운동성은 주의(主義) ·방략(方略)에 있다기 보다는 대세에 적함한 실천력에 있었다고 하겠다.
위의 책, 978면
41) 윤병석(윤炳奭), 《이상설전(李相卨傳)》, 일조각(一潮閣) 1984, 134면
42)김정주편(金正柱編), 《조선통치사료(朝鮮統治史料)》(7), 조선인개황(朝鮮人槪況), 1916. 6, 614면
43) 제 2차 노일협약(露日協約)은 3개조(條)의 공개협약(公開協約)과 6개조(條)의 비밀협약(秘密協約)으로 조인되었다.비밀협약에서는 1) 제 1차 비밀조항의 추가 약관(約款)에 결정된 분계선(分界線)을 만주(滿洲)에서의 양국(兩國)의특수이익지역(特殊利益地域)으로 할 것 2) 전기지역내(前記地域內)에서 양국(兩國)은 상호(相互)의 특수지위를 서로 존중(尊重)함과 동시에 지역내(地域內) 이익방위(利益防衛)를 위한 자유행동(自由行動)을 취할 권리(權利)가 있음을 인정한다. 3) 전기지역내(前記地域內)에서 양국(兩國)이 각특수이익(各特殊利益)을 확보증진(確保增進)할 경우에 어떤 방해도 하지 않는다. 4) 양국(兩國)은 다른 한편이 특수이익(特殊利益)을 갖는 지역내(地域內)에서는 어떤 정치상(政治上)의 활동(活動)도 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의 특수이익(特殊利益)을 해치는 특권허여(特權許與)를구하지 않는다. 5) 양국(兩國)은 각자(各自)의 특수이익(特殊利益)에 관계(關係)있는 일절의 사항(事項)에 관하여 격의(隔意)없이 성실히 상의(商議)하며 이 특수이익(特殊利益)이 침박(侵迫)되는 경우에 양국(兩國)은 이익옹호(利益擁護) 정하였다.
이 협약에 의하여 일본(日本)은 한국을 원할히 강제병탄하였고 미국의 만주진출에 대하여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긴밀한 협조에 의한 공동전선(共同戰線)이 확립되었으며, 노일재전(露日再戰)의 위험이 거의 소멸(消滅)되었다.
외무성외교사료관(外務省外交史料館) 일본외교사사전편찬위원회편(日本外交史辭典編纂委員會編), 《일본외교사사전(日本外交史辭典)》, 685면
44) 《신한민보(新韓民報)》 1914. 2. 26, 국민회력 
45)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 (7), 조선인개황(朝鮮人槪況), 614면
46) 위와 같음
47) 《신한민보(新韓民報)》 1914. 2. 26, 국민화력 
48)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8), 660면
49) 16개 지회(支會)는 블라디보스톡·스챤·니롤리스키·우수리스크·이만·하바로브스크·블라고웨시첸스크·치타·이르크츠크나시면 ·스립스크 ·알히산더롭스크 ·울림지방 등지이다. 주45)와 같음.
50) 김원용, 같은 책, 769면
51) 윤병석(尹炳奭), <1910년대 독립군(獨立軍)의 기지설정(基地設定)> 《군사(軍史)》 6,237면

52)
53) 청도회의(淸島會議)의 내용은 이광수(李光洙), 《도산안창호(島山安昌浩)》와 주요한,《안도산전집(安島山全集)》·《추정이갑(秋汀李甲)》에 기술되고 있는데, 청도회의(靑島會議)에 참가한 인물들은 유동열(柳東說)·이갑(李甲) ·신채호(申采浩)·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鍾浩)·김지간(金志侃)·조성환(曹成煥)·이강(李剛)·박영로(朴英魯)·김희선(金羲善)·이종만(李鍾萬) 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에 기술된 회의 내용에 보면, "‥ ‥불행히 이때에도 의견은 두갈래로 갈리게 되었다. 하나는 당장에 만주로 가서 광복군을 조직하여 일본과 개전하자는 이른바 급진론이요, 하나는 해외 동포를 조직, 훈련하여 실력을 기르면서 장래의 기회를 기다리자는 점진론의 대립이 었다. 군인이오 성격이 불같은 이동휘가 급진론의 선봉이었고 도산이 점진론을 주장한 것은 물론이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교육(敎育)은 무엇이고, 산업(産業)은 다 무엇이냐 당장 나가서 싸우다가 죽으면 죽을 것이다'하고 이동휘는 눈물을 뿌리며 땅을 쳤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다른 저서의 기술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이러한 기록들에 연유하여 해외(海外)에서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를 건설하고자 했던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은 애초부터 무장독립투쟁(武裝獨立鬪爭)과 실력양성노선(實力養成路線)의 차이로 인해 분렬(分裂)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많은 저서와 논문들이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의문점이 있다. 먼저 도산(島山)이 1932년 상해(上海)에서 피체되어 서울로 호송(護送)된 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죄(違反罪)로 4연형(年刑)을 언도(言渡)받을 때까지의 진술 부분을 보면 “‥‥당지(當地)로 가서 만주의 농지개척(農地開拓)을 제의(提議)하다. 그런데 유동열(柳東說) 김희선(金熙(羲)善)은 자금을 신문과 잡지 경영에 쓰자하고 본인과 이갑(李甲)은 예정 계획대로 농지 개척에 쓰자하여 양자(兩者)의 상견(想見) 불일치(不一致)로 실행에 이르지 못하다"고 하였다. (주요한, 위의 첵, 예심신간기보유(豫審訊間記補遺), 896면)
강제변탄 직후인 9월에 열린 해삼위회담(海蔘威會談)에서의 진술을 보면, "…거기도 본인(本人)(안창호)과 이갑(李甲)은 의연(依然)히 농지개척(農地開拓)에 주력(注力)하여 교민한족(僑民韓族)의 생활안정(生活安定)을 얻으며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투사(鬪士)를 양성함이 한족(韓族)의 미래 운동에 유조(有助)할 것으로 역설(力說)하여으나 타이인(他二人)은 만주에서 속히 한족 군인을 양성하며 사(事)를 모(謀)하자 주장하므로 우복(又復) 의견(意見)이 불일치(不一致)하여…"라 고 하였다. (위의 책, 897면)
