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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판

오바마의 어머니 앤 더넘 소에토로

by 8866 2008. 11. 5.

The Story of Barack Obama's Mother
By Amanda Ripley/Honolulu Wednesday, Apr. 09, 2008(Left to right): Jim Cole / AP; Maxine Box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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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cebook Yahoo! Buzz Mixx Permalink Reprints Related Each of us lives a life of contradictory truths. We are not one thing or another. Barack Obama's mother was at least a dozen things. S. Ann Soetoro was a teen mother who later got a Ph.D. in anthropology; a white woman from the Midwest who was more comfortable in Indonesia; a natural-born mother obsessed with her work; a romantic pragmatist, if such a thing is possible.

"When I think about my mother," Obama told me recently, "I think that there was a certain combination of being very grounded in who she was, what she believed in. But also a certain recklessness. I think she was always searching for something. She wasn't comfortable seeing her life confined to a certain box."

Obama's mother was a dreamer. She made risky bets that paid off only some of the time, choices that her children had to live with. She fell in love—twice—with fellow students from distant countries she knew nothing about. Both marriages failed, and she leaned on her parents and friends to help raise her two children.

"She cried a lot," says her daughter Maya Soetoro-Ng, "if she saw animals being treated cruelly or children in the news or a sad movie—or if she felt like she wasn't being understood in a conversation." And yet she was fearless, says Soetoro-Ng. "She was very capable. She went out on the back of a motorcycle and did rigorous fieldwork. Her research was responsible and penetrating. She saw the heart of a problem, and she knew whom to hold accountable."

Today Obama is partly a product of what his mother was not. Whereas she swept her children off to unfamiliar lands and even lived apart from her son when he was a teenager, Obama has tried to ground his children in the Midwest. "We've created stability for our kids in a way that my mom didn't do for us," he says. "My choosing to put down roots in Chicago and marry a woman who is very rooted in one place probably indicates a desire for stability that maybe I was missing."

Ironically, the person who mattered most in Obama's life is the one we know the least about—maybe because being partly African in America is still seen as being simply black and color is still a preoccupation above almost all else. There is not enough room in the conversation for the rest of a man's story.

But Obama is his mother's son. In his wide-open rhetoric about what can be instead of what was, you see a hint of his mother's credulity. When Obama gets donations from people who have never believed in politics before, they're responding to his ability—passed down from his mother—to make a powerful argument (that happens to be very liberal) without using a trace of ideology. on a good day, when he figures out how to move a crowd of thousands of people very different from himself, it has something to do with having had a parent who gazed at different cultures the way other people study gems.

It turns out that Obama's nascent career peddling hope is a family business. He inherited it. And while it is true that he has not been profoundly tested, he was raised by someone who was.

In most elections, the deceased mother of a candidate in the primaries is not the subject of a magazine profile. But Ann Soetoro was not like most mothers.

 

<도입부>

오바마의 어머니 앤 더넘 소에토로S.Ann Soetoro는 십대에 아이를 낳았고, 후에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중서부 출신의 백인 여성이었지만,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낭만적 실용주의자였다.

최근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어머니는 두 가지 측면을 지녔었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믿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떤 상자에 갇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꿈꾸는 사람(dreamer)이었다. 그녀는 위험한 베팅을 했고, 그녀의 아이들은 그 결과를 짊어져야 했다. 그녀는 두 번 그녀가 아무 것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동료 학생들과 사랑에 빠졌다. 두 결혼 모두 실패했고, 그녀는 부모에게 의지하여 아이들을 키웠다.

 

 

          오바마와 어머니 앤 더넘 소에토로

  

그러나 오바마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오바마에게 기부를 하는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강력한 (그리고 자유분방한) 주장을 펴기 때문이다. 그가 그와 매우 다른 수천 종의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를 보석 바라보듯 했던 어머니와 관계가 있다.

 

 

 <본문>

그녀는 1942년 생으로, 18세가 되기 전에 부모를 따라 캔사스, 캘리포니아, 텍사스, 와싱턴 등을 돌아다녔다. 18세때 그녀의 가족은 호놀룰루로 이사했고, 그녀는 하와이대에 입학했다. 그 곳 러시아어 강좌에서 그녀는 Barack Obama Sr.(오바마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하와이대를 다닌 최초의 아프리카인들 중 하나였으며(케냐출신),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는 웅변가여서 지역 신문과도 여러 번 인터뷰를 했고, 자석과 같은(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성격을 지녔다.

1960년대 초의 하와이를 사람들이 ‘melting pot’이라 불렀지만, 그것은 백인들이 아시아인들과 섞이는 것을 의미했다. 하와이의 백인 여성 중 19%가 중국 남자와 결혼했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급진적이라 생각했다. 흑인들은 하와이주 인구의 1%가 안됐으며, 인종간 결혼은 하와이에서는 허용됐으나, 미국내 다른 주의 절반은 그것을 금하고 있었다.

 

 

 

 

만난지 몇개월만에 그들은 결혼했다. 결혼 당시 그녀는 오바마를 임신하여 3개월째였다. 결혼식에는 친구들 중 아무도 초대받지 않았다. 왜 결혼을 했는지는 오바마도 모른다. 곧 그녀는 대학을 한 학기만 다닌 채 그만두었다.

