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지개 그림자
--교향곡과 말티즈 그리고 철민이 A
연재 8
미술에 차고 더운색과 밝고 어두운 색이 있다면 음악에도 밝고 어두운 음과 화려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있다. 색채는 자연의 원색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색채의 각이한 특성은 자연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흰색갈의 눈이 나타내는 냉기, 붉은 색깔의 불길이 나타내는 열기 등에서도 알 수 있다. 더운색으로는 빨간색, 노란색, 귤색, 주황색 등이 있고 찬색으로는 하얀색, 파란색, 남색, 청록색 등이 있다. 밝은 색으로는 백색, 노란색, 연두색 등이 있고 어두운 색으로는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등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현존상황과 반대되는 색채에 흥미를 갖는다. 즉 추운 사람은 더운색을, 더운 사람은 찬색을 선호한다. 그런데 음악은 그 정반대인 것 같다. 불행하고 쓸쓸한 사람은 쓸쓸한 곡을 선호하고 행복하고 명랑한 사람은 경쾌하고 밝은 선율을 즐긴다.
그런데 아내는 평소 이상하게도 호른이나 비올라 같은 감상적인 음색을 가진 악기들을 즐긴다. 호른독주곡이 연주되면 훈련시키던 말티즈를 팽개치고 급히 일어나 오디오볼륨다이얼을 높이군 한다. 초조와 불안의 심리를 가장 잘 표현하는 호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음색, 애정표현의 아늑하고 감상적인 분위기연주에 뛰어난 효력을 과시하는 호른의 연주는 아내의 마음을 송두리 채 뽑아가 버리는 듯 했다. 그 풍부한 감정, 유연하고 안정적이면서도 열정적인, 변화무쌍한 음색은 트릴이나 다블 덩킹 또는 트리플 덩킹, 글리산도, 게슈토프트와 같은 여러 가지 특수연주법에 의해 원만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내가 그런 음색의 특징과 연주법은 물론이고 그처럼 신비한 소리를 내는 악기의 이름이 호른이라는 것조차 모른 채 즐긴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 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은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그렇게 수없이 감상했는데도 명진은 아내가 그처럼 매료되어버린 호른의 존재를 한번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 역시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린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이올린보다는 어둡고 칙칙하지만 동경에 넘치는 비올라의 음색을 선호했다. 비올라의 소리는 현악합주나 유니슨연주에서 늘 다른 현악기의 음색에 파묻혀 소외되기 쉬운 악기여서 명진은 거의 그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와 아내가 똑같이 즐기는 건 오보에와 첼로, 파곳 등 몇 가지 악기에 불과했다. 역시 아내는 이 모든 악기들의 이름도 몰랐고 매개 악기들이 내는 개성적인 음색의 특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아내가 그런 악기들의 연주를 선택, 선호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런 악기들이 표현하는 음색의 부드러움과 감상적이고 어두운 특징 때문일까? 아내는 왜 그런 음악들을 선호할까? 밝음보다는 어두움, 화려함보다는 부드러움, 명랑함보다는 초조와 불안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내는 저 음악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저 음악에 매달리는가? 아내는 비올라가 슬러스타카토나 글리산도주법으로 연주될 때는 눈물까지 글썽해지군 한다. 호른의 게슈토프트연주를 할 때는 정신이상환자처럼 얼굴에 초조와 불안의 기색이 역력해지면서 안절부절못한다.
도대체 아내가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서 들은 것은 무엇일까?
명진에게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이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아니었다. 마치 날마다 똑같은 출퇴근길을 오가는 인간의 일상처럼 심드렁할 뿐이다. 그림이 점, 선, 면 그리고 색채의 집합일 따름인 것처럼 음악도 7개 기본음가의 집합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이란 다만 그런 점, 선, 면과 색채 그리고 음의 조화와 구도에 의해 개성을 가질 뿐이다. 날마다 오가는 출퇴근길의 풍경이 더 이상 유혹의 대상이 아니고 출퇴근이라는 단순한 일상행위의 보조수단으로 그 의미도 축소되는 것처럼 베를리오즈의 음악도 휴식의 한 공간으로 제공될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청취하는 음악도 오케스트라에 참석한 모든 악기의 소리를 골고루, 균일하고 정학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기분과 정서에 따라 한계가 있다. 지금 명진은 베를리오즈의 음악에 심취한 아내의 마음을 읽으려고 의식적으로 호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전에 그의 청각에서 소외되었던 호른의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한 그러면서도 초조와 불안이 짙게 흐르는 특이한 음색이 청각의 공간을 꽉 채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명진은 원래 그 공간의 주인이었던 바이올린과 플루트소리가 점차 멀어지며 소외됨을 느꼈다. 호른의 연주에 심취할수록 바이올린소리는 철저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아내가 무엇 때문에 그처럼 아름다운 바이올린소리의 존재를 망각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명진이 바이올린소리에 심취되어 비올라의 연주를 망각했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말해 화가가 볼 수 있는 것만큼, 본 것만큼을 화선지에 재현하듯이 음악도 들을 수 있는 것만큼, 들은 만큼 감상할 뿐이다. 명진이 지금 감상하고 있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그가 선호하는 한두 개의 악기 외에는 모호와 불확실한 음만을 듣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내가 몇 년 동안 집요하게 들어온 것이 모호와 불확실함이었단 말인가.