위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해삼회담(海蔘會談)에서 독립군양성(獨立軍養成)의 입장은 양론 모두가 주장하고 있으나 한족(韓族)의 생활안정(生活安定)을 우선으로 할것인가, 독립군양성(獨立軍養成)을 우선으로야 할것인가의 차이가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앞서의 인용문에서 처럼 이동휘에 의하여 무력투쟁론이 주장되었다고 함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동휘가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했는가의 여부는 본논문(本論文)의 주제에서 벗어난 문제이기는하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도산기념사업회편(島山記念事業會編), 《속편도산안창호(續編島山安昌浩)(1954), 144면 이강회고담(李剛回顧談)을 보면 청도회의(靑島會議)에 참석한 신민회원(新民會員)은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신채호(申采浩)·김희선(金羲善)·이종호(李鍾浩)·김지간(金志侃)·이강(李剛)으로 이동휘(李東輝)의 이름은 기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동휘의 활동의 활동을 추적해 보면, 1909년 10월 이후 정재면(鄭載冕) 을 단장으로, 한 북간도교육단(北間島敎育團)의 일원으로 간도(間島) 용정(龍井)에 파견되어 북간도 교육사업에 투신하였고, 1907년에 경에 부친(父親)이승교(李承矯(이성교(李聖敎))와 함께 기독교인으로 입신(入信)한 그는 1910년에는 카나다선교사 그리어슨(Robert.G. Grierson)과 함께 함경도·간도·연해주 지역을 돌며 기독교 전교활동(傳敎活動)을 하였다. 간도지방에서는 삼국전도회(三國傳道會)를 조직하여, 각지에 무수히 많은 소학교를 설립하였고 용정촌(龍井村)·화룡(和龍) ·국자가(局子街) 등지에 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도전도미(嶋田道彌),《만주교육사(滿洲敎育史)》461∼417면), 1911년 간도지방에서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를 인도한 당시는 여성교육도 민족교육·독립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여 김약연(金躍淵)으로 하여금 명동여학교(明東女學校)를 설립토록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이지택(李智澤), 북간도(北間島)(10), <중앙일보(中央日報)> 1972. 10. 23)
이처럼 이동휘는 1911년 6월 19일 '안명근 ·양기탁 사건'으로 인해 대무의도(大舞衣島)로 유배되기 까지 기독교 전도와 학교설립에 주력하였고, 교육을 국권회복의 우선 방안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1912년 유배에서 풀려난 이동휘는 그 해 말에 갑산군 혜산진에서의 부흥사경회를 틈타 1913년 1∼2월경 북간도로망명하였다. 이 곳에서 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안창호(安昌浩)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국치(國恥) 제4년(1913) 9월 22일 성재(誠齋) 애제(愛弟)는 도산(島山) 애형(愛兄) 각하에게 다시 문안하오며 앙달(仰達)하옵니다‥‥ 간도형편(間島形便)으로 언(言)하면 원수 악마(惡魔)의 저희(咀戱)가 극도(極度)에 달(達)한 중에서회민(會民)도 하노라 교육(敎育)도 하노라 실업(實業)도 하노라 모든 준비가 착착 진보하는 모양이오, 금년추기(今年秋期)에는 각학교(各學校) 학생모집(學生募集)이 잘되어 매교(每校)에 백여각식(百餘各式) 되고 우리의 정신교수도 진행 중이외다‥‥‥"<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14-45(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편지)>라고 하여 이로써 보면, 그의 운동 방향이 결코 안창호와 대립적인 이견(異見)을 갖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청도회의(靑島會議)에서 이동휘(李東輝)가 참석하여 급진적인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였다는 설(說)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54) 도산기념사업회편(島山紀念事業會編), 《속편도산안창호(續編島山安昌浩)》, 144면
55) 1911년 대한인국민회북미총회(大韓人國民會北美總會)에서는 치타, 블라디보스톡. 스챤, 하바로브스크에 소재한 지방회에 경비를 보조하는 안건을 결정하고 있다.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10-63, 대한인국민회북미총회(大韓人國會北美總會) 통첩 안건, 1911.10.11
56) 현(現)◎정영료(定營料), 0조훈(朝勳)즛 (3), 재외조선인경영각학교서당일람표(在外朝鮮人經營各學校書堂一覽表), 1916. 11, 밀산현무관학교(密山縣武官學餃), 157면
57)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7). 조선인개황(朝鮮人槪況), 614면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재외불양선인(在外不良鮮人)の언동(言動)》, 1910, 10. 11조