오바마가 1살이 되기 전에 그의 아버지는 하바드대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그는 고국 케냐의 발전을 위해 케냐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곳에는 그의 전처가 살고 있었다. Ann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고, 이혼을 했다.

오바마가 2살이 다 됐을 때, 그녀는 대학으로 돌아갔다. 돈이 없었지만 무료급식과 부모의 도움에 의존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다른 외국인 학생, Lolo Soetoro를 만났다. 1967년 그들은 결혼했고, 그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이사했다. 자카르타 교외에 위치한 그의 집은 전기도 없고, 길도 포장되지 않은 곳이었다. 인플레는 600%가 넘었고 모든 것이 귀했다.

오바마는 카톨릭 학교를 다녔는데, 유일한 외국인학생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Negro’라 놀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오바마의 어머니는 집에 오는 모든 거지에게 돈을 주었다. 그러나 거지행렬은 끝이 없었고, 그녀는 선택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점점 서구적으로 변해간데 반해 오바마의 어머니는 점점 더 인도네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은 점점 공통의 관심사를 잃어갔다.

 

 

        가구상이던 부모님을 따라 미국 하와이에 이주했던 더넘 씨는 하와이대에서 오바마의 아버지를 만

        나 1961년에 결혼했으나 오바마의 아버지가 케냐로 귀국하기로 결정하자 이혼했다. 1967년 인도네

        시아 출신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 씨와 결혼한 뒤 오바마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이주해 새로운 가정

        을 꾸렸다.       

 

Ann은 평생동안 해뜨기 훨씬 전에 일어났다. 이 당시 그녀는 매일 새벽 4시에 아들 방에 들어가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시민운동과 Mahalia Jackson(시민운동가같습니다)에 대해 가르쳤고, 모든 사람은 피부 속은 똑같으며, 모든 선입견은 잘못됐다고 가르쳤다.

1971년, 오바마가 10살이 됐을 때, Ann은 그를 하와이에 보내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엘리트 prep school에 다니게 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녀도 딸과 함께 하와이로 돌아와서 하와이대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인도네시아의 인류학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인류학자에게 꿈의 땅이다. 17,500개 섬에 2억 3천만 명의 사람들이 30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다. 문화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 네덜란드의 영항을 받았다.

Ann은 1980년 이혼했다. 이혼 기록에 따르면, 오바마의 아버지와 그랬듯이 그녀는 그와 정기적으로 연락했지만 위자료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2번의 이혼 뒤에도 남자나 사랑 일반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고 비관적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각각의 결혼에서 아이 하나씩을 얻었다.

오바마가 14살 되던 해, 그녀는 박사 학위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갔고, 오바마는 하와이에 남겠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그녀는 Ford 기금에서 일하면서, 여성과 고용 프로그램의 임원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에 사는동안, 새벽 3시에 무거운 바구니를 짊어지고 농산물을 팔러 가는 여성들을 보아온 그녀였기에, 그녀는 Ford 기금이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집은 정치인, 영화인, 음악가, 노동조직가 등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그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화상대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인종이 다른 두 자녀를 갖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녀가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딸 soetoro-Ng(지금 호놀룰루의 한 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에 따르면, “그녀는 대부분 긍정적 용어를 썼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오바마는 말한다. “어머니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심했고, 난 어머니에게 그것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도 남자만큼 급여를 받고 싶지만, 그렇다고 다리 면도를 그만두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 농담을 기억한다. 최근 필라델피아에서 가졌던 인종문제에 대한 연설과 관련해서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 연설을 쓰는 동안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라면 이것을 신뢰할 것인가? 어머니는 흑인 문제 관련해서 보다 공격적이거나 군사적인 접근법에 대해 완전히 편안해 하시지는 않았다”

오바마의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동안, 오바마는 7천 마일 떨어진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조직가(community organizer)로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바마가 이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고, 친구들에게 항상 자랑하기도 했다.

그녀는 1984년 하와이로 돌아갔고, 1992년 24년간 써 온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1995년 52세 나이에 난소 및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오바마 키워낸 `자유주의자` 어머니
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8.03.14 21:05

'뚜렷한 세계관을 갖고 큰 꿈을 꾸었던 이상주의자.'

뉴욕타임스(NYT)는 14일 미국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사진)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다. NYT는 오바마를 미국 대선후보로 키워낸 어머니의 삶을 자세히 다뤘다.

백인 어머니인 앤은 61년 하와이 대학교 러시아어 수업 중에 이 학교 최초 흑인 학생이었던 남편과 만났다. 그러나 63년 이들은 파경을 맞았고 앤은 롤로 소에토로라는 인도네시아 출신 학생과 재혼했다.

앤의 고교친구들은 첫 결혼과 재혼에 대해 "그녀는 얼마나 깊게 사랑하는지가 문제지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특별히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소년 오바마에게 정직함과 직설적인 언변, 독립적 사고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그녀의 많은 지인은 앤이 아들에게 남겨준 '유산'으로 자신감, 추진력, 경계 허물기 등을 꼽았다. 포드재단과 인도네시아 은행에서 소액금융대출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앤은 9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 의원은 가장 소중한 어머니 유물이 무엇이냐는 AP통신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 유해가 뿌려진 하와이 오하우 남쪽 해변 절벽이 담겨 있는 사진"이라고 답해 주위를 숙연하게 하기도 했다.

김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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