그러자 오늘 연구실에서 발견했던 자질구레한 것들과 『스토크 바이 네일랜드』의 그림 속에서 발견한 이상한 점들 그리고 그 형상을 판단할 수 없었던 무명의 추상석이 기억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스케치북이 생각났다.
거의 윤곽만을 재현하여 모호와 불확실성이라고 할만한 가치조차 부족한 스케치였건만 신기하게도 아가씨의 모습만은 확실하여 경찰의 혐의범 수사에 증거자료로 제공되고 몽타주표본으로까지 되었다. 마로니에공원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짧은 순간에 명진이 본 것은 아내가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서 호른과 비올라의 연주만을 들은 것처럼 미모의 아가씨와 사내뿐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보고 있다. 듣지 못하면서도 듣고 있으며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있다.
어느 사이엔가 폭력으로 청각공간에 연행했던 호른의 연주는 밀려나가고 바이올린소리가 턱하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사이사이를 끼어드는 트럼펫의 아르페지오연주는 찬란하고 낭랑하고 강열했으며 그에 어울리는 바이올린 E현의 슬러스카토연주가 내는 날카로운 음색은 명진의 고요한 마음에 파문을 일구었다.
고질병인 두통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강열한 음은 너무 진한 자극 때문에 가끔 두통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그는 한사코 밝고 경쾌한 음악을 선호했다. 미국유학 때 그런 음악만 골라 듣다보니 저도 모르게 고질병이 된 두통이다. 베토벤교향곡 제5번 『운명』,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과 제6번『비창』, 하이든의 교향곡 제94번『놀람』…
“당신 내 가방 안의 스케치북 못 봤어?”
두통만 자극하는 음악에서 해탈하고 싶었다. 그 탈출구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림을 싫어한다. 두통거리로 생각하고 있다. 호른의 연주대목을 미리 알고 있는 아내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말티즈에게 「파피차우 톱쵸이스」를 주기 전에 먹이를 이용해 훈련을 시키다 말고 일어나서 오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감시에서 벗어난 말티즈는 금방 말썽꾸러기로 돌아가 방바닥에 널린 톱쵸이스를 주어먹는다. 아내가 날마다 지정된 장소에서의 배변, 배뇨습관과 기물 물어뜯기 근절, 사람보고 짓기 근절 등 정기적 규제훈련에 돌입했지만 그 효과는 훈련시킬 때뿐이었다.
“앉아!”
“기다려!”
“엎드려!”
여석은 그런 구령들을 잘 받아 행하다가도 훈육원의 눈길만 멀어지면 금시 토종견으로 변해버린다. 지금도 말티즈는 방구석 소파 밑에서 무언가를 발로 끄집어내어 맹렬하게 물어뜯고 있다.
“내 스케치북 못 봤냐고 묻잖아.”
“무슨 스케치북?”
아내는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티즈의 종적에만 신경을 쏟을 뿐 남편의 스케치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스케치북도 몰라. 화첩.”
“몰라서 그러나요. 자기 스케치북이 어디 한두 갠데. 야, 아가야, 엄마가 가만 기다리고 있으라 했지. 거기서 지금 뭐 하는 거니?”
그제야 말티즈를 발견한 아내는 소파가 놓인 구석으로 달려갔다. 넓은 추리닝이 볼품없이 그녀의 아래종아리에서 펄럭거린다.
튜바의 흐느끼는 듯한 저음은 비장하기까지 한데 아내는 압도적이고 음폭이 넓은 튜바의 저음에 짓눌려 버린 호른의 연주를 지금도 분간해 들을 수 있을까?
“이게 뭐니. 뭘 물어뜯고 있는 거냐고. 아가야, 엄마가 뭐랬어. 물건 물어뜯으면 나쁜 아가라 그랬지. 이거 놓지 못하겠니. 어서.”
아내는 말티즈의 발톱아래서 뭔가를 빼앗아 냈다. 발톱을 정기적으로 깎아주었으니 망정이지, 금방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아마 그 물건은 말티즈의 발톱과 이발에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뭐지. 이게 당신이 찾는 그 스케치북이 아닌가요? 마로니에연작인지 뭔지 한 그 스케치북 말이에요.”
“맞아. 그래 바로 그 스케치북이야.”
명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아내한테로 다가갔다.
“아니 이거 다 찢어졌잖아. 이놈의 개가 무르고 센 것이 없어!”