58)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11-15, 1911.11.21 (백원보(白元普)→안창호(安昌浩) 편지)
59)
60) 위의 신문, 1914. 1. 15, 1914. 4. 9, 원동소식(遠東消息)
61)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재외불양선인(在外不良鮮人)の언동(言動)》, 1911. 12.20조
62) 주요한편저(朱耀翰編著), 《안도산전집(安島山全集)》, 126∼127면
63)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12), 오(五), 신문잡지(新聞雜誌)와의 교육(敎育)
64) "‥‥<야소정교보(耶蘇正敎報)>라는 제목의 잡지(雜誌)를 석판인쇄(石版印刷)로 발행(發行)하고 아황실(俄皇室) 을 매리(罵)하고 또한 일반일본(一般日本)의 정치(政治)를 조소(嘲笑)하고 일한병합(日韓倂合)을 분개(憤慨)하는 기사(記事)를 실어 동인간(同人間)에게 배일사상(排日思想)의 고취(鼓吹)에 노력하고 있다‥‥‥"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서백리급만주출장복명서(西伯利及滿洲出張復命書) 1918. 2. 9, 33면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같은 책, 1911.12.20조(條)
65) 《신한민보(新韓民報)》1, 1914.4.9, 원동소식(遠東消息)
66) 유효종(劉孝鐘), <극동(極東)ロシアにける조선민족운동(朝鮮民族運動)>, 《조선사연구회론문집(朝鮮史硏究會論文集)》122, 164
67) 유효종(劉孝鐘), 같은 논문, 152∼153면
68) 웨 그라비에, 같은 책, 113면
69) 윤병석(尹炳奭), <권업회(勸業會)의 성립(成立)과 권업신문(勸業新聞)의 간행(刊行)>,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논총(千寬宇先生還歷紀念韓國史論叢)》, 873면
70)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소장, 같은 자료 11-19, 1911. 8. 23(유진율(兪鎭律)→안창호(安昌浩) 편지)
71) 윤병석(尹炳奭), 앞의 논문, 878면
72)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9), 구(九). 권업회(勸業會)
73)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10-52, 1911. 9. 16, (백원보(白元普)→안창호(安昌浩) 편지)
74) 이 조약은 본래 러시아가 1905년 제 1차 러시아혁명 이후 일본으로 도주한 혁명주의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재한한 것인데, 노령(露領)지방에서의 한인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이 곳에 들어간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1908년 말경부터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갖다고 한다.
유효종(柳孝鐘), 같은 논문, 141면 《신한민보(新韓民報)》1913. 10. 17, 루령됴션인문뎨
75) 윤병석(尹丙奭), 앞의 논문, 874면
76)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 같은 책(2), 권업회일주년기념회(勸業會一週年紀念會)에 관(關)한 보고(報告), 601면
77) 일제(日帝)는 곤닷찌총독에 대한 불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1912년 12월 노령 연해흑룡주총독 곤닷찌는 재포염(在浦鹽) 대조(大鳥)총영사의 희망을 받아들여 배일선인(排日鮮人)·선어신문(鮮語新聞)과 권업회(勸業會)의 취체방법(取締方法)에 대해 진력할 뜻을 구약(口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후 동(同)총독은 스스로 나아가 권업회의 명예회원이 되고 또한 권업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였을뿐 아니라 권업회 해산과 선인(鮮人) 취체 방안에 관한 대조(大鳥)총영사의 희망 내용을 배일서인측(排日鮮人側)에 누설하는 등 오히려 저들의 배일사상을 종용하는 것 같은 기괴(奇怪)한 거동을 하며…"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 (7), 조선인개황(朝鮮人槪況), 618면
78) 당시 상황을 전달해 주는 편지(이갑(李甲)→안창호(安昌浩))에 의하면,
"차아국(此俄國)은 사실상전제국(事實上專制國)으로 집회(集會)·출판(出版)의 일체자유(一切自由)가 무(無)하여 관헌(官憲)의 교섭(交涉)이 무(無)하면 일체사(一切事)를 주거(做去)키 난(難)할 뿐아니라 동족(同族)의 일치행동(一致行動) 못되는 폐()가 불무(不無)하오며 차차국(且此國)의 정치행정(政治行政)을 관(觀)하면 당국자인인(當局者個人)의 의사(意思)가 법률명령(法律命令)이라 여차(如此)한 것이 금일(今日)까지는 오등사업(吾等事業)에 대장애(大障碍)가 되지만은 만일 차(此)를 잘 이용(利用)하면 도리어 우리의 호개리용로(好個利用路)가 될지라‥‥‥"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11-17, 1911. 11. 24(이갑→안창호 편지)
79) 1911년 12월 재창립 당시 새로이 제정된 권업회의 회칙 제 1조를 보면, "국민(國民)의 근로(勤勞)에 대한 애경(愛敬)의 뜻을 개발(開發)하여 생활상근검(生活上勤儉)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 교육(敎育)을 실시하여 대로서아국국민(大露西亞國國民)이라는 의식(意識)과 관념(觀念)을 양성(養成)함에 있다"라 하였고, 전체적으로 러시아당국에 의한 엄격한 통제와 러시아화(化)를 강제하고 있다.
