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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하나님은 없다

by 8866 2007. 6. 8.

 

연재 27

 

 그 뿐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주인에게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마치도 제 땅처럼 공짜로 그랄 땅에 우물을 판 사건 때문에 하마트면 토착민들과 한 차례의 피비린 분쟁이 벌어질 번 하기도 했다. 이 모든 사실은 아브라함이 결코 평화를 대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그는 아비멜렉의 평화협정에 관한 요구를 소량의 물질적 지불로 적당히 해결했을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그랄 땅의 평화공존에 대한 제의에 "책망"으로 대응하므로서 긴장을 완화할 대신 악화시키기도 했지만 다행이도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 사건이  원만한 해결을 보게 된데는 아비멜렉의 인내와 양보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4. 이삭을 제단에 바친 건 믿음이기 전에 천륜을 어긴 죄악이었다.

 

 그 일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2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에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1) 

 

 하나님이 "시험"하려 했던 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그때까지도 확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채 불신이 잔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불신한 사례가 이번 뿐만은 아니었다. 잉태하게 하리라고 하나님이 약속을 했을 때 아내 사라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웃는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아내의 불신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마음 속에도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사라는 물론 아브라함마저도 하나님이 자식을 주리라는 약속을 근본적으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건 그가 아내가 권하는 노예 하갈과 살아서 이스마엘을 낳은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하나님의 약속과 전능을 믿었더라면 구태어 후대가 끊길까봐 전전긍긍할 것도 없었을테고 노예와 동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소돔성과  고모라를 멸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천사?)조카 롯을 멸할까봐 거듭 질문한다. 혹여 하나님이 그의 조카 롯이 소돔성에 기거하는 사실을 모르고 징벌을 내리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곧 불신이었다.

 "시험"이라는 말에는 이밖에도 하나님은 무능한 인간적 방법인 시험에 의해서만 사람의 내면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평범한 존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표현을 바꾸면 하나님의 초인간적인 전지전능의 능력이 실은 제한된 인간의 능력과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 22장 13절에서 보이듯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사전에 예지하고 숫양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천륜을 어기는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이런 잔인하고 불필요한 시험방법을 택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시험은 다만 부자간의 갈등과 불신과 살인을 부추겼을 뿐이다. 하나님에게는 부자간의 천륜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했다.

 번제는 인신제사를 말한다. 인신제사란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 죽임을 당하게 하는 종교의식이다. "이스라엘사회에서도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아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바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인신제사의 종교적 관습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시리아, 팔레스틴, 페니키아인들 속에서도 유행되었다. 성서에도 모압왕이 맏아들을 번제물로 바친 기록이 있다. 아브라함이 거하던 가나안 땅에서 인신제사는 신을 섬기는 방법 중의 최고의 정성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관습법에 의해 하나님의 인신제사 요구가 정당화된다면 그 순간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인간적 관습과 상식을 초월하지 못한 범상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다행이도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금함으로서 자칫 범상해지려던 자신의 존재를 만구하고 있다.

 그러나 인신제사 금지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인신제사는 주로 가나안의 제사법과 과련되어 있을 뿐 "에불라문헌"이나 "마리문헌" 그리고 우가릿, 메소포타미아에서 인신제사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은 다만 지역에 따라 각이한 인간의 관습 중 보다 선진적인 쪽을 이용했을 따름이다. 이 역시 인간적인 능력을 초월한 것은 아니었다.

 인신제사는 주로 위기적 순간이나 긴급상황시에 신의 도움을  요청할 때 행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떠한 위기나 긴급상황이 있었기에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까. 그 아들을 얻게 된 경위는 구태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브라함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자식이었다. 그런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위험이나 비상사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랄 땅에서의 그의 기만 사건과 우물소유권으로 벌어진 분쟁 등으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긴장이 팽팽했던 것일까? 비록 그들 사이에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고는 하지만 상호간에 작용하는 위험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남의 땅에 붙어 사는 아브라함은 늘 신변을 엄습하는 위험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불안한 상황에서 그에에게는 그런 상황을 막아줄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이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최대한 보여줌으로서 그랄왕의 기염과 위세를 제압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를 제물로 바치는 믿음은 그랄왕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도록 하는 데는 더없이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외동아들을 번제물로 바칠만큼 경외할 존재라면 그 위엄이 다른 사람들을 위압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놓고 볼 때 이것은 믿음이기에 앞서 일종의 계책이거나 음모에 불과하다. 그는 아들 이삭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보완책으로 사람을 시켜 제단 주위에 미리 송아지를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는 이 계책으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었다.  도리어 그 자신은 "큰 복"(22:17)을 받고 아비멜렉에게는 위협을 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았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복은 반드시 순종과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축복은 순종과 등가교환이 되고 있다. 이거야말로 철저한 이해타산에 근거한 것이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22:10)

 

 성서학자들은 아브라함의 행위를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라고 극찬한다. 하지만 자식을 죽이려고 백정의 칼을 추켜든 아버지의 만행에서 우리는 "믿음"의 잔인한 모습을 보게 되며 천륜마저 어기는 부덕한 그가 과연 인덕을 겸비한 선지자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브라함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칼을 휘둘러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그가 생각한 것이 정말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을까. 그보다는 민족과 국가를 세우고 권세와 부귀를 취득하려는  정치적 야망이었다고 보는 것이 그의 지난날 행적과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실은 그의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일종의 신격화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하나님이 그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면(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는 성경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 아들을 칼로 찍어 두동강 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그는 인간성을 상실한, 짐승보다 못한 살인괴수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을 때 하나님은 가인을 징벌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였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질투심에서였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인 건 하나님에 대한 순종심이었다는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니까 죄가 성립되는 건 하나님에게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객관적 원칙이나 정당성의 가치적 척도란 없는 것이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

 

 분명 "이제야"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 전에는 몰랐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전지적 초능력이 붕괴되는 순간이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현실을 보고서야 비로서 진실을 안다. 현실과 사실을 떠나서는 無知요, 무능력자라는 말이 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그걸 과시하면서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그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이며 그러한 순종을 얻으려는 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심이다.

 아브라함은 자나깨나 권력을 꿈 꾸었지만 끝내 자기 대에 정치적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175세를 일기로 이국 타향에서 불행한 願鬼가 되고 만다. 물론 그의 모든 소유는 이삭에게 돌아간다.

 그의 아내 사라는 그보다 먼저 127세로 에보론에서 죽었다. 두 사람은 다 이루지 못한 욕망을 식은 가슴에 묻은 채 400세겔에 사들인 헷족속의 땅 막벨라 들에 매장되었다. 하나님은 땅을 준다는 약속만 수차례 반복했을 뿐  埋葬地 하나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약속에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있다. 가나안 땅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를 따라 나선 수많은 사람들은 거치른 이국 타향에서 매장지 한 조각 없이 버려진 채  짐승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450년 뒤에 이행 될 약속을 왜 몇 백년 전부터 말해 무고한 백성들을 억울하게 죽어가도록 했는 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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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과 작가"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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