명진은 발길로 말티즈의 복부를 내질렀다. 그러나 어느새 아내가 말티즈를 안아 가슴에 품고 있다.
“우리 아가 누구도 다치면 안돼요.”
“이런, 이런… 눈꼴시어서 어디… 그런데 이 스케치북이 왜 소파 밑에 구겨 박힌 거지? 당신이 가방에서 꺼냈지?”
그녀는 몸으로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말티즈에 대한 공격을 방어한 채 말없이 개머리만 쓰다듬고 있었다.
“말해봐. 가방에서 꺼낸 거지?”
“전 보면 안 되나요. 보라고 그린 거잖아요.”
“보았으면 제 자리에 놓아두어야 할게 아니야. 매일 휴대하고 다니는 줄 알면서.”
“아가 데리고 산책 나갔다가 깜박했어요.”
“이 그림을 어떡해! 다 파본이 되었으니…”
『마로니에 연작스케치북』이라고 쓴 표지만 귀퉁이가 찢겼을 뿐 그림이 그려진 속 화지들은 다행히도 무사했다.
명진은 스케치북을 툭툭 털어 갖고는 서재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 그림 속의 아가씨는 누구죠?”
뜻밖에 날아온 아내의 질문에 명진은 발길을 멈췄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누군 누구야. 모르는 아가씨지.”
“모르는 아가씰 왜 그려요?”
“그래 아는 사람만 그리는 게 그림인줄 알았어. 말했잖아. 전번 날 영문 없이 죽은 남자에게 커피를 건넨 혐의범이라고.”
명진은 돌아서서 아내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스케치북을 툭툭 쳤다. 그러나 화는 내지 않고 눈길에 실리는 불만을 조용히 삭히며 아래로 깔았다.
“그 아가씰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그림 속에 왜 현주가 있는 거죠? 그날 같이 갔었나요?”
“뭐라고? 현주 씨가!”
느닷없는 질문에 명진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전혀 뜻밖의 질문이었기에 당황에 앞서 어리둥절했다.
“현주라니? 현주 씨가 왜 이 그림 속에 있어!”
그 자신도 의아했다. 스케치를 그린 화가인 그 자신도 금시초문이었으니 말이다. 명진은 자신을 위해서도 확인의 필요성을 느끼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급할수록 여유 있고 침착한 그였다. 그래서 아내는 언젠가 농 절반 진담 절반 그를 가리켜 음흉하고 내숭한 『늙은 너구리』같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현주란 이름은 묘한 신비로움과 충동으로 다가오며 그의 손을 가늘게 떨리게 했다. 그녀의 이름조차도 그에게는 하나의 유혹이었다. 평범한 남녀관계로 그 의미를 격하시키려고 할수록 그 유혹은 더해만 가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내가 옆에 다가와 고개를 기웃하고 스케치북을 들여다본다. 한편으로는 개가 짖지 못하도록 손으로 말티즈의 이마를 가볍게 도닥인다. 그 손길은 교향곡의 페르덴도시선율에 맞춰 박자를 짚고 있었다. 음악의 하나하나의 선율은 이미 아내의 일상에서 체질화된 듯싶다. 때로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칼도마소리가 트라이앵글이나 팀파니의 코모도연주나 칼마토연주처럼 들렸고 그라베나 셈플리체연주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어는 침대위에서 드물게 터뜨리는 신음소리마저도 바이올린의 아니, 그녀가 좋아하는 비올라의 비브라토나 글리산도, 스피카토나 피치카토연주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녀가 잠을 잘 때 코고는 소리는 정말이지 게슈토프트주법으로 표현된 호른의 답답한 음색을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아내는 자신의 삶을 음악화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시각적 즐거움보다 청각적 즐거움이 더 자극적이었을까?
“여길 보세요. 어딜 보세요. 이 아가씨 말이에요.”
명진은 화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 미모의 아가씨에게 눈길을 박고 있었지만 아내가 유도하는 손가락을 따라 왼쪽으로 이동했다. 신문을 보는 남자가 지나갔고 그 다음의 인물에서 아내의 손가락이 정지하며 끌려온 명진의 눈길을 고정시켰다. 더 이상 명진의 눈에는 미모의 아가씨와 남자의 모습이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아내가 손가락으로 짚은 인물은 둥근 원 몇 개와 점 몇 개로 구성된, 윤곽마저 불완전한 “얼굴도 없고 표정도 없는”아가씨였다. 아내가 화가인 남편이 그린, 남편의 시선이 가장 정확하게 관찰한 미모의 아가씨가 아닌 전혀 엉뚱한 인물에 관심과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감상자와 화가가 추구하는 관심은 전혀 다른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얼굴마저 없는, 몇 개의 곡선과 점에 불과한, 불확실하고 모호한 윤곽에서 확실한 존재를 도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그녀를 현주 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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