유효종(劉孝鐘), 앞의 논문, 155면
80) 윤병석(尹炳奭), 앞의 논문, 881면
81)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11-24, 1911. 12. 23(백원보(白元普)→안창호(安昌浩) 편지)
82) 한국일보사편(編), 《재개굴(再開掘)한국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 1편 만주(滿洲) ·노령(露領)에서의 투쟁(鬪爭), 권업회(勸業會)의 이원제(二元制) 운영, 76∼77면.
83) 《신한민보(新韓民報)》 1913. 12. 19, 원동쇼식
84) "‥‥권업회(勸業會) 같은 집단이 지방에서 교육보급을 전무(專務)하므로 한식(韓式)교육의 학교가 처처(處處)에 창립(創立)되어 이족흡화(異族吸化)의 전제책(專制策)을 남용(濫用)하는 아국(俄國)의 저해(沮害)·금제(禁制) ·기염(忌厭)를 갖추어 감당(堪當)하면서 국혼(國魂)을 초반(招返)하며 문화를 전달하였다. "《독립신문(獨立新聞)》p, 1920. 4. 3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11)
85)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9)
86) 유효종(劉孝鐘), 앞의 논문, 154면
87)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같은 책
88) 위의 책, 1911. 3. 5 ·1912. 1. 8조(條)
89) 《신한민보(新韓民報)》 1918. 1. 3, 원동
90)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같은 책, 1911. 3. 26조(條)
91) 위의 책, 1911. 8. 29조(條)
92) 주(註) 89)와 같음
93)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11-19, 1911. 8. 23(유진율(兪鎭律)→안창호(安昌浩) 편지)
94) 위와 같음
95)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같은 책, 1911.8.29조(條)
96) 위의 책. 부록(附錄) 재외발간선문신문잡지조사표(在外發刊鮮文新聞雜誌調査表)
97) 위와 같음
98)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4.8. (아령실기(俄領實記))(12)
99)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같은 책, 1912. 5. 19조(條)
100) 위의 책, 1912. 8. 29조(條)
101) 위의 책, 1912. 8. 14조(條)
102) 《신한민보(新韓民報)》, 1913. 8. 22, 북간도의 대운동
103)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같은 책, 1912.9.16조(條)
104) 주(註) 96)과 같음
105) 윤병석(尹炳奭), <연해주(沿海州)에서의 민족운동(民族運動)과 신한촌(新韓村)>, 《한국민족운동사연구》(3), 180면
106)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11)
107) 윤병석(尹炳奭), 위의 책, 181면
108) 위와 같음
109) 위와 같음
110) 위와 같음
111) 위와 같음
112) 위와 같음
참고로 노령지방에서 교재로 널리 채택하고 있었던 현채(玄采)의 《유년필독(幼年必讀)》(41∼46면)에 게제되어 있는 독립가(獨立歌)의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독립가(獨立歌)>
독립(獨立)하세 독립(獨立)하세
우리 나라 독립(獨立)하세
우리 청년(靑年)소년(少年)들아 우리나라 독립(獨立)하세
슬프고 분(忿)하다 우리 대한(大韓)나라
어이하여 이 지경 노례자취(奴隸自取) 이 지경
슬프고 분(忿)하다 우리 대한(大韓)나라
어이하여 이 지경 비굴자감(卑屈自甘) 이 지경
슬프고 분(忿)하다 우리 대한(大韓)나라
어이하여 이 지경 청아(淸俄) 믿다 이 지경
슬프고 분(忿)하다 우리 대한(大韓)나라
어이하여 이 지경 세사전미(世事全味) 이지경
슬프고 분(忿)하다 우리 대한(大韓)나라
113) 조동걸(趙東杰), <1910년대 민족교육(民族敎育)과 그 평가상(評價上)의 문제(問題)>, 《한국학보(韓國學報)》(6),116면
114) 대야겸(大野謙), 《조선교육문제관견(朝鮮敎育問題管見)》, 31면
115) 조선주차헌병사령부(朝鮮駐箚憲兵司令部), 같은 책, 1911.8.29,
116)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9)
117) 《신한민보(新韓民報)》 1913. 10. 17, 루령됴션인문뎨
118)
119)
120) 《매일신보(每日新報)》 1914. 9. 16
121) 김정주편(金正柱編), 주(註) 119)와 같음
122) 위와 같음
123)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이미 대한광복군정부와 동림학교를 설립,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전쟁에 대비하였다.
뒤바보 <김(金)알렉산드라전(傳)> 《독립신문(獨立新聞)》1920. 4. 20,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9)
124) 1915년 5월 일제는 중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21개조요구안'을 강제로 체결하자, 중국은 일제의 영향력이 침투해 들어오는 추세를 인식하고 중구 각지역에 교육령(敎育令)을 발하여 만주지역의 일체의 학교(學校)를 민국학제(民國學制)로 통일하였고 그외 모든 사립학교들은 폐지해 버렸다. 동림학교(東林學校)는 이 당시 중국정부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한 것으로 보인다. 졸고, <1920년대(年代) 만주(滿洲)지방에서의 민족교육운동(民族敎育運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 2집, 11면
125) 사방자(四方子). <북간도(北墾島) 그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1.1
126) 유효종(柳孝鐘), 같은 논문, 156면
127) 위와 같음
128)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조선(朝鮮)》(3). 재노령부령선인(在露領不逞鮮人)ノ처분(處分)ニ관(關)スル건(件), 340면
129) 《신한민보(新韓民報)》1917. 8. 16, 원동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소장, 도산자료(島山資料) 5-34, 1917. 7. 23(백원보(白元普)→안창호(安昌浩) 편지)
130) 유효종(柳孝鐘), <극동(極東)ロシにわける 10월혁명(月革命)と조선인사회(明朝鮮人社會)>, 《ロシァ사연구(史硏究)》45, 24면
131)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서백리급만주출장복명서(西伯利及滿洲出張復命書), 45∼46면
132) 하라·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19면
133) 강덕상(姜德相),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の조선지배(朝鮮支配)とロシア혁명(革命)>,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329, 41면
134) 《신한민보(新韓民報)》1918. 2. 7, 원동
135) 위와같음
136) 유효중(劉孝鐘)은 앞의 논문에서 아령한인회는 항일운동의 지휘자(이동휘) 석방을 위하여 소비에트의 힘을 빌리던 비귀화 항일운동그룹의 힘이 소비에트세력이 한층 증대해진 것을 배경으로 하여 발족하였다는 설(設)을 제시하였다.(27면)
137) 《신한민보(新韓民報)》 1918. 2. 28, 원동
138) 이때 결의된 사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인의 행동을 통일하고 한인 자치기관을 공고히 할 일
2) 하바로브스크 아령한인회와 한족중앙총회는 협의 통일하고 다른 단체는 조직하지 않게 한다.
3) 시베리아 독립정부(극동정부)에 한족대표단 2명을 파견한다.
4) 중학교를 설립한다.
위와 같음
139) 유효종(劉孝鐘), <극동(極東)ロアにおける 10월(月)혁명(革命)と조선인사회(明朝鮮人社會)>, 《ロシァ사연구(史硏究)》45, 28면
140)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한족회(韓族會)는 1918년 1월 한족중앙총회(韓族中央總會)와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과 합병(合倂)한 것으로 되어있다(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척식국(拓殖局), 선인배일단체조(鮮人排日團體調)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3), 952면) 이러한 기록은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가 귀화인의 조직, 그리고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가 비귀화인의 조직이며 양단체가 합병하여 한족회(韓族會)로 성립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하는데, 앞서 검토한 바있듯이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는 귀화인 중심의 단체로서 전로한족회중앙회(全露韓族會中央會)로 발전하였고, 여러 비귀화인 중심의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와 합병하여 한족회(韓族會)로 성립되었음은 지적해 두고자 한다.
141) 《신한민보(新韓民報)》 1918. 6. 13, 원동
142) 조선총독부척식국(朝鮮總督府拓殖局), <조선외(朝鮮外)에서외 조선인상황일반(朝鮮人狀況一般)>, 《신동아(新東亞)》 1967. 2, 486∼487면
143) 공민(公民), <노서아(露西亞)의 교육(敎育)과 열국(列國)>, 《공제(共濟)》1호, 1920. 8, 96면
144) 박종근(朴宗根), <서백리아한인교육(西伯利亞韓人敎育)에 대(對)하여>, 《독립신문(獨立新聞)》1923.1.10.
145) 위와 같음
146)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11)
보문사는 이한영(李翰榮), 김립(金立) 양씨의 발기로 걸릴되었는데, 러시아사회당 수령인 그라스노초코프가 석판(石版) 기계 1대 인쇄용비 5천루불·천루불 정도의 지물(紙物) 등 시설 지원을 하였다. 보문사는 러시아책을 국문으 로, 국문책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는데, 번역진은 한문(韓文) 번역에 박동설(朴東說)·김립(金立), 노문(露文) 번역에 김(金)진보·오(吳)와실네였다.
147) 위와 같음
148) 뒤바보, <아령실기(俄領實記)>(12)·재외한인단체상황(在外韓人團體狀況),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3), 952면
149) 뒤바보. 위와 같음
150) 위와 같음
151)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露領に於ける不逞鮮人の狀況, 43면
152) 포조방면(浦潮方面)ニ어(於)ケル배일선인(排日鮮人)ニ관(關)スル건(件), 강덕상(姜德相), <행외(海外)における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の발전(發展)>, (동양문화연구소기요(東洋文化硏究所紀要)51, 39면 재인용.
153)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책(10), 서백리재조선인상태조사((西伯利在柱朝鮮人狀態調査)ニ관(關)スル비견(卑見), 1918.2.14. 82∼82면위의 책, 서백리급북만재주조선인보호(西伯利及北滿在柱朝鮮人保護)ニ관(關)スル비견(卑見), 1918.2.18, 61면
154) 강덕상(姜德相), 앞의 논문, 40면
155) 김동진(金東進), 재노동포(在露同胞)의 과거현재(過去現在), 《신동아(新東亞)》 1932.7(2권 7호). 27면박종근(朴宗根), 앞의 실문
156)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조선취체(朝鮮人取締)ニ관(關)スル제시(提示), 109면
157) 이제초(李霽初), 노농공화국각방면관찰(勞農共和國各方面觀察),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4.17
158)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포조방면(浦潮方面)ニ어(於)ける배일선인(批日鮮人)に관(關)する통첩(通牒) ,1919.9.18, 443면
159) 대한민국국회(大韓民國國會),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 3 . 1운동편(運動篇)》, 강화담판지(講和談判地)로 대표자출발(代表者出發)에 관(關)한 건(件), 107∼108면)
160)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같은책(3), 전한국국민의회선언문(全韓國國民議會宣言文). 30면
간도지방의 대표로는명동학교(明東學校) 교장 김약연(金躍淵)·동(同)학교 학감 정재면(鄭載冕)·국자가지나권학소학무원(局子街支那勸學所學務員)인 이중집(李仲執), 수행원으로 국자가와용동(局子街臥龍洞) 창동학교(昌東學校) 교사 정기영(鄭基英), 혼춘현(琿春縣) 특파원으로 문병호(文秉浩)와 윤동철(尹東喆)이, 학생대표로는 명동학교(明東學校) 학생 유익현(劉益賢)이 참석하였다.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같은 책(2), 간도방면한국독립운동(間島方面韓族獨立運動)ニ관(關)スル기인급경과(起因及經過)ノ개요(槪要), 1919. 3.13, 84∼86면
161) 위의 책, 독립운동(獨立運動)ニ관(關)スル건(件). (국외제일보(國外第一報)), 노령(露領), 1919.3.15, 89면
162) 위의 책,독립운동(獨立運動)ニ관(關)スル건(件). (국외제이보(國外第二報)), 노령(露領), 1919.3.16, 90면, 독립운동(獨立運動)ニ관(關)スル건(件)(국외제칠보(國外第七報)), 도문강방면(圖們江方面) 1919.3.21, 93면
163)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신한촌한민학교건축비(新韓村韓民學校建築費)ニ관(關)スル건(件), 143면
164)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같은 책(2), 독립운동(獨立運動)ニ관(關)スル건(件), 도문강방면(圖們江方面). 1919.3.16, 91∼92면
165) 위와 같음
166)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간도방면배일선인일반(間島方面排日鮮人一般)の추향급행동(趨向及行動), 1919.6.26, 60면위의 책(2), 도문강방면(圖們江方面))における항독립운동상황보고(抗獨立運動狀況報告)の건(件)1919.5.28. 833면
167)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같은 책(2), 독립운동(獨立運動)ニ관(關)スル건(件), 도문강방면(圖們江方面), 1919. 6. 14, 57면위의 책, 1919. 6. 7, 197면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혼촌파견원(琿春派遣員)の현지보고(現地報告)の건(件). 1919.6.14, 57면
168)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위의 책, 불령선인이동휘등(不逞鮮人李東輝等)ニ관(關)スル건(件), 159면
169) 《동아일보(東亞日報)》 1920.8.24(3)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로지령지방(露支領支方)ニ어(於)ける불령선인(不逞鮮人)の행동(行動), 1919.11.12, 450면
위의 책, 로영(露領)ニ어(於)ける불령선인(不逞鮮人)の상황(狀況), 1921. 1.19, 494면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같은 책(3), 한국독립선언기념회(韓國獨立宣言紀念會)ニ관(關)スル건(件), 269.
위의 책, ノウキヱフスユエ청년회조직(靑年會組織)ノ건(件). 285면
170) 김정명(金正明), 같은 책(3) 포조(浦潮)に어(於)ける불령선인(不逞鮮人)の동정(動靜), 한민학교생도(韓民學校生徒)の운동비갹집(運動費醵集), 1919.12.8, 452면
171) 대한민국국회(大韓民國國會)소장, 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日本外務省陸海軍省文書) 415, 재니항조선인(在尼港 朝鮮人)ノ행동(行動) ニ간(關)スル건(件), 1920.7.6
한편 라스트리노에에서 배포된 "경고한인전체(警告韓人全體)"라는 문서에는 한인 독립운동세력과 러시아 혁명군과의 연대투쟁을 호소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한국 독립군과 노국(露國)의 적군(赤軍)은 협력하여 저 일본을 토벌함과 동시에 한국내의 혁명과 외지의 혁명 당 국자는 병력과 마음을 합하여 혁명의 목적이 도달할 때 한국은 영원한 독립을 실현할 수 있으며 더하여 혁명주의 자들 은 이때에 한층 분려 노력해야만 한다."
172) "…무기탄약(武器彈藥)을 구매하여 조선국경(朝鮮國境)의 불령단(不逞團)(독립군)에게 보내고 심지어는 노국(露國)의 용병(傭兵)(빨치산)이 되어 독립여병(獨立與兵)을 준비하고 있다고 자칭(自稱)하며 과요파군(過邀派軍)에 투신하여 감히 일본군(日本軍)에 대하여 당낭(螳螂)의 도끼를 휘두르고 드디어 기회를 보아 무기탄약(武器彈藥) 을 횡령(橫領)하여 조선국경(朝鮮國境)을 향해 도망하는 자가 많으며…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조선인취체(朝鮮人取締)ニ관(關)スル건(件), 269∼274
173)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같은 책(3), 한국독립선언기념회(韓國獨立宣言紀念會)ニ관(關)スル건(件), 269∼274면
174) 3월 1일 오후 8시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오전 1시까지 계속된 이 연극은 제 5막으로 구성되었고 이의순(李義橓), 채계복(蔡啓福), 정재관(鄭在寬), 부인회(婦人會),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 한민학교(韓民學校)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연극의 1.3.4막의 내용을 소개하면, 제 1막 "유명(有名)한 가정(家庭)"은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된 자가 생전에 처에게 내가 죽거든 명의 자녀를 미국에 유학 보내어 군사교육을 가르쳐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하였고, 자녀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돌아와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이치용(李致鏞)·박제순(朴齊純)·이용구(李容九) 등이 모든 장소에 폭탄을 투척하여 모두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제 2막은 "배일(排日)·친일(親日)", 제 3막 "독립선언(獨立宣言)"은 33명의 독립선언서 다수를 팔아래 품고 파고다 공원에 가려고 종로를 통과할 때한인 형사(刑事)에게 발각되자 쟁탈전 끝에 여학생이 길 위에 선언서를 뿌려 주변에 모인 다수의 학생 등이 이를 습거(拾擧)하여 만세를 불렀다는 내용이다. 제 4막 "협매(賣)"는 각 집을 돌면서 지사(志士)를 물색하여 애국단체(愛國團體)를 만드는 내용이며, 제 5막 "태극기(太極旗)의 포물(包物)"이었다. 연극이 끝난 3월 2일오후 6시부터 7시까지는 재조단(再造團)·유위회(有爲會)·운동구락부원(運動俱樂部員)이 군악대를 선두로 하여신한촌(新韓村)를 연보(練步)하였고, 오후 8시에 바라바시 부근 챠모오의 한인 학생 13명이 아무르만의 빙상을 건너와 학인학교에서 환영하고 악대를 거느리고 연보(練步)하였다.
위의 책, 273∼274면
175)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불령선인검거(不逞鮮人檢擧)ニ관(關)スル건(件), 1920. 4.10 116면
176)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같은 책(1927년도 판), 299면
177)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포조방면(浦潮方面)に어(於)ける배일선인(排日鮮人)の(狀況), 1919. 9. 19, 446면
178)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불령선인검거(不逞鮮人檢擧)ニ관(關)スル건(件), 117면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5.15
179) 한인학교에 대한 일제의 방화 행위를 한인사회에서는 '일본은 한민(韓民)의 교육을 방해하고 한민(韓民)으로 하여금 더욱 몽매(蒙昧)하도록 하려는 저의가 있으며 장래에 또한 촌민(村民)에게 물질상, 정신상의 손해를 주려는데 있다. 어쨌든 일본군 부대가 공유물(共有物), 그것도 귀중한 교육기관인 교사(校舍)를 소실케 한 것은 강도, 마적의행동과 거의 같고 하시라도 우리들은 일본의 폭학을 개탄하다"고 비난하였는데, 이에 일제는 처음에는 방화사실을 부인하다가 친일파론 내세워 "일본군이 교사를 소실시킨 것은 사실이나 동교(同校) 교사(校舍)는 한민학교(韓民學校) 교사임과 동시에 배일사상선전(排日思想宣傳) 기관인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청년단(靑年團)(최근에는 암살 단(暗殺團)이라는 단체가 청년단 안에 있음) 등의 사무소로 충용되었으므로 일본군에게 소실되었다해도 항의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이때에 총독부에서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의 개선을 꾀하면 화(禍)가 변화되어 행(幸)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하면서 방화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총독부보조학교화할 것을 주창토록 조종하였다.
김정주편(金正柱編), 위의 책, 대검거후(大檢擧後)ニ관(關)ケル선인(鮮人)ノ감상(感想), 학교문제(學校問題), 120∼121면
180)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 5. 15
181) 일제가 제시한 회유책은 선전과 식민주의 교육을 중시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다.
1. 신문을 일으켜 한인의 지도계발(指導啓發)에 힘쓰고 친일선전(親日宣傳)을 할 것
2. 포조일본인소학교(浦潮日本人小學校)의 예(例)를 본받아 한인소학교를 설치하고 조선내지(朝鮮內地)의 한인교육과 같은 교육을 실시할 것
3. 자혜원(慈惠院)을 설치하여 일반 한인에 대한 시료(施療)를 할 것
4. 한인 구매조합(購買組合)을 원조장려(援助奬勵)하고 물자염매(物資廉買)의 방도를 줄 것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같은 책(3), 선인회유책(鮮人懷柔策). 330면
182)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1), 재노한인동태(在露韓人動態)에 관(關)한 촌정헌병대위시찰복명서(村井憲兵大尉視祭復命書), 이등공사건(伊藤公事件)의 연루관계(連累關係), 977면
183) 위와 같음
184)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 (10), 신한촌거류민회성립(新韓村居留民會成立)ノ건(件), 123면
185) 주(註) 181)과 같음
186)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같은 책, 본부(本府)の재외조선인보호무육(在外朝鮮人保護撫育)の상황(狀況), 239∼240면
187) 이창림(李昌林), 재북만노령조선인(在北滿露領朝鮮人)の일반상태(一般狀態), 《북만급노조선인사정(北滿及露朝 鮮人事情)》25면
188) 대한민국국회(大韓民國國會)소장, 같은 책, 니시선인학교(尼市鮮人學校)ニ어(於)テ불온문서발견(不穩文書發見)ノ건(件), l1921.9. 1혈성단(血誠團)ニ관(關)スル건(件), 1921.10.25
189) 김정명편(金正明編), 같은 책(3), 서비리아(西比利亞)に어(於)ける불령선인(不逞鮮人)の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に관(關)する건(件), 1921. 2. 15, 503면
190) 1921년 2월경 치타 극동공화국과의 밀약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치타정부의 통치 관할내(內)에서는 어떠한 도시(都市)·촌락(村落)임을 묻지 말고 고려국무력단(독립군)의 주재(駐在)와 양성(養成)을 허용한다
2. 고려국무력단은 과격주의 아래서 양성함은 물론 치타정부 지정자의 절대 지휘를 받아, 야심을 갖고 침략하려는 제 3국과의 계전(開戰) 때에 무력단을 이용할 수 있다.
3. 전항 무력단체가 사용하는 무기탄약은 치타정부에서 이를 공급하고 단 영원한 급여가 아닐 것을 약정한다.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8), 재외불령선인(在外不逞鮮人)ノ근황(近況), 노령방면(露領方面), 88면
191) 주(註) 191)과 같음
192) 문정창(文定昌), 《군국일본조선독점삼십육년사(軍國日本朝鮮獨占三十六年史)》中, 265면
193) 1921년 6월 28일 대한의용대(義勇隊)가 강제로 무장 해제되면서 대참변(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당하였다. 사할린군대·청룡(靑龍)군대·이만군대·광복단(光復團) ·군정서(軍政署)·의군부(義軍府)·도독부(都督府)·혈성단(血誠團) 등의 단체가 참가한 대한의용대(大韓義勇隊)측의 희생 상황을 보던, 사망 27명·익사 31명·행방불명 250여명·포로 970명이었다고 한다. (《조선민족운동년감(朝鮮民族運動年鑑)》, 재만십일개단체선포문(在滿十一個團體宣布文))1922년10월 25일 이후에는 적군(赤軍)에 편입된 정규군(正規軍) 외의 전한인부대(全韓人部隊)가 무장해제 당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편(國史編纂委員會編)《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3), 294면)
194) 1920넌 9월 2일 포조시교육위원회(浦潮市敎育委員會)에서 결의한 제사항(諸事項) 중, 시교육실행위원회(市敎育實 行委員會)와 시초등소학교평의원회(市初等小學校評議員會)로부터 추천받은 후보자 중에서 새로이 초등소학교장 을 선거 임명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교육자들을 배척하고 공산주의자를 교장으로 하여 학교를 교장의 관리하에 두고, 점차 모든 교원을 공산주의자로 대신케 하려던 조치였다. 김정주편(金正柱編), 같은 책(10), 포조시립소학교(浦潮市立小學校)ノ학제변혁(學制變革)トえト관련(關聯)スル선인소학교문제(鮮人小學校問題)ニ관(關)スル사견진단(私見進達)ノ건(件)(145면), 구월이일포조시교육위원회결의(九月二日浦潮市敎育委員會決議)(147∼148면)
195) 박종근(朴宗根), 서비리아한인교육(西比利亞韓人敎育)에 대(對)하여, 《독립신문(獨立新聞)》 1923. 1. 10,
196) 위와 같음
197) 소비에트정부의 한인 교육방침은 한인 사립학교를 점차 관립학교화(官立學敎化)하여 소비에트 문부성(文部省)의 교육체제(敎育體制)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1925년말 통계에 의하면 노령지방에 관립학교와 사립학교의 학교수·교원수·학생수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관립학교
사립학교
학교수
119
33
교원수
218
91
학생수
9463
1909
보는 바와 같이 관립(官立)학교의 수에 비해 사립학교 수가 현저히 못 미치고 있다. 이는 점차 사립학교가 소멸되어 갔음을 보여 준다.
한편 수업내용을 보면 매일 2∼3시간씩 조선어(朝鮮語)·역사(歷史)·지리(地理) 과목을 교수토록 정하였지만 "(소비에트)정부(政府)의 조선인교육방침(朝鮮人
敎育方針)은 조선인(朝鮮人) 독특(獨特)한 교육(敎育)을 불허(不許)하지만 그 민족성(民族性)을 존상(尊尙)"한다고 하여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은 인정하지 않았다.
김동진(金東進), 재로동포(在露同胞)의 과거현재(過去現在), 같은 책